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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정희성 -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 정희성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남몰래 울며 하는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이 될까 몰라 아픈 꽃이 될까 몰라 * '사랑'의 본령은 짝사랑이다. 나홀로 사랑한다. 설령 서로 똑같이 사랑한다고 해도 사람은 자신만 알 수 있기에 결국 상대의 사랑보다 자신의 사랑에 더 목매단다. 그래서 사랑은 마주보는 것일 수 없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라 말해도 사랑은 어긋남이다. 일치하는 시간은 짧고, 어긋나는 시간은 길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 더보기
김경미 -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 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겠지요 * 시를 읽는 일이 쉬울 때는 마음이 가을 안개처럼 야트막하게 가라앉아 아무런 잡생각 없이 눈 앞에 시만 보일.. 더보기
윤효 - 못 못 - 윤효 가슴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 먹먹하다. 내 생의 뜨거운 부분이 걸린 못들이 수두룩하여 먹먹하다. 그 못이 너무 많아 부끄럽다. 문득 '네 생에서 가장 뜨거운 부분이 무엇이었더냐?'고 되묻게 되어 먹먹하고, 암담하고, 부.끄.럽.다. 내 생에 수두룩하게 박혀있는 이 굵은 못들은 무엇이냐고... 더보기
김선태 - 조금새끼 조금새끼 - 김선태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을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더보기
안현미 - 음악처럼, 비처럼 음악처럼, 비처럼 - 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더보기
서정주 - 대낮 대낮 - 서정주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온몸이 달아...... * 핫슈 : 아편의 일종 * 사람들을 인솔해 미당 서정주의 기념관에 갔을 때,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그의 시에 대한 찬탄을 거듭하며 그의 행적에 대해 눈감거나 그의 행적을 지적하며 이런 시인의 기념관을 세우고, 이런 사람을 기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거나, 물론 그 사람들의 속내를 알지 못하니 내가 한 마디로 단정지어 왈가왈부하는 건 폭력적인 단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분들의 속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사람들은 두 가.. 더보기
황동규 - 더딘 슬픔 더딘 슬픔 - 황동규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므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 어려서 할미를 어미인 양 여기며 살았다. 나 결혼하는 것까지는 보고 돌아가실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다던 할머니는 정말 나 결혼한 이듬해 봄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퇴근하고 돌아와 이제 막 잠들려는 찰나에 받은 전화로 할머니의 부음을 접했을 때 내가 느낀 황망함이란 당신의 죽음이 주는 황망함이 아니라 그 순간.. 더보기
허수경 -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 시를 읽다보면 또, 또, 또냐? 또 '사랑'이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대개의 좋은 시는 서정시고, 서정시는 곧 연애시고, 연애시는 곧 '사랑'에 대한 시이다. 사랑을 많이 체험해야만 좋은 시를 쓴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사.. 더보기
김경미 - 바람둥이를 위하여 바람둥이를 위하여 - 김경미 1 걷지 못하는 민들레가 바람을 만나니 걷잖아 탁 ! 터져서 간음 없는 마음이 흔하랴 그런 거야 욕하지 마 바람둥이들 한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2 욕하지 마 먼지처럼 어디에나 몸을 묻히는 마음 아세톤처럼 어디에서나 쉽게 마음 휘발되는 몸의 사랑 고단하게 귀한거야 * '바람둥이'란 말은 치욕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김경미 시인은 그 고단함을 아는 모양이다. "한 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바람둥이는 어쩐지 바그너의 오페라 같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아니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히 지상에 오를 수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떠돌이가 되어 폭풍우치는 바다 위를 떠돈다. 누군가에겐 .. 더보기
이병률 -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 이병률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헌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 줄 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 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 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 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어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 보아라 * 누군가는 내게 엉엉 소리내어 당신의 슬픔을 보여주고, 간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