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을 보세요-03>
먼지 없는 방- 삼성반도체 공장의 비밀(평화 발자국 10) | 김성희 (지은이) | 보리 | 2012








또 하나의 가족
2007년 12월의 어느 날, 제가 평소 후원하고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평화박물관 송년회 자리에서 삼성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 우리가 흔히 ‘공순이’라 부르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분들이 평범한, 그러나 또한 범상치 않은 삶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 어느 운동권 학생은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순간의 감동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이 말 또한 지극히 오만한 표현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비정규직 법안 때문에 강제 해직당한 뒤 삼성 본관 앞에서 시위를 하던 삼성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썼다는 편지글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학교 운동장에 대기하고 있던 삼성 버스를 타고 공장기숙사로 직행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에 내딛은 첫 걸음은 그대로 학교의 연장이었습니다.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 통과되고 법률이 실제로 적용되면서  강제 해직당한 이 분은 고교를 졸업한 18살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면서 회사와 집, 집과 회사를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다고 말합니다. 김진숙 선생의 『소금꽃나무』란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당신이 일했던 시절엔 숙련공이 아니어도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완장 하나 채워주고 관리자 보조로 다른 노동자를 감독하는 일을 시키면서 노동자 사이에도 벽이 만들어지도록 했다고 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공장에 들어선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길러내는 학교에서 또 다른 학교로 진학한 셈입니다. 관리자들은 종종 부모인 양, 교사인 양 마치 학생들 다루듯 이들을 훈육했다고 합니다. 볼 일이 있어도 잔업 때문에, 할당량 때문에 쉴 수가 없었고, 자기 맘대로 하루 쉬었다고 해서 하루 종일 손바닥만 한 유리창을 닦도록 하거나 일을 시키지 않고 남들 일하는 기계 앞에서 하루 종일 세워두는 것처럼 부당한 처우와 인격모독을 당할 때도 이들은 스스로 항의해볼 생각을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학교에서부터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냐는 체념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실제 직장에서 경험하듯 말입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요.







다만, 사람에게도 깨끗한지 묻지 않았습니다
김성희의 『먼지 없는 방- 삼성반도체 공장의 비밀』은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백혈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지만 산재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열악한 상황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다큐멘터리 만화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실존한 인물이고,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들이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 『먼지 없는 방』의 주요인물 중 하나인 정애정 씨가 삼성반도체에 입사하는 과정이 앞서 제가 들었던 이야기와 너무나 똑같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기름 때 묻은 작업복, 머리띠를 동여맨 어둡고 칙칙한 색의 작업복을 입지 않습니다. 이들은 반도체 제조 공정 상 티끌보다 작은 먼지 하나도 철저하게 관리되는 ‘클린룸’에서 일하기 때문에 하얀색 방진복과 방진모, 마스크를 쓰고 ‘에어 샤워’까지 합니다. 심지어 공장 안의 공기조차 특수 배기시스템을 통해 먼지가 걸러진 공기가 순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깨끗할까요? 작가는 반도체 제조 공정을 정애정 씨의 시선과 경험을 통해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반도체(웨이퍼) 제조 과정이 무수한 화학약품처리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클린룸은 반도체를 위한 클린이었을 뿐 사람에게도 깨끗한지 알려주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삼성반도체 사내 연애로 결혼했던 정애정 씨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빠 황민웅 씨를 백혈병으로 잃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애정 씨는 그것이 산재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개인의 불운이자 불행이라 여겼을 뿐입니다. 또 하나의 가족이자 장기간 무재해사업장으로 인정받았던 삼성을 믿었기에 아무도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나 봅니다. 23살 꽃 다운 나이에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은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올해(2012년) 3월까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http://cafe.daum.net/samsunglabor)’에 제보된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 수는 155명이고, 그 가운데 이미 사망한 사람은 62명입니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SDI 등 삼성에서 일하다 직업병을 얻은 이는 138명에 이른다지만 삼성은 자신들의 작업과정과 노동 환경은 이들의 발병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노동자들의 산업재해원인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이들의 피해를 구제해야할 근로복지공단은 몇 년 동안 반도체 공장 직업병 피해자들의 산업재해 승인을 하지 않다가 지난 2012년 4월 10일 처음으로 반도체공장 직업병에 대해 산재 승인(수많은 산재신청을 했지만 재생불량성빈혈에 관한 사례 단 1건만 인정)을 했지만 현재 근로복지공단은 어처구니없게도 삼성 측의 도움을 받아 서울행정법원에 항소를 한 상태이며 며칠 전인 11월 초에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법원은 대통령 선거 뒤인 12월 27일로 판결을 연기한 상태입니다. 삼성과 삼성가(家)에 입양된 삼성장학생들이 지배하는 삼성공화국, ‘대한민국’의 오늘입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 노동자
이 책을 읽고 저는 돌아가신 제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던 할머니는 나중에 간신히 한글을 떼셨지만 평생 동안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던 외증조부, 당신의 부모님을 원망하셨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보았던 하늘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노동자가 보는 하늘만 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우물 속 하늘을 보고 있을 테니까요. 18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회사버스에 태워져 공장으로 직행했던 그 분들에겐 공장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이 당신이 알던 하늘의 전부였을 겁니다. 또 하나의 가족, 기업과 국가가 보호해주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조국이란 과연 슬픔과 노여움의 대상이었을지는 몰라도 사랑의 대상은 못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 당신의 아이들은 언젠가 학교를 떠납니다. 이들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함께 보면 좋은 책 : 『사람 냄새 -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김수박, 보리, 2012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