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쟁이가 가고 새 글쟁이가 왔다
<남편의 서가>/신순옥 지음/북바이북 펴냄


[302호] 2013년 06월 24일 (월) 10:22:26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신간 서평을 하면서 출판평론가 최성일과 나의 인연을 펼쳐놓는 것은 남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내가 호형호제한 일도 없거니와 두 사람이 만난 것도 어른이 된 뒤의 일이며, 우리는 그야말로 일로 만난 사이였기 때문이다. 살면서 뒤돌아보니 새삼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울해지는 날이 꽤 많았다. 오래된 고향 친구, 같이 학교에 다닌 친구들이 없지는 않으나 1980년대 내가 만났던 책들과의 인연이 그러했듯 시대가 험난했던 탓에 서로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여 저절로 스러진 인연들이 있었고, 사랑에 굶주렸던 탓에 우정으로 만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타버린 인연들도 있었다. 그런데 일 때문에 만난 사이의 우정을 되새김질할 수 있을까. 어느덧 고인이 세상을 뜬 지도 2년이다. 우리는 친구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부른 적은 없으나 언제나 벗이었다.

최성일은 나보다 몇 살 많았다. 그리고 이제야 말이지만 그는 곧잘 남들에게 편벽된 사람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출판평론’이란 것이 문학평론이나 미술평론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리가 잡힌 일도 아니며, 크게 돈이 되는 일도 아니므로 내심 그것이 무슨 평론할 거리나 되느냐 무시하는 이들도 종종 만났으리라. 그는 사람들과 종종 논쟁했다. 듣기로 그중에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유명 작가도 있었다. 그럴 때면 지나가는 말로라도 다투지 말기를 충고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는 나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뜨거운 사람이었다.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에는 싸움을 마다치 않았다. 나는 그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 나서는 일마다 동감할 순 없었으나 그가 사회적 명리를 바라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만은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세상의 모든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평가받는 일이 가장 두렵다. 그것은 나 또한 그렇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들은 상대가 비밀리에 적은 글이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다. 남편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내 일기를 훔쳐보고 그것을 내 일기장에 증거로 남겼다. 고백건대 나 역시 남편의 일기를 자주 훔쳐봤다. 나는 안 본 척 시치미를 뚝 떼버리지만, 남편은 몰래 본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는 양심적인(?) 사람이다.” 아내의 일기장에 ‘일기 봤음’이라는 표시를 해둘 정도로 무섭게 양심적인 사람이 최성일이었다. 내가 읽은 책들의 저자 가운데 아내에게 이처럼 높이 평가되는 걸 읽어본 것은 최성일 이전에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던 역사학자 김성칠(<역사 앞에서>)이 유일하다.

무섭도록 양심적인 사람, 최성일

그가 나를 좋게 봐주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몇 차례 그와 아내, 두 아이가 사는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겉보기에 그의 집은 보통 우리가 사는 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남들의 몇몇 배는 될 법한 책 속에 살았기에 그의 집은 집이 책을 품었는지, 책이 집을 받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의 아이들이 “우리 집 책은 아빠 같다”라며 아빠의 서재를 그냥 두게 했다는데, 그의 책은 최성일이 남기고 간 거대한 기억일 것이다. 고인이 된 최성일은 편집자들에게도 까칠한 글쟁이였다. 그만의 미문(美文) 의식이 있었고, 그의 문장 원칙, 한국어 쓰기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조차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글쟁이가 바로 자신의 아내 신순옥씨였다. 나 역시 그에게 직접 아내 글솜씨 자랑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아내가 남편을 회상하고, 추모하며 책을 낸 것이 이번이 처음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비록 최성일은 가고 없지만, 신순옥이란 새로운 글쟁이가 왔음을 비로소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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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301호] 2013년 06월 14일 (금) 23:46:57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2012년 8월 내 나이 마흔셋에 처음으로 단독 저서(<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를 썼다. 그 책을 펴내기 전에도 나는 글쟁이였고, 편집자였고 공저자였지만 그냥 아는 사람들만 아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책을 낸 뒤라 해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그나마 내가 쓴 책 한 권 있다는 점이 남들에게 나란 사람을 다르게 볼 이유가 된다는 것을 20여 년 가까이 책을 만들며 사는 동안에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책 제목이 의미심장하게도 <대한국民 현대사-국민으로 살아낸 국민의 역사>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이 책이 지닌 뜻 깊은 속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는다. ‘아버지의 스크랩으로 본 현대사 1959~1992’라는 설명까지 따라붙어야 이 책이 지닌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오랫동안 <한겨레>에서 기자로 <한겨레21> <씨네21> 등 잡지에서 편집장으로 살아온 고경태의 부친이 34년간 모아온 손때 묻은 신문 스크랩북 스물다섯 권을 매개로 보수적인 목사 아버지(세대)와 진보 성향의 기자 아들(세대)이 때로는 회한의 시선으로, 때로는 불꽃 튀는 시비로 나눈 길고 긴 대화를 엮은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 성명에는 ‘고경태’라는 이름 옆에 아버지 존함 석 자도 함께 박혀 있어야 마땅했으리라.

개인 저서를 펴내는 가장 마지막 과정은 저자 약력을 스스로 기록해 편집자에게 넘기는 일이다. 나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내 삶이 굴절을 겪었다고 여긴 순간을 중심으로 약력을 적었는데, 되돌아보니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어떤 순간마다 본의든 아니든 언제나 역사의 현장이나 그 시간대에 있었다. 사실 이 말은 매우 우스운 말이기도 하다. 보통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내 삶과 무관한 것이라 여기기 쉽지만 우리는 항상 역사의 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책을 기준 삼아 자신의 연보를 기록해보길

만약 지금의 내 말이 의심스럽거든 이 책을 기준 삼아 자신의 연보를 따라서 기록해보라. 자신이 태어난 해, 태어난 날, 처음 학교에 입학하던 해, 중학교·고등학교에 진학하던 해, 그 외에 자기가 살면서 의미 있었던 순간이라 기억하는 날들을 찾아 그 시절에 일어났던 사건들과 대비해보면 누구나 자신이 역사의 한순간을 살아냈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공교롭게도 내 책의 추천사를 써주기도 한) 역사학자 한홍구 선생의 말대로, “역사는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개입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인이고 내가 기록한 가장 생생한 한국 현대사”를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렇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역사책이지만, 고경태의 이 책 <대한국民 현대사>가 유별난 점은 아버지가 선택하고, 아들이 개입한 역사책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고(高), 봉(逢), 성(星)이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스크랩에 관해 쓰며 수백 번 아버지를 들먹였지만, 실명을 꺼낸 적은 없었던” 아버지와 아들이 이 책을 통해 만나고 대화를 시도한다. 어쩌면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정작 과거와는 거의 무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가 힘을 갖는 이유는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의 자식인 것처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안 역사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내 삶의 일부, 그리하여 내가 행하는 모든 것 속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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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이 위기에 처했다. 민중이여, 일어나라!"
- 김혜린의 『테르미도르』


세 가지 색(블루, 화이트, 레드)과 줄르, 유제니, 알릐느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순정만화 전문잡지 <르네상스>를 통해 발표되었던 만화를 다시 엮은 복간본 만화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예술 장르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만화만큼 성별분업(性別分業)이 확실한 장르도 드문 편입니다. 순정만화란 카테고리는 그 자체로 여성들만 보는 작품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지니까요. ‘앤서니와 테리우스’로 표상되는 순정만화 특유의 캐릭터들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순정만화란 호명 속에는 여류 시인이란 호명이 지닌 문제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순정만화라고 하기보다는 작품의 주제나 소재 면에서 역사만화로 분류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1789년 7월, 왕과 특권층이 삼부회의를 전복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프랑스 전역이 혁명의 열기로 들끓던, 이른바 1789년 ‘7월의 대공포’로 시작해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얼마 전 『레미제라블』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실존인물들이 무수히 교차하는 대하서사만화이지만, 주인공은 혁명의 대의에 동감하는 귀족 청년 ‘줄르’, 귀족이 되려고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며 성장한 혁명주의자 ‘유제니’, 폭도들에게 부모를 잃고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줄르의 생사마저 알 수 없게 된 귀족 아가씨 ‘알릐느’, 이렇게 세 명의 가상인물입니다. 이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처럼 『테르미도르』를 이끌어가는 세 가지 색 주인공들입니다. 줄르는 ‘자유’, 유제니는 ‘평등’, 알릐느는 ‘박애’를 상징하지요.

김헤린의 『테르미도르』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프랑스 혁명사를 줄줄 꿰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유익할 수도 있지요. 역사를 재구성하는 이른바 ‘팩션: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가 하나의 흐름이 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역사를 멋대로 희화화하거나 근거도 없이 왜곡을 일삼는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허구(虛構)라 할지라도 역사를 배경으로 삼는 이상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굳이 홍세화 선생의 추천사가 아니어도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작품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민중이라는 괴물의 등에 올라탄 부르주아지 혁명


프랑스 혁명을 정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간단히 정리해보면 전제왕정 밑에서 세력을 형성해 가던 시민 부르주아지 세력이 절대 군주가 개최한 삼부회의를 통해 그들이 국민을 대변하는 존재임을 자처하며 국왕(및 왕당파 귀족 세력)과 벌인 권력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퀼로트도, 상퀼로트도 입을 수 없었던 노동자, 농민(무산계급)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용해 왕과 귀족들을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부르주아지들은 왕을 살해한 뒤에야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들이 왕을 처형한 최초의 권력찬탈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왕은 원시 시대 이래 꾸준히 살해당해왔고, 프랑스 혁명 바로 얼마 전에도 영국의 청교도들이 왕을 효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경악시킨 것은, 자신들이 왕을 제거하고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그보다 더 무서운 괴물을 감옥에서 풀어주었으며, 그들이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민중’이라는 괴물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이전의 혁명(영국 혁명, 미국 혁명)과 달랐던 점은 특권계급에 속했던 왕과 귀족, 부르주아지들이 서로 적당한 지점에서 권력을 나눌 수 있는(타협할 수 있는) 지점을 무서운 속도로 지나치면서 민중의 등에서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때를 놓쳤기 때문이었습니다.

혁명을 통해 분출되기 시작한 민중의 각성은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도시 민중들과 결합한 부르주아지 지식인들의 숫자도 많았습니다. 이들이 훗날 자코뱅이라 불렸던 마라와 당통, 에베르와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혁명은 처음부터 혁명의 자식들을 제물로 삼을 운명이었습니다. 부르주아지의 국가 프랑스를 살려내기 위해 민중의 활력은 소진되어야 했고, 혁명적 부르주아지(혁명가)들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공포정치의 내용이었고, 희생자들의 명단은 민중의 자발성이 거세되는 전개과정의 화려한 프랑스식 만찬 메뉴였습니다.

프랑스식 공포의 만찬을 능숙하게 요리한 김혜린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의 『베르사유의 장미』나 러시아혁명을 다룬 『올훼스의 창』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작품의 여주인공인 알릐느가 자신의 여성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이 속했던 계급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아(박애의 길)를 찾아 각성해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이전의 다른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김혜린은 이처럼 복잡한 프랑스식 만찬(대혁명의 역사)을 훌륭한 솜씨로 요리합니다.

혁명 과정에서 폭도들에게 부모(귀족)를 잃은 알릐느는 혁명에 앞장선 유제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아 출신의 유제니는 혁명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납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알릐느의 연인 줄르 역시 혁명에 동참하기 위해 이미 파리에 있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각기 자신만의 이유로 혁명의 수도에 모입니다. 알릐느는 혁명에 복수하기 위해 왕당파의 끄나풀이 되어 자신의 미모와 노래를 팔고, 줄르는 프랑스 혁명을 기록하고, 자신이 쓴 글을 익명으로 잡지에 기고하는 작가가, 유제니는 혁명가 마라의 하수인이 되어 반혁명세력을 감시하는 특무대원이 됩니다. 이렇게 두 명의 남자를 앞에 놓고, 한 명의 여자는 처음부터 사랑한 남자와 처음엔 증오했지만 사랑하게 되는 남자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들을 엮어나가게 됩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유제니가 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알릐느는 줄르와 함께 유제니가 보살폈던 거리의 아이들을 거둡니다. 그리고 두 사람(알릐느와 줄르)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게 유제니란 이름을 붙이죠. 평등을 상징하는 유제니는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자유를 상징하는 줄르는 살아남았습니다. 자유와 박애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평등은 죽임을 당했지요. 어쩌면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진정한 비극이었을 겁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로베스 피에르, 혁명의 탄생』 - 장 마생 (지은이) | 양희영 (옮긴이) | 최갑수 | 교양인 | 2005

* 지난 2012년 2학기부터 2013년 1학기까지 "인천교사신문"에 만화비평을 연재하고 있는데(모두 6회)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선생님들과 함께 만화를 통해 역사와 우리 사회의 현실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도록 기획해보았는데 원래는 한 학기만 하기로 했던 것이었지만 반응이 좋아서 한 번 연장했었다. ^^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옛날 만화들을 뒤적이며 재미있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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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그래서 야근한다!"

[프레시안 books]스베냐 플라스푈러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노동'을 '섹스'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스베냐 플라스푈러(Svenja Flasspöhler)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장혜경 옮김, 로도스 펴냄)는 현대사회의 노동이 더 이상 먹고살기 위해 의무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즐기거나 즐길 수 있는 모든 향락을 압도하는 노동으로 새롭게 위치되는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막스 베버로부터 한병철의 <피로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 이르는 여러 문헌들을 인용해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다.

지방출장 중에도 틈만 나면 이 책을 꺼내 읽으며, 나 자신이 저자가 말하는 향락 노동자가 아닌지 고민하는 한편 저자가 펼쳐놓은 다채로운 지식의 향연, 다른 말로 촘촘한 요설(饒舌)들을 따라가느라 다소 힘겨웠음을 먼저 고백한다. 책의 원제이기도 한 1장 '향락노동-고통의 즐거움과 즐거움의 고통'부터 시작해 14장 '놓아두기의 칭송 - 무위에 대하여'에 이르기까지 모두 14개 장(章), 200여 쪽이 조금 넘는 책이지만 한두 페이지를 넘기기가 무섭게 등장하는 수많은 인용문구가 촘촘하다.


철학자들이 쓴 책들 가운데에는 두껍고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책들도 많지만, 얇고 읽기 쉬운 책들도 제법 많이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거닐고 있다 - 공산당이라는 유령이"라는 문구로 시작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로 끝맺음하는 <공산당선언>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읽고 있으며 현대 사회의 향방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책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역시 독일 철학자가 쓴 책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에 제법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은 물론 작년 국내에 소개되어 주목받았던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연상하게 하는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음의 의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처럼 방대한 문헌을 읽고 책을 저술한 저자야말로 향락노동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야릇한 상상이 들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1장 '향락 노동-고통의 즐거움과 즐거움의 고통'만으로도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나왔는데, 구태여 부연일 수밖에 없는 나머지 장들을 왜 그리 힘들게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차라리 1장만으로 책을 만들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읽었을 테고, 후반부에 간단하게 제시하고 있는 해법도 좀 더 설득력 있게 보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저자 소개를 살펴보니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30대 후반의 젊은 여성철학자로 현재 <철학 잡지(Philosophie Magazin)>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여러 매체에 철학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몇 권의 책을 냈으며, 그 성과를 인정받아 아르투어-쾨스틀러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첫 단락부터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무슨 취지인지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장 나 자신부터 그런 향락 노동자(Wir Genussarbeiter)인지 새삼 반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 동료는 물론 SNS의 지인들에게도 저자의 이 선언적인 구절에 대해 의견을 물었으나 누구 한 사람도 노동을 '섹스'는커녕 '휴가'보다 더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를 비롯해 내 주변의 누구도 노동을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여기거나, 노동을 통해 향락같이 고차원적인 즐거움을 찾을 만한 여유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왜 저자는 '왜 오늘날의 우리는 탈진할 때까지 일에 매진할까? 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즐기지 못하는 걸까?'라고 물으며 현대사회에서 노동은 이제 다른 모든 향락을 압도하는 최고의 '향락'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반어법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첫 단락이다.

오 늘날 우리에게 노동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우리는 좋아서 일을 하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일에 쏟아붓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의무 노동자가 아니라 향락 노동자이다. 이 단어는 몇 십 년 전부터, 실제로는 이미 200년 전 시민 계급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 지속되어 온 발전의 정점을 표현한다. 인간이 제 몸을 망가뜨리는 노동을 기계에 떠맡기고 직업 교육을 통해 적성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며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게 된 이래로, 노동이야말로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 되었다. 노동은 이제 쾌락의 다른 원천들마저 몰아내고 있다. 섹스? 그럴 여유 없어. 휴가? 쉴 틈 없어. 실컷 놀아보는 건 어때? 에이, 너무 유치해. (8쪽)

향락 노동은 개인적 병리현상인가? 자본주의적 질환인가?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독일어 원제 'Wir Genussarbeiter'에서 'Genuss'란 '즐김, 향유', 'arbeiter'란 노동자란 의미이니 두 단어를 합치면 '노동을 즐기는 사람, 노동을 향유하는 사람', 즉 '향락 노동자'란 뜻이다.

저자는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우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중요한 근거로 인용하고 있다. 금욕과 신을 위한 근면, 재산 축적은 초기 산업 자본주의의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였고,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란 말을 '성장 사회'란 표현으로 교묘히 대체하고 있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프로테스탄트적 노동윤리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고 말한다.

첫째, 신의 뜻에 따르려는 노력의 자리에 오늘날 노골적인 야망과 끝을 알 수 없는 인정 투쟁이 들어섰다. 부지런하게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해서 마감이 코앞이더라도 원칙적으로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없는 사람, 심지어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일을 향한 끝없는 열정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미리 알아서 주말에도 일을 하고 밤중에도 메일을 쓰는 사람, 출세의 기회라면 무조건 움켜잡는 사람, 때로 자신을 과대평가할 줄도 아는 사람들만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 보존을 할 수 있고 나아가 출세도 할 수 있다.

둘째, 베버와 달리 오늘날의 우리는 세계화된 바겐세일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에게는 죄악인 탐욕과 인색함이 널리 칭송받는 세상이다. 인색한 소비는 프로테스탄트의 근검절약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다. 오늘날의 인색함은 절약하여 돈을 모으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적게 주고 최대한 많은 것을 얻는 것이 요점이다. 바겐세일 자본주의는 낭비 자본주의이다. 저렴한 텔레비전이나 적당한 가격의 소파를 혹시라도 놓칠세라 꼼꼼하게 세일 광고를 살피고 경매 사이트에 들락거린다. 오늘날 향락이 노동이라는 사실은, 군중들이 한밤중에도 할인행사장으로 달려가, 서로 앞다투어 물건을 잡아채는 신종 국민체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자들은 절대 누릴 수 없었던 세속적 향락에게서 죄의 비늘을 벗겨내 줄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우리에게는 존재한다. 결백한 향락! 이것이 오늘날 웰니스 시대의 모토이다. 무알콜 맥주, 저지방 치즈, 사이버 섹스를 보라. (10~11쪽)

역사 이래 노동은 인간 존재, 인간의 도덕, 그리고 인간의 자화상을 형성해 왔고,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전통 속에 노동은 정치적 좌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서로 분리해낼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16세기 종교 개혁이 있던 무렵은 훗날 대규모 자본주의 생산에 필요한 자본축적의 기회가 과거 어느 때보다 컸던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핵심을 자본이라 했을 때, 자본주의에는 가능한 많은 돈을 벌려는 상인 근성과 그렇게 모은 돈을 써서 인생을 즐기려는 향락주의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점에서 보자면 신약성서에도 나오듯 - 예수가 교회에서 세리와 고리대금업자의 돈 상자를 뒤집는 - 기독교는 상업적 행위, 영리목적의 장사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모든 향락에 대해 금욕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돈을 벌기 위한 상업 활동에 아무런 터부가 없었으며 사람들이 마음대로 영리를 추구할 수 있었던 중국이나 인도 혹은 이슬람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했다손 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그 의문에 대해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든 것은 프로테스탄트(신교도)들이었으며 그들은 근면과 절약을 좌우명으로 삼아 자신의 직업을 신에게 부여받은 '천직(天職)'이라 생각하여 신앙생활을 하듯 자기 목적적으로 노동한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영성의 거장'이라 불리는 청교도 목사 리처드 백스터는 "만약 하느님이 어떤 방법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도, 여러분이 이 방법을 거부하고 이익이 적은 방법을 택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명 가운데 하나를 거스르는 것이며, 하느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이 요구하실 때 하느님을 위해 그 은총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육체와 죄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여러분은 부자가 되려고 힘써도 된다"라며, 신도들에게 부를 얻을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설교하기도 했다.

물론 서구의 근대인들이 모두 프로테스탄트들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들 모두가 자본가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처럼 일하기 위해 일한다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부르주아지에서 다시 노동자 계급에 침투하여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되고, 근대에 이르러 가정과 노동 현장이 분리되면서 노동자가 마치 수도사들이 삼종 기도하듯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일을 한다는 생활 태도가 일상화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란 세속화된 기독교이며, 자본가는 세속화된 수도원 원장, 노동자는 세속화된 수도사라 할 수 있다. 자본의 축적 과정이 신의 소명을 받든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자본의 은총이겠지만 제품을 만들기만 하고 스스로 소비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자본주의의 정신)는 - 생산된 제품에 대해 계속 금욕적이라 한다면 - 자본의 순환(성장)에 문제를 일으킨다.

자 본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만들어진 제품을 소비하는 사람들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국가)가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주의란 자신들이 직접 소비할 수 없을 만큼 제품을 과잉 생산한(과잉 노동한) - 소비는 식민지, 타국인들에게 강제했던 - 국가가 세계를 제패했던 역사를 말한다. 만일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이 없었다면, 즉 일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 인생을 즐기려는 사람만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만 있다면 생산과 소비는 국내에서 나름대로 자급자족에 만족하게 될 것이고, 특별히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면 타국을 침략하거나 착취할 필요도 없으며 대자본이 축적되어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할 가능성도 없다.

예컨대 어떤 선진국이 이른바 미개사회에서 산업을 증진하고 자본주의적 성장을 도모하고자 할 때, 선진국은 원주민들에게 그들 사회에서 볼 수 없는 사치품들을 제공(사치품을 생필품화)하여 맛을 들인 후 돈을 내지 않으면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완벽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본에 의해 고용된 원주민들의 의식 또한 '자본주의화'되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원주민이 한 달분 급료를 받은 뒤 다음 날부터 한 달 간 출근하지 않는다면 자본에 의한 고용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식민화 과정에서 기독교화 과정이 필수적으로 병행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향락 노동은 비록 외견상으론 노동자 개개인의 정신적 병리 현상처럼 보일지라도 그 본질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상 더 많이 일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빚어낸 일종의 사회적 질환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스푈러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향락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가 되는 길밖에 없는가?

이 쯤 어디선가 '파놉티콘(Panopticon)'에 의한 시선의 권력(미시권력, 문화권력)에 의해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던 미셸 푸코가 등장할 때라고 생각했지만, 플라스푈러는 뜻밖에 이 책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갈망한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하다. 애정 관계에서뿐 아니라 일에서도 탈진할 때까지 자신을 혹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욕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좀 더 노력하면 가능할 거란 희망으로 인정에 대해 끝없는 야망을 불태운다"가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모든 원인은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성 장사회(혹은 성과사회)가 되어버린 현대에 노동은 인간 생활의 다른 모든 향락을 대체할 만큼 강력하고 유일한 향락(일에 대한 현대인들의 리비도적 집착)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례로 노동중독, 영어로 '워커홀릭(Workaholic)', 일 중독자를 제시한다.

워커홀릭은 이런 강박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지 않고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을 잃지 않기 위해 일에게 봉사한다. 하루 종일 요구 조건을 들어주고 연락이 끊어질까 봐 전전긍긍이며 언제나 대기 상태다.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기분을 위해, 혹은 중요한 순간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항상 온라인 상태다. 누군가 그에게 무언가를 원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때 연락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워커홀릭은 자신이 언제나 대체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미리 알아서 복종한다. (110~111쪽)

이런 노동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2장에서 13장에 걸쳐 프로이트를 비롯한 다양한 사례들을 원용해 현대의 노동이 가상의 향락 노동으로 전락하는 문명적 과정을 면밀히 해부해 그 정신분석적 토대를 파악하고자 했다는데, 그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된 것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4장 '놓아두기의 칭송 - 무위에 대하여'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 고작 몇 개의 단락들이다.

인간이 자신의 창조자라면 인간을 잡아줄 수 있는 단 하나는 자기 자신이다. …(중략)… 절대적 권력의 망상을 쫓지 말고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이것은 수영을 하는 원리와 아주 흡사하다. 물에 나를 맡기면 저절로 몸이 물에 뜬다. 하지만 겁이 나서 물 위로 오르려고 버둥거리며 팔을 저으면 점점 더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물을 믿고 물을 잘 다룰 줄 알아야 몸이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197쪽)

앞서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1장에 압축되어 있다고 했는데, 향락 노동의 문제점도, 그 해법도 사실 1장에 이미 등장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노 동과 관계없는 향락은 강박적인 향락 노동자들을 불안하게 한다. 그들은 "쓸모없는" 무목적성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공허하다고 느낀다. 또한 이중적 의미에서 불쾌로 느낀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다른 한 편으로 때로는 자신에게 때로는 타인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이런 이유로 과도한 향락 노동자들은 어린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잘 못 참는 경향이 있다. 놀이터에서도 열심히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손으로는 블록을 쌓으면서도 생각은 계속해서 급히 처리해야 하는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향해 달려간다. 아이들은 오직 놀기 위해서 놀고 도대체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아이들은 신비한 존재이다. 시간을 초월하며 비밀스럽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더 높은 힘에 자신을 내맡긴다. 아이들은 운명에 몸을 맡긴 존재이며 부모와 신의 힘에 자신을 내던진 존재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잊은 채 놀이에 몰두할 수 있다. 버팀목을 신뢰하는 자만이 놀이에 전념할 수 있다. (13~14쪽)

<개그콘서트>에 등장해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 개그우먼 박지선의 과거 유행어 "참 쉽죠! 잉"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플라스푈러는 우리에게 '아이들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운명에 몸을 맡기고, 물 위로 오르려고 버둥거리며 팔을 저으면 점점 더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니, 아이가 버팀목을 신뢰하듯 물을 믿고 물에 몸을 맡기라'고 말한다.

이런 물에 떠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물 위에 누워>라는 제목의 아도르노의 잠언을 떠오르게 한다. "짐승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그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의 맹목적 분노"를 규탄하고, 놓아두기를 진정한 자유로 이해하라고 제안한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 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듯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아도르노의 구절은 지난 세기의 작품이다. 오늘날, 인간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정신과 삶의 기반인 지구마저 망가뜨리고 있는 성장과 진보의 광기 한 가운데에서, 그의 잠언은 더욱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21세기에는 행동뿐 아니라 "그렇게 놓아두기"도 적절하고 타당하다. (197~198쪽)


과연 우리 사회는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버팀목을 신뢰하듯 사회를 믿고 몸을 맡길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들 중 1위인데, 8년 연속 1위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다. 인구 10만 명당 OECD 국가들의 평균 자살률은 12.8명인데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33.5명으로 평균보다 무려 2.6배가 높다. 언론에서는 청소년들이 학교폭력이나 학업 스트레스 탓에 자살하는 경우를 많이 보도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자살률 세계 1위가 청소년들의 자살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나라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진 이유 중 하나는 고령화 사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노인인구는 늘어났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지 못한 탓에 경제적 극빈층으로 내몰려 생계가 어려워진 노인들의 자살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 대한민국 남자들의 평균 퇴직 나이는 53세로 평균 취업연령을 군 제대 후 27세로 보면 평균 26년간 일하는 셈이다. 이것은 OECD 국가들의 평균 생애 근로 연수보다 10년 이상 짧다. 문제는 생애 주기로 보았을 때 이 시기가 자녀 교육과 결혼 등으로 생애 가장 큰돈이 드는 시기에 퇴직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수당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밥 먹듯 연장근로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결과 우리의 연간 근로시간은 OECD 평균보다 440시간이나 길어서 세계 최장 노동 시간을 자랑한다.

이외에도 우리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항목은 더 있다. 산재 사망률, 성별 임금 격차, 인구 10만 명당 산재 사망자 수, 노동조합 조직률 최하위 등에서도 대한민국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이 사람들이 자아실현을 위해 섹스나 휴가보다 노동을 통해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이라 그렇게 장시간 노동하며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자기 직업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두 부류이다. 하나는 의사, 변호사, 교수같이 은행에 가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하기만 해도 은행이 알아서 그들이 종사하는 직종에 따라 가능한 신용대출 액수가 정해져 있는 부류가 있고, 다른 한 부류는 사람들에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다니는 부류가 그렇다. 모두가 선망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조차 장래가 암담하다고 하소연하는 시대, 정년이 보장되지 않아 불안한 시절을 보낸다며 우울해하는 노동자라 할지라도 대기업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의 불안하고 우울한 직업(직종)을 선망하는 타인들이 이미 모든 조사를 완료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타인이 선망하는 직업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세계에 속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런 세계에 속하기 위해서는 단지 개인의 타고난 능력과 노력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동생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더욱더 많은 자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어려워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2030세대를 일컬어 '삼포세대'라고 하는데 어느덧 삼포를 넘어 4포 세대, 5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스펙' 쌓기와 취업경쟁에 치여서 인간관계마저 포기한 세대라 하여 '4포 세대',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세대라 하여 '5포 세대'라 한다는 것이다.

그 런데 최근 일본에서는 이들 세대를 가리켜 '사토리 세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득도의 세대, 깨달음의 세대'라는 뜻이다. 사토리 세대는 지난 20년간 일본의 거품 붕괴 후유증과 장기 불황을 온몸으로 느끼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10대와 20대 초중반 세대를 말한다. 즉 사회 현실이 너무나 절망적이기 때문에 어떤 꿈도, 목표도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린 세대라는 것이다. 이들 세대의 특징은 깨달음에 도달한 성직자들처럼 소비에 무관심하다. 이들은 자동차를 사려 하지도 않고 브랜드 옷을 입으려 하지도 않으며, 스포츠도 안 하고, 술도 안 마시고, 여행도 하지 않는다. 연애나 결혼에도 관심이 없고 돈을 많이 벌겠다는 의욕도 없으며 주목받는 일을 할 생각도 없다.(바로가기☞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 , "'삼포 세대'의 미래는 일본 '사토리 세대'?") 절망에 빠져 너무 이른 나이에 득도해버린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야 말로 플라스푈러가 제시한 해법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세대가 아닌가?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에서 느꼈던 가장 큰 아쉬움은 빈약하게 제시된 해법보다 향락 노동(혹은 노동중독) 증상에 대한 원인과 진단이었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을 정치나 사회와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체의 예술 지상주의는 결국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면서, 파시즘의 특징은 '소유관계는 일절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회적 모순을 정신의 강조를 통해 제거하려는 특유의 정신주의에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향락 노동의 문제와 원인을 진단하면서 현대인들을 노동중독에 빠지게 하는 원인을 자본주의가 아닌 개인의 병리현상에서 찾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향락 노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를 해보아야 하겠지만, 향락 노동이 스스로를 과잉 착취하는 정신병리학적 현상이라고 했을 때(자본주의적 착취를 자신의 행동원리로 적극 수용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렇게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 분석하지 않고, 원인을 노동자 개개인에게서 찾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일 이상이 아닐 것이다.

기사입력 2013-05-31 오후 7:13:48

* 프레시안측이 뽑은 글 제목이 내 의도와 약간 다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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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왕도의 개』 1~4(완결) | 야스히코 요시카즈 (지은이) | 미우(대원씨아이) | 2012

대체 일본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일본을 가리켜 우리는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릅니다. 한일 양국의 역사는 상고시대(上古時代)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지만, 해방 68년, 한일국교 정상화 48년이 지나도록 양국은 아직도 과거사를 둘러싼 불신을 완전히 씻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의 우경화와 맞물린 잇따른 망언으로 그간 양국이 쌓아왔던 신뢰마저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 시민사회의 일반적인 역사 인식은 아니며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되었던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런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며, 만약 평화헌법이 개정된다면 분리 독립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 역시 전후 세대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소개하려는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 역시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지난호에 소개했던 『바람의 검심』이 일본의 근대화를 촉발시켰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한 시대를 그린 일종의 오락만화였다면 『왕도의 개』는 유신 이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직전까지의 일본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유신 이후 자유민권의식이 높아진 농민들이 벌였던 일본 최초의 근대무장봉기인 1884년 치치부(秩父) 사건으로 시작해서 갑신정변, 1885년 오사카 사건, 1894년 동학농민운동, 김옥균 암살, 갑오개혁, 청일전쟁을 거쳐 1895년 전봉준 처형, 시모노세키 조약, 삼국간섭, 을미개혁 그리고 1900년 중국의 삼주전(三洲田) 봉기에 이르기까지 한·중·일 삼국이 근대의 길목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의 캐릭터 디자이너이자 만화 『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의 작가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가 『왕도의 개』를 기획하게 된 까닭은 오늘날의 일본이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역사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일본이 그릇된 근대화(제국주의)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청일전쟁 때부터라고 말합니다.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빛과 그림자, 카노와 카자마


성인만화(成人漫畵)라고 하면 에로틱한 내용을 먼저 연상하지만 『왕도의 개』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들을 차용해 작가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역사 인식을 진지하게 풀어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본격 성인만화입니다.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실존과 가상인물이 무수히 교차하지만, 한·중·일 삼국이 근대화를 통해 평화와 공동번영으로 가야 한다는 왕도(王道)의 길을 걷고자 했던 카노 슈스케(加納周助)와 개인의 입신양명을 추구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순응하는 패도(覇道)의 길을 걸은 카자마 이치타로(風間一太郎)라는 두 명의 가상 인물이 중심입니다. 두 사람은 자유민권운동이라는 하나의 뿌리(공동의 경험)에서 나왔지만,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와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로서 일본 근대의 명암(明暗)을 상징합니다. 두 사람이 펼쳐내는 우정과 대립은 일본 근대사의 축쇄도(縮刷圖)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카노의 배후 인물로 등장하는 카츠 카이슈(勝海舟, 1823~1899), 카자마의 스승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1844~1897)는 실존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막부의 권력을 빼앗아 천황에게 되돌린 대정봉환(大政奉還)과 서남(西南)전쟁, 메이지 유신까지는 동지였지만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서로 정적(政敵)이 됩니다. 


일본 근대화의 스승으로 현재까지 일본 1만 엔권 지폐 인물로 새겨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는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추동했고, 같은 아시아 국가이지만 근대화 속도가 일본에 뒤처진 조선과 청(중국)을 멸시하고, 조선을 일본의 방파제로 삼기 위해 조선을 병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서구 제국주의를 일본화한 후쿠자와의 논리는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쿠자와와 함께 패도의 길을 상징하는 무츠 무네미츠는 유신 이래 일본이 서구와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했고, 영일 통상조약(1894)을 성사시켜 영국의 치외법권을 회수하는 등 외교적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반도는 언제나 붕당 간의 다툼이나 내분·폭동이 잦은 곳으로, 사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독립국답게 책임을 다하려는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이를 광구(匡救)하려 도모하지 않는 것은 이웃 나라의 우의에 반할 뿐 아니라 실로 우리나라 자위의 길에서도 어긋남이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인즉, 일본정부는 조선국의 안녕을 꾀하는 계획을 담당하는 데 추호도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해 왕도의 길을 주창했던 카츠 카이슈는 한때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 등의 정한론(征韓論)에 동조한 바도 있지만 이후 “구미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일본, 조선, 중국 세 나라가 연대를 맺어 함께 대항해야 한다”며 아시아 연대론을 펼쳤던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을 멸시하던 당시 일본의 정치인, 지식인들에게 “조선이라면 반쯤 망한 나라라고, 빈약국이라고 경멸하지만 나는 조선도 소생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조선을 바보로 여기는 것은 근래 들어서의 일이며 옛날 일본 문명의 종자는 모두 조선에서 유입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처분은 그 처음부터 이미 잘못되었으니 어찌 그 끝을 좋게 이루겠는가. 만일 오늘과 같은 시간이 지속된다면 이웃 나라는 반드시 그에 대해 극단적인 주장을 할 것이다. 일본의 조치는 동양의 치안을 해친다. 그래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혜안이 특히 돋보이는 것은 김교신, 함석헌 선생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같은 이조차 “청일전쟁은 우리에게 있어 실로 의로운 전쟁”이라며 지지했던 청일전쟁을 “대의명분이 없는 전쟁”이라며 반대했다는 사실입니다.

한·중·일 삼국의 근대화를 추동했던 인물들이 펼쳐내는 역사


출판사는 이 작품을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는 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왕도의 개』에는 개화파의 선구자였던 김옥균과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해 고종 황제, 명성황후, 흥선대원군, 중국의 쑨원 등이 등장합니다. 작가는 카츠 카이슈와 김옥균, 쑨원을 아시아의 연대를 통한 평화적인 근대화를 꿈꾼 이상적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인의 처지에서 보면 일본의 일개 사상가와 그 하수인 역할을 자처한 주인공의 노력만으로 그런 역사적 사건들의 물꼬가 트이고 가로막히는 일이 가능했을까 반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탁월한 솜씨는 그런 의문을 넘어 우리에게 동아시아 근대화의 역사를 곱씹을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차근차근 공부해본다면 그것만으로도 동아시아 근대화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일본 망언의 계보(개정판)』 - 다카사키 소지 (지은이) | 최혜주 (옮긴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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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을 보세요-04>
바람의 검심 1~28(완결) - 와츠키 노부히로 지음 / 서울문화사(만화)





올해 초(2013년 1월) 개봉된 영화 <바람의 검심>은 만화가 와츠키 노부히로(和月伸宏)가 지난 1993년 일본 만화잡지 《소년 점프》에 처음 발표하여 1999년쯤인가에 전 28권으로 완결된 동명의 만화를 실사 영화로 제작한 것입니다. 일본 만화는 먼저 잡지에 연재를 시작한 뒤 그것을 단행본 시리즈로 출간하고,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으면 이것을 다시 OVA(Original Video Animation)으로 제작하는 방식인데, OVA는 대체로 공중파나 애니메이션 전문 케이블 방송국 등을 통해 방영된 뒤 DVD로 제작됩니다. 이것이 흥행에 성공하면 일종의 외전(外傳)이랄 수 있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거나 <바람의 검심>처럼 실사 영화로 제작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출판에서 영화에 이르는 생산·수익구조가 오늘날 일본의 만화산업, 애니메이션을 세계화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

에도 막부 말기에 비천한 계급의 전쟁고아로 태어난 주인공 히무라 신타는 검술 스승으로부터 ‘켄신(剣心)’이란 이름을 받습니다.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은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는 시대입니다. 어찌보면 일본 사무라이(侍, 武士)의 단순한 액션 활극 만화로 볼 수도 있겠지만, 작가 와츠키 노부히로는 역사 속의 실제 인물과 사건들 사이에 가상의 인물과 사건들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작품의 사실성과 흥미를 증대시키고 있습니다. 일종의 ‘팩션(faction)’인데,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추동했던 메이지 유신에 대한 지식은 물론 현대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유신의 의미와 당시를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을 느끼는 텍스트(text)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동력이 되었던 ‘메이지 유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이후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야 합니다. 전국 시대를 끝내고 임진왜란을 통해 주요 경쟁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어린 아들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권력을 물려주고자 했지만 그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도요토미 세력을 숙청하고 자신이 쇼군의 자리에 오릅니다. 세키가하라와 오사카 전투에서 잇달아 패한 도요토미 세력은 일본의 서쪽 끝 큐슈의 사츠마 번(薩摩藩)과 초슈 번(長州藩)까지 쫓겨나게 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후 각 지역의 영주인 다이묘들로 하여금 1년 중 반년은 에도에서, 나머지 반년은 영지에서 근무하는 ‘참근교대제(参勤交代制)’를 통해 반란을 사전에 봉쇄하고, 일본 내 각 지역의 거주 이전과 물류 이동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외국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쇄국정책을 통해 ‘에도 막부 300년의 평화’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막부의 쇄국 정책은 서양의 흑선(黑船)이 출몰하면서 힘을 잃게 됩니다. 쇄국정책을 고집할 수도, 그렇다고 개혁을 이끌 추동력도 상실한 막부의 권위는 점차 약화됩니다. 이때 막부의 감시 대상이자 오랫동안 서로 견원지간이었던 사츠마와 초슈 사이의 삿쵸 동맹(薩長同盟)을 체결시키며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람이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유신지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입니다. 사츠마와 초슈 지역의 이른바 지사(志士)들은 ‘막부타도(幕府打倒)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 와중에 벌어진 드라마틱한 사건들과 인물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의 영감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막부 말기의 칼잡이 켄신은 발도술(拔刀術)의 대가로 사카모토 료마 등과 함께 존왕양이파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히토키리(人斬り)’로 활동합니다. 히토키리란 막부 말기의 전문 암살자 혹은 살인청부업자들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하급무사도 될 수 없는 천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신지사들과 어울리며 열등감과 울분을 더욱 폭력적인 살인과 테러로 보상받고자 했습니다. 작가 와츠키 노부히로는 켄신이란 인물을 구상할 때 실존했던 히토키리인 가와카미 겐사이(河上彦斎)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합니다. 막부파와 반막부파 사이의 대결, 같은 반막부파 사이에서 벌어졌던 끊임없는 배신과 모략은 일본을 격동시켰고, 그 와중에 사카모토 료마도 불과 33세의 나이에 암살당합니다.

근대 민족국가 만들기(nation state building)의 세 가지 방법 - 혁명·내전·유신

서구보다 근대화에 늦었던 지역 대부분은 외세에 의해 식민지가 되거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는데, 일본은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가장 빨리 개항하면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성장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동아시아 삼국은 비록 진행시점과 과정, 주체는 모두 달랐으나 폭력적인 경험을 거치며 근대화를 달성하게 됩니다. 일본의 ‘대정봉환(大政奉還)’, 중국의 국공내전, 우리의 한국전쟁이 그것입니다. 동아시아 삼국은 근대민족국가 수립 과정에서 내전(무력을 동반한 내부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War made the state and the state made war)”는 테제를 주장하여, 전쟁(폭력)이 근대의 국가형성(state-building)과 국민형성(nation-building), 정당성 창출의 근거로 이용되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전쟁은 전통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그것을 근대의 질서로 대체하는 역할을 하는데 한국전쟁은 남북한 양국의 지배집단의 국가형성과 국민형성, 정당성 창출의 근거로 이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막부가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대정봉환)하는 과정과 이후의 메이지 유신은 혁명과 달리 위로부터 온 혁신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나 내전을 통한 새로운 정권 수립이란 점에서 이후 혁명에 버금가는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대정봉환이 한국과 중국의 내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좌우 이데올로기의 개입이 발생하기 전에 벌어진 내전이었다는 것 - 그 덕분에 일본인들은 근대화 과정을 이념(선악) 대결보다는 애국지사들이 벌인 다소 낭만적인 권력 투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 이고, 다른 하나는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이 ‘국민국가 만들기’ 과정에서 전 국민이 동원되었던 총력전이었던 반면, 일본은 지배계급 사이의 내전 - 한·중의 경험과 달리 일본은 상대적으로 내전 기간이 짧았고, 지배계급 사이의 충돌이었기에 내전의 후유증이 적었던 대신 근대화 과정에서 민중의 참여가 배제되어 이후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 이었다는 겁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중·일이 경험한 역사의 차이는 이후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로 확연히 구분되는 근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후반부(특히 ‘인벌’편 이후)에 이를수록 일본 만화 특유의 과장과 억지스러운 이야기 늘이기가 작품의 재미를 반감시키기는 하지만 이런 차이에 주목하며 『바람의 검심』을 읽는다면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성찰도 함께 따라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2』 |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지은이) | 휴머니스트 | 2012




** '인천교사신문' 연재는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즐기는 연재 꼭지입니다. 개인적으로 만화 읽기를 즐기는 까닭도 있지만 만화라는 매체를 통하여(간혹 만화를 장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만화는 장르가 아니라 매체입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매체이지요.) 새로운 시각과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즐거움을 선생님들께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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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담뱃값 인상은 금연을 위한 효과적 수단인가, 증세를 위한 손쉬운 수단인가?
- 흡연세 그 다음은 비만세?






몇 해 전 흡연권도 보장하라는 헌법소원이 있었지만 흡연자들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는 있을지 몰라도, 타인까지 파괴할 권리는 없다는 민주주의의 당연한 원리에 따르면 한낱 부질없는 소리이다. 제 아무리 담배를 예찬하는 사람도 새로 담배를 배우려는 사람, 제 자식에게는 담배를 권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담배가 사회적 해악이란 건 충분히 증명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이유에서 지난 2004년 8월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 판결을 통해 공중시설 내 흡연을 제한하도록 한 <국민건강증진법시행규칙>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전 세계 담배회사들이 생산하는 담배는 연간 5조 5천억 개비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비흡연자는 물론 청소년, 임산부, 신생아 등 지구상 모든 이들에게 1년에 각 1천 개비(50갑)씩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이 엄청난 양의 담배를 11억 명의 흡연자들이 전부 태워 없앤다. 담배연기가 흡연자와 비흡연자 모두에게 고루 해롭다는 점에서 흡연자들은 결코 외로운 사회적 소수자가 아니다. 의학적, 논리적 그리고 윤리적으로 담배가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너무나 자연스러운(혹은 당연한) 동의와 합의이기 때문이다. 흡연자들 누구도 담배가 마음에 약간의 위로가 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마저도 흡연자에 대한 혐오와 담뱃값 인상이 흡연자들의 정신건강마저 위협하는 상황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상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는 끊기 힘든 중독 상품이다. 『Catch Up 2012 대한민국 소비자 생각읽기』는 200만 소비자 패널을 상대로 조사한 지난 10년 간 소비자 생각의 변화, 그리고 생활 영역별로 주목할 만한 2011년의 소비자 흐름을 소개하고 있는 책인데, 이 책은 지난 2011년 한 해 동안 소비자(이자 시민)들이 느낀 감정의 키워드는 ‘피곤하다’였다고 소개하면서 흥미로운 설문조사 결과를 수록하고 있다. 전국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일반인 성인 남녀 1,000명(2011.06.28)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89.4%는 건강이 나빠졌다고 느껴지면 금연을 결심할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또한 출산, 육아, 결혼 등 개인 신상에 변화가 일어나면 금연하겠다는 응답(79.3%)도 매우 높게 나타나, 금연 의지는 정부 정책 및 외부 규제 등의 외적 요인보다 건강이나 자신의 삶과 관련한 내적 동기가 크게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53.9%는 담배 가격이 인상될 때 금연을 결심할 것이라고 응답하였는데 담배 가격 인상이 금연을 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와 세계은행에서는 가격정책이야말로 금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라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 담배 가격이 10% 올라가면, 저소득 국가에서는 8%, 고소득 국가에서는 4%가 담배를 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과연 담배 가격을 올리면 사람들은 끊게 될까? 우리 정부는 흡연이 주는 사회적 폐해를 줄이기 위한 금연 정책의 일환으로 지난 2005년부터 담배 가격을 올리기 시작해서 상당한 금연효과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담배 가격을 올리는 것은 일시 방편일 뿐이다. 주당이자 애연가였던 시인 김소월은 부잣집 아들답게 좋은 옷을 입고 다니라고 해도 늘 허름한 바지저고리 차림이었지만 담배만큼은 언제나 최고급을 고집했다고 하는데, 과연 담배는 생필품일까, 사치품일까?

지난 추석 연휴 때 어떤 음식점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담배 가격을 올리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자, 그때의 대화를 내가 재연해보마.
"요새 담뱃값이 너무 비싸단 말이야."
"그러게. 무슨 담배 한 갑이 3천 원 가까이나 해?"
"그래도요. 담뱃값이 올라서 담배 끊겠다는 건 다 한순간이에요. 조금 지나면 그러려니 하고 그냥 사잖아요."
"그건 그래. 조금만 지나면 그 가격이 그 가격 같아. 컵라면도 그랬잖아. 몇 년 전만 하더라도 350원밖에 안 했다고. 그런데 지금 봐봐. 850원이야. 처음에는 너무 올랐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 샀는데,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하잖아."
처음에 담뱃값이 오르면 일시적으로 담배의 수요량이 줄어들 수도 있어. 이때는 일시적으로 탄력성이 커지겠지. 하지만 담배라는 기호품에는 대체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애연가들은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담배를 사서 피울 수밖에 없을 게다. 이 경우에는 다시 수요량이 회복되면서 탄력성이 낮아진다고 할 수 있겠지.

『워밍업 경제학(Das Geld Reicht Nie)』의 저자 정인회와 비난트 폰 페터스도르프는 담배 수요의 가격탄력성을 살펴보았을 때 담배는 생필품에 가깝다고 결론 내린다. 담뱃값은 2000년 초 1,300원이었지만, 2002년 200원, 2004년 500원, 2005년 500원이 올라, 현재 2,500원이 됐다. 담배 가격이 오를 때마다 논란이 있었지만, 국민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관철되었다. 지금까지 가격 인상에 따른 수요 변화는 조사 기관에 따라 차이가 커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담배 업계에서는 담배 가격 인상에 따른 수요의 가격탄력성을 0.25~0.5 정도로 보고 있고 이 정도의 탄력성이라면 담배는 생필품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담뱃값 인상으로 흡연율은 조금밖에 낮아지지 않으며, 담배 제조업체(한국의 경우엔 KT&G)의 수익은 오히려 증가하게 된다는 비판이 있다. 조세연구원은 “가격이 흡연율에 영향을 주긴 하지만 담배 수요의 가격탄력성을 고려할 때, 가격이 오른다고 무조건 흡연율이 하락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가격이 크게 올라도 결국엔 또 팔리는 상품이 바로 ‘담배’이다.

월급쟁이들은 월급을 받을 때마다 근로소득세를 자동적으로 국가에 납부한다. 그래서 샐러리맨들은 월급봉투를 ‘유리지갑’이라고 부른다. 박근혜 정부는 증세 없는 복지 재원 확충 방안 중 하나로 ‘누락·탈루 세금 징수강화’를 들었지만 실제로 역대 정부 대부분은 세금 누락·탈루 등 지하경제를 추적해 세금을 거둬들이기보다는 이처럼 걷기 쉬운 세금에 주력해 왔다. 그런 까닭에 현재 우리 정부가 거둬들이고 있는 세금의 거의 절반이 간접세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만 하더라도 간접세 비율이 20% 선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간접세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간접세 규모를 줄이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간접세가 바로 유류세인데, 휘발유 가격의 66%는 정부가 매기는 특별소비세다. 자가용 소유가 일반화된 현실에서 소비자들은 유류세가 너무 높다는 불평을 쉴 새 없이 쏟아내지만 정부는 모든 책임을 정유 업계에만 떠넘기고 있다. 하지만 정유 업계는 유류세 인하를 도리어 환영하고 있는데, 어차피 휘발유 값의 3분의 2가 국고로 들어가는데 고유가로 정유업계만 재미 본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휘발유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간접세 상품이 바로 술·담배이다. 술 한 병, 담배 한 갑에 붙는 세금은 얼마나 될까? 2011년 1월말 기준 하이트 병맥주 500ml짜리 원가는 478.58원인데, 여기에 주세 등이 붙어 공장 출고가는 1019.17원에 이른다. 출고가의 53%가 세금인 셈이다. 담배의 경우 세금 비중은 더 커 62%에 이른다. KT&G 담배인 ‘원’ 2,500원짜리에 붙는 세금은 담배소비세 641원, 국민건강증진기금 354원, 지방교육세 321원, 부가가치세 227원, 폐기물부담금 7원 등 1550원이다. 술이나 담배 등 국민건강이나 복지 차원에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품목에 매기는 징벌적 성격의 세금을 이른바 ‘죄악세’라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주세·담배세·도박세가 있다. 근본적으로는 간접세인 죄악세는 조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에 집중돼 있어 부의 재분배 효과에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지만 손쉬운 재정 확충 수단이라는 이유에서 재정확충이 절실한 나라일수록 간접세수를 늘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간접세이기 때문에 조세 저항도 약하고, ‘국민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도 분명할뿐더러 조세 확충 효과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음주와 흡연에 따른 연간 사회적 비용이 24조원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도 있는데, 비록 본인은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보험료와 부담금 따위의 형태로 일정 부분을 부담하게 되어 있다. 정부와 기업은 이런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한다는 명분으로 술과 담배의 소비를 강제로라도 줄여야 하고, 이를 위해 술·담배에 대한 세금을 올릴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문제는 간접세가 개인의 소득에 상관없이 누구나 똑같은 세금을 내도록 하는 징세제도란 점이다. 부자가 마시는 술 한 병이나 거리 노숙자가 마시는 술 한 병이나, 부자가 굴리는 자가용이나 서민이 굴리는 자가용에도 세금은 똑같이 붙는다. 간접세가 소득불균형을 강화하는 것이다. 담배세 인상을 통한 금연 정책의 강화라는 정책이 결과적으로 서민의 지갑에서 돈을 빼내 국민복지에 이용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뜻이다. 새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전임 정부의 부자 혜택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듣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문제는 담배세 인상이 증세의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예상 때문이다. 올해(2013년) 3월 4일, KBS·MBC·연합뉴스 등의 보도에 따르면 “한 해 흡연·음주·비만 때문에 지출되는 진료비가 6조7천억 원으로 전체 건강보험 진료비의 14%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 4년 간 관련 진료비가 40% 이상 급증한 만큼, 정부는 담뱃값 인상뿐 아니라 유해식품에 대한 비만세 등을 통해 건강위험요인을 적극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은 3일 <건강위험요인으로 인한 건강보험 진료비 지출 분석> 보고서에서 2001~2002년 일반건강검진을 받은 769만3천999명의 검진·진료기록을 2011년까지 추적·분석해 이 같은 결과를 확인했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면 병원에서 흔히 듣게 되는 대표적 건강위험요소인 흡연·음주·과체중으로 인한 진료비 지출이 지난 4년 동안 4조6천540억 원에서 6조6천888억 원으로 43.7% 늘었으므로 부족한 건강보험 재정확충 등을 위해 앞으로 담배세 인상은 물론 비만세 등 새로운 간접세 항목을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이번 연구를 통해 흡연·음주·비만 때문에 진료비 지출과 사회·경제적 폐해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며 “따라서 담배부담금 세율을 높이고 해외 비만세 사례 등을 참고해 주류와 비만유발 식품에도 건강증진부담금 등을 부과하는 정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은 흡연자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내일은 비만한 사람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비만세’라는 새로운 죄악세가 신설될 것이란 뜻이다. 바야흐로 간접세 폭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개인까지 경쟁력을 제일의 덕목으로 주장하고 나서는 상황에서 흡연은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자본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모든 사람들을 무한경쟁의 긴장과 공포로 내몰고 있다. 오늘날 개별 기업까지 나서 금연을 강제하는 것은 과연 자본이 개인의 건강까지 염려하는 의학적 배려일까. 그보다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동자들의 잠시 게으를 권리까지 빼앗는 음모는 아닐까. 담배의 해악이 알려지면서 흡연자들은 고립되었고, 타인의 건강과 권리를 침해하고 위협하는 못된 중독자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담배 중독의 거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국가와 정부는 시민이자 납세자들을 흡연자와 혐연자라는 프레임에 가둬놓고, 정작 책임의 한 당사자인 자신들은 담뱃값 아니 담배세 인상을 금연운동의 중요 정책으로 제시하며 뒤로 빠진다.

담배가 처음 유럽에 전파될 무렵 의사들은 담배를 매독 치료제, 신비의 명약으로 오인하기도 했지만, 담배회사들은 담배의 치명적인 중독성과 해악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600여 가지 화학약품이 짬뽕된 담배의 중독성은 알콜, 코카인, 히로뽕보다도 강하다고 하는데, 니코틴에 중독된 사람들은 가격이 올라도 계속 담배를 사게 되어 있다. 문제는 흡연자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역시 국가에 의한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국가는 때로는 담배를 폭력적인 수단으로 전매해왔고, 때로는 군대 같이 억압적인 집단이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권장해온 중독 사업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이제 와서 모든 책임을 흡연자 개인에게 전가시킨다.

흡연자들이 다만 가해자로 인식될 뿐 그들 역시 피해자라는 사실은 무시당하는 동안에도 KT&G는 세계 5위의 담배기업으로 성장했다. KT&G의 지난해(2012년) 국내 담배 매출은 전년대비 5.8% 증가한 1조8956억 원을 기록했고, 국내 담배시장점유율도 2011년 59%에서 2012년 62%로 3%포인트 상승했다. 중국,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 해외로 수출된 담배 매출은 신규시장 판매 증가 및 수출단가 상승으로 전년대비 5.1% 증가한 6282억 원을 기록하는 등 상승세다. KT&G는 지난 2011년 ‘꽃을 든 남자’ 브랜드로 화장품 시장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소망화장품 지분을 인수하는 등 사업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흡연자들을 가해자로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론 고수익을 벌어들일 뿐 아니라 자국 국민들에겐 건강을 위해 금연하라고 담배세를 인상하네, 새로 법을 만드네, 호들갑을 떨면서도 국산담배의 해외 수출은 장려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육성한다는 차원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 적용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09년 미 연방대법원이 담배회사 필립모리스에 7950만 달러(약 844억 원)의 징벌적 배상을 선고한 사건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된다면 국가야말로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금연정책은 OECD 25개국 중 24위라고 하는데 우리 정부는 담배세 인상을 통한 금연정책을 통한 세수 증대에만 몰입할 뿐 비가격적 금연정책인 광고 규제와 공공장소의 흡연 규제, 청소년 등 신규 흡연자 유입을 차단할 수 있는 금연교육 등은 거의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실제로 흡연율을 낮춘다며 담배세를 500원 인상했을 때조차 그 세수 중 단지 3%만 금연운동에 쓰였다. 이것이 바로 만국의 흡연중독자들이 금연운동가들과 단결해야 하는 이유다. 위대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간접세에 대해 “국왕의 수입에 비해 백성의 피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징세 방법에 찬성할지도 모른다”고 평했다.


* <인물과 사상> 2013년 4월호에 "‘국가’라는 마약공급책이 펼치는 금연정책의 딜레마"란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전번에 그렇게 자랑질했던 하루 24시간도 안 되어 100매 이상 글쓰기 신공을 보여준 그 원고인데, 책 나오자마자 전문 게재하는 건 청탁필자로서의 상도의에 저촉된다고 생각하여 전체 기승전결 4개의 단락 중 '결론' 부분만 인용한다. 각주도 많이 있는데 일일이 살려넣는 방법도 모르고 하여 편의상 여기엔 빠졌으니 오해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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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흘러든 '후쿠시마 재앙', 당신은 피해자 아닌 공범!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후쿠시마 인근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는 1, 2, 3호기 연료봉이 노심에 삽입되어 있었는데, 지진으로 인해 발전은 중지되었다. 대략 45분쯤 후 쓰나미가 핵발전소를 덮쳤고,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포함한 모든 외부전력이 끊어졌다. 지진 발생 5시간 만인 오후 7시 반 1호기의 연료봉 손상이 시작되었고, 오후 9시부터 원자로 내부 온도는 연료봉이 녹는 온도인 2800도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6시 연료봉이 녹아내려 원자로 압력용기에 고였고, 결국 압력 용기에 구멍이 뚫리면서 방사능이 외부에 유출되기 시작했다. 지진 발생 16시간만의 노심용융(meltdown)으로 후쿠시마는 1986년의 체르노빌처럼 유령도시가 되었다.

▲ 2011년 원전 폭발과 쓰나미, 대지진이라는 참사를 맞이한 일본 후쿠시마 인근 지역이 폐허가 되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후 쿠시마 핵발전소 붕괴 직후 최고의 안전성(?)을 자랑하던 일본 원전의 신화는 원자로와 함께 녹아내렸다. 붕괴된 것은 원자로와 안전 신화뿐만이 아니었다. 후쿠시마 원자로 3호기 냉각장치가 손상된 직후 격납용기 내부의 방사능 검출량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지점 400미터 반경 피폭량을 초과하는 수준이었지만 후쿠시마 원전을 책임지고 있던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는 방사능이 유출된 지 3주가 지나서야 "원전 방사선량에 1시간 정도 노출되면 히로시마 원폭 투하지점 400미터 반경과 비슷한 규모의 피폭에 해당"한다고 시인했다.

또 일본 정부는 방사성 물질이 기준치 1억3000만 배에 이르는 물을 원전에서 바다로 흘려보내면서도 이런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후쿠시마 근해에서 허용치의 수천 배가 넘는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되고, 원전 남쪽 90킬로미터 떨어진 이바라키 현 앞바다에서 잡힌 까나리에서 기준치를 초과한 요오드와 세슘이 검출되었지만 이 사실을 알린 건 정부가 아니라 해외 언론들이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 측은 사태의 심각성이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피해 지역 주민들을 방치해 두었고, 심지어 피난민들에게 물자가 부족한 상황조차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이것은 비단 일본 정부만의 일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라는 북한조차 방송 매체를 이용해 주민들에게 방사능 대처 요령을 적극 홍보하고 있었는데도 우리 정부는 편서풍 때문에 한반도는 방사능에 대해 안전하다며 국민들을 향해 앵무새처럼 '극미량', '기준치 이하'란 말만 반복했다. 일본의 원전 사고가 한국에서 탈핵 운동의 시발점이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치적으로 2009년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을 손꼽았던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해외 원전 시장에서 우리의 경쟁자였던 일본이 망했다. 이제 누가 일본 원전을 사겠나? 이 기회에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팔자'며 지금이야말로 한국의 원자력 르네상스가 열렸다고 큰 소리쳤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년여가 되어 가는 현재 한국에서는 노후화된 원전들이 잇따라 사고를 내고 불량 부품을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이런 사실들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도리어 그 와중에 핵발전소가 2기 더 늘어나 이제 23기의 핵발전소를 보유하게 되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직후 미국에게 핵 재처리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조차 향후 50년이면 핵발전소가 사라질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원자력 르네상스'를 외치고 있다.

일 본은 어떠한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핵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으며 장차 핵무장까지 노리는 극우 보수주의 정치 세력이 득세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피해 주민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지만 이제 후쿠시마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우경화의 바람만 거세게 불고 있다. 사고 직후 멈춰 섰던 핵발전소는 전력위기를 핑계 삼아 다시 2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에 있고, 나머지 핵발전소 또한 재가동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후쿠시마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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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이후의 삶 :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한홍구·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이령경 책임 번역, 반비 펴냄). ⓒ반비
< 후쿠시마 이후의 삶 :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이령경 책임 번역, 반비 펴냄)는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양심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한홍구(성공회대학교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학 대학원 교수),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 서 있는 서경식(도쿄 게이자이대학 교수)이 만나 지난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장시간에 걸쳐 나눈 대화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이 후쿠시마 사태를 단순히 에너지 정책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민주주의의 문제로 바라보고 그 뿌리에 놓여있는 '희생의 시스템'까지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후쿠시마 사태를 다룬 기존의 저서들과 변별력을 지닌다.

<후쿠시마 이후의 삶>을 받아든 순간, 직감적으로 떠오른 인물은 파울 첼란(Paul Celan)이었다. 아도르노(T.W.Adorno)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지만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살아남은 파울 첼란은 계속해서 시를 썼다. 파울 첼란은 소련과 루마니아 접경지역에서 태어나 평생 독일어를 모국어로 시를 썼다. 그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지만 극심한 우울증과 죄의식에 시달리다 결국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파울 첼란의 대표작인 '죽음의 푸가'의 원제는 '죽음의 탱고'였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일시적으로 사형 집행을 유예 받은 악사들은 사람들이 총살당하거나 가스실로 향하는 동안 경쾌한 탱고를 연주해야만 했다. 파울 첼란은 '죽음의 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죽음의 푸가>(전영애 옮김, 민음사 펴냄) 중에서


영 국의 생명윤리학자인 조나단 글로버(Jonathan Glover)의 <휴머니티 : 20세기의 폭력과 새로운 도덕>(김선욱·이양수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에 따르면 나치 독일의 선전상이었던 괴벨스는 "웃음이 의미하는 건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훌륭한 양심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때 신성시했던 것들, 가령 전통, 양육, 우정, 인간의 사랑 같은 것들을 웃음으로 부수고 파괴하는 충분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치의 사형 집행자들은 괴벨스의 주장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들은 희생자들을 같은 인간이 아닌 물질 혹은 짐승으로 간주하였고, 양심의 가책을 완화시키는 방법으로 '서늘한 농담과 신성모독의 언어' -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와 함께 악명 높았던 유대인수용소 트레블링카(Treblinka)에서는 가스실에 이르는 길을 '천국에 이르는 길(Himmelweg)'이라고 불렀다 - 를 사용했다. 나치는 죽은 시신조차 존중하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시신에서 얻은 기름은 비누가 되었고, 여성 희생자의 머리카락은 매트리스 충전재로 팔렸다. 화장터에 남겨진 재들은 보온 단열재나 인근 마을의 도로 포장을 위한 자갈 대신 사용되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학살, 인종말살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홀로코스트 이후 모든 인류가 직면한 물음이었다.

이토록 참혹한 학살을 경험한 인류는 1948년 12월 9일 국제연합에서 제노사이드 협약을 제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와 수많은 학살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인류에게 이런 비극이 두 번 다시 재현되어선 안 된다는 굳은 결심, '더 이상은 안 된다(Never Again)'는 선언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파울 첼란은 시를 썼던 것처럼, 제노사이드 협약이 논의되던 시기 제주도에서는 이른바 '4·3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한홍구, 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는 <후쿠시마 이후의 삶>을 통해 히로시마에서 후쿠시마, 오키나와에서 제주에 이르는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더듬으며 비탄의 희생자들을 켜켜이 쌓아올린 가해자들이 어떻게 희생자들을 비인간화였는지, 현재 한국과 일본이 누리는 풍요가 무엇을 그 원천으로 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후쿠시마 이후의 삶>은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히로시마를 겪은 일본에서 왜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은 단순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진앙이었던 일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 발전 시설이 밀집해 있는 동아시아는 물론 여전히 핵을 포기하지 못한 모든 나라에 해당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히로시마를 겪은 일본에서 왜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나?

한 국수력원자력, 세계원자력협회, 한국원자력산업회의의 2011년 3월 보고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는 모두 21기의 핵발전소가 운영 중에 있고, 7기가 건설 중, 4기가 앞으로 건설될 계획이다. 일본은 모두 54기가 운영 중에 있으며 3기가 건설 중, 12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었다. 중국은 현재 13기를 운영하고 있지만 현재 건설 중인 핵발전소가 27기이고 앞으로 188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다. (2013년 3월 현재 한국은 23기, 일본은 50기, 중국은 18기의 핵발전소를 가동 중이다. -편집자)

한· 중·일 3개국이 운영 중인 핵발전소는 전 세계 20퍼센트이지만, 현재 건설 중인 핵발전소까지 포함하면 전 세계 핵발전소의 52퍼센트가 이 지역에 밀집해 있는 셈이다. 세계 각국은 체르노빌 사태 이후 핵발전소 건설을 중지하거나 자제하는 추세에 있지만 한국·일본·중국은 '죽어가는 핵 산업'을 살리는 주요 동력이 되고 있다. 어째서 이토록 많은 핵발전소가 이 지역에 밀집해 있는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강력한 핵 발전 국가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지식인이 이 좌담에 포함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일본 후쿠시마가 아니라 황해 연안에 집중 건설되고 있는 중국의 핵발전소에서 마찬가지의 사고가 발생한다면 한반도는 불과 3일 만에 편서풍을 타고 불어온 낙진과 방사능의 대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 본은 세계에서 유일한 피폭 국가임을 강조해 왔잖아요. 그 때문에 평화 헌법을 갖고 있고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핵무기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를 지금까지 안고 살아가야 하는 나라로서 강력한 반핵 정서가 있을 것 같은데, 거꾸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전을 보유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죠. (한홍구, 36~37쪽)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미국은 히로시마(6일), 나가사키(9일)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피폭 직후의 조사에 따르면, 히로시마에서는 인구 33만 명 중 7만 8000명이 사망하고 부상 3만 7000명, 행방불명 1만 4000명, 기타 피해자 17만 7000명, 건물 7만 호가 반 이상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고, 나가사키에서는 인구 27만 명 중 사망 2만 4000명, 부상 4만 1000명, 행방불명 2000명, 기타 피해자 17만 7000명이 나왔으며 도시 전체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그중에는 한국인 수만 명을 비롯하여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찍이 권혁태(성공회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가 '피폭 내셔널리즘'이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국이자 원폭 피해국이었던 일본은 가해와 침략의 기억은 생략한 채 자국이 유일한 원폭 피폭국이라는 단일한 인식을 기반으로 전쟁에 대한 기억을 국가주의로 수렴해왔다. 그러나 당시 피폭자들 가운데에는 무려 7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있었고, 이들 가운데 4만 명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피폭자와 그 2세, 3세들은 일본 정부의 비인도적 처사로 아무런 국가적 보상이나 대책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유일한 피폭국' 신화 같은 일련의 과정들이 야스쿠니 문제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해왔다. 그는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통해 전사자가 신적 존재로 떠받들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슬픔보다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침략성이나 가해성을 묵살하게 되는 것을 '감정의 연금술'이라고 호칭했다. '감정의 연금술'은 야스쿠니와 천황제에 이르러 일본이 스스로를 '평화국가'라고 규정하는 문제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

전후에 일본 국민들은 스스로 일본이 평화 국가라고 계속해서 믿어왔습니다. 일본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인데, 여기에는 일본 국민들의 감정에 일종의 '연금술'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합니다. 현실적으로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으면서 일본은 핵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만 유지됩니다. (서경식, 41쪽)

1953 년 8월,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국제연합 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이란 성명을 발표하며 미국의 냉전 체제에 속한 각국에 본격적인 핵 발전 세일즈를 시작한다. 핵의 군사적 이용과 평화이용을 둘러싼 핵 경쟁 체제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소련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그때까지 원자력 정보에 대한 철저한 비밀주의를 벗어던지고 전면적인 정보 공개에 나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숨겨진 내막이었다. 핵발전소는 이처럼 핵 경쟁이라는 동서냉전의 연장선에서 탄생한 핵폭탄의 일란성 쌍둥이였다.

원 전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극구 부인하지만, 사실 원전은 원자폭탄의 다른 얼굴일 수 있어요. 이 둘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핵 발전과 핵폭탄 모두 핵분열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핵 발전은 핵분열의 속도를 늦췄을 뿐이지요. 둘은 같은 기술, 같은 원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또 핵발전소에서 사용한 핵연료는 핵무기의 원료로 사용되지요. 그래서 원자폭탄을 갖고 싶은 열망이 원전을 자꾸 짓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이 전 세계에 포진해 있는 원자력 마피아들이 원전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한홍구, 42쪽)

일본은 미국의 세계 전략에 편승하며 핵 발전을 도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때마침 1954년 3월 1일 미국이 태평양의 작은 섬 비키니에서 실시한 수소폭탄 실험 당시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참치잡이 어선 '제5후쿠류마루'가 피폭되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사회는 이 사건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은 세 번째 피폭 사건으로 받아들여 반핵 여론이 들끓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일본의 수상이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를 비롯한 일본 내 보수 세력은 바로 다음날인 3월 2일 핵발전소 건설을 위한 예산을 승인한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이것이 단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핵발전소를 가동하고 있는 모든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버리고, 무시하는 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 는 이러한 것들을 포괄해서 원전 시스템을 '희생의 시스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타인의 생활이나 생명, 존엄 등을 희생한 위에서만 이익을 내고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그 이익을 취하고 유지하는 자들은 결국 국가권력이나 자본입니다.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내버리고, 국민 이외의 존재를 무시하는 문제점은 각 나라의 원전 추진 세력들이 공유하는 특성입니다. 나아가 원전뿐만 아니라 핵무기 문제를 포함해 핵을 둘러싼 정치, 경제, 군사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아닌가 합니다. (다카하시 데쓰야, 77쪽)

▲ 2011년 4월 8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방사성 물질 오염수 방류 사건 규탄 기자회견. ⓒ프레시안(최형락)

홀로코스트와 원전을 작동시키는 힘, 희생의 시스템

20 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하이데거는 나치즘에 굴복했다는 치명적인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비록 하이데거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치즘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평소 생각한 독일 민족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치즘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나치에 동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 마르틴 하이데거는 과거사에 대해 어떠한 참회도, 변명도 하지 않았고, 그의 '완강한 침묵'은 더욱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파울 첼란과 하이데거는 서로의 저작을 읽었다. 첼란은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다른 한 편 그와 나치즘의 관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1967년 첼란은 하이데거가 있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시 낭독을 했고, 그 자리에 하이데거도 참석했다. 낭독이 끝난 자리에서 하이데거는 첼란에게 자신의 책 한 권을 주었고, 다음날 그를 자신의 토트나우베르크 산장 연구실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함께 술을 마셨지만 파울 첼란은 나치즘에 대한 하이데거의 침묵을 잊지 못했다. 그는 방명록에 "오두막 산장에서 함께 별을 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기대하며. 1967년 7월 25일 파울 첼란"이라고 서명했다. 그리고 파울 첼란은 1970년 4월 20일 자살했다. 어쩌면 파울 첼란에게서 생의 마지막 불씨를 앗아간 것은 그날 하이데거의 '완강한 침묵'이 아니었을까.

한 홍구는 후쿠시마와 용산 참사를 연결시키며 두 사건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논리와 시스템에서 나온 사건이었음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완강한 '자본의 논리'와 '희생의 시스템' 앞에서 무력감과 절망에 사로잡혀 저항을 포기한다면, 위기의 순간마다 국민을 속이고, 버렸던 국가에 또다시 포섭되는 결과만을 빚게 될 거라고 경고한다. 서경식은 가해자로서 양심을 저버린 일본은 자신들이 가했던 침략으로 인한 희생자의 고통에 대해 침묵하며 전후 복구와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국민들이 안락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이 '안락 전체주의'가 되어 오늘날 일본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일본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이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핵 발전은 '윤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핵 발전을 포기했다며 "근대 기술과 근대 문명이 진화해온 끝에 핵무기나 핵발전소 문제가 등장했지만 '인간의 목숨과 삶 자체를 곤란하게 만드는 기술이나 문명은 이미 반윤리적"이라고 규정한다.

지난 2012년 서울 시청 앞에서는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제목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 1주기를 기리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에는 1만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해 우리 아이들에게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탈핵의 길을 가자고 외쳤다. 이 자리에는 일본 후쿠시마에서 피난한 어린이 아베 유리카도 있었다. 유리카는 그 자리에 모인 어른들에게 물었다.

저는 원전사고 때문에 방사능을 뒤집어썼습니다.
저는 어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는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제가 결혼할 수 있을까요?
제가 건강한 아가를 낳을 수 있을까요?
(☞전문 바로 보기 :
아베 유리카, '어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어린이의 물음 앞에서 국가주의와 개발 논리,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소비주의에 중독된 나머지 우리가 '완강한 침묵'을 고수한다면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나가사키, 제주와 오키나와, 후쿠시마의 또 다른 공범이 되는 것은 아닐까? <후쿠시마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 비록 패배가 이어지는 역사 속에 살고 있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프레시안(손문상)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출처: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30813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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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이 말했지, 전공투를 보라고

<적군파>/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임정은 옮김/교양인 펴냄


1988년의 어느 날 고3 수험생이던 나는 삼촌과 마주 앉아 앞으로 어떤 대학, 무슨 학과를 지원할지 인생 상담을 했다. 말이 인생 상담이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숙부모들이 양육을 책임진 상황이라서 진로를 결정하는 대화를 나눈 셈이다. 그러나 나는 직전 해였던 1987년 고등학생 운동에 참여한 뒤로 대학 말고 다른 곳에 뜻이 있었기 때문에 삼촌을 실망시키는 말만 계속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은커녕 대학에 갈 만한 성적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저 멀리 남도 땅의 전남대나 조선대에 가고 싶다고 했다. 굳이 그곳을 이야기했던 건 오월대(전남대 투쟁조직)와 녹두대(조선대 투쟁조직)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에게 오월대와 녹두대는 영화 <넘버3>의 송강호가 “예전에 말야, 최영의란 분이 계셨어, 전 세계를 떠돌며 맞짱을 뜨던 분이 계셨어”라던 분과 맞짱을 뜬다고 해도 믿었을 전설의 파이터 집단이었다.

   
1970년 3월 적군파는 요도호를 공중 납치해 평양으로 가려다 한국 김포공항에 비상 착륙했다(위).

‘세계 동시 혁명’ 꿈꾼 젊은이들


내 이야기를 답답한 표정으로 듣던 삼촌은 우리는 일본을 20년쯤 뒤처진 상태로 따라가고 있는데 일본의 학생운동 세력이었던 ‘전공투(全共鬪)’가 나중에 어찌되었는지 알지 않느냐며, 이쯤에서 생각을 접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이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 학생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만 배움이 부족한 탓이었는지 국내에서 전공투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일본 학생운동 관련 서적은 2006년에 나온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를 제외하고는, 지금 소개하는 퍼트리샤 스테인호프의 <적군파-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이 사실상 유일하다.

전공투란 잘 알려진 대로 1960년대 후반에 출현한 일본의 새로운 학생운동 세력으로, 이들은 패전이 남긴 폐허 속에 꽃피운 전후 민주주의와 고도성장이라는 화려함에 가려진 일본의 맨얼굴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우친 젊은이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자기부정의 논리’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세계 동시 혁명’이라는 슬로건 아래 무장투쟁을 부르짖은 세력이 바로 적군파(赤軍派)였다.


삼촌은 내게 한국의 학생운동이 일본을 뒤따라간다고 했지만 권위주의 독재 체제 아래에서 진행되었던 한국의 학생운동(민주화운동)은 처음부터 합법적 지위를 얻지 못한 채 비합법·반합법 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합법공간으로의 투쟁을 지향한 반면, 일본의 학생운동은 합법 공간에서 반복되는 무기력을 경험하면서 비합법·반합법 투쟁으로 변모해 갔다. 결과적으로 이 차이가 한국의 학생운동권이 제도정치로 포섭되는 과정을 밟게 된 반면 일본의 학생운동권이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결과(단카이 세대)를 빚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적군파는 전 세계를 경악시킨 몇몇 사건(청년 다섯 명이 219시간 동안 3만5000명의 경찰과 대결한 사상 초유의 인질극 ‘아사마 산장 사건’, 북한에 혁명 기지를 건설한다며 평양으로 간 일본 최초의 비행기 납치 ‘요도호 사건’, 그리고 잔인한 동지 살해로 일본 진보 운동에 찬물을 끼얹은 ‘연합적군 숙청 사건’)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 책의 의의는 앞서 살펴본 대로이지만 다소 아쉬운 점은 저자가 사회심리학을 표방하면서도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숙청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과 미국을 대비시키며 일본 사회 특유의 문화와 관습에서 해답을 찾는 듯 보이는 게 아쉽다. <201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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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마오 주석 만세” 낯설지 않은 외침

- <중국인 이야기 1>/리쿤우·필리프 오티에 지음/한선예 옮김/아름드리미디어 펴냄


내게는 중국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두 가지 있다.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한 시민단체를 취재하다 우연히 한 선배를 만났는데 1989년 중국의 톈안먼 사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선배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중국공산당의 결정을 이해한다며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고 했다. 한마디로 시위 군중들이 우경화되었으므로 체제 수호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2007년의 일이다. 중국 광저우에 갔다가 쑨원(孫文)을 기리는 중산기념당에 들렀다. 기념품 가게에는 여느 관광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물품이 대부분이었는데, 유일하게 붉은색 비닐 장정의 책 한 권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오주석어록(毛主席語錄)>이었다. 함께 간 조선족 가이드에게 구입할 수 있도록 통역을 부탁했더니 왜 저런 책을 사려 하느냐며 이제 공산당이고 마오고 진저리가 난다며 손사래를 쳤다.

냉전 시대, 한국과 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20세기 아시아의 신생국가로 각기 다른 방식의 근대화를 추진해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군사 쿠데타와 민주항쟁을 거친 우리에게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개혁개방 시대를 살아온 저들에게도 이 시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중국인 이야기1-아버지의 시대>는 수십 년간 국가와 당의 선전 업무에 종사해온 국가 공식 화가이자 현재 중국공산당 당원이기도 한 리쿤우(李昆武)가 자신의 삶을 통해 격동하는 중국 현대사의 현장을 생생히 담아낸 자전적인 만화 작품이다. 그는 프랑스인 친구 필리프 오티에의 도움을 받아 4년여의 작업 끝에 <중국인 이야기> 3부작을 완성했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제1권은 자신이 태어난 1955년부터 마오쩌둥이 죽은 1976년까지를 다룬다. 

아직 젖먹이인 아들에게 ‘엄마, 아빠’ 대신 “마오 주석 만세”를 먼저 해보라고 시킬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공산당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주인공 샤오리가 맞닥뜨린 첫 번째 사건은 대약진운동(1958~1962)이었다. 그는 이 시절을 “며칠 전 시작된 어떤 운동으로 온 나라가 도취에 가까운 흥분 상태”에 휩싸인 시기로 기억한다. 한순간에 모든 형태의 사생활이 사라지고, 공동식당에서 모두 함께 밥을 먹고, 온 나라의 쇠붙이를 거둬 용광로에 녹이고, 용광로를 달굴 석탄이 떨어지자 온 산의 나무들을 베어냈다. 마오 주석의 한마디에 중국 인민들은 파리·모기·쥐·참새를 박멸하겠다며 산과 들판을 누볐다. 그러나 나무를 베어내고 참새를 없앤 여파로 땅이 황폐해지고, 해충이 창궐하는 바람에 3년여 흉년 동안 10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굶어죽는 대기근이 벌어진다.

   
ⓒ북폴리오 제공
<중국인 이야기 1>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시기를 다룬다. 1966년 9월12일 홍위병이 하얼빈 시장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위).

그들과 우리의 역사가 겹치는 시절

몇 년 뒤 열한 살이 된 샤오리는 친구들과 함께 <마오어록>을 손에 들고 식당, 사진관, 목욕탕, 미용실 등을 돌며 문화대혁명(1966~1976)에 참여한다. 이들은 더 나아가 학교 선생님들을 고발하고, 자아비판에 끌고 나와 욕보인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샤오리와 그 친구들도 피해가지 못했다. 같은 반 친구의 폭로로 지주 집안 출신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버지는 공산당에서 쫓겨나 어디론가 잡혀가고 집안은 몰락한다. 그런데 죽(竹)의 장막 저 편에 가려져 있던 중국의 시대 상황이 내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어린 샤오리가 과제로 쥐를 잡아 꼬리를 학교로 가져가는 모습이 낯설지 않고, 거리 곳곳, 건물마다 온갖 구호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으며, 아침 일찍 학교 갈 때 동사무소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던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의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가 낯설지 않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그들의 역사가 우리 역사의 어느 시절들과 겹쳐지는 이 시절에.<201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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