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3. 마이티네팔과 네팔의 고속도로 휴게소

▶ 하이얏트리젠시 내부에서 전통악기를 이용해 공연을 펼치고 있는 네팔 음악인들


박영석 대장과 빌라 에베레스트
카트만두 시내에서 약간 외곽에 있는 스와얌부나트에서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하이야트 리젠시로 가기 전 이제는 고인이 된 박영석 대장과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원정의 동반자였던 앙 도르지 셰르파(Ang Dorjee Sherpa)가 함께 운영하던 카트만두 시내의 빌라 에베레스트(http://www.villaeverest.co.kr)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마도 네팔에서 먹게 될 처음이자 마지막 한식 식사일 텐데 저녁 메뉴는 한국식 삼겹살이다. 네팔을 찾는 트레커들이나 관광객들이라면 한 번쯤 거치게 되는 쇼핑 거리, 한국에 이태원이 있다면 네팔에는 타멜 거리가 있다. 언젠가 내게 그럴 만한 여유가 이곳 타멜 어딘가에 허름한 방 하나를 구해 며칠씩 머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기도 하다(난 왜 이리 인간이 구질구질할까). 그 타멜 거리에서 우측으로 살짝 빠지면 주머니가 얄팍한 여행자들을 유혹하는 숙소들이 밀집해 있는데 그곳에 빌라 에베레스트가 있다. 빌라 에베레스트는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네팔을 찾는 한국 원정대는 물론 한국인 관광객들이라면 빼놓지 않고 거치게 되는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네팔·히말라야 문화기행 직전에 세상을 떠난 고(故) 박영석 대장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여행길에서 계속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의 인연 역시 이번 문화기행과 겹친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위에 소개해둔 빌라 에베레스트의 웹 사이트를 보면 되겠지만 이곳에 소개되고 있는 기사 중 예전에 함께 일했던 선배(고동률)가 쓴 기사도 있어 반가웠다.


오늘날 셰르파(sherpa)란 히말라야 등반이나 전문적인 트레킹 가이드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네팔 고산 부족의 명칭이다. 앙 도르지 셰르파의 이름에 셰르파가 붙은 것은 그가 실제 산악가이드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그의 부족명이 성씨(姓氏)처럼 사용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앙 도르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삼부토건이 네팔에 건설하는 댐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1978년 한국 트레킹 팀과 함께 일했던 그의 친구가 찾아와 트레킹 팀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받으면서부터였다. 그는 건설현장에서 한국에서 파견 나온 주방 아주머니들로부터 한국 음식 만드는 법과 한국어를 배웠다. 1983년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산악인들의 뒷바라지를 시작한 앙 도르지는 1990년 한국에 나와 한국어 공부를 했고,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를 따라 다시 네팔로 들어왔다가 1991년 6월부터 빌라 에베레스트를 인수해 네팔을 찾는 한국 원정대와 트레킹 팀을 돌보고 있다.


▶ 카트만두에서 치트완 가는 길에 만난 소년들(카트만두 시내 저 때만 해도 엉덩이가 그렇게 시달리게 될 줄 미처 몰랐다. ㅠ.ㅠ)


이제 고인이 된 박영석 대장은 지구의 3극점,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에 모두 오른 사람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와 같은 기록을 가진 사람은 인류를 통틀어 그가 유일했다. 이것을 일컬어 산악의 그랜드 슬램이라고 한다는데 이처럼 엄청난 기록을 가진 그는 어째서 또다시 안나푸르나에 갔던 것일까? 그 대답은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처럼 고작 트레킹 제1캠프까지 가본 것이 고작인 사람에겐 말이다. 다만 그를 아는 사람들, 그와 원정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 그를 좋아했던 것 같다. 말이 쉽지 원정대를 꾸리고 산을 함께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선 함께 여행을 하라고 했던가? 보통의 평범한 여행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나의 진면목을 들키고 만다. 그런데 숨을 할딱이며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 고통스러운 여정에서야 오죽할까? 남에게 베풀 만한 친절 같은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많은 원정대가 팀워크 문제로 정상 등정을 포기하게 되기도 한다. 설령 정상 등정에 성공했더라도 지상에 내려와서는 서로 남남처럼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박영석 대장팀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산 아래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했고 언제든 박영석 대장의 "가자" 그 한 마디면 아무 말 없이 그 산으로 따라나섰다고 한다. 네팔 현지에서도 박영석 대장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제법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나 박영석이란 이름 석자 뒤에 언제나 ‘대장’이란 호칭을 붙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도 그 말이 흘러나왔다. 박영석 대장.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는 호랑이가 아닙니다. 탐험하지 않는 탐험가는 탐험가가 아닙니다. 도시에 있는 산악인은 산악인이 아닙니다. 이제 세상에 신대륙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게 된다면 그게 탐험이고 도전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 같은 탐험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팔 카트만두의 빌라 에베레스트. 이곳에서 우리는 언제나 박영석 대장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이얏트 리젠시에서 네팔의 현재를 보다


▶ 하이얏트리젠시 호텔 현관 모습. 나중에 따로 설명할 일이 있겠지만 네팔의 건축 양식은 사원의 건축 양식을 많이 본뜨고 있는데 지붕 꼭대기에 첨탑 형식의 작은 표식이 있는데 이것을 '가쥬르'라 하고(사진엔 나오지 않았지만), 처마 끝에 가로로 길게 연이어 세워져 있는 나뭇살을 '툰다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많은 문양과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 들어가는 문 위에 반원형 형태로 되어 있는 장식은 '토라나'라고 해서 모시고 있는 신을 새겨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빌라 에베레스트에서 삼겹살에 에베레스트 맥주를 마시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하이얏트 리젠시로 향했다. 스와얌부나트에서 빌라 에베레스트까지 가는 20분 거리라고 하는데 카트만두 특유의 교통난 때문에 좁은 길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버스 안에 갇힌 채 거의 2시간을 보냈는데 저녁 식사를 하고 거리로 나오니 출퇴근시간이 지난 탓인지 20분도 안 되어 저녁 8시 반쯤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장거리 비행에, 버스 안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며 시달린 탓에 숙소에 도착하는 데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당장 내일은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는 데로 로열치트완 국립공원을 향해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이얏트 리젠시 호텔에 도착해 일행의 숙소를 체크하고 방 배정을 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오늘 아침 우리가 도착할 때 공항이 다소 붐빈다고 했더니 그것이 오늘 출국해야 하는 비행기들까지 연착시켜 호텔에 머물던 승객들 중에 체크 아웃하지 않은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뒤늦게 승객들을 빼고 부랴부랴 객실 청소를 하는 중이라 숙소에 체크인을 할 수 없다니 기가 막혔다. 네팔인 호텔리어는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한 편으론 두 팔을 좌우로 벌리며 나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나와 한국인 가이드, 현지 가이드까지 붙어서 항의해봤지만 항의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니 일단 연세가 많은 분들부터 우선 방 배정을 했다. 아마도 이것이 인도·네팔 문화권 특유의 현상이기도 할 터였다. 현지 가이드에게 말해서 일류 호텔이라는 하이얏트 호텔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으니 내일 아침 호텔 매니저를 통해 정식으로 사과를 하지 않으면 클레임을 걸겠노라 엄포를 했다. 그렇게까지 말한 이유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다시 이곳에서 2박 3일간 머물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여행의 기획자라 주최한 입장이나 마찬가지이니 가장 늦게 숙소로 들어갔다. 아직 시차적응이 안된 탓도 있고, 여행의 설렘이 뒤늦게 나타난 탓인지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1층 숙소라 객실 문을 열면 곧바로 정원과 연결이 되어 있어 아침 산책을 했다. 호텔은 인도에 지어진 영국식 건물 스타일에 카트만두 특유의 네와르 식 건축 스타일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 때문인지 처마 끝에 비둘기 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내가 나서자 후두둑하는 날갯짓과 함께 떼를 지어 날아올랐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네팔 최고급 호텔이란 명성에 걸맞게 정원이나 수영장, 테니스 장 등 부대시설이 훌륭하다. 꽃피는 계절에 왔다면 무척 아름다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영장 앞에서 만난 호텔리어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담배 한 대를 맛나게 피운 뒤 숙소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호텔 조식 뷔페로 먹었다. 사실 호텔이란 공간만큼 세계화되어 있는 곳도 없기에 어딜 가든 호텔 식사는 거의 표준화되어 있다. 호텔을 일컬어 어떤 이는 ‘세계의 창’이라고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호텔이란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쇼윈도이지 그곳 현지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공간은 아니다. 이곳에서 제공된 아침식사도 다분히 서구화되어 있었지만 그 기본만큼은 네팔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겨 치트완국립공원으로 우리를 실어 나를 버스에 오르니 호텔 매니저가 찾아와 정식으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이 일은 그렇게 마무리 짓기로 했다.


카트만두에서 로열치트완 국립공원(Royal Chitwan National Park)에 이르는 여정
로열치트완 국립공원은 카트만두에서 서남쪽으로 약 160㎞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데 만약 한국식 거리 개념이라면 길 막히는 걸 고려하더라도 넉넉잡고 2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네팔이고, 네팔의 시간은 네팔의 방식대로 흘러간다. 현지 가이드인 아눕은 아예 처음부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란 뉘앙스로 주의를 준다. 혹시 치트완에 가다가 볼 일을 보고 싶은 분들이 있으면 언제라도 이야기를 해 달라, 다만 화장실이 있어서 차를 세우는 게 아니라 길가에서 볼 일을 봐야 한다는 거다. 일행 중에는 인도를 다녀온 이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이라며 농담을 건넨다. 아눕이 어떻게 아셨느냐며 맞장구를 치니 일행이 까르르 웃는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버스에서 내려 일 보는 건 좋은데 조용히 숨어서 볼 일을 보고 싶다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는 분은 주의하란다. 왜냐하면 언제 폭탄을 밟을지 모르기 때문이란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네팔이 내전을 치렀다고 하더니 길가에 무슨 지뢰라도 있는 모양이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폭탄이란 다름 아닌 인분이다. 실제로도 일행 중 한 사람이 밟고 들어와 일행은 물론 버스 기사의 조수를 애 먹인 적이 있지만 길가에서 볼 일을 볼 필요는 사실 없었다. 다행히 중간 중간 허름하지만 칸막이가 있는 화장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인도보다 나은 편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네팔의 공공 교통에는 빠짐없이 조수가 타고 있는데 이들은 차 안에서 먹고 자면서 버스 내부 청소부터 궂은일은 모두 도맡아 처리하게 되어 있다. 지금 이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기사 역시 전에는 조수로 잔뼈가 굵었을 것이다. 운전 기술을 그렇게 해서 배운다는 것이다.


▶ 워낙 노면상태가 거칠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촬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그나마 건진 한 컷. 사진에 모두 나와있진 않지만 만약 버스가 절벽에서 구른다면 대략 100여 미터는 굴러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가파른 낭떠러지이다.


네팔은 인도 대륙 북부와 중국의 티베트 자치구 사이에 동서로 길게 놓여 있는 나라인데 동 네팔과 서 네팔을 잇는 도로는 실질적으로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도로는 해발고도 2~3,000m가 넘는 고산지대를 끼고 건설되어 잘해야 2차선이고, 그나마도 포장이 잘 되어 있지 못하다. 포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인도 국경에서 온갖 물건을 과적한 상태에서 트럭과 버스들이 오가다 보니 도로의 여기저기가 파여 울퉁불퉁하다. 어렸을 적 보았던 이브 몽땅 주연의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 The Wages Of Fear)>란 영화에 나왔던 길은 차라리 안전하다고 말해야할 듯 싶다. 도로 폭은 좁고 차량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데 자칫 사고라도 나면 천길 아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칠 것 같다. 그런데도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네팔의 공공 시외버스에는 사람들이 문 밖에 매달려 있거나 지붕에서 한가롭게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


마이티 네팔과 고속도로 휴게소
카트만두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버스가 카트만두를 둘러싸고 있는 산지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에야 비로소 네팔이란 나라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산은 한국의 산지처럼 야트막한 경사를 그리며 완만하게 솟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치솟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그런 산이었다. 그런데 그 산 중턱까지 계단식 논과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이 올라가 있다. 이런 풍경은 네팔의 어딜 가든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마을에 도로가 들어오면 잔치를 벌인다고 한다. 우리도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카트만두 시내를 벗어날 무렵 버스가 멈추고, 조수가 뛰어내린다. 아눕은 길 한 편에 서 있는 두 개의 초소 같은 건물을 가리키며 저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하나는 네팔 고속도로 비용을 거두는 톨게이트이고, 하나는 올 여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네팔의 인권운동가 아누라다 코이랄라가 설립한 ‘마이티 네팔’의 감시초소라고 한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수여하는 ‘제15회 만해대상’을 받은 '마이티 네팔'은 평범한 네팔의 어머니이자 주부였던 코이랄라 대표가 어느 날 인도로 팔려가는 네팔 여성들의 비참한 처지를 알게 되어 지난 1993년부터 여성의 인신매매에 반대하고 감시하는 기구로 설립한 기구이다. 본래는 초등학교 영어 교사 출신인 그녀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마련한 작은 방 한 칸으로 시작해 가정폭력과 인신매매로 고통 받는 여성들을 돕기 시작했고, 구걸하는 여성들에게 밥을 제공했다. 마이티네팔은 현재 29개 국내 지부와 세계적인 후원 네트워크를 갖춘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런 공로가 서서히 알려지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고, 할리우드의 배우들 중에도 데미 무어는 마이티 네팔을 지원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진행을 맡기도 했었다. '마이티 네팔(http://www.maitinepal.org)'이란 말의 뜻은 우리가 영어로 생각하기 쉬운데 ‘힘센(mighty) 네팔'이 아니라 ’친정 어머니(maiti)의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 마이티 네팔 초소 앞에 세워져 있는 경고판이다. 가난한 네팔 여성들에게 돈과 직업, 결혼을 빌미로 접근해(요즘은 여성들이 중개상으로 많이 나서는 추세라고 한다) 위장결혼시킨 뒤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가면 남성이 성매매 업소에 인신을 팔아넘긴다고 쓰여 있다(사진은 룸비니 국경 근처의 바이라하와(Bhairahawa)에 세워져 있는 마이티 네팔 초소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이곳이 인신매매의 중심이라고 한다).


실제로 코이랄라 대표는 '네팔의 어머니'란 별명으로 불리운다. 마이티 네팔은 인도 등지로 성노예로 팔려가는 네팔 여성 1만 2천여 명을 구출했고, 사회의 싸늘한 시선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 자활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네팔 여성을 유혹해 인신매매하는 방식이 주로 시골 여성들에게 접근해 사기 결혼이나 일자리 등을 주선하여 데려가는데 주로 인도 등지로 팔려간다고 한다. 톨게이트 앞을 지나는 차 안에 혹시 젊은 여성이 타고 있으면 마이티 네팔 요원들(이들 역시 ‘마이티 네팔’에 의해 구조된 여성들)이 지켜보고 있다가 차를 세우고 여성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어봐 수상쩍다 싶으면 젊은 여성을 맡아 보호하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단다.


카트만두를 벗어나 두 시간쯤 울퉁불퉁한 길 때문에 뒷좌석에 앉아 공중부양에 온갖 재주를 부리며 달렸을까? 자기들 말로는 네팔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가자며 차를 세운다. 한국이 세계에 내세울 만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 여행을 많이 다녀본 이들은 우스갯소리로 커피 믹스와 고속도로 휴게소를 말하곤 하는데 네팔의 고속도로(?) 변에 있는 휴게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사실 괜찮았다고 말할 정도로 훌륭한 시설은 아니었지만 한적한 길가 언덕을 따라 나무 그늘이 있고, 맛있는 밀크티(이곳 네팔 말로는 ‘찌아’, 인도 말로는 ‘짜이’라고 하는)를 마실 수 있었다. 거친 도로를 달리느라 혹사당한 엉덩이도 쉬게 할 겸 해서 잠시 휴게소에 들러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놓인 자연석 평상에 둘러 앉아 네팔식 밀크티를 마셨다. 인도나 네팔을 여행하고 온 사람들은 누구나 이 밀크티 맛을 잊지 못하는데 한국에서 커피에 절어 있던 나 역시 이곳의 밀크티 맛이 지금까지도 입 속에 아른거리는 기분일 만큼 이곳이 밀크티 맛은 한국에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맛있고, 한국에선 이 맛을 내기 어렵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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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2. 네팔과 카트만두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



▶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촬영한 카트만두 시내 모습


네팔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직도 눈앞에 히말라야와 카트만두가 아른거리던 12월 4일 아침, 우연치 않게 TV를 보게 되었는데 <퀴즈쇼 사총사>란 프로그램에 양준혁과 그의 친우 3명이 함께 출연해 퀴즈를 푸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양준혁을 비롯해 함께 야구중계를 진행하는 이용철 해설위원, 임용수 캐스터, 이광용 아나운서가 함께 출연했는데 이들 네 사람의 출연자가 한 팀을 이뤄 번갈아가며 출제되는 퀴즈를 푸는 프로그램이었다. 이광용 아나운서의 차례에 나온 퀴즈 문제는 “다음에 나열된 각 나라의 수도를 해발고도가 높은 순서대로 열거하시오.”였다. 주어진 시간 내에 나열된 수도 이름을 해발고도가 높은 순서대로 호명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의 정답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약 3,600m)가 가장 높고, 그 뒤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약 2,600m),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약 1,800m),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약 1,600m),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약 1,300m)의 순서였다. 우리들의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광용 아나운서가 퀴즈를 푸는 과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온갖 조합을 다 내놓았지만 시종일관 카트만두를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수도로 내세웠기 때문에 결국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참고로 서울은 평균 해발고도가 51m).


출제의 의도가 애초부터 출연자의 선입견을 노리고 낸 것이었겠지만 문제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던 셈이다. 아마도 그가 정답을 맞힐 수 없었던 것은 네팔이란 나라에 대한 우리의 무지(無知)와 선입견 때문일 텐데, 네팔하면 누구라도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와 눈 덮인 히말라야를 떠올리게 되어 무조건 높고 춥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실제 네팔은 북위 27~30。 부근이라(한반도의 가운데를 통과하는 위도가 북위 38。란 사실을 염두에 두자) 높은 고도로 올라가지 않는 한 이미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추위에 단련된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렇게 춥지 않다. 게다가 네팔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기후로 해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6월~8월까지 3개월 동안이 우기(雨期)인데 이 기간엔 매우 더운 편이고, 9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가 건기(乾期)이다. 그런 탓에 네팔 트레킹은 대체로 건기에 집중되어 11월부터 이듬해 봄 3월까지가 네팔 관광의 성수기이다. 올해는 이상 기후 탓인지 11월 초순까지도 비가 내리는 등 일기가 좋지 못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네팔 기행을 시작하던 11월 하순에 들면서 다행히 날씨가 좋아졌다.


▶ 카트만두 국제공항의 모습이다. 네팔은 산업기반이 거의 없다시피해 자동차는 물론 대부분의 공산품들을 인도와 중국을 통해 들여오고 있다. 일본 차들도 많지만 현대, 기아차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사진 우측 하단에 보이는 붉은 색 차량은 현대자동차가 인도에서 생산하고 있는 i10이고, 그 뒤편으로 기아의 스포티지R이 보인다.


트레킹 성수기가 시작된 탓인지 때마침 카트만두 국제공항에 이착륙하려는 비행기들이 몰려 있어 연착하게 되었다. 센스 있는 기장의 특별한 배려였는지 몰라도 우리가 탄 비행기가 카트만두 북방 히말라야 부근까지 날아가 회항해준 덕분에 창가 좌석에 앉았던 승객들은 카트만두 북쪽에 위치한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여러 산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좌석이 한 가운데에 있어서 아쉽게도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고 말았다.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거나 트레킹에 나설 만큼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관광지 포카라에서 초경량항공기를 이용해 안나푸르나 일대를 돌아보는 관광 프로그램도 있고, 마운틴 플라이트라고 해서 경비행기를 이용해 에베레스트, 로체 등지를 돌아보는 관광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


원래 예정했던 시각보다 다소 늦게 공항에 도착했다. 1999년 처음으로 외국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 목적지는 중국의 상해였다. 신공항이 푸둥(浦東)국제공항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라 훙차오(虹橋)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처음 비행기에서 내리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공항 주변의 풍경보다는 우선 중국 특유의 이국적인 냄새가 상해의 열기와 함께 훅하며 달려들어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하면 약간의 과장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 중국은 그 냄새로 깊은 첫 인상을 남겼다. 네팔에 도착해서도 제일 먼저 이곳의 냄새는 어떨까 하는 긴장과 설렘을 품고 비행기 출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출구로 나오니 인천국제공항처럼 공항 라운지와 곧바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계단차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다. 계단을 내려오며 네팔의 냄새를 맡아보니 기대했던 것과 달리 한국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냄새여서 나의 기대가 살짝 어긋남을 느꼈다. 카트만두의 매연이 장난 아니라고 하더니 석유난로에서 나는 매캐한 기름냄새가 느껴졌다. 공항버스가 공항 라운지까지 셔틀 운행하고 있었는데, 재미있었던 건 공항 라운지까지의 거리가 채 30m도 안 되어 보이는데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안전문제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일행 중 한 명이 ‘그래도 네팔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찾아온 사람들을 처음부터 걸으라고 할 수 없어 그런가보다’고 농을 던져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상해에 도착해 한동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던 것은 한국과 달리 탁 트인 평야 지대라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 때문이었는데, 카트만두에서 받은 첫 인상은 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네팔은 인도 쪽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는 한 어딜 가든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있는 산들을 볼 수 있는데 카트만두 역시 주변을 높고 낮은 ‘히말’ - 히말라야(Himalayas)란 말은 고대 산스크리트(梵語)에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가 결합되어 생긴 말로 본래 ‘눈의 집(거처)’란 뜻으로 네팔어로 히말은 ‘산’이라는 뜻이다 - 들이 둘러싼 분지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국의 대구광역시를 떠올리게 된다. 네팔 국왕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트리부반 국제공항은 강남고속버스 터미널과 건축 스타일이 조금 비슷해 보였는데 공항 청사의 규모는 그보다 훨씬 작다. 굳이 네팔이 가난한 나라라는 선입견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인천국제공항이 세계 1,700여 공항의 협의체인 국제공항협의회(ACI)가 제정한 ‘국제공항 명예의 전당’ 1호가 될 만큼 훌륭한 국제공항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어딜 가든 세계의 관문으로 인천국제공항이 주는 우쭐함을 살짝 즐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외국인으로 분리된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심사과정은 그리 까다롭게 보이진 않았지만 심사요원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심사대를 통과하는 시간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행렬은 비교적 빠르게 통과하는데 다른 행렬은 그보다 조금 느리게 진행된다. 성질 급하기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 사람들인지라 일행 중에도 이쪽저쪽으로 눈치 바쁘게 줄을 바꿔 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차피 일행이 모두 통과해야만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말이다. 공항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터라 사진은 없지만 입국 심사요원들 중 남자들 몇몇은 네팔의 전통 모자 ‘토피’를 쓰고 있었다. ‘토피’는 원통형으로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초대 수상이 쓰고 있는 모자의 원형이라고도 하는데 내심 기념품으로 하나는 꼭 구입해야지 마음먹고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할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심사대를 통과한 뒤 입국장에서 미리 부쳤던 화물들을 찾아 공항 로비에서 앞으로의 일정을 이끌어줄 현지 가이드와 만나기 위해 잠시 대기하며 공항 근처를 잠시 배회했다. 공항 한 편에 중국에서 갓 넘어온 병아리들이 가득 담긴 박스가 포개져 쌓여있어 인상적이었다. 잠시 후 우리를 안내해줄 현지 가이드와 만나 버스에 짐을 싣고 네팔에서의 첫 일정을 시작했다.


3개의 왕조가 번성했던 카트만두 분지
버스에 오르니 네팔 현지 가이드가 밝은 미소와 함께 능숙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다. 그의 이름은 아눕 쿠마르 구릉(Anup Kumar Gurung)이었는데 실제 나이(46세)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동안(童顔)이었다. 그는 한국에 1992년부터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로 6~7년간 일하면서 한국어를 익혔다고 하는데 중국에서 만났던 조선족 가이드들보다 우리말에 능숙하고, 무엇보다 사용하는 어휘가 다양하여 깜짝 놀랄 만큼 말주변이 좋아서 문화기행 내내 일행들에게 열렬한 인기를 누렸다. 여행은 만남이고, 만남은 결국 사람의 일이란 생각을 새삼스레 하게 된다. 그는 한국 시간이 네팔 시간보다 3시간 15분가량 빠른데 손목시계를 우리가 흔히 보듯 12시를 기준으로 똑바로 세워서 보지 말고, 주먹을 앞으로 뻗어 보면 한국 시간을 네팔 시간에 별도로 맞추지 않고도 그대로 볼 수 있다며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 숴염부나트의 장난꾸러기 원숭이들


아눕의 이름에 붙은 구릉이란 말은 그의 부족을 뜻하는 말인데, 자신의 외모가 한국 사람들과 비슷한 것은 구릉족이 몽골계통의 부족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그는 몽골어계 산지부족 중 하나인 라이 족 같은 경우엔 한국 사람들과 외모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고 했다(아마도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한국인과 구분되지 않는 외모 때문에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 노동자들은 그 덕을 보기도 하고, 슬픔을 겪기도 했다). 네팔에는 많은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크게 몽골계 산지부족(타망, 라이, 림부, 구릉, 마가르, 체반, 테칼리 등), 북인도계 저지대 부족(일명 ‘터라이’로 불리는 남부 저지대에 주로 살고 있는데 2~300년쯤 전부터 인도 갠지스 평원 지대에서 이주해온 인도인들), 네와르 부족(카트만두 분지에 도시문명을 세운 장본인들로 ‘네팔’이란 국명 자체가 카트만두 분지를 뜻하는 네와르어 ‘네팔’에서 유래), 티베트계 고지대 부족들이 혼재해 있다.


트리부반 국제공항 로비는 지방의 시외버스 터미널처럼 비좁은데 오가는 승객들로 부산하다. 공항 입구는 호객하려는 택시 기사들과 약속한 가이드를 만나려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인데 현지인들은 공항 내부로 들어올 수 없다. 아마 안전상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공항 내부가 비좁아서 이들까지 들어와 손님을 맞는다면 그것도 참 어려운 일일 듯 싶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위장복 차림의 군인들이 FN-FAL 소총을 들고 서 있는 광경이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전투경찰 - 물론 한국의 전경처럼 시위 진압보다는 얼마 전까지 실제로 마오주의 게릴라들과 전투를 벌였다 - 이란다.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체험을 했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네팔 역시 우리처럼 근대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역사의 격변을 겪었다. 네팔의 역사를 간략히 살피면 크게 고대 릿처비 왕조(4~9세기 전후), 중세 말라 왕조(13~18세기), 그리고 근현대의 사허왕조(18세기~현대)로 구분되는데 이들 왕조들은 사방이 높은 산지인 네팔에서 카트만두는 1년 내내 온화한 날씨가 이어지고 비교적 넓은 농토가 있는 분지 지형이라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어 네와르라는 도시문명을 이루며 번성할 수 있었다. 네팔 역사에 처음 기록된 릿처비 왕조 시대부터 이미 인도와 티베트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해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고, 문화적으로도 인도의 힌두문화와 티베트의 불교문화가 네팔 특유의 토착신앙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네팔을 이루는 60여개 부족들이 함께 조화와 안정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 숴염부나트는 이른바 '원숭이 사원'이라 불릴 만큼 원숭이들이 많은데 때로 원숭이들의 짖궂은 장난 때문에 피해를 보는 관광객들도 있다. 



몽골이 아랍지역을 공략하자 밀려난 이슬람세력이 다시 인도를 압박하던 13세기 경 이슬람세력에게 밀려난 인도 힌두교 세력이 네팔로 대거 밀려들며 릿처비 왕조를 붕괴시키고 세운 것이 말라 왕조인데 이들 역시 토착문화와 힌두·불교문화의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네와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간다. 카트만두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말라 왕조는 1484년 카트만두, 랄리트푸르(파탄), 박타푸르의 세 왕국으로 분열되었는데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카트만두의 역사유적지들 대부분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네팔 서부의 구르카(Gurkha) 지역 산기슭에 세워졌던 샤 왕조는 처음엔 작은 분파에 불과했지만 점차 세력을 확대해 18세기에는 카트만두 분지의 3왕조를 무너뜨리며 통일왕국을 세우게 된다. 네팔의 정복군주라 할 수 있는 프리트비 나라얀 샤는 1472년 구르카의 왕이 되기 전부터 카트만두 분지를 탐냈는데 1745년 처음 승리를 거두면서 카트만두의 북서쪽에 있는 누와코트를 점령했다. 그로부터 몇 차례의 패배와 승리가 이어졌지만 마침내 카트만두를 침공한지 23년만인 1768년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완강한 국수주의자였던 프리트비 나라얀 샤는 자신의 왕국을 보호하고 교역에 있어 좀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외국인이나 선교사들이 네팔에 들어올 수 없도록 쇄국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네팔은 1951년까지 쇄국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의 계승자들은 네팔 왕국을 점차 확장시켜 국경선이 카슈미르와 티베트 그리고 인도 동부의 시킴까지 뻗어나갔지만 1792년 티베트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영토 확장이 중단되고 말았다. 구르카 왕국은 전통적으로 전쟁과 영토 확장의 대가로 군인이나 장교에게 토지를 하사했는데, 테라이(남부 저지대) 지역이 늘 우선 수위였다. 티베트와의 전쟁으로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이번에는 인도를 넘어 네팔로 밀려들어오는 서구 세력(영국 동인도 회사)과의 치열한 분쟁이 시작되었다. 1810년 네팔과 영국은 전쟁에 돌입했는데 처음엔 험준한 지리에 익숙치 못한 영국군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결국 네팔은 무기의 질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던 영국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샤 왕조는 점차 밀려드는 서구 세력(영국)에 맞서 1814년에서 1816년까지 네팔 전쟁, 이른바 구르카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네팔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격렬하게 저항했던 구르카 병사들조차 패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네팔은 비록 영국에 의해 완전히 식민지화되는 수모는 피할 수 있었지만 영토를 할양하고 영국주재관을 두게 되었다. 그 결과 네팔의 행정·교육 등 많은 분야에서 영국식 문화가 이식되었다.(샤 왕조와 구르카에 대해선 “존 버뱅크, 권태경 옮김, 『네팔(큐리어스 시리즈 46)』, 휘슬러, 2005, 28쪽 참조”.)


매연과 교통체증 그리고 민주공화국으로의 변신
네팔·히말라야 문화기행의 첫 번째 일정은 카투만두 시내에서 서쪽 9시 방향으로 2㎞쯤 떨어져 있고,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대략 2000년 이상) 불교사원 스와얌부나트(SwayambhuNath)였다. 카트만두 국제공항에서 스와얌부나트로 가는 길은 카트만두 시내를 관통해야 하는데 작은 분지에 몇 년간의 내전을 거치는 동안 급작스럽게 인구가 팽창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카트만두는 교통지옥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교통지옥이다. 몇 해 전 울릉도를 다녀오면서 산비탈 고갯길을 쌩쌩 내달리던 울릉도 버스 기사 아저씨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고난도 운전기술을 선보인다고 했었는데 네팔 카트만두의 운전기사들에 비하면 울릉도는 ‘새발의 워커’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우리가 탄 버스는 30인승으로 한국에서는 중형버스에 해당하는 크기인데 네팔 현지에서는 이런 버스 보기가 쉽지 않다. 이유는 도로 사정이 너무 열악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버스는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네팔에 바다가 있는 곳은 유일하게 네팔 국기(國旗)뿐인 전형적인 내륙 국가이다. 네팔 국기는 특이하게도 두 개의 삼각형이 포개진 모양인데 이것은 고대 힌두교의 신들이 사용한 삼각형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가운데 그려진 달은 평화를 상징하고, 태양은 빛, 적색은 네팔, 청색 테두리는 바다와 하늘을 나타낸다. 이처럼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인 탓에 거의 대부분의 물류가 인도와 중국을 통해서 수입되고 있는데 석유는 거의 전량이 인도산이라고 한다. 가뜩이나 품질이 떨어지는 석유가 네팔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려는 중간 상인, 트럭 운전기사의 손을 타며 이물질이 섞여서 더욱 질이 낮아지게 되는데 그런 탓에 분지라 쉽게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는 카트만두 시내는 매연으로 찌들어 있었다. 그나마도 인도에 석유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간혹 석유 공급이 끊긴다고 한다. 네팔은 여전히 국제원조에 의지해 살아가는 나라이기도 하다.


카트만두를 히말라야 근방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던 우리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희뿌연 안개처럼 매연으로 가득한 거리는 우리나라의 5~60년대 거리 풍경과 비슷하다고 함께 간 어르신들이 말한다. 스와얌부나트 가는 길옆에 어떤 이들이 커다란 플랜카드를 내걸고 모여 있어서 저들이 뭐 하는 거냐고 현지가이드인 아눕 씨에게 물었더니 맞은편에 보이는 큰 건물은 네팔 국회의사당인데 그 앞에서 시위하고 있는 거라고 설명한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현재 네팔은 오랜 왕정을 끝내고 새롭게 민주공화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 달리는 버스 안에서 본 네팔 국회의사당의 모습이다. 네팔 국회의사당은 중국에서 건립해주었는데 네팔의 도로들 중 상당수가 외국에서 무료로 만들어준 것들이기도 하다.


왕정체제에 반대한 민주화 시위는 1979년 전국 규모로 이어졌고, 1989년부터 반정부 시위가 빈발하면서 1990년 네팔의 왕정이 종식되고 입헌군주제가 수립되는 민주화가 있었다. 그러나 개혁은 더뎠고, 이에 불만을 품은 마오주의 반군들이 1996년부터 반정부 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2001년엔 비렌드라 국왕 일가가 왕궁에서 무참히 살해되는 의문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인 가넨드라 국왕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넨드라 국왕은 2002년 의회를 해산하고 2005년엔 군사쿠테타로 전권을 장악하며 과거로 회귀하려 들었다. 그러나 네팔 국민들과 마오이스트 게릴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며 결국 2008년 왕정이 폐지되면서 현재의 네팔연방민주공화국이 되었다.


제헌의회선거가 실시되면서 2009년 마오주의 반군세력이 정권을 잡아 현재 네팔의 국회의원 601명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다. 현재 네팔은 3개의 주요 정당을 포함해 21개의 정당이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는 중이다. 16차례의 선거 끝에 선출된 잘나라스 카날 총리가 6개월여 만에 물러나고 지난 8월 바타라이가 새 총리로 선출되었고, 11월초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수습단계에 들어섰지만 네팔의 정치적 미래는 카트만두의 뿌연 매연과 교통체증처럼 아직 예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트만두를 비롯해 네팔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친절했으며 활기가 있어 보였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곳에 네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카트만두에는 집집마다 가장 높은 곳에 거룩하게 여기는 신상을 모셔두고 기도하는 작은 사원을 마련해 두고 있다. 사람들은 곳곳마다 신상을 세워놓고 붉은 염료와 주황색 꽃잎으로 장식해두고 있는데 이곳 네팔 사람들은 하루의 시작을 신상 앞에서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는 참배의식으로 시작한다.


네팔의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 - 숴염부나트(Swoyambhu Nath)
얼마를 갔을까 어느덧 언덕으로 오르는 비좁은 골목길이 나타나 올라가다 보니 목적지인 스와얌부나트에 도달했다. 동남아 불교사찰들 중에는 ‘몽키 템플’이라 불릴 정도로 원숭이들이 많은 곳이 제법 있는데, 스와얌부나트 역시 원숭이들이 많아서 이른바 ‘원숭이 사원’이라 불린다. 인도의 간디는 ‘한 나라의 위대성과 그 도덕성은 동물을 다루는 태도로 판단될 수 있다’고 했는데 네팔 사람들은 특별히 동물을 집에 두고 기르면서 애완한다고는 할 수 없어도 길거리의 동물들을 보면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 없이 너무도 편안해 보였다. 아마도 힌두와 불교문화의 영향 때문일 텐데 환생을 믿는 사람들이다 보니 먹을 것이 있으면 동물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주는 풍습이 있기 때문에 원숭이들을 비롯해 동물들이 사람을 자기들 친구쯤으로 여긴다. 스와얌부나트에 들어서기 전 현지 가이드 아눕은 사람들에게 사원에 들어서면 원숭이가 많은데 이곳 원숭이들은 남자들은 좀 무서워하지만 여자와 아이들은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안경이나 모자를 주의하고, 특히 원숭이들이 보는 앞에서 먹을거리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빼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스와얌부나트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이자 마크 어빙 등이 지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도 당당히 수록되어 있는 세계 건축물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탑(塔)이라고 하거나 탑파(塔婆)라고 하는 불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은 인도의 스투파에서 나온 말(梵語)을 한자로 옮긴 것인데, 스와얌부나트는 거대한 티베트 불교식 스투파가 특히 유명하다. 스와얌부나트로 오르는 365개의 계단 상층부에는 거대한 금강저(Dorjee)가 놓여있고, 그 맞은편에 티베트 불교식 스투파가 거대한 몸체를 드러내고 하얗게 빛나고 있다. 이곳 사람들 중 불덕을 쌓고 싶은 이들은 시주를 통해 이 스투파에 하얀 칠을 하거나 장식을 덧대는데, 지름이 100m에 이르고, 높이가 36m로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식 스투파에서 흔히 보게 되는 인간의 마음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통찰의 영안(靈眼)’인 제3의 눈이 양미간(兩眉間)에 그려져 있다.



▶ 카트만두의 초록색 언덕에 피어난 하얀 연꽃. 숴염부나트



스와얌부나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하는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이지만 민간에 유래되는 전설에 따르면 본래 이곳은 언덕이 아니라 호수였다고 한다. 호수 한 가운데 섬에 피어난 연꽃에 어느 날 대일여래(大日如來, Mahāvairocana, 摩訶毘盧遮那)가 나타나는 상서로운 일이 생기자 문수보살이 대일여래에게 바치는 스투파를 만든 것이 유래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본래 이 호수에 살던 거대한 검은 뱀의 악행에 시달리던 마을 주민들을 안타깝게 여긴 문수보살이 가지고 있던 검으로 초바르 산을 둘로 가르자 괴물은 호수와 함께 사라지고, 사람들이 살기 좋은 비옥한 카트만두 분지가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략 3만년 쯤 전에는 이곳이 호수였다고 하니 오래 전에 있었던 자연 현상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신화와 전설이 된 모양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스투파와 경내를 참배할 때는 반드시 시계 방향(오른쪽)으로 돌아야 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오래된 전통으로 불교경전에 제자가 부처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존경심을 표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와 함께 동행한 현지가이드 아눕은 심장이 있는 왼쪽은 사랑하는 이에게 주고, 오른쪽은 신에게 내어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나름 낭만적인 해석을 내놓아 동행한 여성분들의 찬사를 받아내기도 했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어 보인다. 경내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사원답게 다양한 건물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추가되며 세워졌는데 사찰의 입구부터 각종 기념품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어 한 사람 당 200루피 쯤 한다는 입장료를 안 내고 싶은 사람은 스리슬쩍 섞여 들어가도 알아채지 못할 듯 싶다. 금강저가 놓인 자리 옆에는 전망대가 있는데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날씨만 좋다면 네팔 시내가 잘 보일 듯 싶었지만 우리가 도착한 날은 안개인지 매연인지 때문에 시내 전망은 보기 어려웠다. 처음엔 정신이 없어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차근차근 건물들을 둘러보며 생각해보니 한국의 사찰에서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大雄殿) 역할을 하는 것이 이곳의 스투파가 아닐까 싶었다. 13세기까지 네팔의 가장 중요한 불교성지였던 스와얌부나트이지만 15세기 무렵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가 후에 다시 건립되었다고 한다.


▶ 숴염부나트 스투파의 주변으로 마니(Mani)차가 있다. 내부에 경문을 인쇄한 종이를 넣을 수 있고 한 바퀴를 돌리면 그 불경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쌓인다고 믿는다. 휴대용으로 소형 마니차도 있다.



스와얌부나트를 내려오니 오랜 비행에 지친 탓인지 모두가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숙소인 하이야트 리젠시는 20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으니 금방 들어가 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과연 숙소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아마도 네팔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뜻을 알고 있으리.


▶ 숴염부나트의 유명한 대형 금강저 사이로 바라본 카트만두 시내 전경과 전망대에 선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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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1

-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일번지 포카라에 들어서는 초입에서 바라본 마나슬루 


탈출인가, 출장인가?
11월 18일(금) 아침에 네팔 카트만두로 떠나 11월 26일(토) 새벽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오는 7박9일 일정의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은 새얼문화재단이 기획하고 있는 힌두·불교문화권 탐방 시리즈의 사실상 두 번째 일정이다. 인도는 이미 한 차례 다녀왔고, 아마도 다음 기행의 목적지는 티베트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인도 기행은 재단의 다른 분이 수행하고 다녀왔는데 어쩌다보니 이번 네팔 기행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가 수행하게 되었다.


2011년은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한 해였다. 2009년 8월부터 월간 <인물과사상>에 매월 혹은 격월로 「현대일상의 지배자들」이란 연재를 시작했다. 기업문화 혹은 기업을 중심으로 한 변화와 혁신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고,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에 대해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내용인데 매월 100매에서 120매가 되는 글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탓이었겠지만 올 연초에는 피로가 겹친 탓에 면역력이 떨어져 그만 대상포진에 걸리고 말았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며칠씩 회사를 결근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 연평도 포격 사건까지 벌어져서 마약 성분이 들어간 진통제를 먹으며 연평도 주민 돕기 운동을 위해 연평도 현지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가정적으로는 결혼 10년이 지나도록 그야말로 천신만고(千辛萬苦)한 노력에도 쉬이 들어서지 않던 아이가 태어나 첫 돌을 지내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상황이었던 터라 직장과 가정, 거기에 부수적으로 연재하던 원고까지 겹치면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져 있었다. 그런 일들이야 남들도 살면서 겪어내는 수고로움이었을 터이니 나만의 괴로움이라 말할 순 없어도 거기에 더해 내 자신이 자초한 괴로움들마저 있어 올해는 청소년기를 제외하고 내 생애에서 살아내기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이런저런 피곤함과 삶의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네팔·히말라야 문화기행에 굳이 동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11월 18일 출국하기 전 날까지도 내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계간 『황해문화』의 최종 마감 원고를 붙들고 있었는데 편집장으로서 떠나기 전 최종본까지 살펴야 했기 때문에 결국 출발 12시간 전에야 부랴부랴 여행용 가방을 꺼내 옷가지를 넣었다 빼다를 반복하며 호들갑을 떨어야 했다. 그런 부산함 덕분에 어딘가 떠나기 전의 여행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여행의 설렘은 내겐 대단한 사치였고, 당장 네팔의 현지 기후가 어떤지 제대로 알아볼 시간마저  없어 트위터에 11월 현재 네팔 기후가 어떤지 대놓고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네팔에 다녀온 어떤 이가 네팔의 11월은 한국의 초가을 날씨라 다니다보면 도리어 더울 수 있고, 일정 중에 포함된 룸비니 같은 곳은 초여름 날씨에 가까우니 여름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얻었다. 만약 그 조언이 없었더라면 7박 9일의 일정이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을지…. 부랴부랴 여름옷 한 벌을 챙겨 넣을 수 있었다.


새얼문화재단은 1년에 한 차례씩 국내 역사기행과 해외 문화기행을 떠나는데 국내 역사기행은 대략 100여명 안팎의 대규모 인원이 2박 3일의 일정으로 함께 먹고 자며 이동하면서 국내의 여러 역사 유적들을 찾아간다. 이에 비해 해외 문화기행은 경비와 일정 문제 등으로 국내 역사기행에 비해서 비교적 소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행사이긴 하지만 참가인원은 여행지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서도 유동적이다. 그러나 이번 네팔·히말라야 기행은 처음부터 30명 이내로 인원 제한을 두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처럼 인원 제한을 두게 된 것은 네팔 현지 사정이 그 이상의 인원이 함께 여행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을 만큼 불편한 탓이 컸다. 결국 나와 한국 가이드, 현지 가이드 포함해 모두 26명의 인원이 이번 문화기행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하게 되었다.

 


부대끼는 마음을 뒤로 하고 9시 45분에 출발하는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였다. 일행들을 먼저 나와 영접한다고 내 딴엔 일찍 출발해 도착했는데도 공항 장기주차장에 주차한 뒤 3층 출국장 만남의 장소를 찾지 못해 약간 헤맨 탓에 약속장소에 가보니 이미 많은 분들이 도착해 있었다. 네팔로 출국하기 전 휴대폰 로밍에 대해 문의하고,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며칠 전 구입한 네팔 안내 책자를 펼쳐들었다. 내가 구입한 책은 한국의 랜덤하우스가 일본의 다이아몬드 빅사와 출판계약을 맺어 한국판으로 펴낸 <세계를 간다> 시리즈의 네팔 편이었는데, 원래 여행안내서로 가장 유명한 론리플래닛 시리즈의 네팔 편을 구입하려고 찾아보다가 론리플래닛 시리즈가 편집이나 내용 구성이 매뉴얼스러운데 비해 종합적으로 보아 <세계를 간다> 시리즈가 내게는 좀더 적합할 듯 싶어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결과는 비교적 만족스러운 편이었는데 <세계를 간다>가 한국이나 일본의 여행자 스타일을 좀더 고려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네팔, 히말라야 그리고 마나슬루
나에게 네팔이란 나라는 아버지의 꿈이 서린 곳이다. 처음 네팔이란 나라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꼭 한 달 간격으로 잇따라 세상을 떠난 1979년 겨울부터 이듬해 1980년 연초까지 그 해 우리 집안은 사실상 풍비박산이 나있었다. 당시엔 아직 철없던 어린 시절이라 앞으로 닥쳐올 내 앞의 삶이 지닌 무게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었다. 그 무렵 내 눈에 띈 것은 책꽂이 한 구석에 꽂혀 있던 김정섭이 지은 『집념의 마나슬루』란 책이었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 세계에서 8번째로 높은 마나슬루(8,163m)가 히말라야 14좌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이고, 8,000m급 이상 봉우리 중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된 산은 안나푸르나였다. 에베레스트에 이어 세게 제2위의 높이를 자랑하는 K2는 난공불락의 어려움으로 인해 악명을 떨친 탓에 유명하고, 낭가파르바트는 목숨을 건 산악인들의 도전이 빛나는 히말라야 등반 역사상 가장 많은 산악인들을 집어 삼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비해 마나슬루는 그렇게 주목받을 만한 산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나슬루는 한국과 일본의 산악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산이다. 다만 한국의 산악인들에겐 집념과 도전의 산으로, 일본의 산악인들에겐 영광의 산으로 기억된다.




마나슬루(Manaslu)는 산스크리트어로 ‘영혼’이란 뜻을 지닌 마나사(Manasa)에서 나온 말로 ‘영혼의 땅’, ‘영혼의 산’이란 의미를 지닌다. 마나슬루가 처음 산악인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네팔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1950년 영국의 W.틸만(H.W.Tilman) 등반대가 마나슬루 일대를 정찰하면서부터였다. 네팔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뒤 서구의 산악인들은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스코트 원정대가 펼쳤던 극지원정 경쟁, 올림픽을 통한 스포츠 경쟁이 그렇듯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히말라야 초등 경쟁은 각국의 산악인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벌이는 치열한 레이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은 경제적인 여유를 갖춘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알피니즘이란 말 자체가 애초에 서구에서 출현한 용어인 것처럼 그들은 알프스, 힌두쿠시, 알래스카 등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며 세계 알피니즘의 역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14봉 등반 경쟁에서도 역시 그들이 앞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영광을 상실한 영국은 특히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에 강한 집착을 보였고, 독일은 낭가파르바트(8,125m)에 줄기차게 도전했다. 독일이 낭가파르바트에 집착한 것은 아마도 세계 최초로 아이거북벽을 정복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의 경험과 역사가 배어나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티벳에서 보낸 7년>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에서도 가장 높은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산악인 힐러리 경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1953년 5월 29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존 헌트 경이 이끄는 영국 원정대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초모룽가)에 오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남성으로 태어나 현장 언론인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자신의 성정체성이 남성이 아닌 여성에 있음을 깨닫고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된 특이한 이력의 언론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쟌 모리스가 펴낸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여행』에 감격적으로 잘 묘사되고 있다. 쟌 모리스는 특파원으로 영국원정대를 동행취재하면서 힐러리와 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과정을 특종 보도하는 영광을 누리며 언론인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게 된다.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우리 앞의 낡은 박스 위에 앉은 저 두 사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우리 밖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날은 너무나 밝았다. 눈은 그지없이 뽀얗고, 하늘은 그지없이 푸르렀다. 대기는 아직도 온통 흥분으로 들끓는 듯 했다. (쟌 모리스, 박유안 옮김,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 여행1-에베레스트부터 성전환까지』, 바람구두, 2011, 22쪽.)



쟌 모리스가 타전한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 뉴스가 영국에 도착한 것은 때마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날(1953년 6월 2일)이었다. 영국 전역은 새로운 여왕의 등극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접하며 열렬한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히말라야에 등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처럼 히말라야 등정이란 사건은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할 수 있는 뉴스라고 생각했기에 국가적인 지원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역시 태평양전쟁의 패전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에 성공하면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분으로 마이니치(每日)신문사의 후원을 받은 일본 산악회가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마나슬루에 원정대를 파견했다. 마나슬루에 대한 사전정보가 부족했던 일본원정대는 초기엔 틸만 원정대가 촬영한 한 장의 사진만으로 시작해 마나슬루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했고, 등정 가능한 코스를 여러 차례의 사전 원정으로 파악한 뒤 1956년 유코 마키가 이끄는 12명의 대원과 20명의 셰르파로 구성된 등반대가 본격적인 마나슬루 등정에 나서게 된다. 이들 원정대는 같은 해 5월 9일 토시오 이마니시와 셰르파 갈첸 노르부, 두 명이 정상 공격에 나서 마침내 마나슬루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록 우리와는 민족적 감정이 뒤얽혀 있는 일본원정대에 의한 마나슬루 초등이었지만 이것은 서구 산악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히말라야 8,000m급 초등 경쟁에 동양의 산악인들이 뛰어들어 이룩한 최초의 쾌거였다. 이후 중국원정대가 1964년 시샤팡마(8,046m)를 초등(시샤팡마는 네팔이 아니라 티베트, 중국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구 원정대가 도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14좌 봉우리 중 두 곳을 일본과 중국이 초등하는데 성공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또한 당시 일본 원정대의 마나슬루 초등을 도우며 함께 했던 셰르파 갈첸 노르부는 1955년 프랑스 원정대와 함께 마칼루에 오른 데 이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8,000m급 2개봉을 초등한 사람이 되었다. 당연히 일본은 이들의 마나슬루 등정을 범국가적으로 축하했다.




16명의 한국원정대를 집어삼킨 마나슬루

 

일본은 이후에도 마나슬루와 끈질긴 인연을 이어가는데 1971년 마나슬루 북서릉을 오르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고, 1974년엔 동릉을 통해 일본의 여성원정대 대원 3명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하면서 여성 최초의 8,000m 봉우리 등정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남기는 등 마나슬루는 ‘일본의 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일본과 깊은 인연(일본의 등산용 석유버너 중 마나슬루의 이름을 딴 제품까지 있었을 정도)을 맺게 된다. 우리나라가 히말라야 등정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은 일본보다 뒤처진 1962년 경희대 산악부가 다울라기리 2봉(7,751m)에 대한 정찰등반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때는 사실상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이 완료되어 가던 시점이었는데 이후 김정섭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가 마나슬루에 도전하기까지 1971년 한국산악회가 추렌히말(7,371m)에 등반한 것이 우리가 경험한 히말라야 원정의 전부였다.


한국의 마나슬루 제1차 원정 당시 김정섭은 직접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뒷받침하면서 실질적으로 원정대를 꾸린 당사자였다. 그러나 제1차 마나슬루 원정대는 김정섭의 동생으로 원정대에 참여한 산악인 김기섭을 불의의 사고로 읽은 뒤 철수하고 만다. 김기섭은 한국인 최초의 히말라야 희생자였다. 『집념의 마나슬루』는 자신이 빠진 채 진행되었던 제1차 마나슬루 원정에서 동생 을 잃은 슬픔과 비탄 속에서 동생의 시신을 찾아 고국으로 가져오고 제2차 마나슬루 도전에 나선 제2차 원정대의 기록이다. 그러나 제2차 원정마저 1972년 4월 10일에 일어난 눈사태로 인해 김호섭, 송준형, 오세근, 박창희와 함께 참여했던 일본 산악인 야스히사를 비롯해 셰르파들까지 모두 15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1937년 세계9위봉인 낭가파르바트(NangaParbat, 8,125m)에서 독일 원정대원 16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이래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 규모의 대형 참사였다.


그는 1차 원정에서 동생까지 잃은 실패 이후 절치부심하며 2차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 등반하며 겪어야 했던 일들, 그리고 다시 조난과 실패, 철수에 이르는 과정을 비교적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심정이야 피를 토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런 슬픔을 딛고 일어서게 만든 힘, 그 힘을 집념이라고 표현한 것이리라. 『집념의 마나슬루』에는 그가 준비한 또 한 차례의 원정, 제3차 원정계획서를 책 말미에 게재했는데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초등학생 시절엔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란 말도 흔히 들을 수 없던 시절이었던 터라 그의 3차 원정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다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단지 등정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애와 네팔의 현지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어서 그 내용에 빠져 읽었을 뿐이었다. 이후 김정섭은 1972년 2차 원정과 1976년의 3차 원정에 직접 대장으로 참여해 당시 7차례 꾸려진 히말라야 원정 중 5차례 원정에 관여한 국내 히말라야 원정의 실질적인 개척자로 활동했다. 김기섭, 김호섭, 김예섭, 세 동생을 히말라야 마나슬루에 묻은 맏형 김정섭은 1974년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될 세 번째 도전에 나섰지만 마나슬루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거듭되는 악천후로 인해 6,800m에서 통한의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만 했다. 마나슬루는 그를 끝끝내 품어주지 않았다(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김정섭 씨는 미국 뉴욕으로 이민 가서 현지에서도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사를 정리하는 원고를 집필하며 2002년엔 다시 마나슬루로 가서 동생들의 시신을 찾아올 계획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나마스떼(당신 안에서 신을 봅니다)’란 네팔의 전통 인사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지만 정작 이 책이 그 시기에 어째서 우리 집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보다 더 세월이 흐른 뒤 돌아가신 아버지의 앨범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이 책이 왜 우리 집에 있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남긴 앨범에는 한 가닥 자일에 의존해 산을 타고 있는 당신의 모습, 빙벽을 기어오르는 모습들이 담겨져 있었다. 나중에야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산을 좋아해 대학 산악부에서 활동했고, 김정섭 씨 형제 가운데 어느 분과 친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의 형제들과 함께 산에 다녔고 마나슬루 등반팀에 합류하라는 제안도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이 분들과 함께 히말라야에 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물론 할아버지의 만류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1차 원정이 있었던 1971년 무렵은 내가 이제 막 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어느덧 비행기는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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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내가 캠핑을 즐기는 까닭
요즘 나는 이중고, 아니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회사 일만 해도 종류별로 서너 가지가 넘는 데 6주마다 고정으로 돌아오는 칼럼 쓰는 일이 있고, 쓰기로 약속만 해놓고 제대로 시작도 못한 일거리가 서너 가지다. 거기에 내년엔, 내년엔 하면서 역시 마무리짓지 못한 논문이 남았다.

하나는 밥벌이용으로 꼭 필요한 일이니 절대로 줄일 수 없고, 칼럼 쓰는 일은 지역사회의 공익근무요원으로 차출된 셈이라 원고료가 거의 없다시피 한 일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못 하겠다고 하면 마치 적은 원고료 때문에 피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단 염려가 들었다.

한편으론 일을 줄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당장 처리해야 할 스케줄들이 줄지어 달려온다. 참다못해 탈출을 꿈꾼 것이 캠핑이었다. 캠핑이 등산과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는 등산이 어찌되었든 일단 산에 오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라면 캠핑엔 아무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도시를 벗어나 자연으로 잠시 삶의 근거를 옮기는 것에 더 큰 목적이 있다. 캠핑의 진정한 목적은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스포츠도 집을 들고 다니진 않는다. 우리는 본래 그러했던 것처럼 잠시라도 자연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숨을 쉬고 싶었던 모양이다.



* 10월의 가을밤, 침낭 밖으로 나오기가 점점 더 싫어진다. 셀시우스 침낭은 가격대비 정말 좋은 녀석이다. 그린색이 국방색 같아 보이는 것이 한 편으론 마음에 걸리지만 다른 한 편으론 오래봐도 질리지 않는 수수한 맛이 있다. 다만 한 가지 4면 개방이 안 된다는 것은 캠핑퍼스트 공구침낭에 비해 다소 약점이긴 한데 3면 개방해놓고 이불처럼 써도 별로 거추장스럽지 않다.

산다는 번거로운 일 혹은 존재 방식
‘산다(삶)’는 건 참 번거로운 일이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행위(실천 방식)’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존재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왜 사느냐? 어떻게 살 거냐? 그런 질문들이 따라오게 된다. ‘산다’는 건, 몸에 배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습관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말하지만 직장생활이 일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그 사람이 말하는 일의 태반은 ‘관계’, 인간관계 때문이다.

인간은 나무 위의 생활을 정리하고 지상으로 내려와 직립 보행을 하고, 자유로워진 양 손을 사용하면서도 비로소 문명이란 걸 일구게 되었다. 문명이란 인간이 네 발로 돌아다니는 동물과 달리 자유로워진 양 손을 이용해 산다는 것의 편리를 추구한 결과다. 이동을 양 다리에 전적으로 맡긴 대신 보행으로부터 해방된, 여분으로 얻게 된 앞 다리를 이용하면서 인간은 새로운 존재양식, 다시 말해 삶의 방식을 만들었다. 여분으로 얻게 된 앞 다리 두 개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삶의 편리, 문명을 일구기 위해 늘 손이 부족했다. 그래서 다른 앞 다리들을 사냥하고 포획해서 노예로 부리기 시작한다.

짧은 생각이다. 문명은 원시공산제부터 현대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름으로 사회적 삶의 양식을 구분해 부르지만 뭉뚱그려 말하면 나무에서 내려온 뒤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팔과 다리를 조직적으로 이용하고, 스스로도 그에 못지않은 대가를 지불하는 시스템 속에 살고 있다.



* 밤늦게 도착해 아침에 부랴부랴 카메라들고 몇 장 찍어본다. 벌여놓고 치우질 않으니 난민 캠프 같다.

캠핑에는 있다. 보이지 않는 많은 매력들.
비록 이미 문명 속에서 돈을 주고 구입한 장비들을 이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자연 속에 집을 짓고, 나무를 줍고, 직접 식사를 해결한다. 물론 이미 문명화된 행위들이긴 하지만 사회 속에서 자신을 한 번 돌아보면 실제로는 평생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거나 평생 해볼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 중 과연 몇 사람이나 직접 자기가 살 집을 지어볼 것이며 혹은 자신이 직접 긴긴 밤을 지새울 땔감을 준비하기 위해 장작을 팰 것인가. 하루 세 끼 중 몇 끼니나 아내 혹은 식당 아줌마의 손을 빌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자신의 끼니를 차려내는 일을 할까?

야영을 하기 위해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유명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한 시간은 도시에서라면 그다지 늦지 않은 11시 45분 정도 되었다. 3주 연속으로 건너 뛴 편집회의를 마친 시간이 8시 10분 정도 되었는데, 나는 처음부터 이번 주엔 기필코 떠나리라 결심하고 장비를 트렁크에 챙겨왔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만약 내가 펜션 같은 곳에서 자겠다고 생각했다면 연휴가 시작되는 목요일 이 시간의 출발은 감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지만 강원도 방향으로 나가는 길은 서울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엔 서울을 거치지 않는 서해안 방향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막히는 시간까지 계산해도 서해안쪽 자연휴양림이나 야영장을 가는 시간보다는 적게 걸릴 것 같았다. 예상외로 서울을 통과하는 것이 약간 난관이긴 했지만 서울 외곽으로 갈수록 소통이 원활해졌다. 유랑객과 달리 행락객들은 밤에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풍놀이라면 낮에 가야 할 터이니.


* 아침에 촬영한 유명산자연휴양림 주차장. 안개가 자욱하더니 낮이 되니 좀 덥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넓은 주차장이 잠시 후엔 정말 주차장이 된다.


캠퍼들의 성지(聖地), 유명산 자연휴양림
가평 유명산 자연휴양림은 서울 인근에 자리한 때문인지 자연휴양림으로 조성(1989년 개장)된 지 제법 오래되었다. 해발 862m로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고, 참나무가 주종인 천연림과 낙엽송, 잣나무 등의 인공림 지대가 한데 어우러져 아늑한 풍광이고, 갈수기에도 제법 수량이 풍족한 계곡이 있다. 무엇보다 자생식물원과 널찍한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서울 근교에서 자연을 즐기고 싶은 행락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유명산이 야영생활을 시작하는 초보자들부터 오래 경험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즐겨 찾고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야영객의 성지(聖地)다. 이처럼 인식된 원인은 시설이 빼어난 탓보다는 휴양림 입구에 오토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합소 오토캠핑장이 있고, 휴양림 내에도 넉넉한 규모의 오토캠핑장과 휴양림 데크들이 있는데다가 이 모든 곳들이 야영객들로 가득해도 인근에 중미산, 용문산 등의 다른 대안을 찾기 쉽기 때문이다.

유명산 자연휴양림은 세 군데에 야영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한 곳은 휴양림 초입이고, 그리고 500m 정도 이동한 뒤 중턱 부분에 한 곳이 더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오토캠핑장이 설치되어 있다. 워낙 늦은 시간에 도착한 탓도 있지만 오토캠핑장은 피하고 싶었다. 단독캠퍼에겐 가족 단위 오토캠핑장의 부지런함과 친절함도 때론 피곤한 일이다. 초행길이라 멋모르고 가장 낮은 곳에 사이트를 구축했는데 새벽녘까지 새로 도착하는 팀들이 있었고, 다음날 아침에 좀더 높은 곳으로 가지 않은 것을 약간 후회했다.


* 데크에서 1박하는 비용은 쓰레기 봉지값 포함해서 10,000원 정도다. 쓰레기 봉투가 떨어졌다고 해서 산 밑 매표소까지 나가 쓰레기 봉지를 직접 사왔다. 사진에서는 아직 정리하기 전이라... ㅠ.ㅠ 아마 왕복 기름값까지 포함해도 웬만한 펜션 하루 숙박비 정도면 1박 2일 캠핑의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행락객과 야영객
다음날 느지막한 아침을 마친 뒤부터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행락객들이다. 앞서 등산과 야영을 구분한 것처럼 행락객(行樂客)과 야영객(野營客)도 다르다.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자고 부르짖고, 매너를 따지는 캠퍼들이 많기 때문에 당일치기 야유회를 나온 행락객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일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행락객을 폄하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우리가 흔히 ‘아줌마’라고 부르는 그들이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어머니, 아내인 것처럼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행락객이나 야영객이나 모두 손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야영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행락객에 비해 아직 소수이고, 말 장난 같지만 ‘삶의 여유’를 찾겠다는 삶의 여유가 그나마 있는 사람들이 좀더 많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만 야영의 사전적 의미가 자연에서 하루라도 자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큰 차이다. 숲 속이든 강변이든 도시가 아닌 자연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건 남다르다. 이건 말로 설명하기 참으로 어려운 느낌이지만 도시의 밤이 낮의 연장이라면 자연 속의 밤은 말 그대로 밤이다. 촛불 하나도 엄청나게 밝게 느껴지고, 침낭에서 돌아눕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인공조명으로 빛을 잃었던 하늘엔 별이 가득하고, 나무 사이로는 촉촉한 이슬이 밤새 내린다. 운이 좋다면 반딧불이도 만날 수 있다.

낮에 단풍놀이 나온 행락객들은 그걸 알 수 없다. 관광버스가 토해낸 사람들은 다시 그와 같은 목적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등산로를 오르고, 인근 매점에서 청량음료를 사서 마신다. 산 밑의 음식점에서 파전에 동동주를 사먹고 부랴부랴 버스에 올라 집으로 돌아간다. 마치 평일에 출근하는 사람처럼 차량으로 붐비는 외곽도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것이다. 사회에서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또다시 같은 버스를 타고,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 함께 산에 오르고,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며 산다. 그, ‘산다는 번거로운 일’을 연장시킨다.

물론 나의 이런 정의가 탐탁치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캠핑동호회 정캠도 있고, 정모도 있고, 함께 사이트를 구축해서 즐기는 맛도 틀림없이 존중해야 하는 삶의 방식, 캠핑의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단독캠핑을 더 좋아하고, 선호하는지 말하는 것뿐이다. 한 번 캠핑을 나갈 때마다 무얼 더 챙겨야 하고, 무얼 더 줄여야 할지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 ‘편리’라는 욕심을 줄이고, 불편을 더 챙긴다. 설거지하면서 세제 한 방울 안 쓴다고 알아주는 사람 없고, 가까운 계곡 대신 멀리 있는 세면장까지 가는 걸음이 다소 힘들어도 자연 앞에서 늘 손님의 자세로 왔다간 흔적 없이 세상 속 내 자리로 돌아간다.



* 텐트가 작으니 살림살이 정리가 안 된다. 오른쪽에 발가락이 찬조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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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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