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o the Celtic Folk - Various Artists | EMI(2005년 9월)






고대 유럽의 정복자였던 켈트인들은 신발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그들이 남긴 유물 가운데는 신발 모양으로 제작된 상징품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아마도 그들 자신이 오랜 세월 떠돌아다니며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오랫동안 조상일지도 모른다고 배워온 유목민족인 우랄알타이어족이 낯선 만큼 서구 유럽인들에게도 실질적으로  켈트인들은 그만큼 낯선 종족이어야 맞다. 하지만 그들에게 켈트인 혹은 켈트적인 것은 낯설지 않은 듯 보인다. 우선 켈틱이라는 것이 지역적으로는 아일랜드의 전통 속에 살아있다고 믿는 탓이고, 이들은 18~19세기 아일랜드의 대기근 등 대체로는 가난 때문에 신대륙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성 패트릭데이가 아이리쉬계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과거 없는 국가의 전통이 된 것처럼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루한 나라였던 아일랜드의 음악은 미국 음악의 원류를 이루게 되었다. 온갖 잡다한 흐름의 음악들이 흘러든 미국 대중 음악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흐름을 이룬 두 가지 음악을 고르자면 아일랜드 음악(다시 말해 켈틱 포크 뮤직)과 흑인 음악이다. 물론 전자는 주로 백인음악이 되었지만, 이 두 음악의 흐름이 서로 얽히고 섥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니 우리들 자신도 즐기고 있는 서구 대중 음악의 원류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Into the Celtic Folk"라는 이름의 이 앨범은 말 그대로 켈트 음악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이 순간에도 우리가 수많은 아일랜드 출신의 음악인들, 예를 들어 U2나 크랜베리스, 밴 모리슨, 시네이트 오코너 등과 같은 독특한 음악세계를 즐겨 듣기도 한다. 물론 이들이 전통 켈트이거나 아이리쉬 포크라 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음악세계를 이루는 밑바탕에 켈트 음악이 녹아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켈트 음악은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어왔다. 예를 들어 윤심덕이 불러 우리나라 최초의 파퓰러 히트곡이랄 수 있는 "사의 찬미"는 켈트 전통 음악인 "The Anniversary Waltz"이기도 하다.


▶ 켈틱 포크 그룹 알탄(Altan)
 

켈틱포크음악의 특징은 발랄한 장조 음악이든, 음울하게 들리는 단조 음악을 불문하게 일단 매우 소박하게 들리는 단선율(monophony)한 스타일이기도 하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 종종 듣게 되는 그레고리오 성가나 르네상스 음악과 흡사한 느낌을 켈트 음악에서 받는 것 역시 그런 까닭에서이다. 켈트 음악을 담은 앨범 표지에서 안개 자욱한 호수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나룻배 같은 이미지들이 즐겨 사용되는 까닭도 그와 같은 켈트 음악의 독특한 느낌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앨범에선 전통적인 포크 음악은 물론 비교적 다양한 형태의 현대화된 켈틱 포크 음악들을 만날 수 있다. 이 방면의 음악에 귀를 적시고 싶은 데 적당히 입문할 앨범을 구한다면 이 앨범으로 시작하는 것이 괜찮은 선택일 듯 싶다. 



 1. Planxty Irwin - Dubliners
 2. The Town I Loved So Well - Phil Coulter Feat. Luke Kelly
 3. The Contender - Phil Coulter Feat. Tommy Fleming
 4. Down By The Sally Garden - Clannad
 5. From Clare To Here - Phil Coulter Feat. Ralph Mctel
 6. Star Of The Country Down - Paddy Reilly
 7. Hare In The Heather - Wolfe Tones
 8. The Anniversary Waltz - fureys
 9. Ta Mo Chleamhnas a Dheananh - Altan
 10. Moll Dubh A Ghleanna - Altan
 11. The Battle Of Clontarf - Jim McCann
 12. Spirit Breathe - bohinta
 13. Paint - bohi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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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1987년 그의 노래들이 해금된 이후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대수는 여전히 가수라기 보다는 기인적인 풍모,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일반인의 정서에 부합하는 가수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가수로서 활동한지 30년이 지난 2001년 10월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두 번째 콘서트를 열 수 있었으리라. 머리에 꽃을 꽂은 청년이 초로의 중년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머리에 꽃을 꽂은 사람은 그저 미치광이였을 뿐이다. LP시절 만났던 그의 첫 앨범을 CD로 다시 만났다. 청년 한대수의 노래를 당신에게 권해본다.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여 나의 목을 간질여 놀리면서 밖에 보내네
난 가겠소 나는 가겠소 저 언덕 위로 넘어가겠소
여행 도중에 처녀 만나 본다면 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오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렸을 적 대학 다니던 삼촌이 사들였던 LP중에는 한대수가 가방을 어깨에 짊어매고 초가집이 있는 시골 밭두렁길을 걸어가는 사진으로 장식된 그의 1집 앨범 <멀고먼-길>이 있었다. 구닥다리 턴테이블이었지만 LP음반을 통해 처음 접했던 한대수의 음악은 어린 마음에도 충격이었다. 그 무렵 나는 송창식의 최대히트곡 중 하나인 <피리부는 사나이>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뛰노는 어린아이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송창식이 향군법 위반 혐의로 끌려가면서
(그때의 충격으로 나는 민방위비상소집도 열심히 나간다) 뭐 다른 노래 들을 만한 것이 없나 삼촌의 LP창고를 뒤적이다 발견한 것이 한대수의 <멀고먼-길>이었다.


출처: 월간사진 http://www.monthlyphoto.com

개인적으로 한국 포크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뮤지션 세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송창식, 한대수, 김민기라고 생각하는데, 언급한 순서는 사실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난 순서이기도 하다. 시인에 빗대어 하는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송창식이 서정주에 가깝다면, 한대수는 김수영, 김민기는 신동엽의 흐름과 근사치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송창식은 번안곡으로 시작해 트로트와 국악을 그의 음악에 접맥했다면, 한대수는 밥 딜런류의 사실적인 포크에 한국적인 정서를 가미했고, 김민기는 서구적 포크의 전통을 한국적 현실에 맞춰 계승한 인물들이다. 이들 세 사람은 포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싱어송라이터의 개념에 부합하는 인물들이기도 했다.


어쨌든 송창식에서 한대수로 처음 넘어갔을 때 한대수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뭐, 이렇게 노래 못하는 가수가 다 있냐?'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한대수의 보컬은 가수로서의 본격적인 트레이닝으로 다듬어진 목소리가 아닌 '날것'이었기 때문에 그동안(1977년 무렵까지, 무려 내 나이 8살 때까지) 내가 접해왔던 가수들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목소리가 언더그라운드로 묻히게 된 까닭 중 하나는 정치적인 금지조치 이외에도 당시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그의 보컬에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한대수'란 가수는 2집 앨범 <고무신> 마저 반체제적이란 이유로 금지되면서 더이상 노래를 계속하기 어려워진다. 그의 2집 앨범이 반체제적이란 지적을 받은 이유는 앨범 재킷 사진이 문제가 되었는데 높은 벽돌담 위 가시철조망에 놓인 고무신이 반체제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포크음악에 대한 체제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지자 결국 그는 노래를 접고, 모신문사의 사진기자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박광현 감독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배우 강혜정은 약간 모자라지만 때묻지 않은 동막골의 순수를 머리에 꽂은 꽃으로 표현한다. 동막골은 민족이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의 이념도, 정치도 사라진 가상의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유토피아로 상징된다. 그런 '동막골'에 불쑥 난입하게 된 전사들은 서서히 이들의 순수에 감화된다. 인민군 하사관 장영희(임하룡)의 명대사 "내레 꽃 꽂았습니다"는 이념과 정치, 증오와 분노를 넘어 사랑과 평화, 자연과 신비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적녹색맹인 수구보수세력들은 <웰컴 투 동막골>에서 친북의 색채를 읽었지만 이 영화는 서구의 1960년대 히피문화를 연상케하는 매우 복고적인 영화였다.



1960년대말 미국은 '꽃을 든 아이들(flower children)'이란 히피들을 중심을 기존의 제도정치와 문화에 도전하는 청년문화가 출현했고, 그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이 포크음악과 사이키델릭 록음악이었다.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 속에 갇혀있던 한국사회에도 자연스럽게 이들의 문화가 흘러들기 시작했다. 명분없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했던 당시의 청년들은 '반전, 평화, 사랑'을 구호로 1969년 8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열었고, 3일간 치러진 이 행사에는 50만명의 청년들이 모여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고, 마리화나를 피웠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는 조니 미첼, 크로스비. 스틸. 내시&영, 지미 헨드릭스, 제퍼슨 에어플레인, 산타나 등 당대 최고의 포크와 록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랐다.



미국으로부터 유입된 포크문화는 1968년 <트윈폴리오>에 의해 번안곡 형태로 반영되었다. 본래 <트윈폴리오>는 송창식, 윤형주, 이익근 트리오로 구성되었으나 이익근이 군에 입대해야 하는 바람에 송창식, 윤형주만의 '트윈'으로 출발했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은 한국 포크의 트로이카를 이루었지만, 이들이 노래했던 포크 음악가 히트곡들은 주로 번안곡 위주로 구성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단 한 장의 데뷔음반을 끝으로 해산한 <트윈폴리오>에서 이후 솔로로 독립하여 본격적인 포크음악을 시작한 송창식과 함께 한국에서 본격적인 포크음악의 출발, 한국적인 포크음악을 시작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을 때 우리가 먼저 떠올려야 할 사람은 '한대수'다.




한대수는 선교사였던 할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미국인 새어머니와 함께 살던 십대 시절엔 불량써클에도 가입하는 등 말썽장이이기도 했다. 사진가를 꿈꾸었던 그는 뉴욕의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하면서 밥 딜런, 도노반 등의 포크 음악에 깊이 매료되었다. 귀국 후에는 한국 청년문화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서린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노래를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TBC의 <쇼쇼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장발의 히피 청년이었다. <트윈폴리오>의 부드러운 포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한대수의 노래는 쉽게 이해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노래에 감동한 두 명의 여성 팬이 자청해 한대수의 콘서트를 열어주었는데 1969년 9월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열린 그의 공연은 한국 포크 음악의 진정한 시작을 알렸다.



그의 뒤를 이어 서유석, 양병집, 김민기 등이 출현했다. 그러나 파격적인 한대수의 풍모와 행동, 세태 풍자적인 노래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히피문화와 포크를 미국의 저질문화로 생각한 일부 사람들은 한대수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한대수의 1집에 실린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군사정권은 '물'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가 의미심장하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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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화와 예술 전방위적으로 살펴보고 기획하여 청탁하고,잡지를 만들고, 때때로 글을 쓴다. 그것이 나의 직업이다.  잡지(雜誌)쟁이... 그게 나의 직업이고, 나는 그 직업을 천직으로 여긴다.  

초등학생 때 나는 스파이가 되고 싶었다. 스파이가 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잘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든 관심을 가졌고, 잡학다식하여 초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퀴즈왕에 나가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스파이를 꿈꾼 아이가 자라서 퀴즈왕이라니... ^^;;;

스파이도 퀴즈왕도 해본 적이 없지만 대신에 현실적으로 나의 천성과 부합되는 일이 서양에서는 매거진이라 하고, 동양에서는 잡지라 부르는 매체의 편집장이 되었다. 매거진이란 말보다 잡지란 말이 이 매체의 성격을 실천적으로, 내용적으로 잘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매거진이란 말이 '탄창'이란 뜻도 가지고 있는 만큼 그 자체로 공격적인 느낌이 나는 반면 잡지란 말은 수동적이고, 한 편으론 천격(賤格)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나의 미적인 감각에도 어울린다.

어쨌든 나는 문학으로 출발해서, 미술,  음악, 사진, 영화, 만화에 두루 관심이 많은 편이다. 이 중에서 음악을 제외하고, 다른 한편으론 음악을 포함해서 저장되는 매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저장되지 않는 매체에 취약하다. 영화의 경우에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보다는 DVD나 비디오테이프로 보는 것을 좀더 즐기는 편이다. 반복해서 보고,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반복해서 들어야만 한다. 난 한 번도 천재적인 재능에 대해 부러워해본 적이 없으며, 그것을 높이 평가해본 적도 없다. 천재에게 필요한 것은 세 가지나 요구되기 때문이다. 일단 적절한 수명이 필요하고, 때를 잘 만나야 하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죽기 전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다면 천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때를 잘 만나서 다시 재확인되지 못한다면 천재가 남긴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사랑해주는 누군가 소수의 사람들이 없다면 그가 남긴 것이 어디에 남겨질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죽어버린 천재를 사랑하지만 살아있는 천재를 아끼지 않는 법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읽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연극이나 무용, 음악회 같이 일회성으로 끝나버리는 예술 장르에 대해서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하지만 한 번 보고도 오래도록 읽어낼 만한 천재적 자질이 없으므로 깊이 천착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어제 거의 몇 년만에 처음으로 연극을 봤다. 김민기의 <지하철1호선>을 몇 해 전에 보고 처음있는 일이다. 표가 생겼고, 표를 물릴 수 없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 본 것이지만 결론은 매우 재미있었고, 나름대로 감동적이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업인 염쟁이 일을 평생동안 해온 염쟁이 유씨가 자신의 마지막 전통 염습을 치르는 과정을 연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모노드라마였다. '죽음'을 다루기 때문에 무거울 것이란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도입과 전개 과정이 경쾌한 연극이었다.  



내가 연극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와 지근거리에서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 사람이 내 앞에서  '정색'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갑자기 다른 인격이 출현하는 사람이 두렵다. 그 사람과 친하면 친할 수록 정색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두렵다. 마치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아이처럼 친근함으로부터 버림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스파이가 나의 천직이 아니란 걸 알았다. 만약 내가 일관성 있는 인간으로 남들에게 비춘다면 그런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기대를 먹고 산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 당신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고 누군가 믿어주는 이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나에겐 가장 큰 보람이다.  

연극 <염쟁이 유씨>는 지난 2008년 연말부터 오는 3월까지 인켈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연극이다. 배우 유순웅 씨가 염쟁이 유씨를 연기하는데 배우의 마스크란 말 그대로 마스크란 생각이 들었다. 눈빛 하나만으로 그는 조폭(조폭 연기 할 때는 선글라스를 착용해서), 사기꾼 장례대행업자, 아들 역할까지 종횡무진 연기해낸다. 모노드라마인 탓에 장면 전환을 어찌할까 생각하며 보았다. 역에 맞는 적절한 분장이 필요할 테니까. 그런데 그런 처리 과정도 깔끔하다. 그리고 분장이 필요없을 만큼 배우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다른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요즘 막장드라마라고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해도 <아내의 유혹>이 인기라는데, 난 이 드라마를 보며 극중 주인공이 같은 얼굴로 나오는데 어떻게 상대가 그녀가 누구인지 몰라볼 수 있는가가 가장 큰 의문이었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내가 '나'이도록 하는 요소는 매우 많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속 주인공이 갈망했던 것처럼 냄새일 수도 있고, 기척일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가 성격이나 품성, 기질이니 다양한 말로 사람을 표현하지만 나를 '나'이도록 하는 것은 결국 인격(퍼스낼리티)이라 부르는 것이다. 인격이란 무엇인가? 복잡하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인격이란 정체성(아이덴티티)과 달라서 타인이 기대하고, 바라보는 나란 사람의 페르소나일 뿐이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 때 그 사람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그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 사람이 내가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정색한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정색이란 말은 '正色', 얼굴빛을 바로 잡다는 뜻이다. 엄정하게 자신의 얼굴을 내비춘단 말인데, 다시 말해 정색, 그것이 본색(本色)이다. 본색은 자신만이 안다.  

<염쟁이 유氏>는 마지막에 가서 정색을 하고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죽음을 치뤄내는 과정에서 유씨는 과장, 부장, 회장이 되려고 힘들게 고생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송장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 뿐이니까.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송장이 될지 그것이 잘 사는 일만큼이나 잘 사는 일보다 힘들다고 말한다. 염습하는 과정은 일반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없는 과정이다. 누군가 가까운 지인이 죽었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너무 가까운 사람의 염습과정일수록 우리는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모습. 염습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마치 잘 포개놓은 북어같이 메마른 피부, 얼어붙은 동태처럼 꾸덕꾸덕해진 몸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너무나 현실이었기에 비현실을 보는 것 같았고, 초현실적인 상황 같았다. 입관 절차가 끝나고 장지를 향해 발인한 뒤에야 비로소 나는 그 숨막히는 죽음의 현장이 현실이 되었다. 장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터진 눈물이 아닌 울음은 매장 절차가 모두 완료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를 대신했던 분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까지 눈에 생생하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2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며 천하의 사람들이 선함을 아는 것은 선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를 생겨나게 하고, 어렵고 쉬운 것은 서로를 이루며, 장단(長短)은 서로 비교되기 때문에 드러나고, 고하(高下)는 서로 기울어지며, 음성(音聲)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전후(前後)는 앞이 있어야 뒤가 따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일부러 하지 않고도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침을 행한다. 천지자연은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노고를 사양하지 아니하며 만물을 자라게 하고도 소유하지 않는다.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그에 머무르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떠나가지 않는다.

누구라도 죽음의 맨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는 없다. 그건 당사자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반대말은 삶이고, 죽임의 반대말이 살림이다. 죽임이 살림을 파괴하는 시대, 죽음이 삶을 겁박하는 시대에 사는 두려움에 비하면 정색하는 두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더란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그러나 선과 악이 본래 한 몸에서 비롯되었고, 삶과 이별이 또한 하나이듯 <염쟁이 유씨>를 본 뒤 앞으로는 정색하는 두려움과도 자주 마주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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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 글래스콕(Joanne Glasscock)의 "센토(The Centaur)"



조안 글래스콕의 센토를 떠올릴 때, 나는 몇몇 뮤지션들을 덩달아 떠올리게 된다. 가령 레어버드(Rare Bird)의 "Sympathy"와 칼라 보노프(Karla Bonoff)의 "The Water is Wide"와 같은 곡들 말이다. 이런 곡들을 가리켜서 일명 한국인의 All Time Request Song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단지 한 장의 앨범을, 그 중의 한 곡이 외국에서의 평가보다는 국내에서의 높은 평가로 사랑받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그야말로 한국인들의 민족 정서란 것을 아예 부인하기는 어려운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인 조안 글래스콕의 센토를 처음 들었던 것은 아마도 초등학생 무렵이었던 듯 싶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아마도 비오는 날이었던 듯 싶다) "센토"를 듣고는 요새 식 표현을 빌자면 그야말로 "삘"이 확 와서 꽂혔다. 가령 이런 곡들 - 나의 어린 시절 음악감상에 매료되기 시작하던 초창기를 장식했던 몇몇 영화음악 - 을 제외하고도 몇몇 영화음악에서 이와 흡사한 기억들이 있다. 가령 "나자리노-When A Child Is Born"나 "빌리티스Bilitis"와 같은 곡들이 그렇다. "나자리노"의 경우엔 워낙 B급 영화였던 탓에(물론 언젠가 TV에서 해주는 걸 보고 몹시 실망한 경험이 있지만, 게다가 이 영화는 아르헨티나 영화였다. 이 사실을 아시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 흔히 보기 어려운 영화였고, 프란시스 레이가 음악을 맡었던 <빌리티스>의 경우엔 야한 영화라는 소문만 익히 들었을 뿐 아직도 보질 못했다(하긴 이제사 봐서 무엇하리오).

어쨌든 조안 글래스콕의 센토를 한동안 무척이나 좋아했고, 나중엔 이 곡이 수록된 그녀의 앨범을 구입하고 몹시 실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야말로 "센토"의 엄청난 센티멘탈을 기대했던 나에게 있어서는 나머지 곡들의 느낌이란 센토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던 것이다. "센토", "센토"하니까 어쩐지 이게 뭘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그러니까 영어 공부를 하기 전에 처음 들었던 것이라 이게 뭔뜻인지 몰랐던 게다. 물론 그때도 켄타우로스Centaurs란 말은 알고 있었고, 이 센토가 그 말이란 사실은 뒤늦게 알게 되긴 했다. 이 노래는 당시 인기 차트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다시피 했다고 하는데, 뒤늦게 우리나라 사람들에 발굴되어 지금의 올타임 리퀘스트 송이 되었다.

가사는 이렇다.

The Centaur (半人半馬)

On that hill a centaur stands, half stallion, half man,
and his hoofs are the hoofs of a stallion,,
and his strength, it's the strength of a stallion,
and his pride, the pride of a stallion.
But his tears are the tears of a man.

저 언덕위에 한 마리 쎈토가 서 있네.
반은 종마(種馬), 반은 사람.
종마 발굽에
종마의 힘에
종마의 자부심을 가졌지만
눈물만은 사람의 것이라네.

Over the hill the centaur goes,
round the mountain and back again,
a little too far from the world of dreams,
and just beyond the world of a man.

저 언덕위에 한 마리 쎈토가 가고 있네.
산을 돌아 다시 제 자리로.
꿈의 세상으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곳,
사람들이 사는 세상 바로 건너 저편이라네.

Once the centaur loved a mare who rode beside him everywhere,
(They were) racing, chasing cross the fields,
(the) centaur and the wild mare.

한 때 쎈토는 암말을 사랑했다네.
날마다 그녀 곁에서 달렸드렀지.
종마와 암말은
들판을 가로질러 경주하고 따라잡고 그랬다네.

But with the racing and chasing done,
they stood silent and silent there.
But the centaur, he had words to say.
(But) the mare had only the soul of a mare.

하지만, 경주와 따라잡기가 끝나고 나면
그들은 조용히 서 있었지.
쎈토는 하고싶은 말이 많았지만,
암말은 단지 암말의 영혼만을 가지고 있었다네.

Over the hill he rode on,
round the mountain and back again,
a little too far from the world of dreams,
and just beyond the world of a man.

언덕 위로 그는 달리네.
산을 돌아 다시 제 자리로.
꿈의 세상으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곳,
사람들이 사는 세상 바로 건너 저편이라네.

Once the centaur loved a girl who saw his golden aspiration.
(They were) walking, whispering through the woods,
the centaur and the lovely girl.

한 때 쎈토는 그의 황금빛 포부를 알아주는
한 소녀를 사랑했다네.
쎈토와 그 사랑스런 소녀는
숲속을 걸으며 속삭였지.

But with the walking and whispering done,
they stood silent, and then they cried.
For the centaur felt the stirring breeze,
He needed someone who could ride by his side.

하지만 산책과 속삭임을 다 했을 때,
그들은 조용히 서서 울었다네.
왜냐하면 쎈토는 산들바람을 느끼자
곁에 함께 달릴 누군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지.

Over the hill, climbing the mountain and back again,
a little too far from the world of dreams,
and still beyond the world of a man.

언덕 너머로, 산 위로 다시 제자리로 달리고 있네.
꿈의 세상으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곳,
사람들이 사는 세상 바로 건너 저편이라네.

On that hill a centaur stands.

그 언덕에 한 마리 쎈토가 서 있다네.


켄타우르스에 얽힌 전설은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아폴론과 스틸베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익시온과 헤라의 형상을 지닌 구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그중 후자의 전설이 좀더 극적인데 왜냐하면 거기엔 친족살해와 헤라 여신과의 사랑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친족을 살해한 익시온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신들의 나라인 올림포스를 찾았다가 제우스의 아내이자 여신인 헤라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이를 눈치 챈 제우스가 구름으로 여신의 형상을 만들어 익시온과 사랑을 나누도록 하는데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켄타우로스라는 것이다.


대체로 켄타우로스에 대한 평은 성격이 급하고, 난폭하다는 것이지만 걔중에는 케이론처럼 현자로 소문난 존재도 있어서 그는 그리스의 여러 영웅들의 스승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의학을 가르친 것도 케이론이었다.

어쨌든 이들은 고기를 날로 먹고, 술을 즐기는 종족인데다가 사랑에도 쉽게 빠지는 편인지라 이들에 얽힌 이야기 속에는 늘 신부 약탈의 전설이 있다. 하긴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정력의 상징으로 비추었던 말이었으니 그럴듯한 성질머리일 것이다. 하여간에 이런 신부 약탈이 전쟁으로 번져 테세우스가 이끄는 인간들과의 전쟁에서 패해 먼 곳으로 유배된 존재가 된다. 켄타우로스는 하늘의 별자리 "궁수자리" 혹은 "사수자리"가 바로 그 별자리이다.

센토 - 반인반수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내 주변에서 또 하나 그렇게 시든다. 그녀는 센토를 무척이나 좋아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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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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