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1958년 무렵 뉴욕 레고 파크.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내가 열 살인가 열 한 살이었을 때…. 난 하우이, 스티브와 어울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는데 그만 스케이트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야! 얘들아! 기다려.”
“꼴찌다! 꼴찌! 하하하”
“같이 가! 얘들아.”
아버진 마당에서 뭔가를 고치는 중이셨다.
“마침 들어오는구나. 이리 와서 이것 좀 잠깐 잡아주렴.”
“훌쩍, 네?”
“아티, 그런데 너 왜 우는 거니? 나무를 잘 붙들려무나.”
“제가 넘어졌는데요. 친구들이 절두고 가버리잖아요.”
아버진 톱질을 멈추셨다.
“친구? 네 친구들?”
“그 얘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1권 본문 5-6쪽>


아트 슈피겔만의 『쥐(Maus)』는 모두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청년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4년 폴란드의 유대인 게토에 머물던 시기를 다루고, 2권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작가는 ‘마우슈비츠’란 익살을 부리기도 하지만) 수용소에서 극적인 생존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과거사를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단순한 회상투로만 구성되진 않는다. 우리는 『쥐』를 통해서 작가인 아들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블라덱 사이에 놓인 경험의 차이, 감정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쥐』를 통해 일정하게 의도하는 바가 성공적이었음을 뜻한다.


무엇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작품들과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 작품이 과거와 현대를 번갈아 가며 대비시키고 있는 구조를 취하는데서 발생한다. 즉,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작가)와 과거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아버지 블라덱 사이의 현재적 갈등 구조는 끝내 해결되지 않지만, 작가는 『쥐』의 작업을 위해 사이가 결코 좋을 수 없는 아버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야만 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궁극적인 원인은 앞서 인용하고 있는 『쥐』의 첫 도입부에서 이미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체험을 나에게 최초로 각인시켜준 인물은 우리에게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빅토르 프랑클(Viktor E. Frankl) 박사였다. 그는 이 책에서 죽음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실제로는 가스처형실을 갖춘 유대인 최종해결시설)에 갇힌 수인들에 대해 외부인들은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수들 사이에 불붙는, 생존을 위한 격렬한 투쟁”에 관해 거의 모르고 있으며, 매일 끼니와 자기 자신을 위한, 친구를 위한 무자비한 투쟁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다른 한 명의 희생자가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친구를 희생자 명단에서 지우려고 아우성을 쳤다는 사실 말이다. 빅토르 프랑클은  결국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수년간 끌려 다닌 끝에 삶을 위한 투쟁에서 도의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수인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 도둑질,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 넘겼다.


아버지 블라덱이 바로 그런 경험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전후 세대인 아들 아트와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아버지 블라덱 사이에는 이렇게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고, 이 두 사람의 간격을 회복하기 어렵게 만든 것은 아트 슈피겔만이 스무 살 때 겪은 어머니 안나(아냐)의 자살이었다. 물론 어머니의 자살이 블라덱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을 묶어주던 하나의 울타리가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 『쥐』가 단순히 히틀러의 만행을 그림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홀로코스트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는,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으나 그만큼 그저 그런 교훈적인 유형의 만화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의도
(그런 의도도 있겠지만)로 그려진 것이기 보다는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세대와의 일정한 단절과 소통, 이해를 위해, 다시 말해 스스로의 정리를 위해 그린 작품이란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그는 자신과 다른 체험을 가지고 있는 부모 세대와 대화함으로써 끝끝내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 블라덱을 이해하게 되고, 단절을 경험한다. 추측컨대 아마도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성장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버지 블라덱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살아온 과정이 너무나 각박했던 이들 가운데 블라덱이 거쳐 온 극단적인 체험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와 흡사한 태도를 지닌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당장 우리의 조부모 세대, 부모 세대 혹은 앞으로 우리들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와 흡사한 이야기를 할지 모른다.


나 역시 생활보다는 생존을 우선해야 했던 체험이 있었고, 이 무렵 내가 즐겨 입에 담던 경구
“강한 자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란 경구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말이었다. 일단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은 어떤 비굴이나 치욕, 폭력도 감내할 만한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태도만이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 자세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는 냉혹함만이 삶의 진정한 자세라고 여기는 동안, 나는 주변에서 순수나 소박한 낭만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얕잡아 보았고 경멸했다. 그들은 삶의, 현실의 냉혹함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 같은 존재들이라 여겼고, 결국엔 삶의 과정에서 도태될 것이라 믿었다. 아버지 블라덱이 어린 아들 아트에게 했던 말 “친구? 네 친구들? 그 얘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공개할 필요 없을, 어찌 보면 아우슈비츠를 드러내는데 도리어 군더더기 같은 대목들에서 도리어 진실을 보여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와 자식의 갈등, 아버지가 청년기에 했던 연애 이야기, 어머니의 자살, 그리고 아버지 블라덱 자신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가스실에 보내질 뻔 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흑인종에 대해 지닌 편견들, 마트에 가서 이미 개봉한 음식물을 바꿔오는 인색함 등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우리는 블라덱과 아들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로, 그들의 이야기가 지난 한 시대의 과거사가 아닌 오늘에도 이어지는 이야기일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더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잔혹한 시대를 살더라도
“인간의 구원은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빅토르 프랑클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존립하는 것이다. 나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조금도 구애되지 않고 그녀의 모습을 관조함에 여전히 내 자신을 송두리째 바쳤을 것이며, 그녀와 나의 정신적 대화는 전과 다름없이 생생했을 것이며 만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그대의 가슴에 새겨주소서. 그러면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해지리다.” 그는 F. 니체의 말을 인용해 (비록 강제수용소에서의 삶과 죽음의 과정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긴 했으나)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 말은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의 도상(途上)에서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대개 “어떻게”가 아닌 “왜”이다.


아버지 블라덱의 냉정하고, 각박한 심성과 삶의 자세를 우리는 『쥐』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여러 조건들 속에서 그의 기대를 배신했거나 믿음을 버림받았던 무수한 경험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이 숱한 배신과 희망의 박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을 어찌 과거의 일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 임금 노예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채 살아가길 강요당하는 현실에서도 역시 배신과 희생은 반복된다. 그러나 블라덱이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까닭은 바로 그의 사랑하는 아내 ‘아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물론 블라덱의 이런 태도를 지긋지긋한 가족주의의 발현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이 아닌 타인
(가족을 포함해서)과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자만이 타인의 종이 되기를 거부할 수도 있는 법이다. 지금은 비록 아우슈비츠가 인류에게 별다른 교훈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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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 장경섭 지음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2005년



장경섭과 최초의 인연을 창비에서 나온 『십시일반』으로 생각했는데 어제 후배가 전해준 『저예산독립만화지 1996년 6월호 통권 제2호-화끈』을 보니 그와 나의 인연은 그가 데뷔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야 했다. 그런데 고백할 것은 그에 대한 내 기억을 되살려 준 것은 『화끈』에 실린 그의 작품 때문이 아니라 여기에 실렸던 김동고의 "돌아온 조단" 때문이었다. 이 작품의 그림체가 당시 내게는 꽤 특이하게 느껴졌고, 그 무렵 시카고 불스의 마이클 조단이 은퇴와 복귀를 반복하던 무렵이라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다. 그런 점만 놓고 보자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하고 창비에서 펴낸 작품집 『십시일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집에서도 장경섭이란 이름은 내 기억 속에 명확하게 새겨지지 못했다. 『십시일반』에서 내가 눈여겨 본 작품은 조남준의 「누렁이1.2」였다. 조남준의 「누렁이2」는 훌륭한 단편 옴니버스 만화집인 『십시일반』의 여러 좋은 작품들 가운데서도 확실히 뛰어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장경섭이란 이름은 내게 확실히 각인되었고, 그것도 매우 뛰어난 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그와의 오래된 인연에 비해 장경섭이란 이름은 내게 오래도록 각인되지 못하고 표류해왔다. 그 이유는 뛰어난 작가를 선별해내지 못한 나의 둔함 때문이자, 이런 작가의 작품을 자주 접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만화계의 고질적인 구조 탓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제라도 발견할 수 있게 된 그의 작품들은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도 장경섭 못지않은 실력과 진지한 작가 정신을 바탕으로 무명의 설움을 경험하고 있을 작가들은 많을 테니 말이다. 현재까지 내가 읽은 장경섭의 작품들은 『화끈』에 실린 「張某씨 이야기」와 『십시일반』에 수록된 「커밍아웃블루스」 그리고 이제 발간된 개인작품집 『'그'와의 짧은 동거』가 전부이다. 좀 더 노력한다면 그의 다른 작품들도 구해서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이 세 권에 수록된 장경섭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이 작가에 대해 일단 세 가지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우선 그가 나랑 동갑이란 사실인데 그 때문인지 이념적 퇴조기를 살아낸, 살아내고 있는 이들이 표출하는 비릿한 삶의 비애가 느껴졌다. 다른 한 가지는 장경섭이란 작가가 매우 고집스럽고, 우직한, 그리하여 매우 호흡이 느리거나 긴 작가일 것이란 추측이다. 앞서 삶의 비애감에 대한 나의 주장이 다소 근거 없는 추측이라면 그의 호흡에 대한 이야기는 내 나름대로는 비평적 근거가 존재한다. 우선 그의 데뷔작이랄 수 있는 『화끈』부터 꾸준하게 주인공(화자)으로 등장하고 있는 '張某씨'와 작가 사이의 길고 긴 인연이 그것이다. 데뷔작이랄 수 있는 96년 작의 "張某씨"의 얼굴선을 그린 펜촉의 느낌은 매우 굵은데 반해 마른 얼굴로 묘사되고 있다. 이에 반해 『'그'와의 짧은 동거』에 등장하는 "張某씨"의 얼굴선을 표현하는 선(line) 자체는 가늘지만 얼굴은 이전의 작품보다 상당히 둥글둥글해졌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張某씨"를, 작가 자체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지만 주인공 화자가 만화가의 또 다른 페르소나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군다나 작가의 작품들이 내보이는 자의식들, 분명히 때로는 과잉으로 보이는 그 느낌들은 작품의 리얼리티와 관련해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룬다. "작가의 말"을 살펴보니 "출판사에서 만화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해온 것이 지난해 12월이었다. 10년 가까이 만화판의 언저리에서 머물렀으니 이제는 한 권쯤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나름의 초조감과 아직도 헤매는 모습을 꼭 드러내야 하나, 하는 부담감에 시달리며 5년 전에 시작만 했다가 끝내지 못했던 원고를 꺼내어 마무리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웃고 있는 작가의 안경 낀, 힘없이 열린 입모습에서 어쩐지 "張某씨" 캐릭터에 대해 그가 느꼈을 법한 애정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장겹섭의 첫 작품집 『'그'와의 짧은 동거』는 표제작인 중/장편에 「'그'와의 짧은 동거」 이외에도 매우 뛰어난 단편 「즐거운 나의 방」, 「즐거운 나의 방 - 다시 열기」를 비롯해 「서브웨이 카니발」, 「히.말.라.야.에.가.보.셨.나.요?」까지 모두 5편이 수록되어 있다. 만화체로 그려진 「히.말.라.야.에.가.보.셨.나.요?」를 제외하곤 극화체와 만화체가 혼재되는 느낌(그러나 전반적인 경향을 놓고 살필 때, 장경섭에겐 이런 구분이 거의 필요 없어 보인다) 속에 자연스럽게 경계를 허물고 있다. 그림체만 놓고 보자면 『십시일반』에 수록된 「커밍아웃블루스」가 가장 세련된 그림체이다. 문학에 있어 문체는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이며 이것은 만화의 그림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장경섭의 그림체는 매우 어눌해 보인다. 세련된 그림체를 선호하는 이들에겐 그의 어눌해 보이는 그림체가 거슬릴 수도 있겠으나 작가 대신에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문체가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하기 위한 선택적 글쓰기 전략의 일환이라면 만화가의 그림체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장면 혹은 다루는 이야기에 따라 문체나, 문장의 호흡에 변화를 주는 방식을 택한다면 만화가에겐 만화체와 극화체, 혹은 펜의 선택,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체를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이 속에는 작가의 주제의식과 세계관, 그에 따른 표현방식을 모두 포함하는)를 전개해나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가의 그림체는 캐릭터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그'와의 짧은 동거』가 선보이는 어눌한, 어쩌면 아마추어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림체는 작품에 대한 몰입의 과정에서 다큐멘터리적인 진실함을 보인다. 이것이 독자로 하여금 카프카의 『변신』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리얼리티의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과잉되어 보이는 자의식의 세계를 낯설면서 낯설지 않게 느끼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다.




「'그'와의 짧은 동거」가 주는 첫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어두컴컴한 싱크대 앞 펑퍼짐한 몸매의 누군가가 설거지를 하고, 침대에 누운 채 책을 보며 과일을 먹고 있는 "張某씨"의 모습은 낯이 익다. 아버지나 남편은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어머니나 아내는 홀로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아버지 혹은남편이 쉬고 있는 모습은 매우 낯익은 정경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낯익은 정경으로부터 시작하는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갑자기 "쨍그랑" 소리가 들린다. 설거지 도중에 컵을 놓쳐 깨뜨린 것이다. 그런데 깨진 컵을 주워 담는 손이 이상하다. 깨진 컵을 주워 담는 건 바퀴벌레였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면 분할에 있어 바퀴벌레의 손이 등장하는 것은 다음 페이지로 넘겼으면 좀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란 생각.) 


"張某씨"는 컵을 줍고 있는 바퀴벌레에게 다가가 "야! 손으로 만지면 안돼! 다친단 말야!"라며 바퀴벌레를 걱정하듯 말한다. 그러나 바퀴벌레는 화를 내며 다시 싱크대로 가 설거지를 한다. "張某씨"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후욱’하고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대체 왜 그래? 그래 불만 있는 거 알아. 아무래도 요새는 일이 좀 바쁘니까 신경도 못 쓰고.... 그래도 그렇게 꽁하니 말도 안하고 그러면 답답해서 어쩌냐. 우리 기분전환 삼아서 해남이나 한 번 다녀올까? 전번에 갔던 갯벌이 근사하던데 가서 갯지렁이도 잡고."라며 바퀴벌레의 마음을 달래주고자 한다. 마치 부부의 대화처럼 낯익지만 이질적인 존재들의 동거가 이 작품의 긴장과 매력 속으로 우리들을 끌어당긴다. 바퀴벌레는 검은 비닐봉지에서 수거한 '컴배트 파워(바퀴벌레약)'를 늘어놓으며 말한다. "화장실에 2개, 침대 밑에 2개, 싱크대 밑에 2개. 이건 무슨 뜻이지? 이젠 끝인가?" 작가 "張某씨"가 의뭉스럽게 깔아놓은 컴배트 파워, 삶이란 지뢰밭 사이로 이 제 우리들은 끌려들어간다.




"張某씨"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의 집은 마치 김중식의 시 속에 등장하는 귀가할 때마다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할 만큼 멀고도 먼 곳이다.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처럼 힘주어 올라간 계단 끝 막다른 옥탑방이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으로 들어간다. 치약을 밟고 그는 혼자 말한다. '오늘은 어째 도가 좀 지나친 날이다. 외로움의 정도가...' 그런데 그의 방 침대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인지 그처럼 피곤에 지친 탓인지 침대 위에 올라가 있다. "張某씨"는 너무나 외로웠고, 오늘은 그 정도가 좀 지나친 날이었기에 바퀴벌레를 잡아 죽이거나 집 밖으로 내?는 대신에 침대를 바퀴벌레에 내어주고, 대신 방바닥에 입던 옷을 덥고 잠이 든다. "외로움의 도가 지나친 날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깐을 제외하곤 결혼할 때까지 10여년을 혼자 살았던 경험이 있다. "張某씨"처럼 옥탑방에 산적도 있지만 바퀴벌레와 가장 오랫동안 동거한 것은 인천의 허름한 연립 원룸에 살던 때였다. 아무도 없는 방, 아침에 출근할 때 급한 마음에 휙휙 던져 논 옷가지 그대로 쌓여있고, 싱크대 통에 누렇게 말라가는 밥풀과 하수도를 메우며 시큼하게 상해 가는 음식찌꺼기들. 그곳은 네가 떠나있는 동안엔 마치 네모난 관(棺)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돌연 출현한 바퀴벌레들, 분명 함께 살고 있는데도 불을 켜면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가끔 살충제나 방충제를 뿌려놓으면 죽은 채 발견되는 시신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정둘 것 없어 병에도 정을 준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너무나 외로웠기에 밤이면 자기 자신에게라도 말을 걸지 않을 수 없던 외롭고 쓸쓸하게 보낸 밤들이 있었다. 그런 어느 아침에 눈을 떠보니 어젯밤 그 바퀴벌레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작가 "張某씨"는 말한다. "혼자서 생활할 때는 자잘한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해야 한다. 어떤 신문을 사야할지부터 재떨이를 비워야 하는 시점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다보면 예민한 자아는 지칠 수밖에 없고 한 번 지치고 나면 무서운 고독감에 라면 한 봉지 사러 나가는 데도 하루 종일을 고민해야 한다."


외로움 때문에 시작된 바퀴벌레와의 동거는 여러 측면에서 알레고리로 읽힌다. 장경섭은 이미 전작 『십시일반』에 수록된 「커밍아웃블루스」를 통해 외국인 이주노동자와의 동성애를 그린 바 있다. 바퀴벌레는 문명화된 도시의 삶(자연, 사회, 공동체로부터 고립된 개인) 속에서 초대받지 못한 곤충 바퀴벌레 그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고, 주류 세계에 포섭되지 못한 배타적 소수자(동성애자, 외국인 이주노동자 등)를 우의(寓意)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張某씨"는 마치 우렁각시처럼 설거지하고 살림을 도와주고, 친밀한 동료로서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바퀴벌레와 함께 일상의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사회가 허락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협소한 통념(通念)의 세계, 일상은 고통의 나날이다. 나이트클럽에서 볼 일을 보던 바퀴벌레는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고 쫓겨나고, 친구 바퀴벌레와 함께 탄 택시에서도 다시 쫓겨난다. "張某씨"에게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시선이 그를 괴롭히고, 생활 자체도 그를 힘겹게 한다. 다만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張某씨"를 이해해주는 ‘그녀’를 통해 그는 숨구멍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그녀'를 통해서도 극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스포일러일 듯하여 말을 아낀다.)



 

전세계에 걸쳐 4,000여종이 존재하고, 한국에도 7종이 살고 있는 바퀴벌레는 아프리카가 원산이라 따뜻하고 어두운 곳을 즐겨 찾는다. 그런 바퀴벌레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은 흑인 노예들을 잡아다 팔던 노예 상인들의 선박에 의한 것이었다. 본래 추운 곳에서는 살 수 없는 바퀴벌레는 화석에너지를 통해 난방을 해결한 문명적 삶의 혜택(?)으로 오늘날 우리가 거주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살게 되었다. 마치 이주노동자들이 자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삶의 정주지를 옮기는 것처럼, 그러나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되는 반면, 노동의 이동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것처럼, 이주노동자들은 사회적 통합을 가로막는 골칫거리로 치부되곤 한다. 이주노동자들, 피부색, 인종에 대해 비교적 열린사회로 평가 받아오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폭동 사건은 이를 잘 반증한다. 「'그'와의 짧은 동거」에서는 사마귀가 사귀어오던 여성을 과실치사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폭동 사건과 이의 전개 과정을 삽입하고 있다. 「'그'와의 짧은 동거」는 그간 문학의 영역에서 감당해왔던 우리 시대와 사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치열한 고뇌와 사투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이는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말」에서 말하듯 “근대에서 소설이라는 형식이 역사적으로 이상하게 팽대해진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왜 소설일까. 그것은 다른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다른 수단이 있었다면 굳이 소설이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란 것처럼 이제 과거의 문학 특히 소설이 감당하던 몫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욱 커다란 미덕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말한다면 내 판단이 지나친 비관에 의존한 것일까.


그의 다른 작품들 특히 단편 「즐거운 나의 방」, 「즐거운 나의 방 - 다시 열기」은 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표현들로 가득하다. “내 방에 들어와 보니 누군가 죽어 있었다. 나였다”로 시작되는 이 단편에서 그는 마치 유체이탈한 영혼처럼 자신이 죽음(주체의 죽음)을 목격하는 또 다른 주체로서의 나를 보여준다. 내가 나를 잡고 슬퍼하고, 내가 나를 위로하며, 다시 “내 방에 들어와 보니 누군가 죽어 있었고” 다시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달려온 내가 “내 방에 들어와 보니” 나 아닌 내가 나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그 중 누군가인 내가 “내 방에서 뭐 하는 짓들이야. 이게 다 뭐야! 집어치우지 못해!”라며(이 또한 장례식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 중 하나다)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나 아닌 나가 “저 자식, 또 지랄이네...”, “받아들이기 힘든가봐.”라며 술잔을 들이킨다. 「즐거운 나의 방」, 「즐거운 나의 방 - 다시 열기」은 마치 에셔의 무한순환하는 그림처럼 그렇게 삶과 죽음의 곡절들을 보여준다. 나는 과연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작가는 그렇게 원자화되고 고립된 개인, 일상의 주체이자 소멸되어버린 몰개성의 주체들에게 묻고 있다.


나는 감히 장경섭의 이 작품들 『'그'와의 짧은 동거』를 2005년, 올해 내가 만난 내러티브 있는 모든 이야기(작품)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첫손에 꼽을 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인간에 대한 우울하기 그지없는 온갖 예언들로 가득한 2005년, 대한민국 문학 판이 온갖 상업주의의 만신전(萬神殿)으로 변해버린 이 시간, 이 시대를 보내며 내가 발견한 희망과 절망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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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기르다 - 다니구치 지로 지음 | 박숙경 옮김 | 청년사(2005)




홀거 하이데에 대한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온 몸이 파김치처럼 피곤에 전 느낌이었다. 아내도 마감 중이라 계속 늦는데 오늘은 아예 집에 못 들어온다고 했다. 소파에 보니 낯선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책 "개를 기르다"였다. 제37회 쇼가쿠칸 만화상 심사위원상 특별상 수상작이란 표식과 함께 "청년사 작가주의 01"란 글이 표지에 있었다. "너를 지켜보고 있자니 그저 눈물이 흐른다" 카피 내용은 그랬다. 첫번째 든 생각은 '청년사에서 이젠 만화도 내는군' 이란 것이었다. 80년대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로 출발한 여러 출판사들이 90년대 들어 일련의 자구책으로 문학에서 아동문학으로 분야를 넓혀가는 혹은 외도하는 광경을 많이 보아왔으므로 청년사에서 만화를 낸다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인데 아직까지는 이런 일들이 꼭 눈에 밟힌다. 길들여진 감각이란 그래서 무서운 거다. 옮긴이를 보니 이름이 낯이 익다. 박숙경이다. 겨레아동문학연구회의 그 박숙경. 일면식도 있는 터라 일단 반갑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미 국내에는 그의 작품들이 꽤 여러 종 번역되어 있는데, 다들 평이 좋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애니북스에서 출간한
"아버지"는 2001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상도 여럿 받았고 다니구치 지로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대표작 중 하나다. 이외에도 "열네살", "느티나무 선물" 같은 작품들이 국내에 이미 출간되어 있다. 그의 그림투와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는 정갈하다. 나는 정갈하단 표현에서 나물을 담아낸 접시 양 귀퉁이를 행주로 스윽 닦아낸 듯한 그런 느낌이 들어 자주 사용하지 않는 편인데,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에 대해 쓴 정갈하다는 표현은 그런 인위적인 정갈함이 아닌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의 정갈함이다. 그림체에서부터 내러티브, 캐릭터 구성에 이르는 전과정이 과장되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정제된 느낌을 전해준다. 거기에 일본인 특유의 섬세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개를 기르다"
에는 표제작인 "개를 기르다"를 포함해 모두 다섯 편의 단편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나이 1947년생이니까. 우리 식으로 치자면 전후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다. 경제적으로 일본이 아직 가난함을 미처 벗어나기 전에 태어나 한창 개발과 성장의 지름길을 달려가던 50년대 후반이 그의 유년시절에 해당할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공터에 건물이 들어서고, 모두가 성장과 개인소득 향상으로 정신없었을 그런 어린 시절을 다니구치 지로는 보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선 상실한 유년, 성장의 이면에서 일본이 잃어버린 가치들에 대한 묘한 동경이 느껴진다. 그 중에서 이 작품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개를 기르다"는 특히 인상적이다.



작가후기에서 지로는 "개를 기른다는 것, 그것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일이었습니다. 개와 함께 들판이나 산에서 함께 노는 광경을 떠올리며 즐거워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동물을 길러보니 '살아있는 것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기른다'기 보다 '동물과 함께 산다'는 거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환경이란 말이 그 말을 운동차원에서 사용하는 이들의 의도보다 좋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환경(環境, environment)란 말은 한자어든, 영어든 그 어원이든 실제적인 의미이든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의 세계(外界)를 의미하는 말이다. 환경이란 말 자체에서 이미 인간과 그이외의 것이란 구분과 상대화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같은 말이라도 환경이란 말보다는 생태계란 표현이 운동적인 차원에선 좀더 적합하다. 최근에 나는 영성(靈性)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적 영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칼 융이나 노자적인, 불교적인, 신화적인 의미에서의 영성.


홀거 하이데에 대한 세미나 과정에서 나는 하이데가 말하는 영성은 융이 이야기하는 영성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고, 그것은 민속학에서 말하는, 그리고 신화의 세계에서 말하는 영성과도 의미가 깊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영성주의는 세상 만물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말이다.
(혹시 "고릴라 이스마엘"을 읽은 이라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이 말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이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동시에 우주 만물과 깊은 연관을 맺는 행위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만 한 인간으로서(동시에 자연의 일부로서)의 주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영성의 회복은 인간 이성의 우월함에서 내려와 자신보다 약한 존재와의 관계를 새롭게 맺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연대(solidarity)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런 영성의 마음을 노동의 차원으로 생각해볼 때 현재 우리 노동운동이 처해있는 상황은 노동의 영성을 회복해야만 치유될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괜히 영지주의(그노시즘)적 기독교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기 십상이므로 약간의 부연을 하자면,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이 당면한 위기는 노동의 영성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대해, 남성은 여성에 대해, 한국 노동자는 외국인 정주 노동자들에 대해 연대의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홀거 하이데의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에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우리들은 종종 주말이면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문명화된 자연에 불과하다. 인간의 문명이 만든 자동차를 타고, 문명의 도로를 따라 문명화된 자연(캐러비안 베이만이 아닌 국립공원, 도립공원도)을 잠시 맛보고 돌아오는 것에 그친다. 맨얼굴의 자연을 접할 수 없다.



지로의 단편 "개를 기르다"는 작가가 실제로 15년간 길러온 개 '탐'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몇 개월을 다룬다. 시바와 테리어 종이 섞인 개 '탐'은 생후 몇 개월만에 지로 내외를 만나 성장한다. 탐은 주인 부부를 이끌고 신나게 산책을 다닌다(편의상 주인공을 작가의 이름으로 하겠다). 그러나 어느새 인간보다 빨리 늙어버린 탐은 더이상 산책의 즐거움을 지로 내외에게 선사하지 못한다. 지로는 탐의 부족해진 앞다리 힘을 대신해 탐의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끈을 사오고, 탐의 힘없는 앞다리 근육을 대신해 자신의 팔힘으로 탐의 상반신을 지탱하여 산책을 시킨다. 자기 자리에 똥오줌을 누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던 탐은 더이상 변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잃어간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리에 볼 일을 본 탐. 끙끙대는 탐을 보며 지로는 늙어감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담담하게 탐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해준다. 탐이 떠난 빈 자리엔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 고양이 보루(일본어로 '걸레'란 뜻)가 차지하게 된다. 주인집에 아기가 태어나자 버림받은 페르시안 고양이 보루. 보루는 처음엔 지로 내외를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낯빛을 보이지만 어느샌가 지로 내외와 친해지고 고양이 새끼 세 마리를 낳는다. 하지만 문명의 애완 동물이 된 보루는 새끼의 탯줄을 끊어주는 법을 모른다. 하는 수 없이 수의사를 지시를 받아 일일이 탯줄을 끊어주고, 애써 젖꼭지를 찾아주는 지로.


애완동물은 우리 인간에게 몸을 맡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작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순수'를 아주 살짝 보여주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맘대로 굴어도 허락해준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준다. - 70쪽


인간이 제 아무리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나 자랐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을 만한 힘을 얻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힘을 행사하고 있다. 이제 자연은 우리 인간의 보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만 우리 본래의 순수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맘대로 굴어도 모든 것을 평화롭게 감당해줄 자연은 이제 더이상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들을 돌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우리가 자연과 또, 다른 생명체와 맺는 새로운 관계 설정이어야 한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인 "약속의 땅"에서 작가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하얀 표범의 이야기를 통해서 문명화된 인간과 영성으로서의 자연에 문명으로서의 인간이 가하는 폭력과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풍요를 동시에 맛볼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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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 고라즈데 - 조 사코 지음 |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2004)


악을 행하는 사람은 우선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믿어야 한다. 이데올로기, 그것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악마의 행위를 발생시키고, 악마의 행위자에게 신념과 결심을 갖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본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비치고, 따라서 그들은 비난이 아니라 찬사와 명예로운 소리만 듣게 되는 것이다. - 알렉산더 이자예비치 솔제니친


말(言)은 종종 현실을 외면하거나 거짓으로 꾸며낸다는 점에서 소통을 위한 진실한 수단일 수 없다. 우리는 팻맨(Fatman)과 리틀 보이(Little Boy)란 이름의 어디에서도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름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의 이름이었음을 알고 있다.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우라늄탄이었던 리틀 보이는 히로시마에, 최초의 플루토늄탄이었던 팻맨은 이틀 뒤인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굳이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공화정의 이상이 짓밟힌 순간의 집권당이 "민주공화당"이었고, 가장 정의가 필요한 순간 집권당 이름이 "민주정의당"이었음을 기억한다.


가장 필요한 것이 가장 결핍된 순간, 이름은 필요를 배신한다는 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결핍되는 순간은 비극의 순간이다. 조 사코의
"안전지대 고라즈데"의 비극 역시 가장 필요한 것이 가장 결핍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안전"이었다. 가끔 나는 낯익은 사람들에게서 낯선 얼굴을 발견한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길을 걷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행해지는 폭력을 경험한 뒤로부터 나는 거리를 걸을 때마다 늘 어디선가 주먹이 날아오지나 않을까 조심하며 길을 걷는다. 백주 대낮의 당당한 폭력... 나에게 폭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순간은 알고 보면 1979년 12월 12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 사이에 일어났던 모종의 군사반란 사건이었다. 밤 사이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총 소리에 놀랐으나 우리는 그것이 연례적으로 일어나는 사격 훈련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보다 극명한 것은 대낮의 경험이다.


1980년 5월의 어느 날. 국민학교 3학년이던 나는 한양대학교 병원에 담임 선생을 병문안하기 위해 방문해야 했다. 그때 한양대학교 앞에 자리하고 있던 장갑차에 설치된 중기관총과 지프들, 얼룩 무뉘 위장포를 씌운 철모를 쓴 병사들, 굳게 닫힌 입술로 오가는 사람들을 쏘아보던 군인들의 M16소총. 그것이 무엇인지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그 때 그 사건들의 대략적인 전말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5년여가 흐른 어느 날의 일이었다. 전지전능한 신적인 존재였던 국가 기구가 권력을 찬탈하고 유지하기 위해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실제로 방아쇠를 당길 수도 있다는 사실은, 국가란 틀 안에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조건지어진 나란 사람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오랫동안 세상이란 거대한 쥐덫에 갇힌 한 마리 생쥐처럼 숨 막히는 공포를 머리 맡에 두고 사는 기분이었다.





이 책
"안전지대 고라즈데"의 부제는 "보스니아 내전의 기록"이다. 낯선 이름이다. 아마도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서울과 평양, 원산과 함흥을 찾고자 했던 유럽의 어느 시민이 그랬을 법하게도 우리 역시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일 때 사라예보를, 고라즈데를 찾아 보려했다면 그와 흡사한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을 거다.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비록 낯선 지명, 낯선 사람들의 모습에서이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낯설지 않다. 이 책을 읽기 불과 며칠 전 나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라는 다소 긴 이름의 시민 단체를 찾아 취재했다. 사무실 입구에는 전지(全紙) 크기의 한반도 지도가 걸려 있었고, 그 지도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현장을 붉은 점과 파란 점, 노란 점 등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각각의 점들이 찍힌 지역에는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미군과 한국군경, 우익 단체들에 의해 희생당한 곳이었다. 심지어는 울릉도 인근에서 발생한 희생자 표시까지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할 때면 종종 어떤 이들에게 북한측이 훨씬 더 많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을 텐데, 남한만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북한이 학살 주체로 자행했다고 하는 민간인 학살 규모에 대해 우리 정부의 공식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12만 9,000여명 선이다. 그에 비해 남한 정부나 비정규 무장 단체에 의한 학살로 추정되는 수치는 100만에 달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제 시선을 다시 보스니아로 되돌려 보자. 보스니아 지역을 흔히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보스니아 무슬림계, 세르비아 정교계, 크로아티아 가톨릭계가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구성원을 종교의 구분이 아닌 민족 구성으로 보았을 때 이들은 모두 남슬라브 계를 뿌리로 둔 사람들이다. 이들이 종교적, 문화적으로 분화된 것은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잇는 교통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한 탓이다. 이렇게 먼 역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념으로 갈라진 남과 북이 치른 내전으로 같은 민족간에 수많은 상처를 남긴 것처럼 구 유고슬라비아 사람들 역시 그 상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에서 어디를 편들어야 할지 몰랐던 유고의 구 지배 계급은 우왕좌왕하다가 쿠데타와 역쿠데타를 거듭하다 결국 추축국 독일의 침략을 불러들였다. 나치는 크로아티아계 민족주의 세력인 우스타샤(A. 파벨리치)와 손잡고 세르비아와 무슬림 세력을 억압하도록 했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 지역은 물론 유고 전역에서 세르비아 계를 몰아내고자 하는 일환으로 대대적인 인종청소를 자행해 약 35만 명에 이르는 세르비아 인들을 처형했다. 우스타샤의 잔인한 학살에 저항하는 단체들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세력인 체트니크와 민족, 종교적 구성을 망라한 세력으로 공산주의자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이 있었다. 체트니크가 전후
"대 세르비아 건설"을 목표로 했다면 티토의 파르티잔은 공산주의 유고 연방의 건국을 목적으로 했다. 이런 목적의 차이에서 보이듯 체트니크는 우스타샤의 학살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크로아티아 계와 무슬림계 사람들에 대해선 우스타샤 못지 않은 학살극을 자행했다.


파르티잔 세력은 체트니크와 우스타샤 그리고 추축국의 집중적인 공격을 방어해내야만 했고, 전후엔 이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문제들을 역사적으로  해결하고 유고 연방이란 단일한 국가 체제를 존속시켜야 했다. 조 사코는 보스니아의 무슬림계인 에딘(Edin)의 입을 빌어 말한다.
"티토의 시대와 그의 정책은 대부분 아주 좋았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여겨지고 있어요. 그의 시대가 끝난 것을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죠. 나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의 어딘가는 미진하다. 조 사코가 코믹저널리즘이란 만화를 통한 저널리즘을 말하려 할 때 우리가 궁금한 것 중 하나는 과연 보스니아에서 이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동안 서방에선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좀더 자세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보스니아의 고라즈데에서 아가씨들이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갈구하고 있을 때... 정작 그 리바이스 청바지의 나라에선 무얼 했는가? 정말 이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한 원인은 단지 종교적인 이유뿐인가? 그런 의문들...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을 읽으며 나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나의 불만이 때론 순전히 나의 자의적 편의에 따라 바뀐단 생각을 했다. 국가테러와 패권테러 사이에서 느끼는 무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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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일본 만화다 - 프레드릭 L.쇼트 | 김장호 외 옮김 | 다섯수레 (1999)


프레드릭 L. 쇼트는 "한국어판을 내면서"란 글을 통해 "만화는 한 세기 전에 미국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었고, 한국의 만화 산업도 예외 없이 매우 세련되고 높은 경지에 다다랐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 만큼 만화가 대중 속에 파고든 나라는 없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우선적으로 지적되어야 할 부분이 한 가지 있다. 예술로서의 만화는 한 세기 전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만약 모던한 장르로서 만화의 출발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프랑스 내지는 영국을 기원으로 삼아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장르의 기원만 놓고 치자면 더욱더 미국이 그 기원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 각국이 만화에 대해서만큼 서로 자신이 그 기원이라 해도 좋을 만한 역사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만큼 만화가 대중 속에 파고든 나라는 없다는 그의 지적, 그리고 만화를 예술 보다는 문화 산업으로 보았을 때 한 세기 전 미국을 그 기원으로 삼는 것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프레드릭 L. 쇼트는 미국인이다. 동시에 그는 일본 만화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지난 1983년에 "망가! 망가! 일본만화의 세계"라는 제목의 책을 냈고, "이것이 일본만화다"는 그 후속작인 셈이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망가"는 만화의 일본어 발음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도 당연히 일본 아니메가 아닌 인쇄 매체를 통한 일본 만화다. 프레드릭 L. 쇼트는 일본의 만화 가운데 스토리 구조를 갖춘 만화 전반에 대해 잘 정리해주고 있는데,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일본인과 일본 만화", "새천년을 맞는 현대의 일본 만화"는 망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개괄적인 내용들을 담고, "일본의 만화잡지"에서는 일본 만화 산업의 기폭제, 일본 만화 산업의 안정적인 기반 역할을 하고 있는 일본의 여러 만화 잡지들을 잡지별 특색과 함께 다룬다.

 

세번째 "주요작가와 작품"에서는 망가의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작품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일본 만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침묵의 함대", "지팡구" 등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가와구치 가이지, "도라에몽"의 후지코 F. 후지오 등을 비롯해 최근 일본 우경화와 더불어 문제가 되고 있는 고바야시 요시노리, 그리고 지난 95년 일본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옴진리교 만화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네번째는 일본 만화의 신이란 찬사를 받고 있는 데즈카 오사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프레드릭 L. 쇼트와도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던 오사무가 지난 89년 타개하면서 그 자신이 바치고 싶었던 헌사를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쇼트가 데즈카 오사무를 이야기하는 배경엔 개인적인 친분 관계도 있지만 그 보다는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듯 하다. "만화를 넘어서"에서 주로 다뤄지는 내용은 '망가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프레드릭 L. 쇼트는 이 책을 통해 가라타니 고진이 문학에 내린 비관적 전망을 현실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듯 보인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동네]2004 겨울호 '근대문학의 종말' 이란 글을 통해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문학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단언한 바 있다. 프레드릭 L. 쇼트는 "일본의 가장 힘있는 출판사들 사이에서도 팔리지 않는 문학작품보다는 만화 관련 책에 더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물론 진지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현대 일본의 작가들이 자신들이 과거 만화가 지망생이었거나 실패한 만화가였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지는 않지만, 쇼트는 이들을 추적해 명단을 공개한다. 1973년 "일본 침몰"이란 유명한 공상과학소설을 썼던 고마쓰 사코, 일본 최고의 다작을 한 것으로 알려진 아라마타 히로시, 우리에게도 "풍장의 교실", "120% COOL" 등으로 잘 알려진 야마다 에이미 등이 한 때 만화가였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미 잘 알려진 만화가들이 만화를 포기하고 글 쓰는 일로 전환한 경우들도 있다. 야마가미 다쓰히코는 본래 만화가였으나 이를 포기하고 소설로 돌아섰으나 이전 만화가 시절의 명성은 얻지 못했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이들도 있다. 국내에도 번역출간된 "개같은 내 아버지(Father Fucker)"의 작가 우치다 순기쿠는 지난 1994년 "분카무라 드 마고"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이때 그는 소설가가 아니라 만화가로 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세키가와 나쓰오, 역사물 작가 이노세 나오키 등이 있다. 만화가는 아니었지만 열렬한 만화광이었던 소설가들도 있는데, 군국주의를 적극 찬양하다 결국 할복해버린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사무라이 만화를 주로 그린 히로타 히로시의 추종자라고 공언했고, 요시모토 바나나는 순정만화의 세계를 순수 문학의 세계로 변질시킨 작가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요시모토 바나나는 순정만화가 오시마 유키고의 영향을 받아 작품활동을 한다는 비판을 들었다). 순수문학이 아닌 대중문학 분야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극적으로 발휘돼 오늘날 출판 대국 일본의 많은 책들은 만화와 문학의 경계 사이에 있는 책들을 만들어 낸다.

 

퓨전(fusion)은 동서양 음식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만화와 문학이란 다소 이질적일 수 있는 장르 사이에도 일어나고 있다. 쇼트는 일본의 만화 산업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하지만 결코 어렵지는 않다. 일본에서는 지난 1995년 한 해 동안 모두 23억 권의 만화책과 잡지가 만들어졌고, 그 가운데 19억권이 실제로 팔렸다고 한다. 오늘날 일본에서 만화는 가장 거대한 판타지 제조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모든 미디어 가운데 가장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다. 물론 미국의 만화 산업 역시 규모면에서 일본의 만화 산업과 비교해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에서 일본 만화 제작을 대행하는 토렌 스미스의 "많은 미국 만화 출판사들은 기형적인 조폐팡이 되어 버렸다"는 지적처럼 미국의 만화잡지들은 수집가들의 애장품으로 기능하는 반면 일본의 만화는 확실한 소비 매체로 자리잡고 있다(미국의 만화잡지 애호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비닐 포장 그대로 수집하는데 열광한다).

 

일본 망가의 성공엔 미국과 유럽의 채색 만화가 주는 예술성의 희생 대신 대량 생산이란 문제가 자리하고 있지만 약간의 질을 희생시킨 대신 그들은 이야기 구조와 캐릭터 구성이란 측면에서 미국이나 유럽 만화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일본 만화가들은 작품에 영화적인 스타일을 도입하여 스토리를 더욱 발전시키고, 캐릭터의 심리를 좀더 복잡하게 만들어낸다. 이에 대해 쇼트는 미국 만화가 브라이언 스텔프리즈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미국의 만화는 일종의 웃기는 그림이 되어 버렸습니다. 터무니없는 인간들이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고 있지요. 그것이 미국 만화입니다. 그러나 일본 만화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쇼트는 망가의 세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만화의 표현과 폭력과 성범죄 문제에 대해 그는 일방적으로 망가의 편을 들지도, 그 반대의 해석을 내리지도 않는다. 데즈카 오사무의 인종 차별적인 표현에 대해 그는 한 편으론 이해를 보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역시 비판을 가한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해의 범위가 더 폭 넓기는 하지만 말이다. 쇼트는 일본 만화의 미래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대신 부정적인 측면들을 보여준다. 일본 만화 산업의 성장이 급격히 둔화되고 있는 현실적 원인을 분석하면서 그는 지나치게 상업화된 일본 만화 산업이 본래의 창조력을 잃고, 산업화되어 상품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비디오를 비롯해 게임 시장 등이 거대화되면서 만화 독자들 가운데 상당수를 잃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인기를 얻은 작가들이 너무 많은 매체에 작품을 게재하면서 문하생들을 동원해 일종의 만화공장을 돌리는 것이 일본 만화의 창조력을 고갈시킨다는 것이다.

 

우리 만화가 미국 만화 시장의 5% 가량을 점유하고 있다고 들었다. 일본 만화와 비교하자면 아직까지는 미미할지도 모르겠으나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만화 시장은 해적판들로 인해 오래전에 사실상 완전 개방되었는데, 많은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일본 문화 개방이 결과적으로 우리 만화에 경쟁력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에 제대로된 만화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우리 만화의 국내 시장 점유율(단행본 만화 구매를 중심으로)은 형편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앞으로 점차 개선될 것이라 믿는다. 쇼트의 이 책을 읽으며 부러웠던 것은 일본 문화의 연륜이 외국의 학자들에게까지 그들의 문화를 연구할 수 있도록 켜켜이 쌓여있다는 점이다. 망가의 세계를 좀더 잘 알고 싶은 분이라면 한번쯤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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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건버스터(トップをねらえ!, GunBuster Top o Nerae!, 1989)
30분 총 6화, 일본OVA,
감독 : 안노 히데아키





오타쿠, 문화의 톱이된 신호탄!

어느 사회든 질적인 전환을 거쳐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차이를 보이는 세대도 있기 마련이다. 전후 영국의 앵그리 영맨, 미국의 비트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사고 방식을 보여 기성 세대를 소크라테스 시대 이래로 계속된 고민에 빠뜨린다. "요즘 얘들 문제야!"라는... 우리에게도 한동안 회자되었던 세대 구분법으로 모래시계 세대니, 386세대니 하는 정체성 자체보다는 언론의 편의주의적 작명법이 작용한 아리송한 세대 구분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식의 세대 구분은 세대와 세대간의 정체성을 지나치게 획일화한다는 우를 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처럼 압축적 근대화 내지는 성장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이런 세대론은 대체로 10년 주기로 이루어져 지나치게 세대(대체로 30년을 주기)를 미시적으로 구분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일본 사회에서 주목해볼 세대론 중 하나는 바로 1970년 동경엑스포를 전후한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오타쿠 세대일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일본 문화의 중핵을 이루는 인물들로 성장했고, "건버스터"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와 이 작품에 참여했던 대다수 인물들 역시 그와 함께 오타쿠 세대로 구분된다. "건버스터 - 톱을 노려라(이하 '건버스터)"는 그간 무성한 얘기들을 만들어 왔다. 그것은 어떤 측면으로 보자면 이 애니메이션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가 이 작품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 감독으로 성장하며 전작을 상회하는 인기작들을 만들어내왔기 때문이지만, "건버스터" 자체가 풍성한 이야기 거리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건버스터"가 매우 풍성한 패러디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본래 "패러디(parody)"란 말은 문학용어에서 출발한 단어이다. 유명 작가의 시나 작품의 문체나 운율을 모방하여 이를 풍자하거나 조롱하는 것을 의미한다. 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에 유행했던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와 같이 일명 "노가바"를 경험한 이들은 사실 "패러디"란 말 자체는 모를지라도 경험상으로는 이미 체험해본 너무나 익숙한 기법이다.

 

그것이 패러디가 되었든 오마주가 되었든 이 기법의 필수 요소는 그 사회가 경험하여 축적한 양적, 질적으로 풍부하고 풍성한 이전의 문화적 업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러디 기법은 모두가 알만한 것들이어야 보다 많은 재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작품에 대한 패러디는 그 자체로 이미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 말을 기초로 따져보면 "건버스터"의 성공 이면엔 우리 사회에 이미 일본문화(특히 일본 만화, 애니)가 자리잡고 있음을 뜻한다. "건버스터"는 지난 1989년 GAINAX에서 만든 OVA로 안노 히데아키의 실질적 데뷔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그가 어린 시절 열광하며 바라보았던 일본 만화, 애니, 특촬물들을 모두 녹여내고 있다. 디즈니의 최신작 "슈렉" 2탄(2004년)이 온갖 영화들을 패러디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최소한 "패러디 애니"로만 국한시킬 때 가이낙스 "건버스터"는 20년 가량 앞선 작품이다. 오타쿠가 출현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것은 소수의 매니아들, 일부 광적인 증세를 보이는 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오타쿠는 인터넷이라는 사이버공간과 결합하면서 더이상 소수 매니아들의 전유물이 아닌 보다 광범위한 계층의 문화로 격상되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 사회든, 일본이든 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그들이다.

 

건버스터 - 진부한 이야기 구조 속에 빛나는 보물들

"건버스터" DVD는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아니메) DVD를 구입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일본 문화에 깊이 빠져든 이들은 그들대로 DVD를 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네들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혹은 다른 루트를 통해 이 아니메를 보았고, 어떤 이들에겐 아이들 장난 같은 "아니메"를 굳이 돈 들여 구입해서 볼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드러낸다. 내가 이 DVD를 구입했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양자의 태도는 우리 사회에서 일본 문화를 대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스스로를 진지한 고급 문화 향유자로 규정하는 이들은 일본 아니메가 미국의 디즈니 애니보다 수준 이하로 평가절하하려는 경향이 아직도 있고, 일본 문화 내지는 오타쿠 문화를 점유한 이들은 그들의 문화를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이런 양자의 태도는 국내적으로는 세계 제일의 애니메이션 제작국(주로 하청업체로서)이면서도 자체적인 캐릭터와 커리어를 축적하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의 오타쿠들은 문화소비자에서 문화생산자의 지위를 획득했으나 우리 사회의 오타쿠들은 아직도 뒷거리를 배회한다. 이 차이가 일본과 우리의 문화생산이란 측면에서 차이를 빚어내는 것이다.

 

나는 여러 매체들(주로, 아니메를 다룬 대중문화서적들이나 인터넷 등을)을 통해 "건버스터" 이야기를 들었고, 이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볼 요량으로 이 DVD를 구입했다. 전부 3장으로 구성된 이 DVD타이틀은 각각 2화씩을 담고 있다. 처음 1, 2화를 보면서 나는 몹시 실망했음을 고백하겠다. 작화나 그림체 등에서 마치 1960년대말에서 70년대 초반에 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 수준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1화의 제목 "충격! 나와 언니가 파일럿!?"이라니... 이건 60년대말 순정만화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아닌가? 스토리를 보면 21세기를 갓 맞이한 인류는 사상 최악의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유는 외계에 출현한 괴생물체가 지구함대를 우주에서 간단히 전멸시켜 버린 사태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외계생명체에 의해 전멸당할 누란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런 스토리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보아온 무수히 많은 스토리들에서 익숙한 것이다. 가령, 우리에겐 "날아라 V호"에서도 이미 경험한 이야기인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이런 익숙한 두 개의 스토리 구조와 미소녀물이라는 일본적인 애니의 전형을 아무런 고민(?)없이 한데 버무려 버린다. 지구를 전멸 상황에서 구출할 히로인의 출현과 소녀 스포츠 만화의 구조를 한데 모아논다. 지구의 로봇파일럿 학교를 다니고 있는 "노리코"는 15년 전 아버지가 이끈 지구 함대와 아버지의 전함 "엑세리온"이 우주 괴물에 전멸당한 뒤에 그에 따른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 소녀 앞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코치는 그녀를 정예 파일럿으로 덜컥 선발해버린다. 평소 아무런 재능도 없어보이던 노리코가 정예 파일럿으로 선발되자 다른 학생들은 노리코를 이지메한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각고의 노력을 거듭하는 노리코는 점차 보다 강대한 적을 만나며 성장해나간다. 이런 스토리조차 "드래곤 볼" 이래 시리즈로 진행되는 일본 만화의 전형이다. 낯익은, 너무나 익숙한 스토리와 전형적인 인물의 출현의 연속이란 점에서 "건버스터"는 진부함 그 자체이다.

 

건버스터의 성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런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가이낙스와 안노 히데아키는 전작 "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를 통해 애니메이션을 통한 최고의 리얼리즘을 추구했었다. 결과는? 대참패였다. 이때의 실패를 경험삼아 가이낙스와 안노 히데아키는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를 이 작품 "건버스터"에서 시도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이후 이어지는 그들 작품세계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들은 전체 이야기란 측면에선 이미 여러 성공 사례들이 축적된 기존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들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대신, 부분적인 요소들을 이야기 전체에 복선처럼 풍성하게 깔아 놓는다. "건버스터"를 감상하는 이들은 마치 소풍나와 보물찾기를 하는 심정으로 다음 장면에선 어떤 숨겨진 패러디가 있을까 궁금해 하며 단 한 장면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마치 맛있는 치즈를 깔아 제리를 유혹하는 톰처럼 우리들은 덫이 놓인 다음 장면, 다음 장면을 쫓아간다.

 

"건버스터"는 그렇게 관객의 시선을 패러디에 집중시킨 다음 그들이 설치한 거대한 덫으로 몰아간다. 오타쿠들이 앵그리영맨이나 비트 세대보다 가벼워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네들 역시 출현 당시엔 기성 세대들에겐 한없이 가벼운 존재들로 폄하당했었음을 잊어선 안된다. "건버스터"는 제3화 "첫 설레임, 첫 출격"에 이르러 그네들이 가볍기만 한 영상세대, SF미래의 긍정적인 면에만 주목하고 있는 세대가 아님을 날카롭게 증명해보인다. 악전고투 끝에 우주 전함의 로봇 파일럿으로 탑승한 "노리코"는 함내에서 "스미스'를 사귀게 된다. 노리코가 스미스를 만나는 에피소드는 진부한 학원물의 에피소드들처럼 보인다. 담력시험을 치르고, 음료를 나눠마시며 간접키스에 볼이 빨개진다. 그러나 뒤이어 찾아온 괴수들의 습격, 노리코와 스미스는 한 팀을 이뤄 출격하지만 파트너 스미스는 한 순간 흔적도,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우주 공간의 망망대해에 흐르는 것는 오로지 침묵 뿐.... 죽음은 한 순간에 찾아와 노리코의 첫사랑이자 파트너를 제거해버렸다. 노리코의 아버지는 그녀가 8살 때 전사했지만, 그의 죽음은 다만 우주 멀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노리코는 직접 그 죽음을 목격할 수 없었지만, 스미스의 죽음은 바로 그녀 곁에서 그녀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순간에 일어난다.

 

노리코가 지구의 로봇 파일럿 학교부터 따랐던 언니 카즈미 역시 사랑하는 연인을 잃는다. 그들이 잃는 것은 단지 주변의 연인들만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따르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는 물체의 시간은 정지한 관찰자가 느끼는 시간보다 늦게 간다" 광속의 속도로 우주를 비행하며 우주 괴수들과 싸우는 노리코의 시간은 그녀의 친구들보다 훨씬 더딘 것이었다. 우주에서 벌어진 며칠 동안의 전투를 마치고 지구에 돌아 와보니 자기는 아직 고등학생인데 친구들은 벌써 그녀보다 10여년은 더 나이들어버린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기성세대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노리코가 우주에서 잠시 머물던 몇년 동안 언니 카즈미마저 성숙한 어른이 되어버린다. 노리코는 홀로 남는다.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이루는 제6화 인류를 구원할 최후의 전투를 마치고 기사회생으로 돌아오는 노리코 앞에 지구의 시간은 그로부터 1만 20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흘러 버렸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건버스터"가 온갖 가벼운 패러디물들 속에서 명성을 유지하게 된 원인은 거기에 있었다. 우리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다. 사회에 나와 한참 적응하느라 고생하다가 문득 옛 친구들을 잊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만난 친구들, 마음은 예전과 다름없는데 그들은 이미 기성 세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배가 불룩하게 나오고, 머리 숱이 적어져 있다. 이제 만나서 나눌 이야기라곤 나날이 오르는 물가, 재테크, 시시껄렁한 정치 얘기가 전부다. 그제서야 우리는 시 한 편을 기억해낸다.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 질수록
당신을 향한 마음이 희미해 진다면
난 당신을 잊겠습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것이 돌려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러워 말지니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얻으소서
초원의 빛이여
그빛 빛날때 그대 영광 빛을 얻으소서 !

한때 그렇게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젠 영원히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 찾을 길 없을 지라도 우리 서러워 말지니
도리어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얻으소서

여태 있었고 또 길이 있을 그 원시의 공감 가운데에서
인간의 고뇌에서 우러나는 그 위로의 생각 가운데에서
죽음을 뚫어 보는 그 믿음 가운데에서
현명한 마음을 부르는 세월 가운데.....

<'초원의 빛' 전문, 워즈워드>

 

"건버스터"와 오타쿠들의 성공에는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우리 인생과 사회에 대한 그들 나름의 성찰과 쓸쓸함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 우주에선 꼭 이런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거니?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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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전7권)- 미야자키 하야오 | 학산문화사(2010)


미야자키 하야오(宮埼駿)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텍스트

- 그러나 결코 만만치 않은....

미야자키 하야오(宮埼駿), 만약 그가 일본인이 아니라면 최소한 양국의 역사적 연원을 거슬러 오르는, 한 작가에 대해 갖게 되는 이미지와 비판들에 대해 몇 차례의 필터링을 거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에 관해서만큼은 무엇이든 자유롭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이라고는 하더라도 자유로운 편에 속한다. 그의 작품들은 일본 아니메에 대한 선입견들 - 폭력, 섹스, 왜색풍 - 로부터 비교적 너그러운 대접을 받으며 국내에선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혜택들 - 청소년의 정서 순화에 유익하다거나, 어린이들도 함께 볼 수 있을 만큼 순화된 스토리란 인상 - 을 함께 누리는 거의 유일한 애니메이션 작가이다.

 

나름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보았고, 궁리해봤지만 다카하다 이사오에 대해 내가 내린 단순하지만 명쾌한 결론과 달리 그에 대해서만큼은 쉽게 결론을 지을 수 없었다. 다카하다 이사오에 대해 내가 내린 단순 명쾌한 결론은 궁극적으로 "좋은 사람"이란 평이었다. 그에 비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외부로 표출되는 일본적인 색채는 초기작들의 경우 약한 편이지만 다카하다 이사오의 일본이 소재나 배경적인 측면인데 비해 하야오의 작품에 드러나는 일본적인 풍은 세계관 자체의 문제로 보인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평가를 그의 유일한 만화 작품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읽기 전엔 내릴 수 없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었다. 그 까닭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난해함에 기인하는 것도 있지만, 나 자신이 인간이 배제된 세상에 대해서까지 상상을 확장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의 세계관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인데, 애니메이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가 손수 대본을 만들고, 그렸다는 점과 런닝 타임이란 시간적 한계 등으로 한 작가의 세계관을 담아내기 어렵다는 장르적 한계를 지닌 영상물에 비해 만화가 작가의 세계관이 드러내는데 좀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동명이고 등장인물 등 여러 면에서 겹치지만 별도의 텍스트로 생각해야 할 만큼 다른 분위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생명을 조작해낼 만큼 높은 물질문명을 쌓아올린 인류는 "불의 7일간"이란 대재앙(전쟁)을  초래해 자멸하고 말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인류는 '부해'라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소를 뿜어내는 자연과 거대해진 곤충류의 습격 속에서 싸우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바람계곡” 사람들도 그런 인류의 생존자들 가운데 하나였고, 이곳의 왕녀 나우시카는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곤충들과도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특이한 감성을 지닌 소녀였다. 이야기는 그런 나우시카가 ‘불의 7일간’을 초래한 거신병을 부활시키려는 음모에 맞서 싸우며 인류 복원의 비밀에 접근해가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여러 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원형질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그런 만큼 여러 면에서 이전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다루는 것보다 복잡한 스토리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애니메이션 작품들 속에서의 해피엔딩이나 소박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여전한 것은 자연으로 상징되는 비합리적인 세계관, 감성, 직관을 갖춘 주인공(나우시카)와 과학문명으로 상징되는 합리적 세계관, 이성을 갖춘 대립항(크샤나)의 존재이다.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특히, 여주인공)의 원형이란 평가를 받는다. 구원의 상징을 여성에서 찾는 것을 두고 여성주의(페미니즘)적 입장에서 보자면 루이 아라공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식으로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안타고니스트 역을 맡는 여성(크샤나)조차 이해받을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이 상대적으로 몇몇 주인공에 집중하여 주변부 인물들을 단순화시키는데 비해 복잡한 인간군상을 솜씨 있게 그려내고 있다.

 

내가 애초에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해 결론을 짓지 못한 문제는 이 작품을 읽은 뒤에도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았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의 세계관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이 겹치고 헤어지는 부분에 의한 것이다. “인간이 배제된 세상”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그것을 긍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저 스토리만 따라가더라도 충분히 재미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묻고 있는 것은 동양철학의 사유체계와 서양철학의 사유체계가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시킨 질서이기 때문이다.

 

동양 철학에서 최고의 진리 체계는 자연(自然)이며 자연은 존재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즉, 인간의 생존 혹은 멸종의 문제는 자연적인 생과사의 순환이란 점에선(동양적인 철학체계 안에서 인간의 죽음은 자연의 질서로 복귀하는 것인데 비해 서양의 죽음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질문 속에 포섭된다)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또한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닐까? 하야오는 치열하게 질문했으나 끝내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인간은 수천수십억의 다른 생명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지구상에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가? 나는 하야오에 대한 결론을 아직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 머지 않은 장래에 그에 대해 긴 글을 쓸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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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로봇의 혼 - 선정우, 시공사(2002)


나는 지금도 종종 프라모델숍 앞을 지날 때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유리창 안을 멍청하게 들여다 보는 버릇이 있다. 왜냐하면 그곳엔 어린 시절의 내가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 먹는 것도 잊어먹을 만큼 열광했던 TV 만화영화들 가운데서도 단연 첫손에 꼽을 수밖에 없는 원형질적인 작품을 들라하면 "마징가Z"일 것이다. 우리나라 TV에서 만화영화를 최초로 방영한 것은 1964년 8월의 일이다. 이때 처음 방영된 만화영화는 물론 외국 것으로 "개구장이 데니스"였고,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가 만들어져 극장에 내걸린 건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으로 1967년 1월의 일이었다.

우리나라 TV에서 일본 만화영화가 방영되기 시작한 것은 1968년 10월 "요괴인간"이 방영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는데, 이후 일본 만화영화가 공중파 방송을 통해 방송되기 시작한다. 이후로도 여러 편의 일본 만화영화들이 방송되었지만, TV에서 방영된 일본 만화영화의 대명사는 아직까지 누가 뭐래도 "마징가Z" "캔디"였다. 선정우의 "슈퍼 로봇의 혼"은 바로 이때의 세대들이 성장하여 그 무렵 보았던 일본 만화 영화 그 가운데서도 "슈퍼 로봇" 계열 애니메이션 작품들에 대한 재발견을 담고 있는 책이다. "캔디"가 소녀들을 위한 순정만화영화, 멜러 드라마의 대명사라면, "마징가Z"는 소년들을 위한 일종의 액션 로망이라 할 수 있다.

선정우 씨는 PC통신 시절부터 이 방면의 고수로 활동해 온 바 있다. 우리는 지난 90년대 초반 서태지의 등장을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인식한다. 그 바탕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스스로 공부하여 개척해낸 사람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시스템 속에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좋아한 까닭에 깊이있게 파고 들어 그 방면에 전문가가 되는 것 말이다. 선정우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이를 어떤 의미에선 우리 문화의 파이어니어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일본만화를 소개하는 것이 우리 문화의 개척자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며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한류란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우리가 일본을 아는 만큼 상대적으로 더욱 강화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실례로 이젠 만화에도 한류 바람은 서서히 시작(미국 만화 시장의 5%를 한국만화가 차지)되고 있으며, 선정우 씨 역시 그 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슈퍼로봇이란 무엇인가? 로봇(robot)이란 말이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K.차페크가 희곡
"로섬의 인조인간(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유래되었단 사실은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다. 이를 예술작품에 응용하여 가장 크게 성공한 장르는 아마도 만화영화일 것이다. 만화영화, 특히 일본의 아니메 작품들은 성과 액션이란 대중문화의 양대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자유자재로 이용한다. 그 가운데 액션이란 측면에서 로봇은 가장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었다. 그런 로봇물 가운데 슈퍼 로봇이란 명칭은 건담류의 작품이 출현하면서 이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쓰인 듯 싶다. 왜냐하면 건담이란 리얼 로봇이란 컨셉으로 인기를 얻으며 이전의 거대로봇물들을 "슈퍼 로봇"이라고 통칭한다.


선정우는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했던 이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자생적 만화 매니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가 그간 여러 잡지와 PC통신 게시판을 통해 발표했던 글들 가운데 '슈퍼 로봇'에 관련된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인데,
"슈퍼 로봇"이란 명칭 자체가 로봇의 슈퍼파워보다는 슈퍼 덩치에 의한 것이므로 "아톰"과 같이 우리에게 낯익은 캐릭터는 빠져 있다. 이 책은 소년의 원초적 로망이랄 수 있는 '마징가 Z' 로부터 시작해서 70년대말 어린이잡지에 연재되다 중도에 사라져 많은 아쉬움을 남겼던 '겟타 로보', 소년이 조종기로 거대로봇을 조종한다는 컨셉으로 인기를 끌었던 "철인28호"와 같은 컨셉의 '자이언트 로보', 안노 히데아키 그룹의 재패니메이션 리바이벌 모음집이랄 수 있는 '톱을 노려라!'를 중심으로 일본 아니메의 한 조류라 할 수 있는 거대로봇들을 소개하고 분석한다. 

그 가운데에는 그간 우리가 잘 알지 못했거나 흘려넘긴 부분들 예를 들어 '마징가 Z'에 등장한 악당 캐릭터 가운데 지금까지 우리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아수라 백작이 사실은 백작이 아니라 남작이었으며 그녀 혹은 그놈
(반남반녀의 캐릭터였음)이 죽은 뒤 헬 박사가 백작으로 승격시켜준 것이라는 내용들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재미난 부분들로는 거대로봇물이 어떻게 아동용 완구 메이커인 반다이와 결합하여 합체변형로봇으로 변화되는가? 어째서 거대로봇물 영화들은 어린이들의 방학 기간과 때맞춰 극장에서 개봉되는지 등을 다룬다. 이 책의 분석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내용은 마징가Z가 여성형 로봇(가슴에서 미사일이 발사된다) 아프로다이 에이스와는 물론 때론 미네르바 X와도 데이트를 즐겼다는 내용이다.

 


이 가운데 저자가 가장 힘주어 주장하는 바는 리얼로봇 매니아들의 주장처럼 '슈퍼 로봇' 혹은 '거대로봇'이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작품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진지하게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파격적인 상징들도 내포되어 있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마징가Z" "그랜다이저"에 동성애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분석은 참신하면서도 그 분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는 지난 해 욘사마와 지우히메 열풍에 휩싸여 일본 내 한류 바람을 다소 민족주의적 흥분으로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한류와 일류, 그리고 중류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 삼국(이 경우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은 배제되긴 하지만)의 교류 역사는 반만년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어느 한 국가에 의해 좌우되거나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문화가 아닐 것이다. 이런 교류의 역사를 근대만의 것으로 한정해서 바라볼 때 우리의 문화관은 협소하고 편협한 민족주의적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고, 진정한 한류, 진정한 문화교류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언젠가 일본에서 바라본 한국 문화 그리고 만화에 대한 이렇듯 진지하고 재미난 탐구 서적들이 역으로 수출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 참고로 이 책은 올칼라다. 물론 일본 만화 영화, 거기에 거대로봇물에 별로 흥미가 없는 이들이 본다면 그다지 재미없는 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이 다루고 있는 아니메들과 함께 본다면(DVD로 출시된 것들이 상당수 된다) 재미는 배가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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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묵시록 카이지(총 39권) - 후쿠모토 노부유키 | 학산문화사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라고는 결코 할 수 없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부유키의 그림체는 아무리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 잔인하게 말하면 싫어하는 그림체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체는 "Arms, 스프리건"의 작가 "료우지 미나가와", "헬싱(Hellsing)""히라노 코우타" 스타일이다. 하지만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작품들이 주는 충격은 이 모든 것을 상회하고도 남는다. 1958년생 개띠인 만화작가 후쿠모토 노부유키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극(極)"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작품 "무뢰전 가이"를 보고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워낙 그의 그림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의 작품을 보고나면 며칠동안 더러워진 기분을 만회하기 힘들기 때문에 "도박묵시록 카이지"도 오며가며 한 번 보긴 봐야 할 텐데 하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를 읽고 나서도 이 작가의 극단적인 묘사와 이야기 진행 방식은 영원히 익숙해지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작가의 낯짝이나 보아둘 요량으로 찾아보았는데, 작가는 알게 모르게 자신과 닮은 얼굴을 캐릭터화한다는 만화계의 오랜 격언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카이지와 숙명의 대결을 펼친 리네카와를 합쳐 논 듯한 얼굴이었다. 이쯤 읽고 난 뒤 저 인간이 이번엔 왜이리 엄살이야라고 한다면, 당신은 노부유키의 만화를 한 편도 읽지 않은 사람이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다면 이미 한 번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일 것이다. 소설에 문체란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만화에서 그림체가 차지하는 비중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낼 수 있다. 소설가의 문체란 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듯 만연체, 간결체, 건조체 식으로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작품마다 다르고, 작품 내에서 호흡을 긴박하게 끊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소 늘어진다 싶게 유장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뛰어난 이야깃꾼일 수록 호흡과 완급을 조절해가며 독자들과 승부를 벌인다.

 

 

앞서 나는 노부유키의 그림체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런 개인적인 취향에서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각진 캐릭터와 거칠고 굵은 선, 투박한 배경묘사는 작품의 스토리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 이 작품의 스토리로 한 번 들어가보자.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제목에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도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의 독서 행태는 스스로도 잡독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독서행태와 달리 나의 취미는 담백 그 자체에 속한다. "읽고 보고 듣는다"가 내 취미 생활의 전부이고, 이와 약간 다르게 활동적인 취미가 있다면 "찍는다" 정도가 있을 뿐이다. 바둑, 장기는 물론 당구, 볼링도 할 줄 모르고, 술도 거의 안 마신다. 4천만의 유희인 고스톱도 장가들어 친척들이랑 어울리려다보니 간신히 패나 떼는 정도다. 그것도 가끔 왼쪽으로 돌려야 하는지 오른쪽으로 돌려야 하는지 몰라서 어른들에게 야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인 사람이다.

 

그러니 도박은 더욱더 젠병인데, 혼자 그런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워낙 나의 투쟁심이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는 게 싫은 건지, 지는 게 싫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다못해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도 온라인으로 누군가와 대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혼자 컴퓨터랑 논다. 일단 승부를 겨루는 일 자체가 피곤하다. 그래서 남들이랑 심심풀이로도 내기하는 법이 거의 없다. 게다가 가위바위보 게임을 해도 이기는 법이 없으니 남들 연애담에 등장하는 애인 팔목 때리기 게임에서 애인 팔목을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하곤 호호 불어주었다는 이야기는 나에겐 거의 영웅전설에 해당한다. 그런 사람이 온갖 "도박"이 등장하는 만화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결론은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재미라고 한정지어 말하기에 미안할 만큼 충격적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주인공 카이지는 도시 변두리를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나 하는 변변치 않은 청년이다. 가진 것도 없고, 별로 배운 것도 없는 그저그런 청년인데, 심성이 곱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가진 자들에 대한 공연한 복수심에서 남의 고급차에 못으로 흠집내기를 일삼는다. 그런 어느날 카이지에게 사채업자 엔도가 찾아온다. 친구의 빚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어 그가 평생동안 일해야 간신히 갚을 수 있을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변제해내란 것이다. 엔도는 카이지에게 평생 빚을 갚으며 살던지 아니면 재애그룹에서 운영하는 도박선의 게임에 참가하여 빚도 갚고 일확천금도 얻을 수 있는 길을 택하던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이야기한다. 카이지는 고심 끝에 게임에 참가하기로 한다.

 

만화를 보기 전에 나는 잠시 하다못해 고스톱도 여러 규칙들이 있어 게임 규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봐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데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선 얼마나 어려운 게임들이 벌어질까 내용을 이해못하면 어떻게 하지란 염려를 했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게임(도박)의 규칙은  매우 단순해서 도박을 모르는 이들도 이해하기 쉽다. 이 만화엔 첫번째 도박 "한정 가위바위보"로 시작해서 "용사의 길", "E카드", "제비뽑기", "지하친치로", "빠찡코"에 이르기 까지 모두 6개의 도박이 등장하는데 작가 노부유키는 만화를 보기만하더라도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을 알기 위해선 함께 술을 마셔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함께 도박을 해보는 편이 더 빠를 것 같다. 노부유키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도박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존재 방식과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도박을 아는 이들은 도박을 통해 돈을 따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소위 타짜들이 이야기하는 도박의 십계명 가운데 첫째 "카지노의 규칙은 카지노 업체에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잃는 것은 당연하다."이다. 얼핏 노부유키의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패자에게 쓰레기라는 치욕을 안겨주며 승자가 패자에게 한없는 경멸을 보낸다. 리네카와는 "너희들은 계속 져왔기 때문에 지금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빈궁하고... 꾸물꾸물... 인생의 밑바닥을... 기고 기고... 기고 또 기고 기고..., 기고 있는거야...! 왜냐? 그것은 너희들이 오로지 계속 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이기지 못하면 쓰레기.. 이겨야만한다... 이겨야만한다!"고 말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평생직장의 신화가 무너진 뒤 우리 사회는 승자독식의 게임이 펼쳐지고 있다. 종종 한 명의 천재가 100명의 무능한 직장인들을 먹여 살린다는 식의 주장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곳이 현재 우리 사회의 풍속도가 아닌가.

 

"도박묵시록 카이지"엔 숱한 명대사들이 있다. 하지만 그 명대사들은 "카우보이 비밥" 류의 쿨하고 철학적인 그럴 듯한 외피를 뒤집어 쓴 낭만적인 대사

들이 아니다. 이 작품의 주요 명대사들 가운데 대부분은 카이지를 철저하게 경멸하고 자신들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도박을 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규칙과 트릭을 이용하는 리네카와의 입에서 나온다. 그 가운데 압권인 부분을 소개해본다.  리네카와는 도박에 나선 이들의 심리를 패자의 것이라 말한다.

 

보통 치료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심성이 병들어 있어. 그 병이란... 어떤 사태에 이르든 철저히 진검 승부를 하지 못한다는 병이지.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놈들은 너무도 깊이 그 생각에 빠져서, 자신의 공상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바보천치들이야. 언제든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빚을 떼어먹든, 또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 사람을 죽인다 해도 말이야...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용서 받는다. 왜냐하면.. 지금 일어난 이 사태는 어디까지나 '가짜' 고, 진짜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야. 거짓말이 아냐. 그 증거로 지금 이렇게 명백하고 적나라하게... 목숨을 건 승부고, 패배는 죽음이라고 얘기 했는데도, 놈들은 그걸 자기 편리대로 멋대로 왜곡하고있어. ...<중략>... 자기 사정이 나빠지면 도중 하차라니... 뿌리째 썩어 있다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어. 저런 놈들은, 평생 그 '가짜'에서 눈을 뜨지 못해. 우둔하게 자고싶은만큼 자고, 억지로 일어나서, 반쯤 자고있는 듯한 의식으로 매일을 반복하지. 따분한 걸 죽도록 싫어하면서도, 그 근본원인은 외면하고, 조금 열중하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보잘 것 없는 도박이나, 별 상관도 없는 여자를 쫓아 다닐 때 정도... 왜 그런 욕나오게 재미없는 기분으로 이 인생의 귀중한 하루하루를 소비하고있느냐면... 언제나 어떤때든지 현실은 놈들에게 있어서 '가짜' 이기 때문이야. 즉, 진짜가 아닌 ... 이 현실이... 자신의 진짜 현실일 리가 없다... 놈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지... 따라서, 서른이 되든 마흔이 되든 놈들은 계속 착각을 하는거야. 내 진짜 인생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진짜 나' 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이 정도라고, 질리지도 않고 계속 그렇게 착각하다가 결국은..., 늙고..., 죽는다! 그 순간 싫어도 깨닫게 될꺼야.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것이, 통째로 '진짜' 였다는것을! 사람은 가짜로 살고있지도 않고, 가짜로 죽을 수도 없어.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리셋하듯, 인생을 새롭게 포맷하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봤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들을 지우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욕심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과거에만 사로잡혀 현실을 자기 것으로 깨우치지 못할 때의 위험, 도피 심리를 이보다 적절하게 나무라기도 참 쉽지 않을 성 싶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를 읽노라면 무한경쟁 시대에 어떤 마음 가짐으로 남들을 짓밟고 올라서며 살아야하는지을 알려주는 "처세술의 보고"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이 작품이 그와 반대로 저들이 짜놓은 무한경쟁의 카지노, 즉 다수의 사람이 패배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카지노의 운영자들인 최상위 계층의 일부만을 위한 게임 경연장이 되어가고 있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깨달을 수 있다. 카이지가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던 리에카와를 넘어서는 순간, 카이지 앞엔 다시 제애그룹의 넘버원 헤이토(효우도)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 순간 리네카와는 거대한 도박장의 희생자로 전락하고 만다. 이 게임의 승자는 리에카와도, 헤이토도 아닌 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카이지는 제애그룹과 헤이토에게 도전하여 승리하기 위해 여러 차례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들은 카이지에게 도움을 얻고서도 그를 돕지 않는다.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한다. 이런 순간 도박판은 우리 사회의 축도가 된다. "도박묵시록 카이지"가 세상에 던지는 비수 같은 한 마디 "타인의 비참함을 보고 돕지 않는점... 죽게 내버려 둔다는 점에서는 다를바 없어... 마찬가지야... 돈을 보내면 구원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그야말로 얼마든지 넘치고 있는데도 우리는 보고도 못본체... 결코 돈은 보내지 않아. 결국 자신의 물욕과 쾌락에 돈을 쓰고 있어. 즉, 철저하게 모른체한다. 남이 아무리 굶주리든... 죽든... 괴로워하든... 알바 아니다... ...99.9%... 사람은 남을 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을 구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아프지 않으니까!!"라고 말이다.

 

복권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권을 판매하고 그 수익을 통해 공공사업이나, 공익 사업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첨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복권을 사는 이들은 주로 어떤 계층일까? 대개는 중산층 이하에 속하는 이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렇다면 복권은 빈자의 호주머니에서 빼낸 돈을 이용해 이를 다시 공익사업에 지원한다는 말이 된다. 자본주의는 게으름을 비판하고, 근면성실을 강조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의식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부자가 된 이들은 하나같이 근면성실하게 노력해서 성공하게 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정직하게 노력해서 돈 번 이들을 누가 탓할 수 있으랴.

 

 

자본가들은 "노동은 신성하다"라는 기독교적 실천 윤리를 강조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옹호하기 위해 사회의 구조적 관계를 은폐하고, 마치 다른 것인양 변환시킴으로써 사회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왜곡 시키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세계에 대한 개인의 진짜 동기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가짜 동기를 상상하게 만들고, 현실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결하도록 부추긴다. 이렇게 미화된 노동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재화를 창출할 수 있을 만큼 생산성이 확대되었지만 노동자의 행복은 실질적으로 증진되지 않았다. 혹시 노동자란 말이 듣기 싫은 분들은 개인의 행복이라고 해두자. 노동자들은 이전과 같은 생활 수준을 누리기 위해 좀더 많은 시간을 노동에 매달려야 한다. 예전엔 아버지만 일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어머니들도 나서서 일해야 한다. 사회는 좀더 좀더 많은 것을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선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벌기위해선 더 많이 일해야 하는 노동 중독 증상이 강화된다.

 

노동자들이 창출해낸 재화가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지 않는다면, 이런 현실을 노동자들 스스로의 자각으로 깨뜨리지 못하고, 좀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 좀더 많은 노동에 매달리는 동안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왜 노동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없이 진행되는 동안, 패할 수밖에 없는 카지노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풍요로운 삶을 위해 즉, 더 많은, 혹은 전혀 쓸모없는 것들을 구입하고,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웰빙하기 위해 돈을 버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다보니, 지방이 축적되고 다시 건강을 위해 돈을 들여 운동을 해야하는 것처럼 또 그만큼 많은 일을 해야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이제 빈곤의 악순환은 어느 정도 벗어났을지 모르나 이보다 더 치명적인 '풍요의 악순환(vicious circle of affluence)' 은 사회 구성원들 누구에게도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다.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라는 이 좋은 글귀는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 정문에 붙어 있었다. 이 거대한 도박판,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러시안 룰렛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카이지는 인간 상호간의 연대와 믿음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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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키튼 세트(1~18) -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 | 가쓰시카 호쿠세이 스토리 | 대원씨아이(2004)




"우라사와 나오키"란 이름은 90년대 중후반부터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한 일본의 만화작가이다. 내가 우라사와 나오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파인애플 아미(Pineapple Army, 1986)"를 통해서 였다. 이 작품에서 "파인애플"의 의미가 무엇인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파인애플이란 미국식 그레네이드(수류탄)의 별명이란 거다. 이 작품을 보면서 처음에 굉장히 낯설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 무렵 소개되던 일본 만화의 거의 태반이 아동만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들인데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그림체 또한 당시 만화선들보다 다소 굵고, 거칠고 인물 캐릭터 묘사도 예쁘다기보다는 평범한 느낌이어서 도리어 그런 부분들이 매우 낯설게 여겨졌다. 다만 우라사와 나오키가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신선한 느낌인 사실적인 무기 묘사, 전문가 수준의 서바이벌 파이팅 기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서바이벌 게임 말고, 서바이벌이란 극한 상황과 지역에서 생존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마스터 키튼"은 내 개인적으로는 약간 특기할 만한 작품이다. 우선 다시 만화를 읽기 시작하면서 내 평생 처음 사들인 만화책이기 때문이다(이후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20세기 소년", 요시다 아키미의 "바나나 피쉬" 등을 사들였다). 만화책에 대해 특별한 폄하는 없었지만 이전까지는 돈을 들여 사놓고 집에 보관하면서 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마스터 키튼"의 사실적인 묘사와 탄탄한 구성력, 지적이면서 인간적인 재미는 나를 사로잡았다. "마스터 키튼"의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이 작품이 주는 재미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 세계 모든 특수부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SAS 휘장: Who Dares Wins

아동용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문학 장르에 비유하면 시(詩)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동용 그림책은 대개 24쪽 내외로 한장한장의 그림에 상징과 함축된 의미를 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만화는 내러티브와 화면 구성 등을 살펴보면 쉽게 영화에 비유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만화를 대체로 구분없이 사용하지만 크게 카툰과 코믹스로 분류할 수 있고, 코믹스 내에서도 극화체와 만화체의 구분을 둔다. 대개의 일본 만화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극화체 중간중간에 코믹한 요소들은 만화체를 사용하는 방식을 오간다. "마스터 키튼"에선 이런 코믹한 만화체 사용은 전무하다. 그런 점에서 "마스터 키튼"은 완전한 성인용 만화라고 할 수 있다. 성인용 만화라고 하면 대개 섹스와 폭력이 끈적끈적하게 묻어나는 것을 연상할 수 있지만, "마스터 키튼"은 아무리 점잖은 자리에 가더라도 펼쳐놓고 읽는데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 도리어 신문에서 알려주지 않는 내용, 외신의 행간을 잘 짚어봐야 해석가능한 사건들을 일러주는 교양이 녹아 있다.

 

"마스터 키튼"이 주는 첫번째 재미는 이것이 성인용 만화라는데 있다. 예를 들어 "마스터 키튼" 6권 '위선의 유니온 잭'에는 영국SAS와 아일랜드 IRA 사이의 일상화된 테러 이야기를 주요 에피소드로 삼고, 8권 "표범 우리"에서는 영국이 참전했던 걸프전쟁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를 담는다. 경우에 따라 "마스터 키튼"이 보여주는 균형잡힌 정의는 진실한 정의에 해당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작품이 보여주는 내용은 동의할 만한 수준의 것들이다. 다이치 키튼 자신은 이혼당하여 딸 하나를 둔 시간 강사다. 그는 도나우강 문명이란 고고학 분야의 소수의견를 주장하는, 그래서 학문적으로는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지식인이자 전직 SAS 서바이벌 교관, 현재는 로이드 보험사의 직원이다. 그의 직업이나 생활이 성인이라서 이 작품이 성인용은 아니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스토리 작가 가쓰시카 호쿠세이와 더불어 인문학적인 교양이 녹아든 지적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성인용이 된다.

 

▶ "마스터 키튼"의 주인공 '다이치 키튼'. 겉보기에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보험조사원이지만 영국특수부대(SAS) 출신의 서바이벌 마스터이자 고고학자로 '스펙'만 놓고 보자면 007의 제임스 본드 쯤 되려나~

 

"마스터 키튼"이 주는 두번째 재미는 주인공 "다이치 키튼"이 보여주는 균형잡힌 시선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키튼의 캐릭터가 선사하는 재미라고 할 것이다. 키튼은 일본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동양과 서양의 혼합이 반드시 이 양자 사의 절묘한 배합을 이뤄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키튼의 경우에 한정해보자면 이 양자가 적절한 정도로 배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서구의 합리성과 동양의 인간미를 한 몸에 녹아들이고 있다. 그는 양측의 세계에 모두 속해있지만, 동시에 약측의 세계로부터 일정하게 거리를 둔 인물이다. 그는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외의 대상이지만, 스스로 자초한 고립이라는 점에서 또한 강자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많은 이들이 조직에 소속되길 원치 않지만, 실력있는 자로 대접받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마스터 키튼"은 이런 시선을 통해 소수자에 대한 다수의 폭력을 보여주는데, 네오 나치들에 의한 터키인 차별을 다룬 "검은 숲"에서 잘 드러난다.

 

세번째 재미는 "마스터 키튼"의 사실성이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소설들 "다빈치 코드"와 같은 것들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쌓으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이런류의 소설을 사실(fact)와 소설(fiction)을 합성해서 팩션(faction)이라고 한다는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노라면 저절로 중세 교회와 수도원의 모습, 종교재판, 당시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스터 키튼의 사실성은 우선 그림의 배경이 되는 유럽 곳곳의 풍광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는데 있다. 키튼이 행동하는 지역이 상당히 여러 곳이란 점을 고려해보면  이런 사실적인 묘사는 충분한 사전조사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그는 이런 조사를 바탕으로 "몬스터"에서는 더한층 깊어진 묘사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스터 키튼"의 사실성이 단순히 배경 묘사 정도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우선, 마스터 키튼 자신이 지닌 놀라운(?) 서바이벌 능력과 인문학적 지식에 바탕한 그럴듯한 이야기들이 지닌 사실성은 매력을 더해준다. 우선 키튼이 SAS(Special Air Service)의 서바이벌 교관 출신이고,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했던 베테랑이란 설정은 미국 중심에 익숙해 있는 이들에겐 참신하면서 매우 적절한 설정으로 보인다. SAS를 우리말로 직역해보면 공군특수부대 혹은 공정부대 정도가 될 텐데, SAS는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부대가 아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수많은 특수부대가 존재하는데 그 종류가 가장 다양한 나라는 물론 미국이지만, 모든 특수부대의 아버지라고 일컬을 만한 존재는 영국의 SAS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덩케르크에서 치욕적인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은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추축국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계획한다.

 

이때 생겨난 부대가 오늘날 특수부대란 보통명사로 사용되는 "코만도"인데,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것이 영국의 SAS와 SBS이다. 이 가운데 "돌진하는 자가 승리한다(who dares win)"는 모토를 지닌 SAS가 가장 유명하다. 특히 이들의 명성을 높이게 된 사건은 지난 1980년 5월 런던 주재 이란대사관 인질 구출 작전을 통해서였다. SAS는 헬기를 통해 대사관 지붕으로 내려와 대사관 내부로 잠입한 뒤 테러범 6명 중 5명을 사살하고, 진입 전에 살해당한 1명을 제외한 19명의 인질 모두를 무사히 구출해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엔 미군 레인저부대가 SAS에 의해 교육받았고, 전후엔 독일 GSG-9 등을 교육했다. SAS는 대테러작전에 필요한 전술교리는 물론 이때 필요한 무기들을 개발하여 세계의 대테러부대에 보급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테러작전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임무인 군 작전에도 참여하였는데, 1980년 아프가니스탄에선 무자헤딘을 교육시켰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 1991년 걸프전 등에 참전했다.

 

사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마스터 키튼"이 지닌 사실성은 그 자신의 관심과 전문지식도 중요했지만, 그의 작업을 도와주는 여러 전문가 그룹이 존재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재미의 요소들도 "마스터 키튼" 자신이 지닌 매력에는 비교할 수 없다. "마스터 키튼"은 한 권 당 서너 개의 독립된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 방식의 작품이다. 그 탓만은 아니겠지만 특정 장르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에피소드들은 그 특성에 따라 여러 장르로 분화될 수 있는데, 작품을 읽다보면 마치 종합선물세트를 풀었을 때 느낌 같다.  추리, 미스테리, 액션, 휴먼 드라마 등 온갖 장르들이 뒤섞여 있다. 이렇듯 온갖 장르의 혼합이 가능한 것은 "다이치 키튼"이란 캐릭터가 지닌 독특한 성격과 개방성에서 유래한다. 혹자는 "마스터 키튼"을 '셜록 홈즈' '맥가이버' '인디아나 존스'를 한데 버무린 듯한 이라고 묘사하는데, 물론 이 말들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마스터 키튼"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고려했을 때 이 사람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는 바로 이제는 고인이 된 "피터 포크"가 열연했던 "형사 콜롬보"다.

 

"마스터 키튼"의 주인공 캐릭터의 개방성은 고고학 박사, 지식인, SAS특수부대원, 일본과 영국의 혼혈, 로이드 보험조사원 등 어느 것을 해도 어울리지만, 동시에 어느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만의 캐릭터를 구성해낸다. 그는 고고학박사지만 난 척하지 않고, 전직 특수부대원 출신이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국적 역시 작중 인물들조차 헷갈려 할 만큼 모호하다. 이런 모호함은 특히 겉보기에 어수룩해 보이고, 그가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억센 인물들과 겨루어야 하는 위기 상황에서 더 큰 빛을 발휘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포즈다 싶었는데, 형사 콜롬보와 매우 흡사하다. 털털이 시보레를 손수 운전하고 다니는 형사 콜롬보, 어깨는 축 처져 있고, 두 눈은 졸음에 찌들었다. 누런 트렌치코트 어깨 위엔 비듬이 수두룩할 것 같은 졸린 눈의 이 형사는 늘상 자신보다 뛰어난 지능과 지위, 권력과 부를 지닌 이들과 겨루어야 한다. 범인들은 그의 외모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콜롬보의 승리다. 마스터 키튼의 승리는 이런 어리숙함, 선량함에 의해 더욱 빛이 난다. 이는 또한 키튼의 인간미를 더해주어 "마스터 키튼"의 전체 이야기구조를 강화시켜주는 미덕을 지닌다.

 

◀ 마스터 키튼의 주요 등장인물들

 

이외에도 자칫 단조로와지기 쉬운 옴니버스 방식의 이야기들에 재미를 더해주는 적절한 조역들이 등장한다. 같이 보험조사원 일을 하고 있는 다니엘,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실제로는 매우 신사적인 아버지 히라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닮아 명석한 키튼의 외동딸 유리코, 키튼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마치 영화 "그랑 블루"에서 장 르노가 연기했던 엔조(Enzo)를 연상케하는 캐릭터인 찰리 등이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그렇다고 "마스터 키튼"에 장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의 균형잡힌 시선이 때로 강박처럼 여겨질 때가 있는데, 균형이란 말만큼 정치적으로 위태로운 감각도 드물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사안을 취급할 때 마스터 키튼은 선택을 한다기 보다는 그 양자 사이에 그냥 놓여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은 균형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방관일 수 있다. 그의 이런 방관적인 자세는 "마스터 키튼"의 휴먼드라마가 얕은 성찰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한다. 실제로 다이치 키튼은 영국도 일본도 아닌 코스모폴리탄처럼 그려지지만 작품의 내용은 주로 근현대사 속에서 영국이 저지른 실책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키튼의 일본인 아버지 히라가는 적절한 조언자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전체 18권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하나의 에피소드도 일본의 실책을 다룬 것이 없으며,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도 느낄 수 없다. 또 한 가지는 이야기가 18권에 이르는 동안 이야기 패턴이 익숙해져 버리는 바람에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대중만화에서 쉽게 다루기 어려운 인종차별, 전쟁, 역사 등을 작품 속에 적절히 녹여 지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솜씨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작품만의 뛰어난 매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들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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