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피시 Banana Fish - 요시다 아키미 | 김수정 옮김 | 애니북스(2009)



"바나나 피쉬"란 만화책을 처음 알게 된 건...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우연히 알게 된 모 사이트의 (현재는 역사 선생님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운영자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의 닉네임이 애쉬(Ash)였다. 영어 '애쉬'는 타다 남은 재란 뜻과 물푸레나무란 뜻이 있다. 그가 사용하는 애쉬는 만화 "바나나 피쉬"의 애쉬 링크스였다. 전에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공중화장실과 목욕탕을 제외하고 문화의 장르 분화에서 만화처럼 확실한 성(性) 구분이 있는 것도 드물다. 아무리 잘된 순정만화라도 어지간해서 남성들이 보는 일은 드물고, 여성들이 선호하는 장르 역시 남성 만화 애호가들의 그것과는 구분된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만화의 이런 성별 구분 역시 모호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요시다 아카미의 "바나나 피쉬"는 유니 섹스 모드의 만화다.

 

장르(genre)란 무엇인가? 본래 장르란 생물학에 쓰이던 용어로 종(種) 다음에 오는 ‘속(屬)’의 의미를 지닌 말이라고 한다. 그것이 문학. 예술 분야로 옮겨지면서 부문, 양식, 형(型)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이 중에서 한자 "형(型)"은 '거푸집'이란 뜻에 유의해보야 하는데, 이것은 현재 사용되는 장르 영화의 중요한 속성이 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영화 문법에서 장르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것은 시나리오 문법상의 캐릭터 형성과 거의 맞먹는다. 그 이유는 바로 장르가 제품을 찍어내는 거푸집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발전하면서 점차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구조)를 갖추게 되고, 상업대중문화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할리우드 영화문법은 좀더 대중적인 기호와 취향, 구미에 맞는 이야기구조를 발견해낸다. 다시 말해 대중이 좋아하는 이야기구조가 무엇인지 영화자본과 제작자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의 욕구와 기호에 맞는 이야기구조로 분화되어 정착한 것이 바로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 문법이라고 할 수 있다.

 

 

 

멜러, 액션, 서부극 등은 모두 하나의 문법 체계 안에 있으므로 관객들은 마치 캠벨 수프(Campbell Soup) 통조림 캔에 각인된 토마토, 치킨, 감자, 양송이 등등 자신의 기호에 맞는 영화 티켓을 예매하면 된다. 이것은 영화자본과 대중 사이에 체결된 일종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8금(禁)" 이하의 등급을 받은 영화에선 절대로 섹스, 살인, 강간 등이 여과없이 보여지지 않는 것처럼 장르 영화들은 각각의 문법을 통해 관객의 취향에 영합 혹은 배려함으로써 영화자본은 흥행의 안전성을 보장받고, 관객들은 취향과 선택의 안전을 보장받는다. 영화연구의 초창기엔 이런 장르영화들을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대량생산된 제품이라 하여 폄하했고, 이런 문법에 충실하지 않은 이들을 '작가주의'라 불렀다. 그러나 작가주의 비평가들은 이런 장르 영화 안에서도 작가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장르 = 신화"라고 생각하는데, 구조와 의미의 구축이란 면에서 이 둘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요시다 아카미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특이한 만화작가라 할 수 있다. "바나나피쉬"에 등장하는 인물 캐릭터는 순정만화의 그것인데 비해서 "바나나피쉬"의 내러티브는 액션 만화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르의 혼재 혹은 하이브리드는 오늘날엔 매우 흔한 것이 되었다. 사실상 이런 하이브리드적인 요소들이 도입되기 시작한 계기는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그 기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스타워즈"에서 온갖 신화들의 흔적, 장르의 흔적들을 발견해낸다. 요사이 제작되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이런 장르의 이합집산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복잡해진 대중의 취향을 반영하고, 남성, 여성은 물론 각 장르의 취향을 가진 이들을 골고루 만족시키기 위한 상업적 고려와 계산이 뒤따른 것이다. 이는 영화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나나피쉬"는 1985년부터 1994년까지 일본의 "별간 소녀코믹"에 연재되어 일본에선 상당한 인기를 누렸으나 국내에선 해적판 출판만 몇 번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 완간되지 못했다. 요시다 아카미의 "바나나 피쉬"가 국내에서 일반 독자들의 호응을 널리 받지 못한 것은 "바나나 피쉬"의 이런 하이브리드 경향이 대중의 코드에 아직 제대로 접속하기 전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대신에 "바나나 피쉬"는 저주받은 걸작까지는 아니어도 소수의 매니아들에게 재발견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터넷상의 만화 매니아들은 자체적인 능력을 동원해 완간되지 못한 만화의 뒷부분을 번역하고, "바나나 피쉬"의 여러 면모들을 소개했다. 

 

"바나나 피쉬"는 우연하게 발견된 신종 마약의 이름이다. 만화의 도입부는 음모 영화의 도입부처럼 과거로 거슬러 올라 베트남전에 이른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클레멘타인을 부르며 휴식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병사가 M-16소총을 들고와 난사한다. 그의 친구 맥스 로보가 하반신을 쏘아 간신히 진정시키지만 그는 "바나나 피쉬"란 의문의 단어를 남기고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이야기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다운타운을 장악하고 있는 애쉬 링크스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우연찮은 기회에 살인 장면을 목격한 애쉬 링크스. 살해당한 남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소량의 약이 담긴 앰플을 넘긴다.

 

 

 

애쉬 링크스. 다운타운의 삵괭이들을 이끄는 리더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해보이는 외모에 금발 미소년, IQ 200을 상회할 만큼 뛰어난 두뇌에 많은 량의 독서, 뛰어난 컴퓨터 조작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처음부터 그런 인물이란 것이 드러나버렸다면 이 만화는 그리 재미있지 않았을 텐데, 작가는 필요한 부분마다 조금씩 이 소년의 능력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작가가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애쉬의 총 솜씨다. 사용하기 편하게(은밀히 감추거나, 뽑기 편하게) 짧게 자른 총신의 스미스&웨슨 38구경 리볼버를 귀신처럼 다룬다(리볼버는 자동권총에 비해 방아쇠 압력이 높은 편이라 초탄 명중률이 낮고, 장탄수가 적어 사용하기엔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가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냉정하기 그지 없는 두뇌를 지닌 인물이기만 하다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거다. 그는 8살 때 강간당하고, 그때 첫 살인을 저지른다. 이후 그는 아동 포르노 무비의 주인공으로 이용되며 성학대를 당한다.

 

이야기는 후반부로 흐를수록 코르시카 마피아와 미국 정부 당국까지 연계된 거대한 음모로 이어지고 다시 애쉬의 가정사와 연계되면서 그가 어째서 "바나나 피쉬"의 정체를 추적하게 되는지,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보여준다. "바나나 피쉬"는 내러티브가 있는 장르에서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나나 피쉬"의 내러티브 자체는 매우 흔한 것이지만, 그 이야기를 상처받은 영혼을 지닌 애쉬가 이끌어간다는 사실만으로 대단한 상승효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동성의 친구 에이지. 요시다 아카미는 "바나나 피쉬"에 야오이적인 요소들을 대중적인 시선에 맞춰 적당한 강도로 저감시켜 등장시키고 있다.

 

야오이 장르의 등장은 일본에선 이미 1976년 타케미야 케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에서 동성애뿐만 아니라 근친상간까지 다루며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만만치 않다. 야오이란 "야마나시(やまなし), 오치나시(おちなし), 이미나시(いみなし)"란 말(주제없고, 소재없고, 의미없다)의 약어라고 하는데, 그 의미 자체가 매우 반문화(counter culture)적임을 알 수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란 성격에서 느슨한 형태의 사회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야오이 문화에 대한 찬반을 떠나 그 자체에  남성지배문화, 가부장적 권력 형태에 대한 저항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할렘의 여성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규방반란이라 할 수 있는 야오이는 우리나라에서 젊은 층의 여성들(1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야오이는 근친상간, 동성애, 강간 등 현실 장르 안에선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으므로 체제 안의 장르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 결과 야오이의 생산은 대개 프로에 근접한, 혹은 프로를 능가하는 아마추어들에 의해 생산된다. 이런 야오이의 자생성은 상대적으로 사회의 검열로부터 자유로와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야오이의 특성과도 잘 부합된다(야오이 문화에 대해선 나중에 좀더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어찌되었든 "바나나 피쉬"는 아동 성학대, 동성애와 "에이지"란 소울 메이트의 존재 등으로 야오이적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결말은 복잡한 이야기의 대단원을 매듭짓기엔 다소 약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또한 그만큼 적절하기 어렵다는 평을 얻을 수 있다. 동네 갱들부터 시작해서 코르시카 마피아, 차이나 마피아, CIA,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의 용병들과의 대결에서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남은 애쉬는 뜻밖의 일격으로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이거 스포일러인가?). 애쉬의 죽음은 그만큼 뜻밖이고, 심지어 충격적이기까지 하지만 작가 요시다 아카미는 시종일관 애쉬의 죽음에 대한 복선을 여러 군데 설치해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보면 애쉬의 죽음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청춘이 불멸인 까닭은 그것이 인생의 매우 짧은 시기만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요절한 청춘 스타들을 길이길이 기억하는 것이다(*일설에는 "바나나 피쉬"가 할리우드의 영화로도 만들어질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영화의 주인공은 "리버 피닉스"가 내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기사 그가 아니라면 누가 애쉬 링크스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혜성처럼, 섬광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연민으로 말이다. 애쉬는 죽음으로 에이지의 우정(혹은 사랑)을 영원히 차지하게 된다. 액션만화의 뒷처리로, 순정만화의 뒷처리로 이보다 적절한 선택도 하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바나나 피쉬"는 액션의 외피를 쓰고 있으나 그 본질은 순정의 문법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만화의 또다른 문법인 그림체와 칸 구분 등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는데, 액션 만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칸의 격자 구조를 탈출하듯 역동적인 연출은 이 작품에선 거의 볼 수 없고, 시종일관 차분한 프레임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렇기에 액션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지는 장면에서도 우리는 액션 그 자체가 아닌 캐릭터에 집중하게 된다. "바나나 피쉬"에는 할리우드 여성 감독들 "미미 레더, 캐서린 비글로"의 액션영화들에 숨겨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체취와 이면에 잠재된 여러 코드들을 따라가며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아, 끝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바나나 피쉬"는 J.D.샐린저의 작품 아홉개의 이야기(Nine Stories) 중 첫번째인 "A Perfect Day For Bananafish"에 등장하는데 바나나피쉬는 구멍에 들어갈 때는 보통 물고기처럼 날씬하지만 구멍 속에 있는 바나나를 엄청 먹어버리고 살이 쪄서 결국 구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라 한다. 어쨌든 바나나피쉬를 보면 죽게 된다는 이 설정을 놓고 보았을 때, "바나나 피쉬"의 "애쉬 링크스"에게 바나나 피쉬는 "에이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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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 최규석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2004



테르미도르와 순정만화

"김혜린!"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왜 저자도 아닌 "김혜린"인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현대적인 만화의 등장을 사람들은 1909년 6월 2일에 창간된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한칸 만화를 꼽는다. 그로부터 한동안 한국엔 만화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여유자적(?)하게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아니, 그것을 출판할 수 있는 여력이 되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어째서 만화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기간의 우리 민족의 모든 예술이 굴절되었듯 만화 역시 굴절 혹은 단절의 길을 걸어야 했다.

우리 만화가 다시 일선에 등장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라이파이"의 작가 김용환 선생이 한국 최초의 만화 전문 잡지《만화행진》을 1948년에 발행하면서부터였다. 만약 이것을 기점으로 한다면 한국 만화는 56년 만에 현재의 위치까지 성장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이 그러하듯 비약 혹은 도약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화만큼 남녀간의 취향 분화가 확실한 장르도 드물다. 특히나 일본 만화의 짙은 그늘 속에 있는 한국 만화의 대중적 취향을 고려할 때 이런 남녀간의 취향 분화는 사실 전세계적인 것이라기 보다 한국적 혹은 일본적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한국 사회에서 만화는 그 시대적 한계나 경제적 어려움을 고려해본다면 놀라울 만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길찾기"라는 출판사에 대해 처음 머리 속에 각인할 수 있었던 것은 김혜린의 "테르미도르"가 이곳에 복간되었다는 기사를 통한 것이었다. 그런 뒤에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 중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라크전과 관련해 먼저 인터넷상으로 주목받았던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가 다시 "길찾기"를 통해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대혁명을 역사적 배경으로 차용한 작품으로 우리 만화사에 기록되어야 할 작품 목록에 분명히 올라가야 할 작품이다. 작품 자체의 질도 질이거니와 이 작품이 처음 수록된 "르네상스"라는 잡지의 역사적 의미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1988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만화 전문지로서 처음 등장한 잡지 창간호부터 수록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김혜린은 당시 김진(바람의 나라) 등과 더불어 그간 순정 만화의 영역을 대하 서사 장르까지 확장시켰다.


한국 만화가 가야하는 머나먼 길

1958년 무렵 미국의 원조 경제에서 갓 벗어나기 시작한 한국사회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만화는 출판 유통망을 떠나 대본소 체제에 진입하게 된다. 만화는 사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보는 전형적인 출판물이 된다. 이것은 대본소용 만화, 무협지를 탄생시켜 만화의 예술성을 극도로 억압하게 된다. 만화의 생명은 대본소의 순환 구조와 맞물리게 되어 점점 짧아지게 되고, 만화 작가들은 작가가 아니라 만화공장의 공장장이 된다. 그들은 대본소에 착취당하면서 동시에 그 밑의 문하생이라 불리는 하도급을 둔 착취자가 되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에 연이어 군사쿠테타로 들어선 1961년 박정희 독재정권은 만화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시작한다. 가뜩이나 열악한 한국 만화계를 더욱 짓눌러 온 것은 군사독재정권이 그들 스스로의 정당성 없는 권력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사회에 대해 벌이는 치졸한 도덕극이 지닌 과장된 무게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화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었고, 어린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이었다.


만화가 대본소 시스템에서 다시 서점으로 돌아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민주화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주목해보아야 할 상황이다. 대중가요가 사전 검열 철폐를 위해 투쟁한 것처럼 만화 역시 대본소 독점체제를 깨뜨리기 위해 많은 만화가들이 싸웠다. 거기에 가장 강력한 힘을 보태준 이들은 역시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이었고, 그렇게 만화를 사랑하고 고민한 세대가 바로 "공룡둘리에 대한 오마주"를 그린 "최규석" 세대다. 물론 얼마전 이현세 파동 등으로 드러나듯 아직도 우리 만화가 이런 사회적 금기와 편견을 벗어나 가야할 길은 멀고 험난하다. 동시에 만화에 대한 가장 든든한 지지층이자 동시에 어려서는 대본소 만화 보기에 익숙했고, 어느 정도 자라서는 도서 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보던, 그리고 자라서는 디지털 스캐닝을 통한 인터넷상의 만화 보기에 익숙한 독자들이 얼마나 만화를 직접 소장하고 보려드는가? 혹은 보게 만드는가하는 문제가 놓여있다. 그것은 만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거의 모든 예술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마주 - 짧지만 위대한 전통에 대한 경배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처음 접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던 최규석의 이 단편 만화를 보고 놀라운 재능을 지닌 신예작가의 등장에 대해 찬사를 보냈고, 아동물의 전형적인 캐릭터성을 지녔던 둘리란 존재의 확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만화를 보고 나도 역시 그런 점에서 대단히 놀랐고, 여러 면에서 기뻤다. 우선 우리 사회에 드디어 오마주를 바칠 만한 전통 혹은 사회 전반에 두루 알려진 문화적 코드가 생겨났다는 점에서 기뻤고, 패러디물인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대해 이 캐릭터의 원저작권자인 작가 김수정 선생의 반응이 또한 기뻤다. 김수정 선생이 "둘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만화의 다양성을 감안할 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반가워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는 다시금 그의 작가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마주와 패러디는 사실 기법상으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 "베낀다"는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끊임없이 알프레드 히치콕을 베낀다. 퀜틴 타란티노는 오우삼을 베낀다. 그들은 각기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 예술가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베낀다. 오마주가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면 패러디는 풍자를 위해 베낀다. 선배된 입장에서 후배의 오마주란 것은 말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패러디든, 오마주든 본래 자신이 만들어냈던 작품의 아우라에 변형을 가하는 행위이며 후배로서는 오마주라 하더라도 선배 입장에선 욕보이는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 그 비근한 예로 "서태지"를 패러디한 음치 가수의 음반과 비디오물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는 언제라도 오마주의 대상이자 동시에 패러디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그것이 설령 기분 나쁜 일이라 할지라도 참아줄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본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바로 예술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오마주가 되었든, 패러디가 되었든 표절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 그 대상이 된 예술가 혹은 작품이 이미 사회전반적으로 통용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마주는 논외로 하더라도, 패러디의 기본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상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김수정은 일종의 아동물로 구분되는 "둘리"를 통해 대중적인 만화작가로 널리 알려졌으면서 동시에 둘리 캐릭터를 통해 독자(한국)적인 애니메이션 창작과 캐릭터 산업 분야를 개척한 이 분야의 독보적인 작가이자 중요한 장인이다. 그에 대해 후배 작가가 보내는 오마주는 짧지만 위대한 우리 만화계의 전통에 대한 경배이기도 하다. 그것을 넉넉하게 받아들인 김수정 선생의 자세를 보면 역시 경배를 보낼 만하다.






최규석 - 슬픈 먹이사슬의 뫼비우스

많은 이들이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처음 구입하게 된 동기가 이 단편 만화의 뒷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고길동의 무덤을 베고 누운 둘리가 공룡화된 모습으로 표현된 이 만화의 엔딩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감동적이었던 만큼 후속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집엔 그 뒷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작가 최규석의 여러 단편들을 모아놓은 단편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아쉬워할 것은 없다. 나머지 단편들 역시 놓치면 아쉬울 만큼 뛰어난 수준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문화계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문제 중 하나는 젊은 작가들의 조로현상이다.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화계를 대표한 장르가 된 영화 부문은 복합상영관과 대자본의 결합으로 영화 장르의 급격한 산업화와 장르화 속에서 젊은 작가들의 창의력이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고, 오랫동안 한국 예술계의 정점에 서 있던 문학은 그 활력을 잃고 있다. 젊은 작가들은 손쉽게 타협하거나 아예 대결할 의지 자체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만화계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시점에서 최규석의 단편 만화들은 비록 때로는 너무 안이하게 해피엔딩으로 종결짓거나 거친 안목을 정제하지 못한 체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젊은 작가의 당연한 권리인 "창조"와 "도전", "비판"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80년대적 향수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익히 드러낸 바 있는 솜씨, 교묘한 비틀기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정신은 2002년 동아/엘지 국제만화전의 극화부문 당선작인 <콜라맨>에서 손쉽게 해피엔딩적인 결말로 다가섰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고, 그의 데뷔작인 <솔잎>에서는 아직 그만의 그림체가 완성되기 이전의 박흥용과 오세영의 그림체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솔잎>에는 이미 작가가 앞으로 걸어가고 싶은 작품 세계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맹아들이 숨겨져 있다. 그는 반전을 즐기는 작가이자 동시에 세상에 대해 진지한 말걸기를 시도하고 싶어한다. 이런 류의 작품에는 우리가 만화에 대해 그간 지녀왔던 적지않은 편견들, 가령 순정만화 vs 활극만화의 구도나 예술만화 vs 대중만화의 경계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깨우쳐 준다. 결국, 예술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다. 그것을 창출해 내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얼마나 철저하게 하였는가? 그의 장인적 기술과 예술가적 재능이 이것을 얼마나 뒷받침해주고 있는가 하는 차이일 뿐이다.


최규석은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풍자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근래 어느 장르의 예술가들도 지니지 못한 최규석만의 뛰어난 장점이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슬픈 먹이사슬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과거에서 미래로 타임워프한 공룡, 아이들에게는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 원하는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줄 수 있었던 히어로 둘리조차도 나이 40에 이르러 "주민증"도 없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이 땅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원숙해지고 그만의 것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거친 러프 스케치 풍의 연필 데생으로 음영을 주는 그의 그림체도 매력적이지만, 역시 그만의 다양한 실험을 할 것이란 사실을 믿는다. 그의 드라마투르기 역시 지금의 간결하고 힘 있는 구조란 장점을 살리면서 점차 복잡해지고 더욱 많은 사연들을 담아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앞으로 매우 중요해질 한 작가의 초반부를 함께 하고 있다. 그 사실이 앞으로 더욱 기뻐할 수 있는 일이 되길 바랄 뿐이다.




 * 나의 걱정에 아랑곳없이 아니 사실은 이 리뷰를 쓴 것이 이미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최규석은 나의 염려를 한낱 기우로 만들어버린 채 무럭무럭(?) 훌륭한 작가로 자리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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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손님 : 보통시민오씨의 548일 북한체류기 -상.하』 | 오영진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2004


작가 오영진은 요샛말로 하자면  "투잡(two job)"이다. 그는 만화가이면서 동시에 한전 직원이다. "남쪽손님", "빗장열기"는 남북한이 분단된 것처럼 두 권으로 분책되어 있으나 사실상 하나의 책이다. "보통 시민 오씨의 548일 북한 체류기"란 부제를 지니고 있지만 오씨가 보통시민이라는 건 자평이지, 독자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고, 공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작가 황석영이 "보통 시민 황씨의 북한 체류기"란 책을 냈다고 치자. 누구도 황석영을 보통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영진의 보통 시민이란 말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대신,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보통 시민의 관점으로 본 북한 체류기"일 수는 있겠다. 알라딘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지은이 소개에 따르면 그는 "지난 2000년 경수로 건설을 위해 북한에 파견되어 1년 6개월 동안 신포에서 근무했다.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이 함께 생활하며 느낀 북한 사람의 이미지와 실제 생활상이 진솔하게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진실이 아니다. 남한 사람이 북한에 가서 장장 548일을 살다 오는 일이 과연 보통의 경험일 수 있을까? 그 자체가 특별한 사건이므로 우리는 이 책을 흥미있게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북한 사람의 이미지와 실제 생활을 진솔하게 살필 수 있는가? 아마 그것도 진실은 아닐 것이다.

 

어느 나라든 외국에 설치된 재외공관은 그 나라 영토로 간주된다. 공해상을 순항하고 있는 군함 역시 떠다니는 그 나라 영토로 간주된다. 작가 오 씨가 북한 신포에 머물면서 관찰한 경험이 소중하지 않다거나 진실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 늦게 혹은 너무 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휴전선으로 갈린 남북 분단의 역사 속에서 서로 이질적인 체제를 구축하여 살아온 우리 민족이 있다. 그런 우리가 북한 영토 안에  또다른 작은 장벽을 치고, 그 안에 작은 남한을 건설하고, 북한 주민 가운데 일부분을 접촉하여 만들어 낸 책은 작가 자신의 역량이 문제가 아니라 처한 환경 탓에 또다른 스테레오 타입을 양산해낸다. 이 책의 소개글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남한 사람 오 씨의 눈에 투영된 북한 사람의 삶을 본다. 그것도 극히 일부만을...



 
이렇게 글을 적고 있다고 해서 내가 북한을 잘 알고 있는가? 당신은 북한을 잘 알고 있는가? 나는 오영진의 이 만화를 읽는 내내 그런 갈급증에 시달렸다. 서울 가서 남대문을 보고 왔는지, 동대문을 보고 왔는지 가보지 않았으니 다녀온 사람의 말을 들으며 유추해봐야 한다. 남대문에 남대문이 아니라 숭례문이라고 써 있다고 그가 말해주면 그렇다고 믿을 것이고, 숭례문이 아니라 남대문이라 써 있다라고 하면 또 그리 믿을 수밖에 달리 어찌 해 볼 재간이 없다. 남한은 오랫동안 북한을 감시해왔음에도, 지금 북한 잠수함이 동해안을 넘나든다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 해군이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제공해주는 정보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해서 그것이 사건이 되고 문제가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은 국가적으로는 미국이 제공해주는 정보에 의존하고, 개인적으로는 국가가 제공해주거나 국가체제(언론도 포함해서)가 걸러주는 정보에 의존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우리들 중 누가 과연 북한을 잘 알고 있는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고 온 김대중 전 대통령인가? 아니면 오랜 기간 북한을 연구하고, 관찰해온 남한의 북한전문가들인가?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고,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마치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북한에 대한 남한의 시각은 크게 두 가지, 좀더 세분화해봐야 서너 가지 정도로 압축될 수 있다. 그것은 북한을 경쟁상대, 주적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장차 하나의 민족으로 공동의 운명을 짊어질 대상으로 바라볼 것인가?로 양분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측, 우리의 시선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다.

 

오영진의 책은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운 듯 보인다. 마치 "아, 거기에도 우리랑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네" 타입의 이 만화 책은 북한이란 우리에게 국가도, 괴뢰도 무엇으로도 정의하기 곤란한, 해체할 수도, 폭발시킬 수도 없는 처리곤란한 불발탄에 대해 갑작스레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본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북한을 주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도, 북한을 공동운명체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뭔가 결여되어 있다. 그건 뭔가? 글쎄, 과연 뭘까? 나는 이 책이 북한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들의 고정된 시선을 새삼스레 확인시켜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에게 북한 체제와 상관없이 북한 사람들은 과거 분단 이전부터 고착화된 이미지들과 분단 이후 조금씩이나마 그네들의 삶에 대해여 소개되면서 알게 된 몇 가지 전형들을 확인시킨다.

 



북한 사람들은 사회주의 체제 살다보니 아무래도 자본주의 체제에 사는 우리들 보다 덜 영악하다. 북한 사람들은 토론을 많이 하다보니 남한 사람들이 자칫 말을 잘못했다가는 논리적으로 밀린다. 가난하지만 자존심은 강하다. 생활력이 강하다. 남남북녀라더니 북한 여자들 예쁘다. 이런 말들을 어디서 보았더라. 그러고 보니 남북한 관계에 조금씩 햇살이 비추면서 우리 언론이 만들어주고, 널리 유포시킨 북한 사람들의 이미지들이다. 서구의 동양에 대한 고정된 시선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했을 때, 이 책은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제공된 북한에 대한 남한의 오리엔탈리즘이다. 다만 이 책의 매력은 만화라는 장르가 주는 손쉬운 접근성과 문자보다는 이미지에 의존하는 매체 특성이 주는 너그러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점들을 제외하고 이 만화가 주는 에피소드들은 이제 너무 낯익다. 내가 이 책에 대해 악평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은 북한에 대한 학습만화라고 하기엔 이를 뒷받침해줄 서사가 부족하고, 그냥 명랑만화로 읽기엔 민족모순은 너무나 첨예하다. 작가 오영진은 역사와 오락 사이에서 우리 민족은 남북공조와 이념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박재동은 이 만화의 추천의 글에서  “이념으로 접근한 것도 아니고 역사로 접근한 것도 아닌 바로 ’사람‘으로 접근한 시선”이라고 말하지만 바로 그 사람이 여전히 문제다. 우리는 북한 사람을 너무 모르거나, 혹은 너무 잘 아는 척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편견없음은 북에 대한 편견이 무언지조차 모르는 편견은 아닐런지...


* 지금 이 만화를 다시 보니 문득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해야겠다. 돌고 돌아 제 자리로 돌아온 머나먼 남북관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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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TAKEHIKO INOUE) | 대원씨아이

1994년의
어느 겨울, 나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롯데월드로부터 올림픽공원까지 걸었다. 우리 세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87년 이후 세 사람이 살아간 삶의 방향은 각기 달랐다. 그 무렵 TV에선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고, 갓 발견된 "심은하"라는 앳된 얼굴의 탤런트는 장안의 뭇 남성들을 설레게 했다. 『마지막 승부』가 방영되던 시절. 나와 그 두 친구는 뭔가 쓸쓸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지만 무엇도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나이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확실치 않은 것 가운데는 오랫동안 신념으로 삼아왔던 무엇이 사라진 뒤에 오는 그런 공황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것들은
반드시 그 나이 때에 통과해내지 않으면 평생 동안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10대의 첫사랑과 40대에 경험하는 첫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듯 TV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우리에겐 그런 부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한 10년쯤 전에) 케이블TV를 통해 재방송되는 드라마를 보면서 그때는 이 드라마를 왜 그리 열심히 보았는지 의아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마지막 승부』에 열심이었던 시절, 내 동생들은 한참 어떤 만화에 빠져있었다. 『슬램덩크』,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대표작이자 사실상 장편만화 데뷔작이기도 했던 이 만화는 1990년 슈에이사(集英社)의 "소년점프"에 연재되면서 오늘날까지 1억 부 가까운 판매고를 올린 만화다. 물론 우리 집에도 한 질이 있는데 완전판은 아니다(완전판은 만화방에서 보았을 뿐이다). 

완전판과
구판의 가장 큰 차이는 일단 판형과 좀 더 좋아진 지질이다. 그 덕분에 구판에선 확인할 수 없었던 작가의 섬세한 터치와 선들이 제법 잘 드러난다. 물론 이전의 구판에 비해 완전판이란 말이 정확히 어떻게 달라졌고, 무엇이 좋아졌다고 말하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애장판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은 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는 여러 면에서 한 세대 전에 히트했던 치바 데츠야의 『내일의 조』와 비교할 만하다. 두 작품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점, 스포츠 만화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두 작품이 지닌 시간 차이다. 1968년의 『내일의 조』와 1990년의 『슬램덩크』는 그 시간차만큼이나 정확하게, 당대 사회의 변천, 젊은 세대의 의식 변화를 견주어가며 살펴볼 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일본항공(JAL) 요도호 납치사건은 일본 적군파의 최후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 시대를 말하는 이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당시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우리는 <내일의 조>다"라고 스스로를 느끼고 표현했던 것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내가 읽은 당시 일본의 문화사, 청년운동에 대한 책자마다 한 쪽은 요도호 납치범이, 다른 한 쪽은 와세다 대학 강당을 점거한 전공투 학생들이 벽에 쓴 낙서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일본 내에서 궁지에 몰린 학생 운동 세력들이 스스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표현으로 치바 데츠야의 『내일의 조』를 택한 것이다. 제목엔 ‘내일’의 조였으나 만화 속 주인공에게도 일본의 전공투 세대들에게도 내일은 없었다. 그에 비해 1990년대의 대표작 『슬램덩크』는 탈이념 시대의 아우라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그 문제를 사회 구조에 빗대어 고민하는 법이 없다. 작가 자신도 그런 문제를 작품 속에 표현하고 있지 않다. 



『슬램덩크』
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정대만"이었다. 물론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윤대협"이었는데, 그래서 나중에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이름을 "대협"이라고 지을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마침 내 성(性)이 "전"가라 그리되면 자식 이름이 "전대협"이 될듯하여 고만 머리에서 지웠다. 윤대협과 정대만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이 만화를 즐겁게 보는 재미 중 하나다. 『슬램덩크』와 『내일의 조』의 차이는 단순히 비장미, 비애감의 차이가 아니라 좀 더 다양다종해진 캐릭터의 차이에서도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슬램덩크』는 천재적인 캐릭터에게도 다양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윤대협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천재라면, 정대만은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뒤 천재성보다는 노력하는 인물로 탈바꿈한 수재형 인물이다. 

물론 『슬램덩크』
에도 일본만화 특유의 과장된 어법으로 등장하는 천재들이 있지만, 그 천재들조차 허점을 지닌, 다시 말해 인간적이란 데 그 매력이 있다. 만화의 주인공격인 자칭 '바스켓맨, 농구 천재' 강백호. 그에게는 무엇이든 빠르게 배우고 익히는 농구센스라는 재능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재능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와 어설픈 실수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사실 아마추어
야구 못지않게 학원 스포츠로서 농구 역시 꽤 오랜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 연세대, 고려대라는 전통적인(재벌에 비견할 학벌이란 점에서 더욱더) 양대 라이벌 사이에서 일종의 마이너리거였던 중앙대, 허재와 강동희를 주축으로 한 중앙대 농구는 현실 속에 나타난 북산고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신선한 경험이었던 거다. 이들의 출현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재현되지 못할 충격이었다. 그 무렵, 학교 체육 시간에 레이업슛을 배우는 과정이 있었다. “슬램덩크”에서는 이른바 ‘풋내기 슛’이라고 해서 가장 기초적인 슛 동작을 말하는데, 나는 워낙 운동 신경이 없는 탓인지, 핸드볼조차 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작은 손  때문인지 몰라도 슛 성공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강백호가
농구를 하게 된 시초는 북산고 부동의 센터 채치수의 여동생에 혹한 때문이지만, 실제로 그 자신을 바스켓맨이라고 부르며 농구에 집착하게 만든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호쾌한 슬램덩크에 반한 탓이었다. 농구에 천부적 센스를 보이며, 슬램덩크를 작렬시키는 백호조차 농구 입문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풋내기 슛', 바로 레이업 슛인데, 농구천재를 자청하는 강백호는 비록 엄청난 점프 능력을 가졌음에도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레이업 슛을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아무리 멋진 슬램덩크도, 레이업 슛과 마찬가지로 2점에 불과하다. 고난이도 기술인 슬램덩크를 할 줄 아는 그조차도 성공하기 위해선 먼저 기초인 레이업슛부터 연습해야 한다는 작은 교훈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백호는
바로 그 풋내기 슛을 하루에 천 개씩(맞나?) 연습한다. 그러고 보니 일명 슛도사로 불렸던 전성기의 이충희 선수조차 연일 계속되는 경기 시즌 중에도 슛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백 개의 슛을 던졌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백호는 거듭해서 레이업 슛을 연습하며 스스로에게 되풀이 한다.

"왼손은 거들 뿐."

그는
이 평범한 한 가지 깨우침을 얻기 위해 매일 같이 무수한 실패를 경험한다. 사람들은 ‘깨우침’이란 말을 손쉽게 내뱉지만, 무언가를 안다는 말은 이토록 어려운 말이다. 동양에선 무언가를 배운다고 말할 때 한자로 ‘습(習)’이라 쓴다. 깃우(羽)변에 백로(白鷺)를 의미하는 백자를 쓴 말이다. ‘습’은 백로 새끼가 둥지를 벗어나 비행하기 위해 날갯짓을 연습하는 모양을 뜻하는 한자어다. 만약 백로 새끼가 날갯짓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다면 목숨을 건 최초의 비행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 동양에서 무언가를 배운다, 깨우친다는 말은 단순히 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안에 깃들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백호가 평범한 점프 슛을 하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왼손은 거들 뿐"이라고 되새기는 건, 머리로만 알고 몸으로 알지 못하기에 그것이 아직 완전한 배움, 완전한 깨달음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손쉽게 마음을 다스리라고 충고하지만, 그렇게 충고하는 이조차 마음의 평화란 삽시간에 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은 안다는 건 때때로 허망한 일이다. 우리가 반드시 아는 데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종종
글을 쓰고, 공부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현학은 물론, 조금이라도 멋지게 문장을 꾸며보고 싶다는 욕심이야 누구에게나 잠재된 욕망이다. 그것은 마치 탄알을 잰 권총의 팽팽한 방아쇠처럼 당겨져 있다. 나는 학교에서 유도를 배운 적이 있고, 프로 복서였던 친구에게 권투를 배운 적이 있다. 우리가 올림픽에서도 본 적 있는 것처럼 유도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메어꽂는 화려하고 호쾌한 기술들이 있다. 하지만 유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누구나 남을 메어꽂는 기술을 배우기 전에 먼저 자신이 메어 꽂히는 걸 배우도록 한다. 그것이 낙법이다. 유도에 입문하는 사람 누가 되었든, 도장에서 가장 오랜 시간, 가장 정성스럽게 배우는 것이 바로 낙법이다. 낙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는 남을 메어꽂을 수도, 자신이 메어 꽂힐 때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권투를 배울 때도
1라운드 3분간 쉬지 않고, 풋워크를 하면서 계속 주먹을 뻗을 수 있는 기초 체력부터 다지게 한다. 이때 주먹을 뻗는 것은 남을 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멋진 스트레이트, 속사포 같은 잽, 유도탄처럼 휘어들어가는 훅, 상대의 턱에 정확하게 명중하는 어퍼컷을 배우는 건 그로부터도 한참 뒤의 일이다. 주먹을 계속 내뻗는 것조차 남을 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맞지 않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맞든 안 맞든 내가 맞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헛손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추어는 라운드 당 3분, 3라운드 경기를 뛴다. 링 위에 단 한 번이라도 서 본 사람은 그 느낌을 안다. 마치 스키를 처음 배우는 이가 리프트에 오르기 전 밑에서 바라본 입문자 코스용의 완만한 슬로프처럼 링에 오르는 순간, 슬로프는 천애절벽이 되고, 사각의 링은 내가 주먹을 휘두를 땐 태평양 같이 넓고, 상대방의 주먹이 날아올 땐 사방이 막힌 벽 같다. 그런 건 해보기 전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가장 확실한 깨달음은 무용수의 몸처럼 가장 정확한 동작을 몸으로 깨우치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소설가가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 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했던 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 말만큼은 뇌리에 박힌 듯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누구든 희망도, 절망도 없을 리 없다. 왜냐하면 이 말에서 중요한 건 희망이나 절망이 아니라 그날그날의 감정이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간다는 것에 있다. 희망도, 절망도 평생을 고민해야 떨쳐낼 수 없는 것들이고, 그런 사념들을 앞에 두고 고민하느라 멈춰있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나아간다. 물론 나 역시 인생을 다 살아보지 않았으니 무어라 할 수는 없으나 살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있는 법이다. 앞서 간 이들의 궤적이 있기 때문이다.

『슬램덩크』
는 마치 나관중의 삼국지가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에게 각각 오관돌파와 장판파 전투를 보여주듯 주요 인물들 저마다에게 각각의 에피소드를 준비시켜 놓고 있다. 강백호, 서태웅, 송태섭, 채치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온다. 부상 끝에 농구를 포기했다가 다시 농구로 되돌아온 사내 ‘불꽃 남자’ 정대만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그는 북산고를 이끄는 중요한 경기에서 자신의 체력이 바닥나 백업 수비도, 커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너무나 지친 나머지 이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결정적인 순간,
대만에게 농구공이 패스된다. 그는 볼을 잡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난 여기 서서 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정대만은
그 자리에서 슛을 날린다. 농구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서서히 하강하고 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정확하게 꽂힌다. 그는 지금 현재 코트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유일한 일을 했다. 이런 정대만의 모습은 순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정대만은 '불꽃 남자'라는 그의 별칭에 어울릴 만큼 농구에 대한 동경과 증오를 오갔다. 그의 동경이 순수한 만큼 증오도 컸다. 그는 순수했으므로 아름답다. 중학시절 그의 팀이 결승전에서 뒤지고 있을 때 정대만은 공을 잡으려다가 넘어졌다. 그때 그를 주목해서 지켜봐주던 안 선생이 말한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돼.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
 



그는 동경과
증오 사이를 방황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슬램덩크”의 여러 주인공들 중 유독 정대만을 좋아하는 이유다. "Dum vita est, spes est.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내가 편지 말미에 종종 서명 대신 쓰는 글이다. 청춘의 어느 시기에 나는 건너야만 했던 강들을 자신 있게 건너지 못한 적이 있다. 그로인해 대신 다른 많은 것을 떠나보낸 경험도 있다. 물론 『내일의 조』와 『슬램덩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비장한 대사들이 결코 촌스럽거나 우스워 보이지 않던 시절의 『내일의 조』들은 이제 『슬램덩크』 세대의 코믹하면서 가벼운 자세에 대해 어째서 너는 나처럼 비장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세대가 그대들은 어째서 그리 비장한가를 되물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나온 청춘의 고민을 현재의 청춘들이 똑같이 붙잡고 있다는 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모양만 다를 뿐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슬램덩크가
걸작인 이유. 그건 삶의 자세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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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매우 많다. 사람, 인간, 민중, 군중, 대중, 인민, 서민 등등... 때로는 정치적으로, 학문의 엄밀성을 위해 용어는 구분되고, 구분될 때마다 각각의 용어들은 별도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람 혹은 여러 사람들을 일컫는 말 가운데 가장 나중에 온 말은 무엇일까? 민중? 하기사 우리가 민중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나중에 발견되었으며, 가장 나중까지 논란의 여지로 남을 인간은 '개인'일 듯 싶다. 최근 역사학계의 새로운 조류로 주목받기 시작한 '일상사'에서(이와 관련한 책으로 몇 해 전 청년사에서 출간된 『일상사란 무엇인가』와 개마고원에서 출간된 『나치시대의 일상사』 등이 있다. 더 좋은 책들도 있지만...) 다루는 인간 또한 개인이라 할 수 있다. 일찌기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만행이 히틀러와 같은 소수 권력자들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에 내재된 '악'에 의해 가능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때의 일상 역시 개인에 해당한다.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을 '혁명 시도가 실패하는 원인이며 결과' 로 봤다. 일상이란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다람쥐 쳇바퀴돌듯 반복된다. 그렇기에 일상은 우울한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말처럼 모든 혁명은 일상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실패하는 원인도 일상에서 비롯된다.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는 변화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일상에 매몰되는 변화 역시 아무 것도 성취해내지 못한다. 일상의 무기력증은 일상을 변화시킨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복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일상성의 의미 속에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개인과 그와 같은 소비적 일상을 거부하는 개인, 이 개인이 주체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르페브르는 '일상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 유택 교수를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손녀딸 하나코와 유택 교수.
야나기사와 요시노리(Yanagisawa Yoshinori 柳澤良則) 교수가 원저상 유택 교수의 이름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택 교수만 한국식으로 한자어 발음을 따서 작명되어 있고, 그의 가족이나 나머지 사람들 이름은 개명되지 않고 일본 이름 그대로 사용된다. 야나기사와 교수라고 하는 것보다야 유택 교수가 편하긴 하다. ^^

'야마시타 카즈미'의 만화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읽다보면 문득 이런 일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은 읽는 내내 감탄하기도 하고, 때로 감동받기도 하지만 기억에 남는 극적인 대목은 쉽게 찾을 수 없는 만화다. 이 작품에도 물론 사건이 일어나고, 갈등이 빚어지긴 하지만  사건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은 철저하게 캐릭터에 의해 진행되는 만화란 점이 다른 작품들과 가장 큰 변별점이 된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의 주요 캐릭터들 우선 주인공 유택 교수가 있다. 그는 Y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매우 고지식한 인물이지만 마음이 따스하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며 무엇보다 매사 원칙을 세워 공부하는 일을 즐긴다. 그리고 그의 부인 마사코, 평범하지만 과연 평범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넷째(막내) 딸 세츠코, 크게 튄다고 할 수 없지만 유택 교수의 딸 아니랄까봐 자기 주장이 확실하고 대찬 면이 있다. 그리고 그녀의 남자친구 히로미츠, 그리고 외할아버지를 무척 존경하여 유 교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흉내내는 하나코가 있다. 아, 고양이 타마도 빼놓을 수 없다.
 

Y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유택을 다른 이들과 확실하게 구분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의 신념이다. 유택은 고지식하다 못해 확실한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이런 개인적 신념은 그의 가족은 물론 그가 속해있는 다른 사회의 융통성이 과다한 인물들과 늘 갈등을 빚고, 충돌을 일으킨다. 만약 이 충돌이 독자들로 하여금 답답하다고 느끼게 만든다면 이 작품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얻지는 못했을 게다. 작가 야마시타 카즈미는 유택을 이 위태로운 경계 선상에서 오락가락하게 만들면서 이 작품의 소소한 재미와 교훈을 유발시킨다. 유 교수의 준법 정신, 바르게 살기 자세는 타인을 겨냥함과 동시에 그 자신을 겨냥한다. 바르게 살기를 타인(혹은 독자)에게 권유한다는 일은 종종 위험한 경험임을 잘 아는 독자를 위해 작가는 유택의 면모들을 먼저 살피고 이해하도록 권유한다. 
 

예를 들어 바른 생활 사나이인 유 교수는 취침 시간 9시를 칼 같이 지키는 인물로(그런 의미에서 유 교수의 모델은 '칸트'일지도...), 그 시간을 넘기면 마치 신데렐라의 황금마차가 호박으로 변하듯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든지 하는, 결함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원칙이 남을 겨냥할 때나 자기 자신을 겨냥할 때나 변함없다는 점에서 그는 타인에겐 바르게 살기를 강요하면서도 그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수많은 위선자들과 격을 달리 한다. 무엇보다 유 교수의 바르게 살기가 그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피해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기에 우리는 편한 마음으로 유 교수의 좌충우돌을 지켜볼 수 있다. 게다가 그의 이 융통성 없음의 신념이 타인에 대해서는 배려와 관심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유 교수의 그 인간적인 매력에 흠씬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작가 야마시타 카즈미는 만화적 관점에서 유 교수를 비롯한 캐릭터 묘사에 특히 각진 부분보다는 전체적으로 원만한 선을 통해 독자들이 시각적으로도 편안하고 깔끔함을 느낄 수 있도록 장치해두고 있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 주는 매력의 또 한 가지 요소는 이 작품이 지닌 풍부한 드라마성이다. 작가는 TV드라마처럼 일정한 분량 동안 기승전결을 짓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대신 어떤 이야기는 상당히 긴 분량의 이야기로 늘이고, 어떤 이야기들은 짤막한 에피소드로 완결짓는 신축성 있는 방식을 이용해 만화책에 담아내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만화들이 대개는 잡지에 연재되는 것을 다시 단행본으로 엮어낸다고 했을 때 작가 야마시타 카즈미의 독특한 고집이 관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야마시타 카즈미는 유택을 통해 현재로부터 일본의 과거를 오가며 - 동시에 유택은 일본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청년들을 길러내는 대학 교수다 -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유 교수 자신이 희극적인 캐릭터도, 비극적인 캐릭터도 아닌 탓이지만, 유 교수의 캐릭터 자체도 희비극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그런 유 교수의 캐릭터 덕에 가끔씩 과거로 피드백하는 순간, 진지하게 몰입을 요구받는 순간에도 우리는 편안하게 유 교수를 따라 건너갈 수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캐릭터들이 오가는 상황에서 독자들이 지루하다거나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물론 이 작품의 제목 자체가 이미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 교수는 천재의 일면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처음 쳐 본 게이트볼 게임에서 그는 마치 '맥 가이버'가 처음 당구 게임을 경험하면서 그가 지닌 물리학적인 지식들을 이용해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유 교수도 그런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작품 전체에서 두드러지는 건 유 교수의 천재적인 면모보다는 그와 가족의 평범한 일상과 삶 그 자체다. 유 교수가 이런 평범함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비범함을 보이는 대목은 그의 천재성보다는 그가 늘 배움을 갈구하는 인물이란 거다.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나 그의 문제를 해결해줄 때나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 갈 때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들은 "나는 지금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배운 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와 같은 말이다. 그에겐 세상 모든 것이 배울 거리들로 가득하기에 심심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일상을 늘 진부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노는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다람쥐 쳇바퀴란 표현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그물보다도 더 촘촘하게 짜인 인간 관계와 사회의 그물망에 포섭되어 있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 권력 관계와 이해 관계로 얽혀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일상은 하루하루 무의미한 경험의 연속으로 비춰지고, 삶은 조각난 파편처럼 아무 의미를 얻지 못한 무엇으로 개인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바흐친으로부터 비롯된 민중 혹은 대중의 일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앙리 르페브르, 미셀 드 세르토 등과 같은 문화연구자들은 일상이 단지 파편화된 개인이 권력 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에 대항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천재 유 교수처럼 늘 무언가 배우는 이, 스스로 주체적인 자아로 해나가는 이에게 일상은 무기력한 삶의 반복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환희의 새로움을 경험하는 순간이 된다. 

일상, 그것은 혁명에 대해 품고 있는 환상처럼 혹은 삶의 진실한 측면이 그러하듯, 불꽃처럼 일순간 환하게 타올랐다가 꺼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 혁명의 미래라면, 일상은 바로 미래의 어제인 것이다. 천재 유 교수가 주는 가장 아름다운 매력은 일상의 환희, 일상의 재미가 어떤 순간 점화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는데 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이 스스로 깨닫고 실천에 옮길 수만 있다면 일상의 주인은 다시 당신이다. 지금 아주 작은 일 한 가지를 스스로를 위해 먼저 해주라. 잠깐 책상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이제 막 움트는 새싹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는 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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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마사무네 - 『애플시드』

 

사람들이 ‘오시이 마모루’와 그의 <공각기동대>에 열광할 때, 비애를 느꼈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까?


영화.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vs 만화.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나는 일본 아니메의 열광적인 매니아이다. 그렇다고 일본 아니메의 작가 연보를 줄줄이 외우는 오타쿠적인 매니아는 아니고, 감상하길 즐기고, 기회가 닿는 대로(이 말은 "닥치는 대로"에 비해 얼마나 우아한가?) 수집하는 정도에 그친다. 일본 아니메에 열광하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작품 자체보다는 플라모델 조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건담 시리즈를 조립하면서 그 리얼한 작동에 경악했다. 그것은 건담 이전의 로봇들이 일종의 슈퍼 거대 로봇물이라 어린 내 눈에도 뭔가 어설퍼 보였기 때문이다. 철인28호, 마징가Z, 그랜다이저 류의 로봇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매사 새로운 것이 나올 때는 이전의 것들의 반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기에 하는 이야기다. 이런 슈퍼 로봇 류 장난감들은 조립하거나, 완제품 완구라 할지라도 워낙 처음의 설정 자체가 있었기에 건담과 같은 리얼 로봇 류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건담의 경우엔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검지 부분이 움직이고, 무릎 관절을 비롯한 각각의 관절이 좀더 인간적인 움직임에 맞도록 되어 있었다(지금 인터넷을 떠도는 구체관절인형의 원조가 건담이기보다는 일본의 전통적인 공예 가운데 일부가 완구 형태로 발전해왔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건담 정도의 움직임과 설정을 두고 슈퍼 로봇물 애호가들과 리얼 로봇물 애호가들 사이에 열띤 논쟁도 늘상 있지만, 결국 로봇물의 설정에서 <장갑기병 보톰즈>의 팬들에겐 건담 역시 비과학적이고, 궁색하기는 매일반이다(장갑기병 보톰즈는 내년 2월 무렵 일본에서 TV 시리즈와 OVA시리즈를 합쳐 DVD세트로 발매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일본 현지 가격으로 100만 원 정도 할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좀더 사실성에 근접한 혹은 극사실성을 궁극으로 추구한 오시이 마모루와 <공각기동대>에 이르는 SF에 이르면 이걸 단순히 로봇물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는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 <공각기동대(1989)>가 있다. 사실 일본 내에서 그의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엔 시로 마사무네가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그 까닭은 그의 작품들이 주로 해적판 형태로 먼저 소개되었고, 시로 마사무네 자신이 외부 노출을 굉장히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매체에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고, 시로 마사무네란 이름 역시 가명이다. 내가 처음 시로 마사무네를 알게 된 것은 그의 데뷔작인 <애플시드(1985)>의 해적판 만화를 통해서였다. 그 이후로 나는 시로 마사무네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오시이 마모루의 대표작이자,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해준 <공각기동대>는 원작자인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와는 몇몇 설정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른 작품에 가깝다. 오시이 마모루가 <패트레이버2>를 만들고 난 뒤 차기작으로 <인랑>을 제작하려고 했지만, 반다이 측에서 이를 거부하고 그보다는 <공각기동대>의 애니메이션화를 제의한다. 오시이 마모루는 급작스런 제안이지만 워낙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 세계를 좋아했기에(두 사람의 작품세계는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흔쾌히 이를 승낙했다고 한다. 대신 오시이 마모루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원작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들 자신이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원작의 작품성과 흥행성과 상관없이 이를 다른 장르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시이 마모루는 원작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옮기는 대신, 원작에서 설정과 내용의 일부만 차용해 자신만의 <공각기동대>를 만들기로 한다. 시로 마사무네는 이를 흔쾌히 승낙한다. ‘원작자는 신경쓰지 말고, 자유롭게 만들라’며 오시이 마모루의 제안을 지지해주었다.

- '시로 마사무네' 특유의 섹스 어필한 포즈들은(그야말로 펑크한 장난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메카닉 탑승 자세에도 드러난다.


오시이 마모루 판 <공각기동대>와 시로 마사무네 판 <공각기동대>의 가장 큰 차이는 캐릭터와 분위기의 변화였다. 시로 마사무네의 <애플시드> 역시 결코 경쾌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만화적인 재미란 측면을 고려한 듯 사고뭉치 전차인 ‘후치코마’ 캐릭터 등이 무거운 분위기를 반전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재미를 위해 시로 마사무네는 시종일관 지속되는 극화체의 흐름 중간에 만화체를 삽입하기도 하는데, 오시이 마모루는 극한의 극사실주의 묘사로 일관한다. 코믹한 요소들을 대거 거둬낸 대신, 시로 마사무네 판의 굵직굵직한 대사들은 그대로 살리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전개와 문제의식이란 측면에서 반다이측이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 <공각기동대>의 애니메이션화를 오시이 마모루에게 맡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 '시로 마사무네'는 "애플시드"에서 버추얼 스페이스를 창조한 것뿐만 아니라 버추얼 역사를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시로 마사무네


미야자키 하야오와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 세계는 이 두 사람의 작화 스타일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랄 수 있는 부분과 차이를 비교해보는 건, 시로 마사무네의 스타일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 듯싶다. 편의상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를 비교해보자(두 편 모두 애니메이션 작품이 아닌 만화로 한정한다). 우선 두 작가의 공통점은 여성. ‘나우시카’와 ‘쿠사나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인데, 나우시카의 재능은 선천적인 것에 비해, 쿠사나기의 재능은 다분히 후천적인 것이란 차이가 있다(신체의 일부를 안드로이드화한 것을 두고 선천적 재능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다른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와 인간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을 철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두 작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이기도 한 유토피아의 세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토피아가 자연회귀(自然回歸)적이라면, 시로 마사무네의 유토피아는 사이버펑크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지향 사이에 놓인 현실세계와 미래, 물질문명에 대한 시선은 부정적이며, 비판적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더 나아가 두 작가의 유토피아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곳이란 점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지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생명공학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는데, ‘불의 7일간’은 창세기를 역전시킨 개념이다. 신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7일간에 빗대어 아마겟돈의 7일간을 의미하는 것이 ‘불의 7일간’인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과정에서 과거의 인간들이 첨단생명공학을 이용해 부해를 만들어 환경공해물질을 제거하도록 한다는 설정을 삽입하고 있다. 즉, 과거의 인간들은 부해를 통해 자신들이 만들어낸 공해물질과 독소들을 제거한 뒤 과거의 잘못을 되밟지 않을 신인류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 ‘불의 7일간’으로부터 생존해 부해와 공존의 삶을 살고 있는 인류를 전멸할 수도 있다. 이렇듯 생명공학을 이용해 인류를 개조하려 드는 과거의 인간들은 신(神)적 존재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비록 나우시카가 과거로부터 계승되어온 신화적 존재라 할지라도 나우시카 혼자의 힘으론 인류를 유토피아라는 이상향으로 이끌고 갈 수 없다. 이 때 나우시카가 기대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은 부해와 거대화된 곤충, 그 중에서도 ‘오무’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으며, 이때 도움을 얻을 대상은 자연이다.

- 시로 마사무네의 오리지널 작화 '애플 시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개인적으로 시로 마사무네의 작화가 더 마음에 든다.


시로 마사무네는 <공각기동대>를 통해 세기말의 권태스러움을 그야말로 펑크적인 반항으로 가볍게 처리한다. 이때의 가볍다는 의미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비해 시쳇말로 Cool하다는 것이지, 무게 자체의 가벼움을 의미하진 않는다. 시로 마사무네는 <공각기동대>의 전작이랄 수 있는 『애플 시드』를 통해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불의 7일간’을 만들어냈을 법한 인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인구수가 급감하게 되고, 사회 구성원을 확보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난 바이오로이드들로 채워지고, 기존의 국가와 민족이란 개념이 없는 인공의 도시 ‘올림푸스’이다. <공각기동대>의 시간 개념은 『애플 시드』의 시간보다 앞선 시대이지만, 그가 추구하는 바는 『애플 시드』의 세계관보다 진일보하고,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시로 마사무네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인 "나는 인간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란 질문은 이미 『애플 시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만, 이를 좀더 정교하게 다듬고, 주제를 밀도있게 다루고 있는 것은 <공각기동대>이다. 오시이 마모루는 이런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가 추구한 주제의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올림푸스 시티로부터 쿠사나기 소령이 살아가는 근미래의 시대로 역순한다 하더라도 시로 마사무네가 작품을 통해 주장하는 유토피아 속의 세계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구축할 수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시로 마사무네의 유토피아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마찬가지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이지만 자연의 힘을 비는 대신, 생물학적으로 조작된 바이오로이드, 즉, 기계의 힘을 통해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현생 인류가 과거의 인류에 의해 전멸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면, 시로 마사무네의 인류는 그 근본 패러다임부터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 "애플 시드"의 매력적인 히로인 '듀난 뉴트'


애플시드, 공각기동대 - 시로 마사무네

얼핏 들은 이야기인데, 시로 마사무네의 그림체는 누군가에게 사사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그 자신이 누구누구하면 알 수 있는 대가를 스승으로 둔 것이 아니라 혼자만의 연습을 통해 도달한 경지라고 들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시로 마사무네에게는 그만이 지닌 특징들이 있다. 첫 번째는 그저 평범한 재미를 찾아 만화책을 펼친 보통의 독자들에겐 골머리가 아플 만큼 복잡하고, 거대한 철학적 테마들이다. 사실 인형 혹은 로봇이 인간인가? 하는 질문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피노키오, 인어공주가 그렇고, 프랑켄슈타인 역시 이런 질문들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게 만드는 요건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기억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블레이드 런너(Blade Runner, 1982)>와 원작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1968)』의 작가인 필립 K. 딕(Philip K. Dick)만큼 인간과 기억의 상관관계에 천착해 들어간 작가도 드물다. 어떤 의미에서 시로 마사무네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세계의 ‘필립 K. 딕’이다. 그러나 시로 마사무네를 필립 K. 딕과 구분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차이는 필립 K. 딕의 작품 세계가 다분히 디스토피아적인 반면에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 세계는 사이버 펑크적인 요소들, 좀더 나아가 그것을 일단 긍정하고 수긍하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봇(robot)이란 말이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K.차페크가 희곡 『로섬의 인조인간(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유래되었단 사실 만큼이나 사이버(Cyber)란 말이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1984)』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필립 K. 딕이 정통 SF의 무거운 주제의식을 가진 작가라면 이후 등장하는 작가들은 ‘사이버’와 ‘펑크’를 조합해낸 ‘사이버펑크’적인 요소들을 가미하기 시작한다.


펑크 자체는 반체제적이란 점에서 사회에 위협적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저항이란 점에서 사회 내부의 일탈자로 치부되고 있다. 사이버와 결합된 펑크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사이버펑크족은 사이버스페이스를 개인의 자율적인 권리가 보존되는 영역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제도를 조롱하기는 하지만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사회의 획일성, 진부함에 대한 비판정신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들이 지닌 펑크 정신은 ‘나는 인간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질문을 경쾌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SF작가들, 심지어 그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오시이 마모루 스타일과도 다르다. 그의 이런 펑크 정신은 그가 독학으로 익힌 그림체와 캐릭터들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이 그를 다른 작가들과 구분하게 만들어주는 두 번째 특징이다.


그의 메카닉 디자인과 설정은 리얼함이 뚝뚝 떨어지는 대단한 것들로 일단 시각적인 쾌감이 대단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OVA나 애니메이션이 아닌 만화책을 출판하면서 설정자료집을 별도로 출간한 것은 시로 마사무네가 최초의 일이라고 한다. 시로 마사무네의 그림 스타일과 그가 담고 있는 주제 의식 사이엔 괴리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그의 펑크성을 역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구미에서 제작된 정통 SF물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캐릭터와 그림체가 매우 어둡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철학적 테마라는 묵직한 주제의식의 반영이랄 수 있는 이런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대체로 극화체에 가깝고, 그리스 정통 비극에 등장함직한 성격을 지닌다. 이에 비해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조차 마치 미소녀물에 등장하는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묘사된다. 시로 마사무네는 작품에 드러내놓고 경쾌한 섹스 코드를 삽입하여 자칫 진지해지기 쉬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메카닉이나 사회 구성 시스템 등에 대해서는 극사실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극 속에 종종 등장하는 미소녀 안드로이드들은 갈 길 바쁜 독자들의 발길을 사로잡아 버린다.


사이버펑크의 정신 자체가 이미 마이너리티성을 지닌다고 했을 때, 시로 마사무네는 그 자신이 이런 마이너리티성을 대변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국내에 시로 마사무네가 덜 알려진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거니까....


* 『공각기동대』와 『애플 시드』는 몹시 소장하고 싶은 책들이긴 한데, 『공각기동대』"는 이렇듯 절판되었고, 『애플 시드』는 어느 출판사가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지 아직까지 구하기 힘든 해적판을 제외하곤 출판 소식을 듣지 못했다. 개인적으론 『애플 시드』를 좀더 보고 싶은데, 음, 음, 그 이유는? 이 만화책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보다 섹시하기 때문?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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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그녀



다카하시 신을 아는 만화 매니아들이 많을 텐데,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을 덧붙이는 것은 약간 우스운 일이 될까? 가끔 남성성, 여성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남성성은 이렇다, 여성성은 이렇다고 거칠게 규정하거나 규정당할 때 약간 마음이 아파질 때도 있다. 가령,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내가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왕따 당하는 느낌을 즐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 점에서 페미니즘 역시 선택적 사고라는 것은 일견 불행하면서 다행한 일이다. 가령, 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지만 그 대의에 너무나 동의한다. 그런데 그런 문제는 넘겨두고라도 남성성, 여성성이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글쎄, 최소한 만화책을 고르는 취향에서만큼 이런 남성성과 여성성의 취향 분화가 확실히 되는 분야가 있을까? 물론 그 장벽이 남성과 여성의 양성 평등에 기초하여 변화해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만화계의 장벽은 브리티쉬 오픈에서 여성 골프 선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큼이나 높다. 어제와 그제 머리맡에 놓고 읽은 두 권의 만화책은 나에게 남성을 위한 순정만화도 존재하는구나 하는 편견 아닌 편견, 스테레오 타입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최종병기 그녀』의 작가 ‘다카하시 신’의 초기 단편집 『좋아하게 될 사람』과 『안녕, 파파』 두 권이었다. 『최종병기 그녀』의 첫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다카하시 신이란 작가가 분명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잠시 후 남자일 거라고 생각을 수정했다(실제로도 '남자'였다). 그런 착각을 했던 까닭은 다카하시 신의 독특한 그림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남성적 문체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분명 만화에 존재하는 남성적 그림체보다 명확하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만화에 있어서 남성적 그림체와 여성적 그림체는 확연히 구분될 만큼 달랐다.

그 차이는 고우영 『삼국지』의 그림체와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캔디』의 그림체가 다른 것처럼 확연한 것이다. 물론 국내의 일부 여성 작가들(『테르미도르』의 김혜린 같이)이 프랑스 혁명 과정을 다루는 만화를 그리거나,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이 그간 남성적 주제로 알려져 왔던 역사 속의 권력 투쟁, 혁명을 다룬다 하더라도 그림체에 있어서만큼 전형적인 그림체를 유지하는 편이다. 가령 얼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눈동자, 치렁치렁하는 머리카락,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 등등 말이다. 물론 다카하시 신의 그림체는 기존의 여성 순정만화체 그림과는 또 다르다. 어딘가 비어 있는 듯 남아있는 여백, 아마추어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흑백 모노톤과 끝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가늘게 이어지는 선, 스크린 톤은 거의 생략하는 등 적게 표현하여 오히려 상큼하고 신선한 느낌이 인상적인, 어딘가에서 본 듯한 정겨움이 묻어난다. 마치 수업 시간에 담임선생의 눈길을 피해 공책에 몰래 그린 만화의 캐릭터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의 그림체가 남성적인 느낌은 아니다. 물론 등장하는 여성의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게 늘어나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의 근육은 사라지고, 여성적인 선은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작가가 금방 남성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캐릭터 표현에 있어서 숨길 수 없는 남성적 시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신의 대표작 『최종병기 그녀』를 보자. 제목부터 참 과감하다. "최종병기 + 그녀"라니,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평범한(?) 남자 아이들은 엄마에게서 받은 혹은 엄마 몰래 숨겨둔 용돈을 챙겨 가장 먼저 군것질을 하고 조금 지나서는 건프라를 사거나 마크로스, 밀리터리 플라모델들을 조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중학생이 되고, 형, 누나, 혹은 친구네 집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과월호를 읽거나 거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발견하여 그에 대한 설정자료집을 사거나, 복사하고 인터넷으로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이때의 최종병기란 무릇 거대로봇군단이거나 그도 아니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뉴타입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라니 게다가 그녀는 이런 말이나 지껄여대는 소녀다.

"왜 나는 당신에게 상처만 입히는 걸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여자라서 미안해"

주인공 소녀는 가냘픈 몸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유방을 달고 다니며 유사시엔 앞가슴을 미사일처럼 발사하는 아프로다인이나 비너스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여성주의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름답고, 소박하게 그려지는 만화체에 비해 여성의 신체를 절단하고, 개조하여 병기화해가는 과정 자체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여성 자신이 소유하지 못하고 소외당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어쨌든 금방이라도 교실 뒤에 웅크리고 있다가 다가와서 쪽지 한 장을 놓고 수줍게 교실 뒤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소녀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쟤랑 나랑 같은 반이었어? 하고 되묻고 싶을 만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녀다. 요새 경제 이야기하면서 다들 성장 동력, 성장 동력하는데, 우리 삶에 있어서의 성장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도 한 때는 뭐뭐 했다"는 식의 대사나 후일담을 늘어놓는 나이가 되어간다. 어떤 사람은 군대 시절 이야기를, 어떤 이는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선배 뻘 되는 386 세대들(엄밀히 말하면 나도 그 끄트머리쯤 있는지도 모른다. 70년생, 89학번, 30대)이 이제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다니는 지금, 나의 유년 시절은 어디쯤에 머물고 있을까? 나는 요새도 밤마다 누군가에 쫓기는 꿈을 꾼다. 대개 이런 꿈의 할머니 식 해몽은 '키 크느라 그런다'는 것이다. 자, 그대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라. 정말 즐거웠는가? 아니면 고통스러웠는가? 누구나 자기보다 어린 나이의 친구들에게는 내 과거는 이랬었지, 이렇게 화려했거나 이렇게 고통스러웠거나 상관없이 과장하게 된다. 말할 때는 금방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지만 돌아서고 나면 누구보다 자신의 과거를 잘 기억할 수밖에 없다.

과연 아름다운 유년만이 존재했을까? 『최종병기 그녀』의 두 남녀 주인공(슈이치와 치세)이 만난 세계는 도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에 휘말려 있고, 결국 치세는 최종병기로 개조된다. 과연 그녀는 나는 아직도 치세 그대로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다카하시 신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SF적인 요소들을 차용하는 듯 보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라 할 만큼 설명하지 않는다. 치세가 어떻게 최종병기가 되었는지 실제로 그녀가 최종병기의 위력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부분은 죄다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병기 그녀』에서 <에반게리온>이나 기타 SF물들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종종 이런 부류의 SF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가 만들어 논 가상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이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그 설정들을 달달 외우는 것을 취미로 한다. 하지만 『최종병기 그녀』는 그런 류의 만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남성들을 위한 순정만화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만화의 여주인공 치세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롤리타』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다카하시 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개의 여성 캐릭터들은 종종 남성들보다 강인하지만(특히, 성적 접촉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에게는 유달리 강한 면모를 보인다는 자극적이라는 측면에서) 그 외의 경우엔 무척이나 순종적이고, 다소곳하다. 물론 이 부분에 남성 성 판타지를 자극한다고 한 마디 해놓으면 아주 편하지만, 그건 또 너무 쉬운 접근법이다. 다카하시 신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분명 성(sex)의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어린이"와 "어른"을 가르는 구분 근거는 섹스다. 어른이란 말의 어원이 되는 '어르다'란 말 자체에 이미 '섹스하다, 남녀가 교합하다'는 뜻이 있다. 결혼, 즉 공인된 섹스는 성인식의 최종 단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성장 동력 혹은 넘어서야 할 고개들 중 하나는 분명 '섹스'다. 『최종병기 그녀』는 일종의 성장소설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서 성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요소들은 군데군데 적절히 깔려 있다. 아무리 십대 청소년들이 까질 대로 까졌다 한들 벌건 대낮에 러브호텔을 당당하게 들락거리는 어른들의 성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입으로는 숱한 성경험을 자랑하는 녀석들의 태반이 실제로 여자 아이들 앞에서는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본 경험들 역시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친구들과 '오줌멀리 누기' 경쟁에서조차 지고 싶지 않은 남성들의 괜한 경쟁 심리가 만들어낸 우스운 결과다. 



난 정말 어렸을 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고,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을 땐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으며 그 뒤론 줄곧 어서 시간이 흘러 자연사하게 되길 바라고 있는 중이다. 어른들의 세계, 그곳에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세계는 모든 것이 부정해보였고, 부조리했다. 학교도 전쟁터였지만 사회는 그보다 더욱 악랄하고 끈질긴 전쟁터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전장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람들이 낙오하고 죽어갔다. 이런 남자 아이에게 최종병기는 누구였을까? 그네들이 매달릴 수 있었던 최종적인 지지대는 누구였을까? 친구들과의 우정 아니면 사랑이다. 우리들에게 사랑은 언제나 지독하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혼란일 수밖에 없다. 치세와 슈이치가 왜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 가는가? 왜 치세의 전투경험이 축적되어갈 수록 그녀의 자아는 붕괴되고,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가? 왜 그녀가 사회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된다고 느낄까? 불행하게도 그것이 성장이기 때문이다. 흔히 영화비평가들이 지난 1980년대의 호러 무비 혹은 슬로터 무비들을 평할 때 십대의 성적 방종에 대한 기성세대의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스크림>에 등장하는 호러 무비의 원칙처럼
"첫경험을 한 여자는 반드시 죽는다." 혹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사랑하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갈망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은 비참한 결과이지만, 마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매우 정직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만,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참호(우리의 성격갑옷) 밖으로 방심하여 고개를 내밀면 순식간에 저격당하고 만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이상을 효과적으로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가도 바보취급 밖에 받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 전쟁이란 것을 무시해버린다 하더라도 실제 고교생의 생활이 절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 중 누가 있는가? 그들의 상황이 혼란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누가 있는가? 몸은 이미 성장했지만 이들의 사랑은 공공연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사회의 눈초리는 차갑기만 하다. 사랑하면 상처를 주게 된다. 그들에겐 이 세계 자체가 혼란이고, 혼돈이다. 관계를 맺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한 법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자아를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불완전한 자아로서 결핍된 상태에서 만나 사랑한다. 관계를 형성할 수는 있으나 이런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란 매우 어렵다. 이들의 사랑이 혼돈스럽고, 때로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나는 이 만화책을 도서대여점에서 읽었는데, 실제로 고등학생이 빌려가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개는 첫사랑의 열병이 지나갔을 법한 나이의 사람들이 도리어 열광하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그들에겐 이들의 관계를 제법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일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미 '길 위의 인생(life on the road)'인 것을, 어차피 길을 가야하는 사람에겐 터널도, 길의 일부이일 수밖에 없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류는 오로지 방황을 통해서만 치유된다." 좋은 성장 소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섣부르게 회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끝내 백조가 될 수 없는 미운 오리 새끼들도 있기 때문에…. 슬프게도 어른이 된다는 건, 백조가 아니란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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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원래 이 리뷰는 다카하시 신의 단편집 『안녕, 파파』와 『좋아하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것인데... 방향을 잘못 잡아 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냥 『최종병기 그녀』를 중심으로 쓴 다카하시 신의 작품론처럼 되어 버렸다. 어쩜 좋냐? 흐흐, 여러모로 우습게 되었다. ^^ 그럭저럭 수준작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최종병기그녀>는 나에게 대단한 감동을 준 만화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도 전권 다 가지게 되었고, OVA 애니메이션 DVD도 소장하고 있는데다가 작가인 다카하시 신의 초기단편집들까지 소장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인연일지 모르겠다. 치세!(흐흐, 게다가 지금 트위터의 아이콘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종병기 그녀>의 상대역이자 나레이터인 '슈'다. 치세의 사랑을 한껏 받은 덕분에 결국 지구멸망의 날까지 살아남은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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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비빔툰/ 홍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2005)

 

어느 때부터인가 한껏 엄숙하기만 했던 우리 사회의 중앙일간지들이 이제 시사만평뿐만 아니라 만화(코믹스)에도 조금씩 공간을 할애하기 시작했고, 이들 언론사들이 발간하는 다양한 매체에도 만화가 조금씩 터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환영할 만한 일이고, 도리어 때늦은 감마저 있지만 그 자체로 좋은 현상이다. 이것이 만화가 자신의 스타성 덕분이든 파워풀한 대중 매체의 영향력 덕분이든 간에 점차 만화가 자신이 스타로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수에 불과하고, 굳이 만화가가 스타가 되어야 할 이유 같은 것은 없지만 가끔 자신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게재해주는 매체의 정치적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본래 가지고 있던 미덕을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작가들의 모습도 간혹 눈에 띄곤 한다. 

홍승우의 경우, 외견상으로는 특별히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만화가라기 보다는 일상의 여러 다양한 모습과 에피소드를 다룬 <비빔툰>을 선보여 대중의 호응을 얻어왔는데,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홍승우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가 다루는 일상의 세계야 말로 여성주의자들과 모든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가장 치열한 정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때때로 가장 비정치적인 모습으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분업을 일상화하고 있는 우리들 가정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현상들을 일상의 외부로 끄집어내고 있기도 하다. 그것도 매우 재미있게 말이다.

이 작품집이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은 예전에 집 사람이 1권을 구입해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지만 사실 그의 작품들은 이전부터 익숙해 있었다
(현재 6권까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선 1권만 올렸지만 "야야툰"을 포함해 전권 모두 가지고 있다). 그가 우리 일상에 깊이 들어오게 된 것은 
1998년 <한겨레리빙>에 "정보통사람들"을 연재하면서 부터인데, 그의 틈입이 워낙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어느새 그의 가족들(활미 씨와 다운이 등)과 한솥밥 식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후 <한겨레리빙>은 여러 가지 한계를 안고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사라졌지만 홍승우와 그의 가족들은 아직도 우리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어느덧 그의 가족들과 함께 한 시간들도 상당한 세월이 되었다.

지금 내 나이쯤 된 사람들은 오래전 KBS에서 방영해주었던 <월튼네 사람들>과 MBC에서 방영되었던 <초원의 집>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좋았던 시절의 미국을 회상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홈드라마였던 이 시리즈들은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리며 채널을 고정시켰고, 나중에 등장한 MBC <전원일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월튼네 사람들>, <초원의 집>, <전원일기> 등의 홈드라마가 과거의 좋았던 대가족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 드라마와 내용이었다면, 홍승우의 <비빔툰>이 지니고 있는 매력 중 한 가지는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가족 이야기가 지닌 현재성 때문이다.

홍승우의 <비빔툰>도 언젠가는 가족드라마처럼 과거의 일이 될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금은 핵가족화된 우리들 삶의 구체적 현실을 가까이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판 홈드라마라 할 수 있다. 만약 이 작품이 단순히 한 남녀가 서로 만나서 사랑하고,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장차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가지 에피소드만을 다루고 있다면 <비빔툰>의 매력은 소소한 일상사를 기록한 일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승우의 <비빔툰>이 지니고 있는 또 한 가지의 매력은 이 작품이 정치적으로 매우 건강한 고민들을 계몽이 아닌 자연스러운 묘사의 형태로 담아내고 있으며, 홍승우 부부와 그 가족이 함께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홍승우의 <비빔툰>은 어른을 위한 성장만화이기도 하다.


이처럼 <비빔툰>은 우리들 모두 익숙한 가족
(물론 이것이 반드시 정상가족의 형태이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의 성장사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를 그만의 독특한 만화체를 빌어 엿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탓에 
아침도 못 챙겨먹는 인간이 댓바람부터 만화책을 읽으며 한 인간이자 여성, 나의 아내와 이제 막 가족을 이룬 나의 생활들을 곰곰이 씹어보게 되었다. 울 마눌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나는 가끔 내 집에 들어와 어쩌다보니 함께 살게 된 그녀를(반대로 그녀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하지만) 관찰대상 목록 1호로 등재해놓고 있다. 물론 최근엔 2호로 새롭고 참신한 딸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2호로 밀려나긴 했다.

 

- <비빔툰>은 가족의 탄생과 성장 과정과 함께 자라고 있다. 만약 내게 아이가 없었다면 이 장면저처럼 가슴 절절하게 공감으로 다가오진 못했을 것 같다.


나는 홍승우의 작품들을 보면서 본의는 아니지만 가끔 김규항(선생)의 글들을 함께 떠올리게 되곤 하는데,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극중 주인공의 모습이 김규항과 외모상 좀 닮아보인다고 느끼는 탓이 크다. 그리고 다른 한 측면에선 아마도 김규항의 글이 주는 감동의 원천이나 그가 주장하는 바의 삶이라면 어쩌면 이 만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제법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 때문이기도 하다. 실생활에서 이와 같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라며 롤모델을 찾아본 나의 결론이 김규항이었던 것 같다. 주변에서 제법 괜찮아 보이는 남정네들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사람들은 집에서도 괜찮은 남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럴 경우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인물이란 뜻이기도 하다.

"나는 정말 좋은 남편이 되고 싶다. 나는 정말 좋은 아비가 되고 싶다. 그것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여성주의적으로도..."

만약 누군가 앞서 말한 바대로 실제의 삶에서도 살고 싶다면 이런 결심에 대한 최종심급은 누가 뭐래도 본인의 아내일 수밖에 없는데, 내가 알기로 자신의 아내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분은 "역사 앞에서(창작과비평사)"를 저술하고 한국전쟁 기간 중 세상을 떠난 故 김성칠 교수의 사모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끔 인터넷이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여성주의자들과의 논쟁 혹은 일상의 가까운 현장들에서 일상다반사로 벌어지는 여러 소소하지만 중요한 이슈들을 논할 때, 남성 논객들은 일종의 알리바이처럼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먼저 언급해야 할 것 같은 죄책감 같은 것을 품게 되는데, 때때로 이런 부분이 조금 지나치거나 평소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는 논개들 입장에서 주장과 실천의 일치문제는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이기도 하다(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 생각하지 않으며 진보적이라면 나의 입장한 부도덕한 진보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라고 규정하곤 한다. 어쩌면 이것조차 방패막이일 뿐이지만).

그런 맥락에서 홍승우의 <비빔툰>을 보고 있노라면 한 사람의 남성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서 그가 품었음 직한 고민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게 되는데, 때때로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남자가 아닌가하며 홍승우에 대한 연모(?)의 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끔씩 나는 그의 만화를 보면서 피식피식 웃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물론 그의 만화가 우선 재미있기 때문이지 부차적인 이유는 바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연 집에서도 괜찮은 남자일까 하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간혹 만나게 되는 여성주의적이고, 아내에 대한 사랑도 지극하신 분들의 글을 보면서 그 분들의 아내와 삼자 대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 불량(온)하게 시리....

- 내 신혼 시절의 어느 휴일 아침 나는 아직 잠들어있는 아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일어나 갓 구운 토스트와 에그프라이(이럴 땐 달걀후라이가 아니라 꼭 '에그 프라이'라고 말해줘야 한다라고 했더니, 그건 얼마전 모 국회의원님이 '섹스 프리' 특구를 만들자고 했던 것처럼 잘못된 영어라고 지적해주신다. "프라이드 에그"란다. 에그그~) 그리고 커피 한 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아내가 잠들어 있는 침대로 갔다. 내 딴엔 호텔식 룸서비스를 한 것인데, 기껏 다 먹은 아내는 트림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고맙다'는 말 대신 "이제 밥 먹으러 가자"고 한 마디를 한 뒤 다시 누웠었다. 결혼이 재미있는 건 기대했던 바와 항상 다른 반응이 돌아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남정네로서 내가 느끼는 소감 중 하나는 분명 그런 것이다. 과연(홍 선생의 아내인 만화 속 아내인지 진짜 아내의 본명이신지는 몰라도) 활미 씨도 당신의 만화에 모두 공감하고 있기는 한 게요? 혹시 활미 씨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뒷통수에 대고 감자를 먹이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뭉스러운 웃음 말이다.

어쨌거나 같은 남정네로서 나 같은 남자들을 위해 농담반 진담반의 변명을 곁들이자면 비록 '결혼'과 '
가정'이란 제도와 공간이 남성들에게 좀더 유리한 체계임에는 틀림없지만 때때로 속좁은 숫컷으로서 어쩌면 이건 암컷들이 숫컷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구상해낸 고도의 매트릭스적 시스템 덕분에 우리 모두 공멸하는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니냔 생각도 가끔 든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여자들이 힘들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이 체제를 잘 유지하기 위한 술수, 즉 엄살이란 뜻?). 또 한 가지는 밖에서는 여성주의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양 큰소리 치기는 쉬워도(이건 '날' 포함해서) 막상 가정에서 아내와 가사를 분담하고, 육아에도 신경쓰는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로 살기에 남자들의 삶 역시 생각 이상으로 퍽퍽한 것이 현실이란 뜻이기도 하다. 

시몬 보봐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남성중심적인 세상에는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여성이 존재할 뿐이며 여성이 인간적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건 남성이 되고 싶다는 뜻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지만 그 세상이 여성보다 조금 덜 심할 뿐이지 남성들에게도 인간으로서 견디기 가혹한 조건이란 점에선 매일반이다(물론 이것이 계급적 관점이란 것을 부인할 순 없다). 물론 여기엔 몇 가지 중요한 현실적 조건들이 빠져있기는 하지만(구태여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것도 남성으로서의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 드는 알리바이를 의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인식 자체가 특별히 못난 일부 남성들만의 인식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문제는 한 개인이나 가정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 바라보고, 사회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풀리지 않을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홍승우와 김규항을 대비시켜 보는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은 글로, 다른 한 사람은 만화로 보여주는 매체적 힘의 근원이 이들의 솔직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내가 파악하는 한 홍승우와 김규항의 공통된 장점은 솔직하다는 데 있다. 다만 나는 정직과 솔직이란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편인데, 정직이란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솔직이란 자신을 있는 대로 드러내지만 그 정도가 정직에 비해선 한 단계 낮은 것을 의미한다. 솔직하지만 정직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정직한 데 솔직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 내가 개인적으로 손꼽는 비빔툰 최고의 걸작 중 하나. 아내에게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며 이 작품을 보여주니 섭섭해 했다(예전부터 아내는 다시 태어나면 절대로 나 같은 남자랑 살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후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될 가장 진지한문 중 하나가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란 것이다.


때때로 김규항의 글들을 읽노라면 그가 늘 너무나 당연한(아마도 이것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상식의 정도와 내가 생각하는 상식이 부합하는 탓도 있지만) 이야기들을 하고 있고, 읽기에 따라서는 매우 원론적인 수준의 이야기들을 그가 일상에 접했다고 하는, 혹은 접했음 직한 이야기들과 잘 버무려 이야기하기 때문에 글의 힘이 발생한다고 할 텐데, 때때로 그 당연함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이 도리어 그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 지극한 당연논리조차 당연하게 발언하고 옮길 수 있는 인간(상징자본가)들이 태부족한 상황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한 가지 홍승우가 보이는 인간적인 솔직함과 김규항의 경우는 다소 차이가 있다. 


내가 읽은 홍승우의 솔직함은 자신의 약한 면모를 자기 내부
를 겨냥해 투사하는 방식의 말 걸기를 하고 있는 반면, 어찌보면 자학적인 개그를 구사함으로써 그것을 재미로 환치시키는데 반해 김규항의 경우에 드러나는 솔직함은 대체로 외부를 겨냥하고 있을 때가 많다. 아마도 그가 '계몽적'으로 비춰지는 이유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물론 두 사람의 위치와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홍승우의 작품 세계를 비쳐보는 한 방식으로 작품과 사실상 무관한 김규항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혹시 결례를 범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 홍승우의 <비빔툰>이 지닌 작품적인 한계는 결국 이것이 특정 부부와 가족의 생애사에 국한되고, 비슷한 평형대 아파트 주민들의 이야기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것인데, 그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때때로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주변의 인물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연을 확장하기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듯 싶다.


어쨌든 남녀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아니면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 척하기로 결심한 채 수십만년 동안 서로를 길들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실패하고 있는 기이한 동물들의 관계에서 오늘도 홍승우 가족은 여느 집들이 대개는 그런 것처럼 아이들에게 치이고, 부부에게 서로 실망하고 아옹다옹하면서 우리들에게 가족사를 노출시키고 있다. 남녀가 만나서 함께 사는 것을 부부라 하지만 부부는 과거의 관념으로는 가족이 아니라 그저 부부일 뿐이라고 한다. 부부가 가족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자녀가 생겨야 한다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오늘날의 관점에도 합당한 가족의 개념인지는 여전히 궁리해봐야 할 대목이다.


사실 '가족'이란 형태만큼 인류의 역사를 두고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인간관계도 없을 터인데 우리는 가족의 내밀한 생애사를 더듬어 본 작품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만화에서는 말이다. 홍승우의 만화 <비빔툰>이 지닌 가장 큰 매력 중 한 가지는 이처럼 남들에게 쉽사리 공개되지 않았고, 공개될 수 없었던 한 가족의 생애사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부부, 육아,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한 편으론 유쾌하지만 결코 간단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그의 작품 명대로 잘 비벼내고 있다는 것에 있다. 더불어
활미 씨 내외가 김광석의 어느 노부부의 그것처럼 백년해로하면서 우리들 앞에 한 가족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훌륭한 작품으로 남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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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무의 고양이방/ 달나무 지음 / 북키앙 / 2003년 11월



솔직히 말해서 요새 신경이 무척 날카롭다. 겨울이 지나갈 동안은 늘 이럴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건 나의 본능일까, 후천적으로 체득된 '드러분 승질머리'일까. 어쨌든 그런 탓인지 아내의 잔소리 탓인지 몰라도 일요일 아침 아내의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혼자 조용히 아침 밥상을 차려먹은 이 기특한 서방님에게 간만에 일찍 일어나 부엌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운 죄많은 '안해(아내)'님과 토닥거렸다. 그리고 두 내외는 오전, 오후 나절을 소식 두절하고 없는 듯이 지냈다. 물론 이 '연애대전'의 전말은 늦은 오후 무렵 부부가 함께 머리를 자르러 가면서(아내는 퍼머를 하고) 이렇다할 휴전 조인식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털갈이를 하고 돌아온 서방이라는 이 묘한 짐승은 아내의 가방에서 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는 책 한 권을 들어 두어 시간만에 죄다 읽어버렸다. 오매 재미난 거.... 어쩜 그리 책도 빨리 읽는가? 의문을 품지 마시라. 글자 수보다 등장하는 고양이 수가 조금 더 적을 뿐인 일러스트와 카툰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2003년 문화컨텐츠진흥원 우수기획만화 선정도서라는 다소 길다란 호칭을 담고 있기도 한  이 책 "달나무의 고양이방"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현재는 달나무의 만화홈( http://www.d-al.net )을 운영하고 있는 박수인(일명: 달나무) 씨의 실제 일상을 담은 책이다. 지은이 '달나무'와 길고양이 출신의 미유와 초코봉이란 이름의 '곤양(고양이)마마' 의 이야기이다. 그러고보니 고바야시 마코토의 "왓츠 마이클?(What's Michael?)"이 떠오른다. 글쎄, "달나무의 고양이방"도 일견 고바야시 마코토의 만화와 비슷하다. 때로 고양이가 의인화되어 등장하는 것이나 고양이의 생리에 대해 더할나위없이 자세한 관찰의 결과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 책 "달나무의 고양이방"은 고양이를 기르는 달나무의 육아일기이자, 고양이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에세이, 도시화된 인간과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고 있는 반려(애완)동물들에 대한 생태 보고서이다.

이 책은 거의 첫 부분을 '알면 재미있는 고양이 용어'로 시작한다. 그것은 그간 우리네 삶 속에서 너무나 흔하여 천대받는 고양이(혹은 반려)에 대한 새로운 자리매김을 위한 것이다. 일례로 작가는 '도둑고양이'라는 말 대신에 '길고양이'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프롤로그'를 통해 길고양이들의 생애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뒤이어 사적인 에세이 식으로 곤양마마 미유와의 첫 만남 - 본인의 말에 의하면 어미 고양이 품에서 납치해온 - 에 대해 서정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달나무는 고양이 하인', '고양이가 있는 풍경',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달나무의 고양이방"은 재미있지만, 그것은 단지 고양이를 기르는 한 애완동물 애호가의 수다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박기범의 동화 "어미개, 새끼개"가 추구하는 바와 일정하게 이어져 있다. 달나무는 귀엽고, 애교 넘치고, 애처로운 마음에 길고양이들을 '납치'해 기르지만 이들은 단지 애완동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반려의 지위까지 올라선다. 이 두 마리 고양이는 지은이에게 단순한 고양이가 아니라 친구이자,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가족이 된다.  

우리는 이 책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길가에서 흔히 발견하게 되는 길고양이와 다른 소중한 생명들에 대해 애정을 품게 된다. 우리는 그것들이 이 지구상에서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소중한 생명체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고양이는 반가우면 꼬리를 내리고, 멍멍이들은 반가우면 꼬리를 들어올린다고 했던가?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인간의 암수가 만나서 평생의 반려로 살아 간다지만 때로 우리들의 대화도 장벽을 만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때로 남편이란 짐생은 길고양이로 나서고 싶다. 아내인들 아니리오. 그러니 우리들은 서로를 열심히 애완하여 살지어다. 그러다보면 절로 반려짐승으로 길들여지지 않겠는가?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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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에 대한 단상
- 정송희의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을 빌어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2004년 5월

"인간에게는 어두운 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낙관론만을 어린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문화적인 관습이 되었다" - 브루노 베텔하임

1. 있잖아. 누가 그러는데
정송희의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이런 글을 쓸까말까 하는 생각에 내내 사로잡혔음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우선 작가는 나와 동년배다. 어설픈 세대 공감론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동년배라는 것은 불운한 시대라면 불운한대로 손쉽다면 손쉬운 대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이 공감이 단순한 공감의 차원을 넘어선다는데 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종종 남의 이야기하듯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류처럼 그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를 빌린 나의 이야기, 그의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있잖아. 누가 그러는데"로 시작하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였던 뼈아픈, 지극히 개인적이라 더 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로만 묻어둘 수 없는 사회적 이야기, 그것이 성(sex)의 이야기이다.

성폭력에 대한 글을 읽을 때마다….
특히, 어린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마다 그간 성(sex이던 gender의 문제이던)에 대해 내가 해왔던 이야기들 - 가령 성에 대해 좀 더 밝은 자리에서 논의하고, 순결이나 혹은 기타 성과 관련한 우리의 인식들을 좀 더 가볍게 생각하도록 하자던 - 이 순식간에 백짓장처럼 탈색되는 느낌을 받는다. 고백컨대 이렇게 말하는 내 안에도 꽁꽁 감춰둔, 결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불행한 과거의 체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체험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다. 그런 체험이 있다는 사실(fact)만을 인정하는 것도 이토록 힘이 드는데, 그 구체적인 기억들을 되살려 글이나 말로 옮길 수 있을까.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어서, 말할 수 없기에 더욱 힘이 들며, 말한다고 해서 이해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없기에 더욱 말할 수 없어진다. 소통이 단절되므로 치유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자던 나의 주장들은 모순이다. 그래서 어쩌면 평생 내 안에 멍울처럼 남을 상처들은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물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까닭은 내 나름대로 치유해보려는 안간힘일지도 모른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라고 불리던 사내가 있다. 그 인물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모르더라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는 누구나 어린 시절 한두 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는 매우 젊은 나이에 모터사이클을 타다 사고로 요절했는데, 내 생각엔 그가 그렇게 요절하지 않았더라도 결코 평탄한 삶을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아랍의 독립을 위해 싸웠으나 결과적으로는 대영제국에 의해 이용만 당했던 전설적인 게릴라였던 로렌스. 사생아로 태어나 언제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던 그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상처는 게릴라 투쟁 중 투르크군에게 붙잡혀 당해야 했던 강간이었다. 성폭력이 다른 모든 폭력에 비해 더욱 가슴 아픈 까닭은 그 대상이 되었던 존재에게 남기는 깊은 상흔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로렌스가 살았어도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2. 내 안에 너 있기에... 진실로 미안하다
정송희의 때늦은 첫 작품집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모두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 「가로막힘(blocked)」, 2막 「이야기하기(telling)」, 3막 「봄(seeing)」이 그것이다. 1막 가운데 첫 번째 단편이자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한 젊은 연인의 사랑과 접촉을 차단하게 만드는 과거의 경험에 대한 반추로 시작한다. 이제 막 몽우리지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들의 젖가슴을 더듬는 담임을 아무도, 그야말로 아무도 가로막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으나 어머니도 촌지를 가져다 건넬 뿐이었다. 내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을까. 믿음을, 구원의 순간을 외면당한 어린이에게 세상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것이 되며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존재들은 공모자가 된다.

그 순간 남자가 와락 껴안으며 말한다. "미안해." "왜 자기가 미안해? 자기가 남자 대표야?"라고 여자는 말하고, 이번엔 남자의 회상이 시작된다. 고3 무렵 놀러온 옆집 여자 아이의 여린 성기를 만지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나는 ‘단지 만지기만 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가을이 오고, 남자 네는 이사하게 되고 그는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다. 그때도 그는 끝내 어린 소녀에게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남기지 못했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여자 친구에게도 그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리고 늦게라도 그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라고 교과서에서라면 그렇게 충고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근현대 들어 국가나 국가기구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 '진실과화해위원회' 형태의 기구를 만들어 과거사 진상규명을 시도한 나라들은 대략 30여 개국 미만으로 알고 있다. 물론, 학살의 경험이 있는 나라들에 비하자면 이 숫자도 적은 것은 아니고, 진상규명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측면에선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 가운데 정식 보고서를 채택할 수 있었던 나라는 다시 그 절반 정도로 떨어진다. 단지 진실을 고백할 뿐 그것만으로 더 이상 처벌은 없을 것을 다짐하지만 실제로 묻힌 진실과 진실이 서로 화해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 숫자는 잘 보여준다. 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하도록 반대 세력들은 집요한 공작을 가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므로, 앞서 고백한 자는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물적, 정신적 린치를 당하기 마련이다. 침묵의 공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가해자들의 공모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여성을 상대로 한 남성 사회의 불문율이다.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 이 사내에게 돌을 던져라!" 어쩌면 성적으로 전복된 여성 예수가 출현한다면 선량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숱한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가련한(?) 한 명의 성폭력 사내에게 그리 말할 지도 모르겠다.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의 사내는 그 여자 친구에게는 상대의 고통을 이해한, 꽤 괜찮은 사내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짐승 같은 사내로 기억될 수도 있다. 정송희의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이 내 마음을 이리도 무겁게 내리누르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내 안에 너 있기에... 진실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말이다.


3.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적 구분
위의 작품들이 지닌 문제의식에 무거움에 비해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 혹은 이야기 구조는 다소 수동적이고, 식물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 묘한 느낌들을 받게 되는 이유는 작가 자신이 이야기를 결말짓는 형태로 이야기의 막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이 작품들의 느낌과 리얼리티를 살리기도 한다. 그것이 미학적으로는 아쉽지 않은 데도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기에 오래도록 곱씹게 만든다. 1막과 3막의 이야기들이 무겁다면, 2막 이야기하기에 수록된 일련의 짤막한 콩트들은 작가가 생각하는 "신체적 접촉"에 대한 일종의 해법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경쾌한 수다의 성격을 띤다.

「유년의 틈」의 첫 대목은 아이가 길에서 그만 쉬야를 한 대목에서 시작한다. 두 명의 여성이 창 밖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며 과거로 틈입해 들어간다. "애엄마한테 빨래감이 또 생겼네"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다른 한 친구가 말한다. "얘가 더 창피하지." 전학와 서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은 과거 오줌을 지린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로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가 풀리고,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2막에 실린 두 번째 단편인 「풍선」의 구조 역시 「유년의 틈」과 흡사한데, 한 남자가 어린 시절 아버지 옷장에서 콘돔을 풍선인 줄 알고 불려다가 어머니에게 호된 꾸지람을 경험한다. 그때 고모는 긍정적으로 아이에게 콘돔이라고 알려주고, 아이가 불어달라고 하자 불어주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이를 야단칠 뿐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이제 그 아이가 성장해 공중화장실에서 콘돔을 사려다가 어린이가 들어오자 놀라서 그만 자판기에서 나온 콘돔을 자기 것이 아닌 양 모르는 척 빠져 나온다. 그런데 아이는 친절하게도 콘돔을 주워 아저씨에게 전해주려고 밖까지 쫓아 나온다. 아이 덕분에 남자는 창피해 한다. 그 이외에도 작품 「인절미」에서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여성에 대해 과감하게 "맛있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누드모델」에서는 살찐 외모를 긍정하는 것이 뭐 어때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 작품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어린 시절 일찍 생리를 시작한 소녀가 성장하여 어른이 된 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팬티 빠는 아침」에서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당당하고, 건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긍정이 지닌 힘에 대해 작가는 섣부른 낙관도, 비관도 하지 말자고 하는 듯 보인다. 물론 성과 관련한 이야기들은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간단하지 않으며 간단하지 않은 만큼 소박하게 긍정하라고 말하는 것은 손쉬운 결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무거움과 진지함 혹은 신성한 차원으로까지 숭상하려는 바로 그 태도,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적 구분 때문에 우리들에게 성은 언제나 짙은 어둠 속에 가려진 채 더욱 힘든 해법을 강요받고 있는지 모른다. 좀 더 쉽고, 가볍게 긍정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성은 다른 얼굴로 다가오지 않을까.



4. 우리 사회는 아직도 위험하다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이나 제법 긴 3부작 「그땐 그게 뭔지 몰랐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한 여대생이 동아리 친구들이랑 MT를 갔다가 술에 취했고, 딱히 강간이라 말하기에도, 아니라고 말하기에도 어색한 정도의 섹스, 아니면 그땐 사랑했으나 하고나서 보니 사랑하지 않았더라는 식의 사랑을 볼모로 한 아름답거나 그렇지 않은 섹스, 그렇다고 명확한 강간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니, 혹여 그 점에 대해 오해는 말길 바란다. 어찌 되었든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봤고, 남의 이야기하듯 했으나 실제 피해자였거나 가해자였으며 혹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던, 어쩌면 그조차도 초월한 경험으로 승화시켜버린 이야기들이다. 그만큼 흔하게 들었고, 체험했던 이야기들이라 도리어 진부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이런 류의 이야기는 TV단막극들을 통해 접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문명개화된 것이란 뜻인가? 모두가 남의 이야기하듯 하여 도리어 배제시켜 버린 우리들의 체험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가해진 위해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의 정신과 신체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분리해내고 싶어 한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의 정신과 신체를 대상화한다. 즉, 자신의 영혼이 정신이나 몸에 깃든 것이 아닌 그와 분리된, 부유하는 영혼으로 느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와 다른 나, 나 아닌 나를 만듦으로써 짓밟힌 정신과 몸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싶어 하고, 외면하고, 그를 통해 망각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오로지 인간만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육체와 별개로 이원화시켜 사고한다. 즉, 자신의 육체와 자신의 영혼, 정신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라는 그릇에 정신과 영혼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더욱 슬픈 것은 어려서부터 이런 체험들을 내면화한 인간은 종종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타인에게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하찮음을 보상받고자 하거나 스스로에게 징벌을 가하고자 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이다. 스콧 터로는 사형제도에 대한 그의 책 『극단의 형벌』에서 "나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남을 해침으로써 자신을 확인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며,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성폭력이든, 언어폭력이든, 혹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의 본질은 구체적으로 한 인간의 존재를 파괴하고, 지배하려는 욕망과 감정의 소산, 즉 본질적으로는 권력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권력이란 권력욕이기보다는 권력감정이다. 막스 베버는 권력감정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의식,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신경의 줄 하나를 손에 쥐고 있다는 감정"이라고 정의하면서, 형식상으로는 보잘것없는 지위에 있는 경우에도 일상생활을 초극(超克)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권력감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것은 욕망이자 동시에 감정의 산물이기에 거창한 의지나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종 일상에서 행사되는 무수한 권력들의 다양한 발산을 보게 된다. 성폭력 역시 그 중 하나이며 종종 이와 같은 폭력은 가부장적인 가족의 위계 속에서, 권위적인 교실에서, 군대에서 그 이외에 그와 같은 권력감정을 별스럽지 않은 것으로 내면화한 무수한 과정들 속에서 체험하고, 체현한다.



우리들 하나하나를 거대한 위계 속에서 계층서열화하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출구를 찾지 못한 생쥐처럼 아버지가 어머니를, 어머니가 자식들을 물어 죽이는 끔찍한 경험을 반복하고 결국 희생 제물을 찾아 불태운 뒤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어디선가, 굳게 닫힌 방, 지하의 퀴퀴한 냄새 속에서, 커튼이 내려진 교실에서 아이들은 또 다시 상처받고 죽임 당한다. 그리고 그 상처는 끊임없이 반복되며 재생산된다. 이와 같은 사회조건 속에서 어떤 것이 구원될 수 없는데,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겉으로는 박애의 정신, 합리적인 듯 보여도 실제로는 합리성에 반하는 것이며,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진실은 도처에 있다. 그 원인은 제거하지 않은 채 전자팔찌를 채우고, 얼굴을 알리고, 문패를 세우는 것만으로 안심하며 되돌아서기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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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작가 정송희 첫 데뷔(1999년) 이래 작품 발표 연도들을 보니 대개는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에 집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첫 작품집이 2004년에야 나온 것으로 보아 그동안 작품 활동을 거의 안한듯하여 최근 작품의 경향이나 그림체의 변화를 짐작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에 접한 소식에 따르면 장편작품집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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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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