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의 영웅들 :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7인 열전 - 대한축구협회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2005)


오늘날 많은 이들이 축구를 염려한다. 근대성(modernity)을 성찰하는 이들은 축구가 근대의 산물이라며,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을 염려한다. 또 반자본주의 활동가들 중에는 연원이 제법 오래된 3S(Sex, Screen, Sports)정책이나 최근 신경제의 새로운 조직이론, ‘연방주의(federalism)'의 최첨단이자 모태로서 FIFA라는 - 스포츠정신이나 도덕과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 조직을 연구한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최근 대한민국 사회에서 축구는 주목할 만한 문화적 현상이다.


축구는
정말 근대의 산물이었을까? 이 문제에 답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서구에서 축구는 중세 이래 여러 지역에서 카니발 같은 행사의 여흥을 돋우는, 혹은 제의적 행사로 치러졌다. 우리나라 역시 지금의 축구와는 다른 것이었겠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 삼국 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蹴鞠)’이란 놀이 형태의 공차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쩌면 축구란 융의 원형상징처럼 세계의 모든 민족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에서 근대축구의 시작은 인천(제물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882년 6월 인천항에 정박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Flying Fish)호의 승무원들이 제물포에서 축구하는 것을 아이들이 구경하면서 한국에 근대 축구가 전파되었다. 인천은 한국 축구 월드컵 첫16강의 산실이자 동시에 한국 축구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또 역사적으로 보자면 한국의 근대 축구는 아르헨티나보다는 늦었지만 브라질이나 러시아보다는 좀더 이른 시기에 축구를 접했다. 다소 우스운 말이지만 아르헨티나, 브라질, 러시아 보다 한국이 축구의 역사에 있어서는 선배 격인 셈이다.


대한축구협회
가 엮은 『한국축구의 영웅들』은 그런 한국 축구의 역사 속에서 빛나는 7명을 선정해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펴낸 책이다.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축구 역사를 되돌아 볼 자신감과 여유를 얻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1982년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 1988년 올림픽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은 대한민국이 치른 국제행사들 가운데 가장 주목해서 살펴볼 만한 것들이다. 광주민중항쟁을 처참하게 진압한 군사정권이 그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세계의 미인들을 데려다 치른 행사, 정권 차원에서 준비하고, 민주화항쟁의 뜨거운 열기가 가시기 전에 치러진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은 여러 차원에서 다른 행사였다.


국민이라 부르든
, 민중이라 부르든 혹은 대중이라 부르든 그 주체의 설정 문제와 상관없이 우리들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자들이 절박한 욕구나 시대적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야말로 난장(亂場)을 치른 것은 고려시대 팔관회(八關會)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즐긴 이래 최초의 일이 아닐까 싶다. 1902년 배재학당에 최초로 근대적 축구부를 만든 것을 기점으로 삼더라도,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은 한국 축구 100년사를 기념하는 의미 있는 축제이기도 했다.


『한국축구의 영웅들』
은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 축구 100년사를 정리하는 의미 있는 작업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한국 축구 영웅 7인의 이야기를 열전 형태로 기록하고 있다. 우선 가장 첫 번째로 손꼽히는 인물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본선에서 일본대표팀의 유일한 한국 선수로 나섰던 故 김용식 옹이다. 그는 지난 2004년 5월에 FIFA로부터 FIFA 100년 기념 공로상(FIFA Centenial Order Of Merit)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종교는 축구라고 자부했다. 김용식은 젊었을 때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첫째 술이나 담배에 일절 손대지 말고, 둘째 여자를 멀리하고, 셋째 마흔 살이 될 때까지 현역으로 뛸 것이며, 넷째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할 것을 스스로에게 서약했다. 물론 그는 이 모든 서약을 철저하게 지켰고, 마흔 세 살 까지 현역 선수 생활을 했다.


『한국축구의 영웅들』
은 인물을 중심으로 한 열전의 형태이지만 동시에 당시 시대상을 함께 엿볼 수 있게 꾸며져 있다. 예를 들어 김용식 편에서 우리는 당시 중등부 팀이었던 경신이 극동경기대회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고 돌아가던 길에 조선에 들른 와세다 대학 축구팀에게 4:3으로 승리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승승장구하던 김용식이 광주 학생운동에 연루되어 결국 퇴학당하고 말았던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런 그가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국가대표팀의 유일한 조선인 선수로 참가해야만 했던 심정은 어땠을까.


한국 축구의 역사
속에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책에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스웨덴전에 0:12로 패패, 1954년 스위스 월드컵 헝가리전에서 0:9로 패하면서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한국 축구의 유년기를 지켜낸 골키퍼 홍덕영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또 조금만 더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 계보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회택과 경제개발 시대 국민적 기대와 열망을 안고, 해외로 송출된 차범근, 축구계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이었던 국제심판 김화집 등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는
벽안의 외국인 거스 히딩크도 있다. 벽안의 이방인 히딩크가 한국 축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불과 1년 6개월이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같은 네덜란드인이었던 하멜이나 박연이 남겼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그리고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를 인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이야기도 있다. 물론 공과를 따지기에 앞서 정몽준의 공적은 인정받을 만하지만 자신이 재임하는 중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그 선정과정이 아무리 엄정했다 하더라도 좋은 선례라고 보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근대 축구의
종가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 축구는 근대산업문명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민중(folk)적 놀이문화의 전통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여가의 상업화’, 자본주의적 레저 활동과는 일정하게 구분되는 면모를 지닌다. 아마도 그와 같은 노동자 문화의 전통이 오늘날 영국 사회의 뿌리 깊은 축구 사랑의 원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현대라 부르는 시대, (근대)문화의 대부분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100%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일본에 의해, 혹은 일본과 겨루는 과정에서 - 물론, 그것이 시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당연한 만큼 - 강력하게 축적된 것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또한 축구다. 많은 이들이 한국축구에서 국가주의의 증거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런 증거로 제시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국가대표축구의 인기와 비례하지 않는 프로축구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전적으로 국가주의의 결과물로만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한국에서의 축구문화는 지역(성)이 과소하고, 중앙이 과대화된 현실의 반영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앙의 문화흡인력에 저항할 수 있는 지역(이웃)문화의 부재가 축구에서 나타나 자신의 귀속대상을 찾지 못한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한 사회의 행복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통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가 필요하며(체제나 시대가 바뀌어도) 그것이 축구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축구에 열광하는 이들을 우민(愚民)시 해야 할 만큼 우리 사회의 대중이 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데 희망을 걸어보면 안될까. 우리가 국민이라는 단일한 호명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마도 축구와 축구를 즐기는 민중들은 자본주의 시대보다 힘이 세고 더 오래 갈 테니 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 이사야 벌린 |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


이 말은 칼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했던 좌우명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이를 다시 재정립했던 사상가 칼 마르크스. 이와 같은 인물에 대해 일대기도 아니고, 평전을 쓴다는 일을 그것도 불과 28세의 나이로 해냈다면, 더군다나 그 책이 60여년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전의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자 피할 수 없는 난제는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자용으로 읽기에는 다소 녹록치 않은 난이도를 지녔다는 점이다.

 

같은 해(2001)에 출간된 프랜시스 원의 『마르크스 평전(푸른숲)』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물론 누군가 내게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 내지 그의 평전을 추천해달라면 나는 별 고민 없이 우선적으로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이 책과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마르크스의 사상(북막스, 2000)』 - 이 책은 책갈피 출판사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과 동일한 책이다 - 을 추천하겠다. 물론 캘리니코스의 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마르크스의 생애는 부분적으로 다루는 대신 그의 사상을 개관하는데 치중하는 편이고, 프랜시스 원의 경우엔 마르크스의 생애사에 집중한 편이므로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명확한 구분 없이 혼용되는 편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평전은 연대기와 전기와 명확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평전과 전기, 혹은 연대기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은 평전은 그 용어 자체가 잘 설명해주듯 작가의 비평(批評)적 관점이 삽입된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당대의 뛰어난 평전 작가들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비평가이자 역사가이고 저술가였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평전을 저술했던 아이작 도이처, 마리 앙트와네트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뛰어난 글을 남겼던(그 외에도 많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바쿠닌에 대한 평전을 저술했던 E.H. 카 등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문장가이자 사상가, 역사가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평전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시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위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음으로써 위대한 두 사상가의 대화에 관찰자이자, 적극적인 독해자로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사상사가(思想史家)라는 저자 이사야 벌린의 위치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를 견주고, 궁리해가며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쪽이 훨씬 더 유익하고 재미있는 독서 체험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이라는 평가가 지탄받을 무엇이 아니듯, 정당한 까닭으로 보다 ’지적인' 수준을 요구하는 독서가 지탄받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칼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위한 투쟁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부르주아적 취향을 지녔다고 공격당하는 것과 흡사해 보이는데, 어떤 의미에서건 마르크스는 당대의 교양을 두루 습득한 인물이었던 것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을 당대의 속물적 과시에 연연해하는(이는 또한 마르크스가 평생을 두고 혐오했던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적 취향과 혼돈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교양을 부르주아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냉소적인(좌파 혹은 노동자는 우아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거나 교양을 경시한다는) 착시 현상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 책이 좀 더 대중적인 난이도를 지니지 못한 점, 좀 더 풍성한 내용으로 꾸며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벌린을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이 평전은 그가 28세 때 집필한 것이고, 애초에 그가 집필했던 원고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원고의 분량 보다 많았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평전보다 쉬운 글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앨런 라이언은 이사야 벌린의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 “영어권에서는 이런 종류의 주제에 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위와 같은 고백을 논외로 하더라도 마르크스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그가 사망했을 무렵, 영어권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러시아혁명을 통해 수립된 이른바 공식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바라보는 마르크스, 세계대전과 헝가리 사태를 겪으며 재발견되기 시작한 인간적(청년) 마르크스, 다시 루이 알튀세르에 의한 구조적 마르크스에 이르는 여러 연구 방향과 해석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의 마르크스가 출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과 관점의 차이,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의 평전이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분명 마르크스의 사상 그 자체에서 발견되어야 하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이사야 벌린의 뛰어난 지적 통찰과 한 인물의 사상과 지적인 흐름을 더 이상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계몽주의 산물이자 계몽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동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제1장 서론에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던 마르크스의 모토에 지극히 합당한 인물평을 적고 있다.

 

마르크스는 선천적으로 강하고 능동적이며 실제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불의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으며 쉽게 상처를 받거나 감상에 빠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우둔함은 물론 지식인들의 자기만족적인 미사여구와 주정주의도 혐오했다. 그는 부르주아지를 위선적인 데다가 자기 기만적이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는 데 골몰해서 당대의 특징적인 사회적 현실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평가했고, 지식인은 현실과 동떨어진데다가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같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데 불과한 잡담이나 일삼는 사람들로 판단했다. <본문 20-21쪽>

 

이사야 벌린의 문장을 읽노라면 그 자신이 마르크스 못지않게 불친절한 사람이면서, 그가 마르크스에 대해 묘사하고 있듯 천재적인 발상에 비해 더딘 문장에 대해 조급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혼란과 궁극적 붕괴를 향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사회는 반동적이다. 물론 어떤 사회 체제라도 붕괴에 직면하면 구성원들에게 비합리적으로 현체제의 궁극적 안정에 대한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는 징후들을 스스로 감추려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체제라도 일단 역사의 판결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구원될 수 없는 데도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류는 바로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을 거쳐,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에 의해 자신의 힘을 완전히 실현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본문 32-33쪽>

 

위의 문장을 읽으며 이사야 벌린이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크스 못지않게 신랄하고, 핵심으로 곧장 진입해가는(물론 두 사람 모두 불친절하다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문장을 지녔다. 그렇기에 그는 마르크스의 학설에 대해 "(마르크스의)학설은 적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기지의 무기에 대처할 수단을 갖추고 있어서 직접적인 공격으로는 함락할 수 없는 일종의 거대한 구조물"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사야 벌린이 쓴 글 가운데 우리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우화를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을 고슴도치와 여우로 비교한 글이다. 그는 「고슴도치와 여우」란 에세이에서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여우는 영리하고, 교활한 짐승이기에 고슴도치를 기습할 많은 전략들을 무수히 짜낸다. 그리고 고슴도치를 습격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단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방패삼아 숲 속 한적한 오솔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이다. 기회를 틈타 여우는 잽싸게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러나 위험을 느낀 고슴도치는 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송곳 같은 가시를 곤두세운다. 여우는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를 어찌하지 못해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나 어떻게 하면 고슴도치를 공략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전략 세우기에 골몰한다. 여우와 고슴도치의 지혜를 따질 때, 우리는 당연히 여우의 지혜가 뛰어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번번이 싸움에서 이기는 건 고슴도치다.

 

이사야 벌린은 이 우화를 통해 사람들을 두 가지 그룹, 여우와 고슴도치로 나누었는데,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그 복잡한 면면들을 두루 살피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해내기 보다는 모순도 한데 아우르는 편이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상으로 종합해내고 통합해낸다. 그에 따르면 이 고슴도치들이 바로 프로이트(무의식), 다윈(자연도태), 마크르스(계급투쟁) 등이다. 그렇다고 이사야 벌린이 절대적으로 고슴도치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벌린이 여우에 속하는 인물로 거론하는 이(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괴테, 발자크 등)들의 면면이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특히나 어떤 인물에 대한 평전을 읽을 때 다뤄지는 인물 못지않게 그를 다루고 있는 인물(저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사야 벌린은 유대계로 구소련 영토였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리가에 진군하자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 그곳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경험하고, 11세 무렵 영국으로 망명한다. 유대인에겐 특히나 격동의 시대였을 20세기 초엽의 유럽, 라트비아라는 슬라브 문화의 영향 아래 놓인 지역 출신의 인물이 냉전 시대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것, 물론 당시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과 미국인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당시 유대계 출신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성향(탈민족주의적 세계주의)을 그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쟁 기간 중 영국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모스크바에서 수개월간 머물며 당대의 소련 지식인들과 교유했고(그 가운데 안나 아흐마또바와는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전후에는 사상사 연구에 집중하면서 그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 자신의 삶의 역정이 한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고 있는 이사야 벌린,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라거나 정치적 좌파로 구분될 수 없음에도 (만약 그런 분류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를 우리 사회에 산재해있는 속류 우파들과 다른 진정한 의미의 ‘리버테리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칼 마르크스에 대한 균형감각과 사상사적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마르크스와의 격조 있는 지적 대화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 이사야 벌린의 이 책은 1982년 신복룡 선생의 번역으로 평민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다만 이 책을 선택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첫째는 이 책이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탈자가 종종 눈에 띄고, 요사이 유행하는 작은 판형(이 책은 110X190)이다 보니 펼쳐놓고 밑줄 쳐가며 읽는 습관이 있거나, 좀 오랫동안 생각하며 읽기에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일부러 오탈자에 신경 쓰며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왕 눈에 띈 오탈자가 몇 개 있어 이야기해보면  57쪽 "유대인 출신인 시인하이네"에서 시인과 하이네는 띄어 써야 하고, 276쪽의 "마르스크"는 "마르크스"로, 451쪽의 사진 캡션에 들어간 "리프크네이트"는 "리프크네히트"의 오기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 김태희 옮김 | 교양인(2006)

 

예전에 나는 내 개인 홈페이지(http://windshoes.new21.org/person-goebbels.htm)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 파울 요제프 괴벨스, 닥터 괴벨스에 대한 제법 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물론 이 책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이 다루고 있듯 1,000여 쪽에 육박하는 분량은 아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나는 하나의 뿌리를 가진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전쟁이 1648년, 30년간 지속된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에 의거하여 생겨난 유럽의 근대민족국가체제의 종말이자 혹은 지속적인 파국의 시원(始源)이 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중사회의 도래 이후 대중과 정치, 대중과 권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괴벨스를 다루게 되고, 그에 대해 글까지 썼던 이유 역시 그와 같다.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이제 정치가들은 좌우를 막론한 누구든 대중선거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기존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대중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동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시대의 대세라고 파악하고 있는 동안, 파시스트들은 대중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깨우치고, 이들을 동원하는 프로파간다 능력을 이용해, 그들이 선전선동에 있어 모범으로 삼았던 좌파를 능가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독일 제3제국을 건설한 나치 세력 가운데 이 방면에 있어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이가 바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디. 우리가 지난 독재정권 아래에서 했던 여러 정치적 경험들 역시 독일의 민중들이 겪었던 선동의 경험과 유사한 측면들이 있었다.

 

나치 독일과 제5공화국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경로를 겪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5공화국이 전형적인 파시즘 국가였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히틀러의 뮌헨 폭동이 실패로 끝났으나 이후 합법적 정권 장악의 초석이 되었고, 12.12 쿠데타는  성공했으나 박정희 식으로 곧바로 집권 태세에 돌입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합법적인 모양새를 갖추는 절차는 거쳤다. 이후 나치가 독일 제국의회 건물 방화사건을 빌미로 독일 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5공 역시 5.17 확대계엄조치를 통해 5.18 광주 민중항쟁을 유도하고, 이 과정을 통해 공세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악명을 떨친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조처 등도 매우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라디오 대량 보급과 컬러 TV보급, 프로 축구, 야구, 나치의 분서와 5공의 금서, 국민차 "폴크스바겐""티코", 베를린 올림픽과 서울올림픽, 유대인 탄압과 지역감정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독일 나치 정권의 정책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 혹은 대중 선동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유럽 전역에서 출몰하고 있는 네오 나치즘과 파시즘적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 오랫동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내면화하도록 강요받아온 우리 사회의 근저를 흐르는 기류가 그만큼 심상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리 사회가 국가주의화 되어가고 있다거나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파시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내 개인적인 인식으로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 역시 앞서의 염려만큼이나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서양의 역사적 경험들을 단선적으로 우리에게 대입시켜 해법을 강구해볼 수 없을 만큼, 급속하고 변화무쌍하게 일어나고(어제까지는 산아제한을 관장하던 단체가 오늘은 출산을 독려하는 것처럼) 있으므로 모순 자체를 살피는 시각 자체도 복잡하고,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그리고 이들 부부의 자녀들인 헬가, 힐데가르르, 헬무트의 모습(1937)이다. 마그다는 괴벨스 못지 않은 히틀러 추종자로 자녀들 이름을 모두 히틀러의 'H'를 따서 지었고, 히틀러와 제3제국의 멸망이 눈앞에 닥치자 히틀러 없는 세상에서 살 필요가 없다며 자녀들 모두에게 청산가리를 먹인 뒤 괴벨스와 함께 자살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제목 역시 원제인 "괴벨스"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으로 이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읽어내는데는 그다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분량에 미리부터 진력을 내지만 않는다면 퇴근 후 두어 시간씩 넉넉잡고, 사오일이면 한 차례 정도는 무리없이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는데 무려 2주 가량이 걸렸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주제에 대한 나의 넘치는 흥미와 지적 욕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인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의 글이 매끄러운 문장과 번역에 비해 재미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책이 나오고 한 달쯤 뒤였던가? 우연히 퇴근하는 길에 이 책의 옮긴이인 김태희 선생이 CBS(?)던가 모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말씀도 논리정연하게 잘 하고, 번역 솜씨 역시(독일어는 모르지만 우리말은) 빼어난 편이라 생각이 들었다. 대개 책이 재미있으려면 소박하게는 우선 주제가 관심있는 분야여야 하고, 문장이 좋아야 한다. 물론 장정이나 기타 등등이 좋으면 더욱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삼박자를 두루 갖추고 있어 높은 점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다만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것은 오로지 저자의 문제이지 옮긴이나 출판사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어렵지 않게 다른 평전 작가들, 예를 들면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이를 연상할 수도 있고, 파시즘과 관련해서는 로버트 O. 팩스턴, 빌헬름 라이히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사실 우리가 쉽게 입에 올리긴 하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아이작 도이처, 이사야 벌린, 요아힘 C. 페스트가 저술한 평전들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면,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를 이들에게 비유하는 것은 크나큰 결례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들과 로이트의 가장 큰 차이는 "통찰"에서 비롯된다. 사실 한 인물이 시대와 역사에 남긴 발자취를 추적해 그에 대한 평전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앞서 말한 이들이 이뤄냈던 작업들 역시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평전이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한 명의 뛰어난 작가이자 역사가로서의 안목과 통찰을 통해 인물을 심도있게 파고 들어가는 성과를 남겼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매우 지루하고, 험난한 과정이기 때문에 평전 작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우선 성실성일 것이다. 그 점에서 로이트는 일단 합격점이다. 괴벨스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달리 생전에 일기를 남겼고, 이 일기는 나치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괴벨스에 대해서는 제법 풍성한 자료들이 있으나, 문제는 로이트가 새롭게 입수한 자료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는 그 부분에서 로이트가 지나치게 자료적인 충실함, 작가이기보다는 역사가적인 입장을 관철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자료가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서술에 있어 임팩트한 순간이 모자라고, 그의 새로운 해석을 기대한 독자의 입장에서 괴벨스에 대한, 그가 살아온 행적, 그가 역사 속에 남겼던 여러 궤적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 쉽지 않다. 앞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괴벨스는 이전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정치인들과 달리 대중을 상대로 정치 선동을 행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의 행적을 고려했을 때 괴벨스 평전에서 대중과 괴벨스의 상관 관계, 실제 대중의 반응 등 의미있고 생생한 일화들도 충분히 삽입되었을 법한데(전체 페이지 분량를 보자면 더욱더) 그런 내용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앞서의 문제에 대해 로이트는 괴벨스 평전을 아래의 관점(소위 '野史'라고도 하는)보다는 정사의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 부족하다는 나의 느낌은 남는다. 분량은 넘치지만 괴벨스의 그런 행적들이 당시 독일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다시 인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로이트는 잘 드러내질 못하고 있다. 다소 역부족이란 인상이 든다는 것이고,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날 괴롭혔다. 다소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책 속의 사진에 달린 설명(캡션)이 작가의 본 문장보다 도리어 의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끝으로 정리하자면,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에서 나는 "괴벨스"는 필요충분으로 읽을 수 있었지만, "대중선동의 심리학" 영역에 대해서는 다소간 아쉬움을 느꼈고, 그 원인을 작가가 자료들을 적절하게 요리해내는 능력, 통찰력 부족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사악하였으므로 그 유능함이 더욱 돋보이는 괴벨스에 대한 책이 우리 말로 이렇듯 훌륭하게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이 흐뭇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Slightly Out of Focus) - 로버트 카파 | 우태정 옮김 | 필맥(2006)


카파의 사진은 그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진다. 사진기는 단순히 그것을 완성시키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카파는 대상을 두고 어떻게 보고, 어떻게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전쟁 그 자체를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격정의 끝없는 확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밖에 있는 것을 찍어 그 격정을 표현한다. 그는 한 아이의 얼굴 속에서 그 민중 전체의 공포를 나타낸다.  - 존 스타인벡

 

포토저널리즘의 짧았던 전성기를 열고 닫은 최초의 영웅이자 사실상 마지막 영웅이었던 로버트 카파. 그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친구 집에서 우연히 라이프 세계사와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사를 본 것이 나로 하여금 로버트 카파의 세계, 포토저널리즘이란 것을 처음으로 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후로 오랫동안 특파원을 꿈꾼 적이 있었다. 이 책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원제는 Sightly Out of Focus, 1947)"는 오랫동안 보도사진계에서 활동해온 민영식 선생의 번역이다. 카파에 대한 책, 혹은 사진가에 대한 책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에 나온 책이므로 이 책의 군데군데 보이는 번역상의 문제나 오탈자를 시비삼지는 말자. 그런 것쯤 크게 거슬리지도 않을 뿐더러 워낙에 재미있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로버트 카파이고, 내 홈페이지(http://windshoes.new21.org)에서 로버트 카파를 다루는 별도의 글을 쓴 적이 있으므로 그의 생애나 작품 세계를 다루는 내용에 대해서는 거두절미토록하겠다. 이 책은 로버트 카파 자신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그는 헝가리 출신의 유태계 사회주의자였다. 이 말을 요새 우리 식으로 바꿔보면 '비정규직외국인여성이주불법노동자'쯤 되는 거다) 프랑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서 생활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서 미국이 참전하게 되고 그가 보도사진가로, 전선기자로 활동하게 되는 1942년 여름의 어느 아침으로부터 출발해서 유럽 전선에서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이야기를 스스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일종의 전선취재록인 셈이다. 첫장의 제목이 '운명의 아침 - 1942년 여름'으로 시작해 마지막 장은 '이제 아침이 되어도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다.'로 끝난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긴 했지만 시계조차 없어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나에게는 시간 같은 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돈이래야 고작 25센트 동전 한 닢뿐. 전화벨이라도 울려 누군가가 점심에 불러주던가, 일거리 얘기라도 하던가, 더우기는 돈을 꾸어주겠다는 얘기 같은 게 없는 한 침대를 떠날 이유는 없었다.

 

따분하고 지겨운 가난한 망명자 신분이었던 로버트 카파 앞으로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커리어즈>지의 전선보도사진기자로 채용한다는 내용이었고, 긴급히 특파원으로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거금 1,500불을 동봉했으니 카파로서는 고민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트 카파는 당시로서는 적성국인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의 국민이었으므로 당연히 취업을 할 수가 없었고,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갈 수도 없었다. 그는 극적인 행운을 거머쥐고도 오도가도 못할 형편이었다. 다행히도 그를 도와준 사람들 덕분에 영국행 여객선을 잡아 탈 수 있었고,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전쟁의 면면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늘 그렇지만 실화는 픽션을 능가하는 재미와 감동을 주는 법이다.

 

이 책에 다루지 않는 내용인, 1942년 이전의 로버트 카파의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dmann)으로 1913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온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사진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아이젠슈타트의 암실에서 조수로 일하며 사진을 배웠고, 히틀러가 등장하자 독일을 떠나 스페인 시민전쟁에 인민전선 의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사랑 겔다 타로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란 사진으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후퇴해온 아군 전차에 애인 겔다 타로가 깔려 숨지는 사건을 겪은 뒤 평생 동안 결혼하지 않았다(물론 연애는 많이 했지만).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 이 사진은 마침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1936년 「라이프Life」지에 게재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후세에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로댕의 조각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실제 사람의 본을 뜬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처럼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종종 사진작품의 진위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곤 하는데 카파의 이 작품도 진짜다, 가짜다 해서 말이 많았다. 어떻게 총탄을 맞는 병사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느냐는 것부터 사진에 다른 병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느냐 등등부터해서 어떤 영국 기자는 그 당시 로버트 카파는 호텔에서 놀고 있었다고 증언을 하면서 이 사진은 가짜라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 사진 속 병사의 이름이 페데리코 보렐 가르시아고, 1936년 9월 5일 세로 무리아노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카파의 사진을 둘러싼 의혹이 드디어 풀리게 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어쨌든 스페인 시민전쟁이 인민전선파의 패배로 막을 내리면서 그는 유럽 땅 어디에도 발을 붙일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고, 결국 미국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한 사진, 죽음의 공포와 엄청난 전쟁의 화염으로 인해 그때 카파의 사진은 상당히 흔들려서 핀트도 맞지 않았으나 그것이 오히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더욱 절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의 보도사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작품이 이 책의 표지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지 않은 나머지 이야기들, 전쟁이 끝난 뒤 로버트 카파는 1945년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1947년에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매그넘>을 결성한다. 이 무렵 그는 존 스타인벡과 함께 소련에 촬영여행을 가고, 1949년과 51년에는 피카소의 가정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평화는 잠깐이었다.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취재하였고 1954년 풍물사진 촬영차 일본에 가 있던 중 <라이프>지의 요청을 받게 된다.

 

1954년 카파는 일본의 한 신문사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그러나 <매그넘> 회원인 친구 잔 모리스가 뉴욕에서 그를 불렀다. <라이프>지에서 베트남 전세가 긴박해지자 카파에게 그곳에 가줄 것을 화급히 간청한 것이다. 카파는 베트남 행을 말리는 친구에게,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로버트 카파는 41살의 젊은 나이에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을 촬영하던 중 지뢰를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1954년 5월 25일의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 자신이 전선기자로서 활동하고자 했던 마음 때문이었겠으나 다른 일면도 존재한다. 매카시즘에 사로잡힌 미국이 그를 반미활동가로 간주하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 카파는 미국을 떠나 있어야 했고, 결국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너무 이르고 극적인 죽음은 그를 전선기자의 신화가 되도록 했다.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앞에 드러내 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 사람 한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라는 카파의 이상, 전선기자들의 이상은 오늘날 거대다국적 기업에 의해 장악된 거대 매스미디어 그룹과 언론통제의 중요성을 깨달은 정부 권력에의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전선기자를 꿈꾸는 많은 젊은 사진작가들에게 이 책은 오랫동안 바이블로 남을 것이다. 전선기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때라도 자신을 지배하려드는 매스 미디어와 정부의 권력에 맞서 싸우려 들었고, 그것이 바로 카파이즘(Capaism)이었다. 역대 전쟁에서 죽은 종군기자를 보면 제1차 대전에서 2명,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66명의 종군기자가 사망했고, 한국전쟁에서 17명, 베트남전에서 65명, 1994년 르완다내전, 보스니아 내전, 알제리 내전 등에서 157명, 1999년 발칸, 시에라리온, 콜롬비아 내전 등에서 활동하던 종군기자 중 87명, 2001년 아프간 전쟁, 나이지리아 내전 등에서 취재보조원을 포함해 95명의 기자가 사망했다. 수많은 기자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오늘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불멸의 아티스트 17명의 초상) - 박명욱 | 그린비(2004)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란 말은 이 책에 수록된 17명의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에릭 사티가 한 말이다. 제목이 책 내용을 모두 설명해주는 책은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음이 또한 좋은 책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의 저자 박명욱이란 사람을 잘 알지 못하지만 출판사 "박가서장"의 책들은 몇 권 가지고 있다. 조병준의 책들이 그것이다. 물론 내 취향이라기 보다는 이 역시 아내의 취향 덕분에 나는 더부살이 독서를 한 셈인데, "나눔나눔나눔"이란 책과 "제 친구들하고 인사 하실래요?"란 책이 그것들이다. 조병준, 그는 시인 기형도와 친구다.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고 말했던 시인 기형도와 조형준. 그리고 원재길... 선량한 사람들은 선량한 사람들과 친구 네트워크로 맺어진다. 그러므로 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는 이들은 제 주변을 먼저 돌아볼 일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박가서장의 이 책 "너무너무"는 1998년 초판이다. 그 이후에 재판을 찍는 일이 생겼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처음 이 책을 발견하고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동안 이 책이 절판되었으며, 매우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류의 책 가운데 내가 애지중지하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시 제목을 따서 만든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란 책이다. 이 책 역시 매우 좋은 책임에도 절판되어 더이상 구할 수 없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출판관계자라면 한 번 잘 찾아서 다시 부활시켜 보는 것도 좋을 거다. 지금 읽어보더라도 결코 뒤처진 느낌을 주지 않을 책이기 때문이다. "너무너무"가 부활하게 된 것엔 아마도 이 책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닌 독자들의 힘과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잡아낸 편집자의 눈썰미가 한데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을 암송해보는 건 싱거운 일이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물론 모르는 이들은 모르고,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 대해서는 나도 지금껏 잘 모른다.) 우선 파울로 파졸리니, 그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다. 정치적으로 좌파이고, 삶의 양식으로 보자면 급진적인 인물이었고, 또 동성애자였으므로 만인의 혐오를 받는 자였다. 정치적으로 좌파, 급진, 동성애자... 그렇다면 살해당할 역사적 근거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는 살해당했다. 안토니오 가우디.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출신의 건축가였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늘 부모님의 애간장을 태웠던 그는 성장하면서 스페인의 불같은 대기와 붉은 대지에 깃든 성(聖)적 충만함으로 심폐를 가득 채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건축적으로는 매우 급진적이었던 그는 성가족 성당을 미완성으로 남겨둔채 달려오는 전차를 피하지 못하고 사고로 죽는다. 실비아 플라스. 미국 태생의 시인이자 3번의 자살 시도 끝에 성공리에 생을 마감한 아이들의 엄마, 영국의 계관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쇠같은 고집으로 타협을 모르는 생을 관철해낸 작곡가 에릭 사티. 그의 짐노페디는 어떤 의미에서든 정말 변태스럽다. 그래서 날 행복하게 한다.

 

이 책의 저자 박명욱이 선정한 17인의 예술가들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 더이상 마이너라고 부를 수 없는 이들이다. 누가 오늘날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구스타프 클림트를, 로버트 카파를 마이너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이 지닌 사상과 생의 궤적들이 그러했을지라도 오늘날 이들은 충분히 메이저의 지위를 누린다. 물론 사후에 누리는 쓸쓸함이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1998년으로부터 2005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문화적으로 우리는 매우 풍성한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누구나 코 끝의 안경처럼, 입 속에, 혀끝에 문화를 담고 살아간다. 그런 과정들이 마이너 아티스트들을 상업적으로 성공한 아티스트로, 전문적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이들을 대중적인 아티스트로 변모시켰다. 그 과정이 우울한가? 천만에... 문화와 예술은 좀더 천해져도 괜찮다.

 

구판의 뒷표지에서 내 뒤통수를 잡아끄는 구절이 있어 옮겨 본다. "언제나 그렇듯이 원칙주의자는 나중에 쓸쓸하다." 이 문장 하나로 나는 올가을을 구원받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반항아 제임스 딘 - 도널드 스포토 | 한길아트(1999)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것은 한 가지 경우뿐이다.
만일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을 넘을 수 있다면,
죽은 뒤에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빠른 속도로 살아야 한다.”- 제임스 딘

 

언제던가 나는 “바람처럼 빨리 살고, 아직 젊을 때 죽어서, 아름다운 시체를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소망이다.”라고 일기장에 그렇게 적었던 적이 있다. 그 무렵의 나는 스스로 막장(漠場)이라 이름 붙였던 연립지하 단칸방 벽에 리바이스 청바지 회사에서 나온 제임스 딘의 커다란 포스터를 붙여 놓고 살았다. 내 방을 찾는 사람들은 간혹 뜻밖의 취향에 놀라곤 했다. 그랬다. 코카콜라를 마시는 일을 무슨 대단한 뇌물이라도 받아 챙기는 양 욕하곤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할리우드가 제작해낸 젊은 청춘 스타의 대형 브로마이드, 그것도 미제 청바지 회사의 광고 사진을 방에 붙여 놓다니... 그 무렵엔 제임스 딘이 나와 비슷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상처받은 듯 보이는 눈빛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널드 스포토가 지은 제임스 딘 평전(한길사, 1999)을 읽다가 문득 평전에는 대개 필수적으로 딸려 있기 마련인 흔하디흔한 약력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31년 2월 8일 태어나 1955년 9월 22일 오후 5시 59분, 하이웨이 46과 41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24살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젊은이에게 별도로 소개할 만한 약력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을 지도 모른다. 제임스 딘이 영화배우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2년 남짓이었고, 그가 출연한 영화는 단 3편이었다. 그나마도 그의 생전에 개봉된 영화는 단 1편 “이유 없는 반항”이었다. 그의 나머지 대표작들 “에덴의 동쪽” “자이언트”는 그가 죽은 뒤에야 개봉되었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문예출판사, 1997)에서 대개 “할리우드 스타들의 신화적인 실제 생활의 절정기는 스크린에서의 그들의 절정기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임스 딘의 실제 절정기는 스크린의 절정기와 일치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신화는 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30년 그의 부모가 결혼할 때 나이는 아버지가 스물 두 살, 어머니는 불과 열아홉 살이었다. 이 두 사람이 갑작스럽게 결혼하게 된 것은 신부 밀드레드가 임신 2개월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신랑 윈튼이 하룻밤 풋사랑으로 여겼을 법한 여인과의 하룻밤 섹스가 제임스 딘을 잉태시켰다. 내 거의 틀림없는 확신은 윈튼이 이 결혼을, 그리고 원치 않았던 아들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나 보다. 요새보다는 이른 나이에 결혼하던 당시 분위기로서도 두 사람의 결혼은 이른 것이었고, 훗날 아내 밀드레드의 죽음과 함께 자식을 팽개치고 떠나버린 아버지로 인해 제임스 딘은 큰 상처를 받았고,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고집불통의 아이가 되었다. 학교에선 어느날 멍하게 딴 생각을 하던 지미(제임스 딘의 애칭)를 선생님이 불러 야단을 쳤다. 어린 지미는 갑자기 반 아이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아버지 윈튼은 결혼 생활 내내 그저 의무적인 역할만 했으므로 아들 지미는 어머니와 정신적으로 깊이 연루되었다. 그러나 열 살 무렵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기억은 평생을 두고 제임스 딘에게 상처로 남았다. 제임스 딘에게 선천적으로 연기자 기질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버지 윈튼 보다는 어머니의 성향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아버지 윈튼은 정기적인 수입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머니 밀드레드는 영화관에 가거나, 무용 발표회, 연극, 책 읽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남편은 의무에 충실한 아버지였을뿐 그다지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어쩌면 대공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잘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파산한 수백만의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아 일거리를 찾아 방랑하는 상황이었지만 윌튼은 재향군인 관리국에서 고정적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 밀드레드는 무미건조한 부부생활의 즐거움을 아들 지미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늘 책을 읽어주었고, 노래를 불러주었으며, 축음기로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훗날 제임스 딘이 즐겨 읽었던 인디애나 주 출신의 시인 제임스 휘트콤 라일리의 시도 어머니 밀드레드가 좋아했던 것들이었다. 어머니와 자식은 정신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없었죠. 아버진 내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죠. 어린 내가 보는 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늘 어머니와 함께 있었고 매우 가까웠죠. <반항아 제임스 딘, 도널드 스포토 지음, 정영목 옮김, 한길아트, 1999. 30쪽>

 

지미는 자신이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이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다. 그는 조숙한 어린 아이들이 가질 법한 영리함과 더불어 가족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상처 받은 짐승의 경계심, 간교함을 함께 터득했다. 그는 타인에게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할 때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적절히 활용했고, 남들이 지켜보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곤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늘 늘 관객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칭찬 받는 일에 익숙했고, 좀더 많은 칭찬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페어몬트 고등학교 재학 중에 아버지의 실망 - 아버지 윈튼은 미국의 아버지들이 흔히 그러하듯 아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며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했으나 다섯 살의 어린 지미에게 심한 근시가 있어 자신과 야구를 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었다. - 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운동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야구, 육상, 농구, 미식 축구 등에서 뛰어난 재질을 보였고, 농구부 주장을 맡기도 했으며, 장대 높이뛰기에서는 고교생 기록을 갱신하기도 했다. 또 모터 사이클 경주에 출전해 종종 우승하곤 했다.

 

그리고 지미는 뉴욕 액터즈 스튜디오의 최연소 단원이 되어 연기를 배웠고, 나머지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영화 배우로서 청춘의 아이콘이 되었다. 험프리 보가트는 "제임스 딘은 제때에 죽었다. 그가 살았더라면 평새 가도 절대 이런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옮긴이는 "죽어서 아쉽다"가 아니라 "제때에 죽었다"는 표현으로 저자인 도널드 스포토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바로 그런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어째서 단 3편의 영화, 24살의 나이로 요절한 한 청년이 세대를 넘어, 시대를 넘어 계속 불멸의 존재로 남을 수 있는가. 저자인 스포토는 이 책이 단순히 24살의 젊은이에 대한 전기, 그의 양성애적 가쉽을 추적하고 밝혀내거나 성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드러내는 수준낮은 전기에 그치길 원치 않았다. 그는 대신에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와 제임스 딘이 어떻게 미국 사회에서 혹은 문화와 전통이 다른 나라들에서도 보편적인 청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살핀다.

 

아이콘이란 상징과는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그 사회와 시대의 정체성이 농축된다는 점에선 수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우장춘 박사 일대기) - 쓰노다 후사코 | 오상현 옮김 | 교문사(1992)





'우장춘 박사'란 이름 석자를 떠올리면 머리속에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건 '씨없는 수박'이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오랫동안 그렇게 암기되었기 때문이다. 선입견이란 건 그래서 무섭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쓰노다 후사코는 우장춘 박사가 씨없는 수박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수박을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은 일본 교토대학의 기하라(木原均)임에도 불구하고 우장춘 박사라고 한국인들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우장춘 하면 '씨없는 수박', '씨없는 수박'하면 우장춘이라고 하면서, 이 수박은 늘 그와 일체가 되어 거론되고 있다. 일반 대중은 우장춘을 '씨없는 수박'의 개발자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88년 12월만 부산에 체재하고 있던 나는 어느 신문사의 인터뷰에 응하여 "다음 작품은 우장춘 박사의 전기"라고 밝혔고, 기자의 질문에 취재의 내용을 꽤 상세하게 답변했다. 그것은 사진과 함께 크게 게재되었는데 '씨없는 수박'에 관한 나의 주장은 실리지 않았다. 그 때도 역시 나는 잘못 전해 내려온 우장춘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본문 251쪽>

 

요사이 모 방송에서 지난 시대의 우리 역사 인물들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장기려 박사, 무위당 장일순 선생 등과 같이 현재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근과거의 인물들을 주로 선정해 방송하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점과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이므로 오히려 우리가 잘 몰랐던 이들에 대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시대의 혜택이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굄돌로 내준 덕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우장춘 박사다. 때마침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 전기 작품을 다 읽은 직후라 방송을 보니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반드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방송 프로그램도 그렇고, 요 근래 아동용 전기물로 만들어진 다른 책들도 거의 대부분은 이 책 쓰노다 후사코의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쓰노다 후사코가 우장춘 박사가 '씨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일본의 기하라가 만들었다고 이야기한 부분을 읽고, 어떤 이는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이 틀렸다는 사실 앞에 잠시 의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위에 인용된 부분만 읽노라면 쓰노다 후사코가 악의적인 의도로, 최근 새로운 과학적 우상으로 떠오른 황우석 박사 이전, 한국인들의 과학적 우상이었던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폄하하려는 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일단 쓰노다 후사코 개인이 아니라 나자신만 하더라도 일본 작가들(소설가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이 쓴 책들에 대해 비교적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대영제국 쇠망사""나카니시 테루마사" 같은 정치학자의 글을 읽노라면 종종 그네들의 시선이 가치중립을 가장한, 보수주의 내지는 국수주의적 시선을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나카니시 테루마사의 경우엔 일본의 대표적 우파 지식인 중 하나란 사실을 최근에 확인하기도 했지만.)

 

우장춘 박사의 일대기인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의 저자 쓰노다 후사코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다. 1914년 도쿄 출생에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수학하고 이후 10년간 프랑스에서 체류하며 1960년부터 일본의 "분게이슌주(文藝春秋)"지로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의 연구자들 특유의 정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군인들의 전기를 많이 집필했다고 하는데, "민비암살"이란 책을 내면서 한일간의 역사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민비암살"은 국내에선 지난 99년 "명성황후 - 최후의 새벽"이란 제명으로 조선일보사에서 나왔으나 현재는 절판이다.) "민비암살"을 읽어보지 못했으나 일본 내의 평가와 한국에서의 평가가 동일하게 나오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하고, 이에 대한 가치 판단은 잠시 유보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런 선입견을 배제하고 우장춘 박사의 일대기를 읽는 재미는 제법 쏠쏠하다. 무엇보다 쓰노다 후사코 자신의 문장은 비록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쓰노다 후사코의 글쓰기는 문장의 흐름을 탈 줄 아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번역 작가의 공로도 크다고 생각한다). 


▶ 우장춘 박사의 어린 시절 가족 사진 : 왼편이 아버지 우범선, 우장춘, 어머니 사카이 나카


잘 알려진 대로 우장춘 박사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었던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 여성인 사카이 나카(酒井仲)의 아들이다. 저자 쓰노다 후사코는 이를 한일최초의 국제결혼이었다고 하는데, 아버지 우범선은 중인 출신으로 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을 맡았던 직업 군인이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기획했던 일본의 미우라 공사는 이를 임오군란처럼 조선 내부의 문제로 조작하기 위해 대원군과 조선 훈련대를 동원했는데 우범선이 이때 전모를 알고 참가했는지, 내용도 모른 체 끌려나왔다가 역적 누명을 쓰게 된 것인지는 역사가 알려줄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듯 싶다. 다만 우범선은 맏아들 우장춘과 둘째를 남겨놓고 조선인 자객에 의해 일본에서 암살당한다. 이때부터 홀로 남겨진 우장춘의 모친 사카이 나카는 어린 두 형제를 훌륭하게 키워낸다. 한 사람은 조선인으로 다른 한 사람은 일본인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우장춘의 모친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은 쓰노다 후사코에 의해 면밀하게 검증된다. 우장춘 전기인 이 책의 초반부에는 그간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마치 '씨없는 수박' 이야기가 그랬던 것처럼 실제와 달리 크게 부풀려진 이야기인 듯 싶다는 쓰노다 후사코의 추측이 보인다. 그러나 후사코의 추적이 현해탄 너머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우장춘이 생전했던 이야기들을 기억하는 후학들의 증언을 종합해본 결과, 사카이 나카 여사가 우장춘에게 심어주었다는 민족 의식은 전설이 아니라 실화였음이 입증되는데 이 대목이 사뭇 감동적이다. 남편이 암살당한 뒤 나카는 홀로 자립하여 두 아들을 키운다. 그 와중에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린 나카는 아들 우장춘을 고아원을 운영하는 절(동경의 희운사)에 맡기게 되는데, 1년 뒤에 찾으러 갔을 때 우장춘은 거의 영양실조 상태였다고 한다. 나카는 남편 우범선의 묘지를 팔아 자식들의 교육비에 보탰다.

 

예를 들어, 우장춘이 어렸을 때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조선인이라고 모두 나를 구박했다'고 말하자 어머니가 정색을 하며 '그럼, 네가 조선인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조선인에게 조선인이라고 말했는데 왜 우느냐. 그래,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면 되지 않느냐'고 타일렀다고 한다. 조선인이라는 것에 긍지를 가지라는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 속에 자란 우장춘은 일본에서 전쟁 물자를 생산해야 할지도 모르는 공학 대신 농학을 전공했고, 훗날 조선이 독립하는 날 자신의 배움이 큰 쓸모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조선이 독립했다. 한국에서는 우장춘귀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된다. 그런데 어째서 일개 농학박사에 불과한 우장춘에 대해 귀국추진위원회까지 결성되었을까.

 

우장춘 박사가 '씨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의 명성은 육종학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적인 것이었을 만큼 뛰어난 육종학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 우리 농업 전반이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농업은 종자 대부분을 일본의 종자회사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농업은 더이상 일본의 종자회사들에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종자를 사올 만한 외환도 비축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종자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신생독립국 한국의 농업은 당장이라도 파탄날 상황이었다. 농업이 파탄난다는 것은 그대로 굶주림과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초대 농립부장관이던 죽산 조봉암이 나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우장춘 박사의 귀국 문제를 정식으로 건의하게 된다.



- 육종학자로서 우장춘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1950년 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그는 일본의 가족들과 마지막 가족 사진을 촬영하고 한국으로 귀국한다.

 

1950년 3월 8일 드디어 일본에서 우장춘 박사가 귀국한다. 우장춘은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귀국인사를 마쳤다. 당시 우리나라 GNP는 5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때였으나 귀국추진위원회는 일본에 남겨질 우장춘 박사의 가족들을 위해 생활비로 1백만 엔 가량을 송금해주었다. 그런데 우장춘은 한국으로 오면서 이 돈을 모두 연구 기자재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일본의 가족은 더욱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년에 병들어 누운 병실엔 그가 한국 땅에서 공들여 키워 낸 가장 훌륭한 묘목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한 번은 벼를 담당하는 양춘배가 서울에 갈 순서가 왔는데, 우장춘 박사는 그에게 잘 와주었다고 격려를 하면서도  "벼는 어떻게 되어 가나.... 가져왔나?" 라고 물었다. 스승의 병환만을 염려한 나머지 그가 벼의 생육에까지 그토록 관심을 기울일 것이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부산으로 연락해 다른 제자가 벼를 가지고 서울에 왔고, 그는 누운 상태에서도 벼의 생육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두었다. 1959년 8월 7일 오전 농림부로부터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농림부 장관 이근식이 우장춘의 가슴에 문화포장을 걸쳐주고 짤막한 축사를 낭독하자 우장춘은 눈을 감고, 떨리는 손으로 살며시 포장을 쥐고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그리고 8월 10일 오전 세시 십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오늘날 즐기는 김치의 재료인 배추와 무를 비롯한 우리 음식의 여러 필수적인 먹을 거리들, 야채들 거의 대부분은 우장춘 박사와 그의 제자들이 연구한 종자에 의한 것이다. 그가 연구하기 이전의 우리 푸성귀들은 지금과 같은 모양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른 여러 관점에서 보자면 "과학과 국가권력"의 문제는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일이긴 하다. 그러나 우장춘의 생애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감동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부끄러웠던 것은 그가 베풀어준 혜택의 열매를 가장 많이 맛보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 그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에도, 그리고 이 책이 나오고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우장춘에 대한 더 좋은 연구서적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 이 책은 시집 한 권 값에 맞먹을 만큼 저렴하다. 한 권 구입해서 아이들과 함께 읽어보시길... 시중에 아동용으로 나온 우장춘 전기들도 모두 이 책을 참고하고 있으니 부모가 먼저 읽고 아이들과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직은 검증되지 않은 황우석 박사 전기도 나왔다는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최승희 - 정수웅, 눈빛(2004)



『최승희 -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이란 책은 내가 아는 한 국내에서 출판된 책 중 가장 호화로운 책 가운데 하나다. 우선 겉 표지 그렇고, 겉표지를 벗겨낸 뒤 바라본 양장본 속표지가 그렇다. 자줏빛 장미가 새겨진 비단천(물론 비단천은 아닐테지만)으로 속을 감싸고 거기에 책등엔 금박으로 제목이 아로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을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평전 성격으로 생각하여 구입한다면 약간 후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이정 박헌영 일대기"처럼 평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자료집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사진전문출판사인 "눈빛"에서 출간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인 듯 싶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듀서인 정수웅이 <세기의 무희 최승희>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수집한 최승희에 대한 자료들을 한데 묶은 책이다. 그렇다고해서 무미건조한 책은 절대 아니다. 다만 글보다 많은 화보들로(그것이 또 여간 귀한 것들이 아니다) 책의 상당수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책으로 엮이게 된 무용가 최승희는 어떤 사람일까? 과연 그녀는 이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일까? 그건 이 책과 최승희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보는 것이 좋겠다.

 

장후리, 중국무용가협회 지도자의 말을 들어보자.

 

최승희는 조선민족무용을 했습니다만 해외의 발레나 현대무용 등도 전부 할 수 있었습니다. 최승희는 이들을 전부 융합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최승희의 위대한 면은 이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민족의 것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것들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술가로서 가장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도리가와 준, 일본 동유럽문화교류협회 회장은 "최승희는 단 한 사람일 뿐 역시 똑같은 최승희는 없습니다. 시대가 다릅니다. 무용에 대한 정열은 역시 헝그리 정신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너무도 자유스럽고 무엇이든 넘쳐나는 시대라 이런 상황에서는 이시이 바쿠 선생이나 최승희처럼 훌륭한 예술인은 생겨나기 힘들지 않을까요. 안타깝지만 그만큼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는 세계적인 동양의 무용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저자 정수웅은 지난 2002년 11월에 방송된 <세기의 무희 최승희>를 위해 1990년대초부터 10여년간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을 돌며 최승희의 사진 자료와 필름을 발굴하고, 각국의 무용계 인사들, 최승희의 제자들을 만나 생생한 증언들을 채록했다.

 

최승희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서울에서 사남매 가운데 막내로 출생했다. 그의 큰 오빠 최승일은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문학단체인 염군사에 가입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최승희는 어려서부터 무용과 음악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자신의 길을 무용으로 정한 것은 1926년 오빠의 권유로 광부 출신 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라간 뒤의 일인 듯 싶다. 그녀는 같은 해 4월 이시이 바쿠 무용소에 입소하여 이때부터 전문적인 무용 공부에 임한다. 1929년엔 경성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듬해 제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를 연다. 1938년엔 미국의 초대로 샌프란시코 카란 극장에서 첫 공연을 펼치고, 같은 해 2월 뉴역 필드 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아시아인으로는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디샹카와 더불어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최승희의 미국진출을 일본의 선전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라는 독립운동가들의 주장으로 공연을 취소하고 유명화가의 모델 활동을 하는 등 곤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최승희 가족 - 남편 안막, 딸 안승자 


1939년엔 파리, 제네바, 밀라노, 로마, 브뤼셀 등에서 공연했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 메트로폴리탄과 계약한다. 1940년 귀국해서 일본의 강권으로 만주 일대를 돌며 위문공연에 나서야 했다. 그녀가 동양무용을 시도한 것도 이무렵의 일이다. 해방 후인 1946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하여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건립한다. 그러나 50년대 후반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으며 무대에서 사라진다.
(주은래가 김일성에게 특별히 최승희의 무대 복귀를 부탁했다고 전해진다.)
1986년 영화감독 신상옥은 최승희가 딸과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탈출하려다 붙잡혀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최승희라는 일제강점기와 분단을 거치며 우리들 뇌리 속에 잊혀져 있던, 아니 간간이 그녀의 제자들을 통해서만 구전되던 한 인물을 구술사라는 역사기술의 기초를 되밟아감으로써 오늘의 생생한 역사 인물로 재생해간다. 이 책은 그 과정의 일부이지 결코 전부는 아니다. 이 땅에서 분단의 족쇄가 풀리는 날, 그날이 오면 최승희는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요절』 - 조용훈 | 효형출판(2002)



◀ 이중섭

"요절(夭折)"
짧게 끊어서 발음해본다. 단지 두 음절에 불과하다. 그러나 입 속 어딘가를 베어문 것처럼 찌릿한 피맛이 살며시 배어나온다. 이 단어에서는... 어릴요(夭)자는 아이가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뒤로 살며시 젖혀진 모습을 형상화한 한자다. 아직 하늘 아래 제 머리를 제대로 가눌 수도 없을 만큼 어린 사람의 꺽어짐. 그것이 요절의 순수한 의미다. 아직 어릴 때 꺽이는 것, 그것이 요절이다. 얼마전 나는 한 어린 친구에게서 "나, 다음에 만나면 구두에게 지금 구두가 가진 꿈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어졌습니다."란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아주 먼 이방의 낯선 땅을 영원히 떠도는 순례자를 흠모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란걸 내 오늘날에도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이들 핸드폰에서 장난스럽게 쏟아지는 "인생 뭐 있겠어. 해피하게 사는 거지"란 벨소리처럼 종종 망가지는 쾌락을 흠모한다. 내가 유독 사랑하는 서사가 있다. 나는 한 인간이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혹은 그것을 이루어도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그걸 시도하고, 그럼으로써 일생을 허비하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것은 퇴락한 회색빛 머리카락 속으로 숨겨둔, 재로 화한 꿈의 잔재를 남기기 보다는 활활 불태우는 의미의 강렬함 때문이다.

죽어도 썩지 않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마르께스의 어떤 단편. 토막난 이야기는 남미의 이름 없는 골짜기 출신인 한 소녀가 어느 날 죽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녀의 시체는 썩지 않는다. 몸 안의 수분도 빠져나가지 않은 채 그녀는 언제까지나 죽던 날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소녀는 소멸한 것일까? 아직 살아남은 것일까? 예술가들이 꿈꾸는 불멸이란 이 소녀의 죽음과 같다. 죽었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의 소멸과정과 일치함에도 그녀의 남겨진 육신은 존재하여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런고로 모든 예술가들이 궁극적으로 열망하는 것은 효시(梟示)된 자아(自我)다.



▶ 손상기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자손을 통해, 어떤 이들은 기억으로 전승되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서의 불멸을 꿈꾼다. 그러나 그 허망한, 도저히 성취될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위해 인생을 바치라고 권유할 수는 없다. 내가 만일 남미의 고원에서 옥수수를 재배하는 인디오로 태어났다면 나는 많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꿈들은 옥수수와 함께 피고지는 세월 속에서 한 구절  노래가락으로 남거나 그나마도 남기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허기의 망령이 엄습한다.

 

인생이 지속될 것이라는 허망한 경고는 모두에게서 울린다. 존재가 끝나는 순간, 당신의 우주도 함께 문닫을 것이다. 어떤 요절한 시인의 시는 오늘도 종잇장 같이 얇게 썰린 복어살처럼 투명하게 빛나지만, 당신과 나의 부박(浮薄)한 영혼은 그대로 썩어갈 것이란 경고. 그래서 한동안 나의 소망은 세속 도시에서 성자처럼 사는 것이었다. 나는 바람처럼 빨리 살고, 아직 젊을 때 죽어서, 아름다운 시체를 남기고 싶었다.


▶ 최욱경
 

이 책 "요절"엔 그런 소망을 성취한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그들이 그런 소망을 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 이중섭, 손상기, 나혜석, 최욱경, 윤두서, 오윤, 류인, 이인상, 전기, 구본웅, 이인성, 김종태, 12인의 요절 미술가들을 다루는 시선은 기본적으로 따뜻하다. 만약 이 책을 읽는 누군가가 그런 소망, 강렬하게 살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생의 물리적 시간쯤 얼마든지 단축된다 하더라도 거칠 것 없다는 그런 소망을 품은 이라면 감동할 수도 있다. 전쟁의 상처 속에서 미처 개화해보지 못한 이중섭, 세속의 출세길을 잡았으나 치안대원의 분노를 사 억울하게 죽은 이인성, 장애에 대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한 손상기, 구본웅 그리고 여성으로 산다는 멍에에 질식한 나혜석, 최욱경 등... 우리는 저자 조용훈의 시선으로 효시되고 있는 화가, 조각가, 판화가, 서화가로 살아간 이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들은 단지 이제 막 알려진 인물들은 아니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요절"이란 공통점으로 묶인 이들에게 감동할 수도 있겠으나 금새 아쉬움을 품게 되리라. 그것은 이들의 삶이 미완성이라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해석이 아직 미완성인 탓도 있다.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썩지 않을 시신이므로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가는 것도 방법이리라. 미완성의 여백이 당신을 끌어당긴다면, 당신의 삶이 아직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탓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미셸 슈나이더 | 이창실 옮김 | 동문선(2002)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늘 혼자서 보냈다. 그건 내가 비사교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술가가 창조자로서 작업하기 위해 머리를 쓰기 바란다면 자아 규제 ― 바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절단시키는 한 방식 ― 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예술까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연예인들의 자살을 바라보면서, 이후 나는 점점더 나의 죽음 이후를 상상해본다. 내가 죽은 뒤 나의 사체를 사람들이 발견할 수 없는 아주 깊은 산 속에 버려두거나 아니면 깊은 심연 속에서 두번 다시 햇살 아래로 떠오르는 일 없이 그렇게 조용히 부패해가기를... 한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잠시 전 한 회사 동료로부터 그(녀)의 죽음과 관련한 그럴 듯한 X파일 하나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우습다. 사람의 죽음이 소모되는 방식이란 구더기가 눈구멍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것처럼 잔인하다.

 

브레히트의 시를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들도 모두 죽는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에 타인의 죽음을 오래도록 곱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가 아니라 살아남았으므로 강한 자임을 깨닫노라면 나는 자신이 미워진다." 오직 인간만이 타인의 손에 자신의 시신을, 최후 처리를 넘긴다. 짐승들은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을 푸줏간의 고기처럼도 취급해주지 않는다. 죽은 건, 그냥 죽은 거다. 한밤의 연예 프로그램에서 성남 분당의 아파트에서 하얀 시트에 포장된채 들려나오는 여인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에 질질 끌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문득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오디오에 삽입한다.


"딴따아앙 따라다라 퉁두르"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토론토 순회 공연 중이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어느날 굴드를 방문했다. 굴드는 자신의 아파트에 번스타인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고, 그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곧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모피와 털로 안을 댄 외투, 목도리 속에 얼굴이 묻힐만큼 깊이 파묻힌 굴드는 창문을 모두 닫고 난방을 최고로 높였다. 그리고 볼륨을 최대한 올린 라디오가 악을 쓰는 상황에서 번스타인은 굴드와 함께 서너 시간 동안 도시 주변을 배회해야 했다. 소음과 땀에 파묻힌 번스타인이 이런 일이 자주 있느냐고 했더니 굴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하루에 육백마흔네가지 망상에 사로잡히는 나 같은 인간도, 병들어 몸져 누워 있는 동안 욕실 거울을 앞에 두고 면도칼로 스스로의 목울대 대신에 머리카락을 스윽쓱 밀어댄 나 같은 인간도, 회사를 그만두고 삼개월여 동안 두문불출하고 방 안에서만 지내 괴물같이 자란 수염을 보며 텅빈 미소를 지어 보였던 나 같은 인간도 글렌 굴드와 서너 시간 동안 도시 주변을 배회하라면 이렇게 말할 거다. "넌 참 짜증나는 인간이야!"라고...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저자 '미셸 슈나이더'를 감히 존경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어느 정도로 글렌 굴드를 사랑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거지요? 하고 그에게 묻고 싶다. 굴드는 종종 마약이 필요한 나에게 마약 이상의 값어치를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금쯤 백골이 진토되어 나뒹굴고 있을 굴드 자신이 아니라 그가 웅얼대며 남겨논 음반 덕이다. 나는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뿐만 아니라 골트베르크 변주곡 자체를 무진장 좋아해서 이 곡이 수록된 음반만 대여섯장 가지고 있다. 그래도 내 귀엔 굴드가 최고다. 그의 악보엔 온갖 낙서들이 난무한다. 상념 많은 인간은 스타인웨이 CD318 피아노 앞에서도 끊임없이 웅얼대고 싶어했다. 그가 그랬다.



 

굴드는 만년에 잠시 야마하를 쓰기는 했지만 그가 즐겨쓰고 좋아한 피아노는 역시 <스타인웨이 CD318> 그것도 그만의 174번째 생산된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를 불의의 사고로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1960년 초 굴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피아노의 건반을 좀 더 가볍게 하기 위해 스타인웨이사의 전속 조율사 윌리엄 후퍼를 불렀다. 후퍼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애용하는 호로비츠와 굴드를 위해 스타인웨이사측에서 특별히 채용하고 있는 조율사였다. 굴드의 집에 온 후퍼는 굴드와 이야기를 나누다 친근감의 표시로 그의 등을 가볍게 한번 툭 쳤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절대 악수하지 않는다는 결벽증의 소유자. 소련에서 니콜라예바와 악수할 때조차 장갑을 낀 채 였던 굴드에게 이것은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그는 즉시 왼팔과 등에 통증과 왼손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며 스타인웨이사에 30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재판에서 누가 승소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사건이 굴드의 노이로제 증세를 더욱 악화시킨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굴드는 이전부터 '감기에 걸렸다' 혹은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등의 핑계댈 만한 것만 있으면, 아니 핑계될 것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예정된 연주회를 취소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휴식하던 중 번스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병의 이름들을 적어놓은 리스트를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특히 콘서트 매니저들에게 효과가 있을 병들을 앞으로도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의 나이 26세때의 일이다. 결국 이런 글렌 굴드의 꾀병과 노이로제 증세는 정작 그의 몸에 중한 병이 찾아왔을 때 의사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부메랑이 되어 변변한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문득 독일 작가 파트릭 쥐스킨트가 떠올랐다.

이 인간(파트릭 쥐스킨트)은 사진 한 장 보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라면 J.D. 샐린저도 만만치 않은데, 쥐스킨트는 사람 만나는 걸 꺼리고, 빛을 싫어하고, 누가 그에게 문학상을 수여할 테니 시상식장에 나와달라고 요청할까 두려워서 문학상도 거부한다. 어디가서 자신의 얘기를 전하는 친구에겐 주저없이 절교를 선언한다. 그는 개도 무서워하고, 비위생적이란 이유에서 악수도 거절한다.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좀머씨는 그래서 쥐스킨트 자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저 침묵한 채 걸을 뿐, 누가 말이라도 걸라치면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외치는... 자기 안에 심연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타인과의 대화를 꺼리게 되는 걸까.

 


▶ 캐나다 토론토시 CBC빌딩 앞에 있는 글렌 굴드의 조각상 벤치


두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한 얼마 후 글렌 굴드는 자신이 거주하던 토론토의 아파트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불을 모두 켜둔 채 잠을 자던 그는 토론토의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죽어갔다. 그의 <데뷔 레코딩곡>이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되었다. 굴드는 두 번째 녹음 이듬해인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가 피아노 건반에 코를 박듯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연주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는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속 결말이 어찌 끝나는지 잘 알고 있다. 소설 속의 좀머씨는 호수를 향해 그냥 걸어 들어갔고,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 나는 그가 과연 자살을 위해 호수로 걸어 들어갔는지 그냥 걸어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오늘날 클래식 연주자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타성을 발휘하길 원하는 청중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그렇게 말하고 있는 본인을 포함해서) 사실 고전 음악의 최전성기 때조차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받은 대접이 그렇게 훌륭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몸을 누일 만한 그럴 듯한 관짝 하나도 허용되지 않았고, 오페라 작곡가들은 온갖 연애담과 구설수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로 대접받았던 시기는 고전음악사 전체를 통틀어도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연주자들은 더 이상 예술가라기보다는 메이저 음반사에 묶인 상품이 되어가고 있다. 대중들은 마음의 심연을 두드리는 음악보다는 듣기 좋게 짜깁기된 콤필레이션 음반들을 더 선호하고, 불황으로 활로를 찾을 수 없는 음반사들은 음악성보다는 뛰어난 외모를 갖춘 연주자들을 통해 매출을 극대화하려 든다. 글렌 굴드가 이와 같은 이유들로 청중들을 싫어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잘 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더 잔인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건 서로 사랑하다가 이별한 경험이 있는 연인이라면 더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내가 당신을 아는 만큼 나는 당신에게 더 잔인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당신이 사랑해달라고 애걸했던 그곳, 당신의 가장 취약한 곳에 비수를 박아넣을 수도 있으니까. 글렌 굴드는 미치도록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외로왔고, 무대에서, 콘서트 장에서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있다는 강박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내 자신이 강박적인 인간이란 사실을 자각하게 될 때마다 나의 상처들이 벌어져 오래된 고름들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 글렌 굴드는 나에게 좋은 위로가 된다. 사랑이란 모든 걸 다 아는 존재로서의 대상을 상정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거기 오랫동안 있어주는, 그것이 무엇일지는 나도 모르는 존재를 상정할 뿐이다.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음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따금 음악이 일체를 엄습해 깡그리 지워버리고 만다. 그리고 음향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 없을 수도 있지만, 음향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때론 아주 미미한 것, 거의 무효화된, 아니면 부서진 무엇일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음악은 내 안에 있고, 나는 음악 안에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부에서 외부로, 내면이 된 외부로 나아감이다. 마치 내면에 외부가 존재하는 양. 음악은 신의 자질들을 지니고 있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보존하면서 채운다. 그것은 에워싸고 조여 온다. 그러면서도 귀로 올라오는 기쁨, 혹은 첨예한 고통으로서, 아주 작은 부분이 되어 내부에 머문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中에서,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동문선 현대신서>

 

지난 88년 프랑스에서 출간돼 유명한 페미나 바카레스코상까지 수상한 전기문학이지만 매우 특별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미셸 슈나이더는 굴드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담아 그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기인 글렌 굴드를 조금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 만약 추억하거나 회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이 혹시 나라면 이처럼 해준다면 좋겠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2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