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5.03 김경미 -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2. 2011.04.22 김경미 - 바람둥이를 위하여 (1)
  3. 2011.03.25 김경미 - 나는야 세컨드1 (2)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 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겠지요

*


시를 읽는 일이 쉬울 때는 마음이 가을 안개처럼 야트막하게 가라앉아 아무런 잡생각 없이 눈 앞에 시만 보일 때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돌이킬 수 없는 명백한 진심 앞에서는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지만 그 행동조차 쉽지 않은 것이고 보면 앞으로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소싯적 한가락 하던 청춘엔 눈 앞에 뵈는 것 아무 것도 없어서 용감하더니 나이 먹으니 보이는 것, 살피게 되는 것만 늘어 발걸음은 더욱 느릿느릿해지고, 언젠가 이 한 걸음 옮기는 것마저 비척거리며 힘들게 생각되면 그 날이 삼베옷 입고 저승 나들이 갈 날일 게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란 충고는 통속적이고, 진부하다.

낯선 말, 낯선 단어를 찾아 고원에 오르고, 늪의 바닥까지 뒤져보았으나 아무리 화려한 말이라도 결국 말일 뿐이란 평범한 진실 앞으로 되돌아 오게 된다. 꽃 같은 너의 입술은 진부하지만 그보다 더 적당하고, 정확한 표현이 없을 때가 있다. 말이 곧 진심일 때, 통속적이며  진부한 한 마디조차 시인의 천 가지 수식보다 힘이 있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만, 누군가 단 한 사람에게만 나의 모든 말을 바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내가 토해내는 세상의 가장 더러운 말도 고스란히 받아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대여, 그조차도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인가. 간신히 조금 밝아지기 위해 내 모든 말을 앗아가고 싶다는 당신의 사랑은... 슬픔도 이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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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를 위하여

- 김경미

1

걷지 못하는 민들레가
바람을 만나니 걷잖아 탁 ! 터져서
간음 없는 마음이 흔하랴

그런 거야 욕하지 마
바람둥이들
한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2

욕하지 마
먼지처럼 어디에나 몸을 묻히는 마음
아세톤처럼 어디에서나 쉽게 마음 휘발되는
몸의
사랑
고단하게
귀한거야

*

'바람둥이'란 말은 치욕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김경미 시인은 그 고단함을 아는 모양이다. "한 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바람둥이는 어쩐지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화란인 선장(Der Fliegende Hollander)> 같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아니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히 지상에 오를 수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떠돌이가 되어 폭풍우치는 바다 위를 떠돈다.

누군가에겐 그도 귀한, 고귀한 사랑일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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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세컨드1


- 김경미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남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 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쉿, 나의 세컨드는 - 김경미 시집
김경미 (지은이) | 문학동네



*

간혹 아깝게 놓치는 시집이 있는데, 김경미 시인의 "쉿, 나의 세컨드는"는 꼭 갖고 싶은 시집이었는데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지금은 구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다. '세컨드'란 표현이 한국에만 있는 건지 외국에서도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 말인 건 확실하다. '날 얼만큼 사랑해?'라고 묻는 말의 배후에는 '네가 제일이야!'란 말이 도사리고 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탓인지 아이들도 태어나면서부터 제 형제들과 먼저 경쟁을 벌이려고 한다. 첫째가 둘째를 시기하고, 둘째는 셋째로부터 위아래로 치고받힌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말씀들 하시지만 당하는 당사자로서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생각해보면 난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첫 번째가 되어 본 기억이 없다. 우리 집안의 장남의 자식이므로 장손으로서의 책무나 부담감은 백배지만, 든든한 배경이 되었어야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편이고, 아버지는 요절한 탓에 좋은 건 하나도 없고, 부담만 턱살처럼 늘어진다. 그래서 나는 시기와 질투를 숨기는 법을 어려서부터 익혀야 했다. 사실 이제는 그런 감정으로부터 어느 정도 초연해지기도 했다. 승자독식사회니까, 첫째가 된다. 1등이 된다는 건 그만큼 많은 자원을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승자가 된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고금의 진리가 증명하는 건, 물질적 자원의 풍요와 행복은 기초생활 보장의 차원을 떠나면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김경미 시인이 말하는 세컨드의 의미도 그것이다. 당당하게 나는 세컨드, 하류인생이라 말할 것...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하며 씨익 웃어줄 것...

나는 당신과 이 사회의 세컨드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이나 이 사회를 질투할 것 같은가? 천만에 말씀, 변방에도 행복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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