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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11 김해자 - 길을 잃다 (8)
  2. 2010.11.11 김해자 - 바람의 경전 (1)

길을 잃다

- 김해자


전태일기념사업회 가는 길
때로 길을 잃는다 헷갈린 듯
짐짓 길도 시간도 잊어버린 양
창신동 언덕배기 곱창 같은 미로를 헤매다 보면
나도 몰래 미싱소리 앞에 서 있다
마찌꼬바 봉제공장 중늙은이 다 된 전태일들이
키낮은 다락방에서 재단을 하고 운동 부족인
내 또래 아줌마들이 죽어라 발판 밟아대는데
내가 그 속에서 미싱을 탄다 신나게 신나게 말을 탄다
문득 정신 들고나면 그 속에 내가 없다 현실이 없다
봉인된 흑백의 시간은 가고 기념비 우뚝한 세상 거리와
사업에 골몰한 우리 속에 전태일이 없다 우리가 없다
회의도 다 끝난 한밤중
미싱은 아직도 돌고 도는데

<출처> 김해자, 『황해문화』, 2005년 겨울호(통권49호)

*

내가 아직 ‘바람구두’라 불리기 전에 나는 떠돌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용 잡부로 떠돌던 시절,
곰빵(등짐 지는 것)에 질벽돌 4~50개는 거뜬히 지어 나르던 내가 있었다.
쓰미(벽돌쌓기)부터, 미장, 방수까지 못하는 게 없었다.
내 땅만 있었다면 나는 혼자 집도 지었을 것이다.
목수 데모도(조수)부터 시작해서 처음 못 주머니를 차던 날,
나는 한 사람의 기공이 되어 기뻤다.
일당이 배로 올랐으므로.
오야지가 사주는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마시며 흐뭇했다.
나는 왜 계속해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지 않았을까?
그 때 나는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고 믿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의 나는 두툼해진 뱃살을 걱정하며
그 시절보다 월등하게 풍족한 삶을 누린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가야만 한다고 믿었던 길을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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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바람의 경전

- 김해자


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내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확 밀어버리는 것
저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어디서 언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애비에미도 없이 집도 절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무덤을 파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탕진하고도 한 자도 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땅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출처> 작가들, 2005년 겨울호(통권 15호)

김해자 :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제8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처장 부총장, 노동자잡지 「삶이보이는창」 발행인, 노동문화복지법인 상임이사 등 역임했다. 2007년 현재 중앙대 예술대학원에서 시창작을 강의하며, 장애인, 노동자, 사회운동가들과 더불어 예술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무화과는 없다>, <축제>가 있다.

*



시를 읽다가 눈을 감아본 것은 참 오랜만이다.
좋아하는 이 아닌 사랑하는 시가 나타난 것도 참 오랜만이다.
눈을 감고 시속으로 풍덩 빠져들기도 참 오랜만이다.
나는 시를 읽다가 문득 그 바람의 길목에 섰다.

저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어디서 언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너무나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눈앞에 깃발처럼 펄럭이는 통에
눈을 감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시를 만난 건 참 오랜만이다.
이건 내 이야기라고 감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시를 만난 건 참으로, 참으로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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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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