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바이야트 -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 민음사(1997)


오마르 카이얌(Omar Khayyam)은 11세기 중엽 페르시아 동북부 지방 코라싼주의 나이샤푸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나 출생연대는 정확치 않다. 오마르 카이얌이 살았던 시대는 셀주크 투르크 왕조가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시대였다. 기독교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순례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오마르 카이얌이 언제쯤 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교황 우르바누스2세가 처음 십자군을 일으킨 1096년 이전에 숨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오마르 카이얌의 이름도 정확하게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루바이야트>는 11세기경에 살았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역사학자, 철학자(당시의 지식인이란 존재를 생각해볼 때 이렇듯 다방면으로 재주를 보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였던 이가 오마르 카이얌('카이얌'은 천막제조업자란 뜻)이란 필명을 써서 4행시 "루바이"를 쓴 것이다. 위에 인용된 구절들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의 루바이들은 매우 교훈적이면서도 생의 찰나적 흐름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훈적이라고는 하지만 허무의 냄새가 묻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이슬람 문명권을 통칭해서 아랍이라 말하지만, 아랍은 단지 아라비아 반도의 지리적 호칭이고, 이슬람이나 무슬림은 종교적 명칭이다. 원래 아랍이란 말은 좁게는 아라비아 반도 일대만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아라비아 반도를 세력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마호메트의 지지자들에 의해 사상적, 정치적으로 포섭된 페르시아 지역까지 아랍이라고 통칭했다. 나중엔 그 의미가 점차 확대되었다.

 

"루바이야트"는 4행시의 복수형으로 "4행시집" 이란 뜻이다. 우리의 시조처럼 정형화된 율격이 있지는 않으므로 형식상은 자유시이겠지만, 4행이 한 연을 이루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루바이야트는 모두 101수의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4행이 하나의 연이면서 독립적인 시 한 편이 된다. 각각의 시들은 모두 다른 주제를 노래하면서도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일반적인 정서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민중적 현세관을 담고 있다. 그런 현세관과 더불어 오늘에 충실하라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감동으로 다가온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네들의 시가 현세적인 풍요를 추구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들은 오랫동안 낙타를 타고 사막을 누비던 중개무역상들이 아니었던가?

 

7.
오라, 와서 잔을 채워라, 봄의 열기 속에
회한의 겨울옷일랑 벗어 던져라
세월의 새는 멀리 날 수 없거늘
어느 새 두 날개를 펴고 있구나.

 

일곱번째 루바이에서 시인은 "세월의 새는 멀리 날 수 없거늘/ 어느 새 두 날개를 펴고 있구나"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동양의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과 대등한 시구라 할 수 있다. 사막의 석양은 분명 보기 드물게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해는 또 순식간에 저버리고 밤의 사막은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게 했을 것이다.

 

20.
살아나는 풀잎이 뒤덮은 강둑,
그 위에서 노닐 때에는 조심을 하오.
그 옛날 귀한 이의 입술 위에서
몰래 핀 풀인지 누가 알리요

 

20번째 루바이에서 시인은 풀잎 하나라도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 까닭은 강둑을 무심히 뒤덮은 풀잎 하나조차 과거 영화를 누렸을 어느 인물이 죽은 뒤 흙으로 돌아가 풀로 피어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머지 시편들 역시 시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미지들은 비록 화사하고 아름다운 것들일지라도 그 이면엔 역시 현세의 삶에 대해 충실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은 마땅히 즐겨야하는 것이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25.
오늘만을 위해서 사는 이 있고
내일을 지켜보는 사람 있지만
암흑의 탑에서 들려오는 저 목소리
"바보여, 그대의 보답은 어디에도 없으리."

 

25번째 루바이의 마지막은 종종 많은 곳에서 인용된다. "바보여, 그대의 보답은 어디에도 없으리." 오늘을 위해 살든 내일을 위해 살든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유명한 우화 '죽음을 피해 달아난 사내' -  한 사내가 점장이에게 점을 보았다. 점괘에 따르면 오늘밤 안으로 그 사내가 죽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사내는 마치 괴테의 "마왕"처럼 죽음의 사자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시간, 죽음의 사자는 테헤란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사내를 찾고 있었다. 죽음의 사자는 말한다. "이 녀석이 오늘 중으로 테헤란에서 죽기로 되어 있는데 아직 안 보이는군." 죽음의 사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사내는 말을 달려 죽음의 사자 앞을 달려간다. 죽음의 사자는 그를 보고 달려가 목숨을 빼앗아 버린다. 죽음의 운명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죽음은 누구에게도 별다른 보답을 주지 않는다. 죽는다는 것은 그저 죽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47번째 루바이를 비롯해 여러 편의 루바이들에서 반복되고 있다.

 

47.
그대와 내가 함께 장막을 지나가도
이 세상은 오래오래 살아 남으리
바닷물에 밀리는 조약돌 인생
머물다 간다 한들 아는 체할 세상인가

 

이렇듯 삶과 죽음에 대한 현실적이고도 냉정한 관찰은 오랫동안 대상 무역에 종사하거나 유목을 위해 사막을 횡단하며 체득한 삶의 방식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양떼를 방목하는 그들로서는 노동력을 발휘할 수 없고 체력이 약한 노인들은 짐이 되기에 어떤 유목민들은 새로운 방목지로 떠나기에 앞서 늙은 부모를 위해 작은 천막을 지어준다고 한다. 20여일치 정도의 식량과 더불어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물품 몇가지를 함께 놓아둔다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손자 삼대가 할아버지를 천막으로 모시고 갔다가 아버지와 아들만 돌아오는 것이다. 

 

35.
행여나 삶의 비결 찾을까 하고
초라한 술항아리 입술을 찾네
입술에 입술 대고 속삭이는 항아리
"마셔라, 살아 생전, 한 번 가면 못오리"

 

우리들 농경민족에게 삶과 죽음은 언제나 고정된 장소에서 익숙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삶과 죽음이란 언제나 낯선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랍 저편으로 사라질 뻔한 "루바이야트"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빅토리아 왕조시대 영국의 상류계급이었던 "에드워드 피츠제랄드"의 공로이다. 그는 취미 삼아 번역을 즐겼는데, 오마르 카이얌의 시 75편을 번역해 주변의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시를 읽고 감동한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는 자신의 친구이자 시인인 스윈번(Charles Swinburne)에게 다시 이 책을 소개했고, 입에서 입으로 퍼져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피츠제랄드는 이런 반응에 힘입어 35편의 루바이를 덧붙이고, 다시 번역하여 모두 101편의 루바이로 묶은 것은 1879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번역은 반역이란 말도 있듯 피츠제랄드의 번역을 두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법 논쟁이 있었다. 그가 오마르 카이얌의 원시에 충실하게 번역한 시들은 불과 49편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고, 심지어 이중 8편 가량은 피츠제랄드가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들을 제 멋대로 덧대거나 생략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오마르 카이얌의 시가 빅토리아 왕조 시대 영국에서 크게 유행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바대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온갖 근엄한 도적과 엄숙하기 그지 없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뒤안에서 상류계층 사람들끼리 온갖 불륜과 부도적한 일들이 벌어졌던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런 시대에 현세적이면서도 허무한 세계관을 4줄의 짤막한 시행들로 표현하고 있는 루바이들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충격이면서 동시에 기쁨이었을 것이다.

 

따지고보면 서양에서도 이런 전통은 로마 이래로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이란 구호에 따라 충실하게 진행되어 오지 않았던가. 21세기 새로운 노마드(유목인)들에게도 여전히 "오늘"은 불확실하고, 내일은 확실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을 읽으며 오늘을 즐기는 일도 그다지 나쁘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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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 아민 말루프 |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2002)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한동안 "내 침상의 책"이었다. 어떤 책들은 책상머리에 정좌하고 앉아서 읽어야 하는 것들이 있고, 어떤 책들은 화장실에서 힘줘가며 읽어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화장실에서 책상 사이의 틈새 공간이 내겐 침상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같은 책들은 책상에 정좌하고 앉아서 읽어야 하는 책이고, "공상비과학대전" 같은 책은 화장실에서 읽으면 좋다. 물론 이런 구분이 책에 대한 가치 평가를 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 순전히 실용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거다. "계몽의 변증법"의 경우엔 중도에 멈추기도 어렵고, 이것저것 메모도 필요한데 비해서 "공상비과학대전"의 경우엔 어디부터 읽어도 무방하고, 중도에 볼 일 다 보고 물 내리고 나오면서 덮어둔다고 해도 상관없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침상에 읽는 책이란 밑줄 쳐가며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더라도 종종 책을 덮고 잠시 생각에 빠지거나 포스트잇 같이 간편한 기억보조장치들을 동원해 나중에 다시 펼쳐볼 장에 손쉽게 기억을 연장해줄 만한 장치들을 가할 수 있는 그런 책을 말한다. 게다가 읽는 재미도 쏠쏠한 그런 책이 되겠다. 어쩌다보니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가
"킹덤 오브 헤븐"이었다. 사실 "십자군" 혹은 "십자군 전쟁"의 전후 시기를 다룬 이야기들은 소설 혹은 영화를 통해 여러번 되풀이 되어왔다.

예를 들어 지난달(2005년 5월)에 나온 토머스 F. 매든의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역시 비록 이전의 관점들과 현재의 관점 사이에 교묘하게 위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서구의 시각으로부터 크게 이탈해 있지는 않다. 우리들은 "로빈 훗", "아이반호우"를 비롯해 서구의 기사 문학 혹은 기사도 문학, 그리고 십자군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이야기들을 통해 알게 모르게 서구적 시각에 깊이 침윤당해 있다. 그런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 김태권 같은 이는 "십자군 이야기1-충격과 공포"란 책을 내기도 했으며, 최근 이라크 전쟁과 맞물려 이런 류의 시각 교정 도서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오랫동안 국제부 기자로 일했고, 파리에 정착한 레바논 출신의 아랍인
"아민 말루프"는 지난 93년 콩쿠르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이상의 사실로 미뤄 보더라도 이 책을 엄밀한 역사서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이 그간의 역사서들보다 나은 점이 최소한 두 가지나 된다. 우선, 이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이(물론 전문적이라면 더 좋겠지만)라도 읽기 쉬울 만한 난이도를 가진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실증적인 역사서가 갖지 못하는 당시 혹은 현재의 아랍인들이 가질 만한 정서를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종종 역사서가 통계나 수치 혹은 공공 제도의 변천사 등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당시를 살았던 소위
"대중정서 내지는 민중정서"가 묻혀 버리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역사책에 경제발전 수치만 제시된다면 전두환 집권기의 제5공화국은 나름대로 살기 좋은 시절이란 오해도 받을 수 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당시를 살았던 지식인의 이야기들을 중간중간에 삽입하고, 다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서 역사가 과거와의 대화라는 오랜 명제를 부지불식간에 떠올리게 한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은 모두 6부 14장의 구성으로 십자군 최초의 원정으로부터 시작해 누르알딘(누레딘), 살라흐 알딘(살라딘) 그리고 칼라운과 칼릴로 이어지는 기독교도 프랑크인들과 무슬림들과의 성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은 1096년 서구 기독교 세력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1291년 이들이 점거하고 있던 지역을 무슬림 세력이 최종적으로 탈환하는 것으로 종료된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 세력과 중동 무슬림 세력간 분쟁의 역사는 천년의 역사를 넘기며 현재에까지 이어진다.

물론 그 시작점을 투르 프와티에 전투까지 거슬러 오를 수도 있지만,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은 십자군 전쟁이었다. 십자군 전쟁과 관련해 가장 최근에 제작된
"킹덤 오브 헤븐"은 과거에 제작된 영화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무슬림과 살라딘에 대해 호의적인 관점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매우 객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이 책을 읽은 탓인지 책 속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도 우연치 않게 영화 속의 두 주인공 발리앙과 살라딘의 이야기이다. 물론 영화와 역사는 다르지만, 부분적으로 역사와 일치하는 대목들도 있고, 영화가 좀더 그럴 듯하게 그려낸 부분도 있다. 영화에서는 나병에 걸린 예루살렘의 왕이 스물 네 살의 나이로 죽고, 왕위가 바로 기 드뤼지냥에게 넘어간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왕의 조카인 6살 짜리 보두앵 5세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1년 뒤인 1186년 보두앵5세마저 죽자 보두앵 5세의 어머니가 기 드뤼지냥과 결혼하면서 살라딘과 예루살렘 사이의 휴전이 깨지게 된다. 이 부분부터 르노 드 샤티용의 부추김을 받은 기 드뤼지냥이 십자군을 이끌고 살라딘을 공격하다 무참하게 패하는 장면은 영화와 역사가 일치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보다 살라딘은 더욱 너그러운 인물이었고, 발리앙 역시 매우 훌륭한 인물이었던 듯 싶다.

어쨌든 저자 아민 말루프는 아랍인의 눈으로 보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줘야 할 부분은 이때 아랍인의 시각이란 것이 민족주의적인 관점, 혹은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십자군전쟁을 그려내고 있진 않다. 그는 서구인들의 시각보다 훨씬 더 균형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아민 말루프는 아랍 진영은 십자군 전쟁을 치르기 이전부터 자체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크인들의 침공은 이런 결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게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 결함들은 첫째. 아랍의 문화적 부흥을 이끌어갈 만한 성장 동력의 결여, 둘째. 안정적이고 인정받을 수 있는 정치 제도
(백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측면에서도)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서구인들이 오랫동안 비웃듯 말해온 동방 전제군주정의 비밀스럽고, 때론 잔혹하기까지 한 권력 교체와 권력 전환기의 혼란과 분열 말이다. 

거기에 더해져 침략자이자 정복자로 아랍에 들이닥친 프랑크인들은 상대적으로 아랍의 발달된 문화와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십자군 전쟁의 최종적인 승자였던 아랍은 프랑크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 서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려들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비록 일본에 대해 최종적인 승리는 거두었으나 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 그들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려들지 않았던 역사와 흡사하다. 

십자군 전쟁이 서유럽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진정한 혁명을 일으키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동방에게 이 성전은 오랜 쇠락과 암흑의 시기로 내몰리는 계기였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던 무슬림들은 몸을 도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겁을 먹었고, 방어적이었으며, 너그럽지 못했고, 메말라 갔다. 다른 세계가 발전함에 따라 이 태도는 점점 심해졌고 그 결과 그들은 변방으로 밀려났음을 느끼게 되었다. 무슬림들에게 발전이란 다른 세상 얘기였다. 근대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문 365-366쪽>

침상에서 나로 하여금 책을 덮고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던 대목이다.

* 이 책의 주석들은 모두 책 뒤로 빠져 있다. 읽는 흐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편집자의 배려가 잘 이해되지만, 중간의 몇몇 부분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낯익지 않은 아랍의 관제와 지위 등은 "괄호( )"를 통해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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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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