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 후지메 유키 지음 | 김경자 | 윤경원 옮김 | 삼인(2004)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싼 논쟁과 성의 역사학

- 새로운 혹은 해묵은 논쟁의 관점들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는 부제가 충분히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여성의 신체를 국가가 어떻게 관리(통제)하여 왔는가? 그것은 근대의 틀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통제되고, 억압되어 왔는가를 마르크스적인 관점과 페미니즘의 관점을 이용해 연구고찰한 결과물이다.


후지메 유키는 근대공창제는 군대, 군사주의, 근대국민국가 체제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제도는 군대 위안과 성병 관리를 기축으로 한 국가관리 체계이며, 근대국가 건설, 특히 강력한 군대 건설의 이익과 결합해 탄생한다. 성병 검진을 통해 질병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 여성을 창부로 등록시킨 이 제도의 목적은 성병에서 남성, 특히 장병을 보호하는 것이다. 캐서린H.S.문의 "동맹 속의 섹스"에 드러난 사례(1965년)를 요약해보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8군 병사들의 약 84%는 성매매를 경험했으며, 성매매의 주요원인은 동료의 압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은 성매매와 성병을 관리하는 것은 전쟁과 전쟁 준비에 저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관리할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들의 입장에서 살폈을 때 이런 제도는 거리의 여성들에 대한 시민권의 전적인 폐지를 국가가 공인하는 최초의 정책을 의미했다. 전쟁 기간 동안 병사들이 걸리는 가장 많은 질병 1위는 성병이고, 2위가 감기였다고 한다." 근대국민국가의 거의 모든 성매매 관련 법안은 남성고객과 성매매 여성의 처벌에 차등을 두었고, 알선업자와 포주는 체포되지도 않는 법률이었다.


또한 저자는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본국과 식민지에 공창제를 도입하는 과정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산업혁명의 유럽 대륙 및 미국으로의 파급, 선진자본주의 각국에 의한 식민지 분할, 상품경제의 침투에 따른 사회변동 등을 배경으로 전통 사회가 해체되고 도시와 해외로 미증유의 인구이동이 발생하고 무산계급 여성들에게 부단히 성매매 여성화의 압력이 가해지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결국 부르주아 사회가 사회제도로서 성매매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버나드 쇼는 성매매를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도록 요구하면서 "실제로 도덕성의 근저에는 경제문제가 있다. 성매매는 여성의 타락이나 남성의 방종이 아니라 여성들의 저임금, 과소평가, 과중 노동으로 야기되는 것이다. 여성들의 비참한 상황이 아주 가난한 여성들에게 이슬처럼 덧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성매매에 매달리도록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 성매매 여성이 인신매매 등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선택으로서의 성매매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후지메 유키는 성매매금지운동에 대해 여성주의 진영이 "여성 전체가 억압당하면서도 특히 노동자계급 여성들이 성매매 여성화되는 강한 압력 속에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성매매 여성의 오명을 쓴 동성(同性)이며 함께 연대해서 싸워야 할 동등한 자매"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폐창운동의 헤게모니를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이 잡고, 공창제(성매매) 폐지로 나아가는 것은 "해방을 지향한 것이 억압을 입법화"하는 것이며, "당연히 성매매 여성들과 연대해야 할 이들이 성매매 여성을 폭력에 강제된 희생자, 저능이기 때문에 타락한 자로 보고 구제, 교화, 배척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을 경계하도록 요구한다. 성매매 여성을 피해여성으로만 규정하는 것을 "계급을 뛰어넘어 자매로 이어줄 끈"을 끊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관점은 "우리는 왜 성매매를 반대해야 하는가"를 쓴 원미혜 선생의 "나는 성을 팔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 제기되는 '왜 굳이 성을 파는가?'라는 질문과 성을 팔고 있는 세계에서의 '왜 팔면 안되는가?'의 반문 사이에서 만들어진 좁고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는 듯했다. 어느 세계에서도 시원스런 답을 찾을 수 없었다"며 반복되고 있다.


근대일본의 사례를 중심으로 구미국가들의 사례들과 비교하며 성과 생식의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여러가지 점에서 논쟁적일 수 있다. 첫째는 그것이 일본의 사례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논쟁적이다.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는 2005년 1월 5일. 올해 들어 첫 수요집회가 열렸다는 사실은 아직도 역사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한일 양국의 문제가 어째서 현재진행형의 논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차원에서 저자인 후지메 유키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1990년대에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 전개한 저의를 요구하는 운동은, 일본의 연구자들에게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관점을 결여한 '일본 여성사'가 얼마나 일면적이며 오만한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져있는가 하는 점을 충격적으로 깨닫게 해주었다"고 고백한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본군 '노예'제가, 1930년대에 시작된 전쟁에서 돌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근대의 군국주의.식민지주의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전개된 국가폭력 제도, 즉 공창제가 가장 흉폭한 단계로 발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고 말한다.


둘째로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은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계급적인 관점으로,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의 몸과 근대국민국가 사이의 관계를 공창제, 낙태죄 체제, 산아조절 문제를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계급적 관점과 여성주의적 관점을 두루 이용하고 있는데,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은 주로 계급적 관점을 동원해 여성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는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이다. 고백하건대 나자신은 비록 여성주의적 자세 일부에 대해 비판적이긴 하지만, 후지메 유키가 다루고 있는 문제들 - 공창제, 낙태를 포함한 산아조절 문제 등 - 은 계급적 관점만으로는 해석하기 힘든, 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란 지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지메 유키의 비판에 대해 대체로 동감하면서도 방법론적으로만 여성주의적 관점을 차용한 것은 아닌지, 그 지향점을 지나치게 계급적 관점에만 치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여성주의적 관점은 방법론적인 부분에서만 차용하고, 그 지향점에선 소외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부분은 논쟁으로 남을 만하다고 느꼈다.


이와 같은 부분은 제1차 페미니즘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구미 사회에서 백인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교육의 확대, 취업기회의 확대, 민법 개정,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 같은 여성의 시민적 권리를 추구하며 국제적으로 폭넓게 전개"된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지만, "제1차 페미니즘에서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도전한 것은 소수파"였으며, "여성을 존경할 만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으로 이원화한 점, 근본적으로 이성애 중심이었음을 지적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는데, 이런 부분은 긍정할 수 있었다. 제2차 페미니즘은 성과 생식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제안했는데, 페미니즘이 드디어 권력의 문제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 제2차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성과 생식의 문제를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 정치학의 문제로 삼아 "개인적인 것은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이라는 슬로건 아래 그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던 남녀관계, 성애, 출산, 육아, 산아조절 등의 문제에 정치성을 부여한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였다. 제2차 페미니즘은 선진자본주의의 국가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중산층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비백인 여성과 제3세계 여성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2차 페미니즘은 백인중산층의 시야와 동기에 규정되기 쉬운 점을 들어  "제국의 페미니즘"으로 비판한다.


흑인해방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싸운 여성들은 여성 억압이 민족(인종) 억압과 계급 지배와 일체를 이루며 여성 사이에는 계급과 인종(민족)에 근거한 차이와 권력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지배집단의 여성(비록, 그 자신이 페미니스트라 할지라도)이 획득한 것은 피지배집단 여성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비판이다.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이 어려운 까닭은 이해가 쉽다, 어렵다는 차원의 어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최근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우리 사회의 여러 층위들이 성매매특별법과 성매매여성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의들, 논쟁들, 시위를 어느 한 가지 관점에서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성매매특별법 시행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언어가 사람을 규정한다는 명제가 일상사에서 이보다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드물다고 생각될만큼 성을 사고 파는 행위를 규정하는 단어들은 "윤락, 매춘, 매매춘, 성매매, 성 노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과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까지 접근해 들어가면 과연 성을 사고 팔 수 있는 것인가?란 질문으로부터, 성을 사고 파는 일은 올바른가? 이것을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와 같은 질문들, 성매매에서의 자발성이란 인정할 수 있는가? 와 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심각한 선택과 판단을 내리도록 강요한다. 마치 실제 성매매가 일어나는 집창촌의 좁디 좁은 골목길과 미로처럼 얽힌 방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름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현재까지 성매매특별법과 성매매 혹은 성노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

는데, 아직까지도 그 미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이 책은 나에게 해답을 선사하는 책이 아니라 보다 많은 고민 속에 처박아 버린 꼴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느낀 한 가지는 저자 "후지메 유키"라면 현재 우리 사회의 성매매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 어떤 선입견도 갖지 말고,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 그들 스스로가 그들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해 소외시키고, 타자화하지 말고, 그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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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김경연  한정숙 옮김 | 까치글방(1999)




천년제국 : 비잔티움 324-1453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역사 공부를 즐기는 편이다. 그간 역사를 공부하면서 내가 깨우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제국은 스스로의 힘을 파악하지 못할 때 가장 강성하고, 경계를 세우는 순간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종말론적인 기독교에서는 종종 천년왕국의 도래를, 불교의 미륵신앙처럼 이야기한다. "천년왕국""신약성서"의 '요한의 묵시록' 제20장에 적힌 문장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하여 1,000년간 통치한 뒤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해석이다. 신앙으로서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 '천년'이란 시간에 주목해보고 싶은데, 이 책 "비잔티움 제국사"엔 굳이 324년으로부터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 이르는 시간을 명시해두고 있다. 이 때 내가 놀라고, 의문을 품은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비잔티움 제국이 무려 1,129년간 존속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흔히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의 건국을 기점으로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330년 5월 11일을 기점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어째서 324년으로 명시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문을 푸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즉,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년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 어째서 저자는 324년을 기점으로 잡고 있으며 그것이 유의미한 것이라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이 의도하는 목적 - 즉, 비잔티움 제국을 이해하는 것 - 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고백할 것은 올해 목표로 세웠던 "서양중세사 이해"를 위한 나의 독서 계획에 따라 구한 책이긴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중도에 몇 번이고 덮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책은 내게 어려웠다. 사실 이 책의 번역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명사 "비잔티움"은 오랫동안 그저 영어의 형용사적 표현인 "비잔틴"이었다. 여기엔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비잔티움 제국이 우리에겐 '잊혀진 제국'이자, 별관련이 없는 제국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알고 있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그저 비잔틴 미술의 몇 가지 양식인 이콘(icon) 성화들, 모자이크 양식이나 독특한 문양, 성상숭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서로마교회(가톨릭)와의 논쟁, 동아시아적인 정치술로 폄하되는 매수와 모략, 암살의 정치, 이슬람 제국의 침공을 견뎌내게 했다고 전하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 고구려 철갑기병을 연상케 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주축이 되었던 중기병 카타플락타이(Cataphract), 콘스탄티노플의 일곱겹 성벽과 이를 둘러싸고 이슬람제국의 메메드 2세와 벌였던 사투 등등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서로 연결되어 이해되었던 것이 아니라 각각 별개의 것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고,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3부작 중 하나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그나마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조금 덜어주었을 뿐이다.

어떤 한 나라, 그것도 천년의 역사를 가진 제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지만, 나에겐 비잔티움 제국의 일곱 겹 성문을 열어젖히기에 아는 게 너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이 태부족하단 것도 비잔티움 제국에 다가서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령 비잔틴 미술이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은 미셀 카플란의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79 "비잔틴 제국 : 동방의 새로운 로마" 와 앞서 말한 시오노 나나미의 책, 그리고 예전에 <한국일보, 타임라이프북스>에서 펴냈던 것을 가람기획에서 재출간하고 있는 "타임라이프세계사" 시리즈 정도가 '비잔틴 미술'이 아닌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읽은 것들도 저 정도다. 그외에는 서양중세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일부 언급하고 있는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이 읽기 쉬울 리 없다. 그나마 이 책은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Georg Ostrogorsky)"가 일반 대중들을 위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이한 것이라고 하니 숨이 턱턱 막혀 올 밖에...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이 책은 소중하다.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나?

내가 던졌던 첫 번째 질문 "비잔티움 제국은 어떻게 천 년간 유지될 수 있었나?"에 대해 저자인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비잔티움 발전의 주된 원인은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다. 이 세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외한다면 비잔티움의 본질은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구조물은 헬레니즘 문화와 기독교라는 종교 그리고 로마의 국가형태가 종합되면서 비로소 성립했다. <본문 9쪽>


석학만이 내릴 수 있는 명쾌한 해석이면서, 이 책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학교 세계사 시간에 나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서양 중세가 시작되고, 동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서양 근대가 시작된다고 배웠다. 어찌되었든 오스트로고르스키식 표현을 빌자면 서양이란 역사적 구조물은 로마제국의 국가제도와 기독교 정신, 그리고 동양으로부터 전해져 온 문명에 의한 것이며 이 중 어느 하나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오랫동안 서유럽인들에 의해 무시당해왔고, 이런 그들의 경향은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런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서유럽인들의 폄하는 역자 후기에도 있지만 "로마 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영국의 부유한 지주계급 출신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로마사 집필에 매진한 역사가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영국과 프랑스가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시대였고,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부르조아지들이 성장하고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가 "로마제국 쇠망사" 전 6권을 발간하던 해에 엠마누엘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발간했고, 루이16세는 삼부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그는 그런 시기의 역사가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가들은 합리주의에 기초를 둔 역사연구를 통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도덕성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불변하는 보편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믿었고, 인간의 진보를 믿었다. 그에 따라 과거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미신, 환상, 종교적 신앙 등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맥락상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게다가 에드워드 기번은 16세 때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했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퇴교당한 경험도 있었다. 물론 그가 계몽주의적 입장에 서서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술한 것을 그런 사적인 이유에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다신교적인 보편성에 기대고 있던 로마 제국의 기풍이 기독교화로 말미암아 훼손된 것으로 보았고, 그로인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에 이른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기독교적 믿음이 제국 형성의 기초가 되었던 동로마 제국에 대한 폄하로 이어졌고, 이런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한 국가의 몰락,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던 대제국의 멸망의 원인을 어디에서든 찾아내야 하는 것은 옳을 것이고, 거기엔 이들 역사가들의 해석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을 기독교화에서만 찾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기번은 동로마 제국 자체를 서양 중세의 암흑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듯 보인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서양 중세를 계몽주의 시대 역사가들처럼 암흑기로 보지도 않을 뿐더러 근대의 중요한 맹아들을 품고 있던 새로운 시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동로마인들은 스스로를 '비잔티움적인 사람'들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런 말 자체를 알지 못했다. '비잔틴'이란 말 자체가 후세인들이 그들을 규정하며 붙인 말이었을 뿐, 그들 스스로는 로마인으로 생각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안정을 찾은 과거의 게르마니아 일대를 차지한 서유럽인들은 스스로를 로마의 후예로 생각하고자 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힘의 상징인 로마군단의 독수히 휘장을 제국의 상징으로 삼았고,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미국 모두 국가 상징을 독수리로 삼았다. 동유럽의 작은 국가인 "루마니아"는 국명 자체가 "Rumania"다. 그네들은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혈통 자체가 로마인들과의 혼혈로 이루어졌고, 라틴인에 가까운 언어와 형질을 지녔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로마제국이 서구 문명에 끼친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비잔티움 사람들이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고, 실제 제국 말엽에 이르렀을 때는 과거의 로마제국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되었음에도 그들은 멸망하던 그 순간까지 로마인으로 살다 죽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천년을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저자의 표현대로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저자가 앞서 강조한 것과 다른 원인 몇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 물론 저자 역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인데,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시간적으로 이슬람제국과 서유럽제국의 세력 판도가 최전성기를 맞이하기 전이었다는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이들 두 세력의 완충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다른 한 가지는 비잔티움 제국의 탁월한 관료제도인데, 익히 잘 알려진대로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마치 로마제국의 말기 황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종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안위 자체가 지켜진데는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웠을 테지만 관료제도 자체가 튼실했던 탓이다. 비슷한 시기의 서유럽 군대의 엘리트 계급이랄 수 있는 기사들이 사실상 문맹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동로마의 군대의 주축을 이룬 귀족들은 최고의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비잔티움 제국이 오랫동안 독점해오다시피 한 동방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경제적 성공도 크다. 동로마는 로마제국의 라티푼디움(latifundium)체제 아래에서 희생당한 소규모 농민들들의 예속 상황을 완화시키고 이들을 군사력의 주축으로 삼는 건실한 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부한 만큼 정복 전쟁에 나설 수는 없었던 근본적인 요인은 주변 국가들의 강성함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토지와 지역에 기반한 농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자기 지역을 떠나 정복전쟁에 나서는 일 자체를 꺼려한 탓도 크다 할 것이다.


324-1453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 비잔티움 제국의 시작을 330년 5월 11일로 잡지 않고, 324년으로 잡은 이유는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렇다면 324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기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부 황제 리키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제국을 재통일했다. 이전까지 비잔티움은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에 불과했다. 나는 저자 오스트로고르스키가 330년을 기점으로 하지 않고, 324년을 기점으로 잡은 데에는 다음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로마의 진정한 계승자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오고, 유스티니아누스 때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이클레이오스 황제기에 이르러 강력한 중앙 집권 조직과 기독교, 동방적 색채를 두루 갖춘 전제국가가 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빠져 있거나 종종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 있다. 우리는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혹은 "고구려사 왜곡"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도대체 동북공정은 무엇이고, 그로인한 고구려사 왜곡은 무엇인가? 중국의 문화권 안에 있던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에겐 "연호(年號)"란 개념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건원(建元)26년이란 말이 역사서에 실려 있다면 이는 B.C.115년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 연호라는 것은 대개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제 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이다. 이전까지는 각 지방의 제후들도 각자의 재위에 따라 연도를 기록했는데 이 시기로부터 중국은 통일된 연호를 사용하게 되어 기년(紀年)도 통일되었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측은 자신들에게 신속된 나라에게 복종의 의미로 자신들의 이런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지요. 고구려에게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고 강요하다가 이를 거부당하자 침략한 역사가 있다.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 태종 때의 일인 것 같다.)이를 “정삭(正朔)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연호가 붙은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런 고구려도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중국 화친책을 사용하면서 중국의 연호를 받아 사용하게 되는데, 중국은 향후 남북한의 통일 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쳐서 문제가 된 것이죠. 간혹 역사기행을 다니다보면 이름있는 옛 선인들의 비석이나 고승들의 부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네들의 비석이나 부도에 새겨진 연호를 확인해보면 대개 '유당(有唐) 신라(新羅)'나 '유명(有明)조선(朝鮮)'이란 글귀를 볼 수 있다. 이는 '당나라에 속한' 혹은 '명나라에 속한' 이란 뜻이 된다. 그와 상관없이 우리들의 민족 감정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에 불과하다는 중국측의 역사 서술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이이화 선생이 신라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규정하지 않고, 고려를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로 규정하는 것도 어느 정도 그런 뜻이 숨겨져 있으리라.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식 표기인 "Korea"를 만든 고려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의식이 강했다. 그런 까닭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여진족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서경(지금의 평양)을 개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가 실제로 북방 정벌에 나선 일은 적었다 하더라도 그네들의 국명에 나타나듯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은 매우 중요한 국정 지표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신은 다들 잘 아는 것처럼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 개국에 앞장 섰던 삼봉 정도전의 요동 정벌로 이어졌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역시 우리의 고려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을 로마의 계승자, 혹은 로마 그 자체로 여겼고, 이는 비잔티움 제국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비잔티움 제국이 사방의 적들에게 포위당해 국경 경비만으로도 막대한 군비를 지불하면서 끊임없이 제국의 외연을 확장하려 들었던 이유 역시 거기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이런 노력이 훗날 중세 서유럽에 로마의 자산을 전수해줄 수 있었던 토양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의 저자 오스트로고르스키가 324년을 기점으로 이 책을 출발시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527-565)는 실제로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대원정군을 이끌고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에스파니아를 공격했고, 일부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 로마 제국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했다 하더라도 세상은 변했고, 비잔티움 제국은 옛 로마의 영화를 회복할 만한 사회경제적 토대가 부족했다. 제국 황제들의 정복 사업은 실패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화는 시들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의 옛 영토엔 새로운 주인들이 차지했고, 비잔티움 제국 자신들도 라틴 문화 보다는 그리스 문화에 젖어들며 급격히 그리스화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8세기 무렵부터는 동지중해 지역에 새로운 패자가 등장하게 되니 이들이 이슬람 세력이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수장이었던 카를(샤를마뉴) 대제에 의한 비잔티움 제국의 이념적 권위 상실은 심대한 타격이 되었다. 카를 대제는 바이에른, 작센, 롬바르드 왕국 등을 차지하며 기독교 세계 최고의 강국이자 왕이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실패한 것을 성취한 카를 대제에게 로마 교회의 신망이 쏠렸고 그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얻어냈다. 우리는 로마교회의 분리가 단순히 성상숭배에 따른 견해 차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해결되고, 성상숭배에 대한 견해차도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로마 교회는 더이상 과거의 "로마" 교회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가 되었다. 그들은 로마를 단일한 제국이라 생각했으므로 카를 대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부인한 것이 된다. 당시 유럽의 정신적 세계 질서는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종종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지켜낸 것을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만의 공로로 생각하기 쉽다. 비잔티움 제국은 오랜 시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진출에 대한 교두보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그 와중에 이슬람 왕국의 속주만도 못한 지경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큰 의의는 역자 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 "고전고대의 문화를 보존하여 이를 서유럽에 전해준 것과 정교의 정신적 유산을 슬라브 세계에 남겨준 것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우리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무엇이며, 유럽의 시작 - 오늘날 아시아를 비롯해 전세계를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유럽 문명권"으로 보이도록 묶어버린 유럽의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뒤이어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역사는 더이상 역사가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종종 과학이 그러했듯 그것을 저술하는 이들에 의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분명 비잔티움 제국이 오늘날의 서유럽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잊혀진 것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계가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고구려사 문제로 시끄럽지만 과거 신라지역 출신의 정치 권력과 남북한이 냉전으로 인해 분단된 결과 오늘날의 북한 지역인 고구려 역사에 대해 무관심했거나 애써 축소해왔던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현대의 역사에서 역사가의 몫을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들라크루아, 콘스탄티노플 함락

같은 유럽이라 할지라도 동방에 가까왔던 비잔티움의 역사를 축소함으로써 유럽의 사가들은 빛이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축소한 것은 아닌가. 나는 그런 의문을 품어 본다. 물론 이 책이 유럽중심주의 역사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을 담고 있지 않으며, 나 자신도 앞으로는 아시아 중심주의 역사관으로 무장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비잔티움 제국사를 읽으며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의 일부를 교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보다 전지구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 끝으로 이 책의 역자와 출판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 본다. 왜냐하면...
어느 출판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외국어를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우리 말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면 그 책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떠올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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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2001)


『계몽의 변증법』은 인간을 계몽되지 못한 신화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한 ‘이성(理性)의 힘이 왜 오늘날 도리어 야만상태로 인류를 몰아가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정리한 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M.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어렵다는 평을 듣기는 하지만, 한 때 유행했던 포스트모던한 난해함과는 다른 성격의 어려움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읽는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첫째는 T. W. 아도르노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과 싸워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책을 읽는 것 못지않게 문장 하나를 읽은 뒤 요구되는 사유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어려움은 첨단 유행을 따지는 우리 사회의 빈약한 지적 풍토(트렌드)와 싸우고, 두 번째는 한 차례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차분하게 띄엄띄엄 되새김질하는 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전으로 인정받는 대개의 책들이 그러하듯 『계몽의 변증법』 역시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읽기에 따라 사전지식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다. 내 나름대로의 독서체험에 따르면 신화학에 대한 공부가 사전에 어느 정도 있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이 쓰이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종종 잊기 쉬운 『계몽의 변증법』 읽기의 한 방법이다. 오늘날 아도르노의 생각 혹은 아도르노에 대한 생각이란 점에서 후학들의 평가는 상이한 편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난 2년간 이 책을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읽어야 하는 경험을 했다. 한 번은 신화학적인 입장에서, 다른 한 번은 문화연구(cultural study)적 입장에서, 다시 한 번은 문화경제(cultural economy)적 입장에서(이 책의 2장에 수록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산업에 대한 견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읽었다.

 

아도르노에 대한 평가의 변화 역시 우리 사회의 빈약한 지적 풍토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이는 이제 시대의 조류로부터 멀어졌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 반대로 그의 중요성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확실한 건 이렇든 저렇든 그는 여전히 중요한 이론가이며 특히 문화를 학문적 틀 속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결절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1947년에 쓰인 이 저작이 현재까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 이 한 권의 책을 두고도 후대의 학자들 -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 아도르노와 쇤베르크』(문학과지성사, 2002년), 권용선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2003년), 이순예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 계몽의 변증법에서 미학이론까지 아도르노 새롭게 읽기』(풀빛, 2005년) 등 - 은 계속해서 새로운 연구서들을 펴내고 있으리라. 흔히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나치에 의한 지배를 가능하게 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펴낸 책이라고들 하는데, 그것이 옳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책의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하게 지적하는 부분 중 상당수는 그들이 미국 망명 생활 중 경험한, 자본주의 체제 하의 대중과 문화산업에 의한 대중문화에 기인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을 나치즘 못지않게 위험한 대중선동, 세뇌 장치로 인식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1920~1940년대 러시아 혁명 이후 출현한 소련의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등 비이성적인 전체주의 세력이 유럽 전역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념적 좌우를 막론한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전체주의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고,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나 좌파적 노동운동은 비이성적 세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노동자계급(대중)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하였고, 원자화된 대중사회는 결국 전체주의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문화라는 용어는 마치 대중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문화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위험 때문에, 그것을 대신하는 용어로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들의 문화 연구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에 걸쳐 주로 이루어졌는데 오락산업의 융성, 매스미디어의 급속한 발전,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문화조작, 미국에서의 영화산업과 음반 산업의 급속한 발전 등이 당시 문화적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스어로 포만, 교만, 멸망을 의미하는 말로 코로스(kopos), 휘브리스(hybris), 아데(ate)란 말이 있다. 이 세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코로스는 ‘죄가 많다', 휘브리스는 ’난폭하다', 아데는 ‘파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할 때 저지르게 되는 죄가 휘브리스, 즉 ‘오만'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신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휘브리스를 범하는 자는 항상 가혹한 벌을 받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된다. 개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인식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해 완전히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이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주체(主體)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휘브리스(hybris)인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자유 의지에 의해 움직였지만 결국은 신들이 정한 운명에 따른 결과가 되어 버렸다. 성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따른다고 지나치게 자신하고 있을 때, 신들이 애써 경고한 메시지를 거부할 때, 신들에 의한 운명은 역습을 가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만물의 근원은 신(神)에 의한 것이며, 신들이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애니미즘이 사물을 정령화 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한다”고 말한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계몽의 목표를 추구해왔다. 노아의 홍수라는 자연 혹은 신의 징벌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간은 바벨탑을 세우려 했고,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죽음의 신 타르타로스를 쇠사슬로 묶었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혜택을 망각하고, 끊임없이 숲을 개간하고, 자연으로부터 얻은 사랑(자원과 기술)을 망각하고 욕보였다. 지식의 목표는 ‘방법’,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고 좀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으로 변질되었다.

 

신성이 깃든 자연으로부터 우리는 아주 멀리, 아주 높이 날아올랐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지혜를 얻고, 무리를 지어 기술을 전수했으나 이것은 자연과 더불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사회를 일구고, 자연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계몽의 합리성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인간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부정하는 탈신화화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어쩌면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 신화는 모든 가르침의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상력에 반대하는 계몽의 원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가 되었고, 하늘 아래 더 이상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었던 인간은 자신들의 이성을 통해 이미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쳤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으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화한다.(신화의 세계, 자연, 사물을 생명을 지닌 대상으로 취급한다면 계몽은 자연을 죽은 것으로 취급하여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 대한다.) 나는 아도르노의 이런 문제의식이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entropy)』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지리와의 합일을 도모하여 여기서 얻는 만족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적인 해방감을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400여 년 전 베이컨과 데카르트, 뉴턴에 의해 구축된 ‘객관적 지식이 있으면 인간은 자연계를 지배할 수 있다.’세계관(패러다임)을 통해 산업혁명이 가능했고, 끊임없는 성장과  한계 없는 진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리프킨은 문명비판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할 것을 제의한다.

 

“세상은 갈수록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어서 여기저기서 끝없는 수선과 짜깁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몰아 붙여 탓해 보아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정치권의 리더나 누구 대단한 사상가라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붕괴로 몰고 가는 냉혹한 기운이 세계를 잠식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바로 우리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가한 이성에 대한 비판은, 신화에 대한 계몽이 그 자체로 신화가 되어버린 상황(파시즘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계몽에 대한 재계몽의 기획으로서의 비판(이론)이다. 비록 그가 제시한 사유 방식은 어둡기 그지없으나 우리가 그 길을 외면하는 것은 빛(enlightenment)을 보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아도르노,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사용하기 시작한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앞서 말했듯 대중문화의 생산 과정을 지칭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이전 세대의 연구자들은 문화를, 산업과는 별개의 혹은 산업과는 완전히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고도의 도구적 합리성과 관료제화한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된 물질적 기반을 그들 나름대로 분석하고, 이해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화할 수 없는 것까지 시장 기능에 의해 사물화(reification)한다. 사용가치(소비자가 상품에서 얻는 효율성)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변형하고, 왜곡시키는 데 기여한다. 당시 출현하기 시작한 라디오와 인쇄매체 등의 매스 미디어와 광고의 결합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태(lifestyle)을 만들어냈고, 결국 자본주의 초기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율성과 주체성은 상실되어 버렸거나 자본주의적(에 적합한) 주체성으로 변질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주장하는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된 문화의 상품화, 예술이 대량 상품화됨으로써 예술의 탈예술화, 즉 예술만의 고유한 자율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주장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이나 『예술의 비인간화』 등에서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하의 문화산업은 ‘교환될 수 있는’ 상품으로서, 예술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완전히 대체해 버렸다. 문화산업은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에 따라 항상 동일한 것을 대량으로 제공한다. 그것은 계획, 통제되고, 예견 가능하며 계산 가능한 상품들만을 생산한다.

 

두 사람은 결국 예술이 문화산업의 메커니즘에 구속당함으로써 관리되는 사회의 총체적인 물화에 빠져든다고 보았다. 문화산업의 메커니즘 속에서 대량생산된 작품 아닌 열등한 상품들은 이전의 고유한 진정성을 지닌 예술 작품들을 모방함(이 과정에서 대량생산에 적합하도록 규격화)으로써 사회적 위계질서에 대한 복종을 조장하고, 이를 은폐한다(부자도, 빈민도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는다). 문화산업은 대중들을 사회의 총체성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기만하는 술책이며,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도록 길들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이 현대의 대중문화가 지닌 도구적 합리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자본주의의 허위의식을 주입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게 만든다고 본 비판엔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비판이론과 자율예술은 대중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이들을 결집시킬 수도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논리는 반대중적 엘리트주의란 비판을 받게 된다. 이들이 바라보는 대중은 근본적으로 조작의 대상일 뿐이지 혁명을 추동할 수 있는 동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를 살다가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발터 벤야민에게서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발견하게 된다. 벤야민은 아도르노가 주목했던 문화산업에 의해 대량 생산된 복제품에 의해 상실된 진정성(authenticity), 아우라(aura)의 상실이 도리어 문화적 민주주의를 부추기는 기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과연 문화산업을 통해 생산된 산출물에는 진정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가 예술작품으로부터 느낀다고 하는 진정성 역시 과거로부터 주어진 것(교육받은 것)이 아닌가? 대중문화에는 자율적인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가? 실제로 도시화와 대중문화로 인해 도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의 지배질서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창조되지 않았는가(E.P.톰슨)?

 

대중은 단순히 문화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며 그들 나름의 문화적 해독능력을 갖추고 있고, 우리들의 해독능력 역시 증가하고 있다. 즉, 창과 방패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는 아직까지는 아도르노의 비관과 벤야민의 낙관 사이를 오가며 의지의 낙관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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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1년 365일이 여성의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99주년 세계여성의 날과 KTX 승무원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 99주년입니다. 직원들이 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서 우리 국장님에게 뜬금없이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성인데도 잘 모르시더군요. 제가 “오늘은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했더니 함께 식사하시던 다른 분이 “요즘은 365일이 모두 여성의 날인데, 별도로 여성의 날이 필요하냐?”고 하더군요. 연세 많은 분들이 요즘 대한민국 사회와 여성들을 보고 있노라면 1년 365일이 매일 여성의 날이란 표현이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일 수도 있단 생각은 저도 합니다.

2004년 9월에는 “성매매방지와 피해자 보호에 대한 법률과 성매매알선 처벌에 대한 법률”이 시행되었고, 지난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 규정 민법 781조 1항 및 778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성계의 50년 오랜 숙원이었던 호주제 폐지가 이루어졌던 같은 해 6월, 여성정책과 가족정책을 총괄 기획하는 정부부처로 여성가족부까지 출범하면서 우리 사회 여성의 지위가 한층 더 강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대중문화가 표상하는 여성의 이미지도 이전과 달리 훨씬 더 건강해지고 당당해졌습니다. 연상녀와 연하남 커플은 물론, 이혼녀에 대한 표현도 어느 때 보다 긍정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요즘 같으면 365일 여성의 날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올해로 99주년을 맞은 세계여성의 날은 지금은 세계 최고의 산업도시이자 문화적으로도 첨단을 달린다는 뉴욕의 섬유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행사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교과서나 다른 책들을 통해 방적기 앞에 서 있는 작은 소녀의 사진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 사진은 루이스 W. 하인(Lewis Wickes Hine)이 1908년 미국의 공장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 속의 소녀는 과연 몇 살이었을까요? 그녀의 어머니는 어째서 이렇게 어린 딸을 공장에 보냈을까요?




1870년대 이후 서구 자본주의는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변화 양상은 마치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의 열풍과 다르면서도 흡사한 일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도시와 농촌간의 인구 비례가 역전되고, 임금 노동자들이 도시는 물론 농촌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은 당시의 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한 자본 축적, 생산의 집적이 대기업, 대자본에 집중되면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계급에게 압력이 가중되어 오늘날 우리가 중산층이라 부를 만한 부르주아지, 도시와 농촌의 중간층이 몰락하여 임금노동자로 전락한 결과였습니다. 1900년대 접어들어 미국의 노동자는 1,000만을 넘어서게 되는데, 이것은 30년 전의 수준과 비교해보면 세 배에 이르는 수치였습니다.

이런 현상 가운데 여성노동자도 함께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게 됩니다. 1908년 즈음에는 섬유산업 분야에서 남성노동자보다 여성노동자의 비율이 앞서는 역전 현상이 빚어졌습니다. 이 같은 일이 빚어진 까닭은 당시 섬유산업이 과당경쟁 상태에 놓이면서 남성노동자 보다 강도 높은 노동을 싼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여성노동자를 다수 고용한 결과였습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여성들을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가정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여성들은 비인간적인 작업장 속에서 하루 12시간 노동, 심지어는 16시간까지 일해야 했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에 종사해야 했습니다.(여성들 뿐만 아니라 아동노동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연령 제한조차 없었습니다. 1880년 당시 미국의 공장에는 18만2천 명의 어린이가 일했는데, 이 수치는 산업노동자 총수의 6.7%에 해당합니다. 1895년 독일의 조사에 따르면 14세 이하 어린이 21만 5천 명이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여성들은 장시간 노동과 가정에서 시달리면서 억압과 빈곤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족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다른 여성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남성노동자들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지기 시작했으나 여성들은 여전히 선거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이소선 여사가 계시다면, 미국에는 또 한 명, ‘어머니(Mother)’라 불리는 메리 존스(Mary Jones)가 있습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는 1910년 당시 80세였던 메리 존스가 80세의 나이로 밀워키의 한 양조공장에서 일하며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상스러운 욕을 퍼부어대는 야수 같은 십장들에게 둘러싸여 신발과 옷은 흠뻑 젖은 채 세척실에서 노예처럼 일하도록 운명지어진 …… 불쌍한 소녀들은 시큼한 맥주의 고약한 냄새를 맡으면서 45킬로그램에서 70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가는 술병 상자를 옮기는 일을 한다 ……. 류마티즘은 만성병 중 하나이고 으레 폐병이 뒤따른다……. 십장은 심지어 여자애들의 화장실 사용시간까지 통제한다……. 여자애들 대부분이 집도 없고 부모도 없이 …… 일주일에 3달러로 …… 의식주를 해결해야만 한다.

1908년 미국의 한 블라우스 공장에서 일하던 어린 여성노동자 146명이 불에 타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분노한 만 오천의 여성노동자들이 뉴욕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노동조건 개선과 여성참정권 인정 등을 내걸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이들은 “노조 결성의 자유를 달라!”, “여성에게 참정권을!”, “미성년자의 노동을 금지하라!”, “10시간 노동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무장한 군대와 경찰과 맞섰습니다. 이날의 투쟁은 전 의류노동자의 총파업으로 번졌고 마침내 1910년 ‘의류노동자연합’이라는 조직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10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 독일의 사회주의운동가 클라라 제트킨은 이들 여성노동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여성의 날’을 제정할 것을 제안하였고, 전세계 17개 국가에서 모인 100여 명의 여성들이 만장일치로 제정했습니다.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은 해마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슈들을 내걸고 시위를 계속해왔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물가안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1917년 이탈리아에서, 1918년 오스트리아에서, 그리고 1936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80만 명의 여성들이 모여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진보와 자유”를 외쳤습니다. 1974년에는 베트남에서, 1979년엔 칠레에서, 1981년엔 이란에서 5만 명의 여성들이 부르카 착용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고, 1988년엔 필리핀에서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여성들의 촛불 행렬이 있었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세계여성의 날’도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됩니다. 물론 그 사이 세상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977년 유네스코는 3월 8일을 세계여성의 날로 선포했고, 1985년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제3차 세계여성대회에서는 20세기말까지 국제사회와 각국의 정부들이 성취해야할 성평등 행동지침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UN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빈곤 인구 12억 중 70%가 여성과 어린이며, 취학연령에 이르러서도 학교에 갈 수 없는 여자 어린이는 8천 5백만 명에 이릅니다. 이 수치는 학교에 갈 수 없는 남자 어린이 4천 5백만 명의 두 배에 이르는 수치입니다. 세계 빈곤인구 중 적절한 음식, 물, 위생, 건강,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남성의 숫자는 4억 명입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엔 그 두 배에 달하는 7억 명에 이르며 성인 여성의 문맹률은 67%입니다. 이것이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작은 별에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선 몇 가지 사건들로 인해 그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일부 사람들이 여성과 여성운동, 여성주의 일반에 대해 공공연히 말도 안 되는 분노를 내뱉습니다. 사실 여성가족부는 처음 출범 과정부터 많은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여성부가 존재한다면 남성부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로부터 여성계 내부에 이르는 우려 섞인 걱정까지 참으로 다양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연말 여성가족부가 성매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남성들에게 회식비를 지급하는 이벤트를 기획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 역시 황당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여성가족부라는 명칭이 이미 다양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가족부가 앞장서 출산장려운동을 하는 등 이른바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에 대한 국가주의적 관리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그간 여성운동 내부에서 논의되고, 힘써왔던 다양한 가족의 공동체의 복지와 인권 문제에 대해선 무관심한 편입니다. 지금과 같은 흐름으로 보았을 때, 여성가족부는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해 있는 운동의 관료화라는 암초를 피해가기 어려울 듯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모 대학의 여성총학생회가 보여준 성급한 문제제기와 미숙한 대응 방식으로 인해 여성계 전체가 매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는 문제점이 여성계라고 빗겨갈리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여성부만을 대상으로 부처 폐지를 거론하고, 그 예산을 국방비로 전용하라고 주장하거나 같은 여성 의원이 여성부가 이 나라 남성들을 모독했다고 나서는 모습들을 바라보노라면 우리 사회에서 양성평등이 이루어지기 까지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지난 해 3월 8일. 어쩌면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세계여성의 날이었던 이 날, KTX 여 승무원 90여 명은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습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였던 이들을 직위해제하겠다는 철도공사의 문자메시지였습니다. 이들이 새로운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인지 어느새 만 1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2월 24일은 술자리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성추행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1심 재판에서 최 의원은 1심 법정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선고와 사회지도층으로서 부적절한 범죄행위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여전히 국회의원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사건 발생 5개월 후 국제부로 자리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술집 여주인인 줄 알고 그랬다는 국회의원은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최근 삼성 에버랜드의 전환사채 불법증여사건이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계속 연기되는 것처럼 그 역시 임기를 모두 채우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기자라면 일반인들에게는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를 통과해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에 속한다고 인정받는 이들입니다만, 그 같은 이들을 생각하는 국회의원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6~70%가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그 가운데 70%가 여성인 현실이 별다르게 느껴질리 없습니다. KTX 여 승무원들이 모 대학에서 헸던 강연을 동영상으로 한참을 다시 보고 들었습니다. 예쁘냐고요? 물론 예뻤습니다. 그들의 얼굴도, 몸매도 참으로 예뻤습니다. 그러나 얼굴이나 몸매 보다 그들의 마음이 예뻤고, 그들의 의연한 태도가 예뻤습니다. 이제 스물 대여섯의 젊은 처자들이었습니다. 다들 제 막내 동생 보다도 어린 친구들이었습니다. 장장 1년여에 걸친 투쟁이었고, 언제 해결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했던 한명숙 전 총리가 다음 대선에서 유력한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한명숙 총리는 30여년간 민주화운동과 환경운동, 여성운동을 해온 훌륭한 여성의 표본이었고,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였습니다. 한명숙 총리 지명자는 방송인터뷰를 통해 “여성 총리가 나온다면 정치 발전에 새 지평을 열고, 여성과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지명자로 내정되었단 소식이 전해졌을 때, KTX 승무원들은 한명숙 총리 지명자와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들이 한명숙 총리에게 받은 화답은 경찰에 의한 강제연행이었습니다.

한명숙 의원님께 드리는 편지

새벽부터 비가 천막을 내리쳤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비를 머금고 울컥이고 있었습니다. 파업농성 50일째인 4월 19일 우리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주최 비정규직 관련 토론회를 마치고 ‘국무총리 내정자’인 의원님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의원님이 여성민우회 출신이고 여성노동자의 압도적인 지지가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KTX 승무원 문제에 대해 해결의지를 보이셨다고 해서 한편으로 무례할 수도 있지만, 다음날 새로운 자회사인 KTX관광레저의 신규승무원 합격자 발표와 24일 승무사업개시라는 일사천리의 계획 앞에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국무총리실 노동사회수석 비서관이 와서는 철도공사가 합리적인 안을 내놓았는데 왜 승무원들이 그걸 받지 않아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으며, 대우자동차 파업 때도 300명만 정리해고 하자고 했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은 노조집행부 때문에 1700여명이 해고돼서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실의 노동사회수석이라는 분이 우리가 왜 이렇게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양보, 잘못된 집행부 운운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관광레저가 감사원에서 지분매각하라는 부실 자회사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긴 하나, 근본적인 원인은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은 있지만 그 문제를 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당사자가 없는 위탁방침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철도공사의 직접고용을 주장하고 있고,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아무 때나 해고해버리겠다고 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규직을, 그래서 공사의 직접고용 정규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한참을 하니 노동사회수석님의 자세도 조금은 숙연해지는 듯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히 좀 전에 자신이 한 얘기는 잘 몰라서 한 것이니 취소하겠고, 자세한 얘기를 좀 들어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철도노조를 통해서 초기에 들었던 내용밖에 몰랐고 그 이후에는 우리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 갖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소관이 아니라고? 노동사회수석의 소관이 아니라고요?
노동자의 문제가 소관이 아니라는 노동사회수석님께서는 당장 면담을 잡기는 어려우니 자신과 다시 한 번 만나고 다시 면담을 잡아보자고 했습니다.

한명숙 의원님! 여성노동자의 차별에 누구보다 애쓰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에 총리로 임명되신 걸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노동자가, 특히 힘이 약한 여성노동자로서는 총리님을 비롯한 저희 노동자의 문제를 같이 풀어주실 분들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20대 여리고 여린 승무원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것까지 각오하고 국회까지 들어오기란 정말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 노동자들이 왜 자꾸 투사처럼 변해 가는지, 이런 투사를 양산하는 장본인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총리로 임명되시면서 바로 이런 어려운 문제를 안겨드려 죄송하기 그지없지만 제발 이 나라의 총리로써 저희를 외면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2006년 4월 20일
한명숙 의원님 면담을 요구하다 경찰서로 연행된 80여 명을 면회하러 떠나며 정지선 올림


사진출처 : 전국철도노조

이들을 해고한 철도공사 사장 이철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그래서 KTX 승무원 사건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어떤 이들은 KTX 승무원들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합니다. 바로 위의 편지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대우자동차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 전 해고되었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희망자에 한해 전원 복직되었다는 뉴스를 들으셨을 겁니다. 그날 KTX 승무원의 강연 내용을 들었습니다. 한 대학생이 "법률적인 절차를 밟아 합법적으로 투쟁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승무원은 자신은 인천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지도 몰랐다. 법대로 하라는데 법대로 하면 3년, 5년, 8년이 걸린다. 어느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무임금으로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겠어요. GM대우의 파업이 5년을 끌었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20명이 1,700명을 복직시킨 겁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많은 수가 다른 곳에 취직을 한 상황이라 실제로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는 아이 젖 달라고 우리가 삭발하고, 점거하고 불사르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 승무원은 “다른 작은 노동조합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는 언론과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주니 행복한 편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서 저는 이 분들, KTX 승무원들이 참으로 예쁘다,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처음 380명으로 시작된 KTX 승무원들의 싸움은 1년여가 지나는 동안 100명 정도의 승무원들만 남아서 싸움을 계속 해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처음 철도공사가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뽑는다며 선전해 고시를 치르듯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아리따운 젊은(현재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모든 미덕을 갖춘)  아가씨들입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직장을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학생이 “모두 능력 있는 분들인데 지금이라도 다른 직장을 찾아가지 않고 계속 싸우는 이유가 뭐냐?”를 묻자 “그렇게 하면 저 한 사람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후배들, 동생들, 이 땅의 800만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 다음 세상에 태어날 우리의 아이들은 또다시 우리처럼 불행한 일들을 계속 겪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런 사람들에게 감히 ‘집단이기주의’를 말하는 당신이 바로 이기주의자입니다.

오늘은 99주년을 맞이한 세계여성의 날입니다. 저는 이 날이 투쟁이 아닌 축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해마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뻬빼로데이라는 정체불명의 상업 파티들은 온갖 뉴스와 상업 자본의 호사를 누립니다. 그러나 철모르는 눈발이 펄펄 날리는 대한민국의 봄, 끝나지 않은 엄동설한이 지속되는 한, 이 땅의 여성들은 여전히 비정규직, 이등시민의 굴레를 뒤집어쓴 채 투쟁의 현장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1년 365일 중 하루만 여성의 날이 아니라 1년 365일이 여성의 날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200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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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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