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 축구는 그냥 축구일 뿐이다. 축구와 월드컵에 대해 쏟아지는 온갖 비판에 대해 익히 알고 공감하면서도 막상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자꾸 감정이입이 되는 건 최소한 그들이 쏟아내고 있는 '땀'과 '눈물'은 진실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알리바이(alibi)
-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사하는 이에게 범죄 시각에 범행 이외의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알리바이'라고 한다. 좀더 유식하게 말해 '현장부재증명(現場不在證明)'이라고 하는데, 형사소송법상 범죄혐의를 입증하는 책임, 거증책임(擧證責任)은 검사에게 있다. '천안함'침몰사건에 대해 북한에 대고 스스로 혐의를 부인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자신들이 무죄라는 걸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들도 하나의 '국가'인데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국가의 알리바이'를 대라는 꼴이다. 과연 그 시간에 북한은 무얼하고 있었을까?

 

안개에 대하여
- 아침 출근하는데 한강에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 속 다리를 건너며 문득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그에게 있어 안개란 미궁이자 장막이었다. 학살과 약탈, 궁핍과 생존은 그너머에 있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홀로 죽은 친구. 나에게 '안개'란 그런 것이다. 보일듯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갸날픈 희망이 완고한 절망에게 포위당한 '세상의 풍경', 희망의 손을 잡아주기에 절망은 지나치게 강하다. 해가 뜨면 안개는 사라지겠지만 그 순간은 인간의 삶이 견뎌내기엔 또 너무 기니까.

 

정보통제
- 범죄자가 주인공인 영화들은 폐쇄적인 구조를 갖기 마련이다. 영화의 사각 프레임이 열어놓은 창을 통해 바라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사회적 모럴(혹은 현실)과 차단된 채 극중 주인공인 범죄자들과 자기동일시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대부>에서 우리는 대체로 앞서의 이유로 말론 브란도나 알 파치노를 정말 나의 패밀리로 혹은 의탁하고 싶은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권력이 정보를 통제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이유도 동일하다. 

 

액션영화의 한 칼
- <글래디에이터>가 성공한 이유는 칼잡이들의 액션에만 있지는 않다. "민중을 즐겁게 하는 것이 권력을 손에 넣는 길이다."같은 류의 대사들이 가끔씩 검투사의 칼보다 크게 움찔거리니까...

 

대표팀 감독
- 허정무 감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이것 한 가지는 꼭 기억하고 평가해줘야 할 것 같다. '국내파 최초의 16강 감독'으로가 아닌 국내파 감독 최초로 '월드컵을 즐기자', 패한 뒤에도 '그대들과 함께 해서 행복했다'고 말한 감독으로 말이다. 때로 결과는 모든 것을 증명해주지만, 결과를 모두 지켜본 뒤에 하는 말은 그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에겐 그저 하기 좋은 말에 불과하다.

 

어떤 희망
- "더 나빠질 게 없는 한국, 얼마나 희망적인 사회인가?"라던 김용철(변호사)의 말이 가슴에 확 와 닿는다. 젠장, 부인할 수 없어 희망적이다.

 

프레임 효과
- 인쇄술, 라디오, 복사기, 카세트테이프가 그러했듯 매체의 특성이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릇 안에 담겨지기 위해서는 내용물의 물성이 변해야만 하고, 그 변화는 처음엔 외형으로 오지만 나중엔 근본적인 변화까지 불러온다.

 

일생일업
- 권중달 선생이 지난달 사마광의 "자치통감" 완역본을 출간했다. 사실 출판계나 인문학 분야에서 올해의 10대 사건을 꼽는다면 첫손에 꼽을 만한 업적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원산지인 중국을 제외하면 근대 이후 우리가 일본보다 앞서 번역한 거의 최초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을 세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권중달 선생의 "자치통감" 완역 작업에 경의를 표한다.

 

* 문제는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에 앞서 갖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지만 너무 비싸다는 것이 첫째 문제고, 둘째는 언제 32권에 이르는 이 책을 언제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그리고 셋째, 나는 송나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사마천은 한 무제 사람이고, 사마광은 송나라 신종 때 사람이므로 남송과 북송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도 읽어볼 만한 책이 마땅치 않다. 흐얼....

 

블랙리스트 1
- 코미디언이자 라디오 시사토크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 중인 김미화 씨가 친정 같이 여기는 KBS에 출연하지 못하도록 하는 '블랙리스트'가 있는 것 아니냐는 내용의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그러자 KBS는 김미화 씨에 대한 법적 조치를 운운하며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대해 부인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총리실에서 민간인을 두 달여 동안 사찰하면서 그가 공무원인 줄 알았던 사회, 80년대 수많은 운동권을 양산했던 금서가 사실 목록조차 없이 주먹구구로 운영되었던 나라, 권력의 비선 라인이라 하는 '영포회'의 회원명부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문서만 없는 거 아니냔 거다. 즉석에서 "쟤는 안돼!", 한 마디가 더 쉬웠을 테니까.

 

KBS는 기자회견까지 자청하며 "블랙리스트 같은 건 없다"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문제는 기자회견이 끝나고 질문도 받지 않고 일어서며 김미화 씨가 알아서 잘 처신할 거라고 말했다는 거다. 어쩐지 천안함 합동조사단 발표 같이 들린다. "오빠 믿지?"하고 말이다. 물론 "오빠 밉다!"

 

블랙리스트 2
- 1947년 11월 24일과 25일에 걸쳐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영화제작자협회 회의에서는 좌파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되던 10명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할리우드에서 영구히 추방하자는 ‘월도프 선언’이 채택되었다. 선언의 일부를 옮겨보면 “우리는 아무런 보상없이 우리가 고용하고 있는 그들을 해고 내지 정직시킬 것이며, 모욕죄에 대한 고소가 취하되거나 무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맹세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재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블랙리스트 3
- 최근 KBS의 블랙리스트 파문을 보면서 나는 문득 마르크스의 말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란 말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참 수도 없이, 정말 지겹게 반복된다. 희비극을 떠나서.

 

어른들의 충고
- 나는 '고운(고등학생운동권)' 출신이다. 가끔 고등학생 시위 뉴스를 보면 가슴이 짜안하다. 그때 어른들이 내게 가장 많이 한 충고는 그런 건 어른 되어서 해도 늦지 않단 거였다. 지금 내가 해줄 말은? 그 어른들이 하지 않아서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청소년의 '섹스'
- 아이들이 아이들끼리 하는 건 어찌보면 정상적인 성장과정이다. 물론 적당한 성교육과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지만 청소년들의 '섹스'에 있어 정말 큰 문제는 청소년들끼리의 섹스가 아니라 자꾸만 다큰 어른들이 자꾸만 아이들과 섹스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안하무인
- 한국사회가 얼마나 학연, 지연, 혈연에 연연하는지는 노태우 전 대통령 내외가 잘 보여준다. 추징금 280억은 돈이 없어 낼 수 없어도 전직 대통령의 영부인께서는 자신의 모교에 쾌히 5천만원을 기부한다. 그러나 이 사건이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건, 전직이든 현직이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 법이나 국민 앞에서 얼마나 안하무인하는 자들인가 하는 것이다.

 

자이니치
- 축구선수로 성공하는 방법으로 한국대표나 일본귀화도 있지 않냐는 물음에 대해 "내게 있어 국가대표는 돈이 아니라 신념을 확인하는 무대다”라고 정대세는 답했다. 그 답변이 촌스럽게 들리는 시대이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서재의 풍경
- 나는 김종익 씨(총리실 민간인 사찰 피해자)가 평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책을 많이 읽고, 즐겨읽는 이에게 보내는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존경이다. 그러나 상대가 어떤 책을 읽든 그것이 민간인 사찰의 빌미가 될 수 없다는 건 독서량과 무관한 상식이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평범'한 사람도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어떤 책을 가지고 있고, 읽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 평범과 비범은 독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구분된다. 총리실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 씨의 서재에 꽂힌 책들이 민간인 사업가가 읽을 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사람들의 지적에 대해 굳이 한 마디 하자면?

 

"그래서 당신들보고 쇠대가리 꼴 보수라고 부르는 거요."

 

고양이 살해 사건을 통해 본 대한민국
- "고양이 똥을 안 치우면 벌금 30만원,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이면 벌금 20만원" 이거 어느 나라 이야기 같아요? 정답은? 대~한~민~국!

 

하인리히의 법칙
- 1930년대 미국의 보험회사 감독관이었던 하인리히는 노동재해들을 조사해 중상자 1명이 나온 사고는 같은 원인으로 이전에 경상자 29명, 잠재적 상해자 300명이 있었다는 통계법칙을 만들었다. 이 법칙을 집권 3년째를 맞이한 MB정권으로 유추해보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뒤에 있을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두려워진다.

 

심각한 질문
- 누군가 인생을 잘 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질문은 '다시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가 언제냐'고 묻는 것이다. 당신에게 '다시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는 언제인가?' 무엇을? 왜?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밑도 끝도 없이 묻는다.

 

기업문화
- '삼성'이 알아도 못 고치는 게 있다. '애플'은 팬덤(fandom)을 파는데, '삼성'은 계속 스펙(spec)을 팔고 있다는 거다. 그 점에선 '소니'도 마찬가지였다. 음질은 언제나 애플의 아이팟 보다 소니의 워크맨이 더 좋았으니까. 그래서 문화가 무서운 거다.

 

하드리아누스의 방벽
- 로마제정의 붕괴는 로마제국의 최대판도를 보여주는 상징물인 '하드리아누스의 방벽'부터란 말이 있다. 역사 속의 모든 제국은 외부의 공격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붕괴하는 법이다.

 

기득권의 무서움
- 역사적으로 기득권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보여주는 사례는 백년전쟁 당시 영국의 평민을 기반으로 구성된 궁수대(장궁)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도 프랑스 귀족들이 결코 무거운 중장갑옷을 벗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권력 기반이 봉건기사제도에 있었기에 그들은 평민들을 무장시키고, 훈련하여 전쟁터에 내보낼 바에는 차라리 자신들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학살당하는 길을 선택했다.

 

가장 유명한 질문
- 1947년 11월 ‘의회반미활동위원회(HUAC)’가 연예산업에 대한 일련의 재조사에 착수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위원회에 불려가 당대의 가장 유명한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공산당인가? 아니면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적이 있는가?”

 

교훈과 팩트
- 글쓰기에 있어 독자에게 교훈과 팩트 사이에서 어느 한 가지만을 줄 수밖에 없다면 나는 아무 고민없이 팩트를 고를 것이다. 만약 왜? 고민없이?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주 많이 고민한 다음에도 여전히 팩트를 고를 테니까요라고 답할 것이다. 

 

루저와 엘리트의 차이
- 지그문트 바우만은 노동의 미적가치가 소비자사회에서 계층을 구분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직업과 취미, 일과 놀이, 노동과 여가의 구분을 지우고 노동 자체를 오락으로 끌어올리는 다시 말해 일중독자들이 가장 성공한 엘리트들이란 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새로운 빈곤"에서 제기하는 주장의 핵심 - '노동을 놀이화하는 엘리트들의 태도'는 다른 한 편으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부에게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휴식할 만한 여유를 사라고 충고하는 자본가의 충고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을 무(無)의 가장 큰 효용이 유(有)에 있다는 노자식 해석으로 접근해보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엘리트들의 한 부류는 바로 '루저(loser)'들이다. 물론 루저들은 반대의 의미에서 그렇게 살도록 강제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마피아의 지혜
- "가끔 바보들로 부터 배울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과 토론은 금물이다, 사랑 보다는 호기심으로 처녀성을 잃는 경우가 더 많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여자를 찾아 가라, 친구는 수 천명도 부족하다. 적은 한 명도 많다"란 명언을 남긴 사람은  '알 카포네'였다. 물론 말하긴 쉽다. 만약 알 카포네가 자신의 말대로 실천했다면 자신의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부잣집 혼사
- 한국의 파워엘리트들은 점점더 근대유럽의 왕가를 닮아가고 있다. 네트워크 이론가들은 6단계만 거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연결된다고 하지만 한국의 정재계는 그들만의 네트워크로 단단한 피의 결속을 이룬다 이른바 혼맥으로 만들어진 '수구반동혈연복합체의 탄생!' MB의 사돈기업인 효성의 재벌3세들이 회사자금을 유용해 불법적으로 해외에서 부동산을 매입했지만 조중동은 굳게 입을 다문다. 과학전문저널 네이처에서 합조단의 천안함 조사 결과를 놓고 바보 같은 분석이라며, 조작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지만 재벌들이 장악한 언론들은 단단한 침묵의 연대를 유지한다.

 

초고층빌딩의 저주
- 성남시의 모라토리엄 선언을 바라보며, 문득 '세계최고층빌딩의 저주'란 말이 떠올랐다. 국가적 자부심이든 도시의 자존심이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세계최고층빌딩 건설 모뉴먼트 경쟁을 벌이는데, 이처럼 세계최고층빌딩을 짓고 나면 반드시 경제위기를 경험한다는 것이 '세계최고층빌딩의 저주'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거대건축물을 사랑한다. 이것은 '권불십년'에 대한 권력자들의 공포를 반영한다. 시대를 떠나 역사로 남은 건축물의 숨겨진 의미는 공개적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었던 자들의 '거대한 무덤(봉분)'이다. MB는 4대강을 파헤치는 것으로 강바닥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어쩌면 그건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다.

 

위험한 논리
- 역사학자 박지향이 <조선일보>에 쓴 칼럼 "진보 교육감, 아이들 대신 세상 살아줄 건가"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1970~80년대 한국문학에서 명작이 쏟아진 이유가 결과적으로 군사독재 덕분이었다는 말과 같다. 이런 논리의 연장에 있는 것이 박정희가 개발독재한 덕분에 경제개발됐다는 것이고, 이런 논리는 필연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독재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그와 같은 논리적 확장의 재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일제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개발이 이루어졌으니 '친일파 만세', 이들을 척결하지 않고 재기용한 '이승만 만세'란 말이 된다.

 

으름장
- 1년 전 정부는 비정규직보호법이 실시되면 해고대란이 빚어질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보호법 실시 1년이 흐른 현재 10명 중 8명은 고용상태라 한다. 기업이 사회복지를 위해 이들을 고용하고 있을까? 이 법안의 처리과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비정규직이 단지 우리 사회가 만든 식민지이자 게토일 뿐이라는 증거다.

 

목숨을 건 선택
- 임신한 뒤 유방암 발병 사실을 알게 된 한 여성 변호사가 태중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아기를 출산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기가 태어난지 10주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런 선택 앞에서는 그 어떤 가치판단이나 이성적 평결 보다도 먼저 마음이 알아서 묵직해지고 숙연해진다.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식 작명법
-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은 사물의 이름을 지을 때 그와 밀접한 특성, 품성을 연관져 짓는데, 예를 들어 인디언들에게 4월은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이다. 이것을 안상수 신임 당대표의 병역기피의혹에 빗대보면 어떤 이름이 나올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자!

 

세계화의 낙수효과(Trickle Down)
- 신자유주의자들은 일단 감세 정책 등으로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그 과정을 통해 혜택이 중소기업이나 가계에까지 미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만 '낙수효과'가 중소기업이나 가계에까지 미치기 위해서는 시간이 다소 필요하니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의 지배구조'상 상부구조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배부를 때까지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란 결국 일국 차원의 낙수효과를 세계적 차원으로 변환하는 것인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하되, 노동의 이동은 통제하는 시스템이지만 예외적으로 여성의 '결혼을 통한 이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인 까닭도 어찌보면 이 같은 낙수효과의 결과일지 모른다. 세계화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하되, 상대적으로 노동의 이동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우엔 '국제결혼'의 형식을 빌려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그러나 이것을 '결혼=사랑'의 개념이 아니라 '결혼 = 개호노동, 가내노동'의 개념으로 파악해보면, 국제결혼이란 한 측면에서 자국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여성 노동을 해외의 개도국이나 후진국 여성을 수입하는 형태의 다른 말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경제적 구매력이 높은 국가의 남성(혹은 가정)이 마치 도시와 농촌의 성비처럼 더 많은 여성(의 노동)을 소비한 결과, 구매력이 낮은 지역에서는 자신들보다 못한 지역(국가)의 여성(노동력)들을 수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 전 베트남 출신의 한 여성이 한국으로 시집온지 일주일만에 남편에게 맞아죽는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물론 한 남성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으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여성(의 노동)이 '매매혼의 형태'로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폐해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사건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들이 주장하는 '낙수효과를 통한 부의 재분배' 효과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증거이다.

 


모토


- 박정희 정부의 모토를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하면 된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죽이면 된다', 노태우는 '속이면 된다'쯤으로 정리가능할 것 같은데, 김영삼은 '밀어부치면 된다', 김대중은 '퍼주면 된다', 노무현은 '시장에 맡기면 된다'쯤 될까? 이명박 정부에 대해선 뭐라고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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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최종병기 그녀



다카하시 신을 아는 만화 매니아들이 많을 텐데,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을 덧붙이는 것은 약간 우스운 일이 될까? 가끔 남성성, 여성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남성성은 이렇다, 여성성은 이렇다고 거칠게 규정하거나 규정당할 때 약간 마음이 아파질 때도 있다. 가령,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내가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왕따 당하는 느낌을 즐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 점에서 페미니즘 역시 선택적 사고라는 것은 일견 불행하면서 다행한 일이다. 가령, 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지만 그 대의에 너무나 동의한다. 그런데 그런 문제는 넘겨두고라도 남성성, 여성성이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글쎄, 최소한 만화책을 고르는 취향에서만큼 이런 남성성과 여성성의 취향 분화가 확실히 되는 분야가 있을까? 물론 그 장벽이 남성과 여성의 양성 평등에 기초하여 변화해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만화계의 장벽은 브리티쉬 오픈에서 여성 골프 선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큼이나 높다. 어제와 그제 머리맡에 놓고 읽은 두 권의 만화책은 나에게 남성을 위한 순정만화도 존재하는구나 하는 편견 아닌 편견, 스테레오 타입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최종병기 그녀』의 작가 ‘다카하시 신’의 초기 단편집 『좋아하게 될 사람』과 『안녕, 파파』 두 권이었다. 『최종병기 그녀』의 첫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다카하시 신이란 작가가 분명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잠시 후 남자일 거라고 생각을 수정했다(실제로도 '남자'였다). 그런 착각을 했던 까닭은 다카하시 신의 독특한 그림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남성적 문체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분명 만화에 존재하는 남성적 그림체보다 명확하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만화에 있어서 남성적 그림체와 여성적 그림체는 확연히 구분될 만큼 달랐다.

그 차이는 고우영 『삼국지』의 그림체와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캔디』의 그림체가 다른 것처럼 확연한 것이다. 물론 국내의 일부 여성 작가들(『테르미도르』의 김혜린 같이)이 프랑스 혁명 과정을 다루는 만화를 그리거나,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이 그간 남성적 주제로 알려져 왔던 역사 속의 권력 투쟁, 혁명을 다룬다 하더라도 그림체에 있어서만큼 전형적인 그림체를 유지하는 편이다. 가령 얼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눈동자, 치렁치렁하는 머리카락,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 등등 말이다. 물론 다카하시 신의 그림체는 기존의 여성 순정만화체 그림과는 또 다르다. 어딘가 비어 있는 듯 남아있는 여백, 아마추어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흑백 모노톤과 끝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가늘게 이어지는 선, 스크린 톤은 거의 생략하는 등 적게 표현하여 오히려 상큼하고 신선한 느낌이 인상적인, 어딘가에서 본 듯한 정겨움이 묻어난다. 마치 수업 시간에 담임선생의 눈길을 피해 공책에 몰래 그린 만화의 캐릭터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의 그림체가 남성적인 느낌은 아니다. 물론 등장하는 여성의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게 늘어나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의 근육은 사라지고, 여성적인 선은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작가가 금방 남성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캐릭터 표현에 있어서 숨길 수 없는 남성적 시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신의 대표작 『최종병기 그녀』를 보자. 제목부터 참 과감하다. "최종병기 + 그녀"라니,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평범한(?) 남자 아이들은 엄마에게서 받은 혹은 엄마 몰래 숨겨둔 용돈을 챙겨 가장 먼저 군것질을 하고 조금 지나서는 건프라를 사거나 마크로스, 밀리터리 플라모델들을 조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중학생이 되고, 형, 누나, 혹은 친구네 집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과월호를 읽거나 거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발견하여 그에 대한 설정자료집을 사거나, 복사하고 인터넷으로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이때의 최종병기란 무릇 거대로봇군단이거나 그도 아니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뉴타입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라니 게다가 그녀는 이런 말이나 지껄여대는 소녀다.

"왜 나는 당신에게 상처만 입히는 걸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여자라서 미안해"

주인공 소녀는 가냘픈 몸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유방을 달고 다니며 유사시엔 앞가슴을 미사일처럼 발사하는 아프로다인이나 비너스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여성주의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름답고, 소박하게 그려지는 만화체에 비해 여성의 신체를 절단하고, 개조하여 병기화해가는 과정 자체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여성 자신이 소유하지 못하고 소외당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어쨌든 금방이라도 교실 뒤에 웅크리고 있다가 다가와서 쪽지 한 장을 놓고 수줍게 교실 뒤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소녀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쟤랑 나랑 같은 반이었어? 하고 되묻고 싶을 만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녀다. 요새 경제 이야기하면서 다들 성장 동력, 성장 동력하는데, 우리 삶에 있어서의 성장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도 한 때는 뭐뭐 했다"는 식의 대사나 후일담을 늘어놓는 나이가 되어간다. 어떤 사람은 군대 시절 이야기를, 어떤 이는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선배 뻘 되는 386 세대들(엄밀히 말하면 나도 그 끄트머리쯤 있는지도 모른다. 70년생, 89학번, 30대)이 이제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다니는 지금, 나의 유년 시절은 어디쯤에 머물고 있을까? 나는 요새도 밤마다 누군가에 쫓기는 꿈을 꾼다. 대개 이런 꿈의 할머니 식 해몽은 '키 크느라 그런다'는 것이다. 자, 그대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라. 정말 즐거웠는가? 아니면 고통스러웠는가? 누구나 자기보다 어린 나이의 친구들에게는 내 과거는 이랬었지, 이렇게 화려했거나 이렇게 고통스러웠거나 상관없이 과장하게 된다. 말할 때는 금방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지만 돌아서고 나면 누구보다 자신의 과거를 잘 기억할 수밖에 없다.

과연 아름다운 유년만이 존재했을까? 『최종병기 그녀』의 두 남녀 주인공(슈이치와 치세)이 만난 세계는 도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에 휘말려 있고, 결국 치세는 최종병기로 개조된다. 과연 그녀는 나는 아직도 치세 그대로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다카하시 신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SF적인 요소들을 차용하는 듯 보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라 할 만큼 설명하지 않는다. 치세가 어떻게 최종병기가 되었는지 실제로 그녀가 최종병기의 위력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부분은 죄다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병기 그녀』에서 <에반게리온>이나 기타 SF물들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종종 이런 부류의 SF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가 만들어 논 가상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이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그 설정들을 달달 외우는 것을 취미로 한다. 하지만 『최종병기 그녀』는 그런 류의 만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남성들을 위한 순정만화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만화의 여주인공 치세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롤리타』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다카하시 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개의 여성 캐릭터들은 종종 남성들보다 강인하지만(특히, 성적 접촉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에게는 유달리 강한 면모를 보인다는 자극적이라는 측면에서) 그 외의 경우엔 무척이나 순종적이고, 다소곳하다. 물론 이 부분에 남성 성 판타지를 자극한다고 한 마디 해놓으면 아주 편하지만, 그건 또 너무 쉬운 접근법이다. 다카하시 신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분명 성(sex)의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어린이"와 "어른"을 가르는 구분 근거는 섹스다. 어른이란 말의 어원이 되는 '어르다'란 말 자체에 이미 '섹스하다, 남녀가 교합하다'는 뜻이 있다. 결혼, 즉 공인된 섹스는 성인식의 최종 단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성장 동력 혹은 넘어서야 할 고개들 중 하나는 분명 '섹스'다. 『최종병기 그녀』는 일종의 성장소설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서 성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요소들은 군데군데 적절히 깔려 있다. 아무리 십대 청소년들이 까질 대로 까졌다 한들 벌건 대낮에 러브호텔을 당당하게 들락거리는 어른들의 성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입으로는 숱한 성경험을 자랑하는 녀석들의 태반이 실제로 여자 아이들 앞에서는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본 경험들 역시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친구들과 '오줌멀리 누기' 경쟁에서조차 지고 싶지 않은 남성들의 괜한 경쟁 심리가 만들어낸 우스운 결과다. 



난 정말 어렸을 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고,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을 땐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으며 그 뒤론 줄곧 어서 시간이 흘러 자연사하게 되길 바라고 있는 중이다. 어른들의 세계, 그곳에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세계는 모든 것이 부정해보였고, 부조리했다. 학교도 전쟁터였지만 사회는 그보다 더욱 악랄하고 끈질긴 전쟁터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전장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람들이 낙오하고 죽어갔다. 이런 남자 아이에게 최종병기는 누구였을까? 그네들이 매달릴 수 있었던 최종적인 지지대는 누구였을까? 친구들과의 우정 아니면 사랑이다. 우리들에게 사랑은 언제나 지독하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혼란일 수밖에 없다. 치세와 슈이치가 왜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 가는가? 왜 치세의 전투경험이 축적되어갈 수록 그녀의 자아는 붕괴되고,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가? 왜 그녀가 사회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된다고 느낄까? 불행하게도 그것이 성장이기 때문이다. 흔히 영화비평가들이 지난 1980년대의 호러 무비 혹은 슬로터 무비들을 평할 때 십대의 성적 방종에 대한 기성세대의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스크림>에 등장하는 호러 무비의 원칙처럼
"첫경험을 한 여자는 반드시 죽는다." 혹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사랑하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갈망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은 비참한 결과이지만, 마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매우 정직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만,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참호(우리의 성격갑옷) 밖으로 방심하여 고개를 내밀면 순식간에 저격당하고 만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이상을 효과적으로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가도 바보취급 밖에 받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 전쟁이란 것을 무시해버린다 하더라도 실제 고교생의 생활이 절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 중 누가 있는가? 그들의 상황이 혼란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누가 있는가? 몸은 이미 성장했지만 이들의 사랑은 공공연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사회의 눈초리는 차갑기만 하다. 사랑하면 상처를 주게 된다. 그들에겐 이 세계 자체가 혼란이고, 혼돈이다. 관계를 맺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한 법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자아를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불완전한 자아로서 결핍된 상태에서 만나 사랑한다. 관계를 형성할 수는 있으나 이런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란 매우 어렵다. 이들의 사랑이 혼돈스럽고, 때로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나는 이 만화책을 도서대여점에서 읽었는데, 실제로 고등학생이 빌려가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개는 첫사랑의 열병이 지나갔을 법한 나이의 사람들이 도리어 열광하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그들에겐 이들의 관계를 제법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일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미 '길 위의 인생(life on the road)'인 것을, 어차피 길을 가야하는 사람에겐 터널도, 길의 일부이일 수밖에 없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류는 오로지 방황을 통해서만 치유된다." 좋은 성장 소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섣부르게 회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끝내 백조가 될 수 없는 미운 오리 새끼들도 있기 때문에…. 슬프게도 어른이 된다는 건, 백조가 아니란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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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원래 이 리뷰는 다카하시 신의 단편집 『안녕, 파파』와 『좋아하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것인데... 방향을 잘못 잡아 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냥 『최종병기 그녀』를 중심으로 쓴 다카하시 신의 작품론처럼 되어 버렸다. 어쩜 좋냐? 흐흐, 여러모로 우습게 되었다. ^^ 그럭저럭 수준작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최종병기그녀>는 나에게 대단한 감동을 준 만화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도 전권 다 가지게 되었고, OVA 애니메이션 DVD도 소장하고 있는데다가 작가인 다카하시 신의 초기단편집들까지 소장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인연일지 모르겠다. 치세!(흐흐, 게다가 지금 트위터의 아이콘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종병기 그녀>의 상대역이자 나레이터인 '슈'다. 치세의 사랑을 한껏 받은 덕분에 결국 지구멸망의 날까지 살아남은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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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Sex - Guide to Getting it on / 폴 조아니데스 지음, 대릭 그뢰스 시니어 삽화, 이명희 옮김 / 다리미디어 / 2004년 7월

바람구두, 섹스책을 사다....


내가 어쩌다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이상하게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이 책은 나온지 아직 한 달도 채 안 된 따끈한 책인 걸로 봐서 어딘가 신문 서평을 읽었거나 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럴 텐데 기억이 안 난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어쩌면 섹스책이라서 나 스스로 아, 이런 걸 읽어도 될까 하는 묵시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거다. 게다가 이 책은 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도 아니고, 아내가 서점에 나갔다가 "뭐 읽고 싶은 책 없어?"하는 뜻밖의 제의를 받은 덕이다(참고로 울 마눌은 내게 용돈 말고 다른 걸 해주는 법이 거의 없으신 분이다, 농담이다. 농담). 하여간 사무실에서 쫄따구(여자 - 참고로 저 랑 같은 학교 출신임 - 어떤 학교는 특별한 편견을 조장하기도 합니다.)가 앉아 있는 가운데 "응, 섹스 책"이라고 난 지극히 덤덤함을 가장해 말했다. 울 쫄따구보다 놀라운 반응을 보인 건 울마눌이었다. 수화기로 흘러드는 아내의 목소리는 약간 놀라움과 짜증이 섞인 것처럼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도대체 이 인간은 "중세 마법에 관한 책"부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인간들 얘기까지 사들이다 못해 이젠 섹스책이라니...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랴. 소위 "삘"이 와서 꽂혔는데... 결국 자기 친구랑 서점에 갔다가 보나마나 서점 점원에게  더듬거리며 "혹시 섹스란 책 나왔어요?"하고 물었을 것이다. 아니면 집요하게 본인이 서점 구석구석을 뒤져서 찾아냈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21세기는 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큰 소리 뻥뻥 쳤지만, 불행히도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리가 개처럼 길거리에서 섹스하는 지경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논의에서 성 혹은 섹스는 특히나 성행위에 대한 논의는 아직까지도 금기 중에서도 금기다.
'데즈몬드 모리스'가 그랬던가? 동물, 그 중에서도 포유류 중에 숨어서 섹스를 하는 유일한 짐승이 사람이라고 말이다. 솔직히 고백컨대 나도 임신한 여자를 향해 이상한 눈길을 준 적이 있다. 어려서 "성교"란 것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모든 인간은 그 과정을 통해 수태되고 세상에 나온다는 사실이 역겹다고 해야할지 하여간 뭐라 말하기 곤란한 그런 복잡한 심경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는 거다.

니가 몽정을 알아? 남자들이 변기에 오줌을 묻히는 이유는?

예전에 나는 잠깐 영화 시나리오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화여대(학교가 중요하다는 말은 분명 편견이지만?) 출신의 한 친구가 있었다. 영화도 많이 보고, 영화 시나리오 공부도 많이 했고, 상식도 풍부한 똑소리 나는 친구였는데 그가 쓰고 싶어한 시나리오는 태반이 페미니즘적인 것들이었다. 문제는 페미니즘적인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상업적인 시나리오로는 참 어려운 주제이고, 더욱 어려운 일은 잘 쓰기가 그보다 더 어렵다는 거다. 하여간 이 친구는 남성의 몽정(night pollution, 夢精 )에 대한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썼는데, 월경(menstruation , 月經)이란 걸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몽정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여자가 쓴 몽정 이야기가 어설프고 서투르게 들렸다. 문예창작을 공부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개의 문예창작은 집필과 그에 대한 토론으로 이루어진다.

대개는 자기 작품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말하고, 그에 대해 토론자들이 나서서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건데, 이렇게 말하니까. 대개 재미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이런 식의 수업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사람 피 말리는 일인지 잘 안다.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도 혹은 잘 읽어주려고 해도 전문적인 작가가 아닌 사람이 쓰는 글이란 게 대부분 엉성하기 이를 데 없어서 맘 먹고 공격하려고 들면 속 상한 건 둘째고 선 채로 눈물만 안 흘려도 다행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워낙 주제가 주제이고, 페미니즘적인 내용이란 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도 어설프게 이야기했다가는 시대착오적인 골빈 남성에 마초이즘에 푹 절은 재수없는 인간으로 모멸 당하기 딱이라서 그런지 이 친구의 시나리오를 이야기할 때는(분명 본인 잘못도 있었겠지만) 대개의 남자들은 입을 다물기 일쑤였다.

그런데 나는 그 무렵 어린 소녀가 등장하는(롤리타 같은 스토리 아니다, 뭐) 호러 비슷한 시나리오를 준비 중에 있었다. 스티븐 킹 원작,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공포 영화 "캐리(Carrie, 1976)"하고 좀 비슷했다고 해야 할까? "캐리"는 초경을 경험하는 어린 소녀의 잔혹한 심리 스릴러이기도 하다. 해서 그에게 아무래도 니가 몽정에 대해 남자 친구에게 좀 어설프게 들은 것 같은데, 나에게 너의 초경 이야기를 해주면 나도 너에게 내 첫 몽정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는 제의를 한 적이 있었다. 나로서는 너무나 진지한 제의였는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나에게 몹시 화를 내며 그날 시나리오 수업 분위기가 싸해진 경험이 있었다. 이 책 이야기를 하기 위해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우리 시대가 성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듯 보이지만 실상 제대로 알고 있거나 이에 대해 진지하면 진지한 대로, 농담이면 농담인 대로 논의된 적이 거의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의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건드렸던 것이라면 미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가 다녔던 대학에서는 사진과 학생들이 강의실 지하 복도에서 서로의 나체를 촬영하며 누드 사진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고(누드 모델을 돈 주고 사느니 그 편이 학생들로서는 훨씬 이익이었을 거다), 나로서는 그런 분위기를 예술의 분위기, 예술에 꼭 필요한 자유로운 향기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하여튼 우린 넘치는 성담론 속에 살면서도 성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여성들은 종종 남성들이 소변을 보고 난 뒤 변기에 오줌이 튀는 걸 더럽다고 말한다. 그거 하나 딱 조준 못 하느냐면서 타박하지만, 정작 남성들이 오줌 방향을, 특히나 처음 발사하는 순간에 그 오줌발이 어디로 튈지는 본인도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른다. 특히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성과학(性科學, sexology)란 측면에선 더욱 그렇다. 성과학이란 것은 성에 관한 다양한 분야 중에서도 특히 성행위 자체에 한정해서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행위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A.D. 1966년 지상에 클리토리스가 재림하다

이 책을 읽다가 나는 꽤 여러 차례 웃었다. 나는 야나기타 리카오의 "공상비과학대전" 같은 책이 아니면  책을 읽다가 소리내어 웃는 일이라곤 거의 없다. 대개는 '씨익'(에반게리온의 씬지 아버지 '이카리 겐도우'처럼) 웃으면서 밑줄을 긋거나 아니면 저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웃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하도 웃으니까. 울 마눌님께서 '왜 그래' 하면서 드디어 책에 대한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이 책의  필자인 "폴 조아니데스"는 앵글로 색슨계 작가들이 조나단 스위프트 이래 연마해 구사하는 블랙유머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1960년대에는 굳이 달에 도착한 우주인의 예를 들지 않아도 일상이 된 과학 덕분에 여성, 남성 모두 "클리토리스(clitoris)"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클리토리스는 결코 1960년대 비로소 생겨난 기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명칭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고, 그 기능을 아는 사람은 남녀 양성을 통들어서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이 새로운 발견을 미니 페니스 정도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파트너에게 쾌감을 선사하고 싶었던 남성은 자신이 애무받고 싶은 강도로(남성의 페니스는 그다지 미니 사이즈는 아니지 않은가)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페니스를 애무하듯 클리토리스를 문지른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여성은 극히 불편해지고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남성이 그 사실을 알기나 했을까? <16-17쪽>


그리고 이 책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우습지만 결코 우습지 않은 정치적 이야기 몇 가지를 들려준다. 가령, 1980년대와 90년대 사이에 미국에서 대통령을 지낸 어느 배우 출신의 정치인은 대통령 재임 시절 미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독신 문제를 다루는 행정국을 만들었다. 문제는 이 행정국이 독신 남녀들의 순결을 계도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인 대통령은 이렇게 순결을 계도하고자 했음에도 그의 딸은 다리를 벌린 섹시한 포즈로 남성용 섹스 잡지에 출연했다.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민주당 출신의 한 정치인은 군대 내의 마스터베이션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군의관 장성을 해임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높이고자 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는 금욕을 골자로 하는 법안에 수백만 달러를 할당하라고 명령했다. 오로지 섹스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위해 말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재임 중에 일어난 부적합한 관계로 인해 미국의 초등학생들이 저녁 식탁에서 부모에게 '오랄 섹스'가 무엇인지 묻게 만들었다.

섹스 - 세계의 근원(The Origin of the World)에 대한 호기심

이 책을 읽는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 포함된 몇 장의 삽화와 어떤 이야기들이 특히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앞서 이야기한 시나리오 작가를 꿈꾼 친구처럼 나의 이런 독후감이 또 그럴 수도 있을 지도 모르겠다. 구스타프 쿠르베가 그린 "세계의 근원"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대로 여성의 성기를 있는 그대로 그린 작품이다. 터키계 이집트인 대사였던 칼릴 베이가 1886년 쿠르베에게 주문하여 그려진 이 작품은 주문한 당사자조차 남들 보는 앞에 걸어두길 꺼릴 만큼 적나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엔 얼굴, 팔, 다리 모두 배제된 채 오로지 여인의 복부와 성기만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고 난 뒤 한 친구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망각 속에서 작가가 발, 다리, 엉덩이, 배, 허리, 가슴, 손, 팔, 어깨, 목, 그리고 얼굴을 그리는 것을 잊어버렸다(김영애, 페로티시즘, 2004, 개마고원)"고 쓰기도 했다. 여성에 대한 인권이 확립되지 않고, 인체의 신비가 아직도 여러겹 쓰개치마에 의해 가려져 있던 시절 여성의 육체가 남성들을 위한 끝없는 성 판타지가 되던 시절이었다.

이 그림 주문자 칼릴 베이는 이 작품 앞에 덮개 그림을 주문해서 덮어놓고, 일부 친밀한 친구들만 불러서 감상하곤 했다. 이 그림은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부다페스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가 나치에 의해 압수되었고, 다시 어떤 개인 소장가의 손으로 흘러든다. 그는 자끄 라깡이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이 그림의 노골적인 것을 걱정한 나머지 앙드레 마송에게 덮개 그림을 주문해서 그림을 감춰 두었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뉴린 무어와 J.케네스 데이비슨은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섹스 경험과 그에 따르는 죄의식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성에 대해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여성은 남성가 관계 맺는 횟수가 적고 한결 더 진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죄의식을 느끼는 여성은 섹스에 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소녀들보다 더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첫 경험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충격적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자신의 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소녀들이 더 어린 나이에 섹스를 시작했으며, 성 파트너의 숫자도 더 많았고 진지하지도 않았다. 또한 죄의식을 느끼는 소녀들은 대부분 '우연히 데이트한 파트너' 혹은 '그저 어쩌다 만난 남성'과 처음 성경험을 가진다."라고 한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은 (임상학적으로 말해서) 모두 미국의 사례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들어 온 주변의 이야기들(음담패설을 말하는 게 아니다)을 종합해보았을 때, 성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일수록 더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때로 어떤 경험들은 되돌이키기엔 많이 늦은 적도 있었다.

성에 대해 쉽게 혹은 밝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종종 변태이거나 무례한 사람 취급받기 쉽다. 그러나 우리들은 근엄하기 짝이 없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젠트리들, 귀족들이 성적으로는 가장 문란했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우리 역사상 성적으로 가장 엄격하던 시절에 우리는 정치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가장 폭력적인 시대를 살았다. 이 책은 전혀 어렵지 않고, 읽다 보면 실제 생활(반드시 성 생활을 의미하지는 않지만)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편견과 무식 속에 있었던 가를 깨우치게 해준다. 결혼하신 분은 하신 분대로, 아직 미혼인 사람은 미혼인대로, 자녀들에게 보다 올바른 성교육을 해주고 싶은 분은 또 그 이유에 합당하게 읽을 만한 책이다. 단, 한 가지... 이 책은 서두에 이런 경고를 하고 있다. "이 책에 포함된 정보로 인해 개인 혹은 신체가 직/간접적인 알레르기를 일으키고 손해나 피해를 입는 경우, 혹은 상처와 병이 생길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이 없음을 밝힌다." 그 경고의 이유가 궁금하다면 물론, 이 책을 읽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주자면, 성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개인적인 편차가 크다는 것이다. 가령, 남성들의 80% 이상은 공중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 타인의 성기를 의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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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18禁의 세계
김봉석, 김의찬 지음 / 씨엔씨미디어 / 2000년 3월



이 책에 대해 리뷰를 한 번 써보리라 마음 먹은 건 상당히 오래전 일인데, 생각보다 책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의 제목을 "13금의 세계"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어제 저녁에도 다시 붙잡고 읽었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에도 이 책을 검색할 때 "13금의 세계"로 했으니 쉽사리 찾아질리가 없다. 어쩌면 은연 중에 나는 "18금"을 좀더 낮춰 13금만 존재하는 세계에 살고 싶은 건 아닐까?

TV를 시청하다보면 종종 나이제한 표시들을 볼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시청대상이나 관람대상을 제한하는 방식의 나이별 등급이 있는데,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보호하려는 이유에서라고들 한다. 이 책은 그러니까 보호되는 청소년들이 넘보지 말았으면 하는 측의 시선이 쌓아올린 그 벽 너머의 세계를 말하고자 하는 책이다. 그 세계가 담고 있는 주된 내용은 이 책의 부제인 "일본의 에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이다. 하지만 저자인 김봉석, 김의찬은 단순히 국적의 차원에서 일본의 에로 만화와 애니, 게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한국의 소위 성인문화와 일본의 성인문화를 비교/분석함으로써 분명히 존재하지만 금지된 우리 사회의 성과 문화에 대한 이중적인 자세를 비판한다.

이것이 내가 읽고 파악한 이 책의 주된 내용과 지향점인데, 다른 이들의 평을 보니 설득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8禁의 세계"는 대중문화론으로 분류되는데, 뭉뚱그려 대중문화라고 하지만 영어권에서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사용한다. 그것은 mass culture와 popular culture인데, 이 둘은 모두 대중문화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전자는 대중문화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긍정적인 측면까진 아니라도 최소한 중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대중문화의 역할, 그것도 금지된 성인문화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 - 최소한 그 효용성을 인정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이 문화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는 거이다.

우리 말로 성인을 가리키는 단어인 "어른"은 "어르다"란 옛말에 어원을 두고 있다. "어르다"란 말은 "혼인하다, 교합하다"란 말인데, 즉 성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성인,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성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을 생물학적으로 "임신이 가능한, 수태를 시킬 수 있는"으로 본다면 간단하지만, 이를 사회학적으로 바라보면 여러 양태들이 나타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교(sex)에 대한 의식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묵시적인 제약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르다"란 말을 사전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첫 구절이 다름아닌 "혼인하다"란 말로 규정된 것과 같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혼인하지 않은 성인은 섹스를 할 수 없으며, 혼인이란 정식절차에 의하지 않은 모든 성 관계는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당한다.


그런 점에서 성인문화는 성인이되 별도의 성인인증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처녀총각이 성인문화를 즐기는 것은 어딘가 부도덕한 것이지만, 혼인한 부부가 부부관계의 자극을 더하기 위해 성인문화를 즐기는 것(간단히 이 때의 성인문화를 포르노 무비 혹은 에로티시즘을 담은 핑크무비라고 해두자)은 묵인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화두는 누가 뭐래도 성(性)이다. 그것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가운데 무엇이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성에 대한 발화자체가 곧 남성의 성적 욕망에 고스란히 연결되는 맹점을 지닌다. 성인 문화는 그 긍정성을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그 자체로 남성적인 문화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은 책으로써의 "18禁의 세계"가 지닌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가야 할 문제이며, 성인문화만의 문제는 역시 아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한국이든, 일본이든 성인문화엔 미래가 없다.

흔히 성인문화라고 하면 성과 폭력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성인문화의 핵심은 누가뭐래도 성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폭력에 대해 특히 관대한 편이고, 심지어 이것을 남성성의 핵심으로 부추기는 측면마저 있다. 이런 태도는 비단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폭력적인 장면보다 더 많은 검열과정을 거치게 되어있는 것이 바로 성적인 암시, 관능성, 에로티시즘이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의 역사적 연원을 거슬러 오르면 신화, 관습, 종교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에로티시즘이 인간의 본원적 욕망에 자리하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세를 거치며 수그러들었다가 인간의 본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에로티시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에로티시즘은 점차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표현하는 부르주아 혁명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예술 사조상 낭만주의와도 함께 했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도 에로티시즘은 포르노그라피와 구분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지닌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에로티시즘으로 볼 것인지, 포르노그라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우리 사회의 "18禁의 세계"가 지닌 한계치이기도 하다.

그런 한계치의 문제를 한 권의 책이 모두 해결할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냐만 시대의 금서들이 걸어온 길을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신에 저자들은 성인문화의 가능성을 성인만화의 가능성에 찾고자 한다. 과연 성인만화가 우리 사회의 18금 문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너무 쉽게 단언하는 경향이 있다. "18禁의 세계"는 크게 두 장으로 구분되는데 "1장 18금이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들은 성인만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사실 한국의 성인은 불쌍하다. 흔히 천민자본주의라고 하지만, 그 천민성에 억눌려 스스로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본문20쪽> 이렇게 단언하고는 있지만 이 부분의 마지막에 가면 대체 성인문화란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산업적으로는 왜 중요한가? 란 식의 질문만 던져놓고, 바로 이어지는 글에서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인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며 움츠러들고 만다.


앞서 큼지막하게 주장한 이야기가 서글퍼질 결말이다. 성인문화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로 제시된 건 진짜 성인문화가 존재한다면 청소년 보호도 오히려 쉬울 거란 말이다. 그렇게 간단한 이유라면 앞서의 천민자본주의와 그 천민성에 억눌린 채 타락해가는 성인들까지 들먹일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사실 이 책의 저자들이 추구하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일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 부분을 독자의 한 사람으로 듣고 싶은 것이다. 성인문화의 존재 필요성을 역설하지만 정작 이 책에서 강조된 부분은 일본의 헨타이 만화를 비롯한 여러 성인 매체와 장르들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저자들이 일본 성인 만화의 애독자이고, 전문가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만 성인문화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그 통로가 어째서 성인만화를 시작으로 해야하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는 것이다.

끝의 대안으로 주장되고 있는 "한국 성인 만화의 가능성" 부분이 그 내용의 가치판단을 떠나 맥없고, 공허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부분부분들에서 보이는 내용들은 무척 재미있고,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로도 종종 다시 읽어보곤 한다. 에로와 포르노의 차이를 말하는 것만큼 미묘한 문제가 또 어디에 있겠나? 그건 정상과 변태의 차이만큼이나 복잡해지는 문제가 아닌가.

* 참고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우로츠키 도지(우로츠키 동자)"는 지금껏 내가 본 일본 아니메 중 가장 뛰어난 것들 속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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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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