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시대의 일상사 -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국가규모의 범죄집단은 폭력과 공포만으로 지배하는가?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스펙터"와 같이 국가적 규모를 갖춘 범죄집단은 과연 가능할까? 어떤 만화나 영화들을 보면서 가끔 설명이 불충분하더라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도 나는 심각하게 궁리할 때가 있다. 앞서 말한 스펙터같이 국가와 경쟁할 수 있는 범죄집단의 가능성이 그렇고, 영화 "혹성탈출"에 등장하는 유인원 인류가 사용하는 자동소총(혹은 반자동소총)이 과연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문명 수준에서 개발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들이 그렇다(세계 최초의 반자동소총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M1소총이었다).


과연 영화 속에서 그리고 있는 원숭이들의 문명 수준이 당시 미국의 문명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런 의문이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총 한 자루 만드는 것에도 그에 합당한 기술 수준이란 것이 있으니까. 007 시리즈뿐만 아니라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는 폭력집단(유사국가 혹은 국가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은)이 단순히 폭력과 억압을 이용한 공포만으로 국가라는 조직과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을까? 소규모 폭력조직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국가 단위의 폭력구조를 유지하는 일은 구태여 그람시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폭력과 공포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는 역사란 "과거의 의미있는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간 의미없음으로 치부되어 왔던 일상의 역사적 진실을 들춘다. 저자는 독일 나치 시대를 살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하여 나치의 인종주의와 같은 중세적 야만성이 선진사회에서 돌출할 수 있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결론삼아 저자의 주장을 미리 말하자면, 이것은 결코 돌출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성, 선진 사회가 내세우는 '진보' 안에 내재된 당연한 귀결이었다. 저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Detlev Peukert)는 독일의 역사가로 '나치 시대 공산당의 저항운동' 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은 그가 81년에 저작한 것으로 나치 시대의 일상사를 선구적으로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포이케르트의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며, 부제로 되어 있는 세 가지 "순응, 저항, 인종주의"란 맥락 가운데 좌파의 역할은 "저항"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제3공화국의 기억과 제3제국의 기억

평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유럽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좌파 정당들이 존재했던 독일에서 어떻게 나치즘과 같은 극우파 정당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그의 책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그런 의문이 모두 해갈된 것은 아니나 상당 부분 도움을 얻게 되었다. 포이케르트는 우선 "순응"이란 측면에서 나치즘이 폭력적인 권력 탈취 방식을 일부(?) 사용한 것은 사실이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내 중산층과 부르주아지들이 이에 순응했기 때문으로 규정한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한 뒤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독일식으로 바꿔보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는 신무기인 후장식 소총의 도입이 아니라 프로이센 교사들의 몽둥이 찜질에 의한 훈육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1866년부터 일반적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모든 면에서 군대식으로 각을 잡은 직각형 인간들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직장에서 빈둥거린다거나 공연히 공적인 장소에서 모나게 행동하는 일탈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고 여겼다. 저자의 지적은 때때로 우리에게도 뼈아픈 일침이 된다.


제3제국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노인들의 기억 속에 두 가지 업적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문 앞에 세워둘 수 있었다는 것과, 당시에는 장발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러한 생각이 당시 유행하던 사형 혹은 가스실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특수한 형태의 테러, 즉 일탈적인 입장 혹은 일탈적인 존재를 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곳에 격리시키고 훈련시키는데 테러 방식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히틀러 치하에서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아도 도둑맞지 않았다는 판에 박힌 좋은 기억이 "절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집시들이 수용소에 수감된 것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303-304쪽 중에서>


질서를 위한 폭력을 권장하는 세력들

오늘날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있는 제3공화국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독일 제3제국 히틀러에 대한 독일 노인들의 향수는 어딘지 모르게 일탈 행위를 그나마 용납해주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이런 판에 박힌 기억은 과거 독재 시대를 미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전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극우파들과 일부 교회의 목사들이 성조기를 나부끼며 벌였던 시위를 기억하고 있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기 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 개신교 총감독 디벨리우스가 "포츠담의 날"에 행한 설교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국가사의 새로운 장은 언제나 폭력과 더불어 열립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결정, 새로운 지향, 변화, 전복은 언제나 한 편에 대한 다른 한 편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경우, 국가 권력은 안을 향해서든 밖을 향해서든 강력하게 행사되어야 합니다. (...) 국가가 국가질서를 파괴하는 자들, 특히 더럽고 비열한 언어로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신앙을 경멸하는 자들, 그리고 조국을 위해 희생한 목숨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면, 그것은 신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 질서가 수립되면 다시 정의와 사랑이 지배해야 합니다.


그날 광화문에서 있었다는 쿠데타 선동 발언에 버금가는 말이다. 독일 개신교 세력이 모두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배경에는 독일 개신교 세력의 은근한, 때로는 적극적인 지지가 작동한다. 그들은 좌파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리어 나치즘을 선동하고 나섰다. 1933년 초 몇달 동안 독일 내 좌파들에게 행해졌던 가혹한 억압 상황에서 독일의 일반 국민들은 이것을 위협받고 있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좌파에 대한 공포로 반공에 대한 공포를 잠시 잊은 결과 독일 국민은 최악의 전쟁을, 최악의 패배를, 최악의 생존을 감수해야 했다.


독일 제3제국의 신화

오늘날까지 독일 제3제국의 신화는 여전하다. 인터넷상으로도 쉽게 볼 수 있는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나치즘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들이 보여준 절도와 형식에 깊이 매료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전쟁 발발 이전의 나치 시대는 부흥과 복지의 시대로 미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대공황과 전쟁동안, 전후(제1차 세계대전)의 질식할 듯한 궁핍과의 비교를 통한 것일 뿐이다. 실제 나치가 집권한 뒤인 1930년대의 경제 분위기도 낙관적이진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경제의 호전 기미만으로 이를 반가워했고, 이를 곧바로 경제호황에 대한 낙관적 기대와 연계시켰지만, 여전히 생필품은 치명적으로 부족했다. 지금 노무현 정부는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처해있다. 국가차원에서 보았을 때 경제는 여전히 나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내수경제가 살아나지 않아 실질경제는 불황 속에 처해 있는 현실은 전적으로 언론의 탓이라 할 수는 없어도, 부분적으로는 언론의 부풀리기가 경제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히틀러가 실업문제를 조속히 해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제 제3제국의 현실이 아니라 나치의 선전이란 측면에서만 그러했다. 현실에서 수치와 통계로 드러난 실업자 감소 추세는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 5.16직후 군사정부가, 1978년 오일쇼크 이후 급증한 실업자 문제를 제5공화국이 해결한 방식은 이미 1930년대 독일에서 실시된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임금만을 받고 노동봉사대와 긴급노동대로 결성되어 체제 위신용 건물 건설에 동원되었다. 실업자 수치 자체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실질적인 실업자 감소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 독일에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1936년 무렵 전시 경제에 접어들어 군수산업이 폭발적인 호황을 누린 뒤부터이다.


다른 하나의 신화는 독일 (나치)관료 집단이 청렴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실이다. 공직과 권위를 충분히 획득한 그들은 관료로서 권력과 직위, 특권을 마음대로 전용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과거 비판해 마지 않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공무원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니 더욱 부패해 있었다. 그럼에도 히틀러 개인에 대한 인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그가 최초의 권력기반으로 삼았던 돌격대를 무자비한 폭력을 통해 해체한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초기 나치당의 지도자였던 에른스트 룀과 그의 사조직이라 할 수 있는 돌격대는 나치의 중요한 권력기반이었지만, 권력을 장악해 더이상 사병집단이 필요없어진 히틀러에게 그들은 골칫거리이자 장차 그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으로 비춰졌다.


히틀러는 재빨리 룀을 제거함으로써 권력기반을 공고히하는 결과를 나았다. 그러나 이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묘하게도 그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일로 비춰지기 보다는 독일의 골칫거리가 된 자신의 신뢰하는 수하들인 돌격대를 국민들을 위해 제거한 것으로 보였다. 히틀러는 알기만 한다면 이를 악물고 부패한 자신의 수족을 잘라낼 만큼 결단력있고, 공정한 총통으로 비춰졌고, 실제로 그렇게 선전되었다. 독일 국민들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그 순간까지도 독일 국민들의 총통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이승만이 모든 실정의 근간이자, 부패의 근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난이 이기붕과 자유당에 집중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는 나치당의 모든 부패와 실정으로부터 격리될 수 있었다. 과연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과 상관없이 집권당만 실책을 거듭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도 물어보아야 한다.


새로운 고전의 기미를 엿볼 수 있었던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가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단 생각이 들고, 이미 어느 정도는 고전의 지위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몇 가지 이 책의 단점이랄까, 아쉬움이 남아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독일 내 좌파들의 맥없는 몰락에 대해 저자의 "일상사"적인 분야에 대한 연구는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독일 내부의 문제만으로 독일 좌파의 몰락이 빚어진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이 저자의 주된 연구 분야이므로 저자의 다른 책을 보노라면 더 세세한 지적들이 있을 것이고, 이 책의 주제가 일상사이므로 국제사적인 맥락을 짚기는 어려웠겠으나 당시 독일내 좌파가 나치에 대한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실책(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의 대 소련 고립정책을 타개할 방편으로, 나치 독일이 프랑스와 우선적으로 경쟁할 것이란 판단에서 독일 내 공산주의자들의 나치에 대한 저항을 금지시켰고, 독일 좌파는 사분오열되고 만다.), 영국과 프랑스의 오판 등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아쉽다.


그러나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은 저자의 단명이다.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살아 있었다면 좋은 연구 업적들을 보다 많이 남겨주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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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공군 대전략 (Battle Of Britain)
감독 : 가이 해밀턴
출연 : 해리 앤드류즈, 마이클 케인, 트레버 하워드, 커드 저진스
제작 : 1969(영국)
 

 

서구의 몰락과 나치의 유럽 통합 계획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한 대의 허리케인 전투기가 패주하는 영국군과 프랑스 피난민들의 머리 위로 공중제비(소위 "승리의 횡전"이란 비행 포메이션)를 넘으며 멀리 사라진다. 그러자 전차에 올라탄 채 후퇴하고 있던 영국 병사 하나가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저게 어디서 사기를 쳐."  1940년 6월 5일 아침 몇 명의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 근처를 산보하듯 거닐었다. 그곳에 독일의 전격전에 휘말려 패전하며 간신히 프랑스에서 철수한 영국군 장비와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전사한 영국군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독일은 전유럽을 석권했고, 이제 남은 것은 영국 하나뿐이었다. 영국만 독일에 굴복한다면 유럽의 통합은 오늘날 EU에 의한 것이 아니라 1940년 6월 독일에 의해 이룩될 뻔 했다.

 

어떤 의미에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한 유럽의 역사에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곧 유럽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만년에 나치즘에 경사되었던 까닭, 그것은 유럽이 하나의 강력한 문명권으로 재통합하여 다시 세상의 주도 문명(패권)을 이루길 소망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렇듯 유럽을 힘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여러 위험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시도되지 않았던 역사 평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대결로서 더 의미지어져 왔다. 그러나 이런 평가만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규명해내는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1940년 6월까지의 독일은 분명 문제가 많은 폭력적 국가이긴 했으나 특별히 인류의 적이라 규정당할 만큼 사악한 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나치즘을 두둔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나 서구문명에서 한 인종에 대한 잔학한 멸종 정책의 원조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치즘이나 독일이 아니다. 그들이 소위 문명화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성취된 이후에도 혹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미 그들은 다른 인종을 멸종시킨 전례가 있다. 그 대부분은 게르만인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앵글로 색슨종에 의한 것이었는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인디언 멸종에 이르는 과정,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일어난 애보리진 멸종에 이르는 과정과 비교하자면 독일과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말살정책은 오히려 덜 잔인한 측면이 있다. 최소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과 대화는 했으니 말이다.

 

 

파시즘이 유럽에서 발호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보다 더 정교하게 규명해볼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유럽 혹은 서구(미국을 포함한)에서 파시즘(나치즘)을 바라본 시각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파시즘을 유럽문명을 수호할 하나의 중요한 정신 혁명으로 보거나, 전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공산주의보다는 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 까닭에 슈펭글러나 하이데거와 같은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은 나치즘을 지지했고, 독일 이외의 국가들 -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 심지어 미국에서도 나치즘을 지지하는 정당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유대인 혐오와 함께 히틀러를 격찬했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헨리 포드뿐만이 아니었다. 윈스턴 처칠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대단한 혐오를 드러내면서 나치즘과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인물이자 훌륭한 정치 파트너로서 격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즘이 지배하는 독일을 소련에 대한 자본주의의 유능한 방패로 인식했고, 독일이 비록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그만한 지위를 누릴만한 자격과 권리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위험을 감지한 소련의 스탈린이 수 차례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춰를 보내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해 연합전선을 만들 것을 요청했음에도 이들 국가들은 도리어 소련을 고립시켰다. 소련이 강력한 반공을 주장하는 독일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궁지에 몰린 소련의 입장에서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소련에 대한 파수견 입장보다는 좀더 쓸만하고 구미에 맞는 먹잇감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제2의 정복왕 윌리엄을 꿈꾼 히틀러

거기에는 동시에 두 곳에서 전선을 만들지 않는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어찌되었든 독일은 서부 유럽의 패자이자, 유럽을 석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프랑스를 단번에 패퇴시키는 위용을 거두었고, 독일 공군(Luftwaffe)는 일찌기 찰스 린드버그가 말했던 것처럼 "독일의 공군력은 전유럽 제국을 합친 것보다 강력"했고, 유럽 최강을 넘어 세계 최강이었다. 영국은 우군 하나 없이(미국은 이 당시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육군국이자, 공군국인 독일을 상대로 고립된 상태에서 전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방공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서 나는 전투를 지휘하겠다. 그리고 만일 침공이 시작된다면 이 의자가 내가 앉을 자리이다. 우리가 독일인들을 격퇴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내 시체를 끌어낼 때까지 나는 저 자리를 고수하겠다." 이 말은 당시 영국이 처해 있던 고립무원의 상황을 너무나 적확하게 보여준다.

 

이 무렵 독일은 영국진공계획인 "강치(시라이온)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도버 일대의 벼랑 동쪽에 있는 램즈 게이트에서 와이트도 서쪽의 라임만까지 거리로 약 320km에 달하는 장대한 영국의 해안선에 25만명의 독일군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이곳은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소수의 노르만 기사들을 이끌고 영국 정복에 나설 때 상륙한 바로 그곳이었다. 독일은 영국 점령 이후 체포할 유명인사들 - 영국수상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 버지니아 울프 등 - 의 리스트까지 작성해 논 상태이고, 독일공정부대원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버킹검궁 강하 직후 체포할 영국왕에게 건넬 인사말까지 준비시켰다. 모든 것은 치밀한 독일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도버 해협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이 보장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폭이 40km에 불과한 도버해협이긴 했지만 이 해협을 건너기 위해서는 제해권과 제공권이 보장되어야 했는데, 제해권을 장악하는데는 필수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틀 오브 브리튼의 시작 - 제공권을 잡아라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공군들을 섬멸해야 했다. 히틀러에 이어 독일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에게 이건 닭을 비트는 일보다 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스페인 시민전쟁 때부터,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점령에 이르는 기간 동안 무적의 전투 경험을 쌓은 강력한 공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 공군은 1선에 배치된 항공기만 4,500대에 이르렀지만, 영국은 제2선급 항공기(여기에는 수송기, 중폭격기)까지 모두 긁어모아야 고작 2,900대 공군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단지 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평균 2:1의 약세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독일 공군의 파일럿들은 스페인 시민전쟁을 비롯한 수않은 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에이스들인데 비해 영국 공군 파일럿들은 그런 경험이 전무한 애송이들이었고, 그나마 파일럿의 숫자는 비참할 정도로 모자라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들을 공중에 모두 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도저히 영국은 독일의 거센 공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영국인들이 이런 비교만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1940년 6월에 끝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협상을 권유한 독일의 제의를 거절했고, 그로부터 독일의 가혹한 대공습을 견뎌내는 "불의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오늘날 "Battle of Britain"이란 말은 단순히 우리 말로 번역한 "영국의 전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1940년 6월부터 시작해서 1941년 5월 10일까지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공군대 공군 사이의 대혈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때를 다룬 영화이다.

 

 

자유를 수호한 영국의 찬가

미국에게 "지상최대의 작전"이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사수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찬가라면, 영국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공군대전략)"은 그들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유럽과 자유 진영을 사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그들만을 위한 찬가이다. 그런 까닭에 "지상최대의 작전"에서 미국과 할리우드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제작한 영화라면, "배틀 오브 브리튼"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제작한 영화이다. 감독은 "007시리즈"로 유명한 "가이 해밀톤(Guy Hamilton)"이 맡았고(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자가 007시리즈의 제작자인 탓인지도 모르지만),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 역시 영국 출신의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이 앞장서고 있다(이 영화의 서플먼트에 따르면 이 배우들은 모두 제각각 가장 적은 출연료라도 감수하면서라도 이 영화에 출연하고자 했다고 한다).

 

마이클 케인 (Michael Caine), 트레버 하워드 (Trevor Howard), 커드 저진스 (Curd Jurgens), 해리 앤드류스(Harry Andrews), 이안 맥쉐인, 케네스 모어, 나이젤 패트릭, 크리스토퍼 플러머,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랄프 리처드슨, 로버트 쇼, 패트릭 위마크, 수잔나 요크 등 모두 주연급으로 한가락씩 하는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주인공은 영국 공군 대장역을 맡았던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경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할 당시 이미 암이 발병한 상태였으나 이 사실을 숨기고 출연해 "배틀 오브 브리튼"의 명장 "휴 다우딩(Hugh Dowding)" 역을 맡았다.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에 대해 여러 찬사들이 있으나, 이 영화 역시 "지상최대의 작전"처럼 수많은 유명배우들이 존재감 없이 등장했다 사라지지만 그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감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역시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연기는 탁월하다는 찬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승리 요인들

이 영화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영국이 어떻게 독일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가를 살피고 있다. 그 요인들은 우선 로렌스 올리비에 경이 연기한 휴 다우딩 장군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전략에 있었다. 다우딩은 프랑스의 패배를 예견하고, 처칠에게 더이상의 영국 공군을 도버 너머로 파병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이 때 처칠은 프랑스 수상에게 더 많은 영국 공군의 파병을 약속해 논 상태였지만, 다우딩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그 덕분에 영국은 더이상의 공군력 손실없이 다가오는 전쟁을 대비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다우딩은 영국의 모든 공업력을 항공기, 그 중에서도 전투기 제작에 최우선을 두도록 했고, 독일 공군의 폭격에 도시를 내어주면서까지 자국의 공군력을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운영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다는 우위를 철저히 이용했다.

 

독일 공군의 주력기인 Me-109는 먼거리를 비행해 영국 상공에 이르렀을 때는 최소 10분에서 최대 20분의 시간 동안만 머물 수 있는 짧은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던데 비해 영국 공군은 레이더의 지원을 받아 독일 공군이 프랑스의 기지에서 이륙하는 순간부터 대기하였다가 그네들이 도착한 시점에 비로소 요격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은 늘 시간과 연료에 쫓기며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 공군은 독일이 보유하지 못한 신형 무기인 레이더 기술에서 훨씬 더 앞서 있었으므로,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의 레이더 기술에 걸려 기습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영화는 "지상최대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실제 전쟁에서 쓰였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동원해 실제로 공중전을 방불케 하는 고도의 기동전술, 편대 비행, 전투 기술을 보이면서 촬영된 영화이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이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 전투기(일부 모델)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방식으로 촬영된 실사 영화이다. 그렇게 고증에 철저한 이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는 유일한 승리의 요인은 당시 영국군은 독일군의 군사암호를 모두 해독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승리의 요인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 공군 파일럿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불굴의 정신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처칠은 "배틀 오브 브리튼"이 끝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때는 없었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데이"는 그들이 세계를 구원한 영광스러운 날로 기억된다. 1941년 5월까지 독일이 영국에 가한 대규모 공습만 127회였고, 이 때 영국 민간인 총 6만명이 사망했으며, 8만 7천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보다 더 많은 공습과 폭탄을 독일에 떨어뜨려렸고, 무차별폭격을 가해 더욱 많은 독일의 도시들을 불태웠고, 더 많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

 

 


그 이후 바뀌지 않는 민간인 학살 - 무차별폭격의 역사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 승무원으로 독일 상공을 비행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폭격했던 지역을 여행하며 공중에서 내려다 볼 때는 다만 한 개의 점으로 보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는 군인 신분으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지만 그가 떨어뜨린 폭탄이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에 떨어져 일반 시민이 사망했다는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하워드 진은 폭격 임무 참여할 당시 폭격기 날개 밑에서 터지는 고사포탄의 검은 색 구름을 제외하면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은 물론 적진을 비행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영국인들에게 "배틀 오브 브리튼"은 자유에 대한 전체주의에 대한 도전에 대한 승리의 의미를 지닐 것이고, 이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항공전의 승리는 그 뒤에 치뤄질 무지바한 대량공습과 무차별폭격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수행방식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이제 전쟁은 더욱 가혹해졌는가? 물론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욱 가혹해졌는가? 그것은 전방의 군인들이 아니라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더욱 가혹한 것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선의 병사보다 후방의 민간인 사상자 수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이런 전쟁 수행 방식은 이후부터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수와 양을 능가했고, 베트남전은 다시 이를 경신한다.

 

 

* 이 DVD는 두 장의 타이틀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은 본 영화를 다른 하나는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 가지 점에서 두 번째 타이틀 역시 매우 재미있다. 하나는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파일럿들의 생생한 증언, 영화 제작과정의 에피소드,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휴 다우딩 장군과 독일의 에이스이자 나폴레옹 이후 유럽 최연소 장군이었던 아돌프 갈란드의 인터뷰가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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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 이사야 벌린 |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


이 말은 칼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했던 좌우명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이를 다시 재정립했던 사상가 칼 마르크스. 이와 같은 인물에 대해 일대기도 아니고, 평전을 쓴다는 일을 그것도 불과 28세의 나이로 해냈다면, 더군다나 그 책이 60여년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전의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자 피할 수 없는 난제는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자용으로 읽기에는 다소 녹록치 않은 난이도를 지녔다는 점이다.

 

같은 해(2001)에 출간된 프랜시스 원의 『마르크스 평전(푸른숲)』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물론 누군가 내게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 내지 그의 평전을 추천해달라면 나는 별 고민 없이 우선적으로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이 책과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마르크스의 사상(북막스, 2000)』 - 이 책은 책갈피 출판사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과 동일한 책이다 - 을 추천하겠다. 물론 캘리니코스의 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마르크스의 생애는 부분적으로 다루는 대신 그의 사상을 개관하는데 치중하는 편이고, 프랜시스 원의 경우엔 마르크스의 생애사에 집중한 편이므로 나름대로 일장일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명확한 구분 없이 혼용되는 편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평전은 연대기와 전기와 명확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평전과 전기, 혹은 연대기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은 평전은 그 용어 자체가 잘 설명해주듯 작가의 비평(批評)적 관점이 삽입된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당대의 뛰어난 평전 작가들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비평가이자 역사가이고 저술가였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평전을 저술했던 아이작 도이처, 마리 앙트와네트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뛰어난 글을 남겼던(그 외에도 많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바쿠닌에 대한 평전을 저술했던 E.H. 카 등은 이미 그들 자신이 뛰어난 문장가이자 사상가, 역사가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평전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시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위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음으로써 위대한 두 사상가의 대화에 관찰자이자, 적극적인 독해자로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책은 사상사가(思想史家)라는 저자 이사야 벌린의 위치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를 견주고, 궁리해가며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쪽이 훨씬 더 유익하고 재미있는 독서 체험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이라는 평가가 지탄받을 무엇이 아니듯, 정당한 까닭으로 보다 ’지적인' 수준을 요구하는 독서가 지탄받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칼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위한 투쟁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부르주아적 취향을 지녔다고 공격당하는 것과 흡사해 보이는데, 어떤 의미에서건 마르크스는 당대의 교양을 두루 습득한 인물이었던 것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을 당대의 속물적 과시에 연연해하는(이는 또한 마르크스가 평생을 두고 혐오했던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적 취향과 혼돈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교양을 부르주아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냉소적인(좌파 혹은 노동자는 우아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거나 교양을 경시한다는) 착시 현상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 책이 좀 더 대중적인 난이도를 지니지 못한 점, 좀 더 풍성한 내용으로 꾸며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벌린을 위해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이 평전은 그가 28세 때 집필한 것이고, 애초에 그가 집필했던 원고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원고의 분량 보다 많았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평전보다 쉬운 글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앨런 라이언은 이사야 벌린의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 “영어권에서는 이런 종류의 주제에 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위와 같은 고백을 논외로 하더라도 마르크스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그가 사망했을 무렵, 영어권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러시아혁명을 통해 수립된 이른바 공식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바라보는 마르크스, 세계대전과 헝가리 사태를 겪으며 재발견되기 시작한 인간적(청년) 마르크스, 다시 루이 알튀세르에 의한 구조적 마르크스에 이르는 여러 연구 방향과 해석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의 마르크스가 출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과 관점의 차이,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의 평전이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분명 마르크스의 사상 그 자체에서 발견되어야 하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이사야 벌린의 뛰어난 지적 통찰과 한 인물의 사상과 지적인 흐름을 더 이상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사야 벌린은 마르크스를 계몽주의 산물이자 계몽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동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제1장 서론에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De omnibus dubitandum)."던 마르크스의 모토에 지극히 합당한 인물평을 적고 있다.

 

마르크스는 선천적으로 강하고 능동적이며 실제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불의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으며 쉽게 상처를 받거나 감상에 빠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우둔함은 물론 지식인들의 자기만족적인 미사여구와 주정주의도 혐오했다. 그는 부르주아지를 위선적인 데다가 자기 기만적이며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는 데 골몰해서 당대의 특징적인 사회적 현실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평가했고, 지식인은 현실과 동떨어진데다가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같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데 불과한 잡담이나 일삼는 사람들로 판단했다. <본문 20-21쪽>

 

이사야 벌린의 문장을 읽노라면 그 자신이 마르크스 못지않게 불친절한 사람이면서, 그가 마르크스에 대해 묘사하고 있듯 천재적인 발상에 비해 더딘 문장에 대해 조급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혼란과 궁극적 붕괴를 향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사회는 반동적이다. 물론 어떤 사회 체제라도 붕괴에 직면하면 구성원들에게 비합리적으로 현체제의 궁극적 안정에 대한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는 징후들을 스스로 감추려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체제라도 일단 역사의 판결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구원될 수 없는 데도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주의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류는 바로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을 거쳐,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투쟁에 의해 자신의 힘을 완전히 실현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본문 32-33쪽>

 

위의 문장을 읽으며 이사야 벌린이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크스 못지않게 신랄하고, 핵심으로 곧장 진입해가는(물론 두 사람 모두 불친절하다는 공통점을 지녔으나) 문장을 지녔다. 그렇기에 그는 마르크스의 학설에 대해 "(마르크스의)학설은 적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기지의 무기에 대처할 수단을 갖추고 있어서 직접적인 공격으로는 함락할 수 없는 일종의 거대한 구조물"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사야 벌린이 쓴 글 가운데 우리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우화를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을 고슴도치와 여우로 비교한 글이다. 그는 「고슴도치와 여우」란 에세이에서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여우는 영리하고, 교활한 짐승이기에 고슴도치를 기습할 많은 전략들을 무수히 짜낸다. 그리고 고슴도치를 습격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단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방패삼아 숲 속 한적한 오솔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이다. 기회를 틈타 여우는 잽싸게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러나 위험을 느낀 고슴도치는 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송곳 같은 가시를 곤두세운다. 여우는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를 어찌하지 못해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나 어떻게 하면 고슴도치를 공략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전략 세우기에 골몰한다. 여우와 고슴도치의 지혜를 따질 때, 우리는 당연히 여우의 지혜가 뛰어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번번이 싸움에서 이기는 건 고슴도치다.

 

이사야 벌린은 이 우화를 통해 사람들을 두 가지 그룹, 여우와 고슴도치로 나누었는데,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그 복잡한 면면들을 두루 살피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해내기 보다는 모순도 한데 아우르는 편이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상으로 종합해내고 통합해낸다. 그에 따르면 이 고슴도치들이 바로 프로이트(무의식), 다윈(자연도태), 마크르스(계급투쟁) 등이다. 그렇다고 이사야 벌린이 절대적으로 고슴도치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벌린이 여우에 속하는 인물로 거론하는 이(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괴테, 발자크 등)들의 면면이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특히나 어떤 인물에 대한 평전을 읽을 때 다뤄지는 인물 못지않게 그를 다루고 있는 인물(저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사야 벌린은 유대계로 구소련 영토였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부유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리가에 진군하자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 그곳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경험하고, 11세 무렵 영국으로 망명한다. 유대인에겐 특히나 격동의 시대였을 20세기 초엽의 유럽, 라트비아라는 슬라브 문화의 영향 아래 놓인 지역 출신의 인물이 냉전 시대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것, 물론 당시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과 미국인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들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당시 유대계 출신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성향(탈민족주의적 세계주의)을 그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쟁 기간 중 영국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모스크바에서 수개월간 머물며 당대의 소련 지식인들과 교유했고(그 가운데 안나 아흐마또바와는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전후에는 사상사 연구에 집중하면서 그는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 자신의 삶의 역정이 한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고 있는 이사야 벌린,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라거나 정치적 좌파로 구분될 수 없음에도 (만약 그런 분류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를 우리 사회에 산재해있는 속류 우파들과 다른 진정한 의미의 ‘리버테리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칼 마르크스에 대한 균형감각과 사상사적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마르크스와의 격조 있는 지적 대화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 이사야 벌린의 이 책은 1982년 신복룡 선생의 번역으로 평민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다만 이 책을 선택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첫째는 이 책이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에 대한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탈자가 종종 눈에 띄고, 요사이 유행하는 작은 판형(이 책은 110X190)이다 보니 펼쳐놓고 밑줄 쳐가며 읽는 습관이 있거나, 좀 오랫동안 생각하며 읽기에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일부러 오탈자에 신경 쓰며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왕 눈에 띈 오탈자가 몇 개 있어 이야기해보면  57쪽 "유대인 출신인 시인하이네"에서 시인과 하이네는 띄어 써야 하고, 276쪽의 "마르스크"는 "마르크스"로, 451쪽의 사진 캡션에 들어간 "리프크네이트"는 "리프크네히트"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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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KODEF 안보 총서 15 -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 | 임윤갑 (옮긴이) | 플래닛미디어(2009)

전쟁 종전일이 아닌 전쟁 발발일을 기념하는 기묘한 국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동안 전쟁을 먼 나라, 남의 이야기처럼 여겨왔던 오만의 결과일까.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했던 2010년 한 해 동안 전쟁의 기운이 검은 안개처럼 한반도에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왜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학자로 연구에 전념해왔고,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의 편집자로 국제연합(UN)에서 정치국 국장으로 활동하며 현장 경험도 풍부하게 쌓았던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의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Why Nations Go To War)』를 읽었다. 2009년엔 『전쟁의 탄생』 말고도, 갈라파고스 출판사에서 다케나카 치하루가 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도 출간되었는데, 전쟁 발발의 근본원인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이란 점에서 이 두 권의 책은 이전(2007, 아카넷)에 나온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의 『인간 국가 전쟁(Man, the State and War)』과 함께 비교해가며 읽어볼 만하다.


전쟁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전쟁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인류의 지혜 역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앞서 언급한 케네스 월츠는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 사회 또는 국가의 특성 그리고 국가체제의 구조적 특성을 연구함으로써 전쟁을 인간적 수준, 국가 ․ 사회적 수준 그리고 국제체제적 수준으로 분석’했다. 존 헤르츠(John Herz)는 국가 내부의 경쟁을 조율하는 정부가 존재하는 것처럼 국가 간의 경쟁을 조율해줄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필요이상의 긴장이 고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았고, 오르간스키(A. F. K. Organski)는 2위 국가가 1위 국가(헤게몬)로 전환하려는 가운데 전쟁 발발 가능성이 증대된다고 보았지만 전쟁의 원인은 인류 역사상 벌어진 전쟁의 숫자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 G. 스토신저(John G. Stoessinger)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 지금까지의 전통적 - 전쟁이 인간 ․ 사회가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상황이나 인간 본성, 체제, 경제적 요인과 같은 근본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 - 인식을 대신하여 그것이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그 중에서도 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자(리더)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란 국내 제목이 『Why Nations Go To War』라는 영어 원제보다 저자가 추구하려는 진실에 좀더 근접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에서 저자가 ‘누가 왜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라고 물을 때 ‘왜?’에 대한 답은 그때그때 경우에 달라지겠지만 ‘누가?’에 대한 답은 언제나 ‘지도자’가 될 것이다.


집단적 범죄와 지도자의 결정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대학 국제외교학과의 존 G 스토신저 교수는 『전쟁의 탄생』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몇몇 가지의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미국 중심의 주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판단하기 쉽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는 외부 요인 못지않게 해당 결정을 내린 지도자도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그는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비춰지기도 쉽다. 게다가 ‘스토신저’라는 그의 성(姓)을 보면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처럼 그가 유대계 미국인이라는 것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서장」에서 자신이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 지도자를 중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무렵 그의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살고 있었다. 스토신저의 계부는 히틀러 통치하의 오스트리아는 너무 위험하단 이유로 체코 프라하로 떠났지만 그마저도 점령당하자 어떻게 해서든 히틀러와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중국대사관을 통해 비자를 받아냈고, 소련을 통과해 일본까지 넘어가는 극적인 여행을 경험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오랫동안 유럽에서 살고 있던 스토신저 일가가 유럽의 집단적 광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판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나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로 평가받는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네((杉原千畝)의 도움 덕분이었다.


존 G. 스토신저는 그와 같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집단적 범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둠의 시대에도 우리의 인간성을 재확인하면서 심지어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악마와 맞서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심연 속에서도 도덕적인 용기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항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의 이와 같은 개인적 체험은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개개인의 인간이 지닌 용기와 선택의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신뢰하게 되는, 다시 말해 훌륭한 인간이 지도자가 된다면 전쟁을 피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토신저는 정치나 경제적인 요인들이 전쟁의 ‘징후’를 몰고 올 수는 있어도 전쟁 수행의 ‘결정’을 직접 내리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바로 ‘지도자’들이 전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이 벌어지는 요인에 주목한다. 이 부분이 존 G. 스토신저를 이전의 다른 학자들과 구분되게 만드는 요인이면서 동시에 그의 학문적 엄밀성을 약화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전쟁에 이르기 까지

존 G. 스토신저는 전쟁 발발 요인을 지도자에게 주안점을 두어 분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책임을 지도자에게만 묻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주요 전쟁의 배경과 개별적 원인을 분석하고 그와 같은 상황들 속에서 지도자들이 전쟁을 결정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피고 다시 이를 개념화하여 정리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는 1장 「철의 주사위」 편에서 그는 장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개전 선언 이전까지도 이 전쟁이 수년간에 걸쳐 장기화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 하나가 당시 독일의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였음을 지목한다.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섣부르게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러시아 황제가 섣부르게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이런 기대와 달리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적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이 충분히 강력하고 길게 이어지면, 그 인식은 결국 사실이 된다.

위기상황에서 힘에 대한 인식은 특히 중요하다. 초기 단계에서 지도자들은 자국의 힘은 과장하고 적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빌헬름의 서약은 러시아 군사력에 대한 근본적인 경멸과 러시아 지도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신뢰했다는 방증이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도 러시아의 군사력에 대해서 실제보다 허약하고 성가신 존재로 인식하고 멸시했다. <본문 63-64쪽>


이와 같은 인식을 토대로 상대국의 전쟁수행능력이나 의지를 낮게 평가하면서 실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황제는 “우리는 지금 물러설 수 없다”라고 호언하는 것이 세르비아의 애국자들에게는 적나라한 침략으로 비출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러시아 지도부에겐 그와 같은 공언들이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전쟁 이외에 다른 대안을 강구할 수 없도록 몰아가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 계획을 입안한 군부의 고위 인사들 역시 평화를 유지하기 이전에 자아의 보존을 좀더 중시하는 경향, 다시 말해 군부와 군부의 이해관계에 귀속되어 있는 자신들의 입장과 처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피할 수 없게 될 막대한 희생에 대해 침묵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눈을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


2장 「바르바로사 - 히틀러의 소련 공격」은 가장 의심이 많고 교활하며 사악한 인간인 스탈린이 가장 비이성적인 히틀러의 이성적 행동에 대해 기대하고 신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나쁜 악마가 같은 놈은 어쩌다 더 나쁜 악마에게 속았을까? 쯤 되는 물음을 던진다. 게다가 이 악마는 처음부터 슬라브족을 노예로 만들고 소련을 그들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에 포함시키겠노라 공언까지 하고 있었지 않았던가. 잇따라 전해지는 독일의 침공 예보(침공 직전 1년 동안 84번의 경고가 소련에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붉은 군대’ 장교의 10분의 1을 숙청했고, 그 결과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예하부대 지휘관의 5분의 1이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존 G. 스토신저는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앞두고 소련 전투력의 중추를 꺾어버리는 숙청을 단행한 까닭으로 스탈린 자신이 소련 내부에서 차지해야 하는 권력의 안전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국가의 안전보다 우선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1939년 맺은 독 ․ 소 조약은 소련에게 독소처럼 작용했지만 침공 직후였던 1940년 7월 스탈린은 소련 인민들에게 전쟁을 독려하는 첫 방송에서조차 독 ․ 소 조약은 옳은 선택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히틀러보다는 더 나은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전쟁의 행운이 그를 배반하고 소련으로 가고 있을 때에도 그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패배가 확실해졌을 때에도 몇 번이고 군대를 증원했다. 반면 스탈린은 그의 초기 실책을 깨달았고 그리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본문 104쪽>


완전히 새로운 전쟁, 완전한 승리에 대한 유혹 - 한국전쟁

『전쟁의 탄생』은 여러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은 3장 「승리의 유혹 - 한국전쟁」편이다. 2009년에 번역된 『전쟁의 탄생』은 열 번째 판으로 저자인 존 G. 스토신저는 판을 거듭할 때마다 새롭게 추가된 사실들을 책의 내용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 수록된 한국전쟁에 대한 내용 역시 전쟁 발발 이후 현재의 핵 위기 상황까지 일부 반영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이란 역사적 사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면 중 하나로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손꼽는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면서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되었다.



유엔군이 38선에 접근했을 때 그것을 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유엔군을 진퇴양난에 빠지게 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무력 침략은 38선을 파괴한 행위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침략자에 대한 ‘맹추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유엔군의 임무가 단순히 ‘무력침략을 격퇴’하는 데 있다면 북한 침략 이전에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되지 않았던 곳으로 유엔군을 진격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유엔군이 38선을 넘느냐의 문제를 누가 결정할 것이며 만일 그렇다면 그 목적과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중대한 문제도 제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북경 주재 인도 대사 파니카(K.M.Panikkar)는 “만일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보냈다. <본문 124쪽>


9월 하순에 개최된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의 의지에 따라 38선을 넘어 한반도에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라고 결의한다. 10월 1일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고, 미군도 10월 7일 북진을 시작했다. 10월 2일 파니카 주중 인도대사가, 10월 10일엔 중국의 외무장관 주은래 역시 “중국은 이 침략전쟁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지만 미국과 맥아더 장군은 이것을 중국 특유의 허풍으로 받아들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만나 중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받았는데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가능성을 희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 편으론 북진을 승인하면서도 미국은 중국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면서 중국 달래기에 나섰다. 맥아더는 중국을 팽창욕구는 가득하지만 실제로 그럴 능력은 없는 국가로 평가했고, 중국 인민해방군에 대해서도 경멸에 가까울 만큼 낮게 평가했다. 그는 1950년대의 중국 인민해방군을 1940년대의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판단을 신뢰했고, 그의 판단을 신뢰한 결과는 매우 혹독했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개입은 국제문제 인식의 다양함을 실제로 보여준 좋은 예였다. 이러한 인식은 실제상황을 인식하는 데 매우 유효하다. 일단 상황이 명확하게 평가되면 특정 대안은 배제된다. 일반적으로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방과는 화해가 어렵기 마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한국에 개입하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힘을 무시할 정도라고 생각할 경우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일종의 허풍으로 치부했다. 자신과 정반대의 이데올로기를 지닌 상대방과는 좀처럼 타협하기 어려운 것처럼 미국과 중국은 재앙이 될 분쟁의 문턱에서조차 상대방의 국제적 역할을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한반도를 또 다른 18개월 동안 파괴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본문 133쪽>


트루먼이나 맥아더가 처음부터 북한 점령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이런 상황을 반전시켰고, 침략자를 응징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의지를 미국의 의지에 종속시킴으로써 유엔은 중재자에서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 이후 남북한 혹은 양대 진영 사이에서 국제적 중재자의 역할을 포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 결과 전쟁은 1950년 10월 1일로부터 2년 반 동안 더욱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미군 전사자 3만 4천 명, 남북한 130만 명, 중국이 대략 150만 명에서 200만 명 정도가 전쟁터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채 휴전했다.


남북한은 현재까지 어떤 심판자나 중재자, 완충 없이 완전무장한 채 60년간 대립하고 있는 중이다. 김일성은 1994년 사망했고,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해 1994년 제네바에서 북한이 핵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2개의 경수로와 핵 발전 원자로 건설의 대가로 핵무기 개발계획을 폐기할 것을 약속하는 북 ․ 미간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클린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키면서 선제전쟁 전략에 대한 독트린을 발표한다. 예방전쟁, 선제공격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부시 독트린의 발표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 상황 등을 지켜보며 북한은 이것을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선전포고)으로 인식했고, 2003년 NPT(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겠다고 위협했다. 2003년 4월 북한은 NPT조약 체결 32년 만에 처음으로 탈퇴한 국가가 되었다.


2003년 6월 북한과의 전쟁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점진적으로 북한과 한국 사이 비무장지대로부터 멀리 병력을 재배치하는 데 합의했다. 1,7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한국의 수도 서울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포병의 사거리 내에 위치했었다. 미국과 한국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군사력의 재배치는 양측 100만 명 이상의 군사력으로 항상 긴장을 유지해온 전쟁의 위험 상황을 다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은 달랐
다. 이들은 거대한 규모의 재래식 군사력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핵개발을 선택했다. <본문 137쪽>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지하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전까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가리켜 ‘최악의 독재자’라고 지칭하며 그 같은 최악의 독재자가 다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무기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북한이 핵무기를 갖도록 부추긴 결과만 빚고 말았다. 미국의 샘 넌(Sam Nunn) 전 상원의원은 “우리는 악의 축의 잘못된 끝에서 출발했다”며 부시의 악의 축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했다.


상대 지도자(국가)의 의지에 대한 오판과 자국에 대한 오만

20세기에 가장 길었던 전쟁은 베트남전쟁으로 베트남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투쟁한 기간은 장장 30년에 이른다. 한 세대가 흐르고 미국의 대통령 5명이 바뀌는 동안 미국은 상대가 지닌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과 의지, 자신들과 겨루고 있는 베트남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했고, 심지어 경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물론 미국 자신은 아시아 전반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베트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특히 존슨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수없이 많은 이념적 조각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전쟁이 지닌 기본적 특성이 공산주의 대 반공산주의의 이념적 전쟁이기 보다는 식민주의에 대항한 전쟁, 혁명과 반혁명에 대한 혁명전쟁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군은 거의 언제나 대부분의 전투에서 상대방보다 적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열악한 조건과 상황에서도 기꺼이 전투에 임했고, 죽음을 불사했다.


존슨과 미국은 호치민과 베트남을 마오쩌둥과 중국의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로 여겼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호치민은 1920년 프랑스 공산당 창설자 중 한 명이자 옛 볼셰비키 당원으로 공산주의의 세계에서 호치민은 마오쩌둥보다 앞선 원로 공산주의자였다. 한국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하기도 했고, 우리에겐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로 잘 알려진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같은 이는 호치민을 가리켜 “한쪽은 간디의 모습을 또 다른 한쪽은 레닌의 모습을 가진 완전한 베트남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언론은 그를 경멸적으로 묘사하여 “모스크바에서 기술을 익힌 염소수염의 선동가”라 불렀다.


오랫동안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승리를 거의 쟁취할 뻔했던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며 전쟁에 끼어들었던 미국은 정작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거의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은 베트남의 진구렁에서 오랫동안 싸움을 이어나갔지만 이들이 1973년 파리에서 확인한 것은 이미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결정되었던 상태로 고스란히 되돌아갔음을 인정하는 일 뿐이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7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투하된 폭탄의 80배나 되며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00배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폭탄들은 폭 25~50피트에 깊이가 5~20피트나 되는 폭탄 구덩이 2,000만 개를 남긴 것과 같았다. 폭격 후 베트남의 대부분은 달의 표면처럼 보였고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아무 것도 자랄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미국도 전쟁이 끝난 후 후유증이 심했다. 미국의 지도부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심을 잃었으며 대학은 붕괴되었고 경제는 전시 통화팽창으로 부풀어 있었다. 5만 8,000명의 전사한 미군을 베트남에서 싣고 온 금속관이 전쟁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의미의 상징이 되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공산당의 초기 승리와 이 전쟁의 고뇌 중 어느 쪽이 희생을 덜 치르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베트남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명의 미군도 인도차이나에 파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대안을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에 선택되지 않은 길이 어느 쪽으로 인도되었을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베트남은 훨씬 일찍 공산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의 형태는 모스크바와 베이징과는 다른 아마도 독립정신으로 무장한 강력한 민족주의 성격을 띤 티토주의적 공산주의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도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산화의 연기의 대가로 5만 8,000명 이상의 미국인의 생명과 300만 명의 베트남 사람들의 희생, 그리고 1,500억 달러의 가치와 맞바꿀 수는 없었다. <본문 185-186쪽>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정책 입안자 중 한 명이었던 딘 러스크는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끝난 베트남전쟁에 대해 “개인적으로 나는 두 가지 실수를 했다. 나는 북베트남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를 과소평가했고 미국인의 인내력을 과대평가했다.”라고 말했다.


잘못된 역사와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전쟁 - 유고내전

발칸반도 지역은 오랫동안 유럽의 화약고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에 값하듯 20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총성도, 20세기의 끝을 알리는 유고 내전도 모두 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키신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슬람교도의 세 종교적 집단 중 어느 것도 다른 집단의 지배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때때로 터키나 오스트리아 또는 공산세력과 같은 외부세력에는 굴종했으나 이들 상호간에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었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1941년 나치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한 기간 동안 이 3개 민족은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 못지않게 서로에 대한 증오 역시 맹렬하게 불태웠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악명 높은 ‘우스타쉬(Ustashes)'를 만들어 비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체트니크(Chetniks)'를 만들어 비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 이들 모두와 투쟁하며 통일된 유고슬라비아를 세운 것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혼혈이었던 열쇠 수리공 출신의 빨치산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였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는 대외적으로 ’형제의 단결‘이라는 슬로건 속에 통합되어 있는 듯 보였다.


티토 사후 1990년대 초반에 벌어진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내전, 처음엔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후 보스니아에 이르기까지, 인종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서로 혼인하고 바로 이웃에 살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서로에게 총질을 하며 잔학행위를 일삼았던 전쟁이었다. 물론 최악의 범죄자는 세르비아였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유일한 가해자도, 그렇다고 유일한 악도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전 유고슬라비아 주재 미국대사는 “그들의 가장 비극적인 실수는, 그들 자신의 역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과거에만 가 있었으며 미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학살의 주범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 대해 존 G. 스토신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죽음과 배반의 그늘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자살했다. 그는 아내 미라와 함께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위한 피난처를 찾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밀로셰비치의 아내 미라는 유고슬라비아를 지배했던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조카이자 수양딸이었다.


1946년 5월 1일, 티토의 오랜 연인 즈덴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즈덴카의 죽음에 가슴 아팠고,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에 조그만 기념비를 세우고, 매일 그녀의 기념비에 헌화한다. 즈덴카에게는 사촌 베라 밀레티치가 있었다. 그녀는 파르티잔과 결혼해 딸 한 명을 낳았는데, 곧이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한다. 그녀는 갖은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토설했고, 그로인해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 파르티잔 동료들에게 체포돼 총살당한다.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부모들은 밀레티치의 딸 미라(미랴나)를 입양한다. 그녀는 훗날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결혼하는데, 이들에게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세르비아의 역사는 그들이 수호해야할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되찾아야 할 세르비아 역사의 성지는 코소보였다. 1389년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진격에 맞서 코소보에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500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민족의 성지가 되었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알바니아계 이슬람교도들은 같은 유고 국민이 아니라 과거의 원수들이었다.


실제로 그 장소에서 그 같은 전투가 벌어졌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민족과 종교 사이의 증오에 다시 불이 붙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터진 총성과 1994년 사라예보의 총성은 전혀 달랐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사건은 유럽을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방아쇠가 되었지만 1994년엔 세계 열강 중 누구도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죽임에 대해 개입하길 꺼려했다. 어느 강대국도 이 지역에 개입해야 할 이해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강대국들이 수수방관하는 동안 인종적, 종교적 증오에 휩싸인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는 서로에 대한 증오를 맘껏 불태웠다. 결국 1999년 미국과 나토가 개입하면서 잔인한 학살극은 막을 내렸다. 영국의 역사학자 노엘 맬컴은 세르비아 측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1389년의 코소보전투에 대한 신화는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떤 한 민족이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신화는 그 자체의 진위 여부로 믿음을 얻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노엘 맬컴의 주장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 기든 가틀립(Gidon Gottlieb)은 “민족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오직 인종적 특징이나 문화의 공유뿐 아니라 역사, 잘못 저지른 실수, 희생을 포함해 정치술의 냉혹한 고려사항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국민들을 움직인 상징이나 전설적인 요소에도 근거를 둔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1994년의 대학살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전쟁 -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이 벌인 실수

이외에도 존 G. 스토신저는 6장 「신의 전쟁」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현재까지 치르고 있는 오랜 분쟁의 역사를 다루고, 7장 「성지에서의 60년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그리고 8장 「후세인의 전쟁 - 이라크의 이란,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쟁」을 다루고 10장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전쟁 - 미국과 이슬람 세계」에서 21세기 초엽 9.11테러 이후 부시의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전쟁의 양상과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저자는 이 모든 전쟁의 양태를 두루 살피는 와중에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렇듯 서로 다른 전쟁이 결국 서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이 벌인 실수이며 전쟁은 결코 인간의 천성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전쟁은 회피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는 무엇보다 전쟁은 지도자의 성격, 그 중에서도 ‘지도자의 잘못된 지각’이 사실상 ‘전쟁의 시작과 평화 유지’라는 정책의 향배를 결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해 존 G. 스토신저 교수의 의견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역사상 벌어졌던 전쟁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모든 전쟁이 사실은 하부 구조, 다시 말해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주장을 과학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서로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에 의해 벌어진다는 주장을 비과학적인 주장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남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남북한 경제협력, 특히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이 안전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데, 여기엔 한 가지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물론 경제적 이해관계가 서로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고, 전쟁이 양측의 이해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인식은 전쟁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좋은 전제조건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양 측의 잘못된 오해와 인식 혹은 증오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개성공단이 아무리 잘 돌아가고, 경제적으로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하더라도 증오의 물길이 파놓은 심연이 너무 깊다면 전쟁의 위기는 상존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존 G. 스토신저의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Why Nations Go To War)』을 통해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길 바란다.


마지막 하나의 경고는 “우리가 들어왔던 어떤 전쟁이 과연 ‘불가피’했던 것인가?”였다. 이 단어는 내가 연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철의 주사위’를 다루는 순간부터 수없이 떠오른 질문이었다. 십자군들은 특히 그러한 주장을 좋아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역사는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외교정책을 결정한다. 이들은 지혜롭게 혹은 어리석게 정책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책을 만든다. 전쟁 이후에 역사가들은 종종 전쟁을 뒤돌아보고 운명이나 불가피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결정주의는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은유에 불과하가다. 결국 우리의 생에는 자유의지와 자기 결정이 있을 뿐이다. <본문 537쪽>


다시 말해 그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란 없으며, 평화란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을 때 비로소 조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쟁이냐, 평화냐는 선택은 잘못된 인식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선택되는 것이며 전쟁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한 사람은 전쟁이 수행되는 동안 천천히 그리고 아주 오랜 고통 속에서 전쟁의 맨 얼굴을 직접 대면한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전쟁이 지닌 가장 큰 딜레마는 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큰 스승이 곧 전쟁 그 자체라는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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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2001)


『계몽의 변증법』은 인간을 계몽되지 못한 신화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한 ‘이성(理性)의 힘이 왜 오늘날 도리어 야만상태로 인류를 몰아가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정리한 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M.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어렵다는 평을 듣기는 하지만, 한 때 유행했던 포스트모던한 난해함과는 다른 성격의 어려움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읽는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첫째는 T. W. 아도르노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과 싸워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책을 읽는 것 못지않게 문장 하나를 읽은 뒤 요구되는 사유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어려움은 첨단 유행을 따지는 우리 사회의 빈약한 지적 풍토(트렌드)와 싸우고, 두 번째는 한 차례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차분하게 띄엄띄엄 되새김질하는 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전으로 인정받는 대개의 책들이 그러하듯 『계몽의 변증법』 역시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읽기에 따라 사전지식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다. 내 나름대로의 독서체험에 따르면 신화학에 대한 공부가 사전에 어느 정도 있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이 쓰이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종종 잊기 쉬운 『계몽의 변증법』 읽기의 한 방법이다. 오늘날 아도르노의 생각 혹은 아도르노에 대한 생각이란 점에서 후학들의 평가는 상이한 편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난 2년간 이 책을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읽어야 하는 경험을 했다. 한 번은 신화학적인 입장에서, 다른 한 번은 문화연구(cultural study)적 입장에서, 다시 한 번은 문화경제(cultural economy)적 입장에서(이 책의 2장에 수록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산업에 대한 견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읽었다.

 

아도르노에 대한 평가의 변화 역시 우리 사회의 빈약한 지적 풍토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이는 이제 시대의 조류로부터 멀어졌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 반대로 그의 중요성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확실한 건 이렇든 저렇든 그는 여전히 중요한 이론가이며 특히 문화를 학문적 틀 속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결절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1947년에 쓰인 이 저작이 현재까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 이 한 권의 책을 두고도 후대의 학자들 -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 아도르노와 쇤베르크』(문학과지성사, 2002년), 권용선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2003년), 이순예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 계몽의 변증법에서 미학이론까지 아도르노 새롭게 읽기』(풀빛, 2005년) 등 - 은 계속해서 새로운 연구서들을 펴내고 있으리라. 흔히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나치에 의한 지배를 가능하게 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펴낸 책이라고들 하는데, 그것이 옳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책의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하게 지적하는 부분 중 상당수는 그들이 미국 망명 생활 중 경험한, 자본주의 체제 하의 대중과 문화산업에 의한 대중문화에 기인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을 나치즘 못지않게 위험한 대중선동, 세뇌 장치로 인식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1920~1940년대 러시아 혁명 이후 출현한 소련의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등 비이성적인 전체주의 세력이 유럽 전역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념적 좌우를 막론한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전체주의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고,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나 좌파적 노동운동은 비이성적 세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노동자계급(대중)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하였고, 원자화된 대중사회는 결국 전체주의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문화라는 용어는 마치 대중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문화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위험 때문에, 그것을 대신하는 용어로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들의 문화 연구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에 걸쳐 주로 이루어졌는데 오락산업의 융성, 매스미디어의 급속한 발전,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문화조작, 미국에서의 영화산업과 음반 산업의 급속한 발전 등이 당시 문화적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스어로 포만, 교만, 멸망을 의미하는 말로 코로스(kopos), 휘브리스(hybris), 아데(ate)란 말이 있다. 이 세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코로스는 ‘죄가 많다', 휘브리스는 ’난폭하다', 아데는 ‘파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할 때 저지르게 되는 죄가 휘브리스, 즉 ‘오만'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신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휘브리스를 범하는 자는 항상 가혹한 벌을 받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된다. 개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인식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해 완전히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이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주체(主體)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휘브리스(hybris)인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자유 의지에 의해 움직였지만 결국은 신들이 정한 운명에 따른 결과가 되어 버렸다. 성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따른다고 지나치게 자신하고 있을 때, 신들이 애써 경고한 메시지를 거부할 때, 신들에 의한 운명은 역습을 가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만물의 근원은 신(神)에 의한 것이며, 신들이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애니미즘이 사물을 정령화 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한다”고 말한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계몽의 목표를 추구해왔다. 노아의 홍수라는 자연 혹은 신의 징벌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간은 바벨탑을 세우려 했고,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죽음의 신 타르타로스를 쇠사슬로 묶었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혜택을 망각하고, 끊임없이 숲을 개간하고, 자연으로부터 얻은 사랑(자원과 기술)을 망각하고 욕보였다. 지식의 목표는 ‘방법’,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고 좀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으로 변질되었다.

 

신성이 깃든 자연으로부터 우리는 아주 멀리, 아주 높이 날아올랐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지혜를 얻고, 무리를 지어 기술을 전수했으나 이것은 자연과 더불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사회를 일구고, 자연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계몽의 합리성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인간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부정하는 탈신화화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어쩌면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 신화는 모든 가르침의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상력에 반대하는 계몽의 원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가 되었고, 하늘 아래 더 이상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었던 인간은 자신들의 이성을 통해 이미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쳤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으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화한다.(신화의 세계, 자연, 사물을 생명을 지닌 대상으로 취급한다면 계몽은 자연을 죽은 것으로 취급하여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 대한다.) 나는 아도르노의 이런 문제의식이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entropy)』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지리와의 합일을 도모하여 여기서 얻는 만족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적인 해방감을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400여 년 전 베이컨과 데카르트, 뉴턴에 의해 구축된 ‘객관적 지식이 있으면 인간은 자연계를 지배할 수 있다.’세계관(패러다임)을 통해 산업혁명이 가능했고, 끊임없는 성장과  한계 없는 진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리프킨은 문명비판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할 것을 제의한다.

 

“세상은 갈수록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어서 여기저기서 끝없는 수선과 짜깁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몰아 붙여 탓해 보아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정치권의 리더나 누구 대단한 사상가라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붕괴로 몰고 가는 냉혹한 기운이 세계를 잠식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바로 우리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가한 이성에 대한 비판은, 신화에 대한 계몽이 그 자체로 신화가 되어버린 상황(파시즘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계몽에 대한 재계몽의 기획으로서의 비판(이론)이다. 비록 그가 제시한 사유 방식은 어둡기 그지없으나 우리가 그 길을 외면하는 것은 빛(enlightenment)을 보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아도르노,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사용하기 시작한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앞서 말했듯 대중문화의 생산 과정을 지칭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이전 세대의 연구자들은 문화를, 산업과는 별개의 혹은 산업과는 완전히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고도의 도구적 합리성과 관료제화한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된 물질적 기반을 그들 나름대로 분석하고, 이해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화할 수 없는 것까지 시장 기능에 의해 사물화(reification)한다. 사용가치(소비자가 상품에서 얻는 효율성)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변형하고, 왜곡시키는 데 기여한다. 당시 출현하기 시작한 라디오와 인쇄매체 등의 매스 미디어와 광고의 결합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태(lifestyle)을 만들어냈고, 결국 자본주의 초기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율성과 주체성은 상실되어 버렸거나 자본주의적(에 적합한) 주체성으로 변질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주장하는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된 문화의 상품화, 예술이 대량 상품화됨으로써 예술의 탈예술화, 즉 예술만의 고유한 자율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주장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이나 『예술의 비인간화』 등에서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하의 문화산업은 ‘교환될 수 있는’ 상품으로서, 예술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완전히 대체해 버렸다. 문화산업은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에 따라 항상 동일한 것을 대량으로 제공한다. 그것은 계획, 통제되고, 예견 가능하며 계산 가능한 상품들만을 생산한다.

 

두 사람은 결국 예술이 문화산업의 메커니즘에 구속당함으로써 관리되는 사회의 총체적인 물화에 빠져든다고 보았다. 문화산업의 메커니즘 속에서 대량생산된 작품 아닌 열등한 상품들은 이전의 고유한 진정성을 지닌 예술 작품들을 모방함(이 과정에서 대량생산에 적합하도록 규격화)으로써 사회적 위계질서에 대한 복종을 조장하고, 이를 은폐한다(부자도, 빈민도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는다). 문화산업은 대중들을 사회의 총체성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기만하는 술책이며,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도록 길들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이 현대의 대중문화가 지닌 도구적 합리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자본주의의 허위의식을 주입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게 만든다고 본 비판엔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비판이론과 자율예술은 대중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이들을 결집시킬 수도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논리는 반대중적 엘리트주의란 비판을 받게 된다. 이들이 바라보는 대중은 근본적으로 조작의 대상일 뿐이지 혁명을 추동할 수 있는 동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를 살다가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발터 벤야민에게서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발견하게 된다. 벤야민은 아도르노가 주목했던 문화산업에 의해 대량 생산된 복제품에 의해 상실된 진정성(authenticity), 아우라(aura)의 상실이 도리어 문화적 민주주의를 부추기는 기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과연 문화산업을 통해 생산된 산출물에는 진정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가 예술작품으로부터 느낀다고 하는 진정성 역시 과거로부터 주어진 것(교육받은 것)이 아닌가? 대중문화에는 자율적인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가? 실제로 도시화와 대중문화로 인해 도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의 지배질서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창조되지 않았는가(E.P.톰슨)?

 

대중은 단순히 문화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며 그들 나름의 문화적 해독능력을 갖추고 있고, 우리들의 해독능력 역시 증가하고 있다. 즉, 창과 방패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는 아직까지는 아도르노의 비관과 벤야민의 낙관 사이를 오가며 의지의 낙관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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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오는 데에는


-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1897 - 1982)



죽음이 오는 데에는
거의 일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 그때
알몸의 손이 와서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은 되돌려주었다
내 손이 잃었던 색깔을
내 손의 진짜 모습을
다가오는 매일 매달
광활한 여름의
인간들의 사건에로 업무에로

뭐가 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항상 몸을 떨고 있었던
나에게 나의 생활에
바람과 같은 커다란 목도리를 두르고
나를 가라앉히는 데는
두 개의 팔이면 족했던 것이다

그렇다 족했던 것이다
다만 하나의 몸짓만으로
잠결에 갑자기 나를 만지는

저 가벼운 동작만으로
내 어깨에 걸린 잠 속의 숨결이나
또는 한 방울의 이슬만으로

밤 속에서 하나의 이마가
내 가슴에 기대며
커다란 두 눈을 뜬다
그러면 이 우주 속의
모든 것이 나에게 보이기 시작한다
황금빛의 보리밭처럼

아름다운 정원의 풀 속에서
그러면 죽어 있는 것과 같았던
나의 마음은 숨을 되찾아
향긋한 향기가 감돈다
상쾌한 그림자 속에서


*

최인훈의 『광장』에서 나오는 이 대목을 나는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광장』에서 이명준은 <광장>을 찾아 월북했지만 그곳에서도 꿈꾸던 광장을 발견하지 못한다. 명준은 대신 무용수 은혜를 만나 그 여자의 다리를 베고 눕는 것으로 절망과 허무를 이기고자 했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그는 사랑에서 그 자신이 超克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절망과 허무를 극복하려고 들었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1950년대 소위 먹물근성이라 해야할까. 티토가 끝끝내 소비에트를 버리지 못했던 까닭, 스탈린이 끊임없이 그의 제거를 염원했음에도 스탈린주의를 말끔히 치워버리지 못했던 까닭, 그건 스탈린주의를 경험한 좌파든 한국전쟁을 경험한 우파든 상관없이 그들이 살아왔던 과거가 현재보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온힘을 다해 성취한 현재의 소비에트, 현재의 반공주의에 입각한 국가 안보, 천박한 자본주의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


루이 아라공....

나는 그가 "미래의 노래"에서 보여준

인간만이 사랑을 가진 자이기에
자기가 품었던 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자기가 불렀던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술로
자기가 걸었던 길이 다른 사람의 길로
자기의 사랑마저 다른 사람의 팔로 성취되고
자기가 뿌렸던 씨를 다른 사람들이
따게 하도록 사람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

<미래의 노래 - 첫번째 연>

이런 대책없는 낙관주의를 사랑한다. 심지어 응당 시인이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시인이 자기자신을 속여가면서까지 독자들에게 대책없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다. 아니, 심지어 경멸해 마지 않는다. 그런데 루이 아라공의 경우엔 그것이 대책없는 낙관주의이기만 했던 건 아니었던 듯 싶다. 그래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싶다. 왜냐하면 그에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만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러시아 태생의 엘자 트리올레트를 만나 결혼했고, 아내로부터 끊임없는 영감을 받았던 시인. 루이 아라공...

왜 아니겠는가?

그에겐 전 소비에트를 내어주고서라도 얻고 싶은 아니 결단코 바꾸지 않으리라 생각한 엘자 트리올레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조차 그녀의 두 팔이 다가와 안아주기만 한다면 이겨낼 수 있는 ...

루이 아라공은 아내 엘자의 이름을 건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엘자의 눈
나에게는 엘자의 파리밖에 없다

애처가였을까? 남자라서가 아니라 어떤 인간은 둘이되 결코 둘이지 않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들국화의 노래처럼...

"혼자는 너무 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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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 - 재스퍼 리들리 지음 |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2003)


뛰어난 전기 작가의 세 가지 덕목


오늘날 전기 작가가 주는 인상은 힐러리 클린턴이나 마돈나 같은 인물의 뒤꽁무니를 추적해 이들이 구태여 감추고 싶은 것들을 파헤쳐 가십거리를 양산해내는 옐로우 페이퍼를 연상하거나 아니면 기업인이나 정치인들에게 고용된 대필 작가들이 쓰는 자서전 형태의 전기들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기나 유명 인사들의 사생활은 일반 대중의 흥미를 유발한다. 사람들은 소위 잘 알려진 이들의 배꼽 아래 이야기와 같이 은밀한 장소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들에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 탓인지 우리 사회에서 전기문학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런 인식에 변화를 주게 된 것은 체 게바라 평전의 성공 이후 일어난 변화이다. 체 게바라에 대해 쓰인 여러 종의 책들을 읽어 보았으나 지난번에 성공을 거둔 ‘장 코르미에’ 판 체 게바라 평전이 거둔 인기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흡함이 많은 책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의아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까닭이 책 자체가 주었던 것이기보다 ‘체 게바라’ 자신이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탓이 더 크다고 여긴다.


코르미에의 게바라 평전은 당시 게바라의 행적만을 무미건조하게 추적했을 뿐, 게바라의 활동이 가진 사회적 의미나, 당시의 시대 상황이 게바라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의 대응이 빚어낸 결과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부족한 인식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인식의 한계를 꼬집곤 하는데, 코르미에의 게바라 평전은 ‘체 게바라’라는 한 개인에 대해서는 전문가일지 모르겠으나 체 게바라라는 한 개인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지 못한 전기 작가의 저술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뛰어난 역사가이자 동시에 뛰어난 문학작가였던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기 작가들, 예를 들어 ‘플루타르코스’나 ‘스테판 츠바이크’ 같은 일급 전기 작가들은 역시 일급의 역사가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이 다루려고 하는 역사 속 인물들을 단지 개인의 삶을 추적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그네들의 삶과 역사를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비단을 짜내듯 서로 긴밀하게 결합시킨다. 뛰어난 전기 작가는 문학가이자, 역사가이며, 동시에 뛰어난 취재기자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전기 혹은 평전 같은 장르에 대해 우리 문학은 거의 전혀 관심이 없는 편이다. 한국 사회에서 문학은 시와 소설만을 의미한다. 에세이 역시 일부 삶의 여유가 있는 이들이나 즐기는 시중한담으로 치부된다. 이래서는 철학적 에세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에세이는 힙합이 그러하듯 한국에 와서 그저 미셀러니 수준으로 격하되며, 기자들의 르포 문학 역시 문학비평은 다루지 않는다. 잭 런던이나 조지 오웰의 르포가 서구에서는 정식 문학 장르 안으로 포용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다. 심지어는 작가나 시인이 저술한 산문집도 문학비평에서 제외되는 협소한 장르가 문학이다.


시와 소설만이 문학의 순수성을 담보해주는 장르로 머무는 동안 한국 문학은 계속 외국 이론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기 상황에 놓일 것이고, 폐쇄적인 학문사회가 서로 인접한 학문의 교차를 금지하는 것처럼 서로의 밥그릇을 놓고 싸우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노벨문학상의 역대 수상자 면면을 살펴보라). 한국에서 소위 일급 문학가들이 집필한 전기문학들은 문학적으로는 평가받을지 모르나 역사학자들에게는 고증의 가치조차 없는 것들로 평가받기 십상이다. 이는 문학가들의 전기문학인 탓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전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급 사료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있으나 유고슬라비아 국민은 없다


우리의 근대는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미완의 숙제를 남겨두고 있다. 남과 북은 그들의 태생만큼이나 상이한 체제를 구축했고, 북의 정치 지도자 김일성의 행보는 호치민식 민족주의, 티토의 비동맹외교노선, 카스트로의 반미와 일부분은 겹치고, 일부분은 다른 그들만의 모습을 보여 왔다.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은 냉혹한 국제질서의 격동기 속에서 각기 다른 민족과 극심한 분열 속에 놓였던 유고가 어떻게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와 그의 리더십을 통해 봉합될 수 있었던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모두 3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시기적으로 구분하자면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요셉 브로즈가 유고 공산당의 정치지도자로 부각되는 단계, 2단계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숙청을 피해 유고지도자가 된 티토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우스타샤, 체트니크의 협공으로부터 승리하여 유고의 실질적 지도자로 인정받는 단계, 3단계는 스탈린의 공격으로부터 유고 지도자의 지위를 지속시키고 유고의 독립성을 수호하는 단계, 4단계는 외부적으로는 비동맹 외교의 중추적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세력들로 부터 유고식 사회주의를 지켜내는가로 구분된다. 이렇듯 20세기 가장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정치지도자 티토에 대한 평가가 단지 위대했다는 한 마디만으로 규정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할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가능하다.


제1단계는 티토가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되는가를 살피는데는 다소 미흡하다는 느낌을 준다. 과거 티토의 행적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1892년 5월 7일 크로아티아 쿰로베츠 계곡에서 태어난 요시프 브로즈는 그의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 이르기까지 그가 진짜 요시프 브로즈가 아니라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북의 김일성이 진짜가 아니라는 소문처럼 말이다. 우리가 흔히 "티토"라고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사실 무수히 많은 가명을 지닌 사내였고, "티토"라는 이름 역시 그의 무수히 많은 가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에 불과하다.


▶ 대독항쟁 기간 중 자신의 오른 팔이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중요한 이론가였던 모사(mosa pijade)와 함께 한 요셉 브로즈 티토. 모사는 함께 옥중에 갇혀 있는 동안 티토에게 공산주의 이론을 가르쳤던 인연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티토가 통치하던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나라는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진정한 의미의 유고슬라비아 인들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티토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를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 몬테네그로인, 코소보인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지명 속에 살고 있는 각기 다른 민족들인 이들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경계선상에서 종교적으로도 가장 첨예한 대립의 현장이었다. 거기에 비잔티움 제국을 함락시킨 투르크 제국과 기독교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종교간의 대립 양상을 한층 더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의 평전을 읽는 일


"제스퍼 리들리"가 집필한 "요셉 브로즈 티토"의 평전은 매우 뛰어난 전기 작품이자, 나에겐 그간 궁금했으나 충분한 자료가 없어 잘 알 수 없었던 지난 역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담긴 책이었다. 우리에게 유고슬라비아는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제3세계의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거울이자 시금석 역할을 해주는 나라이지만 이에 대한 접근은 통제되고 있었다.


내가 지닌 여러 궁금증 가운데 하나인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파시즘에 저항한 주된 세력은 좌파였으나 이들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한 까닭과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총체적으로도 궁금한 부분이었으나 각국의 사례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총론적 접근방식으로야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책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리스와 터키 등에서 발칸 반도와 그 인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각론적 접근이 가능한 책은 현재도 태부족인 상황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그리스"를 우리는 오로지 "신화의 땅"으로만 이해하지만 그리스 올림푸스에는 제우스와 아프로디테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에 저항한 수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뛰어난 활동을 보인 다수는 좌파였으며 이들은 전후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복귀한 그리스 왕정에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패하여 많은 수가 유고슬라비아로 탈출하게 된다.

▶ 반파시스트 전선의 동맹군으로 한때 대독투쟁에 나섰으나 극우 민족주의 성향으로 인해 결국 독일과 동맹을 맺고 티토의 빨치산을 공격했던 체트니크의 드라자 미하일로비치(Draza Mihajlovic). 유고슬라비아가 해방된 뒤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된 세계질서 속에서 과거의 강대국들 영국과 프랑스, 미국들은 그들의 정치체제에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은 반면, 신흥독립국들이나 약소국가들은 대개 두 가지 혹은 크게 보아 세 가지의 발전 양상을 보인다. 이것을 유럽이라는 지역으로 한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와 같이 좌파의 몰락이 기존 정치체제의 부활로 이어지고, 이것이 표면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태로 전이되었다가 군부쿠데타와 연이은 파시즘적 군부독재로 이어졌다가 다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가는 형태이거나 폴란드,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과 같이 이전의 정치체제가 파시즘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소련공산주의 체제로 갔다가 소련의 몰락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이되는 양식이다. 물론, 제3의 방식엔 과거 동서 냉전 시절 비동맹외교를 주도했던 네루의 인도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가 있다. 이들 두 국가의 발전 양태나 정치 체제, 외교는 이 두 정치 지도자의 과거 행적의 차이만큼이나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바는 이들 두 사람이 오랫동안 구금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만큼이나 흡사하다.


티토는 공산주의자였는가?


소비에트 혁명의 성공 이후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만든 코민테른의 악명 높은 실책들만 엮어도 책 10권은 족히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티토를 비롯해 당시 혁명에 가담했던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신념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로 생각했고, "사회주의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노동자 계급의 대의를 위한다"는 믿음을 위해 기꺼이 동지의 손에 죽어가는 길을 택했다.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나치즘이 소련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할 것이라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침묵했고, 중국에서는 마오쩌뚱 대신에 장개석을 유일한 중국 내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갖가지 이유로 학살당했지만 가장 많은 공산주의자를 죽인 나라는 다름 아닌 소련이었고, 그들은 레닌의 사후, 트로츠키의 몰락 이후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공산주의 이념을 이용했다.


티토는 수감 생활에서 풀려난 뒤 내분에 휩싸여 있던 모스크바로 간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독일에서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고 장담한다. 그러자 기업가들이 수많은 정치 헌금을 헌납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실제로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기 위해 테러에 나서자 독일 공산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하인츠 노이만은 공산주의자들도 앉아서 당하지 말고, 파시스트를 공격하라는 슬로건을 내건다. 1931년 여름 노이만이 스탈린을 만나 나치에 대항하는 공산당의 활동을 설명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말한다.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게 되면 서방세계를 휩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 소련이 한숨 돌리면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노이만은 하는 수 없이 한 발 물러났다. 이 무렵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큰 적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제국주의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밀어낸다면 그 틈을 노려 프랑스를 압박해 동맹체제를 구축할 요량이었다.


티토는 그 시절 국제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 그가 소련에서 머무는 동안 스탈린의 후계자로 추앙받던 키로프가 암살되는(실제로는 스탈린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한 혐의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숙청당한다. 숙청은 이 두 사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에 와 있던 국제공산주의자들에게도 시행되었다. 비밀경찰들이 밤마다 이들이 묶고 있던 숙소로 들이닥쳐 체포해간 뒤 이들은 아침이 되어서야 그들이 사라진 것을 아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훗날 이 때의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이런 범죄 행위를 저지른 스탈린과 소련을 지지한 이유를 묻자 티토는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했을 법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르주아들의 형무소에서 크고 작은 고통을 당한 경험이 있던 소수의 골수 공산주의자들은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소련이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중략>... 우리는 오랫동안 낮에는 강제노동을 하고, 밤에는 고독이 엄습하는 숨막히는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 때 우리를 지켜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 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랑과 우정이 충만하며, 성실성이 인정받는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생각했지. 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 궁의 시계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심금을 울리는 그의 이런 말을 대신하여 생각해볼 만한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해보면 티토에게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무렵 만약 소련과 스탈린을 거부한 혁명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최악의 경우 트로츠키처럼 멕시코 산골의 오두막에서 스탈린의 자객이 보낸 피켈에 정수리를 찍혀 죽거나, 아니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아 정치적 위상과 활동 공간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국내의 현실에서 죽산 조봉암이 스탈린식 공산주의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뒤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무렵 공산주의를 포기한 많은 이들이 훗날 파시스트가 되어 더욱 가혹한 억압자로 나선 것을 생각해볼 때 티토의 이 말은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코민테른을 신뢰하지 않은 티토는 스탈린의 시선 밖에 머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침묵했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는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왔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켰고, 벨기에, 네덜란드 , 프랑스를 함락시켰고,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유고 공산당에서도 트로츠키파를 제거한다면서 다른 공산당원들의 숙청을 실시했지만, 티토는 "불만 당원이라도 교화시키면 됐지 죽일 필요는 없다"며 이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했다.


그에 대해 내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단 하나 그들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짜르 시대 이후 지속되어 온 단 하나의 목적, 러시아의 패권 유지"란 차원에서 국제공산주의를 이용했다. 책을 읽는 내내 티토에게 쏟아내는 스탈린의 증오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 이런 형편없는 나라가 70여 년 동안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도리어 의문스러웠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본래 러시아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인민의 대의를 위한 그들의 이상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혁명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 우울하고 슬픈 역사 아닌가. 티토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베오그라드의 도살자인가? 유고 통합의 지도자인가?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이들 모든 세력에게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파르티잔은 이들 모든 세력을 포용하는 유고 내부의 유일한 정치 세력이기도 했다. 티토 자신은 크로아티아 출신이었고, 그는 파르티잔 세력 못지않게 모두의 미움을 받은 이슬람교도들을 포용해주었다. 그런 까닭에 파르티잔 세력 안에는 유고 내부의 잡다한 민족구성과 이념적 다양성을 두루 포괄하고 있었다. 그런 티토조차 전후엔 우스타샤와 체트니크 세력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내전을 경험했다. 북의 김일성은 신흥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왜곡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신흥학살의 역사적 진실은 북한군이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신흥의 우파 세력이 들고 일어나 좌파들을 숙청하면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이후 다시 북한군이 남하하면서 우파를 다시 제거하는 피의 악순환이 벌어졌지만, 김일성은 신흥 학살 사건을 미군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일소해버린다. 내부의 적 대신에 외부의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역사적으로는 왜곡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티토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없었다. 우스타샤와 체트니크의 악행이 워낙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데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파르티잔 집단이 이들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티토 역시 이들을 처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건은 이후 서구에 의해 티토의 공격에 종종 이용당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블라소프와 코자크인들의 경우 그들이 영국의 관할 지역으로 넘어왔으나 그들은 영국에 의해 다시 소련으로 되돌려 보내졌기 때문이다. 영국 역시 국제정세의 미묘한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 요셉 브로즈 티토의 세 번째 아내 요반카(Jovanka Broz)


다음의 일화를 보자. 1946년 5월 1일 티토의 오랜 연인 즈덴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즈덴카의 죽음에 가슴 아팠고,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에 조그만한 기념비를 세우고, 매일 그녀의 기념비에 헌화한다. 즈덴카에게는 사촌 베라 밀레티치가 있었다. 그녀는 파르티잔과 결혼해 딸 한 명을 낳았는데, 곧이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한다. 그녀는 갖은 고문 끝에 동료들의 이름을 토설했고, 그로인해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그녀는 다시 파르티잔 동료들에게 체포돼 총살당한다. 티토의 연인이었던 즈덴카의 부모들은 밀레티치의 딸 미랴나를 입양한다. 미랴나는 훗날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결혼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냉혹한 인종청소로 악명 높았던 밀로셰비치가 바로 이 사람이다. 티토가 죽은 지(1980년) 10여년 만에 유고슬라비아는 가혹한 내전을 경험하며 분열된다. 유고가 다른 동구 국가들이 걸었던 공산화의 길과 다른 공산화의 길을 걸었던 것을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빚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소련이 건재할 당시 이들의 위성국가였던 알바니아나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는 소련의 몰락 이후 그나마 국가의 분열이나 인종청소와 같은 갈등을 겪지 않은 반면에 당시로서는 서구와 동구 사이에서 그네들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유고가 티토의 사망 이후 동구 해체 과정을 겪으면서 나토(NATO)와 미국의 집중 폭격을 받을 만큼 가혹한 해체 과정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여러 방면에서 가능하다. 우선 평전인 만큼 요셉 브로즈 티토의 행적에 대해서만 치중해서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티토가 궁극적으로 보냈던 충성의 대상이었던 공산주의 혁명의 전개 과정을 따르는 것이 가능하고, 영화화되기도 했던(리처드 버튼이 1971년 티토 역을 맡은 영화) 그의 파르티잔 시절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비동맹 외교에 집중할 수도 있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이 책이 티토의 개인적 삶은 물론이고, 역사를 충분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전기 출간 붐을 타고 판매되는 수많은 평전이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이 책을 단연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책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 책에도 몇 가지 단점이 보인다. 우선 이 책의 저자 제스퍼 리들리는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이란 부제를 통해서도 이미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티토에 대한 존경을 감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티토의 모습이 객관성이 결여된 그에 대한 상찬으로 거듭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는 오해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책의 저자가 티토에 대한 존경을 보내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는 장점에 어긋나는 몇몇 부분들이 그럴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흐루시초프가 집권 이후 티토와 유고 공산당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럴 개연성도 있지만, 그것이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전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가지는 유고가 유럽이라는 특수한 상황도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고와 티토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까지 영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해두고 싶다. 미국과의 관계 부분이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인다. 그 이외에 이 책은 번역이나 기타 편집 부분에서 역자인 유경찬 선생(그는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도 번역했는데)의 깔끔한 번역 솜씨에 힘입어 흡족한 수준이지만, 무려 536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 그것도 20세기 초엽인 제1차 세계대전부터 20세기 말에 이르는 기나긴 시대를 다루는 책에서 책 말미에 인명, 지명 찾아보기가 없다는 점과 편집자 주, 옮긴이 주와 같은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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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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