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8.12 신경림 - 갈구렁달
  2. 2011.05.23 신경림 - 다리 (2)
  3. 2011.02.15 신경림 - 파장 (1)


갈구렁달


-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


어릴 적엔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들을 죄다 뜯어 고치겠다는, 아니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부터 싫든 좋든 나도 그 세상 풍경의 일부란 사실을 알게 되고, 내가 이 세상의 문제들에 책임질 나이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늙어가기 시작했으리라.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은 10개월이 지나면 끊어지지만 과거 성장하며 겪어왔던 어려움들은 어느 순간 극복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탯줄처럼 줄곧 내 뒤를 따라왔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시들고 찌든 우리 얼굴처럼 시든 갈구렁달이 줄곧 내 뒤를 따라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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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다리


- 신경림


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스스로 다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늘 서럽다
왜 스스로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만 건네주는 것일까
깨고 나면 나는 더 억울해 지지만


이윽고 꿈에서나마 선선히

다리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서글퍼진다


*


언젠가 글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감정 중 하나는 자존감, 즉 자기존재감이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도 지겨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나로 온전히 서지 못할 때, 사랑도 지겹고, 허무해집니다. 그런데 때로 사랑에 이 자기존재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마음이 도리어 장애가 될 때도 있습니다. 나를 온전히 주고 싶다는 마음은 때로 나를 온전히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나란 존재를 고스란히 그의 마음에 쌓아놓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만 있는 것도 아니라서
사람과 사람 사이엔 강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엔 산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엔 벽도 있습니다. 이곳에선 온전했던 것들도 저 섬으로 옮겨지면 병들기도 하고 상처입기도 하고, 온전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사람은 그 마음으로부터 죽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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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얼마 전 고등학교 후배이자 대학 동기 녀석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간만에 대학 동기들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어떤 시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으로부터 느끼기 전엔 참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는데 신경림 선생의 시 <파장(罷場)>이 내게 그러했다. 얼마전 성공회대학교의 매스컴특강이란 것에 참가해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대학생들이 내 강연을 들은 뒤 적어논 감상평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 사실이 있다. 사람들은 내게서 두 번 놀란다. 첫 번째 놀라는 것은 내가 그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날선 인상의 날카로운 인상이라기 보다 후덕한 인상이라는 데(이건 첫인상이 주는 착시 현상일지도 모르지만) 놀라고, 두 번째 놀라는 것은 후덕해 보이고, 촌놈 같은 인상과 달리 내가 깍쟁이에 가까울 만큼 꼬장꼬장한 서울내기, 다마네기란 사실이다.

난 신경림 시인이 시 속에 펼쳐놓고 있는 못난 놈이지만 시가 묘사하고 있는 못난 놈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샌님이다. 물론 시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정경 속 주인공들은 시골 장터 파장 무렵까지 지키고 있는, "이발소 앞에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는 정말 시골 촌놈이긴 하지만 말이다. '섰다'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술 마시고 색싯집에 가보긴 커녕 학교 마당에 앉아 오징어를 찢으며 술 한 잔 해본 기억도 가물가물 멀기만 하다. 워낙 술 마시는 일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술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온갖 잡다한 경험으로부터 지극히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을 경험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그날의 결혼식 뒤풀이 자리에서 나는 소설가나 시인, 비평가 나부랑이가 되지 못한, 어쩌면 한 번도 그런 꿈을 꾸어보지 못한 대학동기들, 나보다 나이 어린 그들로부터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정감을 느꼈다. 한 놈은 이삿짐 센터 오야지가 되었고, 한 놈은 두 아들의 아비인데 지금도 회사 짤릴 걱정만 쉼없이 늘어놓고 있고, 다른 한 놈은 청량리에 호프집 하나 차려놓고 오입질 원하면 언제라도 한 번 오라는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다른 한 놈은 바람 피우다 이혼당했는지 그냥 이혼당했는지 이미 친구들이 죄다 아는데 혼자만 아닌 척 조용히 찌그러져 있다. 졸업하고 거의 처음 본 그네들 사는 이야기가 못난 놈들을 속으로 연발하게 만들지만 이 못난이들의 얼굴만 봐도 흥겨운 걸 보니 나도 못난 놈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젊었을 때 말로만 막 살겠노라 다짐할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살아볼 것을, 샌님처럼 말만 내세우고 살 것이 아니라 저들과 함께 어우러져 술이나 마시며 가비압게 오입이라도 하며 흥청망청해볼 것을 이래저래 절뚝이는 파장에 막장인 것이 삶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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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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