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 에즈라 잭 키츠 | 이진수 옮김 | 비룡소(1996)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주인공들이 한 차례 반짝 등장하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앞서 "피터의 의자"편에서 이미 한 차례 이야기했다. 이번에 이야기할 "피터의 편지"도 역시 전작의 주인공인 피터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피터의 의자" 속에 등장한 피터에게 아기 시절의 피터가 액자 속 사진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피터의 편지"에 등장하는 피터는 같은 주인공이지만 이전의 주인공과는 다른(좀더 성장한) 인물이다. 피터는 생일을 맞이해 한 친구를 부르고 싶어한다. 그 친구는 "에이미"란 여자 아이다.

 

이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내 추억 하나가 설핏 떠올라 혼자 흐뭇하게 잠시 웃었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날, 가재수건을 잘 접어 안전핀으로 가슴에 고정시키고 앞으로 나란히를 했다. 도토리 키재기겠지만 교실 문 앞에 남녀 학생들이 두 줄로 나란히 늘어서 키높이대로 짝궁을 지었다. 그런데 내 짝궁이 말이다. 세상에 아주 예쁜 거다. 게다가 깔끔한 차림하며 새초롬하니 앉아있는 모습을 곁눈으로 훔쳐보니 작은 가슴은 왜 그리 콩닥콩닥 뛰던지... 하지만 어린 마음이라 그랬을까. 그 짝궁에게 특별히 말을 걸어본 기억이 내겐 없다. 다만 초등학교 1학년 난생 처음 가는 봄소풍 날 일어난 일만 기억에 남았다.

 

요새 같으면 아이들이 유치원 시절부터 서로 한데 어울려 지내지만, 나는 유치원에 다니질 않고 바로 초등학교, 그러니까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래서일까 여자 아이랑 한 곳에서 지내게 된 건 초등학교 때가 첫 경험이었다.  소풍을 가는데 지금은 한 반에 40명 내외지만 그때만 해도 인구 비례해서 초등학교 수가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 반에 무려 60-70명의 아이들이 버글버글하던 시절이 아닌가. 그런 학교 환경에 소풍이라는 건 어마어마한 대군이 움직이는 행사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담임 선생님의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을 거다. 우리는 짝궁과 손을 잡고 일렬 종대로 선생님 뒤를 따라가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남들은 다 옆 짝궁이란 덥석덥석 손도 잘 잡고 가는데, 나는 짝궁 손을 차마 못 잡겠는 거다. 결국 선생님이 이 모습을 보고 달려와서 강제로 옆 짝궁의 손을 잡게 했지만 나는 짝궁의 맨손을 잡지 못하고, 그 아이의 옷자락 하나를 대신 쥐는 것으로 해결을 보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힐 일이다. 내가 이 기억을 좀더 오래 지니게 된 까닭은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엔 고만 전학을 가게 되었기 때문일 거다. 만약 내가 1학년을 거기서 마치고, 졸업할 때까지 다녔다면 1학년 때 옆짝궁이 자라는 모습을 계속 지켜볼 수 있었을 텐데, 나와 그 친구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봐도 영 아쉬움만 남는다. 그런데 왜 아쉬움이 남는 거지... 나 원참... 흐흐. 에즈라 잭 키츠는 자신의 동화에서 그려지는 어린 주인공들의 모습을 자기 자신의 추억 속에서 얻는 영감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전에는 어린이였다.우리들은 모두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솔직하게 말을 건다. 그리고 최고의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대한다.(엘렌 E. M. 로버츠, 그림책 쓰는 법, 문학동네, 164쪽)"

 

앞서 에즈라 잭 키츠가 폴란드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이란 이야기는 한 바 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야고보 에즈라 카츠(Jacob Ezra Katz)"란 유태계 이름과 성씨였다. 그가 이민자의 후손으로 자신의 성씨 때문에 소수자로 어떤  인종차별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론 알 수 없으나 1950년대 미국의 반유대 분위기 때문에 스스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가 어째서 자신의 첫 작품에서 푸에르토리코 소년 "화니토(Juanito)"를 등장시켰는지(유색 인종을 택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동화 속에 유색인종이 등장한 것은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 책 "피터의 편지"에 등장하는 흑인 소년 피터는 그가 1940년 5월 13일자  "라이프Life" 잡지에 소개된 조지아주의 한 흑인 소년의 기사에 감흥을 얻어 구상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사진이 너무 작아 글자를 판독할 수는 없지만 "Blood Test"란 글자로 보아 남부 지역의 흑인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누구 좀더 자세히 아시는 분이 알려주시면 좋겠다-음, 니그로 보이란 말이 좀 걸리지만 기사 내용 자체는 그보단 아이가 주사 맞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웃고 있는 것에 촛점을 맞춘듯). 에즈라 잭 키츠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했는데, 그가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흑인 소년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차별받았던 경험이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내 인생을 바꿀만한 경험이 시작되었다 - 흑인아이가 영웅(주인공)인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썼던 그 어느 책에서도 흑인아이가 등장하지 않았었다  배경속의 아주 작은 모습으로밖에. 그 아이가 내 책에 있는 이유는 그 아이가 지금까지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몇년전에 한 흑인꼬마아이의 사진을 잡지에서 오려둔적이 있다. 내가 동화를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난 그 사진을 내 책상머리에 붙여두었었는데 그 사진을 바라보는 일을 참 좋아했다. 바로 이 아이가 내 책속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피터가 처음 등장한 "눈오는 날(The Snowy Day, 1962. 미국도서관협회에서 수여하는 칼데콧상을 수상했다)"로부터 시작해 "Whistle for Willie(1964), Peter's Chair(1967), A Letter to Amy(1968), Goggles!(1969), Hi Cat!(1970), Pet Show(1972)"에 이르는 동안 피터는 끊임없이 성장해간다. "애완동물 쇼"에 이르러 피터는 어린이에서 청소년의 세계에 진입한다. "피터의 편지"의 원제는 "A Letter to Amy"로 "피터의 의자"가 쓰여진 이듬해(1968) 발표되었다.

 

피터는 자신의 생일에 초대하고 싶은 여자 친구 에이미에게 보낼 초대장을 쓰느라 궁리 중이다. 이건 피터가 태어나 처음 쓰는 편지이자 처음 생긴 여자 친구이기도 하다. 그건  "그-렇-지-만-요, 이번엔 좀 특별하거든요."라고 말할 만큼 피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처음하는 경험이므로 피터는 최선을 다하지만 역시 심장이 마구 뛰는지 실수를 연발한다. 편지를 여러번 접어 봉투 안에 집어 넣고, 가려는데 급하게 서둔 나머지 시간을 적어넣지 않거나, 우표를 붙이지 않는 등 실수를 연발한다. 애완견 윌리에겐 비가 오니 집에 남으라고 말하고 뛰어나간다. 아마 이번 일만큼은 혼자서 처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노란 우비를 입고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애견 윌리가 누구인가? 전편격인 "피터의 의자"에서 함께 가출을 감행하기도 한 주인공이기도 하지 않은가.


 

우체통으로 가면서 윌리는 에이미 집 앞 창가를 지난다. 그런데 M.K와 S.J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하트와 화살표로 사랑에 골인했음을 알리는 아이들의 낙서가 그려진 담벼락 사이로 애견 윌리가 고개를 빼곰히 내밀고 있다. 얄궂게도 화살표는 정확히 피터의 시선과 윌리의 시선을 교차하게 만든다. 서로 뻘쭘히 바라보는 애견 윌리와 피터의 시선을 에즈라 잭 키츠는 독자들에게 "놓치지 마시라. 개봉 박두" 하고 외치는 듯 보인다. 사실 윌리가 이렇게 허둥지둥하고 있는 건 '생일 파티에 여자애가 오면, 남자애들이 보고 뭐라고 할까?' 하는 염려때문이었다. 그렇다. 남자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놀림은 바로 "알나리 깔나리, 누구랑 누구는 그렇고 그런 사이, 알나리 깔나리"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천둥이 치고 피터는 편지를 그 서슬에 그만 놓치고 만다. 바람에 불려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편지를 잡으려고 뛰다가 피터는 누군가와 쿵하고 부딪치고 만다.





사실은 에이미가 바람에 날리는 편지를 잡아주려 달려가는 걸 피터는 "에이미가 편지를 보면 안돼. 그러면 덜 놀랄 거야!" 하며 서두르다 고만 부딪치고 만 것이다. 피터 이 친구, 깜짝 쇼의 묘미도 벌써 터득하고 있는 대단한 녀석이다. 하지만 에이미는 그것도 모르고 울면서 달려간다. 과연 이 두 친구 에이미와 피터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그는 지난 1983년 5월 6일 심장마비로 숨질 때까지 모두 여든 다섯 편의 작품을 남겼고, 어린이 그림 동화 부문의 여러 상을 받았다. 그의 사후엔 에즈라 잭 키츠의 고향인 브룩클린의 프로스펙트 공원(Prospect Park)에 그를 기리는 뜻음 담아 피터와 윌리의 청동상에 세워졌다.

 

그의 동화 속 캐릭터들과 이야기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추억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한직한 사람과 이야기를 정교하게 다듬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에즈라 잭 키츠의 동화를 읽노라면 신영복 선생의 "화이트와 블랙은 색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선(善)과 악(惡), 희망과 절망의 상징이었습니다" 라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검은 피부의 소년 피터가 등장하는 에즈라 잭 키츠의 동화는 지금까지 접해온 동화 속 캐릭터들의 뽀얗고 발그레한 뺨을 물들이고 있는 그야말로 동화 속에 등장할 법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종종 이질감 같은 걸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영어사전에서 'black'이라는 단어를 찾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그 말엔 '검다'는 의미를 제외하고, '음산한, 침울한, 화가 난, 험악한, 심사가 고약한, 사악한, 죄악으로 더럽혀진' 등의 뜻이 있음을 말이다. 반대로 'white'의 의미는 '희다'는 의미를 제외하고, '결백한, 순진한, 오점이 없는, 악의가 없는, 정직한, 공정한, 훌륭한' 등의 뜻이 된다는 것도 말이다.

 

예전에 우리가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여겼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동아시아의 백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볼 시기가 되었다. 우리 안에 수많은 이방인들을 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내 친구 루이』 - 에즈라 잭 키츠 | 정성원 옮김 | 비룡소(2001)


김종현 감독의 "슈퍼스타 감사용"을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정서마저 부인하기는 어렵다. 우리 가까운 역사 속의 인물, 과연 패전처리 전문투수 "감사용"이란 실제 인물을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하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무명 투수 감사용에게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과연 나는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닐까? 나란 한 개인은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위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겠지만, 우린 역사 속에서 민중 혹은 대중의 존재로서 분명히 각인되는 존재들이란 점에서 역시 역사적인 존재들이다. 그런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내 심금을 울리던 한 장면은 이범수가 연기한 감사용의 어머니(김수미)의 가게에서 일어난 한 대목이었다. 감사용의 어머니는 사용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갑자기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걸 반대해왔고, 사용이 야구를 하든 말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어머니 앞에서 사용은 자신이 패전처리 전문 투수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다.

 

패전 처리를 마치고 어깨가 축 처진 채 어머니가 일하는 시장 가게에 돌아온 사용 앞에서 사용의 어머니가 기침을 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없는 꼴찌팀의 패전 처리 전문 투수 사용은 갑자기 짜증이 벌컥 나면서 어머니에게 그러게 병원 좀 가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짜증을 부린다. 손님이 와서 물건을 파는 동안, 어머니는 사용에게 서랍의 약 좀 꺼내달라고 말한다. 공연히 서랍을 벌컥 여는 사용의 눈엔 그간 자기 팀이 가졌던 인천 홈 경기 입장권이 수북하게 쌓인 것을 발견한다. 사용의 어머니는 그동안 말없이 사용이 몸담고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 경기를 모두 보아온 것이다. 사용은 기쁨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와 고개를 떨군다.

 

단지 왼손 투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 원년 멤버가 될 수 있었던 프로야구 선수 감사용에게 선발 라인업에 끼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이상이었다. 그는 이룰 수 없는 이상과 열망을 가졌다. 태어날 때부터 어떤 아이는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도 우리들에겐 누구에게나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장애)를 하나둘씩은 가지고 있다. 상처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 "슈퍼스타 감사용"을 보며 떠오른 그림동화작가 한 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에즈라 잭 키츠(Ezra Jack Keats, 1916 - 1983)"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부모 마음이야 모두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 나오라고 잔소리 하는 걸 나는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어디 그뿐이랴만은 그것이 애정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잘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나는 사랑이 뭔지 몰랐으니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공부와 대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재벌이 되거나 역사에 기리기리 기억될 위인이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건 좋은 대학 나와 판검사,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같은 것이 되길 바란다. 꼭 이런 직업이 아니더라도 어른들이 요구하는 건 단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남들처럼(?) 평범한 생활인이 되는 것 뿐이다. 알고보면 우리나라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품은 소망은 그네들의 잔소리만큼이나 자잘한 소망일지도 모른다.

 

에즈라 잭 키츠의 아버지도 그가 세계적으로 이름난 동화작가가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에즈라 잭 키츠는 작품 속의 주인공으로 유색인종을 등장시킨 최초의 그림동화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약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전까지 나는 그저 유명해지기 위한 시도의 일부로 도입된 일종의 기획(컨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즈라 잭 키츠의 본명은 "야곱 에즈라 카츠(Jacob Ezra Katz)"였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계 유태인 이민으로 뉴욕의 어느 식당에서 급사로 일했다고 한다. 뉴욕 브룩클린의 척박한 살림살이 속에서 화가의 꿈을 키웠던 아들 에즈라, 비록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이긴 했으나, 고등학교 때는 전국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으나 그에게 화가의 꿈을 계속 키워나가라고 격려해줄 수는 없었으리라. 에즈라 잭 키츠가 한창 화가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할 무렵, 그의 아버지가 숨지고 만다. 에즈라는 아버지의 유품인 지갑 속에서 색이 누렇게 바랜 꼬깃꼬깃하게 접힌 신문기사 스크랩 한 장을 발견한다. 아버지의 지갑 속에 든 신문기사는 아들의 미술대회 수상 기사였다.

 

에즈라 잭 키츠의 "내 친구 루이"는 가난하고 허름한 빈민가의 소년 루이가 주인공이다. 에즈라 잭 키츠가 묘사하고 있는 소년 루이의 피부는 역시 백인의 피부색은 아니었다. 어린이 그림 동화에서 색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들은 대체로 어두운 색조, 비교적 짙은 음영의 회색빛과 뉴욕의 오래된 벽돌담을 느낄 법한 갈색이 주조를 이룬다. 하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어린이들만큼은 밝은 색을 사용한다. 이 책의 첫 장을 보면 수지와 로베르토의 인형극을 보기 위해 찾아온 어린이들을 수지와 로베르토의 시각에서 묘사하는 구도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지와 로베르토와 인형극을 준비하며 막 사이로 그들 인형극의 두 주인공 생쥐 인형과 구씨(인형)와 함께 인형극의 시작을 기다리며 자리에 앉아있는 루이와 다른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 생쥐 인형을 움직이는 로베르토는 올리브그린 빛깔의 모자와 상의를 입고 있고, 구씨 인형을 움직일 수지는 연보랏빛 오버올 치마에 밝은 색 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맞은 편 의자엔 어린 루이가 앉아 있고, 그 옆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노란 모자를 쓴 소녀가 다른 어린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밝은 주황색 옷을 입고 있는 루이의 두 손은 가지런하게 모아져 있지만 어쩐지 그의 모습은 외로와 보인다.

 



펼친 페이지로 구성된 단 한 장의 그림이지만, 이미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그림 동화일수록 허투루 그려지는 그림은 한 장도 없다. 책의 '댓수'를 맞추기 위한 편의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대개의 그림동화책은 16쪽에서 많아 봐야 24쪽 이내에서 만들어지는데, 그림 동화책이란 것이 보기엔 쉬워보여도 이 작은 분량으로 남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보통의 노력과 재능으론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동화작가에겐 산문적 재능보다는 시적 재능이 좀더 필요하다. 에즈라 잭 키츠의 그림 동화책은 그림만으로 구성되진 않지만 묘사는 그림을 통해, 스토리 진행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에 꼭 필요한 만큼의 지문과 대사가 삽입된다. 
 

 


작품의 내용은 수지와 로베르토가 진행하는 인형극에서 구씨 인형을 너무나 좋아하게 된 어린 루이의 열망을 다루고 있다. 루이는 인형극이 진행되기 어려울 만큼 구씨 인형을 열렬히 좋아한다. 그런 루이에게 수지와 로베르토는 조용히 하라고 야단을 치거나 공연 진행에 방해되니까 나가라고 나무라지 않는다. 수지와 로베르토는 인형의 입을 빌어 루이와 대화를 나누고, 인형극을 진행한다. 인형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루이는 여전히 구씨에 대해 눈을 떼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루이의 어깨는 축처져있고, 그가 걸어가는 뒤로는 높다란 담벼락이 마치 이룰 수 없는 열망의 상징처럼 솟아 있다. 원래 에즈라 잭 키츠는 콜라쥬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에선 유일하게 이 장면의 담벼락에서만 사용된다. 전체에서 유독 이 장면이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처리한데는 그만의 암시가 숨겨져 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루이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다음 페이지에서 에즈라 잭 키츠는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아이스크림과 그 위에 구씨와 함께 올라탄 루이를 묘사한다. 처음에 나는 갑자기 등장한 아이스크림에 놀랐는데, 시 작법상에서도 그렇지만 그림 동화 안에서 등장하는 상징이나 비유는 작품 전체의 구조 안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때 더 큰 파급력을 지닌다. 맨 처음 장면에서 함께 인형극을 보며 옆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던 노란 모자의 소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아이스크림이란 사실을 안 순간, 나는 에즈라 잭 키츠의 그 솜씨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이스크림의 색깔과 녹아내린 모양까지 똑같았다. 이렇듯 그림 속에 녹아난 소년의 외로움에 대해 이보다 적절한 묘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에즈라 잭 키츠를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감사용이 박철순과 벌인 대결은 너무나 가슴 벅찬 것이었으나 결국 감사용은 박철순에게 패하고 만다. 다음 장면에서 루이는 끝없는 추락을 경험한다. 펼친 페이지의 왼쪽 면에 지문이 있고, 오른쪽 페이지의 맨 하단 부위에 추락하는 루이를 묘사하고 있다. 그림책의 판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끝없는 추락인 셈이다. 잠시 몽상의 대가로 루이는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다. 루이는 자기도 모르게 맨땅에 엎드린 채 팔 다리를 흔들며 허공을 허우적대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런 루이를 놀린다. 몽상이 아름다운 만큼 그 뒤에 오는 추락과 현실은 더욱 끔찍한 것이다. 하지만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구원이랄까, 소원 성취는 그만큼 아름답다.

 

엄마가 물었지. "루이야, 뭐 하고 있니?"
루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 꿈 때문에 아직도 슬펐거든.
엄마는 다가와서 말했어. "루이야, 누가 너한테 쪽지를 써서 문틈으로 넣어 두었구나."
쪽지엔 이렇게 적여 있었지.

"안녕! 안녕! 안녕!
밖으로 나가서 녹색줄을 따라가 봐."

루이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봤어.
<본문 중에서>

 

마지막 엔딩장면을 이야기하는 것은 끔찍한 스포일러가 될 듯하다. 미리 조금만 이야기해둔다면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의 해피 엔딩일 수도 있고, "에게, 고작 이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나에겐 감사용이 박철순을 이겼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흐뭇해지진 않았을 거란 말쯤은 해두고 싶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