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곱하기 둘


-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

동지여, 감방에서
그 방까지
몇 걸음 걸리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오.

스무 걸음이라면
화장실로 그대를 데려가는 게 아니라오.
마흔다섯 걸음이라면
운동하라고
그대를 데리고 나가는 건 절대 아니라오.

여든 걸음을 세고 나서
장님처럼 고꾸라지듯이
층계를 오르기
시작하면
오, 여든 걸음이 넘는다면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그들이 그대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그들이 그대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이제는 오직 한 군데밖에 없다오


출처 : 아리엘 도르프만, 이종숙 옮김, 『싼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 창작과비평사, 1998.

*

내 주변엔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서 감옥살이 이야기 듣는 것이 친구들에게서 군대 이야기 듣는 것처럼 익숙하다. 4.19세대로 5.16군사법정에 섰던 한 사람은 비록 정치깡패이긴 했지만 당당했던 이정재가 사형을 언도받은 뒤 사형대에 설 때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시처럼 그 역시 ‘여든 걸음’ 너머의 세계로 끌려갔다. 서대문형무소에는 면회소 가는 길과 사형대 가는 길이 서로 이어져 있었으므로….

반공주의와 북진통일 이외에 모든 것은 친북좌파이던 시절 당당하게 평화통일론을 펼쳤던 죽산 조봉암은"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고 침실에서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넘은 나를 처형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판결은 잘됐다. 무죄가 안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만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 박사는 한 사람이 잘 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한다."라고 했다. 그는 사형언도를 받은 직후 곧바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인혁당 등 수많은 사람들이 법으로 이름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른바 법살(法殺)이었다. 엊그제(2008. 9. 26) 60주년을 맞이한 사법부의 수장 이용훈 대법원장이 과거 사법부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이제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 내가 감옥은커녕 유치장에도 가보지 못했던 것은 좋은 시대를 살았던 덕분이 아니다. 다만 운이 남들에 비해 조금 더 좋았을 뿐이었다. “스무 걸음, 마흔 다섯 걸음, 여든 걸음이 내 앞에도 여전히 놓여있다. 나는 다만 다른 이들에 비해 조금 운이 좋았을 뿐이다.

죽산은 교수대 앞에서 목사에게 마지막으로 성경의 <누가복음> 23장 22,23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재판장인 빌라도가 말한다. 나는 그의 죄를 찾지 못하겠다. 그러나 처형을 외치는 군중의 소리가 이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삶에 감사하며(Gracias a la vida)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눈을 뜨면 흑과 백을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는 두 샛별을 주었고, 높은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 사랑하는 이를 주었습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밤과 낮에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를 들려주었고, 망치소리, 터빈 소리, 개 짖는 소리, 빗소리, 그리고 내 가장 사랑하는 이의 그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새겨 넣을 수 있도록 커다란 귀도 주었습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가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소리와 언어, 문자를 주었고, 어머니와 친구, 형제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이가 걸어갈 영혼의 길을 밝혀줄 빛도 주었습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피곤한 발로도 전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 피곤한 발을 이끌고 도시와 늪지, 해변과 사막, 산과 평야, 당신의 집과 거리, 그리고 당신의 정원을 걸아갈 수 있었습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인간의 정신이 열매를 거두는 것을, 악으로부터 선이 해방되는 것을, 그리고 당신의 맑은 눈 깊은 곳을 응시할 때 내 심장을 온통 뒤흔드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웃음과 눈물을 주어 슬픔과 행복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었고, 내 슬픔과 행복은 나의 노래와 여러분들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노래가 그러하듯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이여,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Violeta Parra)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o dos luceros, que cuando los abro,
Perfecto distingo lo negro del blanco
Y en el alto cielo su fondo estrellado
Y en las multitudes el hombre que yo am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oído que en todo su ancho
Graba noche y día, grillos y canarios,
Martillos, turbinas, ladridos, chubascos,
Y la voz tan tierna de mi bien amad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sonido y el abecedario;
Con à l las palabras que pienso y declaro:
Madre, amigo, hermano, y luz alumbrando
La ruta del alma del que estoy amand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marcha de mis pies cansados;
Con ellos anduve ciudades y charcos,
Playas y desiertos, montaÃnas y llanos,
Y la casa tuya, tu calle y tu pati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o el corazón que agita su marco
Cuando miro el fruto del cerebro humano,
Cuando miro al bueno tan lejos del malo,
Cuando miro al fondo de tus ojos claros.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risa y me ha dado el llanto.
Así yo distingo dicha de quebranto,
Los dos materiales que forman mi canto,
Y el canto de ustedes que es mi mismo canto,
Y el canto de todos que es mi propio c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삶에 감사하며(Gracias a la vida)>에 얽힌 이야기들


누에바 깐시온 운동(Nueva Cancion Movement)
노래 “Gracias a la vida”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새로운 노래’란 뜻을 가지고 있는 ‘누에바 깐시온 운동(Nueva Cancion Movement)'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모토는 
"
노래없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였다. 군부 독재와 민간 독재가 번갈아 가며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핍박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곧 사회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언제나 미국의 아랫동네 취급을 받던 라틴 아메리카는 실제로도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미국에 예속되어 있었고, 미국 자본의 이익을 대행하는 정부는 민중의 삶을 억압했다. 이런 시기에 태동한 현실참여 문화운동이 바로 누에바 깐시온이었다. 정복자들(conquistadores)로부터 시작된 오랜 수탈과 착취, 학살의 역사 속에 살아남은 인디오들의 전통문화 속에서 누에바 깐시온이 잉태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음악가인 아따우알빠 유빤끼(Atahualpa Yupanqui)와 칠레의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는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1세대로 유빤끼는 안데스 일대의 민간 전승민요를 수집하고 발굴해 전통적인 기법과 음계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노래들을 만들어 ‘누에바 깐시온의 아버지’라 불렸다. 칠레의 비올레따 빠라는 - 비올레따의 오빠인 시인 니까노르 빠라(Nicanor Parra)와 함께 - 반시(反詩)운동을 펼쳤던 시인 네루다의 조언으로 1952년부터 칠레 전국을 돌며 민요수집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누에바 깐시온 운동이 시작된다. 그녀는 이때 수집한 민요와 시, 민간의 전설과 춤 등 칠레의 전통음악인 꾸에카(Cueca)를 토대로 포크 음악을 결합시켜 ‘폴크로레(Folklore)'를 탄생시켜 ‘누에바 깐시온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다.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미국의 상업적인 대중음악에 저항하는 노래운동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으로 예속된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적 자생력을 회복시키고,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연대를 모색하는 운동이었다. 아따우알빠 유빤끼, 비올레따 빠라, 빅토르 하라, 메르세데스 소사 등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가수들은 언제나 가난한 민중과 핍박 받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자유와 해방을 염원하는 현장에 있었다. 마침내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라틴 아메리카의 시대정신을 상징하게 되었고, 국경과 인종을 넘어 세계의 인권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남(南)'의 비올레따 빠라와 '북(北)'의 빅토르 하라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칠레를 찾아보면 남과 북으로 매우 긴 국경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긴 나라이기 때문에 칠레는 남과 북으로 크게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북부 안데스 고원지역은 페루와 볼리비아 등과 공유하는 민속음악 전통이 있고, 남쪽은 ‘마리네’라는 토착음악에 유럽풍의 리듬이 가미된 음악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비올레따 빠라의 음악적 조력자였던 빅토르 하라는 북부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비올레따 빠라는 주로 남쪽 지방의 민요를 채집하며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해나갔다. 비올레따 빠라는 1917년 칠레의 남부 산 까를로스(San Carlos)에서 태어났다. 음악선생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기타와 노래를 배웠고, 12살 때부터 작곡을 할 만큼 음악적 재질이 뛰어났던 그녀는 1952년부터 칠레의 여러 지방을 여행해아며 민속 음악을 녹음하고, 편곡하며 시를 쓰고, 미술 작품도 발표했다. 이때 수집한 민요, 시, 전설, 춤 등의 자료는 인디오들의 전통 민요에 포크 음악을 결합시킨 ‘폴크로레(Folklore)’로 재탄생했고, 그녀는 페루나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의 토속적인 음악세계를 지니고 있던 빅토르 하라와는 다른 그녀만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나는 칠레의 민중들을 위해 민중들에게 노래한다. 만약 내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결코 승리만을 위하야 기타를 잡았노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릇된 것인지 그 차이에 대해 노래할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결코 노래하지 않겠다." - 비올레따 빠라

언제나 민중을 위해 민중에게 노래했던 비올레따 빠라의 노래들은 농민의 삶과 라틴 아메리카의 자연을 노래하였으나 점차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탄압에 저항하는 노래(La Carra)나 중남미의 연대를 강조하는 노래(Los Pueblos Americanos)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진보적인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좌파 정당인 인민연합당에서 활동하며 문화선전 활동을 병행하기도 했다. 1961년엔 ‘까사 드 빨라스(Casa de Palas)’라는 문화모임을 조직하고, 1964년에는 가족들과 함께 ‘라 빼냐 로스 빠라(la pena de los para)’라는 카페와 민속박물관을 함께 만들어 더욱더 많은 민중들에게 누에바 깐시온이 확산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 무렵 그녀의 대표적인 노래들로는 “Gracias a la vida”와 함께 군사독재에 신음하는 칠레 민중의 현실을 다룬 “Que Vamos A Hacer(우리가 가는 길)”, “Santiago, penando estas(산티아고, 너는 견디고 있구나)” 등이 있다. 비올레따 빠라가 작사․작곡한 노래들은 독재와 가난으로 신음하는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는 노래들이었으므로 칠레는 물론 라틴 아메리카 어디에서나 불려졌다. 그러나 비올레따 빠라(1917~1967)는 2월 5일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세운 민속박물관 천막 안에서 권총 자살함으로써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칠레의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운동을 주도하면서 누에바 깐시온이 민중 속으로 뿌리내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낄라빠윤(Quilapayun), 인띠 이이마니(Inti Illimani), 아뿌(Illapu) 등에 의해 계승되었고, 특히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 했던 빅토르 하라는 역사적인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당 정권 창출의 밑거름이 됐고,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혁명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1970년 칠레에는 합법적 선거에 의해 사회주의 정권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인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조직적인 개입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아옌데 대통령은 쿠데타군에 대항해 끝까지 저항하다가 대통령궁에서 피살되고 만다. 빅토르 하라 역시 양 손목이 부러진 채 쿠데타 군에 의해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그러나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숨이 끊어지지 않고 이후 칠레 민주화의 숨은 밑거름이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목소리',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1935년 아르헨티나 투크만(Tucuman) 지역 산 미구엘(San Miguel)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아르헨티나 민중가수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는 어릴 적부터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일찌감치 노래에 소질을 보였던 그녀는 지역 라디오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아마추어 노래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일도 있었다. 그녀가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 아르헨티나에서도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때부터 여러 정치운동의 현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1970년대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한 축이었던 칠레에서 피노체트의 군부 쿠테타가 발생하는 등 억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아르헨티나의 군부 정권 역시 소사의 활동을 감시했다. 1975년에는 공연 도중 청중들과 함께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군사정권 아래서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소사는 결국 1979년 1월 아르헨티나에서 영구 추방되었고, 3년간 이국을 떠돌며 정치적 망명자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음악은 이 시기에 더욱 더 넓고 깊어졌다.



1976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는 1977년부터 이후 3년간 좌익게릴라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반대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정치탄압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 불리는 아르헨티나 군부의 인권탄압이었다. 이때 희생당한 사람의 수는 정부당국 추산으로도 8천~1만 명에 달하고, 유가족 측은 2만 5천에서 3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하고 있다.

“나는 전세계 민중을 위해 노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건 나를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니까요. 노래는 변합니다. 투쟁과 단결의 노래도 있고 인간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1982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대 위에서 국민들에게 새롭게 표현해야 할 방식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건 국민들에게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왜냐구요? 아르헨티나에 산다는 게 투쟁이거든요. 아니, 라틴 아메리카에 산다는 게 그렇지요. 나는 국민들에게 무슨 문제제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메르세데스 소사

사랑하는 사람들과 강제로 헤어져야 했던 망명생활은 그녀에겐 죽음보다 더한 아픔이었다. 1982년 메르세데스 소사는 아직도 군부 독재 치하에 있던 아르헨티나로 목숨을 건 귀국을 감행한다. 마침내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소사를 기다리던 민중들은 오페라 극장을 가득 메우는 것으로 그녀를 환영했다. 모두가 군부 독재로 숨죽이던 시절, 3년이나 기다려온 청중들 앞에서 메르세데스 소사가 청중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가장 먼저 불렀던 노래가 바로 <삶에 감사하며(Gracias a la vida)>였다. 메르세데스 소사가 돌아온 얼마 뒤 마침내 아르헨티나에서 군부독재가 종식되었다.


본래 <삶에 감사하며(Gracias a la vida)>는 라틴 아메리카 ‘누에바 깐시온의 어머니’, 비올레따 빠라가 작사. 작곡한 노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선사했던 이 노래도 정작 비올레따 빠라에겐 삶의 희망을 주지 못했다.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진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비올레따 빠라는  “이 노래는 바로 여러분들의 노래이자 우리 모두의 노래이고 또한 나의 노래입니다. 인생이여, 고맙습니다. 인생이여, 고맙습니다.”란 노래 가사를 자살하기 직전 마지막 공연에서 최후의 인사말로 남겼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마음 아픈 낮

- 파블로 네루다

헤아릴 수 없는 수난과 잿빛 꿈을 가진
창백한 겉옷을 입는다. 틀림없는 수행원.
혼자서 살아가는 쇠의 바람,
배고픔이라는 옷을 입은 하인.
나무 밑의 시원함 속에서,
꽃들에게 자신의 건강을 전해주는 태양의 정수 속에서,
황금 같은 내 피부에 쾌락이 찾아오면,
호랑이의 발을 가진 산호 유령인 당신,
장례의 시간, 불타는 결합인 당신,
내가 사는 이 땅을 정탐한다,
약간은 떨고 있는 당신의 달빛 槍을 가지고.

그 어느 날이건 텅 빈 정오가 지나가는 창문은
날개에 풍성한 바람을 갖게 되는 법.
광풍은 옷을 부풀리고 꿈은 모자를 부풀리고,
절정에 달한 벌 한 마리 쉬지 않고 타오른다.
그런데, 그 어떤 예기치 못한 발자국이 길을 삐걱대게 할까?
음산한 역의 저 증기는, 해맑은 저 얼굴은,
게다가, 이삭 실은 낡은 마차가 내는 저 소리는?
아! 흐느끼는 물결, 물결, 조각난 소금, 소금,
날 듯 흘러가는 천상의 사랑 시간,
이들 모두는 나그네의 목소리, 기다리는 공간을 가졌다.

걸어온 모든 길, 막연한 희망,
어둠과 뒤섞인 타고난 희망,
마음을 찢을 듯이 달콤한 현존,
맑은 결, 꽃의 모습으로 이루어진 날들,
나의 짧은 실존과 연약한 산물 뒤에 무엇이 남는 걸까?
나의 노란 침대, 부서진 나의 존재와
누가 같이 있지 않으며 동시에 함께 하지 않는 걸까?
튀려는 마음. 나는 밀대로 만든 화살을 갖고 있다.
연약한 심장 소리, 물로 된 끈질긴 소리는,
영원히 깨어지는 어떤 것처럼,
내 이별의 밑바닥을 지나가고,
나의 힘을 끄고 나의 비탄을 퍼뜨린다.

* 네루다가 사랑했던 여인 조시 블리스와 헤어진 뒤 읇은 사랑의 노래




같은 유럽에서 파생된 말이라도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에서는 독특한 리듬을 느낄 수가 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시라는 것을 눈으로 읽기만 하는 것이 되고부터는 낭송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요사이에도 가끔 아나운서나 성우들 혹은 인기몰이를 타고 연예인들이 낭송하는 시를 듣게 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어쩐지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은 것 같은 이물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도 낭송하는 것을 꼭 들어보고 싶은 시 중에 하나다. 이 시는 당연히 연시다. 그것도 아주 비탄으로 가득한.... 스페인 혈족의 피가 흐르는 심장은 이토록 뜨겁다. 마치 투우장에 들어선 검은 황소의 뿔처럼 힘차고 우뚝하다. 그리고 에로틱하다. 거친 호흡이 연상되고, 갈색 피부에서 흘러내리는 굵은 땀방울이 연상된다. 마치 시인이 직접 여인의 가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으며 유방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이 시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동시에 소리로 들어야 한다. 분명 음악처럼 들릴 것이다. 이 순간, 시는 리듬이자 노래이고, 동시에 신음이며 호흡이 된다.

비바, 네루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 파블로 네루다 지음, 고혜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0년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한 우리는 찬란한 도시로 입성할 것이다."
-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인용하며 말한 랭보의 시구


파블로 네루다. 시인을 추억하는 방법은 많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그 시인의 시를 마음에 품는 것이다. 내년(2004년)이면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 지난 1973년이었으므로 오래되었다면 약간 오래되었고, 최근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이 된다. 그러나 그가 언제 태어났건, 그가 언제 죽었건 간에 그를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영원한 청춘의 시인이었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그의 시를 마음에 담고 있는 한 우리들 역시 그와 함께 영원한 청춘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아버지는 그가 시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런 까닭에 네루다는 자신의 본명을 숨기고 체코 출신의 서민 시인 '얀 네루다'의 이름을 본따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 그가 체코의 서민 시인의 이름을 본따 자신의 필명으로 삼은 것은 이 무렵 벌써 그 자신이 계급적 동질성이란 의식을 담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는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사망한다.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 테무코에 자리잡았고, 그는 조국의 개척지라는 토양에서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영감을 얻었다.


'우리 어머니를 화냥년, 개년으로 불러가면서. / 혼자서 마셨겠지. 오후의 차를. 고독하게. / 영원히 주인 잃은 내 낡은 구두를 바라보면서/ 내가 지금 거기서 열대 기후, 중국 쿨리들의 가난, / 그렇게도 나를 힘들게 했던 끔찍한 열병, / 아직도 증오하는 지겨운 영국인들에 대해 불평이나 하며 / 그곳에 있는 양, 큰 소리로 나를 저주하지 않고는, / 내 병, 내 밤의 꿈, 내 음식을 생각해낼 수 없을 거다.'


우리는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불유쾌한 경험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공직 생활을 훌륭하게 해낸 예술가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 했고, 그의 이런 소망은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으면서 성취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니며 외교관으로 살았다. 비록 영사직을 맡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명예영사였기 때문에 그는 칠레 본국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매우 힘들었다. 그런 탓에 이 무렵을 회고하는 그의 글들과 시에서는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시집 "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그렇게 만들어진 시들을 엮은 것이다.


'주변을 보았다. 쓰러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 / 노동자, 인력거를 끄는 쿨리, 농장의 쿨리, / 몸이 망가진 채 돌아다니는 이들, / 거리의 개들, / 무시받고 사는 가난한 이들. / 여기 상처받고, / 존재가 아닌, 그저 발에 불과할 뿐인, / 인간이 아닌, 그저 짐꾼에 불과한, / 걷고, 걷고, 땀 흘리고, 땀 흘리고, / 피땀을 흘리고, 영혼도 없어진 다음, / 이들은 이렇게 있다. / 외롭게 / 누워서 / 이제야 발뻗은 신세가 되었다. 이들 무쇠다리들이. / 배고픈 이들은 기쁨에 취할 / 암울한 권리를 산 것이다.' 「동양의 아편」


네루다가 랭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네루다를 추억하는 많은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한때 칠레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 인민연합의 아옌데와 후보 단일화를 통해 칠레의 민주화를 앞당겼고, 스페인 내전기에 희생당한 로르카의 친우였다. 물론 이런 사실들은 파블로 네루다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다. 그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에 일어나는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시인의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될지 모르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네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죽었고, 노 시인은 낙담하여 건강을 잃고 세상을 등졌다.

우리는 먼저 네루다를 시인으로 기억해야 한다. 네루다의 삶이 바로 시인의 삶이었다. 영원한 청춘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있는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사정권을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룩했다. 우리가 네루다를 기억하는 방식은 그의 시를 읽는 것일 게다. 그 중에서도 청춘의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건져올린 이 시집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도 참 아름다운 기억이 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