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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기형도 - 정거장에서의 충고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한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가끔 기형도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이들의 대책없는 애정에 놀라고... 돌아서서 그를 질투한다. 늙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시인이란 얼마나 시인답지 않은가! 기형도가 멈춰서는 정거장이란 늘 어두운 황혼이 깔려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 바그다드로 달아난 이슬람 상인의 일화처럼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천천히 죽어간다. 망각은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길이 아니며 망각없는 고통은 끝끝내 한 가지 길을 일러주지 않는다. 길은 무수한 갈래로 가지를 치고 나는 매순간 그 길의 한 가운데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아, 누추한 육체 속에 머물다 가는 영혼이여! 그대의 영혼은 또 얼마나 황량하냐? 그렇게 묻기 전에 이미 모든 길들은 흔들리며 내 앞으로 스쳐간다. 아니 그 길들은 시내와 같이, 시간과 같이 흘러왔다가 흘러간다. 흘러오는 것을 지켜본 뒤에 내게 남은 것은 늙었다는 자각이다.

시인 고은은 어려서 이미 늙어버렸다고 말한다. 태어나자마자 늙어버린 시인은 그래서 추레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미 누추한 육체를 자각하기도 전에 그대의 영혼은 꽃씨 한 번 시원하게 날려보지 못한 채 시들어버렸다. 시든 세상의 시인이란 그래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남들보다 먼저 늙고 그들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의 시체를 밟고, 뜯어 먹으며 다가오는 즐거운 죽음을 기다린다.

그대, 천천히 죽어가는 즐거움을 맛보는 순간이 어때? 견딜 만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