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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경인 - 인형탄생기

인형탄생기

- 김경인


처음엔 고무 덩어리였죠. 나를 만든 아주머니는 백한 번째 얼굴을 완성하는 중이었어요. 엄마, 엄마, 엄마, 나는 거듭거듭 태어났습니다.

예쁜 이름이구나. 누군가의 목소리 속에서 나는 나를 처음 불러 봤어요. 백한 개의 포장 박스가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나는 속삭였어요. 얘들아, 나는 모든 이름을 사랑해.

처음엔 그저 고무 덩어리였죠.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떴어요. 그런데 얘들아, 나는 누구니? 같은 모양의 이파리를 잔뜩 매달고 문득 호수를 굽어본 나무들처럼 우리는 깜짝 놀랐구요. 눈코입은 미로를 따라 끝없이 달아났지요.

발자국은 언제 발견될까요? 지도를 버리세요. 유리창에 매번 다른 지문을 찍어 대는 눈발처럼 내 몸은 드문드문 변하고 있지만요.

아직은 다리는 두 개. 손가락은 다섯 개. 나는 지금 가까스로 나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아직은 인간의 혀를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눈코입은 어디쯤에서 멈출까요? 나는 거의 다 달려왔지만요. 좀더 먼 곳을 추적하는 사냥꾼처럼 쉬잇 걸음을 멈추고,



김경인, 1972년 서울 출생. 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출처 : <세계의 문학>, 2008년 봄호(통권 127호)

*

“최초(最初)”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첫 출근, 첫 키스, 첫 경험은 두 번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래서 낯설고, 낯선 체험이기에 우리는 새로운 문을 열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 낯선 동네로의 이사와 새로운 골목길들에 대한 탐험은 아동에게는 신비로운 체험이다. 여행이란, 귀환이 비교적 안전하게 포장된 이주(移住)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낯설고 신비한 체험을 좀더 극적으로 누리기 위해 점점 더 외연을 확장해 나간다. 해외로, 해저로, 우주로 나아간다. 그러나 컴퓨터 자판에서 ‘Home'의 반대말이 ‘End'이듯 우리는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서 결국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최초는 유일무이한 경험이지만 우리는 번번이 자아가 속해있는, 속해있다고 믿고 있는 유일무이한 삶의 공간으로 회귀한다. 연어가 목숨을 걸고 생을 얻은 곳으로 회귀하여 죽음에 이르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 자체가 “거듭거듭” 회복(回復)의 길이기도 하다.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시대,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실재인가”라며 자아와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있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이노센스>에는 낯익은 성(姓)씨 하나가 등장한다.

“김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은데….”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 거리에는 얼마든지 있는걸.”

“김은 많을지 몰라도 내가 찾는 김은 오로지 하나뿐이야.”

작품 속에서 한국계로 추정되는 한 인물에게 오시이 마모루는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인 김 씨라는 성을 붙였다. 인간의 이름을 한자어로는 성명(姓名)이라 한다. 성명의 한자어를 풀어보면 계집녀(女), 날생(生), 저녁석(夕), 입구(口)다.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저녁이면 한 지붕 아래 모이는 식구(食口)란 뜻이다.

김경인의 <인형탄생기>는 여러 면에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이노센스>를 연상케 한다. 인형에게 나를 만든 여자는 더 이상 어머니라고 호명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을 합리화하며 자유 의지를 갖는 존재라고 한다면 갓 태어난 아기는 인간일까? - 서구에서도 18세기 부르주아 사회가 정착되기 전까지 어린이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이 말은 성인 대접을 받지 못했단 말이 아니라 아직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보자면 성인 남성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 우리는 가정, 학교, 직장에서 끊임없이 훈육되면서 훈육된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그 틀을 벗어난 대표적인 두 부류가 죄수와 미치광이일 것이다) 인간일 수 있다.

인형은 인간을 닮았으나 어쩌면 인간이 인형을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