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上弦)
-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
상현(上弦)달을 영어로는 'first quarter'라 부른다.
과학적인 표현일진 몰라도 매가리 없고, 풀 죽는 느낌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달은 언제나 여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원시시대 인류가 사냥과 채집에서 돌아와
동굴 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서로의 온기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아이들은 자라고, 새로운 생명은 여인의 품속에 싹텄으므로
밤과 달은 여성에 비유되었다.
남성에게 여성의 신비로움은 언제나 경이로운 일이었으나
늘 함께 지내는 존재였기에 여성의 신비는
한낮의 태양 같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함일 수는 없었다.
달처럼 마주볼 수 있고, 보일듯 잡힐듯 하면서도
여성은 달처럼 달려가면 또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 있었다.
밤과 달은 언제나 쌍을 이루어 등장하지만
상현(반)달만큼은 낮과 밤의 경계 사이에 등장하기도 한다.
언덕 위에 살짝 걸친 상현달을 시인은 설레는 가슴으로 훔쳐본다.
잠시 지상에 내려온 여신처럼
그녀의 하얗고 풍만한 궁둥이가 남긴 흔적은 저기 능선 어디쯤 있으리라.
내 가슴속에도 선연하게 새겨진 듯 화끈거리는 환한 상처들이다.
여신이 다녀간 그곳
능선 근처 나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를 가슴에 품었던 나무들은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순결하게 모든 죄악으로부터 정화되었고, 구원을 얻었다.
나도 그녀의 하얗고 풍만한 궁둥이에 입술을 씻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