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음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The Metamorphosis)"의 첫 문장은 이처럼 충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른바 현대소설의 탄생을 알리는 위대한 신호탄이었다고 할 만큼 이 문장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이처럼 충격적인 사실을 무척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어느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음을...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니 자신이 흉측한 벌레가 되어 버린 팔다리를 바라다보면서도 그는 굳어버린 몸으로 자버린 바람에 일어나보니 몸이 약간 결린다는 사실을 제외하곤 기차시간을 놓쳐 갈 수 없게 된 출장을, 이나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걱정한다.
그의 가족들은 그보다 더 빨리 이 모든 것에 적응한다. 그가 더이상 외판원 일을 나갈 수 없을 테니 사장에게 해고될 테고, 그나마의 일자리를 잃고 되면 더욱 가혹해질 빚독촉이 걱정이다. 그레고르와 가장 가까웠던 여동생 마저 그레고르를 냉대한다.
"내쫓아야 해요! 저 짐승은 우리를 못살게 굴고, 하숙인들을 쫒아내고... 나중엔 틀림없이 이 집 전체를 독차지하고서 결국 우리를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신세가 되도록 만들 거예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생계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힌 가족의 냉대 속에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힌 채 먼지에 뒤덮혀 결국 차갑고 어두운 방구석에서 굶어죽는다. 그의 죽음, 주검을 발견한 가족은 그의 주검 앞에서 신에게 감사드리고 오랜만에 교외로 나간다.
1912년 카프카가 "변신"을 집필하기 시작한지 35년 뒤 미국의 대표적인 현대 극작가인 아서 밀러는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이란 희곡을 발표한다. 예순 셋의 세일즈맨 윌리 로먼은 평생동안 세일즈맨으로 살며 회사와 가족을 책임져 왔지만 나이먹고 병약해진 몸 때문에 어느날 본사근무를 신청했다가 자신이 이름까지 지어준 전임 사장의 아들에게 해고당한다. 그는 자신이 속살만 파먹고 버리는 오렌지가 아니라며 항변해보지만 젊은 신임 사장은 그의 항변을 묵살해버린다.
늙은 윌리에게도 가족이 있지만 그를 이해해주는 것은 그나마 늙은 아내 린다뿐이다.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그가 큰 기대를 걸었던 아들 형제는 아버지를 가부장적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늙은 속물 취급할 뿐이다. 늙은 윌리는 자기 앞으로 들어논 보험금으로 자식의 사업자금을 대주기 위해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고 나간다. 그의 장례식날 가족들은 비로소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왜 자살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보, 난 울 수가 없어. 당신이 그냥 출장 간 것 같기만 해요. 계속 기다리겠죠. 여보, 눈물이 나오지 않아요. 왜 그랬어요? 여보,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요. 오늘 말이에요. 그런데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이제 우리는 빚진 것도 없이 자유로운데, 자유롭다고요."
나는 "변신"과 "세일즈맨의 죽음" 사이에 공통점들이 제법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을 굳이 미학적이거나 문학적으로 비평할 마음은 없다. 다만 오늘날 거리에 수많은 벌레들과 속살 파먹힌 오렌지 껍데기,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질 날만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기억났을 뿐이다.
벌레와 오렌지 껍데기와 늙은 개.... 우리들의 자화상!
* 작가 황석영은 "여럿의 윤리적인 무관심으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거야,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우리 사회가 그 정도의 엄밀한 윤리의식을 가질 수는 없더라도 나와 남의 목숨을 모두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서초구청장이 엄동설한에 구청장이 탑승한 관용차가 들어설 때 청원경찰이 늦게 나왔다며 난방기가 설치된 초소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는 징벌을 내려 이것이 결국 청원경찰의 사망으로 이어졌다는 뉴스가 나와 인터넷이 떠들썩한데 구청 측에서는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며 적극 해명하고 있다. ..... 정말 엄청나게 적극적으로 해명해야만 할 거다.
'LITERACY > Tempus Edax Reru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몽상가에 대한 단상 - 권혁태(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0) | 2013.02.27 |
---|---|
정치인 유시민, 자연인 유시민 (3) | 2013.02.26 |
정희진 선생의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를 읽다가... (3) | 2013.02.15 |
당신의 밥상이 기업의 전쟁터란 사실을 알려주는 몇 권의 책 (0) | 2013.02.14 |
서울대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총서시리즈 (0) | 2013.02.12 |
살아가야 할 이유(why) (0) | 2013.01.23 |
다마스와 라보에 대한 단상 (3) | 2013.01.18 |
送舊迎新(from 2012 to 2013) (0) | 2012.12.31 |
김동춘 - (서평: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이토록 탁월한 자본주의 문명사 (0) | 2012.12.27 |
2012년에 출판된 주목할 만한 중국관계서적들 (0) | 2012.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