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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신경림 - 갈구렁달 갈구렁달 -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 어릴 적엔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들을 죄다 뜯어 고치겠다는, 아니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부터 싫든 좋든 나도 그 세상 풍경의 일부란 사실.. 더보기
윤성학 - 내외 내외 - 윤성학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조붓한 산길을 오붓이 오르다가 그녀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가릴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편에 세워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가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 더보기
김중식 - 木瓜 木瓜 - 김중식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의지 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亡身의 사랑이여! *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 사랑이 이성의 일이 아니란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진리 같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사랑도 호르몬의 작용이라 길어야 3년이란다. 사랑이 이성의 일이 아니든, 호르.. 더보기
이재무 - 저 못된 것들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노래방에 갔을 때 더이상 내가 부르는 노래들이 신곡 코너가 아닌 '가나다'순 어딘가를 뒤져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가끔 어쩌다 알바생들이랑 일을 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친구들이 88올림픽을 본 적이 없는 세대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다. 9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 더보기
천양희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은은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스테인레스처럼 녹 하나 슬지 않는 .. 더보기
이면우 - 소나기 소나기 - 이면우 숲의 나무들 서서 목욕한다 일제히 어푸어푸 숨 내뿜으며 호수 쪽으로 가고 있다 누렁개와 레그혼, 둥근 지붕 아래 눈만 말똥말똥 아이가, 벌거벗은 아이가 추녀 끝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붉은 마당을 씽 한바퀴 돌고 깔깔깔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와 몸을 턴다 점심 먹고 남쪽에서 먹장구름이 밀려와 나는 고추밭에서 쫓겨나 어둔 방안에서 쉰다 싸아하니 흙냄새 들이쉬며 가만히 쉰다 좋다. * 나이 먹고 제일 많이 달라진 게 있다면... 비 맞는 일이 줄었다는 거다. 비 오는 날... 나갈 일도 없고, 비가 와도 우산 없이 다닐 일도 별로 없다. 게다가 비 온다고 젖어들, 손바닥만한 맨 땅도 도시에선 구경하기 힘들다. 이제 비오면 맨먼저 비릿하게 달려들던 흙 냄새 대신 콘크리트 냄새와 열기가 먼저 후욱 .. 더보기
복효근 - 가마솥에 대한 성찰 가마솥에 대한 성찰 - 복효근 어디까지가 삶인지... 다 여문 참깨도 씹어보면 온통 비린내 뿐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순간에도 또 견뎌야할 날들은 남아 참깨는 기름집 가마솥에 들어가 죽어서 비로소 제 몸을 참깨로 증명하는구나 그렇듯 죽음 너머까지가 참깨의 삶이라면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살과 피에서 향내가 날 때까지 어떻게 죽음까지를 삶으로 견디랴 세상의 가마솥에서 참 삶까지는 멀다 * 복효근 시인의 은 성찰(省察)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시이다. 비록 시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지만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향적(polyphonic)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훌륭한 시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시인은 묻는다. "어디까지가 삶이냐?" 참깨라는 .. 더보기
기형도 - 비가2:붉은달 비가 2 ---- 붉은 달 기형도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 더보기
이성복 -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 이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 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 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 시인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럼에도 시는 .. 더보기
백석 - 고향(故鄕) 故鄕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어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寞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의 이 시 "고향"은 그 자체로 참 따스하다. 하나의 에피소드, 하나의 국면만으로 구축된, 보기에 따라 참 단순한 시(미의 세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