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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 승려란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인연(因緣)을 걸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대오각성(大悟覺醒)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자를 말한다. 태어남과 .. 더보기
윤제림 - 길 길 - 윤제림 꽃 피우려고 온 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을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가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 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가는 짐 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동네 어귀에서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걷는 아줌마를 본 적이 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아줌마 저 배에 들어있는 게 .. 더보기
백석 - 여승(女僧) 여승(女僧) -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말이 담고 있는 정경이 구구절절하게 아프고, 아프다. 머리 깎은 여승이 속세에서 겪은 삶의 내력이 한 편의 짧은 시에 모두 담길 수 있을까? 아마도 삶의 이러한 면, 저러한 면을 사려 깊게 살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가 보여주는 몇.. 더보기
나태주 - 산수유 꽃 진 자리 산수유 꽃 진 자리 -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 "풀꽃"의 시인 나태주의 시들은 따사롭다. 얼핏 생각없이 바라보는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따사롭기 그지 없어 예쁘기만 한 시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그의 따사로운 시어들을 곰.. 더보기
강영환 - 여름에 핀 가을꽃 여름에 핀 가을꽃 - 강영환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자갈밭으로 난 작은 길 위에 마른 눈을 들어 들어서 안간힘으로 버텨선 흔들림으로 가을꽃이 피었다 먼 원시림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건강한 뼈대 자갈밭에 내려 쌓이는 수천의 빛 무리를 넘어뜨리며 위태로이 홀로 서서 말라비틀어진 이 계절의 중심에서 억센 근육을 부러뜨려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출처] 칼잠, 시로사(1983) * "여름에 핀 가을꽃"은 강영환 시인의 등단작이자 첫 시집 칼잠에 수록된 시인데 아쉽게도 시집 자체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에는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란 구절이 첫 행과 마지막 행에서 반복(5행에서도 축약된 형태로 '가을꽃이 피었다'가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 더보기
김사인 - 늦가을 늦가을 -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 요즘 시인들은 왜 달에 대한 멋진 시 하나 토해내지 않는 건지. 제가 가장 마지막에 주목했던 소설가는 "마루야마 겐지"였습니다. 이 말은 최근엔 소설을 읽지 않는 제 현실의 문제이죠. 어쨌거나 그의 소설 는 참 특이한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설을 읽고 난 뒤 낡은 오.. 더보기
김수영 - 강가에서 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 더보기
마종기 - 證例6 證例6 : 앤 선더스 아가에게 - 마종기 내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환자는 늙으나 어리나 환자였고, 내가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기계처럼 치료하고 그 울음에 보이지 않는 신경질을 내고, 내가 하루하루 크는 귀여운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서는 연민의 작은 꽃 한 번 몽우리지지 않았지. 가슴뼈 속에 대못 같은 바늘을 꽂아 비로소 오래 살지 못하는 병을 진단한 뒤에 나는 네 병실을 겉돌고, 열기 오른 뺨으로 네가 손짓할 때 나는 또다시 망연한 나그네가 되었지.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 나는 드디어 귀엽게 살아 있는 너를 보았다. 아, 이제 아프게 몽우리졌다. 네 아픔이 되어 낮에도 밤에도 속삭이는구나. 미워하지 마라 아가야. 이 땅의 한곳에서 죽.. 더보기
오세영 - 비행운 비행운(飛行雲) - 오세영 한낮 뇌우(雷雨)를 동반한 천둥번개로 하늘 한 모서리가 조금 찢어진 모양 대기 중 산소가 샐라 긴급 발진 제트기 한 대가 재빨리 날아오르더니 천을 덧 대 바늘로 정교히 박음질 한다. 노을에 비껴 하얀 실밥이 더 선명해 보이는 한줄기 긴 비행운(飛行雲) 출처 : 『황해문화』, 2009년 봄호(통권63호) * 42년생 시인에게 천진(天眞)하단 말은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갈수록 오세영 시인의 시가 천진해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건 나이가 들면서 더욱 천진해지는 시인들이 있으며 그 모습이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시인이기에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에 오세영 선생의 시(詩) 3편을 받았는데 모두 비슷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이었기에 당신의 시를 받.. 더보기
안현미 - 여자비 여자비 - 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메이는 소리 * 사는 게 비루하다고 여기다가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그래도 좀 낫다 싶어 한숨을 푹 내쉰다 살아야 할 날이 어제보다 하루 줄었으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