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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이 한 권의 책 - 『아리랑』(Song of Arirang)

『아리랑』(Song of Arirang))/ 김산, 님 웨일즈 공저/ 조우화 옮김/ 동녘/ 1984

'폭풍의 시대'를 불화살처럼 살아간 이들에게
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커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인도식 카레라이스를 먼저 떠올리기 보다는 '커리큘럼'의 약자로 쓰이던 '커리'를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당시 소위 '의식화 학습'이라는 계몽 교육 기간을 거친 청년이라면 대개는 비슷한 커리큘럼을 가지고 학습했을 텐데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들자면 정인의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와 네크라소프의 시로 더욱 유명해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정도는 충분히 기억날 것이다. 이런 책의 저자들이 이제는 어느새 불혹의 나이를 지나 필명이나 가명 대신 떳떳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진행하는 TV프로그램을 갖게 되거나 자신의 실명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혹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정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던 황광우 선생은 - 황지우 시인의 동생으로 그의 시에 종종 등장하기도 했던- 현재 민주노동당 연수원장을 맡고 있다.

그런 옛날의 커리큘럼에 들어 있던 책들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중고등학교 시절 써클 선배들을 통해서 혹은 동년배들을 통해 몰래 읽곤 했던 기억이 있으나 잦은 이사와 기타 등등의 이유로 이제는 몇 권 보관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중 한 가지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아리랑』이다. 개인적으로 내 인생의 청소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 3권을 들라면 난 망설임 없이 『아리랑』과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 그리고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들 것이다.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오늘 우연히 리영희 교수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책을 펼쳐들었다가 『아리랑』과 관련된 페이지를 보게 되어서 이 글을 쓰게 된다.

이 책은 님 웨일즈라는 미국의 여성 저널리스트가 조선족 출신의 혁명가 '김산'을 만나 그와의 인터뷰를 함께 정리해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우리는 김산이란 인물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시절의 일이었으니 어른들 중 누구를 붙잡고 그 실체를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물어 본다고 알만한 사람도 사실 별로 없을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확실했던 것은 '김산'이란 인물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게다가 님 웨일즈의 글 역시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 인물의 진위 여부를 떠나 저도 모르게 '김산 동지'라는 호칭으로 그를 부르게 되었다. 김산 동지와 우리의 시차는 무려 60여 년의 터울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간혹 우리가 좀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도 이럴 때 김산 동지라면 어떻게 처신했을까를 되묻곤 스스로 좀더 의연해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곤 했다. 많은 이들이 이와 유사한 경험들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후 우리들의 삶이 기구하고 신산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과 주인공들의 삶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리랑』과 관련하여 이후 출판된 책은 크게 두 권이 더 있는데 『아리랑2』라는 제목으로 학민사에서 나온 것이 있고, 『아리랑과 그후』란 제목으로 동녁에서 나온 책이 있다. 그러나 이 『아리랑』을 좀더 재미있게('재미있게'라는 말에는 다소간의 어폐가 있지만) 보고자 하는 이들은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위대한 길 -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를 함께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에드가 스노우와 아그네스 스메들리에 대해서는 앞으로 새로 다루거나 아니면 그와 관련된 웹사이트를 알려드리도록 하겠다.)

중국 대륙에 꽃핀 아리랑과 김산 그리고 님 웨일즈
김산이란 인물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 글이 그의 생애 전반에 걸친 것이 되지 못할 것이란 것이다. 그리고 김산과 님 웨일즈, 아그네스 스메들리, 에드가 스노우, 존 리드 등에 대해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보충하거나 나의 홈 페이지에 그들에 대한 별도의 글을 올릴 예정이다.

김산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그의 본명은 장지락(張志洛)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오다가 1998년에 이르러 장지학(張志鶴)이 본명이라고 새로 밝혀졌다. 장지락이란 이름 역시 그의 가명이었던 것이다. 사실 김산이 실존 인물이란 사실과 몇몇 사실들을 제외하고는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는 사실들 역시 그 진위가 명확하게 밝혀진 것들은 최근까지도 많지 않은 편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님 웨일즈(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우)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그는 이 기록을 통해 후세의 우리들에게까지 알려지는 불멸을 얻은 것이다. 이 책이 미국에서 1941년 초판 발행되기까지 그리고 그것이 다시 일본에서 출판되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우리나라에서 출판되기까지는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고, 실제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판될 때는 출판사 사장이 책을 내고 도피 생활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같지만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이 1984년인 것을 생각해보면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1937년 7월 7일 일제의 중국 침략 직후 연안에서 님 웨일즈는 노신 도서관에서 다종다양한 책을 빌려가는 한 사람에 대해 궁금증을 품고 그를 찾아보게 된다. 님 웨일즈가 그를 처음 만나는 대목이다.

임시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솜이 든 푸른색 커튼을 학자의 손처럼 야윈 손이 옆으로 밀어젖혔다. 그러자 실내의 조명을 받으며 크고 인상적인 사내의 모습이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당당하고 품위있는 태도로 인사를 하였으며, 우리가 악수할 때 주의깊게 나를 응시하였다. 밖에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고 창문이 종이로 되어 있어서 충분한 조명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열굴은 윤곽이 뚜렷한 것이 묘하게도 중국인 같지는 않았고, 반(半)스페인 풍의 사람처럼 아주 멋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 사람이 유럽인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 <중략> … "그렇지만 조선의 시냇물이 평상시에는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아십니까?" 이 질문에는 향수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맑은 강물이나 시냇물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조선의 강에서 투신자살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답니다. 중국의 강들은 그러기에는 너무 더럽지요."

"당신네 조선인들도 일본 사람만큼이나 자살을 좋아하는 모양이지요?"

"자살은 식민지 민중이 요구할 수 있는 불과 몇 안되는 존엄한 인간의 권리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살마저도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서울의 그 다리 위에는 벌써 오래 전에 일본놈들이 푯말을 세워 두었지요. 거기에는 '5분만 기다리시오'라고 씌어 있답니다. 굶주린 아기 엄마들이 종종 자기 자식을 집어 던지고는 자신도 뛰어든답니다. 그래서 전담 경찰이 파견되었지요."

김산의 생애
김산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함으로써 자신의 조국을 점령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싸우기로 결심한 단련된 불굴의 조선인이었다. 그는 당시 32세의 나이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고, 3개 국어 심지어 그리스어도 약간 할 수 있었던 엘리트였다. 그는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1905년 3월 10일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무렵엔 러일전쟁이 한창이었고 그 전쟁의 결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김산이 장로교 계통의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이 평화적인 시위를 제국주의 일본은 잔혹하게 탄압했으며 그로 인해 조선의 강토는 피의 강을 이루어야만 했다. 그 후 수년동안 수십만의 조선인들은 조국을 떠나 해외로 갔다. 그 중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그곳의 상황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혹독했다. 그해 여름 김산은 공부를 위해 일본에 갔다가 1년 정도 머문 뒤 다시 만주로 떠난 것 같다. 그는 삼원보를 거쳐 합니하 부근의 신설된 군사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훈춘사건이 발발한 직후 아직 일본 군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그곳을 떠나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

그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젊은 항일 '급진주의자'들과 접촉하며 무정부주의에 눈뜨게 되고 곧 무정부주의자가 되었으나 1921년에서 22년 사이에 마침내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김산은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에도 영향을 받았으나 님 웨일즈가 느끼기에 그는 어린 시절의 기독교적 영향, 즉 프로테스탄트적인 근면과 성실, 진리 추구에의 순수한 의지가 가장 큰 것이었다. 물론 그도 일제에 체포되었을 때는 조직과 동료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겠지만 그 친구들에게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며, 그가 일경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동료 중국공산당원들도 믿어줄 것으로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를 잘 아는 이들은 물론 그를 믿었으니 그가 최후의 순간에 '일본의 특무,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처형당할 시기의 연안(옌안)에는 그를 믿어주는 이런 동료들이 없었다.

그는 성실했으며 혁명의 이상을 위하여 신들린 사람처럼 열심히 일했다. 그는 제국주의에 침탈된 조선을 잊지 않았고, 휴머니즘에 기초한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해륙풍 소비에트와 광동 꼬뮌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물론 그 당시 중국에는 김산 보다 더욱 많은 열정을 가지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혁명 열사들 역시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김산을 만나 감동을 받는 것은 그가 단순히 한 인간 '김산'이 아니라 그 시기에 조국해방과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싸운 우리 동포 중 한사람으로서 우리가 현재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아직 소규모 세력이었던 초기에 공산당원으로 입당한다. 그렇지만 그는 군벌을 해체하고 그들의 제국주의 후원자들을 패퇴시킬 목적으로 감행된 북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손문은 북벌을 시작하여 1925년 3월 12일 죽을 때까지 이 북벌을 지도한다. 그러나 그가 죽고 장개석이 국민당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그는 제국주의 세력과 손잡고 민중을 배반하여 국민당 내 좌파 세력이었던 공산당과 민중을 배신하여 대규모 학살극을 자행한다. 그 와중에 벌어진 일들이 광동 봉기와 해륙풍 소비에트였으며 김산은 여기에 참가한다. 이 봉기에서 공산당이 패배한 뒤 자행된 백색테러가 난무하는 와중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다시 상해로 돌아온다.

이 무렵 코민테른 제6회 총회에서는 '1국 1당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해 8월 길림성에서는 공산당회의가 열렸고 김산은 이 회의에 참가했으나 이 회의에서 조선공산당의 만주분국 해체 및 그 당원원의 중국공산당으로의 당적 이전 문제를 막지는 못했다. 그가 활동했던 북경은 반동세력의 요새였고, 그에 따라 그의 활동은 철저히 지하화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일경에 넘겨졌다. 그는 다시 압송되어 조선으로 왔으나 조사와 심문을 거치는 동안 전향하거나 동지를 배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그에게서 어떤 혐의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를 석방하고 만다. 그는 1931년 4월 석방되어 그해 6월 북경으로 다시 돌아오지만 동지들은 그가 너무 빨리 석방된데 대해 의심을 품고 당적을 복권시켜주지 않았다. 거기에 '한'이라는 인물과의 불화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얽혀들었고 그가 극구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극좌편향주의자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당조직 재건활동에 몸바쳐 일했으며 그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김산의 최후
1935년은 중국공산당에게는 격변의 시기였다.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홍군은 대장정에 올라야 했고, 알본군과 국민당군에게 협공당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택동은 당시 고위지도부에 도전하였으며 이후 중국공산당은 모택동의 지도 아래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해 7-8월에 열린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서 전세계의 파시즘과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집단과 연합전선을 형성한다는 정책을 채택하게 되어 광범위한 항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달라진 상황 속에서 중국에 머물고 있던 조선의 혁명가들은 어떻게 하면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목표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맞물리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분파로 흩어져 중국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김산은 상해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을 참여시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1936년 8월 당시 섬서, 감숙, 영하 소비에트 지구에 거주하는 조선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어 연안으로 간다. 그리고 이 무렵 멀리 떨어져 있게 된 그의 아내는 아들을 낳는다. 바로 이 시기에 님 웨일즈는 김산을 만나게 된다. 당시 김산은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 등의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오랜 피로로 인해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님 웨일즈가 연안을 떠난 뒤 오랫동안 그녀는 '김산'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최후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다만 추측으로 숙청되었거나, 항일전쟁에서 전사했거나, 질병으로 인해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끝난 뒤 님 웨일즈는 자신이 연안을 떠난 직후인 1938년 그가 비밀리에 부당하게 처형되었음을 알게 된다. 중국에서 쓰여진 김산의 약전(『조선족 혁명 열사전』 제2집)에는 "1938년 섬강녕변구 보안처에서는 김산 동지의 경력을 심사했다. '반역자는 아닌가?', '일본의 특무는 아닌가?', '트로츠키파는 아닌가' 하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심사했지만 결론을 내릴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강생'은 '비밀리에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산 동지는 무고하게 살해되었다, 그때 그는 33세였다." 그 무렵 김산은 아픈 몸을 이끌고 전선에 나가겠다고 자원하고 있었다. 그가 목적하고 왔던 일(조선공산당의 인정문제와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의 문제)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여러가지 혐의가 그에게 드리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전선에 보내지는 체하고 도중에 살해되었다. 그녀의 책이 출판된 1941년에 김산은 이미 저 세상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우리의 해방이 다가온 것은 그로부터도 4년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1983년 1월 27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김산의 처형은 특수한 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였다. …<중략>… 본결의에 의해, 그에게 덮어씌워졌던 불명예가 제거되며 그가 지녔던 명예를 모두 그에게 되돌린다. 또한 이로써 그의 당원 자격은 회복된다."

그가 당적을 빼앗긴지 50여년만의 일이었으며, 그의 책 초판이 대한민국에서 발간되기 1년 전의 일이다. 『아리랑 그후』를 보면 님 웨일즈는 김산의 연안행과 그와의 마지막 대화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당신은 김산이 자전을 다 말했을 때 뭐라고 했는지 아나요? …<중략>…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왠지 모른다.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나를 이렇게 다룬다, 단 한가지 이유는 내가 조선인이어서 그렇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조선인이라는 국외자였습니다. 그는 중국에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 더 있어요. 중국인은 조선에 전혀 경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독립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001.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