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구엔지압(武元甲, Vo Nguyên Giap, 1911.8.25 ~ 2013. 10. 4)





보구엔지압, '붉은 나폴레옹(Red Napoleon)'인가?

현행 발음 표기대로라면 '보응우옌잡'이 맞다고 하는데, 그냥 입에 밴 대로 보구엔지압이라고 해두자. 그가 지난 10월 4일 10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를 탁월한 군사전략가라고 말하는데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탁월한 군사전략가이자 동시에 뛰어난 혁명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를 일러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붉은 나폴레옹(Red Napoleon)'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그가 이런 별명을 좋아했다고도 하는데 냉정하게 말해서 그는 나폴레옹과도 거리가 멀다. 도리어 그는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을 패퇴시켰던 미하일 쿠투조프와 닮았다.

역사상 차르의 궁전에 깃발을 꽂는데 성공했던 외국 군대는 징기스칸의 몽골군을 제외하곤 없었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까지도 그렇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과 그의 위대한 군대( La Grand Armée)는 자신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프랑스가 러시아의 유럽 동맹국을 공격하자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러시아는 1805년과 1807년 두 차례에 걸쳐 나폴레옹에게 크게 패하면서 군대의 10분의 1을 잃어야 했고, 프랑스와 불평등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조약을 준수할 의사가 별로 없었고, 나폴레옹 역시 알렉산드르 황제의 러시아를 호시탐탐 넘봤다. 나폴레옹의 넘치는 자만심이 화를 불렀다. 그는 적국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도 잘 드러난다.

"알렉산드르 1세여, 나의 70만 대군이 모스크바 근처에 다다랐다. 더이상 험한 꼴 보기전에 항복하라!"

당시 나폴레옹을 상대하던 적장은 미하일 쿠투조프였다. 쿠투조프는 예전에 이미 나폴레옹에게 크게 패했던 경험이 있는 장군이었으며 당시 러시아군의 전력은 여러 면에서 나폴레옹의 군대에 비해 훈련과 장비면에서 뒤떨어졌다. 그는 일부러 후퇴하는 전략을 택해 나폴레옹에게 텅빈 모스크바를 내준 뒤 곧 불을 질러 파괴했다. 나폴레옹이 할 수 없이 철수하게 되자 쿠투조프는 그가 왔던 서쪽 길목만을 터주었다. 위풍당당하게 러시아를 침공했던 그의 위대한 군대는 만신창이가 되어 러시아 평원에서 묻히고 말았다. 1814년 3월 알렉산드르 황제는 당당하게 파리에 입성했다.

역사교사를 장군으로 만든, 사람 볼 줄 알았던 호치민과의 만남

보구엔지압을 쿠투조프에 비견하는 것은 물론 여러 면에서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우선 쿠투조프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던 알렉산드르 1세는 쿠투조프 장군의 지연작전과 초토화 작전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이런 작전은 황제는 물론 백성들에게도 인기가 없는 법이다. 황제 역시 쿠투조프 장군 자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매우 무능한 장군으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던 지압이 1940년 호치민을 만나러 중국에 갔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9세였다. 지압을 만난 호치민은 나이 30도 안 된 지압에게 베트남 공산당 군대를 양성하고 조직하는 임무를 맡기고, 그에게 '장군' 칭호를 내렸다. 지압 장군은 군대교육을 받은 일이 없는 언론인, 고등학교 역사교사 출신이었다. 물론 그는 혁명가로서, 역사전공자로서 군대와 전쟁사에 관심이 많았다. 프랑스 혁명사와 나폴레옹의 군사작전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를 '붉은 나폴레옹'이란 별명을 얻게 한 이유일 것이다. 어쨌든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호치민이 사람을 보는 눈이 얼마나 남달랐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구엔지압은 베트남 중부 쾅남다낭성(省)에서 출생했다. 그는 하노이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창립됨과 동시에 입당하였으며, 1930년대 말부터 1940년까지 중국에 가서 호찌민[胡志明]의 지도하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베트남에 잠입하여 베트민(Viet Minh)을 결성한 후, 여러 성(省)에 혁명세력의 근거지를 만들어서 항일(抗日) 게릴라부대를 지도하였다. 1945년 독립과 함께 내무장관이 되었고, 1946년 국방장관이 되었다. 프랑스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해방군 총사령관이 되어, 1954년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베트남은 20세기의 30년 전쟁이었다. 한 세대가 흘러가는 동안 5명의 미국 대통령이 인도차이나의 현실을 잘못 인식했고 자신들이 만든 환영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그 환영은 처음엔 공포였으나 나중에는 희망으로 변했다. 이러한 공포와 희망은 현실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고 마침내 부정할 수 없는 악몽이 되어 버렸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남북전쟁 이후 가장 깊은 갈등을 초래했다." - 존 스토이신저

베트남전은 미국과 베트남의 단순한 인내력 대결이었을까?

지압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지압 장군과 베트남전쟁을 회고하는 글을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하면서 "지압은 병참술의 대가였지만 그의 명성은 그것을 넘어선 것에 기인한다. 그의 승리는 그와 호찌민이 승리를 확신한 '버티기' 전략으로 이뤄진 것이다. 아무리 막강한 적이라 해도 나라를 멸망으로 몰고가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더라도 감내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의미한다. 호찌민은 프랑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병사 열명을 죽여라. 우리는 프랑스군 한명을 죽일 것이다. 결국은 당신들이 먼저 지칠 것이다."라고 했고, 이어 "미군은 월맹군과의 전투에서 한번도 진적이 없으나 전쟁에서 패했다"고 말했다.

"오자병법(吳子兵法)" 도국(圖國)편에 "천하가 싸움에 휩쓸렸을 때(天下戰國) 5번 이긴 자는 화를 면치 못하고(五勝者禍), 4번 이긴 자는 그 폐단으로 약해지고(四勝者弊), 3번 이긴 자는 패권을 잡고(三勝者覇), 2번 이긴 자는 왕이 되며(二勝者王), 단 한번 이긴 자가 황제가 된다(一勝者帝)"란 말이 있다. 실제로 지압 장군의 전술은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식민모국과 당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강대국을 상대로 인명 손실을 감내하는 지연작전과 소모전의 양상을 띠었다.

케네디를 비롯한 그의 군사고문단들은 베트콩 병사들이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말할 때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검은색 파자마'를 입은 베트콩은 가짜군대이며 남베트남이 합법적인 정규군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는 그 반대였다. 당시 지역 전문가들이었던 로스토우와 테일러 등은 베트남을 한국과 같다고 보았지만 이들 역시 베트남과 한국의 중요한 차이를 간과했다. 즉 한국은 어쨌든 군복을 착용한 적군이 정식으로 국경을 넘어 침략한 정통적인 의미의 전쟁을 치른 반면 베트남은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사실상 전선이 없는 정글지대의 이점을 이용해 게릴라들이 치르는 정치 투쟁이었다.





실제로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우리가 기억하는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전술적으로 막대한 피햬를 입었다. 1968년 전술적으로 그다지 가치가 없어 보이던 케산의 미군기지를 향해 수많은 베트콩들이 몰려 들었다. 많은 이들이 이 전투가 프랑스와의 대결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던 디엔비엔푸 전투의 재판이 될 것이라 여겼지만, 실제로 케산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미국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북베트남군은 케산에서 물러났다. 당시 케산 전투를 지휘했던 론스(David E. Lownds) 대령에게 기자들이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언덕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나?"라고 묻자, 론스 대령은 자랑스럽게 답했다.

"적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이기겠다는 생각이 부질없음을 우리가 그곳에서 생생하게 보였주었습니다."

그러나 케산 전투는 곧 들이닥칠 1968년 '구정(테트)공세'의 철저한 위장이었다. 미국과 군부의 시선을 케산에 묶어둔 상황에서 지압 장군은 테트 공세에 전력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심혈을 기울여 전력을 다한 테트 공세에서 베트콩은 초기에 잠깐 그들이 원했던 성과를 거두었을 뿐 이후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때 입은 인적, 물적 손실이 너무나 막대했기 때문에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시간과 인적 자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국도 테트 공세 이후 더이상 전쟁을 지속시킬 수 없었다.

베트남이 그토록 많은 인명 손실을 감당할 수 있었던 까닭, 대의명분

보구엔지압 장군은 미국인 전기작가와의 인터뷰에서 테트 공세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구정공세를 군사적인 목적에 국한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우리는 더 넓게 생각했습니다. 구정공세는 군사적이면서, 정치적이고 동시에 외교적인 활동이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전쟁을 단계적으로 축소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이건 아주 포괄적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군사 전략인 동시에 정치 전략이었습니다. 우리도 적을 섬멸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군의 싸울 의지는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구정 공세의 이유입니다."

베트남에서 미군을 지휘했던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베트남전에서 우리는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았습니다. 중대 단위로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맞붙은 곳에서는 모두 이겼습니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도 물론 이겼죠."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전혀 다른 의미이긴 하겠지만 지압 장군도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우리는 전투에서 여러 번 패배했지만, 전쟁에서는 한 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딘 러스크 같은 인물도 "개인적으로 나는 두 가지 실수를 했다. 나는 북베트남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를 과소평가했고 미국인의 인내력을 과대평가했다"면서 마치 이 전쟁이 의지력의 싸움이었던 것으로 평가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국의 패배 요인을 분석할 수 없다.

앞서 "오자병법(吳子兵法)" 도국(圖國)편을 이야기했는데, "단 한번 이긴 자가 황제가 된다(一勝者帝)"란 이야기 앞에 오자가 전쟁에 임하는 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으로 강조한 이야기가 있다.

"무릇 국가를 잘 다듬고 군사력을 기르려면 반드시 예를 가르치고, 의를 고취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염치를 알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 크게는 나아가 싸우기에 충분하고, 작게는 싸워서 지키기에 충분하다. 싸워서 이기기는 쉬워도 이를 지키는 것은 어렵다(吳子曰, 凡制國治軍,必敎之以禮, 勵之以義, 使有恥也. 夫人 有恥, 在大足以戰, 在小足以守矣. 然戰勝易, 守勝難)." 이게 무슨 말일까? 부국강병을 이루고,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내부의 이데올로기, 동양적으로 말해서 대의명분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의 호치민을 마오쩌둥의 꼭두각시 정도로 여겼지만, 베트남과 중국은 미국이 오기 전부터 오랜 세월 치고박은 앙숙이었으며 호치민은 1920년 프랑스 공산당 창설자 중 한 명이자 옛 볼셰비키 당원이었다. 그는 공산세계에서는 마오쩌둥보다 더 원로 공산주의자였으며 자신의 정의를 지닌 인물이었다. 데이빗 할버스탐은 그를 일러 "한쪽은 간디의 모습을, 또 다른 한쪽은 레닌의 모습을 가진 완전한 베트남인"이라고 묘사했다.

미국인들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치르면서 자신들이 미지의 상대로 전쟁을 치르면서도 그들에 대해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 결과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의 대학들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지역학 연구 자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만약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7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 투하된 폭탄의 80배이며,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00배에 해당한다. 또 막대한 군비와 인명 손실과 국론분열을 경험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지 않은 전쟁이 어디에 있겠는가만 베트남전쟁은 그 자체가 거대한 햄버거힐이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만약 미국이 디엔비엔푸 이후 프랑스에 이어 베트남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베트남은 공산화되었을까?

아마도 베트남은 훨씬 더 일찍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는 분명 모스크바나 베이징과는 다른 독립적이고 강력한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불타는 제3의 공산주의였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 정도 공산주의였다면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처럼 미국도 수용할 만한 수준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잠시 유예하기 위해 5만 8,000명 이상의 미국인과 300만 명 이상의 베트남 사람들의 희생 그리고 1,500억 달러를 사용하고도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을 수 없었고, 내버려두었더라면 공산화되지 않았을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의 도미노를 건드려 버렸다.

보구엔지압 장군은 호치민 사후 도입된 집단지도체제 아래에서 전쟁 기간 동안의 지도적 지위를 상실하고, 오랫동안 침잠해 있어야만 했다. 지난 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부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취임하였고, 1976~1982년 베트남공산당 정치국원을 지냈으며 1981~1991년 다시 부총리를 지냈다. 그리고 2013년 10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명령으로 죽어야만 했던 수많은 동지들과 젊은이들이 지금쯤 그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과연 이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고 있을까?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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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셧다운과 오바마 케어

셧다운이 뭐여?


지난 2013년 10월1일부터 미국 연방정부의 셧다운(Shutdown)이 시행되고 있다. 이는 이른바 '오바마케어'와 관련한 예산안에 대하여, 미국의회 상/하원에서의 합의 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 역시 여야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셧다운, 셧다운하는데 도대체 셧다운이 뭐지? 하는 의문도 가질 수 있겠다. 우리 식으로 말해서 어감상 가장 근접한 것은 '조업중지, 직장 폐쇄' 같다.

미국 연방정부의 셧다운 제도란 다음(2014년도) 회계년도(fiscal year)가 시작되는 2013년 10월1일까지 예산안이 처리되지 못하였으므로 그날부터 연방정부의 공무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할 수 없게 되므로, 공무원들 중 반드시 필요한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에 대해 일시해고 조치, 다시 말해 무급휴가(실직) 상황이 된다는 말이다.

셧다운의 원인은 이른바 '오바마케어'라고 불리는 미국의 건강보험 개혁안의 존폐여부를 둘러싸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케어는 의료보험의 범위를 더욱 넓혀서 더 많은 사람들이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제도를 의미하는데, 미국 인구 3억명 가운데 의료보험을 받지 못하는 인구가 4천 7백만 정도이며,  건강보험 비수급자의 경우 의료비가 너무 비싸다는 문제가 있다.

셧다운의 원인: 오바마케어

만약 오마바케어가 적용될 수 있다면 3천만명 이상이 추가로 신규 보험 혜택을 받게 되며 이가운데 상당수는 흑인과 히스패닉, 아시안 등 소수민족이며 1천만명에 달하는 비시민권자, 영주권자들도 역시 혜택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적인 공화당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당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때 간과해선 안될 부분 중 하나가 일종의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흑인과 히스패닉계가 빈곤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할 것이란 선입견이다. 게르트 기거렌처의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숫자놀음이 주는 착각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데, 인종별 빈곤율을 내면 흑인과 히스패닉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실제 수치로 보았을 때 미국 내 빈곤인구의 절대다수는 이른바 '백인 쓰레기'란 속어로 불리는 백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중산층의 지지를 받는 공화당과 흑인, 히스패닉 인종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이란 도식으로만 바라본다면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식은 아닌 셈이다.  

미국이 셧다운 사태로 치달았던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조지 부시 주니어가 집권한 동안엔 셧다운이 발생하지 않았었다. 이번 사태 이전의 마지막 셧다운은 17년 전인 1995년 민주당 빌 클린턴 집권시절의 일이었다. 어쨌든 연방정부가 셧다운에 들어가면 정부는 정치권이 잠정 예산안에 합의할 때까지 200만명의 연방 공무원 가운데 필수 인력을 제외한 80만~120만명의 직원을 당장 일시해고 해야 한다고 하니 미 연방정부의 노동유연성도 참 대단하다. 셧다운 기간동안엔 긴급한 핵심 서비스를 제외한 모든 공공 프로그램도 따라서 함께 중단된다.

그런데 미국 공화당은 어째서 의보개혁안에 반대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야당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을 포기하지 못하고 강력하게 밀어부치려고 하는걸까? 국민건강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보수적인 시민들조차 국민건강의료보험의 근간을 흔드는 정책에 대해선 극력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면(특히나 미국의 악명높은 의료체계에 대해서는 이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더라) 공화당이 예산안 통과까지 멈출 만큼이런 이런 제도에 감히 반대하는 걸 이해하기 힘들다.

공화당이 배짱 튕길 수 있는 이유가 뭘까?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를 비롯해 우리는 여러 경로로 미국의 의료보험 체계가 심각할 정도로 문제란 사실은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36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면서도 전체 인구의 17%인 5000만명 정도가 무보험 상태에 노출돼 있다. 미국 중산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실직 자체라기보다 실직에 따른 건강보험 상실이라고 한다. 민간 건강보험은 비싸고 건강보험 없이 질병에 걸릴 경우 파산하거나 노숙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을 사귈 때 건강보험이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아이의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부부가 메디케이드 혜택을 받기 위해 이혼하는 일도 흔하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은 맹장염 수술 약 2000만원, 자연분만 400만원, 감기 진찰 한 번에 10만원이 든다. 만약 당신에게 보험이 없다면 말이다. 미국에서 한 해 파산을 신청하는 가계의 절반은 파산 원인이 의료비 부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민간의료보험료는 너무 고가이기 때문에 인구의 17%에 해당하는 5400만명(대한민국 인구수 만큼)이 의료보험 조차 없이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경기 악화와 보험료 상승으로 인해 직장에서 보조하는 의료보험의 비중 또한 줄어드는 추세여서 의료보험 문제는 악화일로에 있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폴 크루그먼 같은 미국의 진보세력들은 미국 사회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최우선 정책으로 '의료개혁'을 꼽았다. 일단 현재에 처한 가장 큰 불안 요소 하나를 제거하고, 여기에서 성공을 거둬야만 미국의 불평등을 고치는 더 광범위하고, 어려운 임무로 눈을 돌릴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오래된 통계이긴 하지만 실제 미국 국민들은 오바마 케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당연히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 같지만 실제 현실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지난 2010년 <NBC>와 <월스트리트 저널> 조사에 따르면 미 국민의 36%만 개혁안을 지지했고, 갤럽의 조사에선 개혁안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미국인은 단지 28%에 그쳤다. 사실, 개혁안의 내용을 보면 미국인들이 그의 개혁안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바마케어는 모든 시민들에게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한 것으로 1965년 노인 건강보험(메디케어)를 도입한 이래 가장 중요한 복지정책이다. 미국 직장인들은 직장을 통해서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65세 이상의 건강보험료를 연방정부에서 지원하는 메디케어, 생계곤란층을 위한 메디케이드도 있다. 문제는 건강보험을 지원하지 않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과 정부 지원에서 빠지는 소득이 낮은 계층(우리 식으로 말하면 차상위계층)이다.

결국, 복지는 세금이다

미국 의보개혁 수정안의 주요 내용은 앞으로 10년간 약 9400억달러를 투입해 무보험자 약 3200만명에게 보험의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정부가 무료로 제공하는 보험인 메디케이드의 대상이 되는 빈곤층의 범위를 확대하고 중산층에겐 보조금을 지급하여 의료보험 수혜 대상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또다른 중요한 조처로서 개인이 풀을 이루어 의료보험거래소에서 보험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고, 보험회사들을 규제하는 조처들도 도입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나머지 3억명의 미국인들이 조금씩 돈을 걷어 병원비를 대신 내주자는 말로도 들린다.

결국 세금을 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들 이름을 따서 재단을 만들고, 박애와 자선을 기부를 통해 실천하는 부유층들의 반대는 당연하다. 왜? 기부와 세금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기부를 많이 하면 천사가 되지만, 세금을 많이 내면 그냥 부자일 뿐이다. 그리고 기부는 부호가 대상과 목적, 방식을 선택할 수 있지만 세금은 그렇지 않다. 박애자본주의의 진면목이 그것이다. 또한 더많은 세금을 감당해야만 하는 고소득층의 반대도 당연하다. 혜택과 불안 사이에서 갈팡질팡해야만 하는 중산층들은 보험료가 더 오를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미국의 사보험체계는(물론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심각한 병력이 있는 사람들의 보험 가입이 매우 어렵다(이런 사람들에게 보험 가입을 쉽게 하도록 해주면 보험회사들은 막대한 손실을 감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건강했던 이들이라 할지라도 막상 보험을 청구하면 여러 이유를 들어 보험료 지급이 거절당하는 빈도도 매우 높다. 특히 미국의 민간보험회사들은 보험료 중 상당부분을 보험금 청구를 거절하고, 의료기록을 감시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공적 보험은 이런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심각한 병력이 있었다는 이유로 보험 혜택을 주지 않도록 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들도 같은 조건으로 보험에 가입하게 되면 기존 가입자들의 보험료는 또다시 인상되어야 한다. 또 메디케이드 가입자가 늘면 서비스 질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3500만명의 기존 메디케이드 수혜자들은 불평할 수 있다. 정부는 비용절감을 위해 메디케이드 수가를 줄이려 하고, 일부 의사들은 돈 안 되는 메디케이드 환자를 안 받으려 한다. 또 직원 50명 이상 기업체는 이제 직원들의 의료보험료를 부담해야 한다(샘 월튼은 그나마 기존의 직장보험 조차도 가입해주지 않아서 비난을 받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인건비 부담 때문에 직원 채용을 꺼리거나 감원할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높는다(이 수법은 정말 오래된 방식이다). 어차피 65세 이상 고령자들은 기존의 무상 공공의료 보장제도인 메디케어에서 의약품 구입 비용이 제외된다. 새롭게 혜택을 받게 되는 3200만 명 중 1600만 명은 절대빈곤 계층으로 기존의 메디케이드(저소득층 무상 공공의료)에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오바마 개혁안과 무관하다.

결국 오바마케어의 혜택을 받는 계층은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차상위 계층 1600만 명뿐이다. 이들이 개혁안의 최대 수혜자이고, 이들보다 사정이 조금 나은 나머지 1600만 무보험자들은 결국 개인 부담으로 보험에 가입해야만 한다. 의무보험이기 때문에 가입하지 않는다면 해마다 695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산술적으로 따져보면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전체 미국 국민들의 5%(1600만명)만으로 이들만이 개혁안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오바마 개혁안 지지율이 36%나 된다는 것이 도리어 신기한 일이다. 공화당이 배짱 튕기며 반대하는 것이 이상할 게 없는 거다. 더군다나 미국은 오랫동안 연방정부가 국민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전쟁과 외교를 제외하고)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만큼 그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오바마는 왜 이렇게 인기 없는 정책을 추진할까?





어째서 진보는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고, 보수는 선택적 복지를 주장하는가?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진보가 어찌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까닭은 세금만 더 내고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다고 느낄지도 모르는 중산층에게 눈에 띄는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이고, 보수가 선택적 복지를 주장하는 까닭은 중산층에게 복지는 피 같은 내 돈으로 세금 내서 생색도 안 나게 남 돕는 일이란 걸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다.

사실, 복지는 정치인의 무덤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복지 공약을 선점하긴 했지만, 증세 없는 복지 정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본인만 몰랐다. 세금과 죽음은 피할 수 없다고 프랭클린 아저씨가 말하기도 했다지만, 죽음은 예수님도 피하고 싶어할 만큼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란 점에서 세금은 죽음과 동격이다. 복지개혁의 성과는 당장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수가 약간씩 손실을 봄으로써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혜택 받는 사람은 적고, 당장 손실을 보는 것으로 느끼는 사람은 많은 것이다.

그런데도 오바마는 어째서 이렇게 힘든 정책을 추진하는 것일까? 얼마전 늦은밤에 모 역사학자와 맛없는 커피를 마시며 당신의 절친이자 한때 복지부 장관을 지내기도 한, 이제는 정계 은퇴를 선언한 모 정치인에 대해 이야기할 일이 있었다. 그에 대한 나의 애증을 잘 아는 터라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는데 나는 이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정치를 한다는 사람은 자신이 국민들을 위해 성취하고 싶은 비전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남의 참모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정치적 커리어를 유지해나갈 수가 있는데 그 분은 권력의지가 약했거나 처음부터 제대로 된 비전도 없이 급작스럽게 정치를 한 것 같다"고.

오바마는 시카고 빈민가에서 오랫동안 변호사로서 봉사활동을 해왔고, 의료보험이 없어 파산하고, 집을 잃고, 가정이 파괴되는 사람들을 보아왔다. 그에겐 이것이 그의 꿈이자 비전이었을 거다. 나는 정치인에겐 그런 신념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처럼 대선에 나서고 나서야 부랴부랴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며 정책을 만들고, 선거에 나설 때마다 말이 달라지고, 실현될 수도 없는 거짓 공약을 내놓고도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는 경우와는 다르다고 보았다.

미국은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현재 여러 분석들에 따르면 하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은 현재의 셧다운 여파로 인해 내년 선거에서 다수당의 자리를 내주어야만 할 것이란 추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의료보험이나 여러 가지를 놓고 지난 민주화 10년간 우리가 미국보다는 좀 낫지라고 자부심을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한국에서 5년 단임제 대통령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미국의 의료보험 개혁정책은 사실 이미 100년 전 루스벨트 대통령 때 처음 나온 것이었다. 만약 오바마 정부가 부족하고 아쉽긴 하겠지만 이 개혁 정책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오바마 정부 최대의 업적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연 대통령 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도, 크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평생 염원하고, 꿈꾸는 비전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정책과 설득력,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야 한다. 설령 패배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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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주, 캡틴큐의 골 때리는 추억

요즘 내가 맛 들인 음료 중 하나가 '모히또(Mojito)'라는 칵테일인데, 시중 카페에서 판매되는 것들 중에는 무알콜음료로 판매되기도 하지만 본래는 럼주와 민트를 넣어 만든 칵테일로 쿠바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쿠바'하면 떠올리게 되는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고 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음료(칵테일)이다. 이처럼 럼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 중에 유명한 다른 한 가지가 ‘피나콜라다’다.

느닷없이 '모히또'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사실 럼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하면 떠올리게 되는 '칼바도스(Calvados)'가 있듯(조앙 마두가 즐겨 마셨던 사과증류주) 근대 해양소설들을 읽노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술이 바로 뱃사람들의 술인 럼주이고, 럼주하면 해적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가? 국산 럼주였던 ‘캡틴큐’에는 애꾸눈 선장이 새겨져 있었다. ‘캡틴 큐’는 돈 없이 빨리 취하고 싶은 마음에 고딩 때 동네 친구들과 즐겼던 국산 양주 이름인데, 내 연령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지도록 아팠던 기억들이 있으리라.

'럼주'하면 사탕수수와 카리브 해, 그리고 쿠바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본래 인도네시아였다. 동서 해상 무역을 관장하던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인도와 중동을 거쳐 지중해 연안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이 신항로 개척 시대 스페인인들에 의해 카리브 해 서인도제도의 악명 높은 플랜테이션 농장 산업이 되었다.

어쩌면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에서 발견한 진정한 황금은 사탕수수를 원료로 만들어진 ‘백색 황금, 설탕(sugar)’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탕수수를 원료로 하는 설탕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낸 뒤 남은 부산물인 당밀(Molasses)도 늘어나게 되었다. 인천 우리 사무실 바로 뒤편으로 제일제당 인천공장이 있는데, 주차장에 밤새 차를 주차해본 사람들은 차량 위로 뭔가 얇은 막이 도포된 것처럼 끈적끈적한 입자들을 느낄 수 있다. 추측컨대 당밀 입자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당밀은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낸 뒤 남은 끈적거리는 캐러멜 빛깔의 액체다.

17세기 초(1651년)쯤 누군가는 당밀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럼주다. 폐식자재(?)를 이용한 - 당밀 자체는 설탕 성분만 빼낸 것이고 사탕수수에 담겨있는 본래 영양분은 고농축된 재료 - 술이기 때문에 럼주는 매우 값싼 술이 될 수 있었고,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물론 부두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부두노동자들에게도 인기 있는 술이 될 수 있었다.

럼주를 구분하는 법은 일단 색깔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진한 것을 다크럼(다크 럼은 당밀을 천천히 자연 발효시켜서 단식 증류), 갈색 빛의 럼을 골드럼, 그리고 무색의 투명한 럼을 화이트럼(발효를 빨리 시키고, 연식 증류기를 사용해서 증류)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색깔의 차이가 나는 것은 증류 과정에서 당밀의 잔류 유무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인데 이중에서 다크럼이 우리가 영화나 모험소설 등을 통해 접했던 것처럼 해적들과 뱃사람들이 즐겨 먹던 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외에도 생산지나 제조법에 따라 구분하는 법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①헤비 럼:자메이카산이 유명하다. 자연발효로 만들어지며, 다량의 에스테르를 함유하고 있어 강한 향기가 있다. 발효에는 효모 외에 부티르산균 (낙산균) 등이 간여하고, 증류는 포트스틸로 하며, 증류액은 통에 저장한다. 숙성기간은 최저 3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②미디엄 럼:가이아나에서 생산되는 데 메라라 럼이 유명하고, 향미는 헤비 럼과 라이트 럼의 중간이다.
③라이트 럼:순수하게 배양한 효모로 발효시키고 연속식 증류기를 사용한다. 바베이도스 · 쿠바 · 푸에르토리코 · 트리니다드토 바고산이 유명하며, 향미는 부드럽다. 한국에서도 럼이 생산되고 있는데, 라이트 럼에 속한다. 럼은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 있는 외에 다이키리 등 칵테일의 바탕이 되는 술로서 널리 이용되며, 최근에는 라이트 럼이 많이 애용되고 있다. 또, 럼의 감미로운 향기는 양과자에 아주 적합하여 설탕의 감미와 달걀의 비린내를 완화시켜 준다고 해서 다량의 럼이 제과용으로 쓰인다. 또 크림이나 젤라틴에 섞거나 과실을 럼에 담그기도 하며, 아이스크림에 가미하여 맛을 더하는 데도 쓰인다. <출처: 네이버 백과 사전>

럼은 어떻게 해적의 술이 되었을까?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집안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끄집어내어 정리하는데 우리 집에서 적지 않은 술이 나와서 놀랐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기 때문(진짜 1년에 서너 차례 정도)에 이렇게 많은 술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생각보다 많은 술이 나와서 놀랐고, 이 술들의 생산 연도가 너무 오래되어서 놀랐다. 대부분 2000년대 초반 것들이라 과연 이 술들을 버려야 하는지, 마셔도 되는 건지 궁금해서 네이버 지식in 검색을 해보니 술(알콜)은 과실주 같은 술들이 아니라면 모두 음용 가능한 것들이란다. 그래서 실제로 술병의 라벨들을 찾아보니 유통기한 표시 자체가 없었다.

가끔 회사 직원들이나 주변의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냉장고나 컬러 TV가 집에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연령대가 높은 이들은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백색가전의 3종 신기(神器)’ - TV, 냉장고, 세탁기 -를 누리며 살았던 세대들은 마치 자연의 일부인 양 이들 제품이 주는 혜택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도리어 신기해졌다. 이중에서 냉장고는 오늘날 우리 가정의 식품저장창고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없을 때 우리는 식품들을 어떻게 저장해놓고 먹었을까? 음식의 부패를 어떻게 막았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3세기부터 인류의 항해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연안을 벗어나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가 완료되면서 드디어 ‘대항해시대’가 시작된다. 항해가 길어지면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음식, 그 중에서도 식수였다. 원양에서 신선한 식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다에서 비를 만났을 때 이것을 잘 거두어 통에 보관해 마시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른 식재료들은 말린다던지, 소금에 절이는 방법으로 일정 기간 동안 보관할 수 있었지만 식수는 오크통 같은 보관용기에 보관하다보면 금세 상해서 마실 수 없게 되거나 그 물을 마시더라도 세균이 번식하기 때문에 복통과 설사, 식중독 등을 유발하여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술이었다. 어쨌든 술도 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음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성경 등 사막 기후의 식생활 풍경을 보면 종종 포도주와 물을 섞어 마시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랬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한자동맹 등에서는 물과 함께 맥주와 와인을 식수로 제공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술들은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물보다 오래 보관할 수는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좀더 먼 바다로 항해를 하는 과정에서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유럽보다 온도와 습도가 높은 대서양과 카리브 해를 지나면서 금방 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위스키 같은 술은 알코올 농도가 높기 때문에 좀더 오래 보관할 수 있었지만 선원들에게 일상적으로 제공하기엔 가격대가 너무 높았다. 위스키는 귀족들이나 선장들의 술을 될 수 있어도 일반 선원들의 술이 될 수는 없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럼’이었다. 럼은 위스키처럼 도수가 높아서 쉽게 상하지도 않았고,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뽑아내고 남은 재료로 주정을 만들었기 때문에 위스키처럼 비쌀 이유도 없었다. 그 결과 럼주는 해적은 물론 일반 상선의 선원들과 해군들까지 즐겨 마시는 뱃사람들의 술이 되었다.

‘캐리비언의 해적’ 처럼 해적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해적들은 언제나 럼주에 취해있는데 이것은 단지 해적들이 거친 사람들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사실은 해적들뿐만 아니라 이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당시 해군들도 모두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 뱃사람들은 해적이든, 해군이든 누구나 항상 취해 있었다는 거다. 그런 까닭에 당시 배에서 선장이 선원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 중 하나가 금주였다는 사실은 단순히 술을 주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식수를 공급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넬슨의 피(Nelson's Blood), 럼주

마커스 레디커의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에 보면 "술은 뱃사람의 육체와 정신이 함께 붙어있게 해주는 접착제"라는 구절이 있는데, 캐리비언의 해적들과 가장 치열하게 맞선 세력은 당연히 영국 해군이었지만 이들에게도 ‘럼주’는 필수였다. 영국 해군은 오랫동안 럼주를 병사들에게 럼주를 제공하는 전통을 유지해왔다. 그래도 명색이 군대인데 해적처럼 하루종일 진창 퍼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럼주 배급에 대한 규칙을 정해놓고 있었다. 럼은 장교를 제외한 준사관 이하 승조원들에게만 지급되었는데(단 20세 이상인 자에 한해서), 하루에 약 0.5파인트(대략 260~280cc)씩 점심과 저녁으로 2번에 걸쳐 배급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오늘날의 양주잔(35cc)으로 환산하면 무려 55도에 달하는 술을 하루에 8잔씩 준 셈이다.

병사들이 늘 술에 취해있으니 규율과 기강이 생명인 해군 고위층의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게다가 군대 물품을 임자 없는 물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국에도 있었기 때문에 선장이나 당직 사관이 럼주를 빼돌려 팔아먹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선원들은 늘 더 많은 럼주를 원했고, 선장이나 항해사 같은 장교들은 병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술 배급을 놓고 자주 갈등해야만 했다. 꼭 럼주 배급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갈등은 종종 술로 인해 증폭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선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선원들에 의한 선상 반란이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고, 선원들이 럼주에 덜 취하도록 하기 위해 에드워드 버논(Admiral Edward Vernon)이란 해군 제독이 머리를 썼다. 그는 럼주에 물을 타서 배급하도록 했는데, 술에 물을 타니 맛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줄어든 향미를 보충하기 위해 레몬이나 라임 쥬스, 설탕 등을 럼주에 섞어 배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칵테일 ‘핫 그로그(Hot Grog)’의 시작이었다. 이 말의 유래는 버논 제독이 항상 착용하던 방수망토(grogram)에서 따온 것인데, 이 칵테일에서 나온 말이 바로 권투에서 심한 타격을 받아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영어 단어 ‘그로기(groggy)’란 말이다.





럼주의 별명 중에 '넬슨의 피(Nelson's Bllod)'란 말이 있는데,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한 넬슨 제독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럼주 통에 담아 영국까지 돌아왔는데 럼주 통을 열어보니 럼주가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넬슨 제독의 기함이었던 빅토리아호의 수병들이 럼주를 마시고 싶어서 넬슨 제독의 유해가 담겨있는 럼주 통에 작은 구멍을 내서 빨아먹다보니 술이 동이 나버리고 말았다는(다시 생각해보면 넬슨 제독을 과실주처럼 술 담궈 먹었다는 섬칫한 이야기) 이야기인데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만큼 럼주에 대한 영국 해군들의 애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말해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이후 점차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원양 항해를 견딜 수 있는 식품용기와 냉장기술이 발달하면서 럼주의 효용이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유독 영국 해군만큼은 럼주 배급의 전통을 꾸준히 유지해왔는데, 지난 1970년 7월 31일, 최후의 럼주 배급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선상에서 럼을 식수로 사용하는 일은 사라졌다. 참고로 미국 해군은 1862년 9월부터 폐지되었다. 현대 해군은 술과 같은 알코올성 음료를 선상에서 제공하거나 마시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 과거에 비해 해군이 운용하는 장비의 가격대도 엄청나졌지만, 해군이 가진 파괴력 또한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선원 한 명이 술에 취해 실수로 누른 버튼 하나 때문에 세계가 멸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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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힘들어!
많이 힘들어?
우울해!
우울해?
고민있어요!
고민있어요?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말을 걸어주세요.
당신의 물음표 하나가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이 광고를 들어본 사람들도 제법 있으리라.

이 광고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공익광고로 제작한 것인데, 이 라디오 CM을 들을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가 있어서 올려본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과거 내가 베트남전에 대해 공부할 때 처음 만났을 - 아마도 베트남전의 부도덕성에 대해 깨우치게 만드는 여러 사건 중 -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이 미라이 학살 사건이었으리라.




Q. And babies?(아기들은?)
A. And babies. (아기들도.)

이 포스터는 예술 노동자 연합(Art Workers Coalition)의 예술가 포스터 분과[Artists' Poster Committee (Frazier Dougherty, Jon Hendricks, Irving Petlin)]가 만든 포스터로, 베트남전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본래는 R.L. Haeberle가 찍은 미라이 학살 사진(1969)을 피처링한 것이다.

AWC의 한 분과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원래 이 포스터는 AWC와 MoMA의 공동작업으로 기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MoMA가 이 작품의 발표를 거부한 뒤로도 Artists Poster Committee가 계속 진행해 결국 MoMA의 참여 없이 출판했다. 이 작업에 필요한 종이는 피터 브랜트가 기부하였다(그의 이름은 Artists Poster Committee의 멤버들과 나란히 포스터에 인쇄되었는데 그런 탓에 가끔씩 브랜트가 이 포스터를 디자인한 것으로 잘못 아는 이들도 꽤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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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비를 몰고 온 손님, 박근혜 대통령


내정 때문에 위기를 맞은 정권은 외교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다. 경제문제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 남북관계 파탄, 국정원 정치개입, 정상회담 기록 공개 등 최악의 상황에 부닥친 박근혜 정부가 방중 외교에서 성과를 내고 싶은 조급증에 시달리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방중 이전부터 정권 출범 갓 100일을 넘긴 박근혜 정부에 대한 용비어천가는 중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다는 식의 언론보도는 이번 방중 외교에 대해 청와대가 걸고 있는 기대를 반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중 외교의 성과와 질이 예상처럼 대단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우리 언론이 과소평가 또는 푸대접을 받고 돌아갔다고 단언하였던 김정은의 중국 특사가 예상과 달리 미·중정상회담을 앞둔 시진핑 주석에게 북한 측 입장을 전달한 것은 물론 중국으로 하여금 미국에 가서 이야기할 거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한·중회담은 시작부터 김이 빠졌기 때문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역사적으로 중국이 분열되어 있을 때, 우리 역사가 비교적 평온했던 것처럼 외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반도의 분열 상황은 그만큼 강대국들이 외교 하기 편해진다. 최근 중국의 기류에 일부 변화의 기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과 미국의 관계 역시 항상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란 점을 고려해보면 지금의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을 이용해 중국이 북한을 길들이려는 시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방증하듯 방중 외교 직후 발표된 합의문부터 서로 엇박자를 내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북핵 문제에 대한 한국의 의견을 지지했다고 발표했지만, 중국에 의해 곧바로 부인 당하는 아픔(?)도 맛보았다. 지금 우리는 과거 이명박 정권 당시 지나친 미국 중심 외교 탓에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절실한 상황이고,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에 대해 중국 측의 기대가 큰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한두 차례의 방중 외교로 이런 상황들이 극적으로 개선되고, 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박 정권은 출범 초부터 남북 정상회담 기록을 공개해버린 상황이지 않은가.


방중 외교의 성과로 내세울 것이 많지 않은 상황임에도, 우리 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기간 동안 가물었던 중국에 비가 내리자 중국 현지인들이 반가운 손님이 와서 비가 내렸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전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의 서두와 말미에 중국어로 연설하여 중국인들의 호응이 대단했다고 전하는 등 한국 언론 특유의 호들갑을 보여주었다. 그 와중에 작게나마 이슈가 되었던 것은 박 대통령이 국내에 묻혀있는 중국군 병사들의 유해를 판문점을 통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만 보아도 박근혜 대통령은 물론 정부 인사들이 오늘의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해 수준이 얼마나 박약한지 알 수 있다.





전쟁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인식 차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규모나 사상자 수치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있을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는)은 사상자의 수치로 전쟁의 승패를 평가하는 전통이 있다. - 이와 같은 전통은 과거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당시에는 주로 개활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사상자의 숫자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다. 이런 전통이 있기 때문에 미국은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에서도 승리했다고 주장(사상자 비율로 보면 중공군 측 사상자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한다. 전쟁을 이처럼 산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베트남전에서 단 한 차례의 패전도 없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것일지 모른다. - 우리나라 역시 정치·경제·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미국식으로 사고하는데 익숙해져서 한국 땅에 묻혀있는 중국군 유해를 송환하겠다고 하면 중국 측이 매우 감사하게 여기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북한 땅에 묻혀있는 미군 유해를 통해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우리 나름대로 응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앞서 전쟁의 승패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개념 차이처럼 전사자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미국과 중국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자를 추모하는 열기는 뜨겁지만, 추모의 방식까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육군 국가인 스파르타는 전사자의 유해가 그가 사용하던 방패에 올려져 고향으로 돌아와 매장되어야 했고, 전통적인 해군 국가였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조차 전사자의 시신이 자국 영토(고향)에 매장되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겼다. 전사자의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영혼이 구천을 헤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전투에서 승리했더라도 전사자의 유해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장수는 개선할 수 없었으며(심지어 해상전투에서도)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하는 형벌을 받기도 했다. 그에 비해 같은 해군 국가였던 영국은 굳이 전사자의 유해를 자국으로 이송하여 매장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은 영국과는 상황이 좀 달랐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단 한 구의 시신도, 단 한 명의 포로도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부는 전사자 유해 발굴 체계를 정립해 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시기까지는 전사자 유해 발굴 신원확인부대를 잠정 운용했으나 이후 1976년부터는 전담부대를 창설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몰자 추모식에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전사자를 찾을 때까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보면 미국이 해군 국가로 출발했던 것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로서 ‘국가 만들기’ 과정에서 국민의 충성심을 북돋는 차원에서 생긴 전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파병된 중국군의 수치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이유는 우선 당시 중국이 그럴 만한 여력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왕수쩡의 『한국전쟁 -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글항아리, 2013)을 보면 당시 중국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상대는 중국이었다. 전쟁의 폐허에서 막 일어난 중국은 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당일에도 중국 전역을 해방시키지 못해 인민해방군은 그때까지도 서남과 서북 지역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해방된 광활한 지역에서 신생 인민정권에 맞서는 국민당 군대의 잔존 세력은 여전히 군사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였다. 해를 거듭하며 지속된 전쟁은 취약한 공업을 철저히 파괴했고, 애초 원시경작 상태에 있던 농업은 더욱 쇠락했다. 1950년 신중국의 농공업 총생산 가치는 불과 574억 위안으로, 달러로 환산하면 미국 농공업 총생산 가치의 끝자리 수에 지나지 않았다.(본문 13쪽)

이처럼 당시 중국의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추정치만 존재할 뿐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만, 미국 측 통계로는 당시 중공군 전체 사상자는 92만 명(북한군 포함 142~150만 명), 중국 측 통계에 의하면 전투 및 사고사망 11만 4천 명, 부상 38만 3천 명, 질병 치료 45만 명(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사망자 13만 3천~15만 2천 명 발표)으로 추정될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병력보다 화력에 우선했던 미국과 부족한 화력을 병력으로 보충했던 중국의 전략 개념이 달랐던 것처럼 이후 전사자에 대한 양국의 차이도 뚜렷했다.





중공군 유해 송환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까?

이제 중국이 지척이라 서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혹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신중국 건국의 주역들인 저우언라이(周恩來), 후야오방(胡耀邦), 덩샤오핑(鄧小平) 등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돌아온 사람이 있는가? 기념관이 아니라 그들의 무덤에 갔었다고 한다면 틀림없는 거짓말이다. 진시황의 병마용이 잘 보여주듯 중국은 한때 무덤의 나라였다. 그러나 현대의 중국은 더는 무덤을 만들지 않는다. 중국은 법으로 화장을 강제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에서 한 해 사망하는 인구가 600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들이 전부 무덤을 만든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땅이 필요하겠는가?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그들이 세운 업적이나 권력만으로도 충분히 기념될만한 무덤을 만들 수 있었지만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화장을 선택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마오쩌둥은 수십만에 이르는 중국 병사들을 한국에 파병시켰다. 그는 수십만에 이르는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내 자식만 안전한 중국 땅에 둘 수 없다 하여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양계혜와의 사이에서 나은 장남)을 한국전에 내보냈다. 그는 참전을 위해 압록강을 건넌지 한 달 만에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자세한 내용은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2』권을 참조). 과연 그의 시신은 어디에 있을까? 중국에 있을까? 아니다. 여전히 북한 땅에 있다(1949년 중국 건국 이후 해외 참전 중 전사해 현지에 묻힌 중공군 유해는 대략 11만 5217구 중 99% 이상인 11만 4000구(추정)가 한반도에 묻혀 있다. 북한은 200여 곳에 중국군 기념지와 묘지를 조성했다고 한다. 1973년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평안남도 회창군 등 8곳에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를 조성 관리하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도 회창군 열사묘에 묻혀 있다. 이 묘역엔 2009년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201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인 3남 정은을 데리고 참배했다).

장남의 시신 송환문제가 논의되자 마오 주석은 딱 잘라 말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입니다. 그냥 조선반도(한반도)에 두십시오.”

그리고는 이렇게 공식발표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희생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세상에 자기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보통사람들 중에도 자기 자식이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 중국에게 남한 땅에 묻혀있는 너희 병사 시신을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하는 한국 대통령과 그걸 무슨 대단한 성과인양 대서특필하는 언론을 보면서 과연 중국, 중국인들은 대한민국이 중국에 대해 아니,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할까? 평소 중국 고전을 많이 읽고, 중국 노래를 즐겨 중국을 문화로부터 접근한다는 우리 대통령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이명박 전임 대통령보다는 조금 낫게 평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이 떠드는 것만큼 유해 송환을 통해 거둘 성과는 크지 않을지 모른다. 신뢰를 쌓는다는 것은 이처럼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정상 간에 나눈 회담 내용조차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공개해버리는 정부라면 더욱더 그렇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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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은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치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운했다. 그의 나이 9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16세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고아가 된 신세였지만 이항복의 나이 19세 때에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당대의 권신 권철은 아들(권율)에게 시켜 손녀사위로 삼도록 했다. 아마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일화 - 실화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 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그의 옆집에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의정 권철이 살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의 지위가 높다보니 그의 집 하인들도 기세가 등등하여 함부로 굴었다.

이항복의 집에는 해마다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나뭇가지가 이웃한 권철의 집으로 넘어가자 그 집 하인들이 감을 함부로 따가는 통에 나무가 상할 지경이었다. 이항복 집 하인들이 나무라자 "우리 집 담으로 넘어왔으니 우리 것"이라며 몇 차례 대거리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의 행실이 고쳐지지 않자 이항복에게 그런 사실을 고해바쳤다.

이항복은 권철이 집에 있는 날을 골라 그를 찾아갔다. 이항복은 권철이 머무는 방문을 뚫고 다짜고짜 자기 팔뚝을 밀어 넣었다. 권철이 "어허,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묻자 이항복은 "대감마님! 이 팔뚝은 누구의 팔뚝입니까?"라고 되물었다. 권철이 "자네 몸에 붙어 있으니 자네 팔이 아닌가."라고 했다. 그러자 이항복은 "그런데 어찌하여 대감 집 하인들은 저희 집 감나무가 담장을 넘었다고 제 집 감이라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따졌다. 그제야 전말을 깨달은 권철이 하인들을 불러 크게 야단을 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항복의 기개와 기지를 높이 평가해 그를 손녀사위로 삼았다. 

이런 고사를 들먹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나눈 정상회담 문건은 국가기록원에 '대통령 지정 기록물'*로 지정되어 있어 아무나 함부로 볼 수 없도록 법으로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처음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청와대 비서실에서는 녹음원본을 국정원에 보내 새로 녹취하도록 시켰다. 원본은 국가기록원에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국정원에 보관된 기록물은 국정원이 임의로 보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일설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한 부는 국가기록원에서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보관하게 했으나 다른 한 부는 국정원에 맡겨 공공기록물로 관리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보관되면 후임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기 때문에 후임 대통령이 앞으로 있을 정상회담에 나서게 될 때, 참고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국정원에 공공기록물로 남기는 선의를 베풀었다고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나의 마음은 복잡다단하다. 그에게 표를 준 적이 없고, 그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 개인의 선의에 대해선 일정한 믿음이 있다. 그는 거칠었지만, 한 편으로 매우 섬세한 대통령이었고, 무엇보다 사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임 대통령들은 그가 살았을 때나 죽은 뒤에도 이처럼 욕을 보인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장을 지냈던 김만복은 퇴임한 뒤 공저로 펴낸 책에 당시 정상회담 내용 일부를 소개했다. 국정원은 그를 '기밀누설' 혐의로 고발했고, 검찰은 고의성은 없었다며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다. 당시 보수언론들은 이 사건을 과연 무어라 했을까? 남재준 현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번 문건을 공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애초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까닭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본다면 국정원이 지켜야 할 명예 같은 건 존재한 적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국가의 이익과 명예 보다 조직 논리와 이익이 앞서는 자질 없는 사람이 국가정보원 원장에 취임했다.

이것이 누구의 책임일까?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한민국만큼 재미있는 나라도 참 드물다. 용산참사 재판 당시 검찰은 법원의 공개 명령에도 불구하고 수사기록 3천 쪽을 끝끝내 공개하지 않았고, 과잉진압의 희생자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또 노회찬 의원은 검찰을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에게 떡값 명목의 뇌물을 제공한 기업을 폭로하고, 그 명단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나라는 누구의 책임인지 또한 묻지 않을 수 없다.

* 대통령 지정 기록물

대통령 기록물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중앙 기록물 관리 기관으로 이관 시 대통령이 지정한 기록물은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의결이 이루어지거나, 관할 고등 법원장이 중요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영장을 발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 지정 기록물은 15년, 개인의 사생활 관련 기록물은 30년의 범위 내에서 열람 · 사본 제작을 허용하지 않거나, 자료 제출에 응하지 않고 보호할 수 있는 제도

** 공공기록물관리법(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정부 내 모든 기관의 문서 보관을 의무화하는 법으로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정부투자기관 등 공공기관에 모두 적용되며, 국가 전반의 기록물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체계적ㆍ통일적으로 관리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1998년 말에 제정되어 2000년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갔으며, 2012년 3월 21일 일부 개정되어 같은 해 7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법률에 따르면 공문서뿐만 아니라 회의록, 비공식보고서, 비밀기록, 메모노트까지도 보존대상에 포함시켜 국정의 입안단계부터 최종종결까지 전 과정을 사후에 규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후대의 역사적 심판을 거쳐야 할 핵심기록을 철저히 보존하고 공개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대통령 통치문서는 대통령 임기종료 6개월 전부터 '국가기록원(옛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정부 기록물을 무단으로 은닉하거나 국외로 유출했을 경우, 기록물을 중과실로 멸실했을 경우, 기록물을 고의 또는 중과실로 그 일부 내용이 파악되지 못하도록 손상시킨 경우 등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국가기록원장은 국장급이므로 장관의 지휘를 받는 다른 부처의 기록관리 실태를 지도ㆍ감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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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도루(橋下徹.44) 오사카 시장이자 일본유신회 공동대표(일본내 극우정당)는 이른바 '일본 정치의 젊은 피'로 얼마전까지도 유력한 차기 총리감으로 물망에 오르던 사람이다. 그가 얼마전  "(군)위안부는 군의 복지를 위해 필요했다"는 망언을 해서 새삼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 매체들에 따르면 하시모토 시장은 13일 오사카(大阪) 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해 "그 정도로 총탄이 오가는 상황에서 정신적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강자 집단에 위안부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수 있는 일"이라고 말해서 또다시 지탄을 받고 있다.

그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일본의 종군 위안부 제도만 문제가 되느냐"며 "다른 나라도 전시에 위안부와 비슷한 체계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일본은 국가적으로 위안부를 강제로 납치해 일하게 했다고 세계는 비난하고 있지만 2007년 각의 결정에서는 그런 증거가 없는 것으로 돼 있다"며 "사실과 다른 것으로 일본이 부당하게 모욕받고 있는데 대해서는 확실히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하시모토 시장은 "의사에 반해서 위안부가 된 것은 전쟁의 비극의 결과"라고 밝히고, "전쟁의 책임은 일본에도 있다. 위안부에게는 상냥한 말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부연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성을 사고 파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하시모토 도루의 발언을 쉽게 단죄할 수만은 없다. 그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면 하나는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국가가 주도하지는 않더라도 암암리에 용인하는 성매매 제도가 여러 경로로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시모토 도루의 발언에서 '민족' 감정을 조금 제거하고 바라본다면 그의 발언이 최소한 역사적 팩트, 현실적 팩트에는 일부 부합하기 때문이다. 괴벨스가 말했던가? “99%의 진실에 1%의 거짓을 섞으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고 했는데, 하시모토의 주장은 원천 무시해야 할 만한 거짓이 아니라 일면의 진실을 가지고 다른 부분까지 왜곡하고 있다는 데 가장 큰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단순하게 민족 감정으로 접근하거나 소박한 윤리의 차원으로만 접근하기에 어려운 몇몇 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0여년 이상 분쟁전문기자로 활동해온 크리스 헤지스는 미국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연설을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뉴욕 타임스>를 떠나야 했는데, 그는 "당신도 전쟁을 알아야 한다(수린재, 2013)"을 통해 그가 알고 있는 전쟁의 악마적 속성에 더해 퇴역군인들을 취재하고, 그들의 경험을 조사해 전쟁에 대한 FAQ를 만들었다. 다음은 그 책의 내용 중 일부로서 전시(군대) 매매춘 문제와 강간 문제에 대한 질문과 답을 재구성한 것이다.

Q.성관계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는가?
A. 항상 생각할 것이고, 특히 작전이 없을 때는 더욱 생각날 것이다. 전투 중이거나, 직접적이고 극적인 스트레스 상태에 있다면 덜 생각날 수도 있다. 집을 떠나온지 오래되면 될수록 성관계에 대해 더욱 문란해질 수 있다. 2차 대전 중 유럽에 참전한 미군 병사 한 사람은 이 전쟁 마지막 해에 평균 25명의 여자와 성관계를 가졌다.

Q.매춘도 하게 되는가?
A. 미군에 의한 매춘은 많은 나라의 현실이다. 매춘은 미군 부대 주둔지역의 주요 수입원이다. 미군이 주둔해 있는 일본, 한국, 베트남, 그 외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대규모의 매춘산업이 형성되어 있다. 한국에만 현제 2만 7천여 명의 매춘부들이 미군 부대 주변에 있다. 베트남전 중에는 30만 명에서 50만 명의 매춘부들이 있었다. 그린베레 병사 한 사람이 평균 25명의 베트남 매춘부와 성관계를 가졌다. 걸프전 때에는 전쟁 기간도 짧았고 그 지역에 매춘 시스템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극소수의 미군만이 매춘을 했다. 그러나, 걸프전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귀국선은 병사들을 위해 '일부러' 태국에 들러 잠시 정박했다.

Q. 성관계에 대해 흥미를 잃게도 되는가?
A. 전투를 앞두고 공포를 느낀다면 그럴 수도 있다. 걸프전에서 전투 전의 설문조사에서 22%의 병사들이 보통 정도나 극도의 불안감으로 성관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고 답했다. 70%의 병사는 성관계에 전과 다름없이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전투 후에는 7%의 병사만이 보통 정도나 극도의 불안감으로 성관계에 흥미를 잃었고, 86%의 병사는 전과 다름 없는 흥미를 보였다고 보고되었다.

Q. 전쟁에서 강간은 흔한가?
A. 그렇다. 코소보에서 1992년과 1994년 사이에 2만 명의 여자가 강간을 당했다. 르완다에서는 1994년의 대학살 기간 동안 25만 명에서 50만 명의 여자가 강간당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1971년 시작된 분쟁에서 서파키스탄 군에 의해서 적어도 20만 명의 여자가 강간당했다. 쿠웨이트에서는 1990년 이라크의 점령 기간 동안 5천 명의 여자가 강간당했다.

Q. 강간은 전쟁범죄로 간주되는가?
A. 다른 전쟁범죄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범죄로 간주된다. UN에 의하면 "강간은 가장 적게 비난 받는 전쟁범죄"다.

Q. 전쟁에서 왜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강간을 당하는가?
A. 강간은 무기로 이용된다. 적국 여자들에게 때로 고의로 임신을 시키거나 질병에 걸리게 하기 위해 강간을 한다. 여자들은 납치되어 짐꾼으로 부려지거나 식사 준비를 하게 되거나, 군인들의 욕구를 풀어주기 위한 성노예로 이용된다. 여자는 때로 심문의 한 형태로 강간을 당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전쟁범죄다.

Q. 왜 강간은 효과적인 무기가 되는가?
A. 강간은 민간인에게 공포심을 준다. 민간인들이 공포심으로 미리 피난을 가버리면 군대가 그 지역을 쉽게 진주하게 된다. 강간범들이 활개를 치게 하고, 희생자들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적국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한다.

Q. 강간은 희생자들에게 어떤 후유증을 남기는가?
A. 성폭력의 신체적 후유증은 상처, 원하지 않는 임신, 성적 기능 장애, 에이즈 감염 등이 있다. 성폭력의 많은 희생자는 심리적으로 다시는 회복되지 못한다. 성폭력의 잔존효과는 불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 자산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여성들이 강간으로 임신이 되면 정신적 외상은 급격하게 악화된다. 낙태를 선택한 여성들도 정신적 외상과 건강상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Q. 미군에게 강간은 어떤 일인가?
A. 평시에는 미군의 강간 범죄가 그 연령대의 민간인 강간 범죄보다 적다. 공격적인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에는 강간을 포함해서 불법적인 행위들이 증가한다. 2차 대전의 막바지였던 1945년 3월과 4월에 유럽의 작전 지역에서의 미군에 의한 강간 비율은 미국 본토의 민간인에 의한 강간 비율의 3.66배였다.

이것을 남성의 본성(혹은 본능)에 기인하는 문제로 보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던 하는 것은 이 글의 본래 목적은 아니다. 다만 이것이 전시라는 특수상황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폭력수단(군대)이 존재하는 한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사실이다. 다음은 캐서린H.S.문의 "동맹 속의 섹스"에 드러난 사례(1965년)를 요약해본 것이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8군 병사들의 약 84%는 성매매를 경험했으며, 성매매의 주요원인은 동료의 압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은 성매매와 성병을 관리하는 것은 전쟁과 전쟁 준비에 저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관리할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들의 입장에서 살폈을 때 이런 제도는 거리의 여성들에 대한 시민권의 전적인 폐지를 국가가 공인하는 최초의 정책을 의미했다. 전쟁 기간 동안 병사들이 걸리는 가장 많은 질병 1위는 성병이고, 2위가 감기였다고 한다."

근대국민국가의 거의 모든 성매매 관련 법안은 남성고객과 성매매 여성의 처벌에 차등을 두었고, 알선업자와 포주는 체포되지도 않는 법률이었다. 대한민국은 기지촌 여성들을 필요악으로 대할 때도 있지만, 이들을 "국가방어와 GNP성장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는데, 1973년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은 도쿄를 방문했을 때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 만하다"고 하여 한일 양국의 여성 단체들과 언론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베트남전에서 목숨을 잃은 파월 한국군 장병들이 벌어들인 달러만 경제개발계획의 밑천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한국인의 눈에, 매춘 여성은 두 가지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 기능이란 한국사회에 끼칠 외국의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들을 견제하고, '존중받을 만한' 소녀와 여성들이 미군에 의해 매춘과 강간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본문 69쪽 - 70쪽>"

"미8군의 한 정보장교는 군대가 1960년대 남한 GNP의 25%를 차지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1987년 미군은 남한 경제에 10억 달러를 기여했으며, 이것은 전체 GNP의 약 1%에 해당한다. …<중략>… 1978년 한국 경제는 매매춘을 통해 일본인으로부터 700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본문 76쪽 - 77쪽>"

성과 매매춘 문제에 대한 시각의 상당 부분은(때로 같은 여성의 경우에도) 이것을 '필요악'으로 간주하는 태도이다. 즉, 이런 굴욕은 형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아우로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몫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 여성들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냔 의식이다. 비단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군 기지가 들어가 있거나 군대 제도를 유지하는 상당수 국가에서 매매춘 여성들은 (정상)가족으로부터만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도 비국민으로 간주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우파의 시각은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있다. 다윈이 진화론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했던 진화의 논리는 자연(현실)에 적응하는 종만이 살아남아 진화해 왔다는 것이었지만 우파들은 이것을 '약육강식'의 논리로 받아들였고, 이것을 다시 사회에 적용한다. 즉,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 역시 자연스러운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하시모토 도루는 군위안부 망언을 한 날 저녁에는 "위안부 제도가 아니어도 '풍속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달초 오키나와(沖繩) 후텐마(普天間) 미군 기지를 방문했을 때 병사들이 성적 에너지를 해소할 수 있도록 "풍속업을 더 활용해 달라"고 지휘관에게 제언했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삼인, 2004)"의 저자 후지메 유키는 이 책에서 "일본군 '노예'제가, 1930년대에 시작된 전쟁에서 돌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근대의 군국주의.식민지주의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전개된 국가폭력 제도, 즉 공창제가 가장 흉폭한 단계로 발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시모토 도루의 발언에 대해 분개하고, 망언으로 단정해야 마땅하겠지만 그보다 앞서 나의 내면에서 혹시 하시모토의 저 발언을 일부 긍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더 되돌아 보았으면 좋겠다.

성을 팔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 제기되는 '왜 굳이 성을 파는가?'라는 질문과 성을 팔고 있는 세계에서의 '왜 팔면 안되는가?'의 반문 사이에서... 나는 가끔 길을 잃고 헤맨다.





* 함께 읽어보면 좋은 책


당신도 전쟁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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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속의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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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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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해변 그리고 군사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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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는 신대륙 원주민을 학살한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이 선물한 트로이의 목마였을지도 모르겠다. 신대륙이 원산지인 담배는 유럽인들의 손에 의해 베트남, 일본, 중국, 조선에까지 널리 퍼졌지만,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란 말로 시작될 만큼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도입된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야귀야 담방귀야·동래울산 담방귀야·너의국도 좋다드니·조선국을 왜유왔나·나의국도 좋다마는·너의국을 유람왔네”란 민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담배는 17세기 초 일본을 통해 전래되었는데, 담배는 남령초(南靈草), 담바고(淡婆姑)란 이름으로 널리 퍼졌었는데, 이수광이 1614년에 발간한 『지봉유설』에 따르면 ‘담배 초명은 남령초(南靈草)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다. 담바고는 타바코(tobacco)의 한자식 표기이지만, 남령초란 남쪽 국가에서 온 신령스런 풀이라는 뜻이었다.

이처럼 남아메리카 열대지대가 원산지인 담배는 유럽의 대항해 시대, 남만(현재의 베트남)을 거쳐 상선(포르투갈)을 타고 16세기 후반 일본에 전파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한해협을 건너 조선으로 흘러 들어왔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살펴보면 “병진(1616), 정사(1617) 연간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1621), 임술년(1622)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와 술을 담배로 대신한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이처럼 담배는 조선에 전파된 지 불과 십년도 안 되어서 온 국토가 담배연기로 자욱해졌다.

18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흡연 습관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던 조선의 농업체계를 교란할 정도의 작물이 되었다. 조선 사람의 담배 사랑이 그만큼 지독했단 뜻이지만 다른 한 편으론 환금 작물을 생산하여 부를 축적하는 농민(토지 소유주)들이 등장하게 되었단 뜻이기도 하다. 담배의 중독성에 기인하는 담배의 환금성으로 인해 조선의 농부들 중에는 식량 작물보다 환금 작물인 담배 농사로 전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정자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가 천에 하나”라며 이런 문제를 한탄하기도 했지만 그들 자신도 대개는 골초였다.

애연가였던 정조는 『일성록』에서 담배가 사람에게 유익한 점은 더위를 당해서는 더위를 씻어주는데 이는 기(氣)가 스스로 하강하여 더위가 스스로 물러가게 된 것이고, 추위를 당해서는 추위를 막아주는데 이는 침이 스스로 따뜻해져 추위가 저절로 막아지게 된 것이다."

"식사 후에는 이것에 의지하여 음식을 소화시키고, 변을 볼 때는 능히 악취를 쫓게 하고, 자고 싶으나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이것을 피우면 잠이 오게 된다. 심지어는 시를 짓거나 문장을 엮을 때,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 그리고 고요히 정좌할 때 등의 경우에도 사람에게 유익 하지 않은 점이 없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성호 이익은 1760년 『성호사설』에서 흡연의 다섯 가지 유익함과 열 가지 폐해를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이가 태호 선생(이익 자신을 가리킴)에게 묻기를, “지금 유행하는 이 담배란 물건이 사람에게 유익한 점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태호 선생이 답하기를 “담배는 가래가 목구멍에 붙어서 아무리 뱉어도 나오지 않을 때 유익하며, 비위가 거슬려 구역질이 날 때 유익하며, 먹은 음식이 소화가 안 돼 누울 수 없을 때 유익하며, 가슴이 답답하고 체해 신물이 올라올 때 유익하며, 한겨울 추위를 막는데 유익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또 묻기를 “그러면 담배는 사람에게 유익하기만 하고 해는 없습니까?”라고 하여, 태호 선생이 답하기를 이로움보다는 해로움이 더 심합니다. 안으로 정신을 해치고, 밖으로 귀와 눈을 해칩니다. 담배연기를 쐬면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얼굴이 창백해지고, 이가 빠지며, 살이 깎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노쇠하게 합니다."

"내가 이 담배에 대해 이로움보다는 해로움이 더 심하다고 하는 것은, 냄새가 독해 재계하면서 신명과 통할 수 없는 것이 첫째이고, 재물을 축내는 것이 둘째이며, 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 걱정인데, 요즘 사람들은 상하노소를 막론하고 일 년 내내 하루 종일 담배 구하기에 급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는 것이 셋째입니다."

게다가 담배는 잦은 화재의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1622년과 그 다음해에는 담뱃불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동래 왜관의 80칸이나 되는 건물들이 전부 연기 속으로 사라진 적도 있었다. 이처럼 오늘날 담배의 문제로 지적되는 것들은 이미 당시에도 문제로 지적되던 것들이었다. 이외에도 미국이 동구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밀수품 중 하나로 말보로와 켄트 담배를 적극 이용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 역시 담배를 재배해서 청에 밀수출했는데 그 양이 엄청나서 조정에서 특단의 조처를 강구해야 할 만큼 커다란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 대책이란 만약 담배 1근 이상을 밀수출하다가 걸리며 바로 목을 베는 참수형에 처하고, 1근 미만은 의주의 감옥에 가두고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을 주기도 했다(요즘엔 중국에서 만든 가짜 담배가 밀수되고 있다).

이처럼 무거운 형벌을 내렸지만 한 번 트인 물꼬, 게다가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 쉽게 끊어질리 없었다. 담배에 대한 수요가 날로 증가하게 되자 농부들은 벼를 비롯한 기본의 식량 작물 대신 담배를 중심으로 농사를 지어 국가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아동 흡연도 문제가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어린이가 담배 피우는 것은 아름다운 품행이 아니다. 골수를 마취하고 혈기를 마르게 하는 것이며, 독한 진은 책을 더럽히고 불티는 옷을 태운다 … 혹은 손님을 대하여 긴 담뱃대를 빼물고 함께 불을 붙이는 어린이도 있는데, 어찌 그리도 오만불손한가? 또는 어린이 매까지 때리며 엄하게 금하는데도 숨어서 몰래 피우고 끝내 고치지 않는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혹은 어린이에게 담배 피우기를 권하는 부형도 있으니, 어찌 그리도 비루한가?”라고 말했다. 물론 이덕무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집안에 담배도구를 갖추고 있다가 손님에게 권하긴 했다.

한국은 담배가 오랫동안 국가전매물품이었고, 현재도 사실상 국가가 관리하는 품목 중 하나이다. 그런 탓에 한국의 담배 문제에는 국가의 문제(세수 증대를 포함해)가 밀접하게 연관되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담배(궐련)를 군대의 사기 진작책으로 적극 활용했던 여러 나라들의 문제들을 따져보면 국가와 담배는 이래저래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최근 금연 바람을 주도하는 것이 기업의 풍토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이것 역시 노동자들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까지 국가와 기업이 협력하여 나서는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런 탓에 담배는 단순히 흡연권과 혐연권 사이의 충돌로만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책으로 쓰게 되면 더 썰을 풀어놓도록 하고 오늘은 여기서 이만.... ㅋㅋ)





다음은 그와 관련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는 담배(산업) 관련 도서 목록이다.

의혹을 팝니다
- 담배 산업에서 지구 온난화까지 기업의 용병이 된 과학자들
에릭 M. 콘웨이 | 나오미 오레스케스 (지은이) | 유강은 (옮긴이) | 미지북스 | 2012-01-15 | 원제 Merchants of Doubt: How a Handful of Scientists Obscurred the Truth on Issues from Tobacco Smoke to Global Warming


담배의 사회문화사
- 정부 권력과 담배 회사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l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은이) | 인물과사상사 | 2011-06-29

역사 속의 담배
- 보랏빛 연기가 자아낸 의존의 문화
조던 굿맨 (지은이) | 이학수 (옮긴이) | 다해 | 2010-02-10

연경, 담배의 모든 것
- 18세기 조선의 흡연 문화사
l 18세기 지식
이옥 (지은이) | 안대회 (옮긴이) | 휴머니스트 | 2008-01-14

흡연의 문화사
- 담배라는 창으로 내다본 역사와 문화
샌더 L. 길먼 | 저우 쉰 (지은이) | 이수영 (옮긴이) | 이마고 | 2006-09-11 | 원제 A Global History of Smoking (2004년)

담배와 문명
- 생활 속의 문명 1
이언 게이틀리 (지은이) | 이종찬 | 정성묵 (옮긴이) | 몸과마음 | 2003-01-30 | 원제 La Diva Nicotina : The Story of How Tobacco Seduced the World

3.3인치의 유혹, 담배
- 골초가 골초들에게 보내는 금연메시지 71
코너 굿맨 (지은이) | 김현후 (옮긴이) | 나무와숲 | 2003-01-15

담배, 돈을 피워라
- 씨앗에서 연기까지 담배산업을 해부한다
타라 파커-포프 (지은이) | 박웅희 (옮긴이) | 들녘 | 2002-01-15 | 원제 Cigarettes : Anatomy of an Industry from Seed to Smoke

시가
l 창해ABC북 1
에리크 데쇼트 (지은이) | 심현정 (옮긴이) | 창해 | 200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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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은 법무부장관이 나서서 직접 발표하는 게 관행입니다. 사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특정한 범죄로 유죄를 받은 사람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일반사면이고, 특정한 사람을 지정해 죄를 사해 주는 것은 특별사면입니다. 흔히 ‘특사’로 줄여서 말하는 특별사면의 적확한 의미는 ‘특별한 사면’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을 지정하는 사면’ 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고, 대통령이 베푸는 은전이라는 성격이 강한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특별사면은 5공과 6공 군사정권 시절에 훨씬 더 자주 단행됐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시절, 악법으로 꼽히는 국가보안법이나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감옥에 가두어졌지만, 두 대통령은 수시로 사면을 단행해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여론이 좋지 않다’ 싶으면 1년에 두어 차례씩 사면을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 씨도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은전(?)이라는 특별사면을 받아 목숨을 부지했고, 복권을 통해 다시 정치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범법자를 잡아들여 벌을 주는 하수인들은 따로 있고, ‘국민 통합을 위해’(이 당시 사면을 단행할 때마다 사용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특별사면을 단행하는 ‘마음씨 좋은 대통령’(?)은 따로 있었던 셈입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이 시절 특별사면은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었습니다. 또 사면을 발표하는 당국도 ‘국민 통합 차원에서 공안사범도 대거 사면에 포함시켰다’는 점을 꼭 발표문의 서두에 포함시켜 사면을 발표하곤 했습니다.

문민정부 시절의 첫 번째 특별사면은 김두희 법무부장관 재임 중에 단행됐습니다. 김 장관은 검찰총장에 이어 곧바로 법무부장관이 되었는데, 그럴 만한 실력과 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았습니다. 사면은 광복절처럼 특별한 날에 맞춰 단행되기 때문에 미리부터 기자들이 그 내용을 알기 위해 취재를 벌입니다. 하지만 법무부관리들은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만큼, 사전에 귀띔도하기 어렵다’며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할지라도, 사면의 대체적인 기준과 대상자는 법무부에서 만들어 청와대에 보고합니다. 청와대에서는 사면의 기준에 대해서는 법무부의 안을 받아들이면서도, 특정한 인물 몇 명을 사면에 포함시키라고 지시한다고 합니다.

특별사면 발표가 예정된 시각 오전 11시, 김두희 장관이 직접 발표문을 낭독하고 대상자를 발표했습니다. 당시에는 서석재 전의원이 특별사면에 포함될 것인지 여부가 기자들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서씨는 동해시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지 채 100일이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특별사면이 아무리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할지라도, 대법원 유죄판결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사면한다면, 지나치다’는 게 당시의 여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씨는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됐고, 김두희 장관은 이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물론 서씨에 대한 특별사면은 불가피하다는 일부 여론도 있었습니다. 서씨는 3당 합당 이전에 야당 총재이던 YS를 대신해 옥살이를 했다는 주장입니다. 그 시절에 큰돈을 주고 유력한 상대후보를 사퇴시키는 행위가 당 총재의 묵인이나 지시 없이 가능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당 총재를 보호하기 위해 서씨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고, 그 뒤 YS가 대통령이 되면서 사실상 국민들이 서씨의 죄를 탕감해줬다’는 논리였습니다. 기자들은 김두희 법무부장관에게 물었습니다. ‘서석재 씨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할지라도,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지 채 1년도 못돼서 특별사면을 단행한다는 것은 3권 분립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장관은 평소 습관대로 잠깐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그리고는 답변을 시작했습니다. 기자들은 장관의 말을 받아쓰기 시작했습니다. 30초 가량 장관의 답변을 받아 적다가, 기자들이 하나 둘 펜을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장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기자들이 오히려 서로 눈을 맞추면서 당황한 표정이었습니다. 장관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답변으로서 단 한마디도 기사에 인용을 할 수 없을 만큼, 전혀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장관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말의 속도는 평소보다 더 느렸습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라는 시쳇말이 딱 어울렸습니다. 기자들이 먼저 제풀에 지쳤습니다. ‘아주 특별한 특별사면’의 시작은 바로 이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세월이 흘러 광복 60주년이 됐습니다. 60이란 숫자는 동양에서 말하는 환갑과 맞물려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갖가지 기념행사가 벌어지고, 청와대는 특별사면도 단행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번에도 ‘아주 특별한 특별사면이 있을 것인가’가 기자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기자들은 정대철 전 열린우리당 선거대책본부장이 사면에 포함될 것인지에 촉각을 세웠습니다. 정씨는 쉽게 말하자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뇌물수수죄로 확정판결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형기도 3분의 1 정도만 마치고, 지병을 이유로 병원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특별사면을 발표했습니다. 이른바 ‘개국공신’으로 평가받는 정대철씨는 특별사면에 포함됐습니다. 특정인을 봐주기 위한 사면이 아니냐고 기자들이 따져 물었습니다. 장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괄적 의미로 보면 뇌물이 아닌 정치자금을 받은 것에 해당되는 만큼 사면을 하는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뇌물이라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법무부장관이 너무도 손쉽게 뒤집어버린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특별사면’의 역사는 이렇게 해서 반복됐습니다. 왜 역사는, 특히 ‘별로 좋지 않은 역사’는 반복될까요?
김종화, <아주 특별한 '특별' 사면> 중에서
- (http://imnews.imbc.com/mpeople/rptcolumn/rptcol20/1272391_7071.html)





앞서 특별사면권 남용의 역사를 간단히 살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 대통령 특별사면이 특사로서 그나마 의미 있었던 시절이 전·노집권기였던 것처럼 박정희 추종자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억눌렀던 시절도 아이러니하게 전·노집권기였습니다.

민주화와 함께 되살아난 박정희의 망령

박정희 신드롬이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 출몰하기 시작했는가를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이후의 일이었음을 상기할 수 있을 겁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의 정치적 머슴이나 다름없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죽음을 눈물로서 애도할지언정 박정희가 남긴 정치적 세력이 재부상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박정희의 유해를 담은 영구차가 청와대를 나와 광화문을 거쳐 동작동에 이르기까지 연도에 늘어선 국민들은 눈물로 홀아비 독재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지만 이것은 박정희 시대의 부활을 염원했기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전두환은 박정희의 정치적 양자에 가까웠지만 현실에서는 죽은 박정희를 영웅으로 추앙하기보다 그와 다른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자 했습니다. 전두환 시절에 이루어진 많은 정책들, 예를 들어 1980년 7월 30일엔 과외금지조치(자기 자녀에겐 과외를 시켰다고 한다)가 그러했고, 1945년 9월부터 37년간 지속된 야간통행금지조치가 1982년 1월 5일 해제되었고, 1983년부터 중고교에 두발 및 교복자율화 조치가 실시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헌법에서 5.16혁명(?) 정신을 삭제했고, 유신 세력이던 구 공화당 세력을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 혐의로 제거하면서 박정희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기로 규정합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뿌리를 부정한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정의 사회 구현'의 신정치 세력으로 부각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정의 사회 구현 세력이 되기 위해서라도 과거 박정희 정권과 일정하게 선을 그으며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여러 차례 언론에 의해 회상되고, 노출되었던 박근혜 당선인과 신군부 세력 간의 알력과 구원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바대로 박 당선인이 용서할 수 없는 자들로 이들 신군부 세력을 지목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가 재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원인은 일정하게 혹은 전적으로 민주화 세력 때문이었습니다. 8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세력은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저항하였고,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습니다. 민주화투쟁을 통해 확장된 정치 공간은 민주화 세력, 노동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그간 전두환 정권의 눈치를 보고 있던 박정희의 잔존 세력들 역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공화당을 부활시킨다는 의미에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고, 이들은 지역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치 세력을 일정하게 부활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결과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유신 세력의 부활을 가져온 셈이었던 것이지요.





기득권 세력의 문화투쟁

박정희 사망 이후 10년이 경과한 시점(1989.10.25.)에 실시되었던 <중앙일보>의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이런 사실이 더 극명해집니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과오보다 공적이 많았다"는 응답이 전체 61%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거는 선택적으로 기억된다는 점에서 '질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탄압, 인권과 민주주의의 상실은 쉽게 망각된 반면 '양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각종 경제지표와 생활지표들은 항상 더 많이 부각되었습니다.

박정희의 '과오'보다 이와 같은 '공로'가 더 많이 부각될 수 있는 밑바탕을 놓은 사람이 바로 김영삼 대통령이었습니다. 비록 3당 야합을 통해 집권했으나 김영삼에겐 박정희 정권 말기의 투쟁으로 '민주화의 기수'란 상징을 획득하고 있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90%를 웃도는) 지지율을 획득하며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3당 합당을 통해 출범한 태생적 한계 등으로 인한 개혁의 실패, 아들을 비롯한 측근 비리로 인해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는 애초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역사 바로 세우기'를 정책 실패를 오도하는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실패는 무리한 세계화, 개방 전략으로 IMF체제라는 최악의 위기를 자초했던 것입니다.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기득권 세력은 잇따르는 개혁(?)정책이 자신들의 입지와 기득권을 위협하는 상황이 오자 거대한 문화투쟁(Kulturkampf)을 기획합니다. 사실 문화투쟁의 원조는 독일 보수주의 정치를 대표하는 비스마르크였습니다. 대외적으로 철혈정책을 통해 제국을 통일했던 비스마르크였지만 대내적으로는 권위주의 통치에 저항하는 개혁세력(사회민주당, 노동자)을 길들이는 방편으로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는 정책을 수행했습니다. 채찍이 정치적 탄압이었다면 당근은 복지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정부의 진짜 채찍은 이전까지 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학교 관리(교육)를 빼앗아 국가가 직접 교육 관리에 나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개혁세력 역시 가톨릭이 장악하고 있던 학교 교육에 반대했기 때문에 두 세력은 교육의 세속화 정책이라 할 수 있는 국가의 교육 관리에 대해 일정하게 타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들 누구나가 알고 있듯 군국주의 국가의 탄생이었습니다.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자학적 역사관으로 비판하면서 기득권 세력들은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을 '국부(국부)'로, '건국의 아버지'로 부활시키는 상징조작을 통한 문화투쟁에 나섭니다. 이것은 박정희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한 사전 포석이기도 했습니다. 김영삼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역사 바로 세우기’는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한보 및 김현철 사건 등으로 실추된 정권의 도덕성을 만회하기 위한 전략으로 치부되었고, 기득권 세력은 그 틈새에 부패한 김영삼 정권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박정희 시대를 강력한 리더십과 청렴, 자기희생과 경제성장으로 치장해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과 없는 용서와 화해 : 민주화세력의 취약성 혹은 타협

이후 정권을 잡은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여러모로 취약한 민주화세력의 입지를 잘 보여줍니다. 만약 IMF외환위기라는 국난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보수의 분열이 없었다면, 유신잔당이 아닌 유신본당을 자처한 김종필과의 지역 분할 구도가 없었더라면 김대중으로의 정권교체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겁니다. 출범부터 이처럼 취약한 구조였던 김대중 정부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과 철저하게 결별하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기념관 건립지원을 약속하는 등 박정희 시대에 정당성마저 부여하고 말았습니다. 표면적으론 화해와 용서를 말했지만 사과 없는 일방적 용서였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부터 IMF체제가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거부할 수 없었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은 한국의 노동자정치세력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후 한국의 노동세력은 노동자정치는커녕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위해 투쟁하는 세력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 정부의 출범은 김대중 정부의 실패와 타협으로부터 가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받아들인 김대중 정부의 타협과 실패는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가 글로벌 스탠더드를 로컬하게 받아들이는데 성공한 결과를 빚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부의 양극화를 넘어 마침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 이 말을 하던 당시의 문맥은 상생협력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지만 언론은 물론 일반 대중들도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줄 마지막 버팀목이 정부라고 생각하던 일반 대중들에게 이것은 정부의 항복 메시지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노동 세력은 물론 민주화 세력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던 노무현 정부는 결국 어디에서도 의미 있는 지지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결과가 빚어지게 된 까닭에 대해 전문가들은 박정희 시대에 일정하게 공유되었던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정치경제패러다임을 구축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들 하지요. 변화하는 국제경쟁체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조정하는 새로운 경제운용방식을 개발하지 못한 채 선거공학에만 치중했던 민주화 세력의 실패가 오늘의 실패를 가져온 셈이라고 말입니다. 기업으로부터, 정부로부터, 시민사회 어디에서도 구조의 메시지를 받을 수 없었던 우리들은 난민이 되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모색했고, '부자되세요' 열풍에 사로잡혔습니다. 고등학생의 44%가 '10억이 생긴다면 1년 정도는 감옥에도 갈 수 있다'고 답하는 배금주의와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병든 사회,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아이러니의 아이러니 : 한국 정치의 딜레마

아이러니(irony)란 말은 흔히 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실제와 반대되는 뜻의 말을 하는 것을 ‘반어(反語)’ 즉, 아이러니라고 하지요. 민주화운동을 하며 피땀을 흘려 오늘의 민주화를 이룩한 세대의 입장에선 오늘의 청년 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어쩌면 저 ‘민주화’란 말을 모두 ‘근대화’라고 바꾸면 민주화운동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던 그 이전 세대 사람들의 복잡한 심사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의 청년 세대는 임기 말 MB 대통령이 “나라 전체가 비리투성이”라며 개탄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아이러니를 느낍니다만 그런데 이들은 그런 MB를 비판하는 민주화운동세력에게서도 마찬가지의 아이러니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가 열렬한 골프광이라고 하지요. 그가 골프를 배우고, 후배들에게 정치하려면 골프도 좀 배워두고 그래야 한다고 충고할 때 이미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대에 대한 기대의 시효는 만료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청년 세대 입장에선 이미 지독하게 보수화되었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다시 말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욕하는 걸로 받아들인다는 거지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청년 세대는 가슴 아픈 세대입니다. 버림받고, 고립당하고, 배신당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운동 세대로서는 작금의 상황이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 즉 ‘아이러니’였던 것처럼 청년 세대에겐 민주화를 부르짖은 세대가 그 이전의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 못할 역사의 아이러니이거든요. 참으로 믿고 신뢰할 놈 하나 없다는 ‘아이러니의 아이러니’가 지금 우리의 정치, 우리가 바꿔나가야 할 한국이란 사회의 딜레마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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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다시 듣는 이 한 곡의 노래> 존 바에즈 : Mary Hamilton
- 한 곡의 노래로 보는 파란만장 영국사





Word is to the kitchen gone, and word is to the Hall
And word is up to Madam the Queen, and that's the worst of all
That Mary Hamilton has borne a babe To the highest Stuart of all

소문은 부엌으로 번지고, 소문은 궁정으로 번져서,
마침내 여왕의 귀에도 들어갔네,
메리 해밀튼이 아이를 낳았다고, 그것도 가장 고귀한 스튜어트 왕통의 아이를...

Arise, arise Mary Hamilton Arise and tell to me
What thou hast done with thy wee babe I saw and heard weep by thee

“일어서거라, 일어서 메리 해밀튼, 일어나서 내게 말해보거라.
네 갓난아기는 어떻게 하였느냐? 나는 흐느낌소리와 눈물을 보았노라"

I put him in a tiny boat And cast him out to sea
That he might sink or he might swim But he'd never come back to me

“그 아이를 조각배에 담아 먼 바다로 띄워 보냈사옵니다.
물에 빠져 죽었을지 어쩌면 살았을지도 하지만 두 번 다시 제게 돌아올 수는 없겠죠."

Arise arise Mary Hamilton Arise and come with me
There is a wedding in Glasgow town This night we'll go and see

“일어서거라, 일어서 메리 해밀튼, 일어나서 나와 함께 가자꾸나.
글래스고에 결혼식이 있단다. 오늘 밤 우리 함께 보러 가자꾸나."

She put not on her robes of black Nor her robes of brown
But she put on her robes of white To ride into Glasgow town

그녀는 검은 예복을 입지 않았고, 갈색 예복도 치워버렸어요.
오히려 새하얀 예복을 입고 글래스고로 나섰죠.

And as she rode into Glasgow town The city for to see
The bailiff's wife and the provost's wife Cried ach and alas for thee

그리고 그녀가 글래스고 시내에 들어설 때, 온 도시가 쳐다봤죠
행정관 부인과 시장 부인이 외쳤어요, "아, 어쩌나, 가엾게도."

You need not weep for me
she cried You need not weep for me
For had I not slain my own wee babe This death I would not dee

"아, 저를 위해 울지 마세요."
그녀는 말했네, "저를 위해 울지 마세요.
제가 낳은 제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면, 전 이렇게 죽지 않았을 걸요."

Oh little did my mother think When first she cradled me
The lands I was to travel in And the death I was to dee

"아, 나의 어머니는 몰랐겠지. 나 어릴 적 요람을 흔드실 때는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또 어떤 죽음 맞게 될지.“

Last night I washed the Queen's feet And put the gold in her hair
And the only reward I find for this The gallows to be my share

"어젯밤 나는 여왕님의 발을 씻겨드리고, 머리에는 금장식을 얹어 드렸죠.
그 대가로 오늘 받는 보상은 이것뿐, 교수대가 바로 제 몫이네요.“

Cast off cast off my gown she cried But let my petticoat be
And tie a napkin round my face The gallows I would not see

"벗겨요, 제 예복을 벗겨 가세요. 하지만 제 속치마만은 그냥 두세요.
수건으로 제 얼굴을 가려주세요. 교수대를 보고 싶지 않으니."

Then by them come the king himself Looked up with a pitiful eye
Come down come down Mary Hamillton Tonight you will dine with me

그때 왕이 납시어, 가여운 눈초리로 물끄러미 바라보네요.
"내려오너라. 내려와, 메리 해밀튼. 오늘 밤 나와 함께 만찬을 나누자."

Oh hold your tongue my sovereign liege And let your folly be
For if you'd a mind to save my life You'd never have shamed me here

"오, 그런 말씀하지 마소서, 존엄하신 전하, 정말 덧없는 말씀,
제 목숨을 구하려하셨다면 절 이렇게 욕보이진 않으셨겠죠."

Last night there were four marys tonight there'll be but three
It was Mary Beaton and Mary Seton And Mary Carmichael and me.

어젯밤까지는 네 명의 메리가 있었죠. 하지만 오늘 밤엔 셋만 남겠네요.
그 네 명은 메리 비튼, 메리 시튼, 메리 카마이클과 나였지요.




16세기 스코틀랜드 민요였던 <Mary Hamilton>은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민요를 모던포크의 디바인 존 바에즈가 불러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노래이다. 나 역시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 중 한 분이 칠판에 가사를 적어놓고 가르쳐주어 어릴 적 배운 노래가 양희은이 부른 <아름다운 것들(1972)>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 노래를 처음으로 번안한 사람은 당시 이화여대에 재학하고 있던 방의경이 1971년 서울대 문리대 축제에서 부르기 위해 번안한 것이 최초였다고 한다.

방의경이 이처럼 슬픈 노래 가사를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져간다는 의미로 바꿔 부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당시의 엄혹했던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노랫말 역시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방의경이 이 노래의 가사를 이렇게 번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작사·작곡자를 확인할 수 없는 민요들 역시 당시 시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없어 노래 가사를 조금씩 뒤틀곤 한다. 그래서 어떤 노래가 당시 시대상황을 반영한다고는 하더라도 가사가 역사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였던 헨리 8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등극이라는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사의 내용은 왕국의 궁정이 배경이다. 왕비의 시녀였던 매리 해밀튼은 왕의 눈에 들어 정사를 나누고 그 사이에서 아기를 낳았지만 왕의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죽이게 되고 결국 왕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왕이 왕비의 시녀와 눈이 맞아 아기를 낳고 결국 죽임을 당한다는 가사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경우를 영국에서 찾다보면 누구라도 금방 헨리 8세와 그의 불운했던 왕비들이 떠오른다.






헨리 8세의 불운한 여섯 왕비들
1509년 헨리 8세는 온 백성들의 축복과 환희의 축제 속에 즉위했다. 그러나 장자가 아니었던 헨리 8세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형 아서가 1502년 사망한 덕분이었다. 불과 18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 헨리 8세에게 부왕의 유언집행인들은 미망인이 된 형수 캐서린과 결혼하도록 강권했다. 왕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형수와 결혼했지만 한동안 헨리 8세는 행복했다. 스페인 아라곤의 왕족 출신인 왕비 캐서린은 헨리 8세의 왕권을 강화시켜주었고, 아이도 다섯 명이나 낳아주었다.

문제는 그 가운데 오직 메리 공주(1516년)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혈기왕성한 헨리 8세는 왕은 튜더 왕조의 운명을 이어갈 남자 상속인의 확보를 바랐지만 캐서린은 임신연령을 넘어섰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는 사이 왕은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영화 <천일의 앤>의 바로 이 앤이다)을 탐했는데 그녀는 결혼에 대한 보장 없이는 이에 응하지 않으려 들었다. 만약 헨리 8세가 합법적 권위에 연연하지만 않았다면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혈기왕성한 왕이었고, 자신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었다. 그는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갈등을 빚고 자신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반포한다. 이로써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성립하게 되었지만 홀로 고립될 것이 두려웠던 헨리 8세는 무력을 앞세워 스코틀랜드로 하여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결별하고 잉글랜드와 통합하도록 윽박지른다.

헨리 8세의 결혼 행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대충의 개요 정도만 소개해보면 앤 불린이 왕과 결혼할 때는 이미 임신 중이었는데, 1533년 9월에 장차 엘리자베스 1세가 될 딸을 낳았다. 헨리는 그녀가 아들이 아니어서 몹시 실망한데다가 1536년 1월 앤이 남자 아이를 유선하게 되자 신(神)이 자신의 결혼을 저주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왕은 앤 불린을 궁정에 유폐(1536년 5월)하고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와 결혼한다. 그러나 제인 역시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출산한 후 후유증으로 12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의 에드워드 왕자가 훗날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이다. 제인 시모어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유럽 내부에서 동맹을 찾기 위해 클리브스(Cleves)의 앤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가문에 비해 교양도 부족했고, 원했던 동맹마저 성사되지 않자 곧바로 이혼해 버렸다. 그 다음이 캐서린 하워드였는데 그녀 역시 전처인 클리브스의 앤의 시녀였다. 그러나 캐서린 하워드 역시 1542년 2월 간통죄로 처형당한다. 헨리 8세는 1543년 7월 온화한 성격에 인문학적 교양이 넘치는 캐서린 파(Parr)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그녀가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였다. 여기까지는 대략 <매리 해밀튼(Mary Hamilton)>의 가사와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라 메리 해밀튼을 죽게 만든 왕이 헨리 8세일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그녀의 이름은 ‘캐서린’도 아니고, ‘앤’도 아닌 ‘메리’였을까?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와 에드워드 6세
여섯 번의 결혼으로 헨리 8세가 남긴 자식들은 첫째 부인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메리, 둘째 부인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 엘리자베스,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와의 사이에서 에드워드  뿐이었다. 제인 시모어가 에드워드를 낳고 불과 12일 만에 죽었기 때문에 헨리 8세는 눈을 감을 때까지도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가 제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을지 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가 남긴 유일한 정통 혈육이었던 메리 스튜어트와의 결혼을 추진한다.

메리 스튜어트는 아버지 제임스 5세가 남긴 스코틀랜드 왕실의 혈통은 물론, 어머니 마리 드 로렌을 통해 프랑스의 피가, 그리고 할머니 마가렛을 통해서는 잉글랜드 튜더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헨리 8세는 아들 에드워드와 메리를 결혼시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병합을 추진했는데 스코틀랜드가 이를 거절하자 1544년 하포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를 앞세워 스코틀랜드를 침공한다.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영내에 침입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며 에든버러를 불태웠지만 메리는 무사했다. 이것이 이른바 ‘난폭한 구혼(Rough Wedding)’이라 불리게 된 사건이었다.

결국 에드워드 왕세자와 메리 스튜어트의 결혼에 실패한 헨리 8세는 헨리는 마지막 칙령을 내려 에드워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위원회로 하여금 정사를 돌보도록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추기경 그랜머에게 에드워드를 부탁했다. 헨리 8세가 세상을 떠나자 에드워드의 외삼촌인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섭정을 자청하고 나서 최고의 권한을 행사하였지만 워릭 백작(뒤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에게 숙청당하고, 실권은 노섬벌랜드 공작이 차지하게 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이 시대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산업혁명의 기틀이 된 양모 생산과 모직물 산업이 영국의 기간산업으로 뿌리내린 시대이기도 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단지 그의 결혼과 이혼만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이와 같은 경제적 변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 따른 부작용만큼이나 이와 같은 경제적 격변에 따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양모 산업을 통해 이득을 얻었던 젠트리 계급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울타리를 그음(엔클로저운동)으로써 농민들의 고통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에서 묘사되듯 실제로 에드워드 6세는 가난한 농민들을 보호하고, 파괴된 농지의 부흥과 경작을 유도하기 위해 젠트리 계급에게 1인당 2천 마리 이상의 양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젠트리 계급은 친척의 명의를 빌어 양을 소유하는 편법을 사용하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로버트 케트와 같은 진보주의자들이 농민들을 부추겨서 폭동을 일으키는 등 에드워드 시대의 사회는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던 1553년 1월, 에드워드에게 처음으로 결핵 증세가 나타났다. 그리고 5월이 되면서 왕의 병세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확실한 왕위계승자가 없는 상태에서 왕이 사경을 헤맨다는 사실은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다툼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헨리8세가 우려했던 혈통을 잇지 못하게 될 사태가 발생했다. 에드워드 6세가 죽는다면 왕위계승권은 헨리 8세가 규정(1544년 왕위계승법)한 대로 메리에게 있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은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손에 있었고,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가 왕위에 오른다면 국교회 신자였던 자신은 물론 여러 귀족들의 지위마저 불안해질 것이라 생각해 에드워드 6세를 부추겨 자신의 며느리이자 헨리 7세의 증손녀인 제인 그레이로 하여금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고, 그녀의 아들들도 왕위 계승 서열의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았다. 얼마 후 마침내 에드워드가 죽고 제인 그레이가 왕위에 오르자 기존의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였던 메리와 제인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블러드 메리 vs. 제인 그레이
헨리 8세의 장녀였던 메리는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후계자이자 외가인 스페인 아라곤 집안의 후광을 입어 줄곧 유럽 왕실들의 구애를 받아왔지만 이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왕위 계승을 기다려왔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한 뒤 새 왕비가 된 앤 불린은 딸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1세)를 낳은 뒤, 메리가 부모와 만나지 못하도록 막았고, 헨리가 캐서린과 이혼하면서 사생아 신세가 된 메리의 왕위 계승 자격마저 박탈하도록 했다.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앤 불린은 메리를 어린 엘리자베스 앞에서 시녀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메리는 스페인으로 쫓겨난 어머니 캐서린과 비밀리에 편지를 교환하며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앤 불린과도 헤어진 헨리 8세는 얼마 뒤 메리를 궁으로 불러 메리에게 아버지인 자신이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하고, 어머니 캐서린과의 결혼이 ‘근친상간에 따른 불법’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딸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처음엔 제안을 거부했지만 사촌인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설득에 따라 제안을 받아들인 메리는 신분이 회복되었다. 이후 메리는 헨리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의 아들 에드워드 왕세자의 대모가 되기까지 하였다.

미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노래를 잘하고 말솜씨가 있는 데다 왕위 계승 서열도 높아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주였던 메리지만 아버지의 이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평생 ‘사생아’라는 딱지를 멍에처럼 짊어져야 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는 ‘성공회’를 선포한 후 예배에서 라틴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도록 규정했지만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는 남들 몰래 자신의 개인예배실에서 예전대로 가톨릭 미사를 올리다가 발각되어 목숨이 위험해지기도 했다. 비록 자신의 누이들(메리와 엘리자베스)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목숨만은 빼앗고 싶지 않았던 에드워드 6세의 배려 덕분에 간신히 무마될 수 있었다.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간계로 눈앞에서 왕위를 빼앗긴 메리는 노포크로 몸을 피신했는데, 이곳에서 민중들이 자신의 불운을 동정하는 분위기를 간파한 메리는 다른 귀족들을 규합해 의기양양하게 런던으로 돌아왔다. 메리는 제인 그레이와 노섬벌랜드 공작을 런던탑에서 참수하고 37세의 나이로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여왕 메리 1세로 즉위했다. 불과 9일 간 통치자의 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던 제인 그레이는 눈이 가려진 채 참수당하는 순간까지 “내가 왜 죽어야 하느냐”라면서 참관인들을 향해 흐느꼈다고 한다.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지지했던 귀족과 민중들은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을 했던 메리가 현명한 여왕으로 처신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곧 이들의 기대가 헛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왕위에 오른 메리 1세는 영국국교회를 파하고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 가톨릭 국가로 환원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수도원 정리로 새로운 토지와 재산을 얻은 귀족들은 가톨릭 환원을 반대했다. 또 의회에서는 왕가의 혈통을 지닌 사촌 데번 백작 코트니를 결혼상대로 천거했지만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메리는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자기보다 11살이나 연하였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의회가 반대하자 메리 여왕은 “결혼은 내가 하는 것이다”라며 화를 내면서 의회를 적으로 만들었다.

토마스 와이어트(Thomas Wyatt)경이 이끄는 신교도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메리는 수천 명의 군중을 모아 반란군에 맞섰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는 처형당했다. 반란을 진압한 메리 여왕은 예정대로 펠리페와 결혼했고, 이어서 가톨릭에 반발하는 신교도들을 반란자로 몰아 제거할 목적으로 이단처벌법을 부활시켰다. 메리 여왕의 재위기간은 3년밖에 되지 않을 만큼 짧았지만 이 기간 동안 3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단자이자 반란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이것이 그녀를 ‘피의 메리(Blood Mary)’라고 부르게 된 이유였다. 그녀의 악명은 훗날 금주법 시대의 미국에서 주류단속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칵테일 이름으로 부활하는데 토마토주스에 진을 섞은 칵테일이 붉은 핏빛이라 하여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 불렸다.

그녀에 대해 동정적이었던 국민들이 차츰 메리 여왕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비난의 목소리도 커졌다. 그 와중에 메리 여왕은 남편인 펠리페 2세의 왕국인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다가 프랑스에 있던 마지막 잉글랜드 영토(칼레)마저 상실하며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건강을 잃은 메리는 암에 걸렸고, 펠리페 2세와의 사이에서 몇 차례 상상 임신은 있었지만 끝끝내 자녀를 갖지 못한 채 1558년 11월 17일 눈을 감았다.


엘리자베스 vs. 메리 스튜어트
1558년 11월 17일, 영국 최초의 여왕 메리 1세가 죽자 지금까지 런던탑에 갇혀있던 25세의 엘리자베스는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해 화려한 대관식을 치른다. 대관식을 마치고 나오던 그녀에게 군중 속에서 한 소녀가 메리 시대에는 금지되었던 영역판 성서를 바쳤는데 감격에 찬 여왕은 그 책을 받아들어 입을 맞추고 높이 들어올린 다음 가슴에 품었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수많은 국교도들이 환호성을 질렀을 것은 당연지사였다. 다른 한 편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이 대낮에 촛불을 들고 나오자 여왕은 큰 소리로 “그 촛불들을 치워라! 그것 없이도 우리는 이제 잘 볼 수 있노라”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이 모든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든, 아니면 엘리자베스 1세의 치밀한 각본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여왕의 치세를 가늠하기엔 충분한 이벤트들이었다.

앞서 그녀의 경쟁자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 여왕이 사라지고, “짐은 영국과 결혼하였노라”라며 최대의 치세를 성취한 여왕으로 칭송받지만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 여왕이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헨리 7세의 손녀이자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8세가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6세와 강제로 결혼시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던 상대였다. 헨리 8세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생후 9개월 만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5세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된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앙리 2세는 잉글랜드의 침공 ‘난폭한 구혼(Rough Wooding)’으로 위기를 맞이한 스코틀랜드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병했고, 잉글랜드를 물리친 뒤 메리 스튜어트를 자신의 맏아들(프랑소와)과 결혼시키기 위해 프랑스로 데려갔다. 프랑스 왕궁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한 메리 스튜어트는 16세에 소꿉친구나 마찬가지였던 프랑소와 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인 1559년 7월 앙리 2세가 신하인 몽고메리 백작과의 마상시합에서 눈에 창을 맞고, 10일 뒤에 파리에서 갑작스레 죽었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 프랑소와 2세는 프랑스 왕에 즉위한다.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의 왕비이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면서 잉글랜드의 정통 왕위계승권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안락한 궁정에서 성장한 메리 스튜어트는 영국 왕실의 복잡한 권력 승계 절차를 지켜보면서도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라 여기기보다 혈통에 의거해 당연히 따라오는 권리 정도로 인식했다.

왕비가 된지 1년 만에 병약했던 남편 프랑소와 1세가 갑자기 사망하고, 자신이 ‘장사꾼의 딸’이라 경멸했던 시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가 권력을 잡게 되자 프랑스 궁정 내에서 그녀의 위치는 현격하게 약해졌다. 때마침 자신을 대신해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고 있던 어머니 마리 드 기즈가 죽으면서 메리 스튜어트는 불현듯 자신이 5살 무렵 떠나온 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땅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의무가 생겼다.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의 이복 오빠인 제임스 스튜어트 모레이 백작에게 스코틀랜드 통치를 위임하고, 자신은 프랑스 왕궁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남편을 잃은 힘없는 과부로 프랑스 궁정에 남을 바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하루를 살더라도 왕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 불과 19세였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스코틀랜드 정국은 종교분쟁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영국에는 태어날 때는 적자(嫡子)였으나 나중에 서출이 되면서 즉위하기 전까지 런던탑에 갇혀 목숨과 권력을 위해 피눈물을 흘렸던 엘리자베스 1세가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 궁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귀여움과 아첨을 받으며 성장한 메리 스튜어트는 애초부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국가와 결혼한 여왕과 남자를 사랑한 여왕
역사는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여왕을 최대의 라이벌로 만들었는데, 그 뿌리는 아버지 헨리 8세에게 있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이혼하고 그녀를 처형한 뒤 엘리자베스를 서출이라고 공표했기 때문에 왕으로 즉위할 명분이 취약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를 여왕으로 추대한 세력은 메리 1세에게 핍박받던 영국 국교회 세력이었지만 메리 1세 여왕을 추대했던 영국의 가톨릭 세력은 여전히 엘리자베스 1세가 서출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녀를 대신할 왕위계승권자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스튜어트가 적임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엘리자베스가 서출이라면 헨리 8세에겐 적통 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제1 왕위 계승권은 메리 스튜어트의 할머니, 헨리 7세의 딸이자 헨리 8세의 누나였던 마가렛 튜더에게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의 행복한 왕비였다면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남편을 잃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메리 스튜어트에게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었지만 메리 스튜어트는 그녀가 왕위에 오른 것을 축복해주지 않았다(다시 말해 왕위를 정식으로 인정해주지 않았고). 또한 실제 잉글랜드의 통치자가 된 것도 아니면서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 왕관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는 치명적인 모욕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메리 스튜어트 여왕은 자신에 앞서 오랫동안 섭정을 해온 이복 오빠 제임스 스튜어트 모레이 백작과 공종하며 권력을 안정적으로 분배했고, 스코틀랜드 내부에 싹트고 있던 프로테스탄트를 배척하지 않는 등 제법 안정적인 통치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메리 스튜어트의 가장 큰 문제는 결혼과 사랑이었다.

20대 초반에 혼자된 메리 스튜어트의 결혼 문제는 혼인을 통해 권력을 나누어 가졌던 당시 유럽 왕실의 커다란 관심사였다. 그녀가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물론 유럽 전체의 세력이 재편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메리 스튜어트의 일거수일투족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 만약 메리 스튜어트가 스페인처럼 강력한 가톨릭 국가와 결혼한다면 잉글랜드와 자신의 왕위마저 위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리 스튜어트의 마음을 빼앗은 남자는 스페인 국왕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내부에 있었다.

그녀는 훤칠한 미남이었던 스코틀랜드의 귀족이자 자신과는 사촌관계가 되는 헨리 스튜어트 단리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헨리와의 결혼은 그녀에게 커다란 재앙이 되었는데 제일 큰 문제는 훤칠한 외모에 빠져 결혼하고 나서보니 그가 골빈 남자였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내심 메리 스튜어트가 외국의 왕과 결혼해 비록 섭정이라도 스코틀랜드의 통치권을 독점하길 바랐던 이복오빠의 실망, 세 번째는 왕위계승권을 가진 두 남녀(헨리 단리 역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의 결합으로 인해 엘리자베스 1세를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레이 백작은 반란을 일으켰고 해외로 망명했다가 그녀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여 귀국했지만 호시탐탐 자신의 이복동생이기도 한 메리 스튜어트를 몰아낼 궁리만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헨리 단리가 아내를 의심해 임신 중이던 메리 스튜어트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비서 다비드 리치오를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남편에게 그나마 있던 정(情)마저 떨어진 메리 스튜어트는 남편을 유폐시키고, 새로운 남자 제임스 햅번 보스웰 백작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남자는 헨리 단리보다도 더 악질이었다.

그는 바람둥이 불한당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여왕을 납치해 감금한 채 강간(?)했고(이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보는 관점이 약간씩 다른데 두 사람이 밀월여행을 갔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여왕이 납치되었다고 관점이 있다. 어쨌든 여왕은 임신했다), 여왕의 남편인 헨리 단리를 그가 유폐된 집에 불을 질러 죽게 만들었다. 여왕은 남편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에 보스웰 백작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마저 여왕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명분을 얻은 모레이 백작은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여왕은 반대파에게 사로잡혀 이제 막 한 살에 불과했던 자신의 아들 제임스 1세에게 왕위를 강제로 양위해야만 했다. 왕위를 빼앗긴 메리 스튜어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메리 스튜어트는 이것이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일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엘리자베스 여왕과 왕위계승을 다투는 제1의 라이벌이자 바로 얼마 전까지 그녀에게 최대의 치욕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 메리 스튜어트의 망명은 뜨거운 감자이자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었다. 자신들의 뒷마당이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 게다가 친척이자 같은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를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왕위를 되찾아줄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 메리 스튜어트가 엘리자베스의 품으로 들어온 것이다.





파란만장한 여왕들의 통치
엘리자베스 여왕은 정치적으로 매우 교묘한 방법을 이용해 메리 스튜어트를 처리했는데 우선 왕이기 때문에 남편의 죽음에 대해 재판을 받을 수 없다는 명분을 들어 재판 대신 질의란 형태로 실질적인 재판을 받게 만들었다.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번엔 스코틀랜드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적(위기)을 가까이 두고 감시(관리)하는 편이 더욱 안전하다고 여긴 엘리자베스 여왕의 판단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 스튜어트를 겉으로는 국빈으로 대접해 연금을 지급하고, 수행원(물론 이들 중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스파이들도 있었다)들을 고용해주었지만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메리 스튜어트를 직접 만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 스튜어트 역시 엘리자베스의 의도를 간파했다.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엔 결코 이 연금 상태가 끝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메리 스튜어트 역시 겉으로는 자신의 보호자이자 당고모이기도 한 엘리자베스를 위해 기도나 하며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뒤로는 가톨릭 세력과 연계해 엘리자베스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물론 이것이 모두 사실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메리 스튜어트의 주변엔 이미 엘리자베스 여왕과 그 측근의 간자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헛된 노력들은 이미 여왕에게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같은 왕족이라는 이유로 메리 스튜어트를 차마 처형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여왕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여왕의 측근들도 애가 닳기 시작했다.

만약 엘리자베스 여왕이 메리 스튜어트보다 먼저 죽게 된다면 가톨릭 신자인 메리 스튜어트가 또다시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장관들은 “그녀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이 있고, 그들이 희망 속에 사는 한, 우리는 공포 속에 살게 된다”고 메리 스튜어트의 죽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충복인 월싱엄의 계략에 말려 가톨릭 신자였던 앤터니 배빙턴의 모반 계획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고 말았다.

메리 스튜어트는 모반죄로 유폐된 지 19년만인 1587년 2월 7일, 잉글랜드의 노샘프턴셔에 있는 포더링헤이 성의 커다란 홀에서 집행되었다. 당시 메리 스튜어트의 나이는 44세로, 마지막까지 비극적인 인물로 남았다. 사형 집행인의 솜씨가 서툴렀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목을 잘라내기 위해 두 번의 도끼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녀의 죽음에 얽힌 일화 중 하나는 그녀가 귀여워하던 애완견이 치맛자락 아래로 기어들어와, 죽은 여왕의 시신에서 떠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때 그녀는 가톨릭을 상징하는 붉은 색 페티코트(속치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불운했던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와 아버지 헨리 단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는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지만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청교도 혁명 때 할머니 메리 스튜어트처럼 왕으로 처형당하고 만다.

15세기에서 16세기로 이어지는 시기 영국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메리’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여왕과 ‘엘리자베스’란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여왕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 명의 메리는 피의 여왕이란 오명을 쓰고 죽었고, 나름 한 명의 여왕은 사랑에 눈이 멀어 제대로 된 정치를 펼쳐 보이기도 전에 목이 잘렸다. 다른 한 명의 여왕은 두 명의 여왕과 경쟁하며 오늘날까지 칭송을 받는다. 흔히 영국은 여왕의 치세기간에 흥했다고들 하지만 앞서 우리는 몇 명의 여왕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치세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의 민요 <Mary Hamilton>이 이런 영국사를 반영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한 번쯤 이런 가사를 가진 노래가 어째서 <아름다운 것들>이란 제목의 노래 가사로 번안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긴 글을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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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