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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WORK

한미FTA, 그만두기 바라노라 - 2007년 03월 16일자 <경인일보>

한미FTA, 그만두기 바라노라



올 들어 한 달에 한 번꼴로 칼럼 쓰는 날이 다가오면 어떤 주제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지 여러 생각들이 난마(亂麻)처럼 갑자기 밀려든다. 몇 가지만 나열해보면 작년 한 해 뜨거웠던 인터넷 UCC 돌풍이 있었고, 창조자이자 동시에 소비자인 프로슈머들이 만든 동영상과 블로그 등 사이버 공간의 저작권 문제가 있다. 최고의 IT강국을 자부하지만 정작 지적재산권 문제 앞에만 서면 오금이 조여드는 대한민국이다. 지적재산권 문제만 하더라도 FTA를 비껴갈 수 없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찬송가나 소책자는 물론 교회 홈페이지의 배경화면, 선교 동영상도 FTA와 저작권 문제가 걸려 있다. 한미FTA가 체결되면 미국의 기독교 음악저작권업체인 기독저작권협회(CCLI)가 한국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일상의 풍경 속에서 인터넷과 개인 휴대전화 사용으로 공중전화가 사라지고, 우체통이 점점 사라진다. 아날로그적 일상 속에서 과거라면 공공영역에 속하던 많은 분야가 지극히 사적인 공간, 디지털화된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미 FTA가 체결되면 1981년 캐나다 포스트가 다국적 배송기업 UPS에 제소당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우체국 역시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나라의 공공서비스나 정책도 외국 투자자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투자자-국가직접소송제'에 의한 소송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소고기, 의약품, 방송, 부동산은 물론 의료영역에서 그나마 일반 서민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건강의료보험체계조차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다양하고 시급한 현안은 물론 겉보기에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분야까지도 FTA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다른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해도 FTA와 연관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이다.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대한민국 서민들은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수많은 외래어, 어려운 경제용어들로 골머리를 앓았다. 우루과이라운드(UR)가 농민들 가슴에 불을 질렀는가 하면 1995년엔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했고, 이후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이나 서비스교역일반협정(GATS), 도하개발의제(DDA) 등이 시도되었거나 추진 중에 있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실업과 빈곤에 대한 공포에 제압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차례 세계체제의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단단히 학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느닷없는' FTA가 우리 삶에 얼마나 무서운 변화를 가져올지 알고 있음에도 글로벌경제, 무한경쟁에서 도태될 것이 두려운 나머지 너도나도 침묵한다.

작게는 아침 밥상에서 크게는 국가기능과 세계체제에 적응하는 문제까지 우리 삶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것이 자명한 FTA가 어째서 이처럼 느닷없이 부각되었을까? 얼마 전까지 신문지상을 도배하던 WTO는 왜 쏙 들어가버린 걸까? 그 까닭은 WTO를 비롯해 앞서 이야기한 것들이 모두 다자간 협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협상이었더라도 다자간 틀에선 모든 것을 미국 의도대로 관철시키기 어려웠다. 그러나 FTA는 국가 간 일대일 협상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협상이란 서로 대등한 상대끼리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미국과 일대일로 협상한다는 건, 우리가 아닌 누구라도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전후처리 보상협상 같을 것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한국측 협상단이 미국측에게 "전쟁에 이겨 이미 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 바라노라"는 을지문덕 장군의 시까지 번역해 보냈을까. FTA, 꼭 필요하다면 해야겠지만 세계의 다른 나라들도 피하고 있는 미국과 우선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주요정당의 대선후보들은 다음 정권에서라도 FTA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임기 일년도 채 남지 않은 정권에서 충분한 대비와 공감대 형성도 없이 추진되는, 이 같은 국가중대사를 졸속으로 처리해야 할 까닭도 없지 않은가.

출처 :  2007년 03월 16일 (금) 경인일보 <프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