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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우리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 거스 히딩크

이미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스포츠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거스 히딩크 감독과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의 팬이 되었습니다. 제가 거스 히딩크와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을 응원하는 이유는 제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런 국적이나 민족을 떠나서 아마 히딩크 감독의 축구철학과 우리나라 대표팀이 거쳐온 극적인 변화의 과정 그리고 그 와중에 그들이 풍긴 인간적 매력에 감동한 까닭이 더 큽니다. 아마 제가 한국 사람이 아니었어도 그들에게 감동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히딩크 감독에 대해 제가 감동하는 다른 이유는 순전히 한국 사람이라 느끼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그가 우리 축구의 파벌주의와 우리의 편협한 민족주의,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여러 후진성들을 극복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는 그동안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 감독을 맡은이래 보여온 여러 행적들을 통해 느끼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히딩크 감독이 저를 감동시킨 인터뷰가 얼마 전 <한국경제신문>에 실렸었습니다(이 인터뷰는 원래 그의 고국인 네덜란드 <텔레그라프(De Telegraph)>지와의 인터뷰를 다시 <한국경제신문>에서 번역·발췌한 내용입니다).

- 한국팀 첫 인상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첫 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선수들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지시하는 점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했다. 유럽의 톱클래스 선수들은 스스로의 생각이 강하고 개성이 탁월하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프로라는 의식이 있을 뿐 하나의 팀으로서, 아니 한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선수로서의 사명감은 많이 떨어진다.

월드컵이란 무대를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선수들도 많이 봤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월드컵 그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무대에서 뛰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할 있다는 자세를 보여왔다. 이러한 한국선수들의 마음가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실력이 한 수 높거나 낮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실력이 떨어지면 남보다 더한 노력으로 이를 보충하면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다. 그런 점에서 한국 선수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선수들보다 우월하다. 그런 한국축구의 잠재력은 일찍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으며 내 자신을 더 채찍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 한국선수들에 대한 애정
나는 한국선수들을 대단히 사랑한다. 그들의 순수함은 나를 들뜨게 한다. 준비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어떠한 비판도 나는 수용할 자세가 돼 있다. 당신들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비판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6월을 기다려왔다. 지금 세계 유명 축구팀들이 우리를 비웃어도 반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월드컵에서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 16강 전망
한국축구는 월드컵에 다섯 번이나 진출하고도 한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좋지 않은 전적에 마침표를 찍기를 원한다. 한국이란 나라를 세계 축구의 강국으로 이끌기 위해 나는 노력할 것이고 지금도 연구하고 있다. 처음 마음먹었던 것보다 더 노력하고 있으며 그 진행은 순조롭게 이어져 왔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내게 질문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가장 궁금한 것일 수도 있다. "과연 월드컵 16강에 오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예스"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확률로 따지고 싶다.

내가 처음 한국팀을 맡았을 때 그 확률은 미미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팀은 그 어느 때보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며 그 확률을 서서히 높여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16강 진출 가능성은 매우 높다.

- 한국팀의 미래와 내 진로
세계 일류의 팀이 되길 원한다면 더욱 강한 팀과 싸워나가야 한다. 질 때 지더라도 두려움을 떨쳐내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그들과 1대1로 부딪쳐야 한다. 한국민들은 그러한 준비과정에서 나오는 패배로 인해 실망할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패배 뒤에 오는 값진 월드컵에서의 영광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월드컵에서의 승리는 내가 원하고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단순히 이번 월드컵 무대만을 위해 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궁극적으로 한국축구가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강력한 팀으로 가는 길에 작은 기여를 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내 스스로의 경력에도 플러스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큰 성취감을 얻게 될 것이다. 비록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차이가 있지만 한국은 내가 선택한 나라이며 또한 가능성이 있는 나라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나는 내가 생각한 길을 갈 것이며 마침내 이는 성공으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한다. 수십 년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생각했던 노하우나 철학들을 모두 쏟아 붓는 이번 대회에서 우리는 분명 강력한 한국팀으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한국국민들이 원하는 16강이 나의 바람은 아니다.
내게는 그 이상의 바람이 있다.

만약 6월을 끝으로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될지라도. 소중한 추억으로서 한국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그것이 영광스러운 이별이 될 수도, 불명예스러운 퇴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한국팀 감독이고 앞으로도 한국팀의 감독이라는 것이다.

* 우리들은 48년 월드컵 도전사, 그 패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나중에 차차 되짚어 볼 기회가 있겠지만 지난 반세기에 걸친 한국 축구의 월드컵 첫 승 도전은 단순히 대한민국이란 한 국가만의 도전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패배와 굴욕을 맛보아야 했던 아시아의 여러 피압박 민족들이 독립과 해방을 쟁취한 이래 그들과 대등해지기 위해 치러야 했던 총성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월드컵 첫 승이란 작은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16강에 진출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히딩크 감독이 대한민국 사회에 던져 논 작은 파문과 변화의 씨앗은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단단한 전근대적 습성들에 확실한 균열을 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거스 히딩크 감독을 통해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장점과 단점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얻었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물체를 자신의 눈을 통해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은 거울에 비춰보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울이 의미하는 것은 자신과의 솔직한 대면이 될 것입니다.  위의 히딩크 감독의 인터뷰를 읽으며 저는 많은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들도 그 거울에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2002/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