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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역사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 박태균 / 책과함께 / 2005년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 박태균 / 책과함께 / 2005년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로 있는 박태균 선생의 책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을 읽으며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나와야 할 책이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며 수백 번에 이르는 외침을 이야기하지만, 한국사적으로가 아닌 국제사적으로 의미가 큰 전쟁이라 한다면 고구려와 수의 전쟁, 제1차 조일전쟁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이다. 현재에 와서는 어느 정도 ‘한국전쟁’이라고 정리되는 듯한데, 사실 한국전쟁만큼 많은 별칭으로 불린 전쟁도 많지 않을 것이다. 동란이나 사변이란 명칭은 어느 정도 관변화된 명칭이라 할 수 있고, 학문적으로 중립적이라 할 수 없기에 요사이는 대개 ‘한국전쟁’으로 정리되고 있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얼핏 보면 사변이나 동란보다는 가치중립적으로 보일 수 있는 명칭인 ‘6.25’에 대해 의미 있는 분석을 가하고 있는데(『전쟁과 사회』, 돌베게), ‘6.25’라는 개념 규정 속에는 이미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공산당”이란 구호로 집약되는, 즉 전쟁 책임자가 누구냐? 그것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도록 강제하는 요소가 잠재해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온 나라가 전쟁 개시 일자인 6.25를 기념하고, 서울 한복판에 전쟁기념관을 세워놓고 이를 (평화가 아닌) 기념하는 기이한 결과를 만들었다. 전쟁 개시일은 기억하고, 기념해도 휴전일을 기억하는 이들은 없는 심리 구조는 우리 사회를 늘 전시체제로 몰아가고, 전시체제 혹은 전시동원체제는 군부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모든 억압을 안보로 치환하여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기이한 심리 구조를 만들어 낸다. 한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을 잠재적인 노이로제 환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한국전쟁에 대해 고민해야 할 부분은 우선 이런 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나 자신의 심리구조는 이미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책 제목에서도 드러나고 있듯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종전 협정이 아닌 휴전 협정이라는 정치현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예전의 동국대 강정구 교수 파문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전쟁은 현재 우리 사회, 남북한 모두에게 있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도 현재 진행형의 전쟁이며, 우리 사회의 지배질서를 구축한 이들의 마음속은 여전히 전시(戰時) 상황이다. 남북한의 지배계급들은 비록 이념적으로는 큰 편차를 보이지만, 분단 상황을 그들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이용했다는 점을 놓고 보자면 분단의 주범까진 아니더라도 종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박태균의 글들을 평소 여러 차례 접해왔고, 그의 입장을 대체로 알고 있는 편이므로 과감하게 입장 정리를 시도해보면 우선 박태균은 이념적으로 좌우를 막론하고 특정한 정치적 패러다임에 의존한 역사해석을 지양하는 편이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중립적이고 가능한 일일까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최소한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편이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라도 그러하기에 박태균의 『한국전쟁』을 놓고 불필요한, 소모적인 논쟁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 박태균의 개인 이력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역사 대중화라는 쉽지 않은 일을 비교적 꾸준하게 진행해 온 학자다. 그는 <인물현대사>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방송 프로그램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주 전공이라 할 수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묻혀버린 인물과 사건들을 재발견하는데 일조해 왔다. 이 책 『한국전쟁』 역시 그런 역사 대중화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편견들을 빚어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개인적인 생각 중 하나는 지나치게 일국사적인 관점에서 한국전쟁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일국사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전쟁이란, 그것도 세계 여러 나라가 참전하고,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전쟁을 동란이나 사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감정적이란 한계가 있으며,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어렵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한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강정구 교수의 접근 방식도 이런 혐의로부터 완전히(대체로 자유롭지만 일부는) 자유로울 수 없다. 또 한 가지는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만들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러시아(당시 소련), 일본, 중국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한국전쟁에 대한 감정적 찌꺼기, 이념적 혼란을 거둬내고 바라본다면 한국전쟁은 기본적으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배와 대소련 봉쇄 정책을 실행하기 위한 미국의 이해관계와 소련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그 주된 전장을 한반도로 삼은 국제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좀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의 서부개척의 역사가 완료된 이후 지속적으로 태평양 진출을 꾀한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전략과 맞물려 있다. 미국은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하와이를 병합하고, 필리핀을 식민화한 뒤 잠시 숨 고르기를 한다. 이때 미국은 유럽의 식민 헤게모니 대결이 결국 무력을 이용한 전쟁(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면서 사실상 세계 유일의 열강으로 떠오른다. 결국 미국은 일본과 아시아 패권을 놓고 태평양 전쟁을 치른 뒤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일본을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아메리카나이제이션하여 최종적인 경쟁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한반도는 그 부수적인 결과물이었으며,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이란 전쟁의 또 다른 당사자들이 실제로 한반도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반증해준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정치, 전략적으로 그다지 의미 있는 공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차원에서 한국전쟁은 물론 피할 수도 있는 전쟁이었고, 박태균 역시 그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문제는 당시 남북한의 지도층이 국제정세를 읽는 식견이 부족했고, 분단 상황이 올 수도 있는 정세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한 측면(혹은 분단 체제가 오더라도 이것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낙관이 도리어 전쟁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것이 박태균의 견해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정치 질서가 비교적 안정되어가던 시기에 벌어졌으며, 북한의 남침으로 촉발되었든, 아니든 간에 한국전쟁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일제 식민 질서가 빚어낸 미완의 민족해방(이것을 이념적으로 이해하지 마시라. 그것이 남북한 모두의 현 단계 지배계급이 원하는 바다)을 완수하려 했던 전쟁이란 것이 본질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이 책의 특기할 점 가운데 하나는 북한의 의도가 애초에 제한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쟁이 너무 손쉽게 전개된 나머지 무리하게 확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남한과 미국에 의해 반복된다.


언젠가 맥아더에 대해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충 요사이 이야기되었던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은 그의 공과와 상관없이 즉, 표면적인 이유와 상관없이 우리 사회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와 있으며 어느 부분이 한계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보수를 흉보는 거야 너무 뻔 한 이야기가 될 테니 일부 진보세력의 맥아더 동상 철거 이슈화에 대해 약간의 흉을 보자. 우선 개인적으로 철거하자는 의견엔 동의하지만 그보다는 이전하자는 쪽이다. 그들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 그들의 주장대로 철거해버리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이며, 마음의 총독부는 고스란히 둔 채, 외형상 존재하는 조선총독부 건물만 허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보다는 훨씬 더 잔인한 방법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 건물을 포크레인으로 일거에 때려 부수는 이벤트 대신에 조선총독부 건물 밑바닥을 파내어 총독부 건물이 자체의 무게로 서서히 침강해 들어가는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짧게는 한 100년, 길게는 1,000년에 걸쳐 서서히 침강해 경복궁 앞마당으로 가라앉히는 것이다. 건물 구조는 그대로인 채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건물은 그대로 온전하게 보존하고 우리는 지하에 묻힌 총독부 건물을 일제 강점기를 기억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건물은 부서졌고, 친일진상규명은 온갖 잡소리들에 시달린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란 획기적인 시도는 그 뜻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네들도 그 일이 지금 당장 시도하여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다만 균열을 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 덕분에 맥아더가 이 땅에 핵폭탄 26기를 투하하자는 과감한 주장을 했던 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나. 우리 땅에서 맥아더 동상의 철거가 더 이상 이슈로 떠오르지 않는 날이 오길 희망한다. 그때쯤이면 그 동상이 거기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우스워 보일 것이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상황이란 두 가지를 상정한다. 하나는 그것이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않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한 반항이다. 지금 맥아더 동상이 자유공원에 여태 서 있는 까닭은 이 땅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들의 사회의식이 아직 그 동상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긴 하지만, 그 동상에 거기 서 있도록 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무관심은 그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박태균은 38선 이북으로 북진이 전략적인 실패였다고 말한다. 우리는 얼마 전 인천 자유공원(개인적으로는 자유공원보다는 이전의 명칭이었던 만국공원이란 명칭을 좀더 선호하긴 하지만)의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로 촉발된 일련의 논쟁들을 통해 우리는 박태균의 이 저서가 어떻게 논거로 응용되고 있는지 살필 수 있었다. 물론 박태균의 입장과 주장이 그로부터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가깝게는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에서도 이미 한국전쟁에 대한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모두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고, 역사학계도 일반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하나의 추세로 보인다. 그 자신도 여러 저서들로부터 도움을 얻었음을 밝히고 있다.


어떤 연구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만한 연구 토대가 구축된 뒤에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이런 당연한 상식을 지금 반복하여 이야기하는 까닭은 최근 잇따라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다시학문의 자유, 양심의 자유 보다 우선하는 이념적 잣대들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태균의 『한국전쟁』은 매우 실증적인 외형을 갖추는 형식을 통해 이런 공격들로부터 나름대로 잘 빠져나가고 있다. 대중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드문 책이란 점에서 특히 돋보인다.


박태균의 『한국전쟁』이 이전의 연구들과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그가 한국전쟁의 책임을 외세에 의한 것으로만 치부하지 않는 점이다. 최근의 우리 모습을 보면 그의 이런 지적은 뼈아프긴 하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분단의 책임으로부터 우리들은 자유로운가. 우리는 최근의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해프닝들을 통해 과거사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깨우치고 있다. 역사는 과거에 묻힌 고리타분하고 퀴퀴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 기억을 위해 벌이는 기억 투쟁의 장이다. 누군가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당신의 기억을 조작하려고 애쓰고 있다. 투쟁하지 않으면 당신의 기억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될 것이다.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은 채 남이 시키는 대로만 살면 인생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