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번 소식지에 보내주신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약속드린 대로 새로운 소식지를 보내드립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이 좀 어렵다고 하셔서 원래 예정에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서적들을 소개해 드릴 예정이었는데 계획을 변경해서 만화 몇 권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요새 인기있는 만화들 중에서 나름대로 골라보았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일본 만화를 많이 본 탓인지 대개가 일본 만화군요.

대사 각하의 요리사/ 그림. 카와스미 히로시(Hiroshi Kawasumi), 글. 니시무라 미츠루 (Mitsuru Nishimura)/ 학산문화사/ 2000

최근 언론에서 많이 다룬, 어떻게 보면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만화입니다. <미스터 초밥왕>이나 <맛의 달인>과 마찬가지로 요리가 그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만화이다. 주인공 '코우'는 일본의 유명한 호텔의 프랑스 음식 전문 요리사입니다.(음, 이 '요리(料理)'란 말 자체가 일본식 한자 조어(造語)인 건 아시지요.) 그의 캐릭터부터가 좀 특이하면서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일본 만화 캐릭터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캐릭터 설명을 하기보다 그를 설명하는 것이 빠르겠군요. 코우는 호텔에서 대연회를 위한 음식을 마련합니다. 나름의 정성을 다한 것임에도 번번이 음식이 남고, 그것을 버리게 됩니다. '코우'는 이것이 요리사로서 자신의 마음을 음식에 담아 손님에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호텔은 그 시스템 상 손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는 것이죠.)

이때 그를 설득하려고 하는 나이 많은('나이 많은'과 '경험이 많은' 혹은 '현명한'이란 말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요) 주방장은 그에게 음식이란 것은 최고의 재료를 써서 최고의 요리사가 만드는 것이면 그것이 최고라는 식으로 그를 설득하려 합니다. 이곳을 떠나서 그렇게 좋은 재료를 풍족하게 쓸 수는 없다는 것이죠. 이것을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 만화의 작자는 만화를 통해 현재의 일본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해서 일종의 반성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품 경제의 위력이 사라지면서 일본 사회도 우리와 비슷한(물론 그 강도는 우리보다 훨신 더 약한 것이지만)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일본이 자랑했던 '평생직장의 신화'는 우리보다 일본 사회에서 먼저 깨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아마도 이 만화의 작가는 일본이란 사회의 시스템이 너무 꽉 짜여 있어서 마치 '공무원들의 사회'인양 변화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 시스템 속에서 창의적인 인간이나 인간적인 면모를 찾고자 하는 인간은 숨이 막히기 마련입니다.(이런 일련의 반성들은 최근 국내에서 개봉되었던 두 편의 일본 영화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춤추는 대수사선>과 <포스트맨 블루스>가 역시 그런 류의 비판들을 약하게나마 하고 있다.)


어쨌든 코우는 그런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베트남 주재 주일대사관의 요리사가 됩니다. 인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그의 요리 역정이 시작되는 셈이지요. 나머지 소개는 별로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만화에도 역시 일본인의 정서가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같은 유교권 문화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때로 공감하면서도 때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 말입니다. 그저 그런 요리만화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이 만화를 보다가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 어쩌면 외면하고 싶은 소재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건 제6권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물과 기름」의 내용이 베트남 주재 한국 대사와 베트남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전 참전 중 가했다고 하는 잔학행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감히 일본놈이 이런 문제를 들고 나오다니' 라는 식의 어쩔 수 없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이 만화는 우리의 그런 인식을 살짝 빗겨가고 있습니다. 베트남 주재 한국 대사인 공 대사와 일본인 기자 미우라가 나누는 대사를 옮겨 봅니다.



공대사: 당신이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대체 뭔가?
미우라: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무슨 짓을 했는가, 하는 겁니다.
공대사: 전쟁이지. 그밖에 뭐가 있겠나! 1965년 2월 미국의 요청에 의해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타국으로 진주했지. 우리 한국군은 1973년까지 베트남에 머물면서 약 11,700회에 걸친 대규모 전투와 55만 6000회의 소규모 군사행동을 하고, 적 4만 1000여명을 살상했네. 그리고 우리측도 4400여명의 사망자를 냈지.
미우라: 대체 뭣때문에 파병한 겁니까?
공대사: 돈 때문이야. 미군은 파병하는 조건으로 몇억달러의 돈을 내세웠어. 그 무렵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후의 경제난과 혼란 속에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미우라: 즉, 비지니스였다는 겁니까?
공대사: 많은 군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싸웠네. 일본인인 자네들은 모르겠지만 한국도 전에 타국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인지라 남베트남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거든. 나는 대학을 나오자마자 남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참전을 지원했네.
미우라: 그 신념은 베트남에 와서는 변치 않던가요?
공대사: 아니....속았다는 걸 알게 됐지. 우리는 제2의 한국전쟁에 가담되어 있었던 거야. 우리는 미국의 전쟁에 아니 기만과 침략에 그대로 휘말려 든거야.
.............중략..............
미우라: 당신은 어째서 미국에 대해선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겁니까? 일본만 걸고 넘어가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대사: 이제 됐네. 자네에겐 무슨 소릴해도 소용없어.....쿠라키 대사. 역시 우리는 영원히 물과 기름으로 남겠군요.



끝까지 말씀드리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이만 줄입니다. 이 일본 만화의 내용이나 작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남벌>과 같은 만화에 빠져 있을 때 일본의 젊은 만화가들은 좀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시아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 시장에 출판되고 있는 대개의 일본 관련 서적들을 살펴보면 어느 한 극단만 있지, 객관적이다란 말을 붙이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피해의식과 콤플렉스의 일단이기도 합니다. 일본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조차 일본에 대해 뿌리깊이 남아있는 인식 중 하나는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이란 망령일 겁니다. 그것은 일본의 우익이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 맞물려서 그 우려를 더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만화(와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에토스ethos)들은 그런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만화들 중 상당수는 일본의 경제와 정치 그리고 문화를 움직이는 시스템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집단, 마치 프리메이슨과 같은 비밀 결사조직이 있으며 그들에 의해 세계지배 혹은 아시아 지배전략을 착착 진행시켜가고 있는 것처럼 다룹니다.


그러나 일본이란 사회가 군국주의의 부활이란 우려를 완전히 떨칠 수 있을 만큼 선진화되어 있는 나라도 아니지만 그 반대로 군국주의 부활을 막아내지 못할 만큼 시민사회 형성이 형편없는 곳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SOFA개정과 관련한 일련의 투쟁 과정 중에서 믿음직한 동지를 얻는 성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오키나와의 일본 주민들이었습니다. 다음은 일본과 우리의 의식의 차이 중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200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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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늦은 가을에 추천드리는 미술관련 서적 3권이 있습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계실 것 같기는 하지만 ....

루브르 계단에서 관음, 미소짓다/ 박정욱 지음/서해문집/12,000원

저자 박정욱은 동서양의 미술의 접점을 혹은 감히(?) 비교하는 행위를 이 책 속에서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대중적으로 쓰인 미술관련 서적 중에서도 상당히 성공적으로 이 두 가지 주제를 잡아내고 있다. 이 책은 시대와 공간, 장르를 초월하여 각각의 미술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찾아보려 시도하고 있다. 신의 모습, 인간의 아름다움, 산과 강 등 주제에 따라 서양화와 한국화를 나란히 놓고,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려 한다.

예를 들면, 고려시대의 불화인 '수월관음도'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암굴의 성모'는 둘 다 종교적인 열정으로 그려낸 신의 이미지이다. 이 그림들에서 관음과 성모는 둘 다 베일로 몸을 가리고 오른손을 길게 뻗었으며, 아래를 향해 반쯤 뜬 눈으로 자비심을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성스러운 인물의 가장 아름다운 전형인 셈. 다만 성모의 얼굴은 인간적인 슬픔의 감정과 겸손함을 담고 있는 반면, 관음의 얼굴은 모든 인간적 가치로부터 초월한 해탈의 이미지이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서양 문화 자체가 해탈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해석한다.

쉽고 재미있는 미술책이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도판이 컬러가 아니라는 점이긴 하지만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신경 쓴 책 만드는 이로서도 굉장히 예쁜 책이라고 칭찬해주고 싶은 책이다.



미술과 문학의 만남/ 이가림 지음/ 월간미술/12,000원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의 시인이자 현재 인하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있는 이가림 선생이 오랫동안 <월간미술>에 기고하였던 내용들을 묶어 책을 냈다. 제목에서도 보여지듯이 미술을 앞에 두고 그에 걸맞은 작가들을 어울리게 하는 것인데 깊이있는 내용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사실들이나 글읽는 재미만큼은 만끽할 수 있는 내용이다. 특히 프랑스의 시인인 폴 엘뤼아르는 '파블로 피카소'라는 제목의 시에서 "해맑은 하루 나는 만났다 낙천적인 얼굴의 친구"라고 쓰고 있다.

피카소는 그의 시집 <사랑ㆍ시>의 삽화를 그렸고, 사상적으로 엘뤼아르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림과 시를 통해 스페인 내전과 그 와중에 있었던 게르니카에서의 학살을 고발한다. ''그림' 속의 문학, '문학' 속의 그림을 찾아나선 예술여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피카소와 엘뤼아르처럼, 장르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교감을 나눈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피카소와 엘뤼아르처럼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사람들에 대한 것도 있고, 플로베르와 쿠르베처럼 실제 교우관계는 없었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사실주의'를 확립했던 사람들의 예술관을 비교하는 글도 있다.



천천히 그림읽기/조이한, 진중권 지음/웅진닷컴/10,000원

조이한, 진중권 씨의 공저 성격의 글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글의 전체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조이한 씨이다. 진중권의 글은 뭐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와 같이 다소 거친 뉘앙스를 풍기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이 사람의 <춤추는 죽음1,2/세종서적>와 같은 책은 근래 보기드문 미술관련 사적 중에서도 수작이다. (근간이 아니기 때문에 별도의 소개는 하지 않겠습니다.) <천천히 그림읽기>는 일반인 보기에는 다소 어렵고, 어느 정도 숙련된(미술에 대해서) 사람에게는 다소 쉬운 정도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진중권은 앞서 말한 책에서 그림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물론 서양그림이다.)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도상학'이라는 것이다. 그것에 관한 입문서가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천히 읽어보시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실 것 같다.

* 다음번에도 역시 미술관련서적에 대한 촌평을 함께 보내드리고자 한다.
부디 기다려지는 소식지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총총히
<2001. 7.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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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회생의 걸림돌: 대우차의 취약한 기술능력과 취약한 사업구조-이익구조>

하지만 만에 하나 이와 같은 혁신적인 기업권력(지배구조)이 새로 탄생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우차는 여전히 18조6천억이라는 막대한 부채의 문제를 채권은행과 협상하여야 하고 독자생존에 대한 채권단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또한 설령 부채의 대부분을 탕감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도 대우차의 독자생존을 향한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사명은 생산력 발전, 구체적으로는 대공업 및 그와 연관된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으며,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가 이룩한 이러한 역사적 성과를 이용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한국의 재벌체제는 많은 경우 과학기술(생산력)에 관한 자본의 기본적인 역사적 사명조차 방기하여 왔다 (그렇기에 한국경제는 '합리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노력이라는 모더니즘적 과제를 아직도 진행형으로 가지고 있다). 대우차에서 김우중의 세계전략은 기형적인 기술혁신 시스템을 남겨놓았다.
김우중은 생산규모의 확장, 생산력의 양적 (세계적) 확대에만 치우친 나머지, 그 질적 내포적 축적을 대단히 소홀하였다. 4차종의 모델을 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체의 개발에 치중하였을 뿐이며 자동차 기술의 70%를 차지하는 플랫폼(샤시와 엔진, 기어 등)의 독자 개발을 위한 노력을 의도적으로 경시하였으며, 또한 개발과정에서 필수적인 각종 시험 (주행시험장 포함)을 위한 시설과 능력의 양성에 태만하였다.

대우차가 독자생존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부채로 인한 금융비용 부담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바로 그 뛰어난 기술력, 품질력, 이익창출력으로 오뚜기처럼 부활하여 경영정상화를 이룰 잠재능력이 풍부하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그런데 대우자동차는 낮은 기술능력과 품질, 브랜드 신뢰성, 그로 인한 낮은 영업이익구조와 원가구조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다. 대우차는 99년 상반기에 이미 3500억원의 적자를 보았고 워크아웃 방침이 결정된 하반기 이후에는 적자규모가 그 배로 늘었으며, 올해 2000년 들어와서는 더욱 악화되어 상반기에만 총 1조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적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국내외에서의 대규모 할부 판매 때문이다.
99년까지도 대우차의 각종 시험설비 수준은 현대자동차의 80년대 중반 수준, 여타 개발능력은 현대의 90년대 초반 수준이다. 따라서 현대자동차에 비해 약 5-10년의 기술격차가 난다. 만약 독자회생을 추구한다면 이 격차를 향후 5-10년간에 걸쳐 최고의 기술학습 속도로 좁히지 않으면 안된다. 자동차산업과 같은 기계공업군에서 기술능력과 품질능력 발전은 압축적 성장이 곤란하다. 그 노하우의 대부분이 이론보다는 경험에 더 의존하는 까닭에, 경험과 경륜이 점진적으로 쌓이는데 필요한 시간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는 향후 5-10년의 시간 동안에는 현재의 취약한 사업구조, 이익구조가 단지 점진적으로만 개선된다는 뜻이다.
물론 기술능력도 중요하지만 조직문화 혹은 기업문화의 혁신을 통해 대우차의 흑자전환은 훨씬 앞당겨질 수도 있다. 마티스와 같은 히트 모델이 세 네 개 연달아 발표될 수 있다면 2-3년 뒤부터 흑자 전환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대우 마티스, 기아 카렌스나 카니발의 성공은 기술능력보다는 상품기획에서 마켓팅까지에 이르는 조직관리의 성공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대우차의 전면적 조직혁신이 필요했다. 김우중을 비롯한 대우차 최고경영진은 (주)대우 출신이며, 따라서 상인자본가의 관점이 대규모 산업기업을 좌우하는 질곡을 작용하였다. 대우차의 전략, 조직관행, 사업방식은 모두 기본적 틀에서 국제무역 조직에나 적당한 김우중 식의 (주)대우 문화였다. 또한 엄격한 수직적 권위주의는 자동차와 같이 2만개에 이르는 복잡계 제품을 제조하는데 필요한 수많은 인간, 조직들간의 수평적 자율적 상호관계, 의사전달 시스템과는 전혀 맞지 않는 질곡이었다.


<수동적인 중간층, 독자생존 가능성의 포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독자생존을 향한 기대를 접게끔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었으니, 무엇보다도 대우차의 독자생존을 노력의 궁극적 주체이어야 할 사무관리직과 현장노동자들의 내부 동향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중간층 사무관리직, 연구직들이 기아차의 경험처럼 노동조합과 힘을 합쳐 회사의 독자생존을 위해 대내외적으로 힘차게 움직이기를 기대하였지다. 하지만 대우차에서 그런 조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무관리직, 연구직들의 대부분은 회사의 장래 운명에 대해 매우 수동적이었다. "누가 주인이 되건 월급만 나오면 그만"이라는 비주인적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대우차의 경영진, 중간관리직, 노동조합은 3갈래로 찢어져 서로 대립하였고, 그 누구도 회사의 독자생존이라는 엄청난 험로를 해쳐나갈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비전과 전략을 제시할 능력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회과학에서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라는 용어가 쓰인다. 기업의 경우 경로의존성은 장기간에 걸쳐 역사적으로 형성된 조직관성, 업무관행, 사고패턴이 "관성"으로서 맹목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기아차, 현대차에서와는 달리, 대우차에서는 중간관리직 연구직만이 아니라 이사, 전무, 사장조차도 총수인 김우중의 독점적인 의사결정으로 인하여 회사의 비전과 전략의 창출 업무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으며, 오랜 세월, 이런 조직관행에 순응하여 생존하고 승진하여 왔다. 따라서 이런 '관성'을 젖어 있는 최고경영진과 중간관리직에게 험난한 독자생존을 향한 전략과 비전을 제시할 투철한 의지와 날카로운 판단능력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노동조합이 해외매각 반대, 공기업화를 독자생존을 주장하긴 하였지만, 노동조합이 대내외적으로 지원세력과 협력하여 경영진을 새로이 조직하는데 스스로 앞장서고 이들과 함께 채권은행과 협상하면서 장단기 생존전략을 창출하기 위해 재무, 기술, 조직 등 모든 측면에서 함께 책임지고 나서려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주식시장형 금융 경제 개혁은 국민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간다>

물론 대우차의 독자 생존을 힘들게 하는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채권은행들의 태도이다. 여기서 문제는 과연 채권은행들이 대우차가 비로소 흑자를 낼 수 있는 빠르면 2-3년 길게는 5년의 기간을 기다리는 '참을성 있는 투자가' (patient investor)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는 금융개혁 및 경제개혁의 기본 요체는 미국식 주식시장 자본주의인데, 그것의 본원적 특징은 '단기주의'(Short-Termism)이다. 일체의 경제활동이 주식가격으로 산정되어 '주식 매매 차익'을 중심으로 평가되고 따라서 주가시세의 하락을 조금도 용납지 않으려는 주주가치(Shareholder Value) 자본주의의 이념을 향해 금융개혁과 기업지배구조 개혁이 추진되는 한, 그 어떤 은행도 자사 주식가격을 떨어뜨리는 모험적인 장기투자를 감행할 수 없다.
현 정부의 금융개혁은 단기주의적 주식시장의 설립에 관한 한 목표를 초과 달성하였다. 한국은 이미 인터넷을 통한 초단기 주식거래 (day trading)에서 미국을 능가하여 세계최고 (총 주식거래의 50%를 상회) 수준이다. 수백만명의 직장인들이 생산적 활동보다는 초대형 도박성 머니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초)단기주의적 증권/금융시스템 (금융자본)을 근저에서 지탱해줘야 할 기업시스템(산업자본)은 아직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 금융자본에 개방된 주식시장 자본주의에서는 지구적 금융자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도로 평균 이상의 높은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그런 기업들은 신속하게 퇴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들 불량기업에 잠재적 현실적으로 잠겨 있는 금융자본을 해방시켜 주식시장에 공급함으로써 총주가의 상승과 특히 우량 기업 주가의 추가적 상승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현재 조건에서 금융자본이 요구하는 수익기준에 따른 글로벌 기준치(Global Standard)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업은 삼성전자, SK텔레콤, 포항제철, 한국통신 등 불과 몇 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대 대다수 불량 대기업들은 퇴출 혹은 해외매각되어야 하는가 ? 그럴 경우 한국의 실물경제 즉 산업경제(산업자본)는 누가 담당하는가 ? 물론 벤처기업들이 창출되고 성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99년에도 전체 수출의 단 3%도 차지하지 못할 만큼 국민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여전히 산업생산(산업자본)의 대부분, 수출의 대부분은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등을 담지하는 재벌계 대기업들이 이끌고 있다.
금융자본과 달리 산업자본은 일거에 해체, 재편성될 수 없다. 화폐로만 이루어진 금융자본과는 달리 그것은 돈과 인간과 조직, 기술, 문화가 결합된 강고한 구성체이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으로서의 벤처기업이 국민경제를 주도한다는 원대한 목표는 앞으로 최소한 10년 혹은 20년은 기다려야 할 장기적인 과제이다. 그 장기간의 과도기에 국민경제가 계속해서 최소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량 대기업들을 우량 대기업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장기적인" 노력을 하여야 마땅하지 않은가 ? (초)단기적인 수익기준, 주가기준을 핵심가치로 하여 진행되는 현재의 은행 금융시스템 개혁을 중지하고, 주식가격 하락과 몇 년간의 손실을 감내하면서 수행되는 "장기적인 산업투자"를 금융시스템이 담당하는 새로운 대안적 방향으로 개혁 방향을 선회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
고유가로 인한 자동차 업종의 세계적 경기 후퇴조짐을 볼 때, 유일한 해외매각 희망인 지엠이 대우차를 인수할 가능성은 점점 더 적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현 정부와 채권금융기관들은 해외매각이 불발되었을 경우 어떤 방식으로 대우차를 독자생존시킬 것인지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미소간의 냉전을 종식시키고 평화공존을 달성한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집권기에 추진된 "500일 전투"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시장경제로의 충격적인 이행은 결국 실패하였고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서민들이 가장 경멸하는 지도자로 전락한지 오래다. 한국의 김대중은 남북한간의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IMF의 지도 하에 그가 추진한 주식시장 자본주의로의 충격요법적 이행은 삐걱거리면서 연이은 위기를 낳고 있다. 은행과 화폐소유자들에게는 돈이 넘치는데 기업들은 자금부족으로 허덕거리고 언론은 11월 위기를 전망하고 있다.
한국경제에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간의 불일치, 부조화가 존재하는 한, 빠르게 글로벌화되는 한국 금융/주식자본이 여전히 장기적으로 민족적 특질들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산업자본과 충돌하는 한, 이런 식의 경제위기는 앞으로도 장기간에 걸쳐 매년 되풀이 될 것이다.
<200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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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매각론을 둘러싼 금융자본 입장과 산업자본의 입장의 차이>

김대중 대통령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즉시 대우차의 해외 매각, 특히 지엠(GM)으로의 매각을 해법으로 들고 나왔다. 미국식 주식시장 자본주의의 이념이 풍미하는 이 시대에 "실패한 기업은 M&A의 대상이고, 국내에 대기업을 구매할 주체가 마땅히 없는 까닭에, 해외 매각은 당연"하다는 결론이었다. 현재 경제정책을 좌우하는 경제관료와 경제학자들의 대부분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산업자본을 이익을 희생시키면서라도 금융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그 요체이다. 기업과 산업, 나아가 국가경제의 사활을 좌우할 중대한 의사결정에서 이것은 오직 금융적 이해관계, 금융산업의 이해관계 하나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놓는다.


금융자본은 바로 자본중의 자본 즉 돈 그 자체의 운동이다. "돈이 돈번다" 원리가 전부이며, 인간이 차지할 자리는 여기에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경제시스템은 돈(화폐)만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 "돈만으로는 않된다"는 원리는 금융자본이 아닌 산업자본의 영역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산업기업의 현장에는 공장의 노동자들, 연구소의 과학기술자들, 그밖에 관리자들, 세일즈맨들 등등 피와 살을 가진 인간들이 등장한다.
화폐 그 자체가 국적을 버리고 국경을 넘어 초국적화하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다. 원화를 달러화로, 엔화로, 마르크로 무제한으로 바꾸는 일은 각국 정부의 외환규제 장치를 법제도적으로 바꾸는 '간단한' 조치에 의해서도 실현 가능하다. 따라서 세계화(Globalization)의 주도세력은 바로 화폐자본, 금융자본이다. IMF 금융위기는 김영삼 정부가 무분별하게 실시한 외환자유화, 금융개방조치에 의해 야기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금융자본처럼 간단하게 국적을 버릴 수 없다. 물론 노동이 '순수한' 비숙련 노동 (주류경제학이 말하는 순수한 '생산요소'로서의 노동)으로서만 간주되는 그런 산업에서는 산업자본 역시 싼 임금과 최악의 노동조건을 찾아 세계 구석구석을 전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섬유, 가발, 신발공장들이 한국에서 방글라데쉬로 이전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산업자본이 반숙련, 숙련노동자와 나아가 연구개발 과학기술자들, 우수한 관리자들을 필요로 하고 이들 '인간'에게 의존하게 되면 자본은 더 이상 마음대로 국경을 넘을 수 없다.
예컨대, 독일과 일본의 장인적 숙련공들과 기술자들에 의존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부품소재 제조업의 산업자본은 한국 혹은 미국으로 한순간에 이전될 수 없다. 이들 고급노동력의 존재는 그곳에 존재하는 전사회적 산업적 차원의 산업교육훈련 제도와 기술혁신 시스템과 뗄 수 없게끔 결부되어 있다. 이런 국가적 산업/기술 시스템 (national industrial and technological system)의 형성과 발전에는 수십 년간의 집요한 노력 혹은 백년대계가 요구된다.
김대중-이헌재가 한국에 이식하기를 꿈꾸는, 실리콘 벨리형 벤처기업이 주도하는 신경제 역시 실리콘 벨리와 결부된 미국의 과학기술 연구 및 교육시스템과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엄청난 국방연구와 비실용적 기초연구라는 '민족적'(결코 '지구적'이지 않은) 자산의 백년대계적 축적 노력 없이는 곧 한계에 부딪힌다.
금융자본과는 달리 산업자본의 지구화(Globalization)는 일정한 민족적, 시간적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산업자본의 세계는 매일 수조 달러가 더 높은 이윤을 찾아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 화폐의 세계, 매 시간 단타매매 (day trading)를 통해 주식시장을 전전하는 주식자본, 화폐자본의 세계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99년 8월 이후 내가 대우차를 바라본 관점은 우선은 이와 같은 산업자본의 관점에서였다. 따라서 지엠으로의 대우차 매각은 철저하게 반대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미 80년대에 있었던 '종속이론' 관련 논쟁에서 이루어진 자동차산업에 관한 실증연구들을 통해, 독자기술의 발전을 추구했던 현대차와는 달리, 대우차에서는 독자 기술능력의 발전이 지엠에 의해 좌절되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또한 나는 대우차 직원들과의 면담을 통해 92년 결별 이전에 지엠이 어떤 방식으로 모델의 독자개발을 가로막았었고 또한 품질개선을 위한 제품/공정 설계변경이 어떻게 가로막혔는지에 관하여 추가적인 발견을 할 수 있었다. 김우중의 세계경영 전략은 대우차가 현재의 최악의 사태로 빠져들게 된 기본 요인이다. 하지만 20년간 계속된 지엠의 식민지 경영적 사업 행태는 바로 대우차의 현 취약성을 근저에서 만들어 냈다. 그런 원죄를 지닌 지엠이 다시 개선장군처럼 대우차에 무혈입성한다는 것은 한국자본주의의 합리적 발전을 위해서도 저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



<해외매각도, 재벌경영도 아닌 대안은 ? >

김우중의 재벌경영은 이미 파산했다. 해외 자본도 않된다. 그렇다면 누가 대우차를 맡아야 하는가 ?
이 의문에 대해 당시 대우차의 한 직원은 하나의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대우차 회생의 깃발을 들 주체는 지엠도, 삼성도 아니며 김우중의 후계자들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깃발을 들어야 한다". 나 역시 이 의견을 지지하였다. 대우차의 직원들과 노동자들이 대우차의 지배와 경영의 주체로서 나서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대우가 가진 문제는 단지 '화폐' 즉 재무금융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대우차의 '인간' 즉 조직과 기업문화 역시 큰 위기 상태에 있었다. 김우중의 1인 황제식 경영은 대우차 내부에 치명적인 조직상의 충돌, 마찰, 책임회피, 무기력, 좌절, 분노 등을 낳았다.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마티스의 4차종 동시개발과 함께 기술능력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성장하는 기술능력(생산력)은 김우중 회장이 만들어놓은 기존의 조직체제와 기업문화(생산관계)과 충돌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가로막히고 있었다. 대우차 역사에서 신세대라고 할 수 있는, 4차종 동시개발을 경험한 젊은 중간급 관리자와 연구개발자, 기술자들은 김우중의 절대황제적 권위를 뒤에 업은 불합리한 경영진의 행태에 대한 좌절과 분노로 회사 전체의 조직은 이미 워크아웃 이전에도 마비증상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신세대 중간층 경영관리자, 연구개발자 등이 대우차의 기존 경영진을 대체하여 올라서고, 스스로의 비전에 맞게 새 최고경영진을 구성하여야 했다. 일본은 전쟁후 47년 재벌시스템을 해체함에 있어, 재벌과 연관된 상층 경영진 거의 모두가 퇴진하고 재벌경영과 무관한 젊은 중간층 경영자들이 최고경영진으로 일거에 상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역시, 재벌시스템을 해체함과 동시에 해외 매각에 의존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대안은 오직 이와 같은 방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사무관리직 중간층과 현장 노동자들과들이 서로 단결하여 기존의 재벌식 경영진을 몰아내야 했다.
하지만 주어진 불리한 정치사회적인 세력관계에서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 나아가 과연 사무관리직 중간층에, 현장 노동조합에, 대우차의 기업권력(지배구조)을 혁명적으로 뒤바꾸는 이런 대범한 일을 행할 의지와 능력이 있을 것인가 ?
<200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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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대우자동차 노동자는 죄인이 아니다.

제2의 IMF니, 또다시 실업자 대란이니 하는 듣기도 싫은 이야기들이 2000년 연말의 우리나라를 유령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울한 이야기들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대우자동차> 문제입니다.

지난 11월 9일 대우자동차가 결국 최종부도 처리된 가운데 우리 사회의 언론들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셈인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두 번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대우자동차 부도의 최종 책임이 마치 노조가 동의서를 써주지 않은 탓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대우자동차 노조의 잘못인가 우리는 한 번쯤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문제가 이렇게 까지 된 데에 노동자들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어른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 놓고, 동승한 어린이에게 그 책임을 미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론 옆에 같이 탄 동승자에게도 책임을 묻는다는 차원에서라면 어느 정도 동의할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라도 역시 음주운전을 한 어른에게 먼저 책임을 묻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자 정상적인 사회에서 할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모든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묻고 있습니다.(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프랑스 니스의 별장에서 베트남인 바둑 기사를 초빙해서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에)
다음은 대우자동차 매각과 관련하여 저희 잡지에 실린 글의 일부를 발췌하여 게재한 것입니다.(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로서는 이 분의 글 이상 쓸 재주도 없고, 이 분의 글 내용에 대해 전면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약간의 이견은 있으나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므로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지식기반 경제와 대우차 문제

정승일

내가 대우차와 인연 아닌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작년 봄부터였다. 박사논문으로 "한국 재벌 지배-경영구조의 붕괴과정 - 자동차 산업의 사례"에 관해 쓰기 위해서 현대차, 대우차, 기아차, 쌍용차, 삼성차 각각의 소유지배구조, 경영전략, 조직관행, 기술전략에 대한 실증조사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차 이외에는 거의 아무런 기성의 실증조사도, 문헌연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의 공업화 성공과정을 대표하는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포항제철 등등의 기업에 대한 실증조사와 연구논문들은 이미 많이 있었다. 그런데 소수에 불과한 이들 성공 대기업들의 사례 이외에, 잠재적 현실적으로 실패한 압도적 다수의 재벌계 대기업들에 관해서는 거의 연구가 없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한국의 산업성공을 이른바 "산업/기술적 추격과정(catching up)"으로 설명하는 기존의 지배적 학설이 지닌 불가피한 이론적 한계이기도 하였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에도 대부분의 연구논문과 실증조사가, 현대자동차를 한국자동차 산업과 동일시하면서, 마치 한국 자동차 산업 전체가 성공하고 있는 양 묘사하고 있다. 대우차와 기아차의 경영 전반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노동운동과 관련된 자료가 훨씬 풍부하였다. 각사 노동조합의 단체협상 관련 연구와 노동과정 연구, 그리고 관련 중소 부품납품기업의 하청구조에 관한 연구에 관해서는 상당한 자료가 있었다. 하지만 대우차와 기아차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좌우할 각 기업 재벌총수 최고경영자들의 경영전략, 조직전략 일반에 관해서는 홍보용 자료들 이외에는 체계적인 연구가 거의 없었다. 그 많은 경제학자, 경영학자들은 무엇을 그동안 한 것인지.

한국의 경제학 및 사회과학의 한계의 하나로, 산업 차원의 연구만이 있었을 뿐, 더 나아가 개별 기업 차원의 연구는 거의 이루진 것이 없었다. 이런 빈약한 지식기반 위에서, 예나 지금이나 대우차와 관련한 정부 정책은 아무런 체계적인 조사나 심층적 연구도 없이, 몇 몇 실세 있는 학자들 혹은 유명 국제컨설팅 업체들의 피상적인 조사보고서에 근거하여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듯 김대중 정부의 경제관료와 정책결정자들은 국정 슬로건의 하나인 이른바 '지식기반 경제'의 상식적 기초원리를 스스로 짓밟고 있다. 대우차의 포드로의 매각 실패 이후 우왕좌왕하면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경제관료들과 실세 학자들의 추태는 현 정부의 '지식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전형이다.

기성의 조사문헌이 없는 한, 직접 회사 내부로 들어가 조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구조사를 목적으로 대우차 경영진에게 공식 면담과 자료제시를 신청하려 하였지만, "그들이 코웃음칠 것"이라는 주위의 충고를 듣고 그만두었다. '개인적인 연줄'을 이용하는 것 이외에, '공적인 연구조사'는 한국의 어떤 세계일류 기업도 흔쾌히 허락하지 않는다. 더구나 문제 많은 대다수 대기업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른바 '지식경영'을 유행처럼 입에 올리고 있지만, 대기업 경영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지식기반의 창출과 이용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경영하고 있다.


<대우 그룹의 붕괴>

다행히 93년을 전후하여 대우그룹에 입사한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다. 93년이라는 시점은 의미가 크다. 93년 3월, 김우중은 대우차 부평공장에서 이른바 "세계경영"을 선포하였다. 당시 연 40만대 생산에서 불과 4년 뒤인 97년에 대우차는 국내외 연 생산 200백만대로 사상 유례없는 대확장을 하였다.
99년 6월, 처음으로 부평공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대우차의 속사정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는 삼성과 대우간의 자동차, 전자 빅딜에 관한 소식이 있었고, 98년 말 일본 노무라 증권의 보고서에 대우그룹 재무위기에 관한 소문이 내가 알고 있던 전부였다. 그런데 대우차 내부에서 나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대우차와 대우그룹 전체가 이미 재무금융과 조직, 인간관리, 해외경영 등 모든 측면에서 썩을 대로 썩어 곧 붕괴하리라는 놀랄만큼 만연된 체념이었다. 매달 1천억원이 넘는 상환불능 만기채무가 이미 도래하고 있었다. 기아그룹의 12조원 부실이 초래한 IMF 한파의 타격을 생각할 때, 70조원에 이르는 부실을 안고 대우그룹이 붕괴할 때 도래할 파국적 사태는 상상의 범윌르 넘어섰다. "설마,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겠지. 이들 직원들이 과장하는 것이겠지"라고 나는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런데 불과 한달 뒤인 8월 초, 현실은 가혹했다. 삼성과의 빅딜이 무산되자마자 대우그룹 전체는 부채상환 불능 상태에 빠져 전계열사들이 워크아웃 상태에 들어갔다. 대우차는 부채 18조6천억원, 자산 12조 6천억원으로, 마이너스 6조의 자본잠식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주)대우 역시 20조원이 넘는 부채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김우중 회장은 23조원에 이르는 세계역사상 최악의 분식회계라는 범죄까지 저질렀다. 600억 달러의 대우관련 부실 채무는 채권은행들과 대우의 회사채를 보유한 투자신탁업체들을 연쇄 위기에 빠뜨렸다.


<해외 매각론을 둘러싼 금융자본 입장과 산업자본의 입장의 차이>

김대중 대통령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즉시 대우차의 해외 매각, 특히 지엠(GM)으로의 매각을 해법으로 들고 나왔다. 미국식 주식시장 자본주의의 이념이 풍미하는 이 시대에 "실패한 기업은 M&A의 대상이고, 국내에 대기업을 구매할 주체가 마땅히 없는 까닭에, 해외 매각은 당연"하다는 결론이었다. 현재 경제정책을 좌우하는 경제관료와 경제학자들의 대부분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산업자본을 이익을 희생시키면서라도 금융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그 요체이다. 기업과 산업, 나아가 국가경제의 사활을 좌우할 중대한 의사결정에서 이것은 오직 금융적 이해관계, 금융산업의 이해관계 하나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놓는다.


금융자본은 바로 자본중의 자본 즉 돈 그 자체의 운동이다. "돈이 돈번다" 원리가 전부이며, 인간이 차지할 자리는 여기에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경제시스템은 돈(화폐)만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 "돈만으로는 않된다"는 원리는 금융자본이 아닌 산업자본의 영역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산업기업의 현장에는 공장의 노동자들, 연구소의 과학기술자들, 그밖에 관리자들, 세일즈맨들 등등 피와 살을 가진 인간들이 등장한다.
화폐 그 자체가 국적을 버리고 국경을 넘어 초국적화하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다. 원화를 달러화로, 엔화로, 마르크로 무제한으로 바꾸는 일은 각국 정부의 외환규제 장치를 법제도적으로 바꾸는 '간단한' 조치에 의해서도 실현 가능하다. 따라서 세계화(Globalization)의 주도세력은 바로 화폐자본, 금융자본이다. IMF 금융위기는 김영삼 정부가 무분별하게 실시한 외환자유화, 금융개방조치에 의해 야기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금융자본처럼 간단하게 국적을 버릴 수 없다. 물론 노동이 '순수한' 비숙련 노동 (주류경제학이 말하는 순수한 '생산요소'로서의 노동)으로서만 간주되는 그런 산업에서는 산업자본 역시 싼 임금과 최악의 노동조건을 찾아 세계 구석구석을 전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섬유, 가발, 신발공장들이 한국에서 방글라데쉬로 이전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산업자본이 반숙련, 숙련노동자와 나아가 연구개발 과학기술자들, 우수한 관리자들을 필요로 하고 이들 '인간'에게 의존하게 되면 자본은 더 이상 마음대로 국경을 넘을 수 없다.
예컨대, 독일과 일본의 장인적 숙련공들과 기술자들에 의존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부품소재 제조업의 산업자본은 한국 혹은 미국으로 한순간에 이전될 수 없다. 이들 고급노동력의 존재는 그곳에 존재하는 전사회적 산업적 차원의 산업교육훈련 제도와 기술혁신 시스템과 뗄 수 없게끔 결부되어 있다. 이런 국가적 산업/기술 시스템 (national industrial and technological system)의 형성과 발전에는 수십 년간의 집요한 노력 혹은 백년대계가 요구된다.
김대중-이헌재가 한국에 이식하기를 꿈꾸는, 실리콘 벨리형 벤처기업이 주도하는 신경제 역시 실리콘 벨리와 결부된 미국의 과학기술 연구 및 교육시스템과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엄청난 국방연구와 비실용적 기초연구라는 '민족적'(결코 '지구적'이지 않은) 자산의 백년대계적 축적 노력 없이는 곧 한계에 부딪힌다.
금융자본과는 달리 산업자본의 지구화(Globalization)는 일정한 민족적, 시간적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산업자본의 세계는 매일 수조 달러가 더 높은 이윤을 찾아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 화폐의 세계, 매 시간 단타매매 (day trading)를 통해 주식시장을 전전하는 주식자본, 화폐자본의 세계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99년 8월 이후 내가 대우차를 바라본 관점은 우선은 이와 같은 산업자본의 관점에서였다. 따라서 지엠으로의 대우차 매각은 철저하게 반대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미 80년대에 있었던 '종속이론' 관련 논쟁에서 이루어진 자동차산업에 관한 실증연구들을 통해, 독자기술의 발전을 추구했던 현대차와는 달리, 대우차에서는 독자 기술능력의 발전이 지엠에 의해 좌절되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또한 나는 대우차 직원들과의 면담을 통해 92년 결별 이전에 지엠이 어떤 방식으로 모델의 독자개발을 가로막았었고 또한 품질개선을 위한 제품/공정 설계변경이 어떻게 가로막혔는지에 관하여 추가적인 발견을 할 수 있었다. 김우중의 세계경영 전략은 대우차가 현재의 최악의 사태로 빠져들게 된 기본 요인이다. 하지만 20년간 계속된 지엠의 식민지 경영적 사업 행태는 바로 대우차의 현 취약성을 근저에서 만들어 냈다. 그런 원죄를 지닌 지엠이 다시 개선장군처럼 대우차에 무혈입성한다는 것은 한국자본주의의 합리적 발전을 위해서도 저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



<해외매각도, 재벌경영도 아닌 대안은 ? >

김우중의 재벌경영은 이미 파산했다. 해외 자본도 않된다. 그렇다면 누가 대우차를 맡아야 하는가 ?
이 의문에 대해 당시 대우차의 한 직원은 하나의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대우차 회생의 깃발을 들 주체는 지엠도, 삼성도 아니며 김우중의 후계자들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깃발을 들어야 한다". 나 역시 이 의견을 지지하였다. 대우차의 직원들과 노동자들이 대우차의 지배와 경영의 주체로서 나서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대우가 가진 문제는 단지 '화폐' 즉 재무금융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대우차의 '인간' 즉 조직과 기업문화 역시 큰 위기 상태에 있었다. 김우중의 1인 황제식 경영은 대우차 내부에 치명적인 조직상의 충돌, 마찰, 책임회피, 무기력, 좌절, 분노 등을 낳았다.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마티스의 4차종 동시개발과 함께 기술능력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성장하는 기술능력(생산력)은 김우중 회장이 만들어놓은 기존의 조직체제와 기업문화(생산관계)과 충돌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가로막히고 있었다. 대우차 역사에서 신세대라고 할 수 있는, 4차종 동시개발을 경험한 젊은 중간급 관리자와 연구개발자, 기술자들은 김우중의 절대황제적 권위를 뒤에 업은 불합리한 경영진의 행태에 대한 좌절과 분노로 회사 전체의 조직은 이미 워크아웃 이전에도 마비증상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200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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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록음악이 주류로 자리잡은 시기는 불과 5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그 기간동안 록음악의 역사는 위대한 저항과 승리의 시간이자 동시에 패배와 굴종의 시간이기도 했다. 많은 음악평론가들이(특히 국내에서는 강헌 같은 음악평론가에 의해) 록(rock)이 마치 민중가요이자 저항가인 양 높이 추켜 세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록음악이 반항적 메시지 전달자로서의 전성기는 사실상 60년대로 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후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 같은 인물은 일종의 오컬트(occult)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히 상업적이고 체제 내 반항적인 구두선(口頭禪)에 멈춰 있었다.

그러던 것이 국내에서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평론가들에 의해 록음악의 그런 정신이 최고의 미덕이자 시대에 반항하거나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음악은 반드시 록음악이어야 하고(이것은 사실과는 약간 다르지만), 록음악에서만 그런 반항 정신이 두드러져야 하는 것처럼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본질이지 형식이 아닌데 지금 서태지의 음악에 대한 이견들은 사실상 그런 맥락(형식주의에 치우친 것이고 과도한 애정에 의해 비뚤어져 있다.)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가령 서태지의 속성상 난 그것이 상업적인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서태지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서태지가 혜성처럼 등장하던 92년 무렵의 시기는 동구 현실사회주의권 몰락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시기였으며 이런 시기에 비록 미국의 랩(힙합)이라는 장르이긴 했으나(나름의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서태지의 등장은 그들에게는 이 땅의 날라리들이 드디어 개과천선하는구나 하는 식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른바 '자연발생적 사회주의자'인 셈이다. 불과 10년도 안된 시기의 일이니 그 시기를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서태지의 팬들은 단순히 10대의 틴에이저 그룹만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지지는 오히려 이 땅의 소장파 지식인 그룹으로부터 강화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70년대의 김지하와도 닮아 있다. 70년대 우리는 최초로 우리 민족문화란 것 그것도 왕실의 것이나 귀족적인 것이 아니라 소위 민중의 문화란 것에 자긍심을 느끼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것은 일제에 의해 가리워졌던 우리의 민중 문화에 대한 자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것인데, 동시에 이 시기는 급격한 도시화 확산과 함께 서구문물이 급증하던 시기로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김지하는 우리 민요적인 가락과 리듬(판소리적인 소리의 결과 메시지를 담은)을 이용한 일련의 시들을 발표하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는 장문의 요설(饒舌)과 함께 그에 게 바쳐졌던 수많은 헌사(獻辭)의 제위에서 내려왔다. 서태지가 조선일보와 계속해서 인터뷰를 하고, 자신을 사회체제에 반항적인 가수로 보지 말아달라고 말한 것은 김지하의 경우와 비교하더라도 훨씬 더 온순한 것이다. 하긴 한 시대를 풍미한 지식인의 훼절 선언과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더라도 날라리의 그것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음,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날라리는 그냥 날라리라는 식의)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태지에 대한 평가는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으며 그런 거품을 거둬들이고 나서의 서태지는 그냥 노래 잘 하고, 유행을 잘 조합해서 곡을 만들어내는 가수일 뿐이다. 그에게 아직까지도 과도한 무게를 지워주고 싶어하는 일부 평론가들은 그만 정신차려 주길 바란다. 반항의 음악은 굳이 락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말이다.

<200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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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우리 사회의 '모랄 해저드(moral hazard) 혹은 도덕적 해이'라는 말은 이미 익숙해져 있다. 항상 드는 느낌은 법이 복잡한 나라일수록 그 사회에는 많은 범죄가 있다는 증거가 되며, 광고에서 100% 콩기름이란 말에는 그 콩이 수입콩이거나 유전자 조작콩일 것이라는 반증이라는 묘한 이야기가 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또한 사회에서 실시하는 공적인 성교육이 부족한 나라일수록 낙태율이나 청소년들의 성 실습(혹은 첫 경험?) 경험이 빨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행간을 읽어낼 것을 강제 받았다. 이것은 정보의 소통이 불확실할 뿐더러 수많은 오보와 아니면 의도된 왜곡 보도 속에 진실을 찾아 헤매야 하는 우리나라 언론 독자들의 고민거리이자 두통거리일 것이다.

위의 말과 마찬가지로 탈세니 고위 공직자의 기강 해이 문제를 가장 많이 언급하는 언론일 수록 내부적으로는 탈세나 모랄 해저드의 상황에 빠져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 되나? 우리 사회의 톨레랑스(관용)의 정신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지경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이 스리슬쩍 <중앙일보> 회장 자리에 복귀했다는 것 때문이다. 홍석현 그가 누군인가?

그는 지난해(1999년) 검찰에 소환되는 그것도 언론 탄압이 아니라 탈세 혐의로 말이다.(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중에서 알 카포네가 무슨 죄목으로 알카트라즈 감옥에 수감되었는지 아시는 분 많으실 꺼다. 바로 탈세 혐의다.) 그때 중앙일보는 난리를 쳤더랬다. "사장님, 힘내세요." "흐,흐" 참말로 가관이었다. 내가 듣고 알기로는 언론사에서는 국장님이니 부장님이니 하는 호칭을 의도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기자면 다 같은 기자지 님자를 붙이기 시작하면 기자 고유의 반권력적 성향이 수그러들지도 모른다는 취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기자들이 초등학교 학생들처럼 피켓을 들고 "사장님, 힘내세요."라니 이때 중앙일보에서는 오동명 기자(사진기자) 한 사람만 사람같은 목소리를 내고 자성하자는 발언을 하였고 결국 짤렸다.

다시 홍 아무개 씨에게 뽀인트를 맞춰보자. 그는 실형이 확정되었다. 탈세는 그들의 주장처럼 무고도 아니고 정치적 탄압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예전 같으면 구속은 무슨, 얼렁뚱땅 무마되고 말 일인데 구속까지 되었으니 그들로서는 정치적 탄압 운운할 만한 내부적 아픔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그 죄가 명백하고, 그로 인해 홍 사장은 죄값을 치르기 위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몇 개월만에 8.15광복 특사로 풀려났다.(잘 하는 짓이다.) 그는 사면 복권이 목적이었겠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이 정말 반성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탈세에 대한 책임을 느껴 중앙일보 사장과 발행인 등의 직책을 사임했고, 상당기간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 또 그런 반성의 의미에서 2년 가량 외국에 나갈 계획이라는 등의 설을 유포시켰다. 그의 예감대로 특사에 사면복권까지 되자 그는 다시 중앙일보 회장직에 복귀해버렸다. 대마초 핀 연예인들이 자숙의 기간 어쩌구 하는 기간도 경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홍 아무개씨보다는 길다. 그는 10개월만에 다시 복귀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그를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감옥에 보낸 정부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박정희를 경제성장의 화신으로 자신을 민주,인권의 화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DJ로서는 그럴만도 하다. 그래서 박정희기념관 건립 어쩌구 해서 국민화합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것이겠지만.... 김 대통령은 지난 9월 22일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중앙일보 창간 35주년 기념식에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중앙일보에 거는 기대는 매우 큽니다. 뭐, 어쩌구 저쩌구" 그 자리에 홍 아무개 회장도 있었던 것은 당연했겠지. 중앙일보의 모든 사설은 이래서 거짓이다. 그 신문 사보는 독자들에게 엄숙히 충고하고 가르치고 고위 공직자들이, 이 나라의 정치인들이 어쩌주저쩌구 주절주절 하는 얘기들은 모두 자신들은 빼고 남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라는 것이다.

홍 회장은 물러나야 한다. 그것은 중앙일보가 제대로 된 언론으로서 해야 할 일이다. <200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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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소헌(風蕭軒)이란 이름에 새긴 뜻

다산 정약용 선생은 "아언각비"라는 책에서 전, 당, 각, 루, 정, 재, 헌 등 각 건물을 구분하는 법을 적었다고 하는데, 이는 신분적 위계질서가 뚜렷했던 조선시대의 궁궐 건축에도 역시 그런 위계와 건축 양식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각기 달리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은 그런 위계와 의미, 건축 양식에 따라 다른데, "전"은 궁궐의 건물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건물로 왕과 왕비, 전왕비, 왕 어머니나 할머니 등이 공적인 활동을 하는 건물로 세자나 영의정 등은 전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당"이란 "전"에 비해 외적 규모는 떨어지지 않을 수 있어도 "전"보다 한 단계 낮은 건물을 일컫는 말로 "전"이 공적인 영역이라면 "당"은 일상적인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합"과 "각"은 "전"이나 "당"에속하는 부속 건물이다. 그러므로 불교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대웅전"으로 "전"이 되고, 그 이외에 토속신앙의 산신령을 모시는 건물은 "산신당"이 되는 것도 이런 이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술의 전당은 무슨 뜻일까?)

"재"와 "헌"은 왕과 왕비도 쓸 수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기거활동공간으로 재는 숙식 등 일상적인 주거용이거나 조용하게 독서나 사색을 하는 용도로 쓰이는 건물을 의미한다. 헌은 동헌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대청 마루가 발달되어 있는 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공무적 기능을 가진 경우가 많다. 루와 정의 경우엔 바닥이 지면에서 한 길 높이 정도의 마루로 되어 있는 집을 일컬어 루라 하고, 연못가나 개울가의 휴식 공간 또는 연회 공간으로 사용하는 곳은 정이라 한다. 같은 루의 형태라 하더라도 일층만으로 된 경우엔 각, 이층일 경우엔 루라고 불렀다. 전이란 말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지만 "당" 아래의 말은 일반 사대부들도 당호나 옥호를 지을 때 각자 편의로 지어 붙일 수 있었다.

내가 구태여 헌(軒)이라 한 것은 대청마루의 느낌, 바람 소리 쓸쓸하게 듣기 가장 좋은 곳, 인터넷 공간이란 결국 남들에게 훤히 내보이는 위치이므로 앞 뒤로 막히지 않은 헌의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풍소헌(風蕭軒)"의 풍소(風蕭)는 사마천의 "사기" 열전편에 실린 자객 형가(荊軻)에 대한 내 애정이 담겼기 때문이다.
 
형가는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그의 선조가 본래 제나라 사람이었으나 위나라로 옮겨와 살다가 다시 연나라로 가서 살았다.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며 많은 이들이 떠돌이 생활을 하긴 했으나 다른 지역 사람들이 옮겨와 사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중국의 객가를 생각해보라) 텃세가 있는 법인데, 연나라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형경(荊卿)이라 불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의 인품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형가는 생각이 깊으며, 책을 좋아하는 선비였고, 인품이 고결하여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그와 교제를 나눈 상대 역시 어질고 호방한 인물들이었다.

형가가 연나라로 와 정착하자 당시 연의 재야 인사였던 전광(田光) 역시 그가 벙상치 않은 인물이란 사실을 알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교제를 청했다. 그 무렵 진나라로 볼모로 잡혀갔던 연의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서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왔다. 태자 단은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기 전에는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진왕 정정(政:훗날의 진시황)을 만나 어렸을 때부터 친구의 정을 쌓았다. 정이 진나라의 왕이 되자 태자 단은 다시 진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진왕은 어렸을 때 친구였던 태자 단을 잘 대접하지 않았다. 결국 단은 진왕 정이 전국 통일이라는 무서운 야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고, 장차 연의 멸망을 막기 위해 진나라에서 도망쳐 연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진의 보복과 진왕 정의 야심을 사전에 막아내기 위해 태자 단은 자객을 물색하지만 연나라는 작은 소국이어서 그럴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때마침 진나라는 중원으로 진출하여 여러 제후국들을 공격해 영토를 넓혀나가다가 결국 연나라마저 압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를 근심한 태자 단은 그의 스승인 국무(國武)에게 그 방책을 자문했다. 국무가 말하길.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나오게 된다면 만리장성의 남쪽, 역수(易水) 이북에 있는 우리 나라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태자께서는 비록 모욕을 당했다는 유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해서 그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 장군 번오기(樊於期)가 진왕의 미움을 받고 연나라로 망명해 왔고, 태자 단은 그를 받아들여 융숭한 대접을 하며 묵도록 했다. 이때 다시 국무가 충고하길.

"그것은 안될 일입니다. 저 포악한 진왕이 우리 나라에 대한 노여움을 더해 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근심되는 일인데, 하물며 번장군의 은신처가 이곳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치 굶주린 호랑이가 지나가는 길목에 고기 토막을 던져 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반드시 끔찍한 재난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빨리 번 장군을 흉노의 땅으로 보내어 진나라에 트집잡힐 일이 없게 하십시오."


태자 단이 말했다.

"나는 진왕에 대한 분노로 마음이 혼란하여 잠시도 참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번 장군으로 말하더라도 천하에 몸둘 곳이 없어 쫓기는 처지에서 내게 의지해 온 것입니다. 나는 강국 진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가엾은 친구를 버리고 그를 흉노에게 보내는 일은 내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이상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선생께서는 아무쪼록 고쳐 생각해 주십시오."


"그러시다면 재야의 인물로 전광 선생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생각이 깊고 침착하며 용기가 있는 사람이니, 그와 한번 상의해 보십시오."


"선생의 주선으로 전광 선생과 사귀고 싶은데 애를 좀 써 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국무는 밖으로 나와 전광 선생을 만나 태자가 국사를 상의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전광은 쾌히 승낙하고 태자에게로 찾아갔다. 태자는 전광이 자리에 앉자 간절하게 말했다. "연나라와 진나라와는 공존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원컨대 선생께서는 좋은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윽고 전광이 입을 열었다.

"신은 이미 노쇠하여 국사를 의논함에는 응할 수 없고, 신의 친구인 형가라면 가히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시다면 선생의 주선으로 형가와 사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광은 즉시 일어나서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태자는 문까지 전송하며 당부했다.

"내가 지금 말한 것과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은 국가 대사이니, 부디 누설하시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전광은 고개를 숙인 채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굽은 허리를 이끌고 형가를 찾아가서 말했다.

"내가 그대와 친하다는 것은 연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소. 지금 태자는 내가 혈기 왕성한 시절만을 듣고 내 몸이 이미 노쇠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인지, 송구스럽게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소. '연나라와 진나라와는 공존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라고 말이오. 나는 그대를 내 몸처럼 여기고 있소. 그래서 태자에게 그대를 소개하기로 했소. 그러니 태자를 한 번 방문해 주시지 않겠소?"

형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광은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덕있는 사람이 행동을 함에 있어서는 남의 의심을 품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오. 그런데 태자는 내게 또 이렇게 말했고. '지금 말한 것은 국가 대사이니 부디 누설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이오. 그러니 태자는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오. 무릇 일을 함에 있어 남의 의심을 품게 해서는 절개와 의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소." 

전광은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형가를 분기시키고자 했다.

"아무쪼록 그대는 곧 태자를 찾아가서 '전광은 이미 죽었습니다. 누설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보여준 것입니다'하고 전하시오." 

전광은 말을 마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가가 태자를 만나 전광의 죽음을 전하자, 태자는 두 번 절하고 난 다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전광 선생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은 국가 대사에 관한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전광 선생은 죽음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형가가 자리에 앉자 태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지금 진나라는 탐욕이 끝이 없어 그 욕심은 만족을 모르고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땅을 점령하고 온 중국의 군주를 신하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나라는 약소국으로 종종 전쟁의 피해를 받았으며, 이제 나라의 총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진나라와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제후들은 진나라에 복종하여 합종 동맹에 의해서도 이를 당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천하의 용사를 찾아내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게하여 큰 이익을 내세워 설득해 본다면, 비록 탐욕스런 진왕이지만 혹시 무슨 희망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진왕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가장 바라고 있는 바입니다만, 누구에게 그 사명을 맡겨야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형경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잠시 후 형가가 말했다.

"그것은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저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으로서는 정녕 사명을 다하지 못할 일입니다."

태자는 가까이 다가가 절하고, 겸양하지 말기를 청하여 물러나지 않았다. 마침내 형가가 승낙하자 태자는 경의를 표하며 형가에게 상경의 지위를 주어 관사에 머물도록 했다.  태자는 매일 그 관사로 찾아가 태뢰(太牢:왕가의 음식으로, 소·돼지·양 등으로 만든 고급 요리)로써 대접하고 진귀한 물품과 거마와 미녀를 제공하며, 형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었다.  이러는 동안 상당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형가는 아직도 움직여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에 진나라 장군 완전은 조나라를 격파하여 조왕을 사로잡고 그 땅을 모조리 거두어 들이고는 군사를 북쪽으로 돌려 종횡무진으로 공략하면서 연나라의 남방 국경에까지 이르렀다. 두려움을 느낀 태자 단은 다시 형가를 청하여 말했다.

"진군이 내일이라도 역수를 건너오면 오래도록 귀공을 모시려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형가가 대답했다.

"태자께서 말씀이 없으셔도 제가 찾아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서둘러 떠난다 하더라도 믿을 만한 징표가 없으면 진왕을 만나게 해 주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금 번오기 장군은 진왕이 천근의 황금과 1만 호의 땅을 현상금으로 내걸고 찾고 있는 중입니다. 만일 번 장군의 목과 비옥한 연나라의 땅인 독항(督亢)의 지도를 진왕에게 바친다면, 진왕은 우리를 믿고 기꺼이 만나줄 것입니다. 그리하면 저는 은혜를 갚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실로 참혹한 고육계가 아닐 수 없었다. 태자 단은 몹시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번장군은 쫓기어 내게 의지하러 온 사람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훌륭한 분의 마음을 해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원컨대 형경께서는 생각을 고쳐 주십시오."

형가는 태자가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간파하고 남몰래 번오기 장군을 찾아가 말했다. 

"장군에 대한 진나라의 조치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양친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가 권속이 모두 극형에 처해졌으며, 지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장군의 목에는 황금 천 근과 땅 1만 호의 현상이 걸려 있다 하니, 장차 이 일을 어쩔 셈이십니까?"

번오기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깊이 한숨을 몰아쉬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도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늘 뼈에 사무칩니다. 다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따름입니다."

형가가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연나라의 근심을 덜고 장군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번오기는 다가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장군의 목을 얻어 진왕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진왕은 반드시 기뻐하며 저를 만나 줄 것입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그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장군의 원수도 갚을 수 있고, 지금까지 연나라가 받은 굴욕도 씻을 수가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동의해 주시겠습니까?"

번오기는 숨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이야말로 제가 밤낮으로 이를 갈며 속을 태우던 일입니다. 지금에야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즉시 목을 찔러 죽었다. 그 무렵 연나라에 진무양이라는 한 용사가 있었다. 열세 살 적에 벌써 살인을 한 사람으로, 누구나 그를 두려워하여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태자는 진무양에게 명하여 형가를 수행하게 했다.

출발에 앞서 형가는 같이 동행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의 집이 멀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장을 갖춘 채 대기중이었다. 출발 시각이 지나자, 기다리다 지친 태자는 형가가 혹시 변심이라도 했는가 싶어 또 부탁했다.

"앞으로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형경께서는 무슨 다른 의견이 있습니까? 나는 진무양을 먼저 출발시킬까 합니다."

형가는 답답하다는 듯이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께서는 도대체 어찌 하자는 것입니까. 더벅머리 애송이는 떠난다 하더라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지금 한 자루의 비수를 품고 진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제가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제가 데리고 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태자께서는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만 작별하고 떠나겠습니다."


이리하여 형가는 마침내 출발하였다. 태자와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모두 흰 상복을 입고 형가를 전송하여 역수 기슭에 이르러 도조신(道祖神:길 떠나는 사람을 보호하는 신)에게 제를 올리고, 드디어 여로(旅路)에 올랐다. 형가의 친한 친구인 고점리는 비파(筑)를 뜯고, 이에 화답하는 형가의 음성은 반음이 낮은 단조의 비창한 가락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닦을 줄을 몰랐다. 형가는 천천히 걸으며 즉흥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역수를 건너며(渡易水)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易水)는 차구나
장부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호랑이 굴을 찾음이여, 이무기 궁으로 들어가네.
하늘을 우러러 외침이여, 흰 무지개를 이루는도다.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探虎穴兮入蛟宮
仰天噓氣成白虹


이 때 그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모두 하늘로 솟았다고도 한다. 진나라에 도착한 형가는 진왕의 총신인 중서자(中庶子:궁내부 대신) 몽가(夢嘉)에게 천금의 예물을 바쳤다. 몽가는 그를 위해 진왕에게 상주했다.

"연왕은 충심으로 대왕의 위엄에 떨고 있으며, 군사를 내어 우리 나라에 거역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합니다. 연왕은 대왕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말씀올리기가 어려워 삼가 번오기의 목을 베고 연나라 독항의 지도와 함께 상자에 넣어 봉함 다음, 연왕이 보낸 사자가 그것을 가지고 지금 어전 뜰 앞에 엎드려 대왕을 뵙고자 합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잠시 인견하여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진왕은 크게 기뻐하며 정장을 하고 국빈 알현의 의식으로 함양궁(咸陽宮)에서 연나라의 사자를 인견했다. 형가는 번오기의 목이 든 상자를 받들고 진무양은 독항의 지도가 들어 있는 상자를 든 채 천천히 다가가 옥좌 아래에 이르렀다. 그때 진무양은 안색이 창백하여 떨고 있었다. 늘어선 뭇 신하들이 괴이하게 여기니, 형가는 진무양을 돌아보며 웃고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북방 오랑캐 땅에 살던 사람이라 일찍이 천자님을 배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벌벌 떨고 있사오니 아무쪼록 대왕께서는 저 사람의 무례를 용서하시어 어전에서 사명을 다 마치도록 해 주십시오."

진왕이 형가에게 말했다.

"먼저 진무양이 가지고 온 지도를 가지고 오라."

형가는 지도를 들고 어전에 올렸다. 진왕이 지도를 펼치자 지도 맨 안쪽에서 비수가 나타났다. 그 순간 재빨리 형가가 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비수를 쥐며 진왕을 찔렀다. 그러나 몸에 닿지는 않았다. 진왕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일어섰다. 그 바람에 소매가 찢기었다. 진왕은 급히 검을 빼려고 했으나 검이 너무 길어서 빠지지 않았다. 칼집을 잡았으나 당황한 나머지 빠지지 않았다.

형가가 진왕을 쫓으니 진왕은 기둥을 돌아서 달아났다. 여러 신하들은 너무도 뜻밖의 일에 모두들 넋을 잃고 섰을 뿐이었다. 더구나 진나라의 규칙으로는 어전에서는 몸에 한 치의 쇠붙이도 간직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무기를 든 시종 무관은 모두 어전 아래에 늘어서 있었으나 어명이 없으니 감히 올라갈 수도 없었다. 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부하 군사를 부를 여유도 없었다.

형가는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진왕을 쫓았다. 사태는 급박했다. 진왕은 형가를 칠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달아나는 꼴이었다. 이때 시의(侍醫) 하무저(夏無且)가 들고 있던 약봉지를 형가에게 던졌다. 형가는 약봉지를 맞고 잠시 멈칫했다. 진왕은 계속 기둥 둘레를 돌고 있을 뿐, 허겁지겁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때 좌우에서 외쳤다.

"대왕께서는 얼른 검을 빼십시오!"

진왕이 검을 뽑아 형가를 쳤다. 형가의 왼편 다리가 잘려 나갔다. 형가는 설 수가 없었다. 그는 비수를 진왕에게 던졌다. 그러나 비수는 맞지 않고 구리기둥에 박히고 말았다. 진왕이 재차 형가를 내리치니 형가는 여러 군데에 중상을 입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형가는 웃으며 기둥에 기대어 다리를 괴고 편히 앉더니 진왕을 꾸짖으며 말했다.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은 천운이다. 다만 그대가 빼앗은 땅을 도로 찾지 못하는 것이 한이로다."

결국 형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  진시황의 호위병들에 의해 사지육신이 무참하게 도륙당하고 만다. 앞서 형가의 인품이나 성정에 대해 말했는데, 형가를 일컬는 말 가운데서 "방약무인(傍若無人)"이란 표현이 있다. 오늘날 이 한자어는 사리분별을 못하여 무례하고, 교만한 태도를 일컫는 말이 되었으나 본래는 형가와 그의 절친한 벗이자 비파(琵琶)의 명수인 고점리(高漸離)와의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파의 명인인 고점리가 비파를 켜고, 형가는 이에 맞춰 춤을 추며 고성방가를 하였다. 그러다 두 사람이 서로의 신세가 처량함을 느껴 감정이 북받치면 얼싸안고 울기도 웃기도 하였는데, 이때 그들의 모습이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해서 "방약무인(傍若無人)"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 (傍 : 곁 방, 若 : 같을 약, 無 : 없을 무, 人 : 사람 인)

* 이곳의 이름에 <역수가>에서 따온 이름을 넣은 것은 어쩌면 제가 '형가(荊軻)'를 닮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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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는 어떻게든 살아가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큰 몫이란 생각을 종종 합니다.

리고 가끔 현재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실천 없는 반성을, 사유 없는 실천을 반성하고  또다시 실천 없는 일상을 되돌아 보며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곤 합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활에 대해 의문을 가지곤 합니다. 어째서 나는 흙을 일구고 생명을 기르는 일을 택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아늑한 집을 짓는 일을 택하지 않았을까, 이른 새벽 아직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기 전에 길을 닦고, 청소하는 일을 택하지 않았는지 반문해보곤 합니다. 어째서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책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택했는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제 속살 다 내어 바치는 세상 나무들에게,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받아 챙기는 월급이 오로지 저 혼자 일 잘해서 받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세상에 책 한 권 펼쳐내는 일이 제 속살 내어 바치는 세상의 나무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지 항상 되살펴 묻게 됩니다. 이를테면 제가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는 밥값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학을 전공했고, 글쓰기와 책읽기,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일을 업으로 삼은 뒤로도 이런 일들을 직업으로 택한 데 대한 많은 회의를 품곤 했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으며 자본주의의 음습한 기운이 전세계를 적시는, 희망이 사라진 세기를 살아가고, 비루한 일상 속에서 전망없는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속에서 문학이란, 글쓰기란,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일이란 얼마나 의미있는 일일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시인 함민복이 <긍정적인 밥>이란 시에서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나의 글쓰기에 대한 마음은 이 시인에 비하면 아직 멀기만 합니다.

울 첼란(Paul Celan)이란 시인이 있습니다.

울 첼란은 소련과 루마니아 접경지역에서 태어나 일평생 독일어를 모국어로 시를 쓴  유태계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모국어의 나라인 독일은 파울 첼란을 죽음이 춤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인간의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고, 사람들을 총살하는 동안 동료 유태인 악단은 흥겨운 춤곡을 연주해야 하는 속에서도 파울 첼란은 시를 썼습니다. 파울 첼란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극심한 우울증과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다 결국 세느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맙니다.  

런 자신의 문학을 파울 첼란은 '유리병편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 받을 것인지, 과연 무사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인지 글을 쓰는 이는 알지 못하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이 험난한 파도와 암초 사이를 뚫고, 깊은 심연에 가라앉지 않고 누군가, 어딘가에는 닿으리란 희망을 품고 망망대해에 띄우는 편지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이렇듯 당신의 해변 언저리에 무사히 도착한 '유리병편지'를 집어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Ghetto)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유대인들은 전멸의 위기에 직면하자 생존자들이 마지막 힘을 모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 줄 시인 한 사람을 피신시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유태인들의 마지막 희망을 한 몸에 품은 시인 이작 카체넬존은 자신들의 일을 담은 시들을 깨알같이 베껴 여섯 부를 만들어 파묻어 놓은 후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가 끝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중 유리병에 넣어 파묻었던 한 부와 가방 손잡이에 꿰매 숨겨 놓았던 한 부가 기적적으로 구해져서 몇 년 전 출판되었습니다.

런 까닭에 저는 거창하게도 '문학이란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데 당신 한 사람이 저 거대한 체제에 반대한다고 해서, 변화와 변혁을 꿈꾼다고 해서, 혁명을 꿈꾼다고 해서 세상이 변할 수 있겠는가' 같은 패배주의적인 말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시대의 급류를 잘 타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는 좌초하여 혹은 말은 그렇게 냉소적으로 했음에도 역시 괴로워하며 불만 많은 소시민처럼 술잔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운명이나 필연, 숙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탁(神託)에 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사가 매양 1+1은 2의 결과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과학에 대한 것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고, 늘 왼쪽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인간에 관한 것입니다. 변하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고, 인간을 움직이는, 인간을 움직이고자 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사회과학이고 예술입니다.

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한때 그 자체가 혁명적인 행위였습니다.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마음, 남의 생각에 귀기울이겠다는 마음가짐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일 중요한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 내가 옳은 일이라고 믿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리는 불행히도 당대에 어떤 성과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해서 고대 사회의 노예들이, 중세의 농노들이, 근대의 시민들이 변화와 혁명을 포기했다면 우리는 현재까지도 귀족이나 양반 계급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했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불가능하다고 믿어지는 일들을 꿈꾸기 시작했을 때, 그것들을 일상에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곳, 그 지점으로부터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에게 지금 이렇게 띄우는 '유리병편지'가 고스란히 잘 전달될 수 있을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러나 누군가에게 어느 순간에는 제 마음이 닿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약하지만 이곳에서 작은 출발을 다짐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룰 수 있습니다.
게바라는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리가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꿈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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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