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상, 대중 : 문화에 관한 8개의 탐구 ㅣ 박명진 외 / 한나래 / 1996년 12월




1996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새로운 키워드들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더이상 혁명도, 민중도 아닌 문화와 일상, 대중이었다. 현실사회주의라 명명된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단순히 맑스 원전의 번역만 뒤늦은 것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새로운 트렌드에도 매우 뒤늦었다는 사실을 어느날 갑자기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마치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 비행체에 지구의 컴퓨터 바이러스를 심어 일거에 무력화시킨다는 발상처럼 일순간에 대한민국 사회는 포스트모던이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고,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글쎄,
이 책은 내가 앞서 말하고 있는 서론 격의 이야기처럼 그리 거창한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대학에서 새로운 문화이론을 고민하고, 가르쳐야 하는 8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진행했고, 그들이 공부했던 서구의 문화이론가들, 학자들의 텍스트를 우리 말로 번역해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처음부터 교과서라는 텍스트의 본래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하는 책이고, 나 역시도 그런 텍스트로 이 책을 접했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피에르 부르디외,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비롯해 아는 이들에게는 그들 못지 않게 유명한 니콜라스 간햄, 존 피스크 그리고 미셀 드 세르토 등의 논문 8편이 번역,수록되었다.


미셀
드 세르토의 이름 앞에 '그리고'를 붙인 까닭은 내가 알기로 세르토의 논문 가운데 우리 말로 번역된 유일한 글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최소한 현재까지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이 책은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크게 보아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 격에 해당하는 박명진 선생의 글 "문화 연구 - 새로운 시각의 모색을 위하여"부터 "문화에서 탈문화로 - 스티븐 크루크, 장 파컬스키, 맬컴 워터스""부르디외: 문화 자본과 아비투스"는 문화 편에 해당하는 것이고, 부르디외의 "예술적 취향과 문화 자본", 니콜라스 간햄,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피에르 부르디외와 문화 사회학: 입문", 드 세르토의 "일상 생활의 실천", "도시 속에서 걷기" 등은 일상 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존 피스크의 "팬덤의 문화 경제학", 존 클라크, 스튜어트 홀, 토니 제퍼슨, 브라이언 로버츠의 "하위 문화, 문화, 그리고 계급", 토니 베넷의 "대중성과 대중 문화의 정치학"은 대중 편에 해당한다.


일반적인
정의는 아니고, 내 개인적인 정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내 믿음일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적 맥락으로 보았을 때, 문화연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 구조, 혹은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서유럽 좌파의 고민과 모색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바대로 문화인류학적인 방법론과 본인들은 때때로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프랑스 구조주의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거기에 덧붙여 문화연구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독특한 문학문화(Literacy Culture)와 좌파 역사학의 영향이 합쳐져서 그들만의 독특한 연구 방법론 혹은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사실 문화연구는, 문화라는 모든 것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그 연구대상의 폭넓음으로 인해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치명적인 악몽이며 기존의 아카데미 시스템 속에서 이미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는 학자들에겐 사기꾼 집단처럼 보일 수 있다.


신문방송학,
비판커뮤니케이션학의 한 분파일 수도 있고, 인문학적으로는 문화인류학, 문화사학의, 또 사회학적으로는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의 한 지류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화연구는 어쩌면 실제로도 흘러가는 유행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한동안 국내 소장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직종 가운데 하나가 다소 뜬금없이 출현한 '문화비평가'란 것이었다. 역사적 뿌리가 없는 비평 행위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반증하기라고 하는 양 1997년 IMF 외환 대란이라는 된서리를 맞고 나서 문화비평가라는 직종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 책은 바로 그 직전에 나와서 현재까지 여러 대학에서 문화연구 혹은 문화이론의 제반 분야들을 공부하는 교재 중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읽노라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엄청난 문화환경의 변화라는 것이 다각도로 실감난다. 하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예시로 들고 있는 급변하는 문화환경들이 이미 오래전의 급변들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의 저자들이 고민하는 문화연구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점은 피에르 부르디외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사실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였다(우습게도 나는 윌리엄스가 부르디외 보다 훨씬 전 세대 사람으로, 느낌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사람은 영국의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가(문학비평가)로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의 좌파이자 구조주의 문화연구가로 활동한 사람인데,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니콜라스 간햄과 함께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구가 어떻게 정치경제학과 문화론적인 연구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통합하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들 아는 이야기겠지만 맑스는 고전 경제학과 결별하는 방법으로 경제학에 정치학(혹은 사회학)을 도입한다. 당대 최고의 뛰어난 문화적 교양인이기도 했던 맑스는 그러나 사회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문화에 대한 진술(다들 아시다시피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를 제외하고는)을 거의 공백 상태로 남겨놓는다. 그런 점에서 맑스 이후 맑스를 계승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영국 좌파이자
문화주의 문화연구의 중요한 이론가였던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여러 차례 맑스와의 결별을 시도했으나 끝끝내 결별하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그건 지금 우리가 그와 결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흡사하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가 존재하고 있으며, 변화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주체성을 밝히는 도구로서도 여전히(낡기는 했으나)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문화연구가 영원히 정치경제학과 결별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문화연구의 본질은 결국 "문화+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진술하지 못한 부분들을 찾을 때에야 비로소 문화연구라는 하나의 방법론이 존재하는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전지구적 피라미드의 하부구조가 어떻게 상부구조에 의해, 보이지 않는 검은 손에 의해 통제되는지, 문화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얼마나 우리의 숨통을 옭죄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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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 - 존 스토리 | 박만준 옮김 | 경문사(2002)




우리에게 현실문화연구에서 출간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존 스토리의 책 "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은 문화연구가 실제로 어느 분야에 적용되고 있는가를 실질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문화연구는 여러 분야의 학문들에 기대고 있다. 예를 들어 문화연구에서 논의되는 인물들은 그 자체로 서구의 근현대 사상사를 옮겨온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롯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가들, 알튀세르, 그람시, 벤야민 등등이 이야기된다. 그 못지 않게 문화연구가 건드리고 있는 분야도 폭넓은데(도대체 어느 것이 문화연구고, 어느 것이 문화연구가 아닌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존 스토리의 이 책은 그 가운데 어느 것이 그래도 문화연구가 주로 건드리고 있는 분야이고, 그 분야를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지금껏 우리가 "문화"라면 고정관념처럼 떠올리게 되는 고급예술(high art)을 말하진 않는다(물론 이 분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텍스트와 문화적 실천행위로서 이해될 수 있는 문화이다. 대개의 문화연구 관련 서적들이 문화에 대한 그들의 이런 입장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까닭은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고 싶다는 의도와 달리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우리에게 문화는 뭔가 우리의 일상과 다른 고급한 것을 향유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만큼 뿌리깊게 박혀있음을 늘 의식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존 스토리는 이 책을 통해 문화연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문화는 일상적인 것, 문화엘리트들이나 지배계급층이 향유하는 것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향유하고 일상 속에서 실천(이때의 실천이란 컨텍스트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행위를 그 대상으로 한다. 이 때 문화연구의 방법은 레이몬드 윌리엄스, 스튜어트 홀, 알튀세르의 입장 중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 문화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회적/역사적 상황에 입각해서 문화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문화연구에서의 문화는 거의 반드시 역사와 결부되는 과정을 거친다. 다른 하나는 문화란 그람시가 말하고 있는 "헤게모니"의 개념처럼 끊임없이 텍스트 생산자와 소비자(수용자) 사이에서, 다른 말로 하자면 지배계급이 퍼뜨리고자 하는 지배이데올로기와 그것을 수용하고 거부하는 피지배계급이 벌이는 치열한 투쟁의 전장이란 것이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존 스토리는 문화연구가 (대중)문화의 여러 영역들 - 텔레비전, 소설, 영화, 신문과 잡지, 대중음악, 일상생활의 소비 - 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으며, 지배계급이 제공하는 문화 이데올로기들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해낼 것인가. 문화연구자들이 어째서 문화실천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설명한다. 문화연구란 정치경제학적인 토대 위에서 새롭게 쓰여지는 문화정치학적 실천행위이다. 문화연구자들은 그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의미(저항)를 만들기 위해 전개하는 독자들의 투쟁과 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연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중문화의 전장에서 독자들과 함께 이 세계에서 자신을 위해 더 나은 터전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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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입문 ㅣ 한나래 언론문화총서 16
그래엄 터너 지음 / 한나래 / 1995년 10월













이 책의 원제는
"British Cultural Studies"이다. 그럼에도 그냥 문화연구입문이라고 번역되어 제목이 달렸다. 흔히 문화연구를 이야기할 때 혹은 문화연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모든 용어들은 컨텍스트(context)에 따라 해석되길 희망하는 것들이다. 컨텍스트란 말 자체는 매우 많이 사용되지만 그 자체가 한 마디로 정의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멋대로 이것을 정의하길 "층위와 맥락"으로 본다. 누구도 이렇게 정의하여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순전히 주관적인 판단임을 전제로 하자면 컨텍스트의 사전적 의미는 맥락 혹은 행간이라 할 수 있는 말이다.


"모든 진리는 일정한 현실성을 지닐 뿐이며 특정한 상황에서만 통용된다. 그것 자체로서는 정당한 주장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느 무엇과도 연관을 안 갖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 될 수 있다."
는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한 이 말이 문화연구의 측면에서 컨텍스트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문화연구는 지금껏 문화텍스트 비평, 문화의 생산자와 문화산업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만으로는 현대 자본주의 문화시스템을 해석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비판이론이다. 그렇기에 모든 문화 텍스트들은 컨텍스트의 매개를 통하여 그 의미가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텍스트이든 간에 그 의미가 텍스트 자체에 의해 사전에 결정되고,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란 말이다.


이것이 이 책의 1부 '기본원칙들'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다시 처음로 돌아가 우리는 문화연구가 영국에서, 영국의 학자들이 영국적 현실을 앞에 두고 고민한 끝에 출발한 학문이란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학문이 순전히 영국만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재즈가 미국만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흡사한 오류를 범한다. 잘 알려진 바대로 재즈는 흑인들의 억눌린 정서와 뉴 올리언스 지역에 녹아든 유럽, 프랑스와 스페인 등 다양한 문화들이 한데 녹아들어 생겨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문화연구 역시 맑시즘과 기호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가 녹아들어 생겨났으며, 역사적으로는 동서 냉전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양극화 현상 속에서 서구의 좌파가 자본주의의 문화 시스템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동시에 스탈린식 사회주의에도 반대하며)를 고민하며, 동시에 영국의 고유문화가 미국화되어가는 것을 고민하는 중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매우 거친 분석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런 고민들은 동서 냉전과 미국화(아메리카나이제이션)을 고민한 세계 여러 나라의 학자들에 의해(특히 영국의 구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중심으로) 각국으로 퍼져 나갔고, 각국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문화연구의 틀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 책 "문화연구입문"은 그런 현재 상황을 담고 있지는 않다. 다만, 문화연구의 기본 원칙들과 중심 범주들을 이전의 입문서들보다 깊이 있게 담아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원용진과 존 스토리, 김창남의 입문서들을 거친 다음 좀더 심화된 이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디딤돌 구실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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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 스타를 통해본 대중문화론 - 에드가 모랭 / 문예출판사(1992년)


 


에드가 모랭의 "스타 - 스타를 통해본 대중문화론"은 대학 다닐 때 리포트 제출 참고용 도서로 구입했었다. 책이 여직 깨끗한 것으로 보아 그 무렵 구입해 한 차례 읽고는 오랫동안 책꽂이에 꽂힌 채 다시 읽게 될 날을 기다려 왔던 모양이다. 얼마전에야 나는 이 책을 덮고 있던 오래된 비닐을 뜯어내고 새로 비닐 포장을 했다. 얼마전 원전 반대 어쩌구하면서 생태 이야기를 한참 떠들어댔는데 책을 비닐로 포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뭐냐고 화낼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나만의 용도로 이 책들을 재활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그러하는 것이므로 널리 양해를 구한다. 에드가 모랭이 이 책을 처음 쓴 것이 1972년의 일이므로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소 낡은 스타들이 들먹여지는 감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의미한 까닭은 이 책에서 들먹여지는 스타들이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대중문화적인 차원에서의 스타와 스타시스템은 여전히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처음엔 독설가로 널리 알려진 버나드 쇼의 "야만인은 나무와 돌로 된 우상을 숭배하고, 문명인은 살과 피로 된 우상을 숭배한다."는 글이 쓰여 있다. 이 문장은 에드가 모랭이 이 책을 통해 스타를 분석하는 두 가지 키워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스타 - 스타를 통해본 대중문화론"은 말 그대로 사회학적인 현상접근법을 이용해 스타의 출현과정과 배경, 스타 시스템이 대중과 대중문화에 끼치는 영향과 수용과정,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면밀하게 살피고 있다. 물론 이 때의 면밀함이란 영미권 학자들의 그런 면밀함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에드가 모랭은 1921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의 서술 방식이 가지고 있는 면밀함이란 사료에 입증해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가는 실증적인 면밀함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적인, 다분히 직관적인 방식을 통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감독들은 자신의 스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 할리우드에서는 스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그들에게 없었다. 스타의 탄생은 영화산업이 체험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기쁜 사건이었다."란 식으로 스타의 탄생을 표현한다.




그런 점들이 이 책을 읽는 재미이다. 1926년 8월 23일 루돌프 발렌티노가 숨을 거둔 병원 앞에서 두 명의 여자가 자살한다. 그의 죽음은 스타 전성 시대의 절정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할리우드가 산업적으로 부추긴 (고전적 의미에서의)스타 시스템은 마릴린 먼로를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1950년대 중반에 이미 스타들은 -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 등 -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에 의한 스타 시스템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대공황기에 절정에 달했던 스타 시스템은 TV의 등장과 함께 보다 커다란 스펙타클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사람들은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스타 보다는 좀더 친근한 스타를 원했다. 에드가 모랭은 할리우드와 스타시스템에 대해 정치적인 비판을 가하기 보다는 현상 자체에 주목하여 이를 분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 점은 이 책을 읽는 재미를 개인적으로 다소 반감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이 지닌 미덕이기도 하다.


스타는 근본적으로 착하며, 영화 속에서의 이 착함은 사생활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타는 자신의 팬들에 대해서 귀찮아해서도, 무관심해서도, 또 부주의해서도 안 된다. 스타는 항상 팬들을 도와야 한다; 스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타는 항상 모든 사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스타는 권위와 용기 그리고 재치가 있다. 따라서 스타에게서 허물없고 애정어린 또 도덕적인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본문 71쪽>


스타는 신이고, 관객은 스타를 그러한 존재로 만들어 낸다. 종종 스캔들이 발생한 스타들은 공인으로서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죄송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평자들은 누가 그들에게 공인으로서의 지위를 허락했는가 시비를 건다.(거기엔 나 또한 포함되곤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에 반대하든, 찬성하든 그들이 논의의 중심에 놓여지는 순간 이미 그들은 공인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만약 그것, 공인의 지위 획득은 오로지 대의민주주의적 표결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중사회의 속성에 대한 평자들의 몰이해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1936년의 미 합중국 대통령 선거 때, 프랭크 카프라의 "디즈 씨 시내에 가다"를 본 팬들은 영화 속에서 훌륭한 정치적 태도를 나타낸 디즈 씨(게리 쿠퍼)를 선거에 출마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오늘날엔 실제로 이런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보라!


스타는 신(우상)이며, 어느날 인간을 위해 제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상품이다. 스타는 자본으로서의 상품이며, 그들은 희소한 가치로 인정받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이므로 자본이라는 개념 자체와 혼동되고, 신용화폐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신이면서 동시에 사물인 스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은 이 때 매우 유효하다. 스타는 신화(물신, 현신)이지만 단지 몽상이 아니라 힘이 있는 관념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란 치열한 투쟁의 현장에서 스타는 종종 압도적인 스펙타클을 앞세워 위세를 드러내고 승리하는 듯 보이나 더이상 과거의 위세를 떨칠 수 없다. 해피엔드의 도그마는 점차 부정당하고 있으며, 영화가 현실의 내러티브를 닮아가는 동안 비극적이게도 스타들은 더이상 신적인 지위를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스타는 아직 일부의 대중들에겐 여전히 신적인 우상으로 떠받들어진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의 영향은 청춘기 이전, 남성보다는 여성, 중간 사회 계층에 더 많이 잔존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시스템과 스타를 분석하지만 이에 대해 특정한 정치적 의사를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해 이미 많은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서양을 모델로 한 일종의 국제화의 방향에서, 비부르주아적이고 전(前)공업적인 많은 민족문화에 효소로 작용하는 작품을 세계에 널리 퍼뜨린다. 어떤 혼합이 이루어질까? 다른 요구에 기초한, 즉 사회주의에서 생겨난 다른 문화는 그 영향과 싸울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싸울까? 우리는 아직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다. <본분 193쪽>


과연 현재의 우리, 2005년의 우리는 저 예측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 이 책에는 70여 장에 이르는 스타들의 도판이 담겨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의 85면에 있는 알랭 들롱의 사진(크리스티앙 자크의 1963년 작 <검은 튤립>의 스냅 사진)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 에드가 모랭의 이 책에 기대어

"기호학으로 본 스타시스템의 변화(http://windshoes.khan.kr/612)"란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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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구 이론 - 정재철 지음 | 한나래(1998)


"문화연구이론"이란 책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 책의 머리말이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다.

"거의 1년 6개월 전부터 한국방송학회 문화이론분과에 속해 있는 10여명의 소장 학자들은 대학 혹은 대학원에서 대중 문화나 문화 연구를 강의할 때 쓸 수 있는 대학 교재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이를 현실에 옮기기 위해 함께 집필 준비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바로 "문화연구이론"이다. 국내의 소장 학자 10여 명이 모여 문화연구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현재 현장에서 강의되고 있는 문화연구, 문화이론의 강의 현장이다. "문화연구이론"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문화 연구의 주요 이론"이라고 해서 '구조주의와 기호학, 그리고 문화연구'를 통해 문화연구 분야의 주요 문화 이론들을 살핀다. 2장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문화자본'은 문화연구에 있어 중요한 개념인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문화자본을, 3장에서는 문화연구와 페미니즘을, 4장에선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화 연구를 살핀다.

2부 대중문화와 일상성에서는 현재 대중문화의 시공간이자 수용자들의 공간인 일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핀다. 제5장 '대중문화와 수용자'에서는 생산자, 텍스트 보다 현재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수용자에 대해 살피고, 6장에서는 일상을 소비하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7장에서는 '문화 정치'라는 다소 난해할 수 있는 내용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3부 "권력과 문화"에서는 문화 연구가 추구하는 바를 엿볼 수 있는 권력과 문화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문화연구란 무엇인가? 아무런 설명없이 "문화"란 말이 주어졌을 때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생각을 할까? 글쎄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문화라고 하면 뭔가 고상한 것이 먼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오페라, 발레, 연극, 고전 음악, 미술 등 일부 상류 계층이 전유하는 '문화'말이다. 우리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문화연구"라는 말을 할 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앞에 "대중"이란 말이 빠진 것이다.  즉, 문화연구는 대중, 우리들 자신의 일상적 시공간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연구이다. 그렇기에 문화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간은 일상이고, 사람들은 문화적 주체이자 수용자인 대중이며, 공간으로서는 도시가 그 연구 대상이 된다.

그간의 문화연구들은 대중문화, 문화상품들이 문화산업적인 측면에서 생산되어 어떻게 지배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지배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피지배집단의 종속적 지위를 영속화시키는지 비판하는데 주력해 왔다. 그러나 최근엔 “저항이론”이라는 새로운 연구 시각을 통해 대중, 하위 문화 집단이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 체제가 제공하는 지배적 압력에 어떻게 저항하며, 그 저항적 행위를 통해 어떤 즐거움을 얻는가라는 논쟁적인 문제점을 제기한다. 하위문화가 갖는 정치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미셀 드 세르토가 제기한 ‘일상의 창조적 실천과 저항 이론’은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과 결합됨으로써 대중문화가 주는 ‘저항적 즐거움’의 가능성과 그 진보적 정치성을 상정할 수 있게 해준다.

바흐친은 카니발의 기본 속성으로 첫째. 카니발의 모든 형식들이 지배 문화적 실천의 영역을 벗어났고 둘째, 이러한 형식들은 웃음에 기초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카니발의 익살스러움과 감각적 속성이 공식적이고 제도화된 문화적 실천과 맺는 관계는 대중문화의 수용 과정에서 대중문화의 놀이적 특성을 통해 공식적인 규율을 위반함으로써 지배질서가 전복되고, 자신들의 주체성이 확인되는 자유와 저항의 즐거움을 잠정적으로나마 느끼게 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중문화물은 결코 급진적인 텍스트가 아니다. 모든 문화상품은 그것을 생산하고 배포하는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으며, 따라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나 상품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것은 지배 집단의 이념적 목소리를 담아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목소리에 저항하고 이와 타협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배 이념과 가부장적 헤게모니에서 저항적 해독을 위한 틈새를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대중문화의 대중적 어필이 가능한 것이다. 대중문화는 한편으론 피지배계층을 종속시키는 담론들을 아주 적나라하게 담아내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이러한 담론들이 전복되고 전도될 기회를 제공한다.

문화연구는 아직까지 확고한 틀을 가지고 진행되는 학문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측면에서 여러가지 시도들이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미로 속에서 대중의 저항을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시도이기도 하다.

* 이 책은 난이도가 제법 있는 책이므로, 기본 교양서로 읽기엔 다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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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문화실천 - 김창남 | 한울 | 1995


셰익스피어가 그랬다던가? 청춘은 뉘 반항할 이 없어도 반항하는 것이라고….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이란 것이 과연 있다면 나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 기억들이 평생의 짐이 될 것이란 사실을 당시엔 알지 못했으나 그로부터 10년이 흐르고, 다시 20년째를 향해 가고 있는 도중에 돌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공부를 시작했다. 87년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열패감들은 낭패한 마음을 넘어 절망에 이르기도 했었다. 내가 생각했던 진보란 인간의 승리였으나 인간에겐 선도 악도 늘 함께 있었으므로 진보가 늘 선의 승리를 의미하진 않았다.

 

서구에서의 진보는 오랫동안 일직선상에서 사유되었다. 진보는 전진 혹은 후퇴, 정체라는 세 가지 개념 속에서만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보주의적 낙관론은 인류는 과학적, 기술적 진보를 통해 끊임없이 전진한다는 이상론이었고, 이들의 학문적 틀을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인 80년대 한국의 진보진영은 이들과 똑같은 함정에 빠져들었다. 자유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 이름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다른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가? 시장경제론자, 보수주의자 등 - 혹은 타협, 야합의)은 동서냉전의 승부에서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승리했으며 이 결과로 동구에서도 자본주의는 놀라운 효율성을 발휘할 것이라 믿었다. 그것을 진보라 믿었기에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이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승리를 자축하기도 전에 균열은 동구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서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자크 아탈리는 "역사의 미로를 걷는 인간"이란 글을 통해 "21세기를 앞둔 시기,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어떤 사람들에겐 인간이 전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겐, 그 두 이념의 패배가 진보의 확고한 전진을 보여주는 표시"였다고 말한다. 후쿠야마에게 이는 시장경제의 확고한 승리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역사의 중지를 의미했다. 진보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낙관과 비관 사이를 오고가는 시계추처럼 보인다. 낙관과 비관의 틈새는 역사는 우연인가, 필연인가라는 질문을 불러들인다. 과연 역사는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되어있는 걸까. “행복한 결말”이, “비극적 파탄”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인가. 이렇듯 진보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역사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김창남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에 녹아 있는 고민의 흔적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나의 이런 고민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진보의 새로운 기획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제 문화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영역으로(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 <중략> … 진보진영의 문화적 관심의 증폭이란 좀더 정확해진 문화에 대한 관심의 중심이 민중문화운동에서 명백히 대중문화로 이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중략> … 이와 같은 일련의 변화 속에서 ‘진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정립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다기다양한 논쟁이 지금 진보진영의 초미의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주목되는 것은 착취와 억압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이 강조되던 시절에는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일상성’과 ‘생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의 증폭이다. <본문 15-16쪽 중에서>

 

문화실천의 장(場) - 일상, 실패와 성공의 공간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을 ‘혁명 시도가 실패하는 원인이며 결과’로 봤다. 일상이란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된다. 그렇기에 일상은 우울한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말처럼 모든 혁명은 일상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실패하는 원인도 일상에서 비롯된다.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는 변화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일상에 매몰되는 변화 역시 아무 것도 성취해내지 못한다. 일상의 무기력증은 일상을 변화시킨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복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일상성의 의미 속에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개인과 그와 같은 소비적 일상을 거부하는 개인, 이 개인이 주체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르페브르는 "일상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이에 대해 김창남은 지난 80년대 진보진영의 인식은 “대중문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라기보다는 문화운동적 실천에 의해 상대적으로 얼개를 갖추어온 것”이라고 분석한다. 80년대 독재와 반독재가 서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시대에 대중문화, 대중음악을 논한다는 것은 그 의도가 아무리 진보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만큼 민주주의의 회복이 절실했고, 긴박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김창남의 말대로 “그동안의 진보의 논리가 대립과 적대의 틀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80년대식 문화비평에서 대중문화의 의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각도에서 진행되었다. 이들에게 대중은 비록 군중(mob)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대중(mass)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과 문화를 일정하게 분리하여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문화산업, 즉 대중문화는 지배계급의 상업적 가치를 재생산하도록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유기적으로 결합된 교묘한 술책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80년대의 문화비평은 문화의 세 가지 측면 가운데 주로 생산체계에 집중되었고, 이후 90년대의 문화비평은 문화의 텍스트를 해독하는데 주력했다.

 

김창남은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에서 “대중은 주어진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선택하고 선별하여 특유의 방식으로 해독하고 변형한다고 주장한다. 즉, 대중의 문화실천은 주어진 문화, 텍스트에 반영된 구조의 논리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응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 「이론적 논의」에서는 위에서 이야기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당시(90년대 초중반) 우리 사회의 소비문화 ․ 문화산업의 현실과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을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몇몇 부분들은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전의 명징함을 많이 상실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문화산업의 현황 부분에서 85년의 외화자율화와 87년의 직배사 허용 문제를 놓고 지적하고 있는 절망적 어조는 한국 영화 1,000만 명 시대에 도달한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부분적으로 수정될 필요도 있다. 제4장 「문화시장의 개방과 민족문화의 새로운 모색」에서 주장하고 있는 부분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측과 정반대로 진행되는 양상 또한 존재한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미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은 규모의 경제를 보장하는 풍부한 자국시장과 잘 발달된 다매체 ․ 다채널을 이용한 창구효과, 가장 넓은 언어권, 풍부한 자본과 기술, 인력 등의 요인을 배경으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고히 하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들조차도 탈규제와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맞아 미국 프로그램의 시장 확대를 막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산업의 기반이 취약한 우리나라가 성급히 다매체 ․ 다채널 시대를 맞게 됨으로써 미국 문화산업에 의한 시장장악은 한층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 역시 머지않아 이루어질 전망이다. 만화나 게임 등의 분야에서 사실상의 개방이 이루어진 지 오래이긴 하지만 일본영화나 가요의 수입이 합법화될 경우,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일정 기간 안에 우리시장내 일본문화와 가요의 영역이 확보될 것이며 이는 그만큼 우리 문화산업의 위축을 가져올 것이 때문이다. <본문 38-39쪽> 중에서

 

위의 전망이 예견한 바대로 현재에도 우리 사회에서 미국과 일본의 문화산업이 미치고 있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지만 우리 문화산업의 전반이 미 ․ 일의 문화산업 때문에 현재 위축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창남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부분은 위와 같은 현황 분석과 전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핵심”을 논하고 있는 부분이다.

 

대중문화와 민중문화의 첨예한 이분법에 근거한 기존 방식의 문화운동은 이제 현실적인 힘을 갖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와 민중문화를 그 출신성분에 따라 선험적으로 가르는 일이 아니라 대중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실천태 속에서 지배적인 층위와 저항적인 층위를 변별하는 일이다. 여기서 문화운동은 대중의 일상적인 문화실천에 존재하는 지배적인 층위를 약화시키고 대항적 층위를 강화시키는 일로 규정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중을 단일한 계급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다양하게 분화된 하위집단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양하게 분화된 대중집단의 삶의 조건과 현실, 욕구와 감각에 대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각 집단에 맞는 다양한 접근 방식이 찾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우리의 대중문화 읽기가 단지 텍스트 분석의 차원에서 나아가 ‘대중읽기’의 차원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 75쪽> 중에서

 

“대중과 대중문화”는 그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화한다. 이러한 전망은 80년대 문화비평이 지니고 있던 한계 - 대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던 -를 극복하고, 문화적 진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게 해준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대중을 획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90년대 한국사회 하위문화의 다층적 구조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의 2부는 그간 외국의 사례만을 인용해왔던 하위문화 방법론을  국내에 적용해 본 사실상 최초의 연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지난 1991년 동구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우연찮게 맞물리는 시기에 우리 사회는 신세대문화 담론으로 들끓었지만, 실제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진 바가 없었다. 모두가 즉자적(卽自的)이고 감각적인 반응으로 신세대 문화담론을 유행처럼 소모했을 뿐이다. 김창남은 2부에서 우리 사회의 각 하위 집단이 동일한 물질과 역사적 조건 속에 공유하는 문화적 특성들을 대중음악 수용태도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우선 부모계급문화와 일정하게 대립되면서 상호의존적 형태로 나타나는 청소년 집단의 문화적 실천과 특성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 청소년 집단이 보이고 있는 문화적 실천의 특징은 모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청소년집단이 부모계급문화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적극성에서 두드러진다. 이들은 학교라는 기성문화의 재교육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음악을 저항적 의미로 수용한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더욱 적극적이고 예민한 자세를 보인다. 김창남은 이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여학생들이 겪는 억압이 남학생들에 비해 더 심하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창남이 청소년 집단의 문화적 실천에 대해 가하고 있는 분석에서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기존의 신세대론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최근 유행하는 이른바 신세대론이 가지는 큰 맹점 중의 하나가 청소년 세대가 부모세대와 비교하여 가지는 차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그들의 저항이 결국 ‘상징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데 있다. 청소년들은 아직 부모세대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러한 현실적 조건을 거부하기 보다는 그에 타협하려고 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런 타협의 형태가 상징적인 수준에서의 저항이라는 하위문화적 특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본문 126-127쪽> 중에서

 

현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집단은 역시 사회 계급이다. 그리고 주요한 문화적 흐름은 계급 문화라 할 수 있는데, 김창남은 이를 다시 세분하여 “사무직 노동자 집단, 생산직 노동자 집단, 중산층 주부 집단”으로 구분한다. 사무직 노동자 집단이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 청소년 집단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이들이 대중음악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현실을 돌아보는데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대목이다. 그에 비해 생산직 노동자 집단이 보이는 태도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대중음악 취향과 실천은 작업장의 환경, 경제적 여유의 부족 등으로 인해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하위문화적 특성 - 혼자 노래부르기, 집단적 공간에서의 소리지르기, 일하며 듣기 등 - 을 드러내고 있다. 중산층 주부 집단은 사무직 ․ 생산직 노동자 집단보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대중음악 수용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주부들은 일상에서의 종속적인 위치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하지만 궁극적인 탈출을 추구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종속적인 위치를 당연시하고 있다, 그들의 도피는 스스로 인식하고 있듯이 일시적이며, 종속적 위치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주부들은 남성가수의 여성화 경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면서 여성 가수에 대해서는 규범적인 여성성을 주문하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표하면서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여성가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략>… 기본적으로 기성의 가치관 속에서 성장한 세대이면서 신세대 자녀를 키우는 중년세대로서 경험하는 문화적 갈등이 상대적으로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중산층’의 ‘여성’으로서 가지는 종속적 위치와 접합하여 다소 착종된 정체성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 220-221쪽> 중에서

 

문화실천의 공간에서 기획의 주체로 선다는 것

우리는 일상을 늘 진부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노는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다람쥐 쳇바퀴란 표현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그물보다도 더 촘촘하게 짜인 인간관계와 사회의 그물망에 포섭되어 있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 권력 관계와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일상은 하루하루 무의미한 경험의 연속으로 비춰지고, 삶은 조각난 파편처럼 아무 의미를 얻지 못한 무엇으로 개인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바흐친으로부터 비롯된 민중 혹은 대중의 일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앙리 르페브르, 미셀 드 세르토 등과 같은 문화연구자들은 일상이 단지 파편화된 개인이 권력 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에 대항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우리들 스스로가 주체적인 존재로 실천해간다면, 문화의 일상은 더 이상 무기력한 삶의 반복이 아니다. 일상, 그것은 변혁에 대해 품고 있는 희망처럼, 혹은 삶의 진실한 측면이 그러하듯, 불꽃처럼 일순간 환하게 타올랐다가 꺼져버리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 혁명의 미래라면, 일상은 바로 미래의 어제이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습득하고 창조하고 소통하는 존재(a learning, creating, communicating being)라면, 인간의 이러한 본성에 걸 맞는 유일한 사회적 체제는 참여민주주의이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고유한 개체로서 습득하고 소통하고 스스로를 지배한다. 이보다 열등하고 제한적인 체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의 원천을 소진시켜 버린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말은 김창남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 또한 인간에 대한 낙관, 대중을 해방적 기획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혹은 근대에 대한 해방적 기획(정치적 ․ 문화적 실천)은 공동체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해방적 기획의 회복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구분 짓기가 아닌, 고상하고 위대한 선각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 사상, 행동, 욕망 등이 종합적으로 조립된 문화에 의한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들의 문화는 그들만의 경험을 통해 기존 체제에 대해 대항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대중들의 자발적인 실천은 더욱 강조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은 대중의 자발적인 문화실천에 대한 진지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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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와 문화이론 - 존 스토리 | 박이소 (옮긴이)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1999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문화이론을 개괄하는 입문서이다. 이 방면의 개론서로 이 책을 포함해 김정은의 "대중문화읽기와 비평적 글쓰기",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를 포함해 모두 4종을 읽었고 다른 책들에 대해선 차례차례 서평한 바 있으니 문화이론 입문서 가운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은 대체로 읽은 셈이다. 그러니 혹자는 그렇게 묻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어느 걸 읽는 것이 가장 좋으냔 의문을 품을 법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엇을 읽든 별상관없을 듯 싶다. 대체로 4종의 책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김정은의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는 난이도면에선 가장 쉽지만 쉬운 만큼 간추린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른 책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물론,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루카치, 벤야민, 하우저 등의 다른 저작들을 읽은 분이라면 도리어 그것이 굉장한 장점일 수 있다).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은 앞서 김정은의 책에 비해 심도 있는 접근을 꾀하고, 국내 상황을 함께 다룬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문보다 문장이 난삽하고, 어떤 예시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는 단점을 지닌다. 그에 비해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는 문장이나 기타 한국적 상황들을 다룬 점에서는 원용진의 책보다 뛰어나지만, 해외이론 소개 편에서 생략된 부분이 많다는 단점을 가진다. 이에 비해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비록 부분적으로 문장이 어색한 부분은 있지만, 원용진의 것보다 어떤 면에선 정리도 잘 되어 있고, 문장도 상대적으로 덜 난삽하다. 게다가 한국적 상황이나 예시를 고려할 까닭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서구의 문화이론을 이론적으로 접근하려는 목적으로 읽기엔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4종의 책을 모두 읽을 까닭은 없지만, 어느 한 종만 읽기 보다는 2종 정도를 서로 대비해가며 읽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이다.

 

이 책의 원제가  "An Introductory Guide to 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인데 영어명이 의미하는 바는 '대중(긍정적 내지는 중립적인 의미에서의 대중)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한 예비(입문)단계의 가이드'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에 대한 입문서'란 뜻이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이 책의 목차는 그대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을 공부하는데 가장 적절한 커리큘럼이며, 다른 입문서들도 그 순서나 내용 배치면에서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배치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1장 대중문화란 무엇인가"에서는 대중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대중문화는 "대중+문화"가 합쳐진 말이다.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알기 위해선 먼저 문화가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저자는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윌리엄즌는 문화를 넓은 의미에서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문화는 지적, 정신적, 심미적인 계발의 일반적인 과정, 2.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 방식, 3.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 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존 스토리는 대중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이데올로기를 지목하고,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정의와 쓰임새를 소개한다.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단일한 용어로 표기하지만 영어 표기에서 대중문화는 mass와 popular로 구분된다(이에 대해선 전에 다른 서평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이어 "2장 문화와 문명의 전통"에서는 우리에게도 뿌리깊이 고정되어 있는 문화 관념인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충동을 이야기한다. 19세기 이후 정치적 자유주의, 산업화와 도시화로부터 비롯된 대중의 출현은 그동안 고급문화의 생산자이자 주된 소비자였던 사회의 상층계급을 크게 긴장시킨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 출현한 여러 미디어들(당시엔 주로 신문, 잡지였으나 점차 대중교육의 확대, 라디오, TV의 출현 등)로 인해 소위 대중들이 즐기고 향유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이에 대해 매튜 아놀드 등을 비롯한 당시의 지식인들은 대중문화가 문화 전반에 걸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고 보았고, 이를 분리하거나 대중들을 계몽하여 고급 문화의 향유자로 변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런 논쟁은 매튜 아놀드 이후 리비스주의로 넘어가면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전세계로 널리 전파된다. 이를 통해 문화를 고급문화와 대중(저급)문화로 구분하는 이분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과연 문화의 고급과 저급을 구분하는데 대중이란 잣대가 적당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존 스토리는 영국 출신의 학자인 까닭일까? 우선적으로 문화연구의 여러 경향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영국의 버밍엄대학 현대문화연구센터의 학자들이 일군 "문화주의"를 3장으로 끌어낸다. 마르크스주의를 먼저 끄집어낸 다른 책들과는 약간 다른 점인데, 헤게모니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의 이런 구분은 나름대로 적당해 보인다. 문화주의는 영국 피지배계급의 역사적 경험을 정리하면서 전개된다.1950년대 말엽부터 주로 영국의 이론가들(Richard Hoggart, Edward. P. Thompson, Raymond Williams, Stuart Hall)에서 부각되기 시작한(영국의 문화 연구는 전후 영국의 특수한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자본주의적 산업 생산 양식의 부활, 복지 정책의 수립, 그리고 동구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구 세력의 결집 등으로 인해 변모하는 영국적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다. 전쟁 전의 영국과는 단절된 듯한 변화들, 현대화 및 미국화된 대중문화,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이나 이데올로기가 중류계급과 차별성이 없어지면서) 연구 전통이다. 문화주의의 핵심적인 전통은 문화의 수동적 소비보다 능동적 생산, 즉 인간의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대립되는 특징을 가진다.

 

사회변혁의 주체인 노동계급이 즐기는 대중문화가 노동계급 형성 및 유지에 어떤 역할을 하는 가를 논의하려 했다. 문화주의에 속하는 이들은 대중문화의 주체인 대중을 새롭게 해석하여, 대중이 수동적이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했다. 문화주의자들이 말하는 피지배계급은 단순히 계급적인 축(항상 노동계급 이상의 의미를 지님)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문화라는 영역은 물질적 토대에서 상대적인 독립성을 누릴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물질적 토대에 개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문화주의는 구조보다는 인간에, 이데올로기보다는 인간의 경험에, 지배계급의 전략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전술에 관심을 갖는다. 문화주의는 대중이 문화적 실천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적 영역을 구축해가는 능동적인 모습을 찾으려 시도한다.

 

4장에서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다루고 있다. 구조주의는 이론이면서 동시에 방법론이기도 한 학문 분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규칙과 개념을 기초로 다양한 문화분석에 적용되어 많은 성과를 낳았으며, 현재까지도 문화분석 툴로써 여러 비판들이 있으나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구조주의의 이론적 경향을 보여주는 특성은 한 마디로 ‘구조(structure)’라는 말 자체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구조란 겉으로 드러나는 표피적 현상의 밑바닥에 존재하면서 그 표피적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나 행위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인 원리나 체계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조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어떤 문화적 텍스트나 행위가 그 자체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텍스트나 행위의 내부적 혹은 외부적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즉 구조)에 의해 그 의미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현상이 바로 언어다. 서로 다른 언어의 선택, 서로 다른 방식의 언어 배열은 서로 다른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런 맥락에서 구조주의자들은 ‘언어가 현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구조주의적 입장에서의 문화 분석 1) 문화적 표상이 특정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고 2) 문화적 표상이 의미를 내는 방식 - 의미 체계 -를 분석하고, 3)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영향, 즉 주체 형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이 책에서는 소쉬르, 레비 스트로스와 롤랑 바르트를 소개하면서 구조주의 이론이 어떻게 미국 서부극 장르에 숨겨진 신화를 드러내는가 실례(윌 라이트)를 통해 보여준다.

 

5장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문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은 문화론이라고 명확하게 내세운 하나의 이론 체계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이라는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문화이론도 없다. 마르크스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진술을 남기고 있는데, “토대-상부구조의 문제(base and superstructure)”의 문제 - 사회를 이루는 두 요소, 즉 경제적 기초(토대)와 사회적 의식의 모든 형태들인 상부구조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로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에 있어 문화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문제의 핵심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determination)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있다.

 

경제결정론(기계론적 결정론, 속류 마르크스주의) - 상부구조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는 아무런 자율성을 지니지 못하며 단지 토대가 되는 경제구조의 단순한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반영이론(reflection theory), 모든 문화는 그것을 생산한 사회의 경제구조의 단순한 반영일 뿐이다. 대중문화의 의미는 단지 그것을 생산한 경제구조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예술성보다 구호성을 강조했던 프롤렛쿨트(proletkult)같은 교조적인 예술론도 이런 기계적 결정론의 맥락에 있다.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기능; 권력을 지닌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포장하는 이념이다. 지배계급에 의해서 생산되는 대중문화의 내용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대중들이 계급적 갈등과 불평을 느끼지 못하는 허위의식을 갖게 된다. 사회변동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계급이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대중문화를 즐기게 된다. 계급문화론, 이데올로기는 계급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게 막는 역할과 지배방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문화적 텍스트(종교, 법, 도덕, 관습, 책 등)는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반영물이다.

 

여기에 루카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알튀세르의 주요 개념들, 그리고 문화주의와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한 데 아우르고, 아우를 수 있는(개인적인 생각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두루 설명하고 있다. 사실 6장에서 다루는 "페미니즘"은 구조주의 직후 내지는 7장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나왔어야 적당할 수 있을 듯 싶다. 페미니즘의 정치학은 몰라도 페미니즘 문화학은 확실히 이들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크다. 페미니즘은 대중문화 속에 숨겨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구조를 분석해낸다. 8장은 문화연구의 전체적인 부분을 다룬다. 여러 이론들엔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며, 모든 이론이 그러하듯 완벽한 분석틀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중문화를 옹호하려는 측과 대중문화를 비난하려는 측 사이에 벌어지는 오랜 논쟁의 결과인 듯 싶다. 문화이론를 어떻게 바라보든 문제는 한 가지다. 대중문화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전의 장이며, 이 싸움은 계급 혹은 문화적 이질성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거란 사실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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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 임진모/ 창공사(1996)


내 나름대로는 정리할 건 정리하고 넘어가자는 차원에서 오래전부터 빚진 책들에 대해 빚을 갚는다는 생각에서 나름의 정리작업으로 하고 있다. 이 책 그러니까, 임진모의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은 오랫동안 내 책꽂이에 늘 꽂혀있던 몇 권의 책 가운데 하나다. 세광음악출판사에서 나온 "팝아티스트대사전" 옆자리에 늘 함께 한 책인데, 내가 늘 아쉬워하는 것은 이런 류의 책들이 쌓아올린 작업들은 나름대로 한 시대를 정리하는 중요한 지적, 학문적 작업일 수 있는데, 어째서 수정증보판이 나오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은 일종의 문화사, 서구 대중음악사를 시대별로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 책의 부제 "음반으로 보는 팝과 록의 역사"는 이 책의 내용을 정의하면서 동시에 이 작업이 대중음악사의 한 부분을 연구하는 기초적인 자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이 지난 1994년에 출간되었으니 아무리 가깝게 잡아도 이미 10년 전의 음악사밖에 수록할 수가 없다. 즉,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음반으로 보는 팝과 록의 역사 가운데 가장 최근사인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는 공백으로 남아있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대중음악을 다루는 웹진들이 존재하고, 그런 작업들을 통해서도 이런 작업들은 진행되고, 축적되고 있겠지만, 책으로 엮는 것과 인터넷상으로 둥둥 떠나니는 작업과는 일정한 차이를 갖는다.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이 담고 있는 콘텐츠는 1950년대 발원해서 1990년대 초반에 이르는 서구 대중음악의 역사를 100장의 앨범들을 통해 시대사와 연관시켜 가며 살펴본다는 점에서 다소 과정을 섞어 말하자면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대중음악의 사회사"로 치환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하우저의 작업에 비견되기 위해서는 좀더 복잡한 학문적 검증 절차와 심도 있는 비평 작업이 필요한 것이지만 말이다. 임진모는 서문에서 "대중음악은 시대를 반영한다. 또한 대중음악은 음반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 형식과 내용을 구체화한다. 따라서 음반에는 단순히 한 아티스트나 그들의 음악뿐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시대와 대중의 정서가 담겨 있다. 음반만큼 그 시대상황과 직결되어 있는 수단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이 중시되다 보니 소위 음악적(이 말은 미학적이란 말이기도 하다)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당연히 명반의 범주에 들어야 할 음반들보다는 그 시대의 표상 내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음반을 위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임진모는 마빈 게이(Marvin Gaye)의 앨범 "What's Going on"을 이야기하면서 단지 이 앨범의 음악적 가치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당신 말야. 오늘 신문 봤어? 켄트 주립대학에서 죽은 학생들에 대한 기사 읽었지? 켄트 사태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잠도 못자고 계속 울기만 했다니까. 이제 달이라든지 유월 어쩌구하는 3분짜리 노래를 부른 건 싫어."

 

마빈 게이는 모타운 레코드사의 작곡가인 알 클리블랜드와 레날도 벤슨이 "What's Going on"을 써 왔을 때 예전처럼 신변잡기식 노래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마빈 게이는 본래 흑인 프랭크 시내트라를 꿈꾸었던 가수였다. 당시 모타운은 물론 대개의 음반사들은 작곡가나 기획자들이 음반 제작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자의식을 가진 아티스트를 원치 않았다. 마빈 게이는 이들과도 투쟁해 자신의 앨범을 세상에 내보냈고, 이 음반은 8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젊은 날 흑인 프랭크 시내트라를 꿈꿨던 마빈 게이는 고통을 노래하고,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흑인 소울로 되돌아와 성공했다.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계속 인기를 얻다가 70년대 후반부터 약물 문제와 우울증으로 괴로움을 겪었다. 이후 그는 모타운에서 20년 동안 활동한 뒤 컬럼비아로 옮겨 앨범 "Midnight Love"(1982)를 발표하며 재기에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빈 게이는 아버지와 다투다 총에 맞아 사망했다.

 

임진모의 책은 좀더 깊이 들어가길 원하는 독자에겐 다소 얕고, 그저 음악만 즐기고자 하는 이에겐 너무 깊은 이야기를 다룬다. 마빈 게이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What's Going on?"라고 반문했던 건 잠시였다. 유럽의 68혁명은 잠시 폭풍으로 지나갔고, 미국의 반전운동은 히피들의 마리화나와 섹스 속에서 일시적인 일탈에 그쳤다. 마빈 게이 역시 다시 개인의 고통과 에로티시즘으로 침잠해들어갔다. 시대는 대중문화가 진보적이거나 저항적인 메시지를 담는 걸 별로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이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임진모의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은 대중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이제 막 고조되던 초기의 성과물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많이 뒤처지거나 얕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대중음악과 사회의 연관성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만들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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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하룻밤의지식여행12) - 지아우딘사르다르 | 이영아 옮김 | 김영사(2002)


나는 이런 식의 도서에 익숙한 편이다. 그러니까 80년대 말엽에서 90년대 초엽 사이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던 리우스의 만화책들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엔 사회과학 서적을 중심으로 출판하던 "오월"에서 "리우스"(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멕시코의 좌파 만화가)가 이런 식의 작업들을 통해 일련의 만화 책들을 시리즈로 간행했다. 사회과학 이론의 빡빡함에 미리부터 질려버린 까닭으로, 혹은 좀더 쉽게 입문하기 위한 방편에서 이 책을 선택했던 이들에겐 상당한 도움을 준 책이다. 리우스는 "쿠바혁명과 카스트로", "레닌", "체 게바라" 등 혁명가들의 생애와 사상, 그들의 이론을 나름대로 잘 요약해주었다.

김영사에서 펴내고 있는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 중 한 권을 읽었다.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그것인데, 얼마전 누군가가 이 책은 아니고 이 책의 한 시리즈 중 노암 촘스키 편에 대해 썼던 리뷰도 있었지만, 이 책 혹은 이 시리즈 중 어느 책이든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머리 속에서 "하룻밤"이란 글자를 빨리 삭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룻밤"만에 이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다 알게 된다거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란 말이다. 이 시리즈가 다루고 있는 면면을 살펴보면 더 빨리 이해될 수 있다.

1권에서
"노암 촘스키", 그리고 연이어 "양자론, 수학, 진화심리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 플라톤, 포스트페미니즘(헉, 페미니즘도 어려운데 거기에 붙였다 하면 뭐든 세 배는 더 어렵게 만드는 "포스트"까지 붙어 있다. 나는 "포스트"자가 붙은 건 심지어 시리얼 메이커까지도 싫어지더라구.), 이슬람, 문화연구, 기호학, 프로이트, 라캉, 융, 호킹, 정신분석, 데리다" 그리고 앞으로 "푸코" 도 낸다고 한다. 앞서 포스트페미니즘에 대해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한 가지 개념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 앞에 접두사가 붙는 학문은 더욱 어렵다. 예를 들어 아동문학이 그냥 문학보다 어려운 까닭은 그 앞에 아동이 붙기 때문이다. 아동을 알아야 하고, 문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허투루하면 모를까, 진짜 아동문학을 잘 하기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보다 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하기사 무엇이든 제대로 하기란 참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룻밤의 지식여행"이란 기획으로 정말 하룻밤만에 끝낼 수 있을까?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사기라고 해야 할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대로만 해준다면 그래서 그 여러 개념들이 대관절 어떤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지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면, 나름의 성과를 거두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룻밤이란 말만 지워버리고 시작한다면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결론삼아 말하자면 지아우딘 샤르다르의 "문화연구"는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도움이 된 책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화""영화"만큼이나 대중적인 화두이다. 문화에 대해 한 두 마디쯤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시인이 어느날 갑자기 문화평론가로 등장해서 TV에서 그럴듯한 해설을 읊조리는 광경이 더이상 낯설지 않다. 문화는 방금나온 따끈한 빵처럼 말랑거려서 누구라도 손쉽게 조물딱거리면 만들어 낼 수 있는 학문 분야처럼 보인다. 

거기에 대중문화란 말이 붙으면 더 쉽게 느껴진다.
"대중문화 = 저급문화, 상업문화"란 등식이 존재하다보니 누구나 쉽게 즐기고,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으니 그걸 공부하는 일도 쉬우리라 생각하게 된다. 문화연구의 함정이 거기에 있다. 문화는 도처에 있고, 누구나 즐기는 것이기에 어디에도 없고, 누구도 해석하기 어렵다(반대로 누구나 해석할 수 있기도 하다). 누구나 잘 아는 듯 여기지만 막상 말로 그것을 정의하고, 그 안에 숨겨진 여러 함의들을 찾아 해석해내고, 연구하는 범주 안으로 들어가면 미노타우르스의 미로처럼 얽히고 섥?것이 (대중)문화란 것을 금방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화연구의 이론(가)들을 살펴보자.

맨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여사, 그리고 문화연구의 창시자로 손 꼽히는 레이먼드 윌리엄스, 사회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다. 문화연구는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이론과 방법론들을 빌려와서 제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즉, 대충 몰라도 넘어갈 수 있는가하면 제대로 걸리면
(혹은 제대로 하려면 이 모든 것들을 손대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거다) 금방 밑천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소쉬르, 로만 야곱슨, 롤랑 바르트로 이어지는 기호학, 키플링, 포스터와 같은 문학, E.P.톰슨 같은 역사,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같은 20세기 메타 이론에서 다시 이들을 뿌리로 하여 등장하는 알튀세르, 그람시, 리오타르, 부르디외에서 스피박에 이르는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CPU과열현상을 빚는 인물들이 즐비하다.

그러니 이 책을 하룻밤만에 읽고 끝낸다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이 책도 나름대로 유의미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짤막한 요점 정리를 통해 문화연구의 다종다양한 분야의 개념들과 연구자들, 그들이 문화연구란 거대한 테마 속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데는 아주 괜찮은 지도책이란 사실이다. 지도에는 온갖 기호들로 거리와 위치, 통과해야할 도로의 번호들이 명시되어 있다. 물론 지도책 없이 헤매면서 찾아가도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목적은 이룰 수 있다. 미로를 헤매는 과정에서 더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리아드네의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이었듯, 비록 이 책이 건네주는 실오라기는 가늘고,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문화연구의 미로를 헤매는데 꽤 믿을 만한 나침반 아니, 그 지도 상에 아로 새겨진 기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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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사랑 이야기(살림지식총서 91) - 안재필 | 살림(2004)


앞서 오승욱의 "한국 액션 영화"를 읽고 나서, 화장실에 갈 때 들고 간 책이 안재필의 "세기의 사랑 이야기"다. 화장실 가서 담배 두 대 피워문 동안 다 읽었다고 하면 심한 뻥이겠지만, 변비 있으신 분들은 필경 다 읽고 나올 수도 있겠다. 이유는 두 가지다. 쉽고 재미있으니까. 이 책은 살림지식총서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전체 쪽수가 96쪽이다. 그러므로 맘만 먹으면(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한 시간에 두 번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만 안뜻 봐가지고는 내용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세기의 사랑 이야기"하면 누가 먼저 떠오를까? 왕위를 버린 윈저공과 심프슨 부인의 사랑, 비극으로 끝난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비의 사랑. (글쎄, 누구의 사랑은 세기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대중 사회의 도래 이후 그깟 핏줄에 의한 왕족 나부랑이보다 더 많은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이들은 역시 "스타"다. 스타에겐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미지까지 펼쳐진다. 그들은 이미 인간을 초월한 신성(神性)을 지닌 존재로 승화된다.

 

스타에도 여러 길이 있다. 세기의 사랑이라 불릴만한 스타들의 사랑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차드 버튼의 사랑이 있을 테고, 머릴린 먼로의 남성들(케네디, 디마지오, 시내트라, 이브 몽땅 등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몰라도), 나브라틸로바의 동성애인들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런데 저자 안재필은 음악전문칼럼니스트다. 그래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세기의 사랑 이야기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 그리고 패티 보이드", "시드 비셔스와 낸시 스핑겐", "오지 오스본과 샤론 오스본", "토미 리와 파멜라 앤더슨", "커트 코베인과 코트니 러브",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저스틴 팀벌레이크"의 이야기다. 다시 말해 이 책의 제목은 "팝스타들의 사랑" 내지는 "팝스타들, 세기의 사랑 이야기" 정도가 내용을 설명하기엔 더욱 적당해 보인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 그리고 패티 보이드"의 이야기야 이미 한 세대도 이전 이야기가 되었으니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얘기일 테고, "시드 비셔스와 낸시 스핑겐"("시드 비셔스"라 "비셔스, 비셔스" 이름이 너무 멋지지 않은가? 그렇다. "카우보이 비밥"의 그 "비셔스"와 같은 이름이다. 역으로 이렇게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섹스 피스톨스를 모르는 이들은) 이야기는 이들의 이름을 딴 영화 "시드와 낸시"로도 만들어졌다. 시드 역에는 게리 올드만이 나왔었다. 이 분야의 꽤 좋은 영화로 평가받는다. 오지 오스본은 블랙 사바스와 오지 오스본 밴드를 통해 악명높은 퍼포먼스로 널리 알려진 뮤지션이고, 글래머의 대명사인 파멜라 앤더슨과 헤비 메탈 밴드 머틀리 크루의 토미 리 역시 요즘 신세대들에겐 좀 그럴지 몰라도, 고 바로 윗 세대들은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룹 "너바나"의 리드 보컬이자, 또 다른 짐 모리슨이 되었던 "커트 코베인"...그들은 각각 그들이 추구한 음악 세계와 자신의 가치관을 삶과 사랑을 통해 증명해보였다. 대중문화산업의 인큐베이터에서 성장한 브리트니와 저스틴의 사랑 역시 그들 나름으로는 진지한 것이었을 게다. 물론 이 책은 스타들의 연애담 내지는 결혼 생활을 중심으로 다룬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사랑이 결코 그들의 삶과 음악과 다르지 않았음을 잘 드러내준다. 언젠가 이들에 대한 좀더 자세한 책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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