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액션영화(살림지식총서 44) - 오승욱 | 살림(2003)


▶ 고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암살자>


시집 한 권에 1,500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야 그 시절보다 더 저렴했던 시절도 있었을 테니 두 말하면 입 아픈 얘기다. 요새 시집 한 권에 얼마더라... 하고 살펴보니 한 권에 6,000원 정도 한단다. 이번에 살림지식총서 중 예술 분야로 묶인 10권들이 한 세트를 구입했다. 정가대로하면 33,000원이다. 물론 인터넷으로 구했으니 가격은 더 저렴해진다. 어쨌든 이 한 권의 정가는 3,300원이다. 시집이랑 판형이 똑같고, 쪽수도 100쪽 안팎으로 손에 잡히는 느낌도 똑같다.

 

이 책은 주제가 재미있어서 먼저 읽게 된 책이다. 제목하여 "한국 액션 영화"다. 액션 영화라... 액션영화는 비디오 가게를 즐겨찾는 배부르고, 적당히 삶이 피곤한 인생들이 시간 떼우기용으로 빌려보기 딱이란 선입견이 먼저 든다. 또 실제로도 그런 이들이 즐겨 찾는다. 아줌마들이 TV드라마를 놓친다고 해도 스토리 이어가기에 별로 문제가 없듯  액션 비디오를 돌리면서 잠깐 화장실 갔다 온다 해서 스토리에 어떤 단절이 오지 않는다. 그 말은 액션 장르의 문법, 서사구조가 대동소이한 탓이다.

 

같은 문법에 약간의 비틀기만 들어가도 액션 영화란 장르에서는 성공적이란 평을 듣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약간이라도 비틀면서 그것이 어색해지지 않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생각해보라 영화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분야가 어느 것일지) "좀 더, 좀 더, 좀 더"하면서 액션의 강도가 강화되다보니 스너프 무비가 아닌 이상 액션이 보여줄 수 있는 것, 액션이 도달할 수 있는 묘사는 어지간해서는 대중을 감동시키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악역은 더욱 잔인해져야 하고, 카타르시스를 위해 악역의 최후는 더욱 비참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봐야 또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는 거다. 그래서 액션영화는 상업영화의 주류 장르이면서도 영화비평가들이나 연구자들에겐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장르다. 이 책은 그 틈새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스틸 컷 


"올드 보이"
는 액션 영화다. 아닌가? 아니라고 해도 좋지만, 액션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를 그대로 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때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상처를 준 죄로 가족을 잃고, 악마 같은 인물이 짜놓은 얼개대로 자신의 딸과 근친상간을 맺고, 그것을 알게 되고, 복수하고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으로 살다가 최면을 통해 그런 자신의 과거 중 일부를 지워버린다는 내용이다. 물론, 과거 액션영화들이 보여주듯 단순도식화된 패러다임은 아니지만, 기본 구조 자체는 액션영화의 틀 속에 있다.

 

오승욱"한국액션영화""올드보이"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60년대말에서 70년대 초의 한국 영화 가운데 액션 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영화들에 대한 시네마 키드이자 현재 영화인이기도 한 오승욱(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영화인)"그땐 그랬지"류의 회고담이다. 그러나 그는 회고하기엔 아직 너무 젊고, 그저 킬킬거리고 웃자니 지금 현장에 있는 영화인이므로 일반 독자들이 그러하듯 킬킬거리고 웃기만 할 수는 없다. 물론 무겁게 몸 한 번 풀자고 쓴 글이 아니니 액션영화에 대한 미학적 분석이나 고리타분해지기까지한 영화이론을 한 바탕 풀어놓고 사라지는 글도 아니다. 그는 개인의 회고를 통해 대중성을 얻고, 틈틈이 자신의 견해를 녹여낸다(글 잘 쓴다, 하긴 당연하지 ).


▶ <놈놈놈>은 갑자기 튀어나온 영화가 아니다. '만주 웨스턴'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
 

그는 과거 한국영화의 전성기이자 동시에 쇠망기이기도 했던 호시절의 액션영화들을 살펴보면서 무언으로 현재 한국 영화가 누리고 있는 영화와 번성의 기운 속에서 우리의 뿌리를 들추어낸다. 협객, 김효천, 박노식, 이두용 등의 이야기... 어떻게 하면 영화 속에서 총기 사용을 그럴듯하게 꾸며볼까 고민하는(한국은 총기소지가 금지되어 있으므로) 속에서 만들어진 만주 웨스턴까지... 100여쪽 내외의 짤막한 글에서 우리 영화, 액션 장르에 대한 그의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글을 읽는 건 분명 즐거웠다. 내외에 널리 권하고 싶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한국전쟁영화 <포화속으로>의 한 장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대중 문화의 패러다임』 - 원용진 | 한나래(1996)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인 원용진의 책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은 대중문화이론에 대한 기초 입문서로는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다. 이 책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적인 책이란 증거는 이 책의 판권란에 기재된 쇄수를 확인해도 알 수 있다. 1996년 10월 초판이 인쇄된 이후 내가 소장하고 있는 2004년 9월까지 1판 16쇄를 찍어내고 있다. 최근 인문학 관련 서적들의 초판 인쇄 부수가 300부까지 떨어졌다는 비관적인 출판계 뉴스가 들려오는 이 때에 원용진 교수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은 단연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책머리에" 해당하는 글의 제목을 "변명 몇 가지"란 제목으로 대체하고 있다. 변명의 내용인 즉 1993년부터 이 책의 집필을 시작했으나 미국에서 친구가 보내준 책 한 권이 그가 저술하고 있는 책과 내용은 물론, 책의 순서, 참고문헌의 내용까지도 겹치는 책이란 사실이다. 저서란 기본적으로 저자의 창작물이라고 했을 때 원용진의 고민은 심각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부분을 읽노라니 문득 떠오르는 책이 한 권 있었다.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이란 책인데,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을 출간한 출판사 한나래는 언론문화총서 시리즈로 대중문화 연구와 관련된 여러 종의 책들을 펴내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지점에서 또다른 시리즈를 펴내고 있는 출판사가 "현실문화연구"다.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이 국내에서 출판된 것이 1994년의 일이고, 내가 소장하고 있는 판이 1995년에 나온 재판이다. 최근까지 이 책이 출간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은 저자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과 달리 책으로서는 물론, 저자의 창작물로서도 독자적인 지형을 확보하고 있으며 생명력을 지녔다는 반증이다. 사실,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과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물론 얼마전 서평을 올리기도 했던 김정은의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 그리고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는 약간의(사실 약간이라고 하기엔 큰 차이지만) 차이를 제외하곤 대중문화이론 입문서로 공통된 주제와 분야를 다루는 책들이다. 이들 책이 지니고 있는 앞서 작다고는 했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기획과 장단점을 지닌 책들이다(물론 나는 위에 언급한 네 종의 책을 모두 읽었다).

 

김정은의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용 교재를 엮은 것으로 이 분야의 책 가운데 가장 쉽고, 재미있으면서 중요한 개념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미리 결론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은 김정은의 것을 좀더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 대중문화이론에 대해 좀더 깊이있는 공부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란 말이다. 거기에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과의 차별점은 존 스토리의 저서가 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라면, 원용진의 책은 국내의 사례를 들고 있기에 사례를 중심으로 이해하기엔 이 책이 좀더 편하다. 김창남의 책 역시 그런 점에서는 같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한 가지 김창남의 책은 이런 대중문화이론 국내 수용 부분에 대해 별도의 장으로 빼내어 다루고 있다는 점이 원용진의 책과 다른 점이다.

 

대중문화이론에 대한 입문서로 위에 언급하고 있는 네 권의 책은(그외에도 몇 종이 더 있지만) 국내에 출판된 것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고, 권할 만한 책이란 공통점을 지닌 것들이다(앞서 이미 두 권의 책 - 김정은, 김창남 - 은 리뷰한 바 있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란 무엇일까?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면 위에서 다루고 있는 책들을 읽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다만 대중문화가 미학이나 사회학, 정치학, 언론학 등과 다른 독자적인 지형을 차지할 수 있고, 차지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는 이야기할 수 있을 듯 싶다. 그에 대해 원용진은 지난 1995년 봄 서울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신문기사를 인용해 설명한다.

 

서울 서대문 경찰서는 13일 대학 캠퍼스 안의 조형 미술 작품을 고철덩어리로 잘못 알고 고물상에 팔아넘긴 혐의로 인부 조모 씨 등 2명을 구속. 조씨는 11일 오후 6시 10분쯤 상명여대 운동장에서 철제 조각품 5점(학교측 시가 3,000만 원 주장)을 타이탄 트럭에 싣고 나가 인근 d고물상에 2만 150원을 받고 팔았다는 것. 조씨는 12일 오전에도 용접기를 준비해 "고철을 주우러 가자"며 친구 도모씨와 상명여대에 들어가 전날 미처 가져가지 못한 다른 대형 철제 조각품 2점을 절단하다 미술학과 대학원생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조씨는 경찰에서 "학교 측이 귀찮아 처리하지 않은 줄 않았다"며 "고철덩어리가 미술작품이라니 미술 작품이라니 믿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본문 37쪽>

 

누군가에게는 시가 3,000만원 상당의 가치를 지닌 조형물이 누군가의 눈에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쉽게 내뱉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다. 순수와 참여의 구분이 오랫동안 우리 문화계의 주된 담론으로 다뤄지는 동안 대중은 소외되고 있었다. 어떤 미학적 기준으로 문화를 설명하느냐에 따라 문화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즐기는 문화는 엘리트들의 폄하를, 반대로 대중의 눈에는 엘리트들이 즐기는 문화는 난해하기만 문화로 보인다. 저자는 위의 사건이 그런 인식차를 잘 보여주는 사건으로 예시한다.(80년대를 거치며 기층민중문화의 생명력과 가치를 발견한 것은 운동권이었다. 그에 비해 대중이 즐기는 문화는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작(장)된 문화로, 상업적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민중문화와 대중문화는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일까?) 저자는 새로운 인식론인 후기 구조주의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출현 덕으로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은 모두 9장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1. 넘치는 대중 문화, 대중 문화론 2. 대중 문화론 지도 그리기 3. 대중 사회론"에 이르는 3장은 대중문화를 논의하는데 있어 필요한 기본 개념들을 설명하는데 할애되고 있다. 이 책의 전체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쓰였고, 공들인 부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본론이자 대중문화이론의 여러 갈래들, 패러다임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것은 "4. 마르크스주의 문화론 5. 문화주의 문화론 6. 구조주의 문화론 7. 여성 해방주의 문화론 8.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부분이다. 이 장들에서는 각각의 구분에 따라 해당하는 문화론의 범주 안에서 다뤄지는 중요 개념들,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맨마지막 부분인 "9. 문화연구 : 종합적 패러다임"에서 저자는 대중문화를 분석한다는 것의 의미에 비중을 두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러나 책을 모두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대중과 문화, 대중문화와 대중문화론의 갈피가 확연히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물론 독서의 어려움 탓이기도 하겠지만, 정작 모호한 것은 이런 대중문화의 구분이 아니라 학문적인 영역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대중문화 자체의 모호함 탓인지도 모른다. 대중문화를 하나의 갈래로 구분해, 그 중요성을 발견해낸 이는 매튜 아놀드와 E.P.톰슨,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갈래라 할 수 있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대중을 의미하는 'mass' 란 단어가 20세기의 '폭도/군중(mob)' 이라는 말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재해석하면서 이 용어는 대중매체에 호응하는 일반대중에 대해 반민주주의적인 문화적 선입견을 갖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대중(mass)이란 개념은 사람들을 오합지졸의 무리로 표현하여,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그의 저서 "텔레비전론"에서)고 주장한다.

* 지난 2010년 "새로 쓴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이 나와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월드뮤직: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 서남준 | 대원사(2003)


서남준의 월드뮤직 -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는 신현준의 신현준의 World Music 속으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출간된 책이다. 나는 두 책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주문해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두 책 가운데 어느 책의 우열을 가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이 한 가지는 이야기해줄 수 있는데 신현준의 책보다는 서남준의 책이 이 방면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먼저 접하는 게 순서가 될 듯 하다. 이유는 이 책이 좀더 쉽게 저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남준은 기독교방송 FM에서 <서남준의 월드뮤직> 진행자이기도 한데, 이 책은 각 지역의 음악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배경을, 각각의 대표적 뮤지션을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신현준의 책보다 좀더 쉽게 느껴지고, 실제의 난이도 역시 입문서 수준으로 맞춰져 있다. 이 책은 크게 2개의 구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월드뮤직,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집시 음악부터 시작해서, 요들, 파두, 플라멩꼬, 렘베티카, 칼립소, 삼바와 보사노바, 탱고에 이르는 각 지역별 음악의 출생 배경부터 현재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다. 다른 하나는 월드뮤직의 정신을 상징할 수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인간은 노래로 싸울 수 있는가
편인데, <릴리 마를렌>이란 곡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를레네 디트리히,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멜리나 메르꾸리, 나오미 셰메르, 미리암 마케바, 빅또르 하라, 아따우알빠 유빵끼, 메르세데스 소사 등이 그들이다.

우리가 흔히
'월드뮤직'이라고 통칭해서 부르긴 하지만 '월드뮤직'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 월드뮤직의  개념 자체가 사실은 혼란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다. 우선 월드뮤직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의 마케팅 범주로서 생겨난 개념인데다가 영미권을 제외한 타지역에서 생산된 대중음악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드뮤직이란 통칭되는 음악 갈래는 상업적 유통망에 의해 영미팝(내지는 세계화)의 하위 범주로 끊임없이 포섭되어가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저항의 진지로 평가되곤 한다. 월드뮤직이 서구 대중음악의 시선을 잡아끌기 시작한 것은 폴 사이먼 같은 이들이 <Graceland>를 통해 아프리카 음악 형태를 자신의 음악 세계 속에 삽입하면서 부터였다. 

월드뮤직을 흔히 민속음악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 월드뮤직이 지역색을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속음악
(국악의 예를 상정해놓고 보았을 때) 같이 인위적으로 보존되고, 보존하려는 음악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월드뮤직을 떠올릴 때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이것이 대중음악이란 사실이다. 그것도 때로 영미권 팝과 서로 호응하거나 배제하면서 한 지역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반영해가며 만들어지는 대중음악이란 거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의 월드뮤직은 순혈의 음악이 아니라 일종의 퓨전, 하이브리드된 대중음악의 갈래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월드뮤직에 대한 냉정한 평가라면 서남준의
『월드뮤직 -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이 이런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지는 않다. 서남준이 포인트를 맞추고 있는 것은 그것이 비록 상업적인 대중음악으로 지역적 정체성을 일부 반영하고 있는 하이브리드된 대중음악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이미 영미 팝이란 주류 대중음악에 저항하는 몸짓을 보이는 것이란 점이다. 저자는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우리가 흔히 듣기 편한 이지리스닝 계열의 포크 뮤직으로 분류하곤 하는 <엘 콘도르 파사>는 안데스 민요로, 스페인 침략군에 저항하던 투팍 아마루를 그리는 인디오들의 한이 담겨 있다. 서남준의 시각이 특히 돋보이는 대목은 1부보다는 2부이다.

그리스의 월드뮤직을 대변하는 두 인물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와 멜리나 메르꾸리의 예를 보자. 메조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의
<내 조국이 가르쳐 준 노래(Songs My Country Taught Me)>를 통해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기차는 7시에 떠나네>의 작곡자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단순한 음악가가 아니었다. 영화음악을 즐겨 듣는 이들이라면 <제3의 사나이 The Third Man>(1949년)와 안소니 퀸 주연의 <그리스인 조르바>, 멜리나 메르쿠리 주연의 <죽어도 좋아(페드라)>, <형사 서피코>,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작품에서 흘러나오던 그의 음악을 떠올릴 수 있다. 그에 대해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가 지난 2000년 노벨평화상 후보였다는 사실을 혹시 아는지 모르겠다. 1925년생인 테오도라키스는 음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운동가로도 주목받은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어난 그리스 내전 중에 좌파로 활동했고, 그런 이유로 결국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음악 활동을 해야만 했다.



▶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테오도라키스는 1961년 조국 그리스로 돌아와 <희랍인 조르바> 등의 음악을 작곡하지만 1967년 4월 발생한 파파도풀로스의 우익 군사 쿠데타로 인해 70년까지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의 모든 음악은 그리스에서 금지곡이 되었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제작한 정치적인 영화 <
제트(1968년)>의 음악은 감옥에 갇힌 테오도라키스가 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작곡한 곡들을 이용한 것으로 그해 영국 아카데미는 감옥에 갇힌 테오도라키스에게 음악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그가 좌파라는 이유로 그리스에서 금지곡이 된 건 이해한다 손 치더라도 우리에게까지 그의 음악은 한동안 금지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국내 라디오에서는 그의 음악들을 즐겨 방송해주었는데 그의 정치 성향이 알려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음악들은 금지곡이 되었고, 5공 시절에는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음악이 삭제된 채 방송되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었다. 

80년대 중반에는 그리스 출신의 샹송 가수이자 테오도라키스와 가까운 친구 사이였던 조르주 무스타키가 방한했을 때는 자신의 앨범에서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곡들이 모조리 삭제된 것을 알고 항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우리에게 영화
<페드라>로 잘 알려진 멜리나 메르쿠리 역시 1967년 그리스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독재정권과 맞선 여류정치가로도 유명하다. 군사정권에 의하여 그리스국적과 재산을 몰수당한 그녀는 임시로 스위스 국적을 얻어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망명생활중에 몇 번 암살당할 위협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훗날 그녀는 그리스 문화부장관을 역임하며 여러 일화들을 남기기도 했다. 국민배우니, 국민가수란 말이 남발되지만 국민가수니, 배우니 하는 말은 이런 이들을 위해 아껴둬야 할 말이다.


▶ 콘서트장에서 열창하고 있는 미리암 마케바(1978)

우리에겐
<바나나보트송>이나 <페어웰 자마이카> 등 칼립소의 황제로 잘 알려진 해리 벨라폰테가 19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을 위해 거리 시위에 나선 인물이란 사실이나, 카네기홀 음반 발매 수익금 전액을 유네스코에 기부한 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하다. 또한 그는 남아공 출신의 무명 가수 미리암 마케바(Miriam Makeba, 훗날 아프리카의 디바란 칭호로 더 널리 알려짐)를 미국의 음악 시장에 소개(An Evening with Belafonte/Makeba)하면서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을 함께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외에도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에 희생된 빅토르 하라,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 등에 대한 이야기는 월드뮤직에서 어째서 그토록 강렬한 저항의 냄새가 나는지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롬'이라 칭하면서 로마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집시 음악이 오늘날 고스란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 전해지기보다는 확실한 팝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주류 음악 시장에 편입되기 위한(이는 서구인의 귀에 맞추기 위한이란 말과도 같다) 이종교배 속에서 집시 음악의 전통은 날로 시들어가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월드뮤직의 진정한 메아리가 어째서 아직도 멀리서 들려오는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 - 제프리 노웰 스미스 (엮은이) | 김경식 | 이남 | 이순호 | 이영아 | 이유란 | 전찬일 | 주영상 | 허인영 (옮긴이) | 열린책들(2006)


영국의 유수한 명문대학으로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를 꼽는다. 다소 엄살을 섞어 말하자면, 요사이 이들 대학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영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유학 생활하기가 그다지 까다롭지는 않아도, 생활비가 많이 들어 힘들다더라는 정도의 정보밖에 없긴 하다. 그럼에도 이 두 대학이 대영제국 전성기의 제국 엘리트들의 산실이며 수많은 명사들을 배출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떠나 내게 이 두 대학은 다음과 같은 책들로 인해 명문대학이다. 우선 케임브리지는 개마고원에서 출판하고 있는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 시리즈로 인해, 옥스포드는 옥스포드 영어 사전 및 영국사 등의 저서를 출판하는 명문 대학 출판부를 가진 대학으로써 나에게 명문대학이다.

 

"제프리 노웰 스미스"가 책임편집자로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의 저자로는 모두 80여명 가량의 세계 유수의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이 참여했다. 사이먼 윈체스터의 책 "교수와 광인"을 통해서 이미 잘 알려져 있듯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권위는 전세계적으로도 절대적이다.(옥스포드 영어대사전은 약 40년 동안 학자 1000여명이 동원돼 1928년 처음 완간되었는데, 사이먼 윈체스터는 이 과정에 참여한 제임스 마리의 이야기를 통해 옥스포드 영어사전이 만들어지던 무렵의 문화와 역사를 담아 책으로 엮었다.) 내가 처음 옥스포드란 고유명사와 인연을 맺은 것도 중학교 입학하면서 삼촌이 선물해준 "옥스포드 혼비 영영한 사전"을 통해서였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명성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데, 명성이 지속될 수 있는 바탕에는 옥스포드 영어사전측이 일년에 최소 4차례에 걸쳐 인터넷 개정판을 내는 등 매해 1,500단어 이상을 추가하는 노력에 기초한다. 이렇게 온라인 사전에 추가된 단어들은 옥스포드 출판부가 발행하는 수십 종류의 활자 사전 개정판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프랑스 역시 17세기 왕립학술원을 통해 국가 차원에서 사전 작업에 착수해서 1690년대 첫번째 불어사전을 만들었고, 이후 총리 직속 기관으로 불어연구원을 두어 1960년대에는 표준불어대사전 작업에 착수하여, 1990년대 16권을 완간해냈다. 프랑스의 유명출판사인 라루스 역시 1910년 첫 불어사전을 펴낸 뒤 매년 개정판을 출판하고 있어 100회 가량의 개정판을 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인터넷 확산과 함께 대형 포털 사이트들이 국어사전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온오프라인상의 모든 어휘연구작업이 사실상 중단된 상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최근 들어 국내의 언론사들이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또한 미디어로서 온라인 매체들에 밀리는 현실이고, 상대적으로 영세한 잡지 매체들 역시 경영상 매우 곤란한 처지다. 이젠 신문, 잡지를 정기구독하는 일에 대해 세금 감면 혜택이라도 주어야 할 판이다.

 

얘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샜다. 앞서 말한 내용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이 책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 앞에 특별한 방점이 필요하다면 역시 옥스포드에 붙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의 영화붐을 타고 "세계영화사"란 주제로 국내에 출판된 책들은 꽤 여러 종이 되지만, 이 책은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출간되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신력과 품질을 인정해줄 수 있다. 그래서인지 국내외 매스미디어들이 이 책에 대해 보인 호들갑스러운 평가가 괜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세계영화사"에 대한 주제로 쓰인 최고의 책이다.

 

이쯤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외견상의 평가는 일단락짓기로 하고, 소비자로, 독자로 책을 좀더 꼼꼼이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이 책의 만듦새는 본래 영어판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독특하다. 정확하게 1.000쪽으로 떨어지기는 하지만, 실제 본문 내용은 판권 포함해서 997쪽으로 떨어진다. 뒤에 남는 페이지는 그냥 백지이긴 하지만, 그냥 1,000쪽이라고 해도 별무리는 없겠다. 집에 1,000쪽짜리 책 있는 사람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내가 아니고 우리 사무실에 소장된 가장 두꺼운 책은 금성출판사판 국어대사전인데 거의 3,800쪽 가량 된다.) 이렇게 두꺼운 책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반적인 단행본 제본으로 책 상태가 오래도록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정통적인 양장본 제본 방식인 사철 제본으로 되어 있는데, 종이를 일일이 실로 꿰맨 책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다. 단단한 하드 커버로 마치 앨범처럼 덮개가 되어 있다.

 

속표지를 넘기면 책임편집자의 "감사의 말씀"이 수록되어 있고, 그 뒤로 이 세계영화사(사전이라 불러도 좋으리)의 기고자들 명단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이 책의 첫번째 문제이자 관점이 튀어 나온다. 기고자의 면면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국적을 살펴보면 이 책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영미적 관점에 의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폴란드, 라트비아, 인디아, 홍콩, 일본, 러시아 필자 등이  각 1인이고, 이상하게 네덜란드 필자가 2인, 그리고 뜻밖에 프랑스 필자가 1인밖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 국적이 영화사를 특별히 편협하게 기술하는 요인이 되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자국 영화는 자국의 필자가 가장 잘 안다고 했을 때, 프랑스 국적을 지닌 필자가 80여 명이나 되는 중에서 1인에 불과하다는 것은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참고로 호주 영화인은 2명 참가하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영미권 인사들이다. 그런 까닭에 프랑스 무성영화에 대한 기술은 미국의 리처드 에이블이 담당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기 어렵다는 거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취향을 탓할 수도 있고, 책이 재미없는 것과 유익함은 별개의 문제라고 인정한다. 앞서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지만, 이 책의 유익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책의 재미와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의 무미건조함이다. 대개 여러 명의 필자가 참가하는 기획서들의 일반적인 문제는 필자간의 의견 차와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데 조율하기 어렵다는 점인데, 이 책에선 그런 단점을 찾아보기 어렵다.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와 이 책의 번역자들이 공들인 덕이겠지만 이 책은 마치 한 명의 저자가 담당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일관된 톤을 지닌다. 그런데 그 일관된 톤이 사전적인 무미건조함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영화사도 일종의 예술사라는 역사라고 할 때 사관이 드러나 보여야 하는 대목이 거의 없는 덤덤함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자 역시 재미를 추구하는 독서란 점에선 지적해 둘 대목이다(개인적으로 영화사의 기술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비평사 -혹은 비평사조- 부분이 이 책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이 책이 무려 1,000쪽에 달한다고는 하지만 구조 자체는 매우 간단한 편이다. 모두 3장의 구성(897쪽부터 시작되는 용어설명, 참고문헌, 인명색인, 영화색인은 별도로 하고)으로 되어 있는데, 1장 "무성영화 1895 - 1930", 2장 "유성영화 1930-1960", 그리고 3장 "현대영화 1960-1995"까지의 실제로는 영화 100년사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장들은 다시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반복되는데, 서론으로 각 시대의 영화사적인 특징과 얼개를 소개하고 그런 뒤에 그 시대의 특징적인 영화사적 사건에 대한 개론을 소개한다.

 

1장에서는 당연히 영화의 탄생과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부장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이 시기에 분화되기 시작한 애니메이션, 코미디, 다큐멘터리, 아방가르드 영화 등 영화 장르를 개별적으로 다룬다. 그 뒤에 다시 각국의 영화 스타일을 각각의 필자들이 맡아서 다룬다. 1장과 2장의 영화를 구분하는 가장 큰 구분점은 소리의 문제이다. 2장에서는 본격적인 유성영화 시대를 맡이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성공과 이 무렵 영화에 불어닥친 검열의 문제, 기술혁신의 문제를 특징적으로 소개한다. 그런 뒤 유성영화 시대 더욱 극적으로 분화된 영화의 장르들(뮤지컬, 서부영화, 범죄영화, 판타지 등)을 개별적으로 소개한다. 혁명의 시대이기도 했던 이 무렵 이데올로기가 영화에 끼친 영향을 소개하고, 각국의 영화 스타일과 발전상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화를 포함해서).

 

3장 현대영화편에서 가장 주목해볼 기술적 혁신과 영화사적 사건은 그간 유일한 동영상 매체로서 영화가 누려왔던 영광에 치명적인 위협이 된 TV매체의 출현을 꼽는다. 서론 이후 곧바로 '텔레비전 시대의 영화' 라는 별도의 구성을 통해 텔레비전이 영화산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분석하는 것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후의 구성인 '미국영화'편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미국영화가 매체로서 TV와 경쟁할 자원으로 삼은 것은 섹스와 선정성, 그리고 블록버스터였으니까 말이다. 이후 유럽의 예술 영화들, 미국의 독립영화가 TV출현에 대한 영화예술적 모색이란 점을 고려해 아방가르드 영화들, 시네마 베리테 등 예술영화운동을 살펴본다. 그 뒤 각국의 영화 발전을 살핀다.

 

이미 여러 리뷰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여러 나라의 영화 발전을 다루고 있다. 영미권 영화(실제로는 미국 영화)는 당연히 그 중심에 있고, 그 주변부 영화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동유럽, 독일, 러시아, 터키, 아랍, 아프리카, 이란,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홍콩, 대만, 일본,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라틴 아메리카 등을 총망라하고 있지만, 한국 영화는 별도로 다뤄지지 않았다(이렇게 역사적인 맥락에서만 영화사가 기술되면 상대적으로 예술의 주체인 창작자들이 소외되기 마련이다. 아마도 편저자들 역시 그 점을 고민한 듯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알랭 들롱과 같이 유명 영화 감독과 배우를 포함해서 미술감독, 촬영감독에 이르는 각각의 영화 종사자들을 모두 132명 소개하는 것으로 보충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로서도 처음 듣는 인물들이 많았다).

 

지금 한국영화가 누리고 있는 영광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것이 1996년의 일이란 점(과 1995년까지만 다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크게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최소한 서구인들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우리 영화의 출현은 21세기적 사건이지, 20세기의 사건은 아닐 테니 말이다. 

* 본래 하드커버로 먼저 출판되었는데 보급본으로 새로 나와 있기도 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재즈를 찾아서』 - 성기완 | 문학과지성사(1996)


"성기완"이란 저자명을 넣고 검색했더니 너무 많은 책이 떠서 깜짝 놀랐다. 그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유리이야기"를 펴낸 시인이자, 음악 분야에 여러 글들을 쓰고, 책을 낸 저술가이자, 동시에 록밴드에 직접 참가하고 있는 뮤지션이자, 또한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호치민" 편 등을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의 번역 작업엔 만화책 "아스테릭스"를 비롯해서 재즈 아티스트 "마일즈 데이비스"의 자서전 등도 포함된다. 다방면으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인 건지, 돈이 궁한 건지(이런 불경스런 어투하곤)는 모르겠지만 직접 만났을 때의 느낌으론 짙은 눈썹에 크지 않은 눈, 펑퍼짐한 코에 약간 장발, 그리고 한쪽 귀에만 달린 귀걸이가  어쩐지 서로 잘 어울린다기보다는 느릿느릿한 촌사람이 도회지 옷을 갖춰 입은 것같다는 첫인상을 주었다. 다른 음악인을 취재하던 차에 그는 대담자로, 나는 사진 찍는 사람으로 만났으므로, 요모조모 따져볼 시간은 충분했다. 어쨌든 시인의 외모가 모두 김수영 같거나 같아야 한다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재즈를 찾아서"란 책 말고도 나는 요아힘 E. 베렌트의 "재즈북"을 비롯해 십여 권의 재즈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우리나라에서 재즈가 돌연 유행했던 것은 지난 90년대 말의 일이었다. 곧잘 재즈 듣기 열풍과 국민소득 2만불을 연계시키곤 하는데, 선진국의 재즈 듣기 열풍이 국민 소득 2만불 시대에 주로 일어났다는 사례 때문일 것이다(물론 확인된 바는 없다). 한동안 그런 재즈 열풍이 불더니 우리 사회에 언제 그렇게 많은 재즈 매니아들이 있었나 싶을 만큼 여기저기서 숱한 재즈들이 들려오더니, 이와 관련한 책들도 많이 발간되었다. 하기사 그것이 비단 재즈란 음악에만 국한시킬 일은 아니다. 삼국지의 여몽이 했다는 말(刮目相對)처럼 잠시라도 고개를 돌릴라 치면 눈비비고 쳐다봐도 쫓아가기 어려울 만큼 우리 사회의 트렌드는 순식간에 바뀌니까 말이다. 이럴 때 뒤따라 나오는 말이 그런 트렌드들의 경박함을 비난하는 것이 순서겠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하겠다.

 

"재즈를 찾아서"의 저자 성기완 역시 자신이 어떻게 재즈를 듣게 되었는가를 별도로 밝혀둘 필요를 느꼈나보다. 사실 이렇게 재즈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록 음악을 듣다가 점차 재즈를 듣게 되는 길을 간, 그리고 지금은 아무거나 막 듣는 수많은 애호가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처음에는 왠지 슬퍼서 재즈를 좋아했다. 그 때 나는 쓸데없이 우울해하기 잘하는 십대였다. 게다가 지금도 LP를 플레이어에 걸 때면 그 때의 묘한 기분에 젖는, 다른 사람이 잘 모르도록 조용하고 친근한 방식으로 대화를 청하는 소리의 세계에 진입하면서 느끼곤 하던 옅은 들뜸으로 되돌아가는,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국외자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성기완이 말하는 국외자의 자세는 "재즈를 찾아서"라는 이 책의 제목과 그럴듯하게 어울린다. 그는 재즈에 대해 다 아는 척하지 않는다(하긴 jazz라는 말의 원뜻과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한 마다이니 누가 재즈에 대해 아는 척하며 말할 수 있을까). 그 자신이 책을 쓰면서 좀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재즈에 대한 기초적인 입문자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난이도를 가지고 시작한다. 재즈의 정의에 해당할 수 있는 "재즈란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해서 하드밥, 프리재즈, 재즈록, 애시드 재즈에 이르는 분화된 재즈 장르를 소개하고, 끝에 가서는 재즈와 영화, 재즈와 문학을 짚어 본다. 참고로 성기완은 2003년에 "영화음악, 현실보다 깊은 소리"란 책을 내었다.

 

앞서의 서평에서 신현준의 "록음악의 아홉가지 갈래들"을 통사적 접근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한 바 있는데, 그에 비하면 이 책 "재즈를 찾아서"는 좀더 통사적인 방식에 근접해 있다. 재즈의 출현으로부터 융성, 쇠퇴에 이르는 과정과 미국, 세계의 사회 변화를 함께 다루어 각각의 재즈 장르가 분화되어온 원인과 결과를 밝힌다. 물론 이 책보다는 앞서 말한 요아힘 E. 베렌트의 "재즈북"이 훨씬 더 전문적이고 자세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세계적 명성이란 측면에서도 단연 앞선다. 하지만 이제 막 걸음마하는 이에게 47,000원이나 하는 "재즈북"을 입문서 삼으라고 하기엔 너무 위험하다. 그러므로 지금은 편하게 성기완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게다가 이 책이 "재즈북"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있는 건 확실하고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가격을 고려한다면 결코 많이 부족한 건 아니란 점과 콤팩트하면서 소프트하다는 장점을 고려할 때 재즈 입문서로 우선 고려대상에서 제외되는 건 독자 자신을 위해 불행한 일이다. (혹시 염려되어 한 말씀 드리자면 베렌트의 책은 이 방면으로 워낙 확실한 명성을 지닌 책이므로 이렇게 비교된다고 해서 누가 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록 음악의 아홉 가지 갈래들』 - 신현준  | 문학과지성사(1997)


역사 서술의 한 방식이자 대표적인 것으로 통사(通史)란 것이 있다. 시대 순으로 중요한 사건과 경험들을 서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가 바로 이런 통사의 일종이다. 역사 서술의 시작이자 종착점이라 할 수 있는 통사는 역사를 강물에 여러 지류들이 합류하며 흘러가는 것처럼 기술되는 특성을 지닌다. 통사가 역사 서술의 시작이라는 것은 역사란 것이 기본적으로 시간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출발이 될 수 있기 때문이고, 그 종착점이라 함은 역사 기술이 하나의 사관에 따라 조합되고 정리되는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사적 서술이 만능은 아니다. 특히 록음악과 같이 하위 장르가 잡초의 뿌리처럼 분화해간 장르의 서술의 경우엔 더더군다나 어렵다. 그래서 록음악에 대한 그럴듯한 통사가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신현준은 대중음악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문화비평가로, 이 방면에 여러 권의 책을 상재해놓고 있다. 이외에도 한겨레21, 웹진 weiv 등에 대중음악과 관련한 글들을 접할 수 있다. 평소 신현준의 글을 접할 기회가 있었던 나로서는 『록 음악의 아홉 가지 갈래들』을 읽으면서 혼자 미소 짓는 경험을 몇 차례 했다. 본인 자신이 책머리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문지스펙트럼의 문화마당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록음악에 대한 일종의 입문서라는 책을 집필하는 것은 어쩐지 그답지 않은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통사를 역사서술의 시작이자, 종착점이라 했는데, 이 말은 입문이자 끝이란 뜻이기도 하다. 역사학자가 궁극적으로 해보이고 싶은 일은 아마도 자신의 사관을 담은 통사를 엮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통사들이 나와 있으므로 자칫하면 진부한 글쓰기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록 음악의 장르와 스타일들을 아티스트 중심으로 소개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외국에서 이런 유형의 책들은 수도 없이 많고, 국내에도 이미 상당수가 출판되어 있다. … 중략 … 더구나 이런 ‘스탠더드’한 방식의 글쓰기에 대해 어쭙잖은 혐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작업을 반복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지는 일임이 분명하다. <책 머리에, 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쓴 이유를 발명(發明)하기 위함인지 저자는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의 필요성과 기성의 형식을 따르지 않은, 한국형 록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는 이유 등에 대해 미리 밝혀두고 있다(그의 다른 글들이 상당히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이 확실히 스탠더드하긴 하다). 그런데 그 뒤에 이르는 록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좀 헷갈리게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모호함과 혼돈스러움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록 음악은 적절한 대상일 수 있다는 정도다. 애증이 교차하는, 때로는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이 중독성 강한 사운드는 종종 약물에 비유되어 왔다. 록 음악을 즐기는 패거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끔찍하다고 느끼는 존재라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다. 그들(우리?)은 끔찍함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중독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책머리에, 8쪽>


저자 신현준은 록 음악을 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세상에 대한 패배자들의 중독 약품이거나 그런 세상에 대해 부단한 대결을 벌이는 진지의 하나로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다. 자본의 넘치는 탄력과 포옹하지 않을 수 없는 록 음악의 (상업적)한계를 생각한다면, 신현준의 관점엔 동의하기도 거부하기도 어렵다. 따지고 보면 그런 고민은 록 음악을 의식, 무의식적으로 즐기는 모든 이들의 고민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저자는 『록 음악의 아홉 가지 갈래들』을 통해 저자 자신이 말한 그런 류의 고민들을 과연 스탠더드한 글쓰기로 담아내고 있을까? 물론, 그것을 감식해내는 것이 독자의 몫이긴 하다.


어찌되었든 저자의 저런 고민을 마음에 담고서 『록 음악의 아홉 가지 갈래들』을 짚어나가다 보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아홉 가지 갈래(편의상 블루스, 컨트리, 포크, 인디,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 하드 록, 글램, 펑크 계열 등 아홉 가지 갈래로 구분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록 음악의 장르들을 다루고 있다.) 의 록 음악에서 두 가지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하나는 반항이고, 다른 하나는 강제된 혹은 자발적 순응으로서의 록 음악이다. 신현준의 책에서 특히 백미로 꼽을 수 있는 부분은 특히 체제 반항적인 록 음악 장르의 대명사인 포크와 펑크 계열을 다룬 3장 「Hey, Mr. Tambourine man」과 9장 「Smells Like Teen Sprit」부분인 걸로 느껴진다. 특히, 이 부분들이 좋게 느껴진 것은 신현준의 특기인 사회와 음악의 민감한 연결고리들을 더듬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측면들이 비록 스탠더드한 글쓰기가 요구되는 입문서 특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들을 고려해가며 읽는다면 이 책의 록 음악 입문서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문고판 특유의 저렴함(지금은 6,000원으로 올랐지만, 초판인 1997년 당시의 가격은 5,000원이었으므로)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은 문고판 판형인데 신국판과 동일한 크기의 서체가 사용되어 좀 읽을 만하면 다음 페이지로 넘겨야 하는 점, 개별 아티스트들에 대한 소개가 부족한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의 음반 가운데 상당수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음악을 다룬 책의 원 텍스트가 음악 자체라고 했을 때, 전송권에 제약을 둔 신저작권법이 발효된 현실에선 참 난감한 일이다.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법적, 사회적 통제력은 그에 미치지 못해 생겨난 우스운 제약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야만의 시대 - 김성진/ 황소자리(2004)


세계의 분쟁지역에 대한 괜찮은 브리핑

"야만의 시대 - 영화로 읽는 세계 속 분쟁"에는 칭찬할 점과 비판할 점이 공존하고 있다. 우선 이 책의 제목 "야만의 시대"는 좀 손쉽게 붙은 제목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내용이 분명 전쟁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야만의 시대"라는 거창한 제목에 부응할 만한 심도를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선 오히려 부제 '영화로 읽는 세계 속 분쟁'이 제목에 좀 더 어울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대개 "세계의 분쟁"이라고 하지 않나? 세계 속 분쟁이라고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그것이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들었던 첫번째 의문이다. 저자인 김성진, 동덕여대 교수인 그는 연합통신 외신부 기자를 거쳐 시사저널, 중앙일보의 외교전문기자를 했다고 하는데, 약력 소개와는 달리 글에서는 현장 체험이 별로 묻어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이야 알 수 없지만 작년(2004년)에 읽었던 전선기자 정문태의 "전쟁취재 16년의 기록(한겨레신문사)"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먼저 이 책의 장점 몇 가지를 이야기해본다면, 동서냉전 해체 이후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여러 분쟁들에 대한 비교적 최신 브리핑(briefing)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브리핑이란 건 간결하게 요약된 보고를 의미하는 것처럼 이 책은 기본적인 한계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분쟁들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동서냉전 시기엔 이데올로기에 묻혀버렸던 민족분쟁들을 다룬다. 우선 최근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우리들에게도 익숙해진 쿠르드족, 러시아의 골칫거리인 체첸, 중국의 두 얼굴을 보여주는 티베트, 유럽의 영원한 불씨인 발칸, 현재까지 계속되는 열전의 현장 이라크, 마약왕국의 대명사 콜롬비아, 동서교통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고통받는 아프가니스탄, 오랜 분쟁의 현장 북아일랜드, 그리고 전세계의 화약고 팔레스타인이다.

 

기획은 돋보이지만 어딘가 미진한...

이 지역들은 종종 외신을 타고 흘러나오는 뉴스들은 있으나 우리들 자신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생각에서 혹은 외신 자체도 그다지 집중 보도를 하지 않는 탓에 쉽게 알기 어려운 지역들이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된 몇몇 사실들이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많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황소자리" 출판사는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와 같이 과거에 출판(아마도 정신세계사에서 나왔던가)되었던 책을 재출간하면서 최근에 등장한 출판사다. 그러고보니 류비셰프를 포함해, "위대한 남자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이 책까지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3권 읽었다. 사실 모리시타 겐지의 "위대한 남자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 를 읽으며 들었던 아쉬움이 이 책에도 거의 고스란히 적용된다. 모리시타 겐지의 책도 적당히 재미있었고, 적당히 정보를 얻었다고 할 수 있지만 뭔가 아쉽고 심도가 얕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 역시 그렇다.

 

즉, 이 분야에 대해 거의 처음 접하게 되는 일반인에겐 좋을 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들, 이 분야에 관심이 좀 있는 이들이 읽기엔 좀 엷은 향과 맛이다. 그런 점은 신생 출판사로서 상업적인 고려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왜 느닷없이 그런 출판사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이 책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 중 하나가 출판사의 기획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의 프롤로그에 보면 2003년 열린사이버대학교에 개설했던 강좌를 들은 수강생 중 한 명이 출판기획자로 변신한 뒤 출판을 제의해서 책으로 엮게 되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즉, 이 책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양서 중 하나로 기획된 것이다.

 

대개, 출판에서 편집자가 큰 역할을 하며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든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이런 류의 책이다. 시집이나 소설의 경우엔 창작자의 몫이 편집자보다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편집자가 관여할 몫이 그만큼 적은 편인데 비해 이런 류의 책은 편집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진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런 편집자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 군데군데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여러 곳에 삽입되어 있는 각각의 개념 설명과 뒷부분에 부록으로 포함된 분쟁일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런 부분들은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로 읽는 분쟁? 분쟁으로 읽는 영화?

하룻밤 침대에 누워 재미있게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의 몇몇 단점들이 걸렸다. 우선 국제정치를 전공한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국제정세를 지나치게 파워게임의 측면에서 읽으려는 측면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제법 도드라져 보인다. 거기에 기자 출신 필자들의 문장이 지니는 건조한 문체가 책의 재미를 좀 덜하게 만든다. 물론 문장 자체야 흠잡을 데 없지만 재미는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영화로 읽는" 이라고 하는 이 책의 컨셉 부분인데, 분쟁이라는 국제정치,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야 할 부분을 영화라는 소재를 채용해 드러내보인다는 컨셉 자체야 이를 데 없이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vs. 분쟁이라고 보았을 때 사실상 영화는 분쟁에 종속되어 있는 편이다. 물론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영화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이고, 대개의 독자들 또한 그러하리란 점을 고려해보면 이 양자 사이에서 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분쟁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이라면 그다지 재미없는 책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발칸분쟁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영화 "세이비어" (국내에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화 자체는 무척 잘 만들어졌다)는 영화의 내용만 따라가더라도 발칸분쟁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이 책에선 그 줄거리가 과감하게 생략되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비디오나 DVD로 이 영화를 따로 구해보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분쟁은 이해해도 책 내용은 실감나지 않게 된다. 책의 완성도를 상대적으로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책이 세계의 분쟁을 많이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아프리카 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점 역시 지적해둘 만하다.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들이 이 책의 커다란 흠결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책의 완성도란 점에서 다소 미진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야만의 시대를 계획한 배후는 누구인가?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저자의 시각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 "야만의 시대"라 하는 거창한 주제에 걸맞지 않는, 혹은 프롤로그 부분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안이해보이거나 분쟁의 원인을 분석하는 부분에서 일면적이거나 미국의 책임을 분명히 언급해야 하는 부분이 누락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괄호 안의 글은 내가 딴지를 거는 부분들이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어째서 점령이란 단어를 썼을까? 침공과 점령은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보인다. )은 미국에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해온 시리아와 이란에게 언제라도 초라한 후세인의 몰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암시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세계 2위의 산유국인 이라크를 점령하는 것은 자원민족주의의 관점에서도 정말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로 이어지는 새로운 친미벨트의 형성은 21세기의 새로운 강국 중국을 압박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했음 직하다.


노골적인 이해관계에 매달리다보니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해 나갔다. 미군에 잡힌 이라크 포로들은 이슬람교도로서는(그건 비단 이슬람교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성적 학대는 종교와 관련없이 그 누구에게나 죽음보다 더한 것이다) 죽음보다 더한 성적 학대를 감내해야 했다. 세계의 경찰국가로, 매년 세계 각국의 인권 상황을 감시해 발표하는(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영화 "착한 쿠르드 나쁜 쿠르드"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의 인권은 그들이 친미적이냐, 반미적이냐, 미국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가로 구분될 뿐인 인권이다) 인권의 최후 보루로 자임해온 국가의 군대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조직적으로 자행한 포로 학대여서 그 충격은 더하다(솔직히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는 사람이 충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로서는 도리어 충격이다. 역설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미국은 늘 그래왔지 않나?). ...<중략>.... 이 시대 최고의 문명국가임을 자임해온 미국이 이럴진대 과연 인류의 역사가 정말 발전해온 것인지에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본문 10-11쪽>

 

세계의 분쟁지역을 살펴보면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이 미국과 과거 유럽의 식민지배 혹은 그들의 식민지배 질서의 영향이 분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발칸 지역의 분쟁의 한 원인은 물론 대세르비아주의임에 틀림없지만 그 안엔 가까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나치를 등에 업은 민족주의자들인 우스타시의 대세르비아 학살, 인종청소(이 책에 따르면 35만명을 학살)가 보다 자세하게 언급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덧붙여져서 티토의 사망 이후 서유럽이 종교적, 인종적으로 자신들에게 가까운 몇몇 나라들의 독립을 부추겨 유고의 해체를 촉진한 사실도 언급되어야 하는데 이 책엔 그런 부분은 누락되었다.

 

판쉬르의 사자, 마수드의 암살 배후가 오사마 빈 라덴
- 그런데 왜 미국이 좋아하는 거지...



마찬가지로 판쉬르의 사자. 마수드의 암살과 그 배후에 대해 저자는 철저하게 미국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수드를 직접 인터뷰한 바 있는 정문태는 "전쟁취재 16년의 기록"에서 마수드의 암살 배후에 미국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요지의 글을 쓴바 있는데, 이 책의 저자 김성진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일부의 주장인 오사마 빈 라덴과 탈리반 암살설을 거의 정설로 취급한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불특정다수를 향한 목적없는 살해를 제외하고는 대개 사건의 배후를 지목할 때, 그가 죽음으로써 가장 이득을 얻는 집단, 개인이 누구인가를 추측하는 것에서 초등수사가 시작되기 마련이다. 물론 마수드를 암살하기 위한 시도는 구소련의 침공 당시부터 수도 없이 있었던 일이며, 마수드의 명성만큼이나 그의 죽음을 원하는 집단도 많았다. 그런 이유에서 마수드 자신도 암살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보안과 검색에 철저함을 기했다.

 

탈리반도 그들과 대립하는 북부동맹의 마수드가 눈엣가시였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구태여 그의 죽음을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할 까닭도 없다. 그만큼 오랜 적이었으니까 부인할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수드 암살에 책임이 없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마수드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이들은 누구였을까? 정문태는 그로 인해 이득을 본 것은 미국이라는 것이다. 마수드의 암살은 탈리반이 축출된 후 가장 큰 정치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가장 확실한 지도자의 제거를 의미한다. 이 땅의 해방 정국에서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이 비명에 간 것, 그들의 암살 배후에 누가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추측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너무나 손쉽게 오사마 빈 라덴을 배후로 지목한다. 그것은 바미안 석굴의 파괴 과정에서 정문태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 탈리반 지도자인 물라 오마르는 오랫동안 출처를 알 수 없는 자금을 사용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언론들은 이 자금이 오사마 빈 라덴의 지원이라고 손쉽게 규정하지만 오랫동안 탈리반을 무자헤딘으로 칭송하며 이들에게 자금을 댄 것이 미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바미안 석굴의 파괴과정 역시 정문태는 탈리반 지도자인 오마르는 오랫동안 바미안 석불을 볼모 삼아 미국과의 거래를 원했으나 결국 이 과정에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명분 쌓기를 위해 바미안 석불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 책 "야만의 시대"는 분명 우리들에게 세계 전역의 무수한 분쟁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 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명확한 진실을 보여주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별 셋 이상을 줄 수 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 문화학교서울 지음, 문화학교서울(1995)


요새 소장함을 들춰보며 이것저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문득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란 책에 눈길이 머물렀다. 아, 1995년 무렵 나는 무얼하고 있었지? 하는 생각에 그 무렵의 일기장을 열어보았다. 나는 매년 일기장에 제목을 붙이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데, 1995년의 일기 제목은 "또 다른 별에서 한 세상을 살고 있는...나!"였다. 아, 너무 비웃지들 마시라. 나는 저무렵 아직 20대 중반에 불과했다구.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무척 아팠었다. 졸업여행 때부터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하더니 졸업한 뒤 거의 6개월 가량을 누워서 지내야 했다.

문제는 허리였는데, 아픈 곳은 머리였다. 졸업한 뒤 아무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는 백수 생활을 한다는 거, 게다가 기약없이 몸져누운 상태라는 거 멀쩡한 정신으론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6개월을 지낸 뒤 알바자리가 나서 출판사에서 알바를 하며 지내다가 정식 직원으로 취직했다. 출판사 알바를 한 6개월여 하다가 나중에 광고쪽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직장은 신사동에 무슨 극장 맞은 편에 있었는데, 그 덕분에 영화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이 해는 영화 탄생 100주년이기도 했다. 이 책을
구해 읽은 것도 아마 그 무렵의 일이었을 거다. 방 구석 어딘가 돌아다니다가 누가 집어가서 없어져서 나중에 다시 힘들게 서점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 이 책을 읽으면 영 입맛이 씁쓸하다. 묵은 일기장을 뒤적이는 것처럼.... 사실 영화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서울의 대표적 시네마 테크인 '문화학교 서울'에서 발간한 이 책은 어딜보더라도 80년대 이념과 더불어 영화의 세례를 받은 젊은 청춘들의 가열찬(?) 의지에 비해 이를 뒷받침하는 능력은 아직 그에 못 미치는 아마추어 티가 팍팍 느껴지는 책이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제목부터 "불타는 필름..." 아닌가?

사실 이 책의 제목은 1960년대 군부독재 치하의 아르헨티나를 세밀하게 기록한 페르난도 솔라나스(Fernando E. Solanas)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La Hora de Los Hornos)>에서 따온 것이다.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이 옥타비오 게티노(Octavio Getino)와 공동으로 각본을 써서 좌파 페론주의자들이 결성한 시네 리베라시옹의 작품으로 1969년에 완성될 때까지 무려 3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전두환 군부독재 체제 아래에서 비밀리에 광주 비디오가 유포되고, 비밀리에 상영되었던 것처럼 4시간 20분에 달하는 대작이었지만 이 영화 역시 비밀리에 사영되었고, 중간에 상영을 멈추고 관객들에게 이런 현실에 대해 논쟁하라고 권유하는 등 영화상영과 관람이 또다른 정치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부제명이 "신식민주의의 폭력과 해방에 관한 기록과 증거"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요새는 문화가 시대의 주된 흐름인 만큼 작정만 한다면 이보다는 훨씬 더 폼나게 책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책은 참 폼이 안 난다.
이미지 중심의 책도 아닌데, 판형은 거의 예전 영화잡지들 크기로 뻘쭘하니 크고, 두께는 영화주간지 한 2권 정도밖에 안 되니 폼이 안 난다. 게다가 인쇄를 한 건지 마스터를 돌린 건지 모를 인쇄하며, 종이용지 역시 우리가 흔히 서적지로 보게 되는 미색모조 80g이 아니고, 백색모조지를 사용해서 조악한 활자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게다가 글의 수준도 들쭉날쭉이다. 1995년은 나에게도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해였다. 이 해 나는 대학에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 전해에도 한 명의 친구가 사고로 죽었는데, 내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은 이듬해에는 또 한 명의 동기가 죽었다. 이번엔 자살이었다. 해마다 한 명씩의 동기가 젊은 나이에 죽는 경험을 한다는 건, 제 아무리 어려서부터 주변 지인들의 죽음을 익숙하게 접해왔던 나라고 할지라도 충격이었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나에겐 불타는 청춘의 연대기와 우연히 겹친다. 이 책은 영화 기점을 뤼미에르 형제로 잡아서 1895년으로부터 1995년에 이르는 영화, 필름의 연대기를 시대의 배열, 장르 영화의 소개, 각국가별 영화적 특색, 작가주의 감독 소개, 사조 등의 배열로 나름대로 균형을 잡아 선정하고, 배치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 오늘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이 책의 흔적은 곳곳에서 보인다. 이 책을 그 사람들이 죄다 사서 읽고, 일일이 타이핑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정보들이 이제는 얼마나 흔해졌는가를 알 수 있다. 다행히 이 책은 절판되었다. 영화에 대해 좋은 책들이 연일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 시대 우리 문화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영화로 대표되는 영상매체인 만큼 그와 관련한 대중의 호기심과 이를 충족시켜주고자 하는 출판자본의 행복한 결합이 질좋은 용지를 사용하고, 세련된 편집의 디자인, 양질의 이미지들을 담아 출판되고 있다.

문득 시네마테크인 '
문화학교 서울'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여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한다. 어쩐지 안심이다. 음악을 흔히 시간의 예술이라 하고, 연극을 순간의 예술이라고 한다. 인간의 연령을 이와 흡사하게 비교해본다면 확실히 청춘은 순간의 예술에 속한다. 그럼에도 청춘의 시간은 더디기만 하다. 뉘 반항할 곳 없어도 반항하는 것이 청춘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도 있지만, 이 책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가 출판될 무렵만 하더라도 우리 영화가 오늘날의 이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영화탄생 100주년이라는 화려한 축하의 계절이 지나간지도 어느덧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해진다. 어떤가? 그 세월, 시간의 흐름이 이렇게 책 한 권을... 퇴물로 만든다. 이 책을 처음 만들던 불타는 영화광들도 어느덧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그들이 처음 이 책을 만들 때 이 책이 지난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이렇게 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당시에 예상했을지 아니면 그 보다 더 오래가기를 희망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이 책 자체는 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그 첫 인상이 주었던 강렬함만큼 - 아니 어쩌면 그것은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의 영화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 여러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는지 지금도 여러 행사들에서 차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노력이 한 권의 책을 만들고, 다시 이 책에서 불을 붙인 영화학도들이 세상에 나와 새로운 영화들을 만든다. 그들의 작업이 과연 10년전보다 나은 영화를, 이 책을 처음 만들던 이들이 생각했던 한국 영화의 미래, 영화예술의 미래를 추구하고, 만들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뿜어내었던 그 무렵의 문제의식과 발상만큼은 이 책의 작가들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들은 영화에 들씌어진 온갖 미사여구들 이른바 '예술 영화'니 '컬트'니 하는 영화의 허상을 깨고, 영화를 바로 세우고, 땅에 발딛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에 대한 온갖 찬사와 거짓말 같은 담론의 거품을 빠고 조용히 그러나 진지하게 스크린과 우리들의 거리를 재보았습니다. 그 위치 조정이 성공한다면, 우리의 영화 환경은 매우 달라질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과연 그 후편이 궁금하다.

이 무렵 나는 일기에 시인지, 낙서인지 모를 글 하나를 끄적여 두었는데 일부만 소개해본다면 내용인즉... 이랬다.


쓸쓸한 날에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히 잘 살고 있는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며
쥐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허풍떠는 꼭 그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쥐처럼 천장벽지에 가끔 오줌도 찍 갈기며

책도, 활자도, 인생도 시간과 승부한다. 책과 활자는 한 번 인쇄되어 나오면 세월과 함께 변치 않는다. 다만 쇠락해간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저주인가.... 나도 한 때 영화를 꿈꾸었으니...


* 그 무렵의 나는 한국문화예술의 능력을 100이라고 했을 때 이들의 모든 관심이 온통 영화 같은 영상매체로만 쏠려있는 것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불과 10여년 사이 나의 이런 비관은 그저 그런 전망쯤으로 돌아와 있다. 한국 영화가 가고 있는 길이 겉보기만큼 화려하지 않으며 우리 사회의 다른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그 저변이란 것은 극히 취약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영화를 만드는 나라에 제대로된 시네마 테크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여태 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제임스 트위첼 지음, 김철호 옮김 / 청년사 / 2001년 10월

1. 광고 - 범죄의 재구성 혹은 당의정?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그런 경험들
- 자신의 인생이 어느 사건, 혹은 순간을 계기로 극적인 전환을 거쳐 질적인 변화에 이르는 - 을 하게 된다. 어떤 맥락에서 보든 나 역시 내 삶의 이력을 때로 매우 극적으로 변환시킨 계기가 되었던 몇몇 사건들을 경험했다. 그 중 몇 가지는 이런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간 막노동꾼으로 건축현장의 거의 전 분야, 가령 목수로 시작해서 미장이, 벽돌공, 방수공사 일꾼을 전전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대학생이 되었던 것, 대학을 졸업하고 모 광고회사에서 대리까지 승진했다가 어느날 갑자기 때려치우고 지방의 모 시민문화단체로 업종을 전환한 사건이 그것이다. 광고회사에서 일한 기간은 전부 합쳐봐야 2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지금의 내가 업무적으로 해내야 하는 일들의 거의 대부분을 실무적으로 배우게 된 것은 학교가 아니라 그 회사에서였다. 그곳에서 2년을 근무하는 동안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인지 운이 나빴던 것인지 프로야구단 홍보물, 모재벌그룹의 그룹 브로슈어, 철강회사 브로슈어, 이탈리아산 수입 자동차 브로슈어 등 주로 출판물에 의한 광고를 전담해서 진행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가장 존경했던 광고인 데이비드 오길비였고, 클라이언트들 앞에서 행하는 프리젠테이션은 총성없는 전쟁이었다. 나는 모 그룹 브로슈어 제작을 따내기 위한 공개 경쟁에서 LG애드와 같은 메이저 광고회사를 따돌리고 광고물을 수주한 경험도 있었다. 그날의 기분은 베르사이유궁에서 독일 통일을 강제한 뒤 독일 브란덴부르크문으로 개선하는 프로이센 장군의 심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설 연휴에 쉬어 본 적이 없고, 추석 명절에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하루 세 끼를 고스란히 사무실에서 해결해야 했고, 모두가 퇴근한 빈 사무실에서 디자인팀과 함께 BB탄 에어건을 가지고 서바이벌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 적도 있었다. 아침엔 인근 사우나에 가서 사우나를 한 뒤 박카스 한 병과 우루사 한 알로 해장을 했다. 작은 원룸에서 살고 있었지만 집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연애는 자연도태되었고, 나는 7년을 사귄 사람과 헤어졌다. 충격이었다. 나쁜 일은 함께 온다고 했던가? 그렇게 따낸 재벌의 그룹 브로슈어를 납품하고 얼마 안가 이 회사는 그룹 전체가 정권과 밀착한 비리와 연루되어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그룹 회장은 물론 계열별로 경영권을 물려받은 형제가 줄줄이 구속되었다. 문어발식 경영과 무리한 업종 확대, 권력과 밀착한 비리가 불러온 파국이었다.

그때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마도 내가 썼던 말들, 소위 '컨셉'이니 '카피'니 '비주얼 이미지'들이 그들의 범죄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포장해냈는지를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무렵엔 모든 재벌들이 변화에 목말라했다. 아직 IMF는 터지기 전이었지만 5공화국 시절 3저와 함께 누렸던 호황의 거품이 빠지면서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자각도 있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내가 광고로 관여하기도 했던 모 재벌그룹 총수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는 모두 바꾸라"고 말하며, 전세계에 걸쳐 있는 자사 임직원들을 모아 서울잠실경기장에서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며 변화의 몸짓, 아니 안간힘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것이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본질을 바꾸지 않고, 그에 대한 포장을 통한 변화의 이미지 메이킹만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전만으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거짓을 포장해서 달콤한 설탕으로 덧씌운 당의정을 팔았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지방의 작은 시민문화단체에 취직했다. 업무 환경은 열악했고, 주변에서는 아직 그 일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이 일에 만족하고 있다. 비록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대학생들의 초봉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고 있지만... 나는 일 자체가 주는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2. 다시 읽는 광고 -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나는 홈페이지를 하나 가지고 있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http://windshoes.new21.org)" 제법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고, 햇수로 4년째를 하다보니 여기저기 알려진 모양이다. 그 덕분에 재작년이던가? 대학생연합광고동아리의 강연을 부탁받은 적이 있다. 글쎄,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장차 광고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광고인으로서의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이저 광고회사를 다닌 적도 없고, 단지 2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어쩔 수 없이 광고를 생업으로 삼았을 뿐인데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며 한두시간 남짓한 이야기로 과연 무슨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러난 그것은 광고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예술을 '문학, 미술, 음악, 사진, 영화, 무용, 연극' 등등의 장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고전 시대의 그리스, 로마 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예술엔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장르들이 종종 예술로 평가받는다. 가령, 오늘날 정치인의 웅변을 예술로 생각하고 규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웅변'을 분명히 예술 장르 중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다. '사진'이나 '영화'는 기술적 진보로 만들어진 예술 장르이며 지난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이것을 예술로 인식하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이것을 '요지경'과 마찬가지로 신기한 장난감 정도로 인식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분명히 이것을 예술로 인식한다. 만약 예술을 상업적인 의도와 무관한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영화를 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예술과 상업주의는 서로 떼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21세기, 22세기에는 혹시 '광고'도 예술 장르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그들에게 던졌다. 역시 반응은 거의 돌아오지 않았지만....
편견과 고정관념은 광고의 적이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트위첼은 우리가 흔히 광고하면 떠올리는 마케팅 전문가로서의 광고학자는 아니다. 그는 미국 플로리다대학의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국의 몇몇 광고 잡지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는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해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무장한 광고를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광고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격찬하는 광고가 실제로 대중들에게는 외면당한 사례가 종종 있다. 그것은 광고를 실제로 접하고 구매에 이르는 이들은 아마추어 광고 매니아(?)들이자 프로 소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다보면 쉽게 제임스 트위첼의 시선이, 일반 독자들의 시선과 쉽게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에 비해 무척 쉽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런 점 때문이다.

이 책의 한국 도서명은 "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인데, 큼지막하게 쓰인 한글 도서명 옆에 작고 붉은 타이포그라피로 원제명인 "Twenty Ads that Shook The World : The Century's Most Groundbreaking Advertisings And How It Changed Us All"이다. 우리 말로 번역해보자면 "세계를 놀라게 한 이십 편의 광고 - 20 세기 최고의 창조적인 광고, 그것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영어 원제명은 모두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지만, 맨 앞에 오는 글자만 조금씩 크게 표기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광고업계에서는 알파벳 타이포그라피를 사용할 때 모든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방법과 소문자로 표기하는 방법, 앞 글자만 대문자로 표기하고 따라오는 글자는 소문자로 표기하는 방법 중 어떤 표기 방식을 사용할 때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가를 연구해왔다. 그 결과 앞글자만 대문자로 표기하고, 뒷글자는 소문자로 표기할 때 인지율이 가장 높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책의 표지에서 앞글자만을 다소 큰 폰트 크기를 이용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듯 광고를 위한 심리적 기법에 말려든다.

3. 광고는 자본주의 꽃인가? - 20 세기의 창조
저자 제임스 트위첼은 저자 서문에 해당할 "0장" - 이 책은 모두 21장의 구성인데, 저자 서문을 0장으로 표기하고 있다 - 의 제목을 '예술인가, 쓰레기인가'로 뽑았다. 아마도 그것이 이 책 전체를 총괄할만한 저자의 의도이자 결론내릴 수 없는 결론일 것이다. 흔히들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말한다. 광고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먼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안된다. 그 결과에 따라 광고는 예술 혹은 쓰레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20세기를 결코 자본주의의 시대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복잡다기한 20세기의 사건들을 이리 정리하고, 저리 정리하면서 20세기를 때로는 혁명의 시대로, 총력전의 시대로, 문명과 야만의 시대로, 사회주의의 시대로, 자본주의의 시대로 정의한다. 저자나 나 역시 이런 정의들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저자는 20세기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전초기지를 구축해놓고 있는 문화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쁨은 두 배로 만들어주는 즐겁고 행복한 쌍둥이" 운운하는 추잉검 광고를 무심결에 흥얼거리면서 입냄새와 비듬과 물때를 걱정하면서, 서른일곱 가지나 되는 치약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기 위해 고민하면서, 커다란 꺽쇠가 그려진 운동화를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구입하면서 상업주의를 비판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이런 것들은 물이고, 우리들은 물고기인 것이다. <본문 8쪽>


"물과 물고기"의 비유는 낯익다. 그것은 마오쩌뚱이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며 혁명가와 인민 대중의 관계를 지칭하며 한 말이다. 광고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은 물고기이고, 소비자들은 물이겠지만, 소비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광고의 홍수는 물이고, 자신들은 본의든 아니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이다. 이 비유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어느 경우이든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광고를 들여다보면 상업주의의 종교적 뿌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물건을 사면 구원받으리라. 그대는 오늘 휴식할 자격이 있도다. 당신, 당신, 당신은 모두 하나다. 우리는 당신을 염려하는 벗이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다. 우리가 보살핀다. 우리를 믿어라. 당장 사라." <본문 23쪽>


20세기를 규정하는 중요한 움직임 중 하나는 분명 사회주의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20세기를 러시아 10월 혁명과 함께 출발해 지난 1991년 무렵의 소연방 해체가 역사적 맥락에서 종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역으로 지난 18세기 무렵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를 통해 축적한 자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가동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20세기의 중요한 역사적 본질로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축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이며 이것이 가능하도록 한 토대에는 인간의 욕망이 잠재해 있다. 우리들은 이미 우리들의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일단 새겨진 안락함의 기억이 얼마나 질긴지 너무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은 그 기억에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20세기의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불교, 유교와 같은 종교적 가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인류는 이미 단일 종파, 단일 종교로 통합되었는데, 그 신의 이름은 바로 "물신(物神)"이다.



4. 빨간코 사슴 루돌프로부터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 팔 수 있는 모든 가치를 파는 광고

이 책은 모두 20편의 광고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제1장 "야바위의 왕자 - 흥행의 천재 바넘"으로부터 제20장 "영웅 신화 - 나이키와 마이클 조던"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가장 창조적이었던 광고들이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이었는가를 묻고 있다. 1장에서 다루고 있는 바넘은 쇼비즈니스계의 천재였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팔았고, 제2장에 등장하는 댄 핑크햄은 아무런 효능도 없는 싸구려 물약을 만병통치약으로 팔았다. 우리가 흔히 위약(僞藥)이라고 알고 있는 플라시보(placebo)의 시초인 셈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약효를 산 것이 아니라 광고를 샀다. 제3장 "페어스 비누"편에서는 사람들이 상류층 사람들과 같은 물건(비누)을 구매하고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상류층 사람들과 물질적 평등을 이루었다는 자기만족감에 빠져드는지를 말한다. 제5장 "리스터라인 구강청정제"는 한 광고인이 이전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구취를(서양에서는 식사 중에 소리를 내며 먹는 것을 에티켓에 어긋난다고 여기지만, 동양에서는 맛있다는 표현이다. 그들은 남들 보는 앞에서 코 푸는 행위가 에티켓에 어긋난다고 생각지 않지만 우리는 이것을 예의없는 행위로 생각한다) 에티켓에 어긋나는 것으로 몰아부쳐 결국 사회의 분위기를 구취 자체가 문명인의 예의 범절에 어긋나는 것으로 강제했는지를 말한다. 구강청정제를 팔기 위해 구취는 문명세계에서 추방당해 마땅한 존재가 되었다.

제8장 "드비어스 다이아몬드"는 오늘날에도 즐겨 사용되는 대표적인 광고 문구를 만들어 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A Diamond is Forever." 드비어스사는 다이아몬드를 사랑의 맹세와 결부시킴으로써 탄소 덩어리에 불과한 다이아몬드를 보석의 최고봉으로 올려놓았다. 186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근대적 채굴법이 이용되면서 다이아몬드 재고는 쌓여갔지만 다이아몬드는 여전히 비싼 보석이다. 그럼에도 다이아몬드는 대중화되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 제국을 이루려는 드비어스가 만든 '영원불멸'이란 이미지 전략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런 드비어스의 광고 전략 덕에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는 전인구의 3분지 1이 난민이 되었고, 4천여 명의 어린이, 민간인들의 팔다리가 반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잘려 나갔다. 아름다운 순백의 신부의 손가락에 끼어진 다이아몬드 반지는 사실 아이들의 잘려나간 팔다리이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총.균.쇠"와 "다이아몬드 잔혹사"를 참고하시라). 드비어스와 같은 다이아몬드 상인들은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을 위해 광산을 장악한 반군에게 군비를 제공했고, 반군들은 다이아몬드를 팔아챙긴 돈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오늘날 우리가 산타클로스하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빨간 외투의 뚱뚱한 산타는 코카콜라의 광고 대행사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빨간코 사슴 루돌프 역시 디즈니사가 만든 아기 사슴 밤비에 힌트를 얻은 광고대행사의 한 카피라이터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이렇듯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추억이 되는 산타와 루돌프는 예술인가? 쓰레기인가? 우리는 해마다 발렌타인 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해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탕이나 초콜릿을 주며 사랑을 고백한다. 사람들은 이를 무대책으로 수용한다. 그 결과 캔디 나라의 왕자들인 제과 회사들은 한 해 매출액의 상당 부분을 이때 올린다. 미국의 경우엔 부활절 하루만 5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다고 하니 이건 우리나라만의 현실은 아니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고, 이런 날은 소비자들 스스로도 재미를 위해 만들어낸다. 가령 '빼빼로데이'처럼 말이다.

때때로 광고는 드러내기 보다는 스스로를 감추는 방식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제10장 "폭스바겐의 풍뎅이" 편을 보면 광고업계에서 잘 알려진 광고 카피 "Think small"이 어떻게 소비자들에게 먹혀들어갔는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추는지 말한다. 모두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안달할 때 폭스바겐은 스스로를 감춘다. 사람들은 호기심이 생겨 제 발로 성큼성큼 광고 안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폭스바겐이 딱정벌레 비틀에 대해 공부하고, 이를 전파해준다. 그러나 이때 그들이 알고 있는 비틀에 대한 정보는 모두 긍정적인 것 뿐이다. 부정적인 내용은 결코 소개된 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외에도 말보로 담배와 같이 구체적인 상품으로부터 시작해서 '페미니즘'과 같이 우리가 긍정적인 가치로 인정하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광고의 효과적인 도구로 이용당할 수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5. Protect Me From What I want

개념미술(conceptual art)가인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전광판에 "나의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줘"란 말을 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제임스 트위첼은 "예술인가, 쓰레기인가"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인정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비록 우리가 광고에 대해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고는 있지만, 광고가 우리를 타락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광고는 우리 자신이다. 광고가 인위적인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역사와 인간 본성에 대한 씁쓸한 무지의 소치며, 옛날옛적에 순수하게 자연적인 욕구를 지닌 고상한 야만인들의 평화로운 시대가 있었으리라는 막연하고 낭만적인 추측의 소치다. 식량과 피난처가 충족된 이후로, 인간의 욕구는 언제나 문화적이었지 자연적이지 않았다. 그 같은 욕구와 갈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만족시켜주는 모종의 다른 체제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상업주의는 - 또한 그에 수반된 문화는 - 끊임없이 전진하여 번성을 이룩할 뿐 아니라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우리는 영화 <하이랜더>를 알고 있다.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는 그의 명저『죽음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했다. 인간은 오늘날 그런 존재의 모습을 중단했다. 경위는 바로 다음과 같다. 먼저,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 ― 스스로 죽음을 느끼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에게 죽음을 알려주어야 하든지 간에 ― 을 알고 있었다.… 중략 … 인간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사고나 전투의 경우에서조차도 급작스런 죽음은 드물었다. 급사(急死)는 인간에게 회한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죽음을 박탈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두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약간 위중한 병도 거의 치명적이었던 시대에 죽음은 항상 예고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단지 좀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인간이 지닌 욕망의 근본적인 뿌리는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초극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은 종종 무한을 향한 욕망, 불멸을 향한 욕망과 끊임없는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영화 <하이랜더> 속의 코너 맥클라우드는 불멸불사의 몸을 지녔다. 그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 수명을 다하여 사라지지만 죽지 못하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그는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그와 같은 불멸불사의 몸을 지닌 전사들과 무한의 쟁투를 벌여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수레 바퀴는 지구상에서 최후의 자원이 소모될 때까지 지속될까?

극중의 '코너 맥클라우드'는 최후의 승자로서 온전한 생명 - '유한한 생명', 자신을 기억하는 대상들과 함께 소멸할 수 있는 죽음, '낯익은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을 상으로 받았지만 우리는 연이어 김 빠진 속편이 제작되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욕망의 무한 추구 시스템은 결국 욕망의 폭주를 의미하고, 400년을 넘게 살아온 불사신에게 새로운 투쟁을 강요한다. 욕망의 폭주는 결국 '지구'라는 인류 공동체의 터전을 파괴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나의 욕망으로부터 날 좀 지켜달라(Protect Me From What I Want)'는 제니 홀저의 작품을 보면서 <하이랜더>가 떠오르는 까닭, 우리는 우리의 파괴적인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광고는 21세기에 혹은 22세기에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예술엔 분명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는 인간의 순수한 의지를 반영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예술은 상업주의와 결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자본적인 의사 표현 방식인 광고는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미래의 언젠가 발생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 예술이 광고의 차원을 떨어지든, 광고가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되든 이 둘이 극적으로 결합하는 순간 인류의 삶 역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본래의 의미로서 예술이 광고가 되거나 아니면 광고가 예술이 되는 순간, 인류는 스스로의 욕망에 굴복하거나 욕망을 지구의 다른 인류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으로 순치시킨 결과일 것이다. 분명 전자는 파멸일 것이고, 후자는 공존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인간은 그가 어떤 지위, 어떤 위치에 있든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행복해질 수 없다. 자, 광고가 아니라 당신의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길 바란다.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편력기 / 홍디자인 / 1999년

가끔 TV식, 비디오식 영화작명 법을 보면 유명 배우의 이름을 앞에 들이대면서 "누구누구의 어쩌구"하는 제목의 작품들이 있는데, 이런 제목의 영화는 십중팔구는 개판이었다. 오죽 내용에 자신이 없으면 그런 식의 작명법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 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편력기>는 그런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의혹으로부터 행복한 경계 긋기에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 책은 제목으로부터 책 내용에 대한 절반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명석"이라는 한 개인의 만화읽기에 관한 책이며,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세계최대의 만화왕국 일본의 만화에 대한 것이다. 이제 이 책을 읽는 내내 독자가 유쾌하기만 하다면 이 만화는 제목 그대로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필자의 이름이 들어간 것처럼 이 책은 이명석이라는 한 개인의 캐릭터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전반적인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 저자. 이명석은 누구인가?


알라딘의 저자 소개를 살펴보니 나랑 동갑인 1970년생인데다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이건 아주 중요한 약력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다니... 흐흐)했고,  <이매진> 기자, 웹진 <스폰지> 편집장을 역임, 현재 웹사이트 <마나마나>를 운영 중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그의 사이트를 가본 적이 있었던 듯도 싶다. 게다가 이 책의 부제라고 할 수 있는 "만화 칼럼니스트 이명석이 파헤친 현대 일본 만화의 50가지 스펙트럼"이란 말도 과장 많은 아닌 듯 싶다. 평론가가 넘쳐나는 시대에 굳이 만화 칼럼니스트라는 겸양을 보인 것도 흡족하거니와 50가지 스펙트럼이란 말이 약간 과장이 섞이기는 했으나 "애생낙소투활사인환사초(사랑, 삶, 즐거움, 웃음, 싸움, 모험, 역사, 인간, 환상, 대재앙, 초월)"라는 11가지의 주제 속에 각기 다른 50편의 만화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을 두고 보자면 과장만은 아닌 것이다.

"이명석의"라는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이명석 개인의 - 따지고 보면 어느 책은 또한 개인의 그것이 아니던가 - 지적이고 자유로운 만화 편력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책 표지로부터 맘 편하게 먹고 첫장을 열면 될 터이다. 그런데 첫장부터 범상치 않다. 우선 중구난방식 소개가 아니라 11가지의 주제 구분이 그럴듯하고, 처음 소개하고 있는 것이 한때 우리나라 소녀들을 울고 웃기던 만화 <캔디캔디>의 소개가 아닌가.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이 책이 단순히 만화에 대한 소개나 정보 제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각 아래 개인의 시각을 차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보편적인 시각과 기준 속에서 엄선된 것들임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저자 이명석이 펼쳐놓은 유쾌한 편력을 따라 걷다보면 일본만화의 다양한 내용, 뛰어난 기법, 고유의 미학 등을 함께 분석해 갈 수 있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부분적으로 지적인 갈증을 느끼기 쉽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접근법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부분을 상당 부분 보완해주는 장치들을 갖추고 있다. 미약하나마 "시간의 스펙트럼"과 "테마의 스펙트럼"이라는 부록 성격의 연대기를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한 권으로 일본 만화 역사 50년을 꿰뚫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은 그 50년 역사를 꿰뚫기 위해 시도한 어떤 책보다 튼실하다. 그것은 아마도 이명석이란 한 개인의 역량에 기대고 있는 바가 또한 커보인다. 그런 탓에 이 책의 제목에 저자의 이름이 박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나는 이명석을 따라 일본만화를 편력했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전에 본 것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미처 읽지 못했던 것들도 그가 추천해주는 권유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들에게 일독을 권유하고 싶다. 굳이 만화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읽어두면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2 3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