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 서성철, 김창민 | 까치(2001)


"라틴 아메리카"란 말은 지리적인 구역설정이 아니라 문화적인 설정에 해당한다. 이때의 "라틴"이란 당연히 스페인, 포르투갈 문화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라틴 아메리카"란 말이 던지는 뉘앙스는 부정부패, 군부독재, 빈곤, 미국의 안마당 등 좋지 않은 이미지들인 것도 사실이다. 만약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라틴 아메리카를 단정지어 버린다면 우리나라를 남들이 뭐라 폄하하더라도 별로 할 말이 없어진다. 부정부패, 군부독재, 빈곤, 미국의 영향력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혹은 그에 못지 않은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우리가 현재 라틴 아메리카보다 조금 나은 조건에 있다고 해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문화적인 방면으로 접근해 들어가자면 세계적으로 우리보다 더 많은 인정을 받고 있는 지역이 라틴 아메리카다.

 

외국에서 나온 역사, 지리, 사회 등 교과서를 통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3국이 어느 정도의 비율로 다뤄지고 있는지를 살펴 본 적이 있는 이라면 세계에서 대한민국, Korea란 국가 브랜드의 이미지의 현수준을 알 수 있다. 세계사를 다루는 전체 400쪽짜리 책이라면 중국이 30쪽, 일본이 10쪽이라면 한국은 2쪽 정도이고, 그나마도 중국과 일본의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다루는 정도 수준이다. 그에 비해 태국은 우리보다 나은 편이라 4-5쪽 정도는 된다. 자학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냉정하게 살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라틴 아메리카 문화가 지닌 영향력과 파급력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 지역을 눈아래 깔고 본다는 건 그네들 입장에서 보자면 우습기짝이 없는 노릇이 된다. 물론, 문화의 우열을 매기는 것이 바보같은 짓이긴 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지만, 문화적으로 보았을 때도 라틴 아메리카는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상대란 거다. 단적인 예로 최근 국내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외국 작가들 - 파울로 코엘료(브라질), 루이스 세풀베다, 아리엘 도르프만(칠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페루) -의 면면을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는 그런 라틴 아메리카가 배출한 걸출한 작가와 시인들의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라틴 문화 전문가인 김창민, 서성철 선생이 엮고 많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 전문가들이 참여한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세계를 작가 중심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책이 작품론 대신 작가론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 전반에 대한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의 방편을 택한 것이지만, 최근에서야 라틴 아메리카 문학 작품들이 국내에 번역 출간되고 있는 현실 탓에 어쩔 수 없이 택한 고육지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모두 10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국가별 구성 - 멕시코, 과테말라, 쿠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브라질의 순서 -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를 이해하기 위한 1차적인 자료가 작품이란 점을 고려했을 때 "후안 룰포(멕시코),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과테말라),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기예르모 카브레라, 호세 레사마 리마(이상 쿠바), 로물로 가예고스(베네수엘라),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페루), 에우클리데스 다 쿠냐(브라질)" 등의 작가와 시인들은 국내에 거의 소개된 바가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옥타비오 파스, 카를로스 푸엔테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파블로 네루다, 이사벨 아옌데, 보르헤스, 에르네스토 사바포, 마누엘 푸익" 등은 국내에 출간된 번역서가 있고, 옥타비오 파스, 마르케스, 보르헤스, 네루다 등과 같이 국내에도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문인들도 있다. 이 책이 지닌 미덕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들에 대해 새롭게 알게 해주는 것에도 있지만, 단순히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 분야만이 아닌 그들이 처한 사회와 정치적 상황과 연관지어 함께 다루어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같은 까치 출판사에서 나온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사상"과 함께 읽는다면 훨씬 좋은 독서 체험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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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과 그림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 김지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2004)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내가 읽은 책과 그림"은 한 편으론 유쾌하면서 다른 한 편으론 읽는데 힘겨운 책이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의 거의 절반은 이름도 처음 듣는 작가들이었고, 이름을 아는 작가들도 절반 가량은 이름만 알고, 책은 본 적이 없는 인물이고, 다시 그 절반 정도의 사람들만 책을 읽었고, 작품 이름이라도 들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를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생 때부터 좋아했던 작가 "귄터 그라스"의 당시 신작 "광야(원제 : Ein Weites Feld)"를 놓고 그가 벌인 해프닝 때문이었다. 그 무렵만 하더라도 그냥 성격 더러운 괴짜 평론가 한 사람이 있나 보다 하는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귄터 그라스의 유명세 못지 않게 그 자신의 유명세가 더해져 독일 문화계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사실 라이히-라니츠키가 "슈피겔"지 표지에 등장한 것은 1995년 귄터 그라스의 신작을 찢는 사진말고도 또 있었다. 그는 1993년에도 표지에 등장했었는데, 이때 그는 개로 등장했었다. 1993년과 1995년에 등장한 그의 사진에 공통점이 있었다면 이 두 사진 모두 책을 찢고 있는 인물로 나왔다는 것이다. 1993년 그가 책을 찢는 장면으로 등장했던 것은 독일 문학에 대한 것이었지만, 1995년에 등장했던 것은 귄터 그라스의 신작이란 구체적인 작가와 작품을 지목한 것이었다. 비록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이지만 전후 독일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고 있던 귄터 그라스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분을 참지 못해 찢어 버리는 문학비평가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는 귄터 그라스가 단치히 4부작 이후 발전과 변화가 없는 점을 참을 수 없으며, 그라스의 명작 "양철북"을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귄터 그라스가 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독일 작가로는 1972년 하인리히 뵐, 1981년 엘리아스 카네티 이후 18년만의 일)로 발표되었을 때, 그의 수상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한 기자들에게 그는 "Ich bedaure nichts"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 말로 "전 유감 없습니다."란 뜻이라는데, 독일 대통령, 수상, 마르틴 발저 같은 이들이 그의 수상 줄소식에 기뻐한 것과 비교하면 영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생각해 보세요. 마틴 발저가 그 상을 받는다면, 저에겐 그건 날벼락일 것입니다. 아니면 그 멍청한 페터 한트케요! 재앙이지요. 스톡홀름에겐 귄터 그라스 말고는 없었어요." 하지만 그는 귄터 그라스의 노벨상 수상을 끝끝내 축하하지 않았다.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라이히-라니츠키는 매우 편협한 인물로 비춰질 수도 있을 텐데, "문학권력"이니 "주례사 비평"이니 특정한 집단끼리 나눠먹기식의 문학상 제도니 해서 구설이 끊이지 않은 우리 풍토를 생각해보면 작가와 비평가의 사이가 이렇게 안 좋아도 노벨상도 때 되면 받아가고, 작가는 작가대로, 비평가는 비평가대로 자기 고집을 세우며 작품활동과 비평활동을 하는 모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는 귄터 그라스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을 새롭게 세워나가고 있는 모습이 고루해보인다는 비판을 아끼지 않고, 귄터 그라스는 귄터 그라스대로 자기 갈 길을 꿋꿋이 간다.


문학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cih-Ranicki)는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다. 그는 1920년 폴란드 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지만 당시 독일계 학교를 다녔다. 그는 나치시대의 베를린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아비투어를 치르지만 1938년 가을 폴란드 국적을 지녔다는 이유로 추방된다. 바르샤바에 거주하게 된 그는 1940년부터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원회에서 통역일을 하다 탈출한다. 이때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살해당한다. 그는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전후 폴란드의 외교관으로 근무(런던 주재 폴란드 대사관의 영사와 총영사를 지냄)했다.1949년 정치적인 이유로 외교관직을 박탈당한 뒤 1958년 독일로 이주한다.


'문학의 교황(Literaturpapst)' 이란 평가를 받는 그는 평론가란 정확히 어느 한 입장에 서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나 그 책에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모든 작가는 결국 돼지이고, "작가는 재능이 있는 돼지 아니면 재능이 없는 돼지"란다. 이 책 "내가 읽은 책과 그림"에서도 그는 좋아하는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그는 모제스 멘젤스존, 루드비히 뵈르네, 하이네, 토마스 만 등에 대해서는 열렬한 애정을 귄터 그라스와 베르톨트 브레히트에 대해서는 석연찮은 표정을 짓는다. 라이히-라니츠키가 '문학의 교황'이란 칭호를 얻게 된 데에는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FAZ)"과의 인연이 컸다. 그는 1973년 12월 FAZ의 편집진으로 복귀하면서 이 신문의 문예비평란을 유럽의 독일어권 신문 중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를 대중적인 스타로 만든 것은 독일 제2방송(ZDF)의 "문학 사중주(Das Literarische Quartett)"란 프로그램 덕이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TV, 책을 말하다" 정도라고 해야하겠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지루하고, 재미없게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도 모두 악동같은 라이히-라니츠키가 내세운 조건들 때문이었다. 그는 TV란 미디어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일 수 있는 "보여준다는 원칙"(무엇이 되었든, 보여줄 수 없는 것은 가상의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서라도 보여준다)을 허물고, 그와 초대 손님의 진지한 대화만으로 구성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대표적인 초대 손님은 "아도르노, 슈피겔 발행인인 루돌프 아우구스타인, 에른스트 블로흐, 하인리히 뵐, 막스 프리쉬, 귄터 그라스, 발터 옌스, 지그프리드 렌츠, 마틴 발저" 등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라이히-라니츠키를 포함한 3인의 패널과 한 명의 초대 손님으로 구성되는데, 초대 손님은 이들과 토론을 나눈다.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방송사는 주제 및 초대 손님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해 관여할 수 없다. 1년에 6회 방영됨.)


어쩌다보니 "내가 읽은 책과 그림"에 대한 서평이 아니라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에 대한 소개글이 되어버린 듯 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철저히 "라이히-라니츠키"의 책읽기와 그가 정성들여 수집한 작가들의 초상화로 구성된 책이다. 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보다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일과 유럽에서는 문학의 교황으로 군림하는 비평가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이 책을 보다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필자인 라이히-라니츠키의 친절보다는 이 책을 번역한 "김지선" 선생과 이 책의 출판사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편집자들의 친절이 돋보인다. 독일어와 독문학이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격감해 가는 시점에서 이 분들의 공로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잘 만든 책에는 후한 점수를 주어야 하겠지만, 이 책이 모두에게 쉽게 읽을 수 있다며 추천하기는 약간 곤란하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어디까지나 저자와 우리 독자들이 건너야 할 외나무 다리인 것이고, 최소한 이 책에 있어서만큼 그것은 번역작가와 편집자의 책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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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총서 - 전20권 
김광균 | 김기림 | 김소월 | 김영랑 | 박남수 | 박목월 | 백석 | 오장환 | 유치환 | 윤동주 | 이육사 | 임화 | 정지용 | 조지훈 | 한용운 | 박두진 | 이용악 | 김상용 | 김억 | 김창술 (지은이) | 열린책들(2004)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인 18인은 우리 문학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면 어느 책이든 빼놓지 않는 이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시집을 찾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낯익음이 주는 게으름이 이들의 시집을 읽지도 않은 체 이미 다 아는 양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의 시집은 주로 선집 혹은 전집 그도 아니면 여러 시인들을 한데 묶은 편집판본들이 허다하게 널린 탓이다.

 

모두 20명의 시인들의 펴낸 그네들의 시집 초간본을 한데 묶은 이 "초간본총서"는 "열린책들"이란 출판사의 기획력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나 된다. 출판에 있어 총서(叢書)라는 것은 "일정한 주제(主題)에 관하여, 그 각도나 처지가 다른 저자들이 저술한 서적을 한데 모은 것"이라 정의된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데 묶어주는 기획에 있어 원칙이란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전체 기획의 통일성을 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집을 선정하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 남아야 될 작품성 있는 시집, 둘째, 그중에서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시집을 골랐다. 표기는 원칙적으로 현행 맞춤법에 맞추었지만 특별한 시적 효과와 관련된다고 판단된 경우 원문의 표기를 그대로 살렸으며 필요한 경우 편자 주를 달았다." 그외의 점에서 이 책은 총서로서 뛰어난 역량과 아담한 판형과 제본 솜씨를 보이고 있으며, 쪽수면에서 얇은 시집의 특성상 낱권 보관의 어려움을 배려하여 예쁘게 박스 포장하는 배려까지 기울였다.(소장용으로도 그만이란 뜻이다)

 

우리는 문학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인시집으로 소월의 스승이기도 한 김억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라고 배웠다. 이 시집은 모두 164쪽으로 1923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되었다. 책의 첫머리에는 춘원 이광수(李光洙)와 지은이의 서문이 있고, 총 83편의 시를 9장의 구분으로 나누어 싣고 있다. "열린 책들"에서 출간된 김억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살펴보니 틀림없이 내가 배우고 알고 있는 김억의 초판본의 수록 형태와 내용을 빠짐없이 담고 있었다. 춘원은 이 시집의 서문에서 "인생에는 기쁨도 많고 슬픔도 많다. 특히 오늘날 흰옷 입은 사람의 나라에는 여러가지 애닮고 그립고, 구슬픈일이 많다. 이러한 <세상살이>에서 흘러나오는 수없는 탄식과 감동과 감격과 가다가는 울음과 또는 우스꽝과, 어떤 때에는 원망과 그런 것이 시가 될 것이다. 흰옷 입은 나라 사람의 시가 될 것이다. .....<중략>..... 어디 해파리, 네 설움, 네 아픔이 무엇인가 보자." 라고 말한다.

 

이렇듯 이 총서는 우리 문학사의 중요한 시기이면서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웠던 시기의 시인 18명의 시집 20권을 초간본 형태의 원형 그대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런 기획 자체는 앞으로도 더욱 많아지길 희망하게 되는 그런 류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이 책의 단점이기도 하다. 만약 원형 그대로의 초간본 형태를 보여준다면 일반 독자들은 과거의 맞춤법에 따른 이 시집들을 읽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탓에 총서기획자들은 보다 대중적인 시집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시집의 맞춤법과 문장 형태를 현대적인 것으로 개작하였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대중을 위한 배려이다. 그러나 연구자료로서 이 책을 기대했던 문학연구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책은 이전에 출판되었던 다른 시집들과 변별점을 찾기 어렵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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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과 밥과 자유
     


공중에 떠다니는

저기 저 새요
네 몸에는 털 있고 깃이 있지

 

밭에는 밭곡식
논에는 물베
눌하게 익어서 숙으러졌네

 

초산(楚山)지나 적유령(狄踰靈)
넘어선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니?


 

나는 소월 김정식의 시를 가슴 깊이 절절하게 느껴본 적이 몇 번 없었다. 그러니까 최근 그의 시들을 다시 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시 감상이란 것은 대개 좀더 직접적으로 분출되는 어떤 정서적인 것에 기댄 바가 컸던 것이다. 조용필이란 가수를 알기 위해서 내게는 좀더 나이 듦의 시간이, 위스키가 참나무통 안에서 숙성해 가듯 탄닌과 기타 성분이 참나무통이란 숨쉬는 공간 안에서 숙성해가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을 가두고 있는 육신의 참나무 통도 그렇게 갇힌 듯 숨쉬며 숙성해 가는 공간이 바로 삶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보면 다 늙어가는 마당에 김소월이라니 하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니라 나이 드니 비로소 소월의 시가 눈에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소월의 시를 단순히 여성적인 정조의 한이 맺힌 시라고만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가. 시가 미술과 비슷한 점은 그걸 설명하고 해석하기 시작하면 그 맛이 절반 이하로 줄어 든다는 것이다. 시 감상은 먼저 느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 김소월 생가


소월 김정식(1902 ~ 1934)은 평안북도 곽산 출생으로 원래 부유한 광산업자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의 장손이란 것은 비록 부유해본 적은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장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은 알 것이다. 금지옥엽이란 말이 괜히 생겼을까. 그러나 부유하고 행복했을 법한 이가 추락하며 느끼는 낭패의 높이감이란 바닥 언저리에서의 추락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으리라. 소월의 부친은 어떤 이유에서인지(소월의 나이 2세 때 아버지 김성도(性燾)는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병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실성하고, 이런 가족사의 비극은 어린 소월에게 깊은 상처로 자리해 그의 유년 시절의 커다란 그늘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조부는 한문학을 가르치며 손자를 양육하였고, 소월의 나이 15세 때 조만식이 교장으로 있었던 오산중학교에 들어가 안서 김억의 제자가 된다. 그러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 오산학교가 폐쇄당하자 배재중학으로 편입하여 졸업한다.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그해 9월 관동대지진을 경험한 뒤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한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볼 일은 소월의 집안에서 일어난 2대에 걸친 일본인들의 집단 린치에 대한 경험이다. 아버지는 제국의 경계를 넓히려는 첨병이랄 수 있는 철도 부설의 목도꾼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고, 그 아들인 소월은 "관동대지진"이라는 비극을 경험한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의 관동지방을 급작스럽게 덥친 강도 7.9의 지진은 일본 역사상 최대의 피해를 일으켰다. 사망자 91,344명, 가옥 전파·소실 가옥 464,900호라는 엄청난 숫자는 일본에 일종의 패닉 현상을 불러 일으키고,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안감과 혹시 있을지 모르는 반정부적 행위의 빌미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그야말로 로마를 불태운 네로가 그 책임을 기독교도들에게 돌린 것처럼 그 책임을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 사회주의자들에게 돌려 6천명, 1만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학살 당했다. 지진이 발생한 9월 1일 오후에는 이미 관동지방 각지의 경찰서 내에 '불령 선인(不逞鮮人)들이 우물 속에 독약을 던지고, 방화, 강도, 강간'을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고, 파출소 앞에 '조선인폭동'이라는 벽보가 내 걸리고, 경찰은 제 정신이 아닌 민중을 향해 메가폰을 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돌아다녔다.

 


 ▶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을 폭도로 몰아 학살하는 일본인 자경단
관동대지진 :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 카나가와, 치바, 사이타마, 시즈오카, 야마나시, 이바라키의 1부 6현에 강도 7.9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과 함께 발생한 화재로 인해 9만9,331명이 사망했고, 4만3476명이 행방불명되었으며, 가옥전파가 12만8,266호, 반파가 12만6233호, 화재로 인한 소실이 44만7128호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본 정부는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해진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 지진과 화재가 일어나는 와중에 조선인들이 약탈과 방화, 우물에 독극물을 넣는 등의 불령스러운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어 재난을 당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들어 - 이튿날인 9월 2일 제국헌법 8조에 따라 계엄령을 선포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이처럼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이유는 몇 해 전 조선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1919년)의 영향으로 조선은 물론 일본과 중국 등으로 퍼져나가던 조선인들의 해방운동을 경계하고, 당시 재일조선인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일본 사회주의자 및 노동자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일본 정부는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군대와 경찰뿐만 아니라 민족적 편견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이 결성한 자경단 등이 합세하여 조선인 6,661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이와 같은 조선인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현재까지도 희생자인 조선인들이 학살의 원인 제공자인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런 유언비어들은 다시 등사판 인쇄물로 복제되어 대량으로 배부되었고, 지진이 발생한 며칠 뒤인 3일에는 내무성 경보국장 이름으로 '조선인 가운데는 폭탄을 소유하고 도쿄 시내에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자가 있다'는 전보를 일본 각지의 지방장관들에게 퍼뜨렸다. 결국 군대·소방대와 같이 국가기관과 민간인 자경단에 의해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어 수많은 조선인들이 살상당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 소월은 일본에 있었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소월은 정치적인 의미들은 탈색된 채 탈역사적, 탈정치적 맥락에서의 무미무취(?)한 민요적 서정만 읊조리다 간 시인으로 기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관동대지진의 학살을 피해 귀국한 소월은 <초혼>을 지었고, 이 시가 관동대지진으로 학살된 조선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이란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主人)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물론 이 학살의 배후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있었다. 그렇게 일본에서 도망치듯 귀국한 뒤 소월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 땅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부의 광산업 실패로 집안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고, 이곳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해 경영하며 생활고를 덜어보고자 했으나 이마자도 여의치 않아 그는 심한 염세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1934년 고향 곽산으로 돌아가 치사량의 아편을 먹고 그만 자살하고 만다.

 

▶ 서울 남산 소월길에 위치한 소월시비 : 대학 다닐 때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올라갔던 그 길에 서 있던 소월 시비였지만 소월의 시에 새겨진 참맛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소월에 대한 어떤 이미지들은 고정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만, 소월에게서 단지 여성적인 정조의 한풀이만을 발견할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를 보도록 하자.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 가나니, 볼 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을 김매이는.



소월의 재발견, 그것은 내게 커다란 기쁨이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그것은 참나무통에 갇혔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호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낯익은 듯 모르는 시인들을 다시 알게 된다는 것...
이만하면 나이드는 것도 행복이지 않은가.  젊은 혈기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거나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의 느낌을 얻는 것은 말이다. 종종 우리네 문학교육은 시인을 규정해버림으로써 시인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도리어 규제해버린다. 문학이란 학문이기 이전에 예술이란 사실을 망각해버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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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항우와 유방(전3권)』 - 시바 료타로 | 양억관 옮김 | 달궁(2002)


요시카와 에이지와 시바 료타로


책을 열심히 읽는 이가 아니더라도 재미삼아 "내 인생의 책 10권"을 선정하는 일을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책 10권 중 하나는 틀림없이 "삼국지"에 할애해야만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가 처음 접하는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일어판 번역본이었다. 지난 10여년 동안 국내에서 "삼국지"가 여러 차례 다시 번역되거나 평역되어 발간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황석영, 이문열 등 작가의 이름을 내건 삼국지가 있고, 다시 그 판본을 어느 것으로 하느냐에 따라 청년사판, 범우사판 등 출판사마다 삼국지의 저본을 어느 것으로 했으니 자기네 삼국지가 정본 삼국지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삼국지를 발간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삼국지 발간 붐은 요시카와 에이지가 뿌린 요시카와 에이지판 삼국지의 독소를 해독하기 위한 시도인지도 모른다. 일본식 역사 소설의 시작은 요시카와 에이지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 완성자라 불리우는 사람은 바로 시바 료타로이다.

이 두 사람을 극명하게 가늠하는 것은 '요시카와 에이지가 책상 위의 원고지와 펜 하나로 소설을 탈고했다면,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트럭 한 대분의 자료가 필요하다.' 는 말이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에는 나관중의 원작엔 어디에도 없는 부분이 과감하게 삽입되어 있곤 한다. 가령, 유비가 낙양의 차를 구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장비의 도움을 받고 부용 낭자를 만나 처음 사랑에 눈뜬다는 식의 에피소드는 원작 삼국지엔 없는 대목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기억나는 분이라면 요시카와 에이지판 삼국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에서 당신이 만약 와츠키 노부히로의  "바람의 검심"이나 히데키 모리의 "묵공" 등을 인상적으로 읽었다면 당신은 본의든 아니든 시바 료타로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종종 일본의 만화가들이 만든 역사만화들을 읽노라면 그들의 치밀한 고증과 역사에 대한 관심에 놀랄 때가 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당시의 정경과 사회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나는 그 어떤 역사책보다 "바람의 검심"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춘추전국시대의 묻혀진 사상 묵가(墨家)를 상상 속에서 구현해내는데 "묵공"이란 만화의 도움을 얻었다.

일본의 국사(國士), 시바 료타로
- 한국에서 사(士)는 선비를 의미하지만 일본의 사는 사무라이를 의미한다

대관절 일본의 만화가들은 어디에서 그런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것이 어느 한 작가의 공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세계 제1의 출판대국으로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책들이 출판되고, 중고도서의 유통망 역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짜여져 있어 한 번 출판된 책이 영영 사라지고 없어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출판문화가 많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일본의 출판문화를 따라가기엔 먼 얘기이다.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 대한 책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일본의 경우엔 외국의 저자가 "도쿄이야기"를 펴낼 만큼 풍부한 자료들을 비축해놓고 있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트럭 한 대분의 자료가 필요하다. 설령, 직접 그 책을 소장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어딘가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상상해낼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문화 콘텐츠가 비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문화가 형성되어야만 요시카와 에이지도 책상머리에서 펜과 원고지만으로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그 길을 연 인물이 바로 '시바 료타로' 라 생각한다. 지난 1996년 시바 료타로가 73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일본 요미우리 신문이 사설을 통해 '국사(國士)가 서거하셨다'라며 그의 위치를 국가적 스승의 위치로 승격시킨 것은 고인에 대한 공치사의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시바 료타로. 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福田定一)'로 1923년 일본 오사카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오사카외대 몽골어과를 졸업하고, 산케이 신문 오사카 지사에 입사한 그는 처음엔 저널리스트의 길을 걸었다. 그의 문장이 건조하면서 힘있는 문체, 특별히 명문장이라 할 수는 없어도 쉽게 이해되고, 이야기 전개에 빨려드는 문체를 지니게 된 것은 그가 처음 문장을 가다듬은 곳이 신문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1955년 "페르시아의 환술사"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그는 5년 뒤인 1960년 "올빼미의 성"으로 나오키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올빼미의 성"은 지난 1999년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일본 전국시대의 효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리고 숙적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사이의 암투를 닌자(忍者)라는 존재를 통해 다룬다.


일본의 역사적 자부심 부흥

우리 역사에서도 정사(正史)가 있는가 하면 야사(野史)가 있듯 일본에서 닌자의 존재는 마치 우리의 '활빈도'와 마찬가지로 매력적이긴 하나 정사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거의 없는 존재들이다. 시바 료타로는 그들을 일본 문화의 한 가운데로 끌어낸다. 이외에도 그가 다루었던 역사 소재들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일본의 검성이라 할 수 있는 "미야모토 무사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여는 최대의 전투였던 "세키가하라 전투" 등등 그는 일본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그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인물상을 발굴해낸다. 시바 료타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1966년 발표된 "료마가 간다"일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일본 역사소설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되고, 키쿠지칸 문학상을 수상한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그가 어째서 그토록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그는 일본의 최대 격동기였으며, 근대화라 할 수 있는 메이지 유신의 전반기를 살았던 일본의 지사(志士)이자 풍운아였다. 처음엔 존왕양이파로 출발했던 그는 친서양파인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암살하기 위해 에도에 갔다가 그의 설득에 감화되어 오히려 가이슈의 제자가 된 인물이다.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하신다면, 1894년 김옥균이 상해에서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당하지 않고, 홍종우가 도리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라. 이렇듯 사카모토 료마는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 일본 역사를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인들이 상상하고 좋아할 수 있는 인물, 일본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기백(氣魄)이 살아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일본인의 정신 속에서 이런 기백을 부흥시킨 존재 셋을 꼽자면, 아마도 교진(巨人)이라 불리는 요미우리(讀賣) 자이언츠 구단과 시바 료타로가 재창조해낸 인물 사카모토 료마,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신이라 불리운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蟲)의 아톰. 이렇게 셋을 꼽을 수 있다. 시바 료타로는 그렇게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을 부활시켜 놓았다. 기백(氣魄)! 우리 말로 '넋'이라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을 일본인들은 참 좋아한다. 백(魄)이란 한자에서는 어쩐지 같은 백(白)을 사용하는 박(迫)자의 느낌이 난다. 압도해오는 느낌이랄까. 도검(刀劍)을 숭상하는 민족이라 그럴지도....

앞서 일본의 역사만화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는데, 특히 일본 만화는 결말 부분에 가면 모든 것이 일본으로 환원되는 구조를 갖추고 있어 마지막에 가서 한국인으로서는 맥빠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가령, 만화 "묵공"에서 주인공은 결국 중국에서 묵가의 정신을 펼치는데 실패하고 일본, 지팡구에 간다. 칭기스칸도 우연히 일본에 와서 한 수 가르침을 익히고, 몽골로 돌아가 천하를 통일한다. 일본만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은 진실을 가장하고 있지만 진실이 아니란 점에서 의사역사(疑似歷史)이고, 이를 부추긴 책임에서 시바 료타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시바 료타로는 일본의 역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대륙의 역사, 중국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다.

일본의 역사관과 동아시아 역사관의 차이
-민중을 어찌 볼 것인가?

"항우와 유방"을 읽으며 - 나를 민중주의자로 구분해야 하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 께름직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엑스 파일"의 주인공들만이 온세상이 외계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바보처럼 행복의 진구렁 속에 있을 때 이들을 구원해야만 하는 소수의 깨어있는 지식인 행세를 하는 것처럼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모두 신랑신부를 장식하기 위한 들러리들에 불과한 것처럼 그려진다. 어쩌면 그것이 일본의 역사적 전통에 해당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제대로 된 민중혁명, 민란을 경험하지 못한 나라 일본의 한계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왜 일본에 민란이 없었는가 하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도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일본 역시 수많은 민란을 거쳐 왔으나 일본 역사에서 민중이 주된 주체로 떠오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에서 민중은 주로 수동적인 존재로서 동원의 대상이 된 반면 우리의 민중이란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통해 주체적으로 무장한 경험이 있다. 즉, 조선시대의 예만 놓고보더라도 민중이 자발적인 무장을 통해 의병을 형성해 지배계급을 구원하는 사례가 많았으므로 그에 따른 문화 전통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일본의 전쟁은 철저히 내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많았던 반면에 우리의 전쟁은 철저히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 민중의 자발적인 동원없이는 지배계급이 지탱할 수 없었던 경험의 차이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인 차이로 작용한다. 그것은 현재 일본의 시민운동과 한국의 시민운동이 보여주는 형태의 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 "항우와 유방"에서도 시바 료타로의 철저한 역사고증은 역시 돋보이는 대목이다. 시바 료타로가 중국의 고전들 특히 역사서들을 탐독해왔을 뿐만 아니라 실제 자신의 발로 중국의 역사 현장들을 찾아다닌다.

이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중요한 소재와 배경 중 하나로 등장하는 중국의 식량창고에 대한 묘사 역시 그의 이런 자료 수집 열정을 통한 것이다. 이 책 "항우와 유방"은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같은 의미에서 매우 재미가 없다. 이것을 시바 료타로의 소설의 한계라고 한다면 필부의 식견이라 미안한 이야기겠지만 그의 소설들이 일본의 이야기를 다루는 동안엔 재미있지만, 그의 소설이 일본이란 작은 섬나라를 벗어나 대륙으로 넘어가면 어딘가 한 귀퉁이가 허물어진 듯 느껴지는 까닭 그것은 시바 료타로가 사람의 바다, 즉 인해(人海)로서의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가 일본의 역사소설가 중 최고의 자리에 놓인다면 중국에서는 누구를 손꼽아야 할까? "나관중"을 그 자리에 놓는다고 해서 이견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책 "항우와 유방"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항우와 유방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뒤 기억에 남는 인물들은 거의 없거나 기억에 남는다고 해도, 항우와 유방을 제외하고는 그 의미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이가 없다. 만약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만을 읽은 이라면 중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인 진말한초의 역사가 밍숭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에게 수많은 고사들을 전해준 장자방 장량과 한신, 범증과 번쾌, 소하와 조참, 하우영과 전영 등등 이 시기를 주름잡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저 스쳐가는 풍문처럼 전해지고 만다.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시바 료타로를 나관중의 반열에 놓아도 좋은가? 하고 말이다. 이것은 여러모로 불리한 게임이다. 삼국지는 나관중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지의 저자가 나관중이 정말 맞는가 하는 문제는 셰익스피어가 과연 실존하는 인물이었냐는 질문만큼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앞서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민중의 차이로 이야기한 바 있다. 물론 조선은 전제왕정의 국가였다. 하지만 조선에서 소위 '백성'이라 불린 민중을 제외하고 기술되는 역사소설을 오늘날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을까? "장길산"이나 "임꺽정"에서 민초들을 배제한 상황에서 이 역사소설들을 읽어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인해(人海)"를 제외하고 기술되는 역사소설이 과연 뚜렷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은 삼국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삼국지를 일견 세 영웅, 조조와 유비, 손권의 세력 다툼만으로 보는 사람은 삼국지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삼국지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바로 인해이다. 삼국지만큼 민심의 동요와 그에 따른 영웅들의 성쇠를 주도면밀하게 다루고 있는 역사소설도 매우 드물다. 유비가 그토록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제갈량과 결의 형제들만의 덕이 아니었다. 그것이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민심이었다는 것을 저자 나관중은 끈질기게 설득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살펴보자. "항우와 유방"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주인공은 "유방"이 아니라 "항우"이다. 시바 료타로는 승자가 아닌 패자로서의 항우에 좀더 매력을 느끼고 있는 듯 보인다. 책의 전개 역시 유방이 어떻게 승리했는가하는 것보다는 항우가 어떻게 패배하게 되었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유방은 중국의, 혹은 중국 민중의 표상처럼 묘사되고 있으며, 중국의 민족성을 그대로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유방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마오쩌뚱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1927년의 호남폭동에 실패한 마오쩌뚱은 불과 1천여 명의 패잔군을 이끌고 호남성과 강서성의 접경지역에 있는 정강산으로 퇴각한다. 그는 이른바 `정강산 투쟁`을 전개하면서 마오만의(사실은 이미 유방을 비롯한 중국 왕조 건설의 역사적 전통에 기반한) 농촌혁명전략을 구체화시킨다. 그는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홍군을 조직하고 `혁명 근거지`를 구축하고, 유격전술에 입각하여 지구전을 전개함으로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 간다는 농촌혁명전략을 세운다.

인해(人海): 사람의 바다를 이해하지 못한 시바 료타로

사람들은 중국의 인해전술을 단순히 머리수로 밀어부치는, 사람을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전술인양 오해하지만 그건 인해전술에 대한 대단한 착각이다. 중국의 인해전술은 단순히 사람의 머리수로 밀어부치는 전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어 사람의 바다에서 물고기처럼 유유히 헤엄치며 승리하는 전술이다. 미국 등 자본주의 제국들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국민당 군대는 결국 사람의 바다에 빠져 익사한 것이다. 이때 마오는 유방이고, 장쩨스는 항우가 된다.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시바 료타로는 유방보다는 항우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마오보다 장쩨스가 좀더 좋았던 모양이다. 시바 료타로를 읽는 것은 이렇듯 여러모로 재미있는 경험이다.

작가와 두뇌 싸움을 벌이며 어떤 대목에서 작가는 어째서 이런 표현을, 이런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심리적으로 겨뤄가며 읽을 수 있는 체험을 하도록 해주는 이는 오늘날 참 드물다. 분명한 건 나는 황석영의 삼국지보다는 이문열의 삼국지가 재미있고, 이문열의 삼국지보다는 고우영의 삼국지가 보다 더 재미있다. 그러나 내가 동의하는 시각은 이문열도, 고우영도 아닌 황석영의 시각(황석영의 삼국지에 황석영의 것이라 할 만한 시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것이 나로선 앞서 삼국지에 대한 나의 시각이 옳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나관중은 이미 민중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에 새로운 평역은 그에겐 사족일 것이기에)이다.

시바 료타로의 책은 재미있다. 그에게는 그만의 사관이 있고, 그가 펼쳐놓는 여러 장치들, 가령 역사적 고증이나 인물에 대한 그만의 해석 솜씨,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건에 대한 의미 재부여 등을 갖추고 있다. 만약 시바 료타로식 표현법을 빌어 말하자면 그와 나는 적이지만, 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기회가 온다면 나는 그대의 목을 베어주리라. 한편에서는 시바 료타로를 두고 국수주의적이라는 비판을 가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서술에는 일본 중심주의가 두드러진다. 일본 만화들 혹은 문학작품들에서 두드러지는 것들 중 하나는 선과 악의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슬램덩크"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이 만화에 등장하는 그 어떤 악한 캐릭터도 궁극적으로 악하지 않다. "바람의 검심"에 등장하는 악한도 궁극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다. 그들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싸운다. 메이지 유신 당시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막부파의 무사집단 신선조(신센구미) 역시 그들의 명분을 가지고 일본을 위해 싸운 존재가 된다. 료마가 주인공이라도 신선조 역시 나쁜 이들은 아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옳다는 것을 위해 싸운 것뿐이고, 죽은 료마도, 죽인 신센구미의 무사에게도 죄는 없다. 이것이 일본식이다.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은 모두 피흘린 근대화를 경험한다. 이들 세 나라는 모두 내전을 경험하며 근대화에 도달한다. 중국은 국공내전을 한국은 한국전쟁을 치뤘다. 그리고 일본 역시 존왕양이파와 막부파 사이에서 내전을 치른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내전과 일본의 내전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중국과 한국의 내전엔 체제 대결, 이념 대결의 요소들이 있는 반면, 일본의 내전엔 그것이 없었다. 이 말을 우리의 개화기에 접목시켜 보면 이렇다. 김홍집 내각은 친일적인 인사들로 구성된 내각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김홍집을 친일파로 욕하지 않는다. 이때의 친일파라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친일파와는 다른 의미이다. 척사파와 개화파를 두고 우리는 어느 일방을 편들 수 없다. 그들 모두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그들의 방식으로 애국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본과 한국, 중국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를 낳았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일본 역사의 악역은 외부로부터 온다
- 엘리트주의, 국수주의, 냉소주의

일본의 역사에서 악역을 담당해야 할 존재가 없다보니 일본의 역사에서 악역은 주로 외부에서 온 것들이 된다. 앞서 일본의 민란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실제 했던 민란의 주인공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天草四郞)'를 말한 바 있다. 어떤 의미에서 아마쿠사는 국수적이고, 폐쇄적인 국가 일본이 상상해낼 수 있는 역사적 요수의 이미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는 외국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여 민란을 일으킨다. 기독교의 혁명적 요소들이라 할 수 있는 만민평등은 막부를 무너뜨리는 그들의 이념이 될 수 있었지만, 종교란 기본적으로 혁명의 이념으로 삼기엔 불완전한 것이었다. 결국 아마쿠사의 난은 가혹할 정도로 철저히 짓밟히고 만다. 일본에서 악은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다. 후지타 가츠히로의 만화 "요괴소년 호야"에서 절대적인 악으로 그려지고 있는 "백면인"의 존재도 일본 내부에서가 아닌 외부에서 들어온 악마적 존재를 일본의 소년과 일본의 토착 요괴들이 힘을 합쳐 물리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일본 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역사적인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는 것을 읽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갑갑증의 원천은 사실 '시바 료타로'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적을 가지고 작품 세계를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본 작가들 가운데 일부에게서는 확실히 "반민중적 엘리트주의"와 "국수주의" 그리고 세상 만사를 일종의 파워게임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냉소주의"가 물씬 풍겨난다. 나는 "항우와 유방"에서도 역시 그런 갑갑증을 느꼈다. 그가 죽은 뒤 일본에서는 시바 료타로상을 제정하여 뛰어난 저술을 남긴 작가들에게 이 상을 수여해왔다. 이 상의 1회 수상자가 "다치바나 다카시"였고, 제2회 수상자가 "시오노 나나미", 3회 수상자가 "미야자키 하야오"란 것을 생각해보면 시바 료타로상과 그 상의 실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바 료타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유추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시바 료타로의 진정한 계승자는 바로 "시오노 나나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일본 작가들의 세 가지 요소 "반민중적 엘리트주의", "국수주의", "냉소주의"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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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전집』 - 백석 | 김재용엮음 | 실천문학사(2003)


백석전집 혹은 "백석"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 해보자고 마음 먹은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도 어렵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제비손이손이하고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서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못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홍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골족(族)' 중에서>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 중 뒷부분만 발췌해봤다. 과연 저 시를 읽으며 중간에 사전 혹은 다른 해설 없이 읽는 것이 쉬운 일일까? '엄매'는 엄마일 테고, '아르간'은 '아랫간'일 테지만, '조아질'이라니 이건 무슨 말일까?

 

백석의 시를 좋아하는 이들이 부쩍 많이 늘었다. 지금 30대 이상인 사람들은 백석이란 이름을 교육 과정을 통해서는 한 번도 접해볼 수 없었다. 그런 시인이 어디 백석뿐이랴. 우리는 김기림(金起林), 박팔양(朴八陽) 등 소위 월북작가로 분류되었던 이들의 시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백석을 비롯한 이들이 해금되어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의 일이었다. 시인 고은(高銀)은 백석의 시를 “근대 시사(詩史)에서 가장 빛나는 시 중의 하나”라고 평했다. 고은뿐만 아니라 시인 신경림은 "내가 우리 시에서 단 하나만 꼽으라 해도 서슴지 않고 꼽는 시인이 백석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백석의 시 '남신의 주류동박시봉방'은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 중의 하나다"라고 말하며 그의 시가 지닌 아름다움에 아낌없는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 아오야마(靑山) 학원 3년 무렵의 백석

그런 시인이 오랫동안 묶여 있었으니 우리 문학사에 드리워진 냉전과 분단의 그림자는 한반도의 허리만 두동강낸 것이 아니었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뒤 그는 도쿄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가 필명으로 백석(白石)을 사용한 것은 일본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익혔고,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뒤 그의 별명은 '모던보이'였다. 그의 시가 한없는 토속성에 기대어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의 잘생긴 외모와 풍기는 멋으로 인해 지어진 별명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백석의 고향 정주는 눈이 많은 곳이었다. 그가 수원 백씨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시에서 백색의 이미지는 고향 정주의 휘날리는 눈발과 함께 백석의 시세계의 주된 심상 중 하나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그에게 내리는 눈은 그냥 내리는 눈이 아니라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기에 내리는 눈이다. 나타샤, 자야(子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김영한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원래 가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으나 어머니가 친척에게 속아 가산을 탕진하고, 거리에 나앉게 되어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 여인이었다. 자야의 기명은 진향(眞香). 당시 기생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기생과는 다른 의미에서 신여성이었다.



 

김영한은 당시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우연히 백석을 접하게 된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라고 말했다 한다.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子夜吳歌

李白

長安一片月 장안의 한조각 밝은 달 밤에
萬戶擣衣聲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들려오고
秋風吹不盡 가을바람 소리 그치지 않으니
總是玉關情 이 모두 옥관을 향한 정이리라
何日平胡虜 어느 날에야 오랑캐 평정하고
良人罷遠征 원정 마치고 우리 낭군 돌아올까

 

이 시는 서역 원정을 나선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정조를 그린 시이다.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호를 지어준 탓일까. 백석과 자야는 이렇듯 평생을 서로 연모하며 지내야 할 운명이었다. 자야가 서울로 돌아온 뒤 백석은 학교를 그만두고, 백석을 따라 서울 청진동으로 올라와 두 사람은 혼례도 없이 살림을 차린다. 이상과 금홍이가 이 시절 그러했던 것처럼... 백석은 자야를 통해 많은 시적 영감을 얻는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느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다' 중에서>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백석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떼어내기 위해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결혼하였으나 자야를 잊지 못한 백석은 다시 자야에게 도망질쳐 온다. 동경 유학생 백석과 자야는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불태웠으나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도망쳐 살자고 했으나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자야, 아니 나타샤는 끝끝내 오지 않았다. 자야는 자신 때문에 한 명의 훌륭한 시인, 아니 자신의 연인이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백석은 '100편의 시를 담고서'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하고, 홀로 만주 신경으로 떠난다. 두 사람은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만주에서 잠시 세관 업무를 하기도 했으나 해방 이후엔 고향 정주로 돌아와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발표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중에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은 그가 분단 이전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백석에게 '월북 작가'란 딱지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남의 정지용, 북의 백석'이라고 하듯 백석은 한 번도 월북한 적이 없었다. 그의 고향이 평북 정주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월북'한 것이 아니라 '월남'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그에게 고향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어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寞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故鄕' 전문>

 

백석의 시에서는 평안북도의 토속 방언들이 생생하게 묻어나고 있다. 해방 이후까지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독소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김수영이 모더니즘을 '근대를 향한 모험'으로 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백석은 '근대'라 할 수 있는 '모더니즘'과 '전근대'라 할 수 있는 '민족'을 결합해냈다.



  1980년대 중반 백석이 70대 중반일 무렵 촬영한 가족사진. 백석 옆이 부인 이윤희씨, 뒤는 둘째아들(중축 씨)과 막내딸.

오랫동안 금기였던 시인이었기 때문일까? 1987년의 해금 이후 이동순의 "백석 시전집"을 비롯해 내가 알고 있기로만 "백석 시전집"은 네 차례에 걸쳐 만들어졌다. 평생을 살며 시를 쓰지만 전집은 커녕 한 권의 시집을 묶기도 쉽지 않은데 비해 어쩌면 그는 호사를 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백석의 시전집은 아직도 미완성일 게다. 이동순의 백석시전집에는 그가 북에 남아 있는 동안 쓴 시들은 누락되어 있고, 북한문학연구가 김재용(원광대 교수)의 이 전집은 백석이 북에 머무는 동안 쓴 동화를 비롯해 여러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1부에서는 8.15이전에 발표된 그의 첫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을 비롯해서 이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들과 수필, 소설 등을 담고, 제2부에서는 8.15 이후 즉, 그가 북한에 머무는 동안 발표한 작품들을(여기에는 국내에도 동화로 출판된 바 있는 백석의 동화시 '집게네 네 형제'가 포함되어 있다)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전부일까. 사실 김재용 교수의 "백석 전집"은 가치있는 책이긴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앞서 '여우난골족'에서도 이야기했듯 오늘날 우리에게 백석이 살던 시기의 평북 방언이 생생하게 전달되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시어들에 대해서는 편집자주 처리를 해서라도 원뜻을 밝혀주었어야 한다. 다음 개정증보판에서는 이런 점들과 다른 미비점이 좀더 보충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동안 백석은 1961년 '돌아온 사람' 등 3편을 "조선문학" 지에 발표한 뒤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왔고, 1963년 52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 지난 1999년 세상을 등진 자야 김영한은 매년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하는데, 실제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해에는 자야 김영한이 "내 사랑 백석"을 '문학동네'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재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토록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되기 시작했다. 자야는 이 상이 처음 시행되던 1999년 11월 백석이 있는 세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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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작가 12인의 초상 - 이상진 | 옛오늘(2004)


대학에서 나는 1년간 김병익 선생에게 배운 적이 있었다. 개설된 과목 이름조차 기억이 희미하지만, 당신이 졸업을 앞둔 우리들에게 내어주었던 과제명만큼 확실히 기억한다. 그것은 "왜 글을 쓰는가?"하는 것이었다. 늘 그렇지만 "왜?"라는 질문은 "어떻게?" 혹은 "누가?"란 말로 시작되는 질문보다 어렵다. 그것은 "왜?"라는 질문이 대개는 근원에 대한 정직한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솔직(率直)과 정직(正直)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전적인 의미에서라면 이 둘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좀더 파고 들어갔을 때 "거느릴 솔"에는 '경솔하다, 신중하지 못하다, 대강, 대체로, 보기 좋다' 의 뜻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솔직하다는 표현에서는 어쩐지 다변(多辯)의 뉘앙스를 받게 된다. 솔직하다는 것은 늬 묻지 않았으나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말하고, 정직이란 것은 누군가에게 요구 받았을 때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솔직하기는 쉬워도 정직하기란 그래서 어려운 법이다.  "왜"라는 질문은 그래서 늘 정직함을 요구받는다.

 

김병익 선생은 우리들에게 "왜 글을 쓰는가?"라는 단도직입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고통에 대해, 혹은 자신의 암담하기 그지 없는 미래의 포부에 대해 정직하게 고백하는 자술서를 요구했다. 그때 나는 대충 고민한 끝에(말은 대충이라고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었는지 알고 있었다) 원고지 10여장 내외로 리포트를 써서 제출해 버렸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뒤 나는 당신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제자로 당신과 술집에 앉았다. 원래 처음 뵈올 무렵에도 이미 백발이었던 지라 십여 년이 지난 뒤 다시 만났을 때에도 당신은 그닥 많이 노인이 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당신은 내게 오래전에 이미 큰 어른이었던 것이다. 나로 하여금 글쓰기에 매달리게 했던 근본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 모든 걸 한 마디로 응축하기란 지금 생각해도 난감한 일이다. 스스로에게 정직하기란 타인에게 솔직하기 보다 백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그때의 내 심정을 한 마디로 "자기 혐오"의 느낌으로 정리한 것 같다. 나는 사물이나 인생, 세상이 무엇이냐고 알려고 대들기보다 우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늘 먼저 관심을 두어야 했다. 그만큼 나는 살아가는 것, 생존 자체의 문제가 언제나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세상이 무엇인가도 알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내 또래에서 언제나 매우 영악한 아이였다고 주변 어른들에게 기억됨과 동시에 스스로에게는 매우 열악한 어린이라는 열패감에 시달려야 했다. 세상엔 슬픈 일이 기쁜 일보다 언제나 많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깨달음일까? 아니면 선택일까?

 

사람들은 종종 글 자체보다는 글쟁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데, 거기엔 동양의 오랜 전통, 글이 곧 사람이라는 판단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살면서 경험으로 느낀 바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쓰는 글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 성직자가 제 아무리 성서에 나오는 이웃사랑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교사가 아이들에게는 제 아무리 올바른 삶을 가르치려 말한다고 해도 실제로 자기 자신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글은 종종 위선이고, 실제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근대를 살아간 우리 작가 12인의 이야기이다. 각자에게 한 권씩의 분량을 할당한다 할지라도 부족할 사람들을 한 권에 다룬다는 것은 분명 과욕이다. 하지만 근대라는 폭력적인 시간대를 살아낸 까닭으로 그들이 살았던 흔적조차 망실되어 찾을 수 없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그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책은 유효적절하다. 우리는 근대적 풍경 속에서 스스로를 소설가이기 보다는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었던 춘원 이광수의 야심과 그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아버지라는 대상의 상실이 그를 얼마나 유약하게 만들었는지 이 책을 통해 그 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근대의 풍경 속에서 만석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한없이 오만했으나 말년엔 생활고에 시달리다 급기야는 친일작가로 낙인찍히고 마는 김동인을 발견할 수 있다. 김동인을 바라보며 날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일본에 아부하고 싶어했지만 그 방법을 몰라서 천황모독죄라는 죄명을 썼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는 현진건, 나도향, 최서해, 염상섭, 채만식을 비롯해 자신에게 얼마간의 돈을 꿔준다면 땅꾼들을 고용해 뱀을 잡아먹고 기운을 차려 잘 팔릴만한 몇 편의 소설을 쓰겠다는 편지를 썼던 김유정을 발견할 수 있고,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그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이상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문학평론가들의 '작가론'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았던 인간으로서의 작가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 책에서 그 험난하고 어려웠던 민족 수난기에 일가족이 모두 침대생활을 하고, 만주로 질좋은 커피를 찾아갔던 작가 이효석을 만나게 된다. 하수상한 시절 언제나 권력과 가까이 지냈던 작가 김동리를 만나게 되고, 사슴 같은 눈망울을 굴리던 작가 황순원을 만나게 된다.

난 이들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 읽으면서 새삼
"왜 글을 쓰는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왜?" "왜 이들은 글을 썼을까?" 글을 통해 애써 위선을 가장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글쟁이는 필연적으로 글을 쓰는 동안 자신과 글을 다 쓴 뒤 그 글을 읽고 있는 자아 사이의 간격을 발견하게 된다. 이 순간 어떤 글쟁이도 정직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글이란 자신과의 치열한 대면이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눈 앞에 바짝 들이대진 거울이다. 
우리는 글을 통해 타인을 속일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어쩌면 글쓰기란 이런 자기학대의 과정을 거친 이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지금 우리 문학은 그나마 잘 나간다는 작가들조차 "1쇄 작가"를 면하기 어렵다고 한다. 문학이 위기라고들 한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지금 우리 사회는 절실하게 문학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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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튼영문학개관』 - M.H. 에이브럼즈 지음 | 김재환 옮김 | 까치(1999)


전공이 영문학이었던 사람들에게 『노튼영문학개관』을 읽었느냐고 묻는 건, 역사를 전공한 이들에게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느냐고 묻는 것과 흡사하다. 영문학전공자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책이고, 국내에서 출간된 책 가운데 이보다 더 좋은 책도 물론 있겠지만 아직까지 명성이란 측면에서 이 책을 능가하고 있는 책은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영문학 개론서이자 영문학통사라 할 수 있다.

 

책을 잘 읽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나는 저자 서문이나 옮긴이 서문을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는데, 불행히도 이 책엔 저자 서문은 아예 없고, 옮긴이의 서문이라는 건 분권된 2번째 책의 말미에 짤막하게 이 책과 옮긴이 김재환 교수의 인연 부분이 전부다. 이 책을 교재로 삼은 학과 이외의 독자들에겐 상당히 불친절한 셈이다. 조셉 골드(Joseph Gold)가 북키앙에서 펴낸 『비블리오 테라피』란 책이 있다. 읽어보진 못하고 그저 그런 책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는 책인데, 이 책의 부제는 "독서치료, 책속에서 만나는 마음치유법"이다. 우리가 향기 치료법을 아로마테라피라고 하는 것처럼 책을 통한, 독서를 통한 치료법이란 의미에서 "bibliotherapy"란 제목을 달았다.

 

이 책에는 워즈워드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소개하고 있다.

 

"무엇인가 얻어내고 소비하느라 우리는 우리의 힘을 탕진하고 있네. 우리는 우리의 것인 자연 안에서 보지 못하네"

 

이때 저자 조셉 골드가 이 글의 출처로 삼고 있는 것이 『노튼영문학개관』 이른바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이다. 나름의 독서법을 위해서는 한 권의 책을 개관해보라고 권한 적이 있는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책의 로드맵이랄 수 있는 인덱스 부분을 충실하게 검토해보라고 말했다. 이것을 영문학사 혹은 다른 테마의 책들로 옮겨 볼 때, '개론서'라는 것은 강의나 학습의 필독서 차원을 넘어 독서에 있어서도 역시 중요한 로드맵 구실을 해준다.

 

개론서는 단지 개론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테마 뒤안에 있는 수많은 오솔길과 갈라지는 길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이 책 『노튼영문학개관』이 다루고 있는 영미권 시인들이 그렇다. 이 책의 1권에서는 중세 앵글로 색슨 시대와 노르만 시대의 중세 영문학을 다룬다. 영미 문학의 고전이랄 수 있는 『베오울프』를 비롯해 여러 작품들을 개괄하면서 읽다보면 문득 한 사람의 이름에서 눈길이 멈추게 된다. 그는 바로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다. 그가 지은 『캔터베리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를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우리는 이 책 『노튼영문학개관』을 통해 이 작품이 영국 문학사에 있어 어째서 중요한 작품인지 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국내에도 출판되어 있는 제프리 초서 연구서들이나 그의 작품들을 함께 읽어볼 수 있다.

 

제프리 초서 시대의 영국은 아직 이들만의 사상이 무르익은 시기라 볼 수 없었다. 사상이 현실을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상황이 사상보다 앞서 있던 시대였다. 문학사는 어느 경우라도 당대가 직면하고 있는 시대 상황과 결부되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헨리 5세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국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국의 왕이니만큼 전제 왕정 시대의 영국 작가인 셰익스피어가 그의 업적을 높이 찬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어를 사용하는 작가로서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헨리 5세를 각별히 아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헨리 5세는 영국의 세종대왕이었다. 헨리 5세는 그의 숙부인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영어로 읽고 쓰는 법을 먼저 배운 사실상 최초의 영국 왕이었으며, 영어를 궁정어의 지위로 승격시킨 왕이었다. 헨리 5세의 부왕이었던 헨리 4세는 1399년 의회에 나가 영어로 연설하였고, ‘영어를 지나치게 조잡하거나 이상한 용어로서 사용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해될 수 있는 용어로 사용함’으로써 소통의 어려움을 제거하고자 했다. 헨리 5세는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정부와 지식인 사회에서 프랑스어의 사용이나 프랑스적인 풍속을 억눌렀다. 이제 영어는 최소한 영국 땅에서만큼은 더 이상 ‘정복당한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정복한 사람의 언어’ 가 되었다.

 

제프리 초서가 영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1387년 - 1400년)』를 집필한 것이 이 무렵이었던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이 무렵 영국은 점차 민족국가로서의 국가성(nationhood)을 획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보다 많은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 인식하면서도 지식이란 그것을 활용할 때 비로소 본래의 의미를 다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노튼영문학개관"을 그저 영문학 개론서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동안 이 책은 절대로 본래의 의미대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다. 영문학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동시에 영국사를 이해한다는 것이고, 영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영국의 철학과 사회와 경제, 문화를 이해한다는 말이 된다. 이를 다시 영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다룬 영화를 이해하고, 이에 대한 글을 쓰거나 리뷰를 한다는 목적으로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을 때, 지식이란 그 본래의 의미를 다하는 것이다.

 

영문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그저 지난 과거의 영문학사를 공부하는 것에 그치는 건 시간낭비다. 인간이 어느 한 일면만을 지니고 있지 않듯, 어느 한 시대는 어느 하나의 일면만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하나의 학문은 단지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인접 분야의 학문 체계와 유기적 연관을 맺는다. 인문학과 사회학은 물론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독서가 요구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셰익스피어를 알기 위해서는 가의 반드시(?) 튜더 왕조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역사구분법은 일반적인 영국사의 시대구분법과 맥을 같이 한다. 중세를 지나면 16세기가 나오고, 17세기의 중요한 사건들인 청교도 혁명 전후의 주요 작가들, 존 단, 존 밀턴, 프란시스 베이컨, 존 로크 등을 다룬다. 왕정복고시대와 18세기에서는 신고전주의 문학이론을 개괄하고, 이 무렵 영미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소설의 출현을 다룬다. 존 번연과 다니엘 디포우, 사무엘 버틀러, 조나단 스위프트 등이 이 시대의 작가들이다. 만약 누군가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고 이것이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여전히 중요한 작품이라고 느낀다면 그 시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영미문학사를 개론하고 있는 책 가운데 이 책 보다 더 좋은 책도 있을 수 있다.

 

한 권의 책, 하나의 작품, 한 명의 작가를 이해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한 권의 책을 읽어도 되고, 그에 대한 작가론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다면적이고 중층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작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가 살았던 시대를 함께 짚어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한 권의 책에서 보다 많은 지식들을 얻어낼 수 있다. 좋은 책은 많은 대화거리들과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골치아픈 영문학개론 숙제나 리포트를 쓰기 위해 처음 이 책을 접한 이들은 리포트 작성 뒤엔 더이상 이 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에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자신은 학교에서 아무 것도 배운 게 없다고 과감무식하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지식은 교과서(text)에서 얻는다. 텍스트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참고서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처럼 볼썽사나운 일도 드물다. 만약 대학에서 이 책을 교재로 삼았고, 그것을 공부했다면 이 책을 주요 텍스트로 삼아 이 책에서 가지를 치고 나가는 독서를 하는 것도 매우 좋은 독서법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2권에서 다루고 있는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들, 윌리엄 블레이크, 로버트 번즈, 윌리엄 워즈워스, S.T.코울리지, 바이런, P.B. 셸리, 존 키이츠 등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도 모두 번역된 시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 하나하나가 이후의 작가,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중세로부터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의 영미권 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이 한 권을 텍스트 삼아 주변부로 가지치기 하는 공부를 해나갈 때 아마 본인도 모르게 축적된 영문학에 대한 교양에 놀라게 될 것이다. (* 현재는 절판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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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부활절』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음, 황동규 옮김 / 솔출판사(1995)



예이츠는 1865년 더블린 외곽 샌디먼트라는 곳에서 영국계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나 평생을 아일랜드의 시인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가 영국계라고는 하나 그의 집안은 200년 이상 아일랜드에서 살았다. 그의 가계는 대대로 성직자 집안이었으나 부친 J.B 예이츠는 법률공부를 했다. 그러나 법률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부친이 화가였다고는 하나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고, 예이츠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화가를 포기하고 시업에만 전념했다.


내가 예이츠를 재인식하게 된 것은 지난 1991년 아직 대학생이지 못하던 시절 어느 후미진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 <멤피스벨(Memphis Belle)> 때문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아직 대학생이 아니었고,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순간의 자기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개봉 당시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는지 관객도 별로 없는 극장의 어둠 속에서 나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우리에게 예이츠는 그의 명성을 드높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해 괜히 잘 아는 척하게 되는 작품 「호수 섬 이니스프리(The Lake Isle of Innisfree)」로 기억된다.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란 인상적인 첫 구절이 주는 낭만과 처음부터 끝까지 호수의 잔잔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싯구를 따라 예이츠의 이미지도 거기에 종속되어 버린다.


예이츠를 어떤 시인이라고 규정하는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굳이 그의 시적인 세계를 이야기해본다면, "아일랜드 민족주의"와 "신비주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집의 번역자이자 시인인 황동규 선생의  해설에도 드러나고 있지만 "20세기의 시인들 가운데 예이츠처럼 명성의 오르내림 없이 사랑을 받는 시인"은 드물다. 그 이유 가장 큰 이유야 역시 그의 시가 지닌 탁월한 성취에 기인하지만, 다른 이유를 꼽자면 그 중 하나는 20세기에 출몰한 특별한 문예사조들 어디에도 그의 시가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상징주의에도 모더니즘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시인이었고, 그것에만 충실한 삶을 살았다.


예이츠의 시에서 드러나는 신비주의는 아마도 에드바르트 뭉크의 화풍에 가계가 성직자 집안이었던 영향이 녹아드는 것처럼 성직자 집안으로 몇 대에 걸쳤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일 게다. 예이츠의 부친은 신학을 포기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비종교적인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이츠 역시 기질상 기독교적인 전통을 신봉하는 신자는 아니었으나 그것을 대체할만한 종교적 비의를 찾아 일생을 추구했다(따지고 보면 아일랜드는 켈트족 본래의 종교인 드루이드(Druides)의 전통이 강한 곳이 아닌가). 예이츠의 시세계가 변천해가는 과정은 몇 개의 중요한 시기들로 구분된다. 초기 런던의 시인들(셸리와 같은)에게서 영향을 받던 낭만적인 시기의 시들에서는 어머니의 고향 슬라이고의 지명과 민담 등을 시적인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던 '호수 섬 이니스프리' 역시 이런 시기의 경향을 대표하고 있는 시이다.


▶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일으킨 1916년 부활절 봉기 당시 모습

그는 종종 발표할 당시의 시를 다시 시집으로 묶으면서 새로운 시어로 교체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주로 자기도취적인 낭만주의적 경향의 시어들을 제거하는데 치중되곤 했다. 그는 좀더 목소리를 낮춰 자신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이미지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시는 좀더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추구해 나간다. 그 자신은 이때의 경향에 대해 "비인격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정상적이고, 정열적이며 분별력이 있는 자아"를 지니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런 시기에 나온 시들이 이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는 '물 속의 자신을 찬미하는 늙은이들'이다.


나는 들었다, 저 늙고 늙은 늙은이들이 말하는 걸,

"아름다운 모든 것은 떠내려 간다
물처럼."
I heard the old, old men say,
'All that;s beautiful drifts away
Like the waters.'


이 시기에 그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여인 "모드 곤(Maud Gonne)"을 만난다. 예이츠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인생의 고뇌는 시작됐다"고 고백할 만큼 아름답고 아일랜드 독립에 대한 신념에 가득 찬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모드 곤은 자신을 열렬히 사랑했던 예이츠의 청혼을 거절하고 다른 독립운동가와 결혼했던 그녀의 남편이 1916년 부활절 봉기 때 처형당하자 예이츠는 또다시 청혼한다. 모드 곤은 예이츠의 청혼을 다시 거절했고, 결국 예이츠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며 그녀를 기억속에 접었다. 훗날 예이츠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면 자신은 그저 평범한 시인에 그쳤을 것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예이츠는 수년간 그녀에게 필사적인 구애를 펼쳤으나 열렬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던 모드 곤은 그의 구혼을 완강하게 뿌리치고 만다. 이때 그는 '두 번째 트로이는 없다 No Second Troy'에서 그녀를 트로이의 헬렌에 비유했다.


모드 곤의 사랑을 얻는데 실패한 예이츠는 아일랜드 문학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그레고리 부인을 만나 사귀게 되면서 마음의 안정도 찾게 된다. 그는 자신의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고 싶었고, 그의 이런 시도들은 매우 복합적인 형태로 작용한다. 그는 중산층의 속물의식을 혐오했으며 종종 걸인이나 농부들과 같은 계급 혹은 그 이상의 계급인 귀족적인 아름다움에서 이상적인 인물을 발견해낸다.



▶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

그의 명성도 점점 더 높아져 더 이상 시인으로서만 머물 수 없게 되어, 그는 1922년엔 갓 건국한 아일랜드 공화국의 상원위원에 지명되어 1928년까지 활동한다. 이 무렵 쓰인 시 중 하나가 영화 <멤피스 벨>에도 일부 인용된 시 '아일랜드 비행사가 죽음을 내다보다 An Irish Airman Foresees His Death'이다.


나는 안다, 저 구름 속 어디에선가
내 운명과 만나게 될 것을.
내 싸우는 자들 내 미워하지 않고
내 지키는 자들 내 사랑하지 않는다.
I know that I shall meet my fate
Somewhere among the clouds above;
Those that I fight I do not hate,
Those that I guard I do not love;


시인은 이후 한층 더 원숙해진 시어들, 사실적인 언어들을 통해 신비스러운 힘을 발휘한다. 이 시집의 번역자인 황동규 시인은 그의 대표적인 시 '풍장(風葬)'을 통해 그 자신이 예이츠의 영향을 받았음을 일부 시인하고 있다.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 혀 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 그냥 담고 가리."

<황동규, 풍장 28 중에서>


"한 외로운 환희의 충동이 나를/ 이 설레이는 구름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재어보았다, 마음 속에 떠올려./ 이 삶, 이 죽음과 견주어 볼 때/ 앞으로 올 세월도 지나간 세월도/ 호흡의, 호흡의 낭비로 보였다."

<예이츠, 아일랜드 비행사가 죽음을 내다보다 중에서>


예이츠는 말년에 이르러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사람은 진리를 구현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알 수는 없다고 말하겠다 … 추상적인 것은 삶이 아니며 도처에서 자기모순을 드러낸다. 그대는 헤겔을 반박할 수 있지만, 성자나 6펜스의 노래(Song of Sixpence)를 반박할 수는 없다." 모든 생명이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을 통해 제 자리를 찾는다. 그것이 과학적인 개념으로 보았을 때는 진화라고 부르는 것일 게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예이츠의 시는 합리주의에 기초한 서구철학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 갔다. 그의 성찰이 담긴 시집 한 권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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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 1886 - 1912)의 시집이다. 지금은 죽어 일본 하코다데에 묻혀 있는 시인. 교사 신분으로, 학교개혁을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시인이었다(당시 일본은 국가적으로는 부국강병주의가,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가 팽배했다. 말이야 '개인주의'였겠지만 '국가'가 강조되던 시기의 사람들로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고통스러웠던 '근대의 기억'은 일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근대화 역시 그들 사회의 내적인 필연성이나 필요에 의한 요구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페리 제독이라는 외세의 압력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도쿄에서 열린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일본의 한 전범은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묻는 법관에게
"그건 페리 제독에게 따지라" 했던 것도 어찌 보면 이런 맥락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미 열강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일본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처럼 땅과 민중을 넘기고 상류층은 그 지위를 유지하는 방식이나 아니면 국력을 신장해 그들과 하루라도 빨리 대등한 관계를 만드는 것만이 그들의 살 길이었다. 당시 일본은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기술을 배워 국력을 신장해야만 한다는 강력한 외적 자극 아래 놓이게 된다. 일본은 서구를 통해 그들의 문물과 자본주의, 산업의 토대를 닦는다. 그러나 물질적인 면에서의 성장이 곧 정신의 근대화까지 일궈주지는 못했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저서인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보면 일본이 '서구식 민주주의'와 같이 새로운 개념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던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기술은 이식이 가능했지만 그 근저에 놓인 정신은 내면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근대화의 동력을 얻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천황제를 중심으로 국가의식을 고취시켜 그 동력원으로 삼고자 했다. 이런 정책을 추진한 명치번벌정부(潘閥政府)는 차츰 증대되어 가는 시민의 대두를 오히려 막고자 했으며 그 결과 일본에서는 사회주의나 기타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개인의 양심적 행위까지 위험하게 여겼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식인들은 '근대적 자아'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억압하거나 자기 스스로에게 명확한 한계와 금기를 정해주지 않을 수 없는 고민을 안게 되었다. 근대화는 이들에게 그토록 무거운 주제였던 것이다. 이 무렵의 지식인들에게는 오직 문학과 예술만이 그런 자신의 고뇌를 토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이 되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그런 시대의 시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이들이 주장한 정한론(征韓論)이 실현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9월 밤의 불평> "세계 지도 위/ 이웃의 조선 나라/ 검디검도록/ 먹칠하여 가면서/ 가을 바람 듣는다" 과 같은 시를 짓는 등 소극적인 표현이나마 당시 일본의 대체적인 분위기와는 매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우리나라의 시인 백석은 그의 나이 19살 때인 1930년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어 신문사의 후원으로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의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이때 일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문학에 심취하여 자신의 필명을 '이시카와(石川)'에서 따왔다. 그의 연인이었던 자야는 '백석이 팔베게를 하고 그의 시를 많이 읽어주었다'고 회상한다. 이토록 백석이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았던 이시카와 타쿠보쿠는 데뷔 시절 젊은이의 이상을 노래하는 천재적인 시인이었다. 

그는 당시 강화되어 가던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 - 군인칙유(軍人勅諭)(1882), 교육칙어(敎育勅語)(1890) - 아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모교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교장 배척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학교에서 쫓겨난다. 실직한 이시카와는 그 뒤 별다른 직장도 구하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그의 아내 세츠코도 집을 나가버리고 만다. 시인은 어머니를 매우 사랑했는데 늙은 어머니를 업어보고 너무나 가벼워진 어머니가 애처로운 나머지 세 걸음을 걷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시카와의 삶은 궁핍했다. 그는 너무나 궁핍하게 산 나머지 폐결핵에 걸렸고,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시인의 어머니 역시 그가 세상을 떠난 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의 아내 세츠코도 그 이듬해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시는 데뷔 초엔 젊은이의 이상을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표현해 갈채를 받았지만  죽기 몇 년 전부터는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민중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도키 젠마로(土岐善棧) 등과 더불어 신잡지 <나무와 열매>를 기획하는 등 청년 계몽을 위해 노력했지만 몸에 깃든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지고 말았다. 

코코아 한 잔

-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 -
그것은 성실하고 열심한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끝없는 논쟁 후의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모금을 홀짝이며
혀 끝에 닿는 그 씁쓸한 맛깔로,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프고도 슬픈 마음을.
                               (1911.6.15)


일본문학사에서는 그를 메이지 시대의 편협하고 관념적인 단가(短歌, 하이쿠)의 성격을 서민의 애환이 깃든 생활적 주제, 민중적 경향으로 해방시킨 최초의 시인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창씨개명을 거부해 다니던 회사로부터 해고까지 당했던 백석이 그를 좋아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위의 시 <코코아 한 잔>을 읽으며 나는 다쿠보쿠의 그 비린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 그러나 "끝없는 논쟁"이 지나간 뒤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모금""혀 끝"에 닿는 그 씁쓸함을 말이다. 거기 어떻게 더 긴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견딜밖에.



그외에도 국내에는 지난 1996년 한국문원에서 <슬픈 장난감>이, 1998년 민음사에서 세계시인선 55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선>, 1999년에 월인에서 나온 <일본의 국민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슬픔과 한> 등이 출판되어 있다. 그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이시카와 다쿠보쿠 편(http://windshoes.new21.org/literature/takuboku.htm)을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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