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회의주의자 벤자민 보다 복서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1903년 6월 25일, 당시 인도의 식민지였던 벵골의 모티하리에서 식민지 하급관리의 아들(본명은 Eric Arthur Blair)로 태어난다. 그의 탄생일이 기묘하게도 한국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작가 오웰은 우리나라에 많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6.25에 태어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사망했고, 1945년 출간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동물농장(Animal Farm)』이 외국어로 옮겨져 소개(1948년, 김길준)된 최초의 나라가 한국이었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이 냉전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해외정보국(VSIA)은 1942년 6월 창립된 이래 주로 적대국에 대한 선전방송을 해온 기관이다. 전후 냉전 기간에는 주로 공산권 국가에 자유주의 진영의 이데올로기·문화·생활수준 등을 소개·선전하는 일을 했고, 한국어 방송은 1942년부터 시작했다. 오웰의 『동물농장』은 반공(反共)문학으로 분류되어 신생공화국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해 이용되었고, 같은 이유로 『1984년』 역시 출간되자마자 우리말로 옮겨진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 『동물농장』은 여전히 문제 있는 책으로 분류되었다. 저자인 조지 오웰이 공산주의자(사실은 무정부주의자)였고, 『동물농장』이 기본적으로 민중봉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하급관리의 자식으로 태어난 오웰은 1911년 수업료를 감해준다는 조건으로 사립기숙학교인 이튼에 입학하지만, 부유층이나 귀족 등 상류계급과의 심한 차별감 속에 더 이상의 진학을 포기하고 영국 식민지였던 버마의 경찰이 되었다. 그는 식민지의 말단 관리로 근무하며 서구 제국주의의 현실에 대해 새롭게 눈뜬다. 오웰은 식민지 경찰로 근무하며 느꼈던 여러 생각과 경험들을 『제국은 없다(서지원, 2002)』와 『코끼리를 쏘다(실천문학, 2003)』에 담아내고 있다. 이후 1927년 유럽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계대전의 조짐이 농익어가던 불황의 파리와 런던의 빈민가에서 부랑자로 살아가며 하층민의 삶을 실제로 체험했다. 이때의 기록이 그의 처녀작이기도 한 르포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삼우반, 2003)』이었다.

사회주의자가 된 오웰은 1937년 말 스페인시민전쟁에 무정부주의(POUM)의 시민의용군으로 참전한다.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이 잘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스탈린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세력과 무정부주의 세력 간의 심각한 정치 투쟁을 통해 오웰은 이후 스탈린과 스탈린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바르셀로나에서 부상을 당한 오웰은 이후 박해를 피해 귀국하여 스페인시민전쟁 참전기라 할 수 있는 『카탈로니아 찬가(민음사, 2001)』를 썼다.

오웰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동물농장』을 처음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스페인시민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막상 그가 집필한 것은 1943년 말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웰이 소설을 탈고했을 무렵에는 영국의 어느 출판사도 선뜻 이 책을 출간하려 하지 않았다. 이유는 당시 영국과 소련이 나치를 상대로 전시동맹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의 비위를 거스를 것이 명백한 이 책의 출판을 꺼렸다(1943년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아직까지 서구(영국)의 지식인들 - 자유주의적이었건, 좌파적이었건 간에 - 이 소련의 스탈린과 소비에트 정부에 대해, 심지어는 스탈린주의에 대해서까지 우호적인 감정을 느끼던 시대 분위기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오웰은 당시 영국의 BBC방송이 적군(赤軍) 25주년을 축하하면서도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에 대해 개탄했다. 그는 이미 내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기준(혹은 정치적 이해관계)을 통해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왜곡하는 상황에 분노했다.

이와 같은 분노를 담고 있는 작품이 바로 『동물농장』이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동물농장』은 1917년 2월 혁명으로부터 1943년의 테헤란회담에 이르는 소련의 역사를 우화적으로 재현하면서 스탈린의 전체주의 독재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다. 농장주 존스의 농장에서 빈곤한 처지에 놓인 가축들은 수퇘지 메이저(마르크스) 영감에게 감화되어 반란을 일으킨다. 가축들은 비교적 영리한 돼지인 스노볼(트로츠키), 나폴레옹(스탈린), 스퀼러(스탈린의 추종자)의 지도 아래 모든 동물이 평등한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고, 문맹퇴치를 위한 학습을 거치며 말과 오리에 이르는 모든 동물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농장의 운영에 참여한다.

그러나 풍차건설을 계기로 벌어지기 시작한 권력투쟁 속에서 이상주의자였던 스노볼은 나폴레옹에 의해 숙청당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전 농장주인 존스가 쳐들어온다는 위협과 풍요를 약속하며 동물들의 자유를 빼앗는다. 반항하는 동물들은 개와 돼지들을 내세워 공격하고, 반동으로 몰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과거의 농장주보다 더한 사치와 타락 속에 마침내 과거의 “두 다리는 나쁘고 내 다리는 좋다”던 구호마저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욱 좋다”는 구호로 탈바꿈시킨다.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스탈린과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와 풍자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이 부분만 주목하는 것은 오웰의 본래 의도는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의 진정한 실현을 믿었고, 마침내는 그 실현을 위해 헌신했으나 결국 푸줏간으로 팔려가야 했던 복서를 비롯한 다양한 인물들은 다소 전형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교훈들을 준다. 또 나폴레옹이 필킹턴(히틀러)과 손잡는 모습은 역사적으로는 1939년 8월, 독일 외무장관 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직접 서명하면서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자본주의화 과정)를 통해 타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웰이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보자면 진정한 사회주의를 추구하고자 했던 러시아 2월 혁명이 또 다른 전체주의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페인시민전쟁을 통해 경험한 좌파 내부의 본질적인 문제, 관료화된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속류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참한 예감을 담아 이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에 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웰은 사회주의자 혹은 무정부주의자로서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혁명 그 자체의 허망함을 비판하는 회의주의자 당나귀 벤자민 보다 혁명에 헌신하고자 했으나 비판적이지 못했던 복서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미국에서 이 책 『동물농장(Animal Farm)』이 '문제적 서적'으로 낙인찍혔던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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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서 "옹"이란 말은 별도로 정한 바 있는 접두사는 아니다. 그러나 "옹"이 붙는 표현들은 "옹골지다", "옹골차다"와 같은 형용사에서 볼 수 있듯 '실속이 있는 것', '내용이 충실한'과 같은 느낌과 뜻으로, "옹기옹기", "옹기종기" 등과 같은 부사에서 느낄 수 있듯 따듯한 정감이 느껴지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물론 "옹고집(壅固執)"이나 "옹졸하다(壅拙)"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도 없지는 않으나 그것 역시 악하거나 나쁜 느낌이기 보다는 민화에서 장난스럽게 표현되는 도깨비 같은 느낌이다.  이렇듯 우리 말표현에서 접두사 아닌 접두사처럼 사용되는 "옹"이란 말이 그릇으로서의 "옹기(甕器)"에서 비롯된 것인지 <옹고집전(雍固執傳)>과 같은 "옹"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고, 학술적으로 연원을 따져물을 재간은 없으나 나는 "옹기종기"와 같은 말들은 분명 우리네 실생활의 장독대 풍경 같은 것에서 유래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여기 옹고집이라면 옹고집장이고 옹골찬 옹기장이라면 옹기장이인 "이현배"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지금 전북 진안군 백운면 솔내마을에서 물이, 솔이, 바우 세 아이와 그 못지않게 씩씩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옹기의 역사에 대해 쓰고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기 작품을 추어 올리기 위해 꾸며 쓴 글도 아니다. 그냥 흙냄새, 불 굽는 가마의 장작 타는 냄새, 그렇게 구워낸 옹기 그릇에 투박하게 끓여낸 토장국 냄새 물씬 나는 생활 글이다.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사서의 하나인 "대학(大學)"에는 "명명덕(明明德:명덕을 밝히는 일) ·신민(新民: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지선(止至善:지선에 머무르는 일)"을 일컬어 대학의 3강령이라 하고, 이에 대한 실천적인 덕목을 여덟 개로 적어 "8조목(八條目)"이라 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이의 8조목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이런 8조목의 가장 앞에 나오는 말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다. 격물치지라 함은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유교가  "사농공상"과 같은 봉건제적 경제 구조에 기반한 계급을 강요했거나 그에 따른 이데올로기였다는 비판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본디 유교적 가르침과는 달리 이용된 대목도 있으리란 생각을 대학의 "격물치지" 정신에서 느껴봤다. 

옹기장이 이현배는 3녀 2남의 막내로 태어나 먹을 것이 없으면 흙담을 뜯어먹는 가난함 속에 성장했다고 한다. 그와 흙의 인연은 어쩌면 그렇게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배가 고파서였을까 아니면 세속적인 출세, 성공에 목이 마른 탓이었을까. 그는 경희호텔전문대학을 나와 오늘날 부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척도로 보자면 분명 부러워할 만한 유명한 호텔에서 초콜릿을 만들었다. 그러던 그가 지난 1991년 돌연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온가족을 이끌고 고향 인근 시골마을로 낙향한 것은 다시금 흙을 만지기 위해서였다. 그는 전남과 경남을 넘나들며 옹기장이 선생들에게 옹기 빚는 법과 옹기 굽는 법을 배워 다시 솔내마을로 돌아와 오늘도 흙과 씨름하며 옹기를 굽는다.

우리가 흔히 옹기라고 부르는 그릇은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질그릇은 진흙만으로 반죽해 구운 후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기가 나지 않는 그릇이고, 오지그릇은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위에 오짓물(유약)을 입혀 다시 구운 질그릇을 말한다. 삼국 시대부터 만들어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옹기는 전세계에서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음식 저장 용기로 옹기는 먼저 흙을 반죽해서 응달에서 말린 뒤에 떡매로 내려쳐 벽돌모양으로 만들고 이를 다시 바닥에 쳐서 판자모양의 타래미로 만든 뒤 타래미를 물레 위에 올려놓고(예전에는 발로 쳐서 돌렸었는데 요새는 기계를 이용해 돌린다.  그는 여전히 발로 쳐서  물레를 돌린다) 옹기를 빚어내는 것이다. 옹기의 모양은 물레의 속도와 옹기장이의 손놀림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네 생활과 땔래야 땔 수 없는 생활 그릇이었던 옹기가 어느날부턴가 플라스틱과 스테인레스, 법랑 그릇에 밀려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지 오래이다. 먹을 거리가 달라지고, 생활 습속이 달라진 탓이 제일 크겠지만, 우리가 주체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근대화(산업화)가 우리 전통의 것들을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여기게 했던 탓도 클 것이다. 정부에서는 지난 1989년부터 옹기장(옹기 만드는 기술자)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했지만 우리 본래의 장 담그기는 물론이요, 김장도 사라져 가는 요즈음의 분위기로 생활 속에 사라진 옹기를 부활시키는 것은 역부족일지도 모르겠다. 옹기의 장점이야 TV나 잡지와 같은 여러 매체에서 "숨쉬는 그릇"이니 "선조의 과학"이니 해서 많이들 부각시키긴 하지만 어쩐지 집안에 옹기그릇 하나 장만해 두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책의 저자 이현배 씨가 옹기장이로서 자신이 선택한 이런 삶의 방식에 대해, 혹은 여러가지 장점과 미덕을 담은 옹기에 위와 같은 찬사들을 늘어놓을 만한 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런 식상한 주장들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옹기장이 이현배는 그가 매일 만지고 주무르고 밟고 있는 흙을 담은 사람이다. 그는 주장하지 않지만 그의 주장들은 우리 몰래 숨을 쉬는 옹기처럼, 우리가 잠든 사이 씨앗에 숨어 있는 새생명들을 움틔어내는 흙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격물치지"를 이야기했지만 세상의 진실 혹은 진리란 것을 찾아 무한히 탐구하는 길은 참으로 여러 갈래이다. 철학자들은 철학함으로, 글장이들은 글을 통해, 화가들은 그림을 통해 "격물치지" 하지만 이현배 같은 "장이"들은 그가 하고 있는 생활 속의 작업들을 통해, 어찌 보면 류승완  감독이 영화 "아라한장풍대작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생활도인"들을 통해서도 진리는 구현된다. 이현배의 이 글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우리는 그를 볼 수 있고, 그가 만드는 혹은 옹기 그 자체의 장점을 소리 높여 주장하지 않지만 저절로 그가 만들어 낸 혹은 우리 주변에 퇴물처럼 놓여 있을 옹기 그릇의 소중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주목하게 되고, 주목해볼 것은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꾸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파고드는 한 사람의 장인을 통해 우리가 우리네 삶에서 놓치고 갈 수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끔 손끝에서, 머리를 짜내 글을 쓰는 이들의 얄팍한 글재주에 지친 사람들이라면, 조미료 맛 나는 그런 글 말고 정말 오래 곰삭힌 그런 질박한 글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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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창비시선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중 하나는 조태일 선생의 "국토"가 아닐까 싶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비닐 커버가 달린, 판권란 밑에 박힌 정가는 500원이었던 그의 시집. 사실 조태일의 시는 지사적 풍모와 선굵은 활동 탓에 오랫동안 남성적인 시세계를 가진 것으로만 평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 시인의 시세계와 삶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를 대표하는 연작시로 손꼽히는 "國土""식칼論" 등은 그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좀더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식칼론 2
―허약한 詩人의 턱 밑에다가


뼉다귀와 살도 없이 혼도 없이
너희가 뱉는 천 마디의 말들을
단 한 방울의 눈물로 쓰러뜨리고
앞질러 당당히 걷는 내 얼굴은
굳센 짝사랑으로 얼룩져 있고
미움으로도 얼룩져 있고


버려진 골목 어귀
허술하게 놓인 휴지의 귀퉁이에서나
맥없이 우는 세월이나 딛고서
파리똥이나 쑤시고 자르는


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
꺾어 버리며 내 단 한 칼은
후회함이 없을 앞선 심장 안에서
말을 갈고 자르고
그것의 땀도 갈고 자르며
늘 뜬 눈으로 있다
그 날카로움으로 있다.


<전문>
언젠가 시인 김수영에 대해 말하면서 "시인은 말로 산다. 좀더 고상하게 말하자면 언어로 살아간다. 태초에 말씀이 있어서 가장 즐거웠던 이들은 어쩌면 시인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조태일에게 있어 "말"들은 '너희'라는 타자화된 외부로부터 오는 무수한 폭력의 다른 형태(異形態)들이거나 그 자체로 폭력의 도구인 "녹슨 여러 칼"이다. "허약한 詩人의 턱 밑에" 겨누어진 죽음과 폭력 앞에서 시인은 "말"을 갈고 자르며 늘 뜬 눈으로 날카롭게 깨어 있다. "식칼론2 "에서 시인은 외부의 무수한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단호해진다. 단호해진 만큼 그의 시는 경직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천 마디의 말들"을 쓰러뜨리는 것은 "한 방울의 눈물"이며, 불의와 폭력에 대한 시인의 미움은 정의와 생명에 대한 짝사랑과 한 몸을 이룬다.

내가 뿌리는 씨앗은
―國土•42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다.
이 고요하고 고요한 시간에
가릴 것은 가리고, 버릴 것은 버려야지.


사람아, 사람아, 떠나가라.
나로부터 떠나가라.
내가 딛는 땅도 내가 받는 밥상도
떠나가라 떠나가라.


그리하여 혼만 남고 내 육체도
내가 걸치는 옷도 땀도 때도
손톱도 발톱도 털도 떠나가라.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
저 파아란 地平의 저 넘치는 뜨락에는
마음놓고 뿌릴 수 있는 品種이란
내 혼의 씨앗이어라
산간벽지 호젓한 개울물로 씻은
내 혼의 씨앗이어라.


사람아 사람아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지만
최후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남아 있다.

아아! 그것은 죽는 일인데
죽어서 다시 깨어나는 일인데
아아! 그것은 씨앗을 뿌리는 일인데
우리들은 아직 혼을 찾지 못했는데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
저 파아란 地平과 뜨락만 넘쳐나네라.


<전문>

마하트마 간디는 "삶은 죽음에서 싹튼다. 보리가 싹트기 위해서는 씨앗이 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시인은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다"고 말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시인의 "국토" 연작은 1971년 "창작과비평" 여름호(통권21호)에 "국토2"를 담아내며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 (이 연작 시는 내 나이만큼 오랜 연륜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다 이때 이야기하는 모든 맹렬한 싸움이란 무엇이었을까? 글쎄, 그것은 시인이 평생을 걸고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이었을 게다. 다만 시인은 5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지만 최후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남아 있다"고. 그것은 "씨앗을 뿌리는 일", 죽음을 통해 그로부터 부활하여 우리들의 "혼"을 되찾는 일이다.

생전에 시인은 스스로를 '일국의 시인'이라 이야기했고, 어떤 이들에게는 '국토 시인',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우스개로 만들어 'X털' 시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등진 것이 지난 1999년의 일이다. 시인은 생전에 제자들에게 이르는 시창작 강의에서 "자연은 뭇 생명들의 근원지이며 원형이며 모태이다. 뭇 생명들의 총체이자 본질"이라고 가르쳤다. 인간 역시 이러한 큰 생명체에서 뻗어나온 가지이므로 자연과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시는 자연의 본질을 드러내는, 자연과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러므로 시란 "생명의 노래"이자, "생명의 발현이고 소망"이라고 말했다.


자연과 생명과 시는 시인에게 삼위일체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렇듯 자연과 생명을 노래하고 소망한 시인이 살아야 했던 시대는 이 삼위일체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시대였다. 생명의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 중 하나는 시인이 노래했던 "최후로 이길 수 있는 싸움"처럼 혹은 그의 시 "풀씨"에서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 그곳이 나의 고향 / 그곳에 묻히리." <조태일, 풀씨, 시집 "풀꽃은 꺽이지 않는다" 중에서>에서 처럼 "죽음"이다. 삶과 죽음, 생명과 죽음은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효(通曉)하는 조화로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삶과 생명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다. 그러나 잔인한 시대는 풀씨들의 삶을 꺽고, 생명을 꺽는다. 

시인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말한다. "단 한 칼"의 말을 위해 "심장 안에서 / 말을 갈고 자르고" 그리고 다른 시인의 말을 살려내기 위해(1977년 양성우 시집 『겨울공화국』 발간 사건에 연루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고은 시인과 함께 투옥돼 옥고를 치른다) 온몸으로 실천(그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임시총회와 관련 계엄법 및 포고령 위반으로 시인 신경림 , 문학평론가 구중서 등과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다. 작고 여린 생명을 거두기 위해 그의 시는 밖으로는 단호하고, 단단하였으나 안으로는 누구보다 따스한 체온과 부드러움을 함께 지녔다.

살아생전 5.18유공자 신청을 거부했던 시인이지만 그의 사후인 지난 2005년 5월, 평소 그를 알고 사랑해왔던 시인 김준태, 박석무 5.18기념재단 이사장 등의 노력으로 국립5.18묘지로 이장했다. 그리고 그의 타계7주기를 맞아 오는 2006년 9월 9일부터 그의 고향인 전남 곡성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에서는 "죽형 조태일 문학축전"을 개최한다고 한다. 당신이 노래한 것처럼 "매운 찬바람 속에서도 / 이제 삶을 죽음이라 / 죽음을 삶이라 말하며 // 밟힐수록 힘이 솟는 우리들, /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 끼리끼리 그림자 만들어 / 마침내 더불어 큰 산 이루었네."<조태일, 겨울보리, 시집 "풀꽃은 꺽이지 않는다" 중에서> 우리들은 정말 더불어 큰 산을 이루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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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인 김수영(金洙暎 , 1921.11.27~1968.6.16)은 밤새 술을 마시고 깨어나는 아침, 뱃속으로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는 그 느낌을 사랑했던 시인이었다. 그는 공복상태에서 오는 정신의 맑음, 답답했던 머릿속을 헤집고, 맑은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한 두 방울 씩 떨어져 퍼지는 코피의 핏물처럼 비록 피를 흘린다한들 그 순간의 상쾌함, 정신의 맑음을 흠모한 시인이었다.

개인적으로 어느 시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연예인이나 영화배우 혹은 가수를 좋아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일 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책을 구입하는 선택이 자본주의적 상품의 유통경로 중 가장 이성적인 판단에 기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깊고 넓은 정신을 흠모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김수영은 우리 문학의 거대한 산맥이자 동시에 우리 문단의 대표 스타이기도 하다. 그의 사유의 소산들이 여러 시인들에게 계승된 탓도 있을 것이고, 많은 문학 청년들의 가슴에 그가 시인의 한 전형처럼 여겨지는 탓도 있을 것이다. 런닝셔츠 차림에 선병질의 얼굴, 신경질적으로 치켜뜬 눈의 시인을 담은 사진은 우리 집에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렇듯 '문학적인 스타'라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이면엔 많은 오해의 소지도 있다. 무턱대고 난해한 시인으로, 혹은 신랄한 풍자의 시인으로, 지식인적인 풍모만을 지닌 시인으로, 때로 소시민적인 시인으로만 평가되는 것들은 분명 옳지만 일견 오해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은 그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글을 쓰면서 새삼 느끼는 것인데, 나 자신이 고교시절부터 입이 닳도록 극구 흠모하던 그에 대해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있어 실제 그를 발견한 것이 나 자신인지 아니면 타인들의 시선을 통해 주입된 것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시인 "김수영"이 "신화"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진짜 시인 김수영을 발견하는데 도리어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르며, 그가 1960년대의 위대한 시인, 그 당시만의 해석에 붙들리는 우를 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시인은 "친구여, 이제 바로 보마"라고 말했던 시인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들도 우리들 당대의 시선으로 이제 시인을 바로 보자"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한 이전의 수많은 논문과 연구, 평론들이 그를 조명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그에 대하여 잘 알 수 없다는 말은 게으름의 소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우리의 김수영이, 나에겐 나의 김수영이 필요한 것이다. 이 글의 출발점은 이 부분이 아니고선 안 될 것이다.(이 독후감은 편의상 "김수영 전집"에 대한 것이지만, 김수영이란 한 인물을 내 나름대로 입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던 그의 시집, 그에 대한 좋은 책들에 대한 종합적인 독후감이다. 시집을 제외한 도서명은 말미에서 소개하겠다.)

2.
시인은 산문을 쓰는 것을 꺼리고 때로는 불편하게 여긴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론을 산문의 형태로 남긴다. 그것은 시인이 시를 통해 산출하게 된 과정을 산문이란 형식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지 모른다. 흔히들 김수영의 시론은 <詩여, 침을 뱉어라 - 힘으로서의 詩의 存在>와 <反詩論>에서 그의 시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고들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시여, 침을 뱉어라>는 실천적인 관점에서의 시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시론이라고는 하지만 김수영이 詩가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詩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엘리오트의 말처럼 시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사전 편찬자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시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재간은 나에게도 없지만 내 나름의 좋은 시인을 구분해내는 법이 하나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산문 잘 쓰는 시인"은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시라는 장르가 지닌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진정성"이란 측면에서, 혹은 동양적인 미덕인 "언행일치"란 측면에서 시인의 일상과 시의 진정성이 결합되는 부분, 그의 사유가 시라는 정신적 산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노출되지 못한 사유의 잔재들이 표현되는 것이 산문이란 측면에서 그러하다. 시인의 산문이 중요한 것은 그런 측면에서이다. 즉, "시"는 언어의 험난한 절애(絶崖)에 세워진 탑으로, 시인의 사유(산문)의 정점에 세워진 금자탑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아는 한 가장 산문을 잘 쓰는 시인 중 한 명은 바로 김수영이다.

3.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첫구절은 종종 인용된다. 김수영의 시들은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는 가끔 저널이나 평론가들의 산문에서 한두 구절씩 인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이 시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와 같은 대목도 그런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우리는 이 시를 시인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솔직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다. 그는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자신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습이 자신이 추구하는 시의 경향이나 참여시인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가 이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위 '힘있는 자들의 위세'가 생각외로 그리 대단한 존재들이 아니란 사실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그들은 기껏해야 '땅 주인'이나 '구청 직원' 또는 '동회 직원' 나부랑이에 불과하다. 김지하의 <오적>에 등장하는 그런 거물들이 아닌 것이다. 나는 그가 언급하고 있는 권력자들을 보며 솔직히 키득거리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바닥에 납죽 엎드린 시늉을 하며 우리들의 비위를 살살 건드린다. 아니 소위 '지식인'이라는 비루한 인간들의 비위를 확 뒤집어 놓는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그런 똥물에 빠져 고상한 척, 있는 척 하는 지식인들의 쓸개를 꺼내 씹어준다. 김수영이 "풍자냐, 자살이냐"를 말할 때엔 적어도 이 정도 배포와 익살은 가지고 한 말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기껏해야 눈 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여 '이발장이'나 '야경꾼'들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 힘 없는 자에게는 단돈 일 원 때문에 흥분하지만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다 '붙잡혀 간' 소설가를 보면서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똥물(자기비하)을 뒤집어 씌우면서 그보다 더큰 불의에 대항하지 못하고, '설렁탕집'에서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이들의 똥침을 찌른다. 얼얼하게 아팠을 것이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의 최대 히트작인 <풀>의 세계로 나아간다. 바로 서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자기 모멸과 반성을 거쳐야 한다. 스스로 더러운 땅에 들어가 온몸을 오물을 적시며 그는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들에게 비판의 세례를 준다.

이 시의 배경 중 다소 특별한 것은 그의 포로수용소 경험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아는 이들은 아는 이야기지만 그는 의용군이었다. 반공시대를 살아오면서 생존을 위해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의식까지는 아니어도 단지 강제에 의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어차피 그 속은 누구도 모르는 일이 되어 버렸으므로... 다소 무례한 추측을 해본다면 그가 북의 체제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쳤는데 다시 인민군에게 붙들려 파묻어두었던 군복과 총기를 다시 파서 보여주고서야 총살을 면했단 이야기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던 중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지만 그는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병원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에는 그때의 경험이 녹아 있다. 이때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느낀 모멸감은 상당한 것으로 후일 영어를 할 줄 알았음에도 번역일을 맡아서(이 무렵 그가 번역해낸 양서들이 상당수 되며, 그는 외국잡지들을 통해 외국의 문화계소식에도 정통했던 편이다) 생활에 보탬이 되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실생활에서 영어를 통해 할 수 있는 밥벌이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수원의 어떤 서양화가와 살림을 차려 살고 있었다. 시인이 포로의 몸에서 풀려나와 다시 사회로 복귀한 뒤에도 한동안 아내를 만나러가지 못하고 망설인 데에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이런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그의 아내는 해방 정국에서 목숨을 잃은 시인 배인철의 연인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김수영은 현대판 처용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시에 등장하는 아내의 모습이 그닥 긍정적이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4.
시인은 말로 산다. 좀더 고상하게 말하자면 언어로 살아간다. 태초에 말씀이 있어서 가장 즐거웠던 이들은 어쩌면 시인들이었을 것이다. 김수영은 <말>이란 제목의 시를 썼다. 어떤 시는 해석 이전에 먼저 말을 걸어온다. 마음으로 쓰인 시라 그럴 수도 있고, 비슷한 심리적 정황 속에 스스로 놓여 본 경험이 또한 그런 경험을 가능케 한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말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때로 시인은 지장보살의 현연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기능이 시인의 기능과 일정하게 맞아 떨어지는 탓이 크다. 지장보살은 불덕으로만 보자면 득도하여 부처가 되고도 남는 이다.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지장보살은 염라지옥의 가장 하층의 저주받은 중생들이 모두 구원받을 때까지 스스로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의 염을 세운 이가 아닌가. 물론 시인들이 모두 불립문자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스스로 그리하지 않은 존재들인지는 묻지 말자. 비유일 뿐이니까. 시는 동시대의 공기와 접하여 가장 먼저 산화되는 사유의 접점이므로 시인들은 늘 시대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며 더불어 정신의 피로와 슬픔을 호소한다.  

같이 말을 풀어내는 존재들이지만 산문을 주요한 표현 방식으로 사용하는 작가와 시인의 가장 큰 차이는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의 차이에 있다.(유치하게 시의 우월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말하지 않음으로 가장 많은 말을 한다. 시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들에 의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몇 마디 말로 인해 드러내진 부분 이외에 말이 가리고 있는 부분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사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혹은 보다 멀리 보기 위해 나도 모르게 눈가에 양손을 모아 시야를 좁혀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인은 언어의 양손을 들어 우리의 눈을 보다 자세히,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한다. 깊이, 자세히의 포즈를 통해 넓이를 확보해낸다.

그런 시인이 "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겨울에 말이다. 모든 생명이 죽은 듯 엎드려 있는 얼어붙은 땅을 향해 뿌리가 깊이 가라앉았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 동계라는 것은 숨이 차오는 것을 말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떨리고,숨이 차오는 현상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생리적, 본능적 현상들 - 기침, 한기 - 도 내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에게 속해있는 혹은 뗄 수 없는 관계들조차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살아가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질서가 죽음의 질서에 종속되어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두번째 연에서 시인의 그런 마음은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거리가 단축된다는 것은 심리적인 거리를 말할 수도 있고, 원근감의 상실을 말할 수도 있고, 세상의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해야 하는 공간을 이탈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질문이 없어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문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의문이 사라지는 순간은 해탈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의문과 질문은 다른 것이다. 의문은 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을 입밖에 내어 질문으로 전환시킬 수 없는 순간. 그것은 폭력의 순간이거나 강압의 순간이다. 묻고자 하나 물을 수 없다. 게다가 시인은 고립되어 있다. 세상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말은 곧 깨달음이지만 세상은 나의 깨달음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셋째 연에 가면 그 결과물이 나온다. 그런 침묵의 결과, 마음 속 동계의 결과들은 그러나 추상적이지 않다. 시인은 세상의 불의나 억압에 대해 진실을 고하고 싶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매우 구체적이라 그는 조무래기처럼 느껴진다. 스스로의 삶은 허접하다. 말하지 못하는 말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도, 친구도 점점 그를 업수이 여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하지 못한다. 공연한 타박이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고, 너 혼자 그래봐야 세상이 변하니 하는 그런 일리있는 포기의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다.

4연의 역설은 놀랍도록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하늘의 빛, 물의 빛, 우연의 빛인 말은 고로 우연히 나에게 스며든 말일 수도 있다. 천지 사물 속에 깃든 빛의 말은 감히 나같이 하찮은 존재에게 스밀 수 없는 말이므로 감히 나의 말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우연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말들은 -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 이다. 말은 나의 말이되, 나의 말이 아니다. 시인은 고립됐다. 그의 말은 신의 말을 모사하는 방언이 되었고, 방언은 지껄인다 한들 그것을 해석해줄 이 없으니 말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 무어라 지껄여도 상관없는 만능의 말이다. 그의 말을 겨울의 말로 만들던지, 봄의 말로 만들던지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되었다.

5.
시인의 삶 속에는 우리 현대사의 격렬한 순간들이 많았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국전쟁을 겪었고, 다시 이승만 독재 시절을 거쳐 4.19혁명을 겪는다. 그가 4.19의 순간에 얼마나 가슴 뿌듯한 희열에 가득찼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증언들이 입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혁명은 곧 좌절된다. 그런 시기에 나온 시가 유명한 <그 방을 생각하며>였다. 이 시 역시 전문이 인용되기 보다는 첫행의 격렬함 탓인지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역시 첫 구절이 주는 강렬함이 드세다. 그 방에는 "싸우라", "일하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죄다 헛소리 혹은 헛소리 같이 공허한 것들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노래들 - 싸우라, 일하라 - 라는 구호들을 이전의 구호들처럼, 아니 이전의 노래들처럼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첫연의 구절을 두 번째 연에서 반복한다. 시인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은 녹슨 펜, 앙상하게 남은 뼈, 그리고 표독한 광기, 그리고 가벼운 실망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를 "역사일지도 모르는"이라고 말한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말은 "역사란 무엇인가?"하는 정의이다. 역사를 묵직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체험의 연속, 낙망의 연속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역사의 정의는 무수하나 역사란 기본적으로 흘러간 과거를 말한다. 그에게는 이번이 처음의 실망도, 낙망도 아니다. 그런 탓에 펜은 녹슬어 버렸다. 그것을 한탄만 하고 있다면 이 시는 그저 그런 재미없는 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인은 3연에 와서 1,2연에서 반복했던 구절을 교묘하게 비튼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그의 입속에는 의지의 잔재 대신에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다. 구취(口臭)! "bad breath" 그는 방, 낙서, 기대를 잃었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도 잃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이런 낙망한 순간이 있는가? 시인이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으니, 읽는 나도 그게 대관절 무슨 말인지 알아챌 수가 없다. 하기사 시를 쓴 본인 스스로도 모른다 하지 않던가?

이럴 때 제목은 이 시 전체를 암시해준다. 시 제목이 무엇이던가? "그 방을 생각하며"가 아닌가.
시인은 방, 낙서, 기대, 노래, 가벼움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재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제목도 "그 방을 생각하며"라고 지었다. 그는 혁명을 꿈꾸었으나 방만 잃었다, 방만 잃은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되는 온갖 허접한 것들을 잃었다. 그런데 그 방에서 나와 그 방을 생각해보니 이 모든 것이 허접이었다. 버림받은 것인지, 버려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시인의 가슴이 이유없이 풍성한 까닭은 그것이다.

시인은 이제부터 자유다. 까닭이 있는 것은 대항할 구체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지 모르고도 기쁠 수 있다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이나 현상이 현재로서는 타개된 것을 의미한다. 이유없이 풍성하다는 것은 그를 옭죄던 현실의 무게로부터 그가 자유로와질 수 있다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 시가 1960년에 쓰였으므로 이 시에 대해 역사적 현실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비록 혁명은 안 되었으나 그는 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의 시 <푸른 하늘을>을 나는 유독 좋아하는 편이다. 알고 보면 시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시에 무슨 무기가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가 사람을 죽일리 있나? 그런데 이상한 일은 왜 권력자들은 시인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그들을 감시하거나 혹은 그들의 시에 갖가지 죄목을 붙여 감옥에 가두는 것일까? 그것은 시가 사람을 죽이지 않고, 대신에 사람들을 깨우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족이 만들어낸 시인 중에서 앞으로 100년 후에도 여전히 위정자들의 골치를 아프게 할 만한 시를 제조해낸 시인. 그가 김수영이다.

6.
사적인 면모로 보았을 때 이토록 오만과 편견으로 그득한 시인 역시 드물 것이다. 보라! 그는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을 이유없이(?) 극도로 미워했고, 후배 시인이 술 한 잔을 청하고자 집을 찾았을 때 속이 빤히 보이는 모시저고리 윗 주머니에 누런 배춧잎이 몇 장을 꽂아두고도 돈 없다고 후배 시인과 문학평론가들을 야단치며 젊은 친구들이 공부를 해야지 맨날 술타령만 한다고 야단쳤던 인물이다. 그 야단맞은 후배 시인 중 하나가 바로 '고은'이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은 늘상 술에 절어 있었다. 자신은 살아 생전에 시나 평문을 써주고 받아오는 몇 푼의 원고료를 제외하고는 돈 한 푼 벌어보지 못했으나 집안에서는 큰소릴치는 아버지요, 남편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죄인이었지만 언제나 이유없이 당당했던 그이기도 했다. 물론 잠든 아이들을 살뜰히 보살피는 일면도 지녔던 시인이다.

19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문학'의 시대를 김수영이 살아서 겪었다면 그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역사의 가정은 없지만 가끔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런 순간 존경할만한 스승, 선배란 것은 그의 말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돌아갈만한 중요한 전통이란 측면에서 그의 존재는 컸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인 김수영은 분명히 절필하거나 민중문학론에 반기를 드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그가 자신이 소망했으나 당대에 자신은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런 문학적 토양들이 뿌리내리기 전에 세상을 달리했으므로 우리는 그의 그런 시론과 시들은 접할 수 없었다. 김수영이 민족문학론이나 민중문학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분명 어떤 태도를 보여주었을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있으며, 그의 그런 태도는 때로 보수적으로 비췄을지 모르겠으나 믿고 기댈만한 든든한 보수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김수영에 대해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누가있겠는가? 그러나 내 청소년기의 이 시에 대한 감상과 피끓는 느낌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친구들이 신동엽의 민중성을 말할 때도 나는 김수영의 저 솔직함을 보라고 외쳤었다. 그렇다고 신동엽 시인을 부인한 것은 아니나 나는 김수영 시인의 저 부끄러움이 좋았다. 무엇보다 그의 통찰은 신동엽의 농촌 정서와는 다른 풍모가 있었다. 그는 그래서 중도에 그렇게 가버린 것이겠지. "아름다운 상상"을 했다. 그것은 임화가 그렇게 죽지 않고, 우리가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지지 않아서 그래서 임화가 스승이 되어 제자들을 기르고, 우리들은 즐겁게 임화에서 김수영 그리고 다른 또 누군가로 이어지는 선생들에게 배우고, 신동엽이 그렇게 죽지 않아서 여전히 꼬장꼬장한 늙은이로 후학들을 다그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임화는 죽고, 김수영은 죽고, 신동엽은 죽고... 또 조태일이 죽고, 김남주가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우린 아름다운 스승이 없는 시대에 나서 스스로를 가르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늘 쫓기고, 절박하며, 기갈에 들린 것. 그들이 펼쳐놓은 길을 따라가면 절대로 헤매지 않을, 딛고 올라설 스승이 없어서다. 그것이 늘 나를 아름답지 못한 고민들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시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시집을 읽는 것이다. 민음사에서는 시와 산문으로 구분된 김수영 전집이 있으므로 이 책을 읽는 것이  김수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좋은 첫 단추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시인 최하림 선생의 김수영 평전이 있다. 이전에 나왔다가 절판되었던 것을 수정증보하여 재출간한 좋은 평전의 본보기가 될 만한 책이니 이는 그의 삶과 사유의 뿌리를 더듬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세 번째로는 문학평론가 김명인 선생이 소명출판에서 펴낸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이란 비평서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를 향한 모험가로서의 김수영의 시세계와 생애를 더듬어 본 좋은 책이다. 그외에도 그에 관한 좋은 책들은 많이 있으므로 찾아 읽는 노고를 사양치 않는다면 김수영은 우리에게 좋은 고민거리들을 던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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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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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 - 침묵의 뿌리, 그 20년의 역사


좋은 하느님
나는 어떤 때 매를 맞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하늘을 보며 "나는 죽고 싶어요, 죽여주세요 하느님" 하며 운다.
- 5학년 도미숙


조세희 선생의 『침묵의 뿌리』에 대해 서평 혹은 리뷰를 올리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없다. 그건 이 책이 내게 아무런 영감도, 감흥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서평 혹은 리뷰란 말로 재단될 수 있는 글을 나는 이 책에 대해 감히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리뷰 혹은 서평이 적은 까닭, 이 책이 지난 20여 년간 절판되거나 품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조세희 선생 자신이 워낙 적은 작품을 썼으나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절판되지 않았다 - 다시 말해 수많은 이들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저자 조세희 선생의 이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섣부르게 서평이나 리뷰라는 "말"의 형태를 빌어 말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이 책에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책에 대해서 이론이나 논리적 도움이 아닌 정서적인 기운의 도움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 『침묵의 뿌리』에 대해 섣부르게 무어라 말할 수 없어 오랫동안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침묵의 뿌리』엔 목차가 없다. 첫 장을 열면 바로 조세희 선생의 육성이 들려온다. "지난 70년대에 나는 어떤 이의 말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책 한 권을 써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 책이다. 그때 나는 긴급하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80년대에 들어와 바로 10년 전 그 생각에 사로잡혀 또 한 권의 책을 묶어낸다." 나는 직접 조세희 선생을 뵌 적은 없지만, 직간접적으로는 이 분과 인연이 있다. 당신이 『침묵의 뿌리』에서 언급하고 있는 당신의 큰 아들이 고등학교 1년 후배고, 나와는 대학 동기로 다시 엮이는 인연...

"나는 작가이다. 어떤 이의 말대로 소설 나부랑이나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작가는 물론 대단한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작가인 나에게 유별난 것이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잘 잊는 것을 작가인 나는 좀처럼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몇 해 전 이상 기후에 대해 내가 지금 이야기한다고 이상해 할 필요는 없다. ...<중략>...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춥다는 말을 했다.
나는 작가이기 때문에 원고지 위에 농사를 지었다. 작가가 농민과 다른 점은 자기 농토가 없어도 작가는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농토가 없는 농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나는 농민은 아니지만 이른 봄부터 서둘러 일을 했다. 내가 일할 때 우리 집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놀았다. 작은 아이가 소리를 내면 큰아이가 주의를 주었다.

"조용히 해."

큰 아이는 형답게 말했다.

"형아, 왜 조용히 해?"

"아빠가 글을 써."

작은 아이는 알았다는 듯 눈을 몇 번 깜박인 다음 형의 귀에 대고 이렇게 물었다.

"아빠가 글을 쓰면 또 책이 있어질 거지?"

그러나 아이들의 그해 협조는 아무 보람이 없었다."
<본문 19-20쪽>


작가의 아들을 안다고 해서 작가를 아는 건 아니다. 지난 90년대의 어느 날 나는 80년대가 잉태했으나 끝끝내 사산되어버린 혁명의 불운한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마치 어느 날의 낙서처럼 "내가 그랬잖아/ 사랑하지 말라고/ 많이 아플 거라고.../ 불의 늪을 지나는 것/ 얼음의 갱도에 갇히는 것/ 모래로 성을 쌓는 것이라고/ 세상과 교미하는 일은/ 비루하고 더러워"라고 나의 청춘이 세상에 걸었던 말은 침묵에 에워싸인 채 비루하고 더러워졌다. 내 사랑은 거절당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무시당했다.

그 무렵 만난 출판사 다니던 애인(현재의 내 아내)이 어느 날 우연히 디자인사무실에서 조세희 선생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계간지를 만든다는 거였다. 뜻밖이었다.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는 일도 그렇게 더딘 분이 남의 글을 쫓아다니며 받아내야 하는 계간지를 만든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당대비평』이란 계간지였고, 나는 창간호에 실린 당신의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었다(물론 얼마 뒤 조세희 선생은 『당대비평』을 떠났고, 이 잡지의 이후 행보는 다들 아시는 대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침묵의 뿌리』는 1995년판이고,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85년 그리고 올해는 2005년이다.

"1985년 3월, 나는 다시 사북에 다녀왔다.

금년은 해방 4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가 보낸 40년은 중세의 40년 또는 18,9세기의 40년이 아닌 바로 20세기의 40년이다. 나 개인에게도 1985년은 의미를 갖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 1975년인데, 어느 사이에 10년이 흘러간 것이다. 그 10년 속에  1980년이 들어 있었다."
<본문 135쪽>


올해는 『침묵의 뿌리』가 세상에 나온 지 20주년이 된다. 해방 60주년이다. 그리고 21세기의 첫 5년간을 보내고 있다. 1985년에 조세희 선생은 1976년 국제노동기구 ILO의 조사를 인용해 말한다. 당시 우리 노동자들의 주당 근로 시간은 52.6시간인데 비해 미국은 40.4시간, 캐나다 38.5시간이었고, 우리 노동자들이 시간당 0.46달러를 받을 때, 캐나다는 4,97달러, 미국은 4,80달러를 받았다. 이듬해인 1977년 우리 땅 어느 그룹 회장은 78억원의 개인 소득을 올렸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5년 5월 1일자 신문엔 한국 노동자가 세계에서 제일 일을 많이 한다는 기사가 실렸단다. ILO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들의 주당 노동 시간은 54.4시간으로 10년 전보다 2시간가량 도리어 늘어났다.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 노동자들은 어떨까? 1988년까지 우리나라의 법정근로시간은 주당 48시간이었고, 1991년 이후엔 주 44시간으로 다소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법정근로시간이지 실제 근로시간은 아니다. 지난 2003년 통계로 보면 주당 45.5시간을 일한다고 한다. 대신에 비정규직 혹은 주당 근로시간이 18시간 미만인 불완전 고용자의 수가 17만 명대에 진입했고,  비정규직 노동자수는 2001년 5월말 현재 758만 명으로 전체노동자(1천297만 명)의 58.4%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사진기를 메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어질 책이 없어졌지, 아빠?"

작은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그 뒤의 나는 한 해에 한두 가지씩, 몇 가지 사실을 몇 해에 걸쳐 깨달았다. 첫 번째 해에 내가 알아낸 것은, 지구라는 우리 별 사십억 인구 가운데서 일억의 어린이들이 밤마다 배고파 칭얼대다가 잠이 든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해에 깨달은 것은 일억의 두 배가 되는 이억의 어른이 밤마다 배고파 뒤척이며 잠을 청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전우주에 알려진 지구라는 인류의 고향 별 어느 곳에서는 그 수가 밝혀지지 않은 어린이와 어른들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세 번째 해에 나는 사십억 가운데서 일억의 어린이와 이억의 어른들이 날마다 과식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가운데서 몇 천만 명은 혀를 즐겁게 해준 음식을 소화시키기 위해 노래하고 춤추고, 몇 백만 명은 운동을 하고, 다른 몇 십만 명은 즐거운 다음 식사 시간 전까지 먼저 먹은 것을 소화시키기 위해 소화제를 복용하고, 또 다른 몇 만 명은 치료를 받아야 할 지경이 되어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느 날, 지구라 불리는 우리의 고향별 어떤 도시에서는 역시 그 수가 밝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가 영양 과다 섭취에 의한 병을 얻어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지구에서는 못 일어날 일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본문 22-23쪽>


이 책의 표지엔 한 소녀의 얼굴이 실려 있다.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표지에 실렸던 스티브 맥커리의 사진 "아프가니스탄의 소녀"처럼 『침묵의 뿌리』 표지에 실린 소녀의 사진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대변하는 듯한 눈빛을 담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또한 그렇게 느꼈나보다. 소설가 함정임은 "아이가 어미를 기다리는 한 어미란 존재는 전 우주의 희망이 된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 아이가 뿌리의 의미를 알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를 되새겨보곤 한다. 부질없는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매번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나조차 밑둥 잘린 나무처럼 드러난 삶의 구멍을 감당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데 부끄러움이 일어서이다.  ...<중략>...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책을 훑어보기도 전에 아이는 두 손으로 책 표지를 가리고 울먹였다. "이 누나 눈 무서워!" 울상이 되어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왜 무서운데?"하고 "침묵의 뿌리"라고 씌여진 책을 다시 펼쳐 아이와 함께 보려고 했다. 아이는 금방 울음을 터뜨리며 "무서워!"하더니 다시 책을 뒤엎어놓았다."라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21세기를 이미 5년씩이나 살아낸 우리들이지만 우리들 자신은 과연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이제 사람들은 가난 혹은 절망에 대해 말문을 여는 순간부터 "입 닥치라"는 눈빛을 보낸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뻔한 설교 따위 집어치우란 얼굴 표정이 역력하다. 도리어 성을 내는 이들도 있다. 생명의 충동은 죽음을 알지 못한다. 죽음은 그저 결과일 뿐이다. 안락함을 꿈꾸는 쾌락의 원칙, 생명의 충동 저 너머엔 분명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무의식의 근저에 가리어진 죽음이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유기체에게 한정된 수량의 생명, 모든 유기체의 결말은 죽음이다. 그러나 너무 이르게 죽음을 체감한다는 건, 생명충동, 쾌락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죽음은 다스려져야 한다. 그래서 문명은 죽음을 금지한다. 문명의 보존을 위해 죽음은 추방당한다. 그러나 죽음은 생명의 그림자. 죽음이 추방된 결과 생명 역시 위험해지고 말았다. 죽음에 둔감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일수록 도리어 죽음의 광경이 흔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1980년 4월 21일. 소위 "사북 사태"란 것이 일어난 날은 우연치 않게 내가 태어난 지 꼭 10년째 되던 날이었다. 조세희 선생은 1975년 긴급하다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쓰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85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 다시 『침묵의 뿌리』를 쓴다. 그리고 1997년, 당신은 "20세기를 우리는 끔찍한 고통 속에 보냈다. 백 년 동안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이 헤어졌고, 너무 많이 울었고, 너무 많이 죽었다. 선은 악에 졌다. 독재와 전제를 포함한 지난 백 년은 악인들의 세기였다. 이렇게 무지하고 잔인하고 욕심 많고 이타적이지 못한 자들이 마음 놓고 무리지어 번영을 누렸던 적은 역사에 없었다." 고 말한다.

이 책 『침묵의 뿌리』 마지막 장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다운 인간들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개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과 불의, 특히 그 앞에서 또는 그가 알고 있는 가운데 저질러지는 범죄 행위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을 저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때 나는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같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남의 말이다.
우리는 80년대에 또 어떤 진행을 맞게 될까? 당신은 아는가?"


나는 2005년 다시 『침묵의 뿌리』를 펼쳐 읽으며 이런 질문을 당신에게 하고 싶다. 당신이 성내고, 귀찮아하는 절망과 가난에 대해 외면할 때, 우리는 21세기에 또 어떤 진행을 맞게 될까? 당신은 아는가? 알리바이라면 우리시대의 시민 모두가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땅 어느 곳의 역사가 20년밖에 안 된다는 것은 곧 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명의 밝은 모습, 늘 좀더 밝고 즐거운 풍요와 평온만을 바라볼 때 어두움은 더 깊고, 더 무겁게 자라난다. 너무나 뻔한 설교이겠지만, 이제 우리들은 "침묵의 뿌리"가 더 깊숙히 뿌리내리기 전에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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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 파블로 네루다 지음, 고혜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0년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한 우리는 찬란한 도시로 입성할 것이다."
-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인용하며 말한 랭보의 시구


파블로 네루다. 시인을 추억하는 방법은 많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그 시인의 시를 마음에 품는 것이다. 내년(2004년)이면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 지난 1973년이었으므로 오래되었다면 약간 오래되었고, 최근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이 된다. 그러나 그가 언제 태어났건, 그가 언제 죽었건 간에 그를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영원한 청춘의 시인이었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그의 시를 마음에 담고 있는 한 우리들 역시 그와 함께 영원한 청춘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아버지는 그가 시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런 까닭에 네루다는 자신의 본명을 숨기고 체코 출신의 서민 시인 '얀 네루다'의 이름을 본따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 그가 체코의 서민 시인의 이름을 본따 자신의 필명으로 삼은 것은 이 무렵 벌써 그 자신이 계급적 동질성이란 의식을 담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는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사망한다.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 테무코에 자리잡았고, 그는 조국의 개척지라는 토양에서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영감을 얻었다.


'우리 어머니를 화냥년, 개년으로 불러가면서. / 혼자서 마셨겠지. 오후의 차를. 고독하게. / 영원히 주인 잃은 내 낡은 구두를 바라보면서/ 내가 지금 거기서 열대 기후, 중국 쿨리들의 가난, / 그렇게도 나를 힘들게 했던 끔찍한 열병, / 아직도 증오하는 지겨운 영국인들에 대해 불평이나 하며 / 그곳에 있는 양, 큰 소리로 나를 저주하지 않고는, / 내 병, 내 밤의 꿈, 내 음식을 생각해낼 수 없을 거다.'


우리는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불유쾌한 경험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공직 생활을 훌륭하게 해낸 예술가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 했고, 그의 이런 소망은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으면서 성취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니며 외교관으로 살았다. 비록 영사직을 맡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명예영사였기 때문에 그는 칠레 본국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매우 힘들었다. 그런 탓에 이 무렵을 회고하는 그의 글들과 시에서는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시집 "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그렇게 만들어진 시들을 엮은 것이다.


'주변을 보았다. 쓰러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 / 노동자, 인력거를 끄는 쿨리, 농장의 쿨리, / 몸이 망가진 채 돌아다니는 이들, / 거리의 개들, / 무시받고 사는 가난한 이들. / 여기 상처받고, / 존재가 아닌, 그저 발에 불과할 뿐인, / 인간이 아닌, 그저 짐꾼에 불과한, / 걷고, 걷고, 땀 흘리고, 땀 흘리고, / 피땀을 흘리고, 영혼도 없어진 다음, / 이들은 이렇게 있다. / 외롭게 / 누워서 / 이제야 발뻗은 신세가 되었다. 이들 무쇠다리들이. / 배고픈 이들은 기쁨에 취할 / 암울한 권리를 산 것이다.' 「동양의 아편」


네루다가 랭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네루다를 추억하는 많은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한때 칠레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 인민연합의 아옌데와 후보 단일화를 통해 칠레의 민주화를 앞당겼고, 스페인 내전기에 희생당한 로르카의 친우였다. 물론 이런 사실들은 파블로 네루다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다. 그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에 일어나는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시인의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될지 모르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네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죽었고, 노 시인은 낙담하여 건강을 잃고 세상을 등졌다.

우리는 먼저 네루다를 시인으로 기억해야 한다. 네루다의 삶이 바로 시인의 삶이었다. 영원한 청춘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있는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사정권을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룩했다. 우리가 네루다를 기억하는 방식은 그의 시를 읽는 것일 게다. 그 중에서도 청춘의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건져올린 이 시집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도 참 아름다운 기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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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1993년

책을 읽다보면 가끔 문학평론가 김현의 한탄스런 독백이 떠오르곤 한다. 세상엔 매일같이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책을 평론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평론가로서 자신이 읽어낼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으니 이를 어쩔 것이냐는 것이 그의 한탄이었다. 물론 김현은 이 부분을 능숙하게 변명하고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성실함에 대해서야 누군들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은 지난 1993년이고, 내가 구한 것은 2002년 4판째의 것이다. 거의 10년에 걸쳐 모두 4판을 인쇄했으니 결코 많은 부수가 팔린 책은 아니며, 어쩌면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우연한 기회에 위에 올린 '달나라의 장난'님의 독후감을 읽고 대관절 어떤 책이길래 저런 서평이 가능한가 하는 궁금증에서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책을 만나게 해준 그 인연에 대해 몹시 감사하는 마음이다.

소설이란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잠시의 여가를 위한 노리개로 전락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사무실에서 점심 시간이 지난 뒤 입가심을 위해 껌을 씹는 동안 잠시 읽거나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소일 삼아 잠시 읽는 데 적합한 소설이 대량으로 쏟아지는 시대에 어찌보면 200쪽이 조금 넘는 이 소설집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는 1909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용산국민학교와 경성중학교를 나오고,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1942년 요절한 사람이다. 식민지 시절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 작가의 작품을 펼쳐들고 읽는 소회도 만만치 않건 만 이 작가의 작품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도저히 말로 퍼 옮길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반추(反芻)라는 말이 있다. 소나 염소 같은 짐승이 씹어 삼킨 먹이를 다시 입 속으로 끄집어 올려 씹는 행위에서 비롯된 이 말은 이 책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에 정말 부합하는 말이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한 재능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두려움과 고심을 싫어하는 게으름이 나의 모든 것 이었던 게지. 나보다도 휠씬 모자라는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그것을 갈고 닦는데 전념한 결과 당당히 시인이 된 자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야.호랑이가  되어 버린 지금에야 겨우 그것을 깨달었지 뭔가.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타는 듯한 회한을 느낀다네" - <산월기> 中에서

<산월기>, <명인전>, <제자>, <이능> 4편의 짤막한 단편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고전 속의 인물들을 다시 만나게 한다.  그것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의 열기가 가슴 저 밑으로부터 끓어오르도록 한다. <산월기>와 <명인전>은 각기 다른 의미에서 서로 호응하게 되어 있는데, <산월기>의 경우엔 세상과 담쌓은 한 예술가가 결국 몰락해가는 모습을 때로는 카프카의 <변신>처럼 그리면서도 동양적인 고전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명인전>은 노장의 세계에 빠져든 예술가, 장인이라 불러야 할 한 인물의 모습을 수묵화처럼 담담하게 묘파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와 그의 제자 자로를 다루고 있는 <제자>에 이르면 이 젊은 작가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서양의 고전주의와는 다른 동양의 고전주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가끔 왜 우리에게는 그리스 로마신화 같은 그런 세계가 없냐고 투덜대는 이들에게 늘 해주고 싶은 말은....그런 무식한 소리하지 말고....먼저 <논어>를 읽고, <사기>를 읽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역시 하늘은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이능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보고 있지 않은 듯하면서 역시 하늘은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숙연한 두려움으로 떨었다. 지금도 자신의 과거가 옳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소무라고 하는 남자의 존재가,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고, 그 흔적이 지금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아무래도 이능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가슴이 쥐어뜯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개 없는 자신은 소무를 말할 수 없이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능은 몹시 두려움에 떨었다." - <이능> 中에서

작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란 것이 무엇인지 이 네 편의 각기 다른 이야기와 각기 다른 주제를 통해 전달하는데 막힘이 없고, 읽는 동안 내내 숨이 턱턱 막혀오는 감동을 준다. 하마터면 묻혀버렸을 이 책을 근 10년이란 시간 동안 절판시키지 않고 꾸준하게 출판해준 <다섯수레>라는 출판사와 이 책이 소문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하게 팔리도록 해 어느덧 4판을 찍어 내 손에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이 책을 읽어준 안목있는 독자들에게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결국 우리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꾸준히 읽을 수는 있다. 그러므로 계속 좋은 책을 찾아 읽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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