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생각? 생각? 생각?

안철수의 생각 -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
안철수 (지은이) | 제정임 (엮은이) | 김영사 | 2012-07-19


우리 사회의 ‘멘토’라는 법륜 스님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단일 후보로 문재인이 아니라 안철수로 단일화되었다면 선거에서 승리했을 거라고 말했다는데, 비록 법력 높은 분의 말씀이긴 해도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아마도 법륜 스님의 말씀에 담긴 속내는 잘해야 민주당이 ‘안철수로 헤쳐모여’ 할 수 있을 만큼의 쇄신을 이룩하길 바란다는 덕담쯤 되지 않을까 싶다.

출마자가 다양한 총선 때 만큼은 아니더라도(총선 때는 선거자금 마련과 후보의 홍보를 위해 게다가 책 한 권쯤 낸 저자로서의 권위가 여전히 유용하다는 판단에서 후보자 개인의 자비 출판이 홍수를 이룬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 자신이 직접 쓰거나 후보와 관련한 내용을 다룬 책들이 붐을 이루며 출판되는 것이 상례(常例)가 되었다. 물론 이렇게 나온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일반적이진 않았다. 특히 안철수 당시 교수가 제정임 교수와 함께 펴낸 『안철수의 생각 -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는 드물게 대중의 호응을 얻은 책이기도 하다.

‘베스트셀러'를 단순히 많이 팔린 책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대중으로 하여금 지갑을 열고 책값을 지불하고 싶게 만들 만큼의 매력(대중성과 보편성)을 가진 책이란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 너머에는 남들 다 읽는(혹은 다 구입한) 책을 나만 안 읽었다고 한다면 대화에서 소외될까봐 읽게 되는 다분히 한국적인 현상(왕따)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지난 2012년 7월에 출간된 『안철수의 생각』을 구입한 분들은 대선도 끝난 지금쯤 모두들 이 책을 다 읽었는지 모르겠다.

“저는 지금까지 인생의 큰 전환기마다 ‘내가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얼마나 보탬이 될 수 있을까’를 판단 기준으로 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런 맥락에서 정치에 직접 뛰어들어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든, 혹은 직접 나서지 않아도 기성 정치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든, 국민의 열망을 대변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책임감을 느꼈어요. 제가 정치에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제 욕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30쪽)

“하지만 저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의미 있고, 열정을 지속할 수 있고, 잘할 수 있는가’의 세 가지만 생각했고 성공 가능성은 고려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같은 입장이고요.” (33쪽)

제목을 누가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때로 어떤 책들은 제목보다 부제에서 더 많은 것을 설명한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부제를 다는 것이지만 『안철수의 생각』에 달린 부제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에서 ‘안철수’의 생각 또는 안철수의 ‘생각’은 ‘우리’로,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미래’로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비록 이 시점까지 그는 선거에 참가할지 안할지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지만 이 책을 내는 순간,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에 대통령 선거 출마를 결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정의로운 복지국가’ 혹은 ‘공정한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복지와 정의는 평화가 전제되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으니, 남북의 통일을 추구하면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제도 절실합니다. 결국 복지, 정의, 평화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현재의 정치권은 진영 논리에 빠져서 상대의 의견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데, 화합과 소통의 리더십을 통해서 복지, 정의, 평화의 시대적 과제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82~83쪽)

안철수가 생각하는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진영논리’이다. 흔히 안철수를 과거 정치 경력이 없어서 그만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라 좋아한다고들 하는데 그와 흡사한 맥락에서 안철수의 생각에는 과거(역사에 대한 성찰이 부족해 보인다는 뜻)가 없다. 그의 생각 속에는 어째서 이런 진영논리가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드물고, 역사적 맥락이 탈색되거나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대신 등장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믿음’ 같은 이상화된 담론들이다.

“제가 지난해 <경영의 원칙>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거기에 전쟁과 정치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어떤 분의 설명을 인용했어요. 전쟁과 정치는 적과 싸운다는 점은 같답니다. 그런데 전쟁은 적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이고, 정치는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상대방의 궁극적인 목적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적을 믿으면서 싸우는 것, 기본적인 믿음은 가지면서 대결하는 것이 정치라는 얘깁니다. 이런 믿음 위에서 소통의 정치를 추구해야겠죠.”(91쪽)

정치인의 정치적 수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유권자들에겐 참 어려운 일이지만 어쩐지 안철수가 선한 눈매에 어눌한 어투로 말할 때는 설득력을 얻는다. 월터 리프만은 ‘스테레오타입 (stereotype)'이란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심리적 지각 과정이 보이는 한 가지 중요한 편향으로 ’보고 나서 정의(first see and define)'하기보다는 “정의하고 나서 본다(define first and then see)'고 했는데, 그래서 정치는 논리 이전에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현실 인식 과정에서 자신의 표준화된, 습관화된, 그리고 미리 정의된 스테레오타입의 강력한 지배를 받게 되므로 직접 관찰보다는 타인의 설명에 높은 타당성을 부여하고, 직접 체험보다는 공상을 더 신뢰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안철수는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다시 말해 ‘희망사항’을 표상한다.

앞서 안철수에게는 과거(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안철수의 생각』 중에는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저는 국사뿐 아니라 세계사도 필수과목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동물의 경우 주어진 그 순간만 생각하고 반응하지만, 사람은 그전에 일어났던 일과의 맥락(context) 속에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리고 세계 시민으로서 국사와 세계사를 모르고 지금 당장 필요한 지식만 익히는 접근방법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197쪽)

좋은 생각이고 동의하지만 문제는 딱 거기까지 만이었다는 거다. 『안철수의 생각』은 300쪽이 채 안 되는 얇다면 얇은 책이고, 이 책이 공약정책집도 아니기에 우리는 이 책 한 권으로 그의 생각(박근혜 당선인이 TV토론에 나와서 한 말로 널리 회자된 “그래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거잖아요.”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을 모두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갈증에 시달린 사람들이 나 말고도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 『안철수의 생각』 이후에 『안철수의 생각을 생각한다』거나 『안철수의 진짜 생각』, 그리고 『안철수의 생각과 다른 생각』 같이 마치 생각의 존재론이나, 생각의 인식론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창한 제목의 책들이 연이어 출판되기도 했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 작품의 예술성이라 하기엔 다소 뭣하지만 예술의 중요한 미덕 중 하나는 해석의 확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미학적으로 보든, 사회과학적으로 보든 예술 작품의 가치('가치'와 '가격'을 같은 말이라고 해석하지는 말자! 이 글에서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이해를 돕기 위한 차원이니까)가 생산 즉시 생산되는 것이라면 예술 작품의 가치는 불변이겠지만 예술 작품의 가격과 가치는 장(場)에 의해 변동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예술작품의 가치를 변동시키는 속성 중 하나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해석의 확장성이다. 다시 말해 시공간에 따라 여러 의미로 변주(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작품이 뛰어난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의미이다. 의미 값이 고정된 작품은 해석의 여지가 좁기 때문에 장이 개입할 여지가 그만큼 줄어들뿐더러 시간과 공간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반감되기 쉽기 때문이다.

안철수 혹은 『안철수의 생각』을 생각하기 위해 이토록 많은 변주(출판물)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안철수의 생각이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한 좋은 생각들로 가득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치는 예술작품처럼 독자(상대)의 해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때로 정치인 스스로 능동적인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현실을 해석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은 이것을 ‘시대정신(Zeitgeist)’라고 거창하게 주장하기도 하지만 어떤 정치인도 시대정신이라는 모호한 주장만으로 집권에 성공하지는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 안철수의 가장 큰 매력은 우리 시대(정치)가 만들어 낸 스테레오타입이라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의 가장 큰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가 현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해석의 결과에 따라 선택하면 할수록 그의 가치는 점점 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말이다. 정치인으로서 안철수는 네덜란드의 튤립이 그러했던 것처럼 수많은 거품 속에 피어났다. 이제 앞으로 5년, 그가 거품을 거둬내고도 그만한 역량과 가치를 지닌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보여야 할 시간들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안철수의 생각이 구체적인 미래를 얻게 되지 않을까? 안철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타입인 거죠.”(39쪽)


안철수는 선거 이후에 앞으로도 정치를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가 만약 이번 선거에서 실수한 것이 있다면 다음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이 책은 인터뷰집인데, 지은이는 안철수이고, 엮은이는 제정임이다. 이 책보다 한 해 먼저 나온 『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에서도 지은이는 김어준이고, 지승호는 엮은이이다. 지난 2000년에 나온 에릭 홉스봄과 안토니오 폴리토의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원제 Interview on the New Century)도 앞의 두 책과 비슷한 구조지만 이 경우 에릭 홉스봄과 안토니오 폴리토는 공동 저자로 대접받는다. 한국 사회(출판계)에서 저자와 엮은이(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어떤 위계적 질서에 놓이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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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 문명 -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문명(civilization)은 시민을 뜻하는 라틴어 '키비스(civis)' 와 도시를 뜻하는 '키빌리타스(civilitas)' 에서  유래한 말이다. 문화비평가 김창남은 "문화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사고와 표현의 뛰어난 정수로 본다면, 여기에는 예술에 대한 지식과 실천을 통한 정신적 완성의 추구라는 열망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종종 문화(culture)와 문명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으로 파악되거나 문화의 특수한 한 형태로 파악되어 서로 연결되거나 혼용되어 사용되는 등 실제 사용에 있어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문화가 정신적인 발전 상태(가치)를 의미하는 말이라면, 문명은 물질의 발전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문화인류학의 영향으로 문화 가운데 도시적인 요소, 고도의 기술, 작업의 분화, 사회 계층 분화를 갖는 복합문화(문화의 복합체)를 큰 단위로 파악한 총체를 문명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권용립 선생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어서 마침 가지고 있던 이 책
"미국의 정치문명"에 저자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와 미국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보니, 나의 서재에는 미국 관련 서적들이 책꽂이 두어 칸을 빼곡이 채울 정도가 되었다. 하워드 진, 리처드 O. 보이어, 노암 촘스키, 이냐시오 라모네, 리오 휴버만,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외국 학자들과 국내 학자들의 책들이 그것이다. 책 많다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그 같은 책들과 권용립의 이 책은 상당히 다른 책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책들이 미국의 역사, 경제, 사회, 외교 정책 등등에 대한 책이라면 권용립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국의 정치 문명에 대해 규명하고, 분석하려 한 책이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 1880년대 후반에 촬영된 서울의 미국 공사관 모습(출처. University of Arkansas Libraries)



권용립은 미국과 우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이 미국과 수교한 것은 1882년이지만 미국이 한반도의 정치적 운명과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부터다. ...<중략>... 해방 이후의 한국에 엘리트를 공급하고 재생산하는 본거지였으며, 한국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살아본 사람들이었고 미국과 어떤 종류든 내연의 커넥션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미국은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타인의 나라'이기 이전에 '대한민국의 피안'이었고 '세계'로 나가는 거의 유일한 출구였다. <본문 29쪽>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사회 내연의 커넥션에
"이산 가족"이 존재했다면,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인 1970년대 우리 사회 내연의 커넥션 안에는 "이민 가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민족 공동체인 북한보다 심정적으로 미국이 더 가깝게 여겨지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경제적인 이유만이 아닌 내연의 깊은 속사정이 있었던 거다.  


▶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대표 신헌과 미국 해군의 로버트 윌슨 슈펠트 제독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였다. 1876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에게 고종이 미국의 위치를 묻자 김기수는
“서양의 서쪽, 동양의 동쪽에 있다고 합니다.”라고 두리뭉술하게 답해야할 정도로 잘 알지 못했던 먼 이역의 나라 미국은 그저 오랑캐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받아 온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단박에 뒤집어진다. “예의로 나라를 세웠기에 남의 땅과 백성을 탐하지 않으며, 굳이 정치에 간여하지도 않는다.”는 미국에 대한 일방적 찬사가 가득 담긴 이 책은 러시아의 침략성을 과장되게 표현하면서 이를 막고자 한다면 미국과 손을 잡아야만 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약소국 편에 서는 정의롭고 공평하며 부강한 나라, 미국의 이미지가 우리 위정자들의 뇌리에 새겨진 건 아닐까?


서유럽과 다른 정치 문명 - 미국


권용립은 책 머리에서 서구적 비전으로 바라볼 때, 대개의 학자들 슈펭글러, 소로킨, 토인비 등의 문명론에서 서유럽과 미국을 동일한 문명권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최근 우리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충돌' 역시 미국을 별도의 문명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선 토인비 등과 동일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권용립은 미국과 서유럽의 정치 문명은 분명한 차이를 가진 별도의 문명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미국이 서유럽의 정치 문명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농축된 기억의 유무이다.


역사시대의 긴 세월을 수많은 굴절과 변화 속에서 보낸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국가를 설계한지 불과 150여년 만에 세계 최강의 공화국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해냈다. 서유럽 국가들이 상상의 공동체든, 아니든 간에 실제 피를 나눈 역사적 민족과 그 집단적 기억이 교직되면서 형성된 민족국가인데 반해 미국은 먼저 국가와 이념을 설계해놓고 그런 뒤에 받아들인 여러 인종의 이민을 통해 건설된
(기억을 제조해낸)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국가 설계 과정을 담당한 담론이 미국의 건국 신화가 되고, 이것이 미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즉, 이것이 미국의 이데올로기이고, 미국의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현재의 미국 속에서 정치적 응집력을 제공해주는 담론이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현재의 미국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므로, 이데올로기를 제거할 때 미국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


저자는 미국의 역사와 역사학의 계보를 엮어내면서 19세기 미국 애국주의 역사학의 대부 뱅크로프트의 주장을 보여준다. 뱅크로프트는 미국을 전 세계 문명을 융합한 결정판으로 미화하며 미국의 건국 과정을
"이탈리아의 콜럼버스와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가 합작한 신대륙 탐험과 발견, 프랑스가 지원한 독립전쟁, 인도에 기원을 둔 영어, 팔레스타인에 그 뿌리를 둔 기독교, 그리스 문명에서 기원한 문화, 로마에서 기원한 법, 영국으로부터 전수받은 대의 제도, 네덜란드 연방으로부터 받아들인 연방제 원리와 사상적 관용의 정신"을 하나로 녹여 인류의 보편적 정치 체제를 가진 나라로 묘사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 가 의미하는 상상이 만약 담론에 의해 구축된 고도의 상징 체계를 의미한다면, 정치적 담론과 정치적 자의식의 산물이란 점에서 미국 국민(American Nation)은 이 정의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전세계의 인권과 자유를 노래한 측면에는 이런 미국인들의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다. 즉, 미국의 국가 정체는 인류의 정의를 담보한 가장 보편적인 정치 체제이기 때문에 타자(민족, 국가)들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식 문명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현대 외교사를 살펴보면 비합리적일 정도로 도덕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모두 '도덕주의적 외피'를 뒤집어 쓰고 나타난다. 실제로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정치(power politics)'를 추구하는 현실주의 외교를 수행하면서도 끊임없이 교의
(doctrine, 이 말은 정치학의 주의, 공식 외교 정책을 뜻하지만 그보다 먼저 종교의 교의(敎義), 교리를 의미한다)를 선포하면서 미국의 외교를 정당화하려 한다. 물론 역사 이래 모든 강대국들이 자국의 힘을 합리화하기 위해 애써왔고, 이런 선민 의식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계도할 소명을 타고났다는 확신 속에 극단적 개입주의의 함정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구대륙의 타락으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도덕적 국가로 태어난 미국이야말로 국제 정체 세계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도덕을 솔선수범한다고 믿었다. 즉, 다른 국가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자격과 능력을 지녔다고 확신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이런 자의식은 제국주의 혹은 사회진화론적이다. 거기에 캘빈주의적 소명의식이 곁들여지면서 미국의 강자중심주의는 다시 도덕주의적 절대주의가 된다. 즉, 미국의 외교적 행위
(전쟁을 포함한)는 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부합하는 행위이지만, 미국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국제 정치 행위는 반도덕적인 것이며,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구세주의 나라(Redeemer Nation), 해방자로서의 힘, 세계의 십자군"으로 표현된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독립전쟁 직전의 잠시를 제외하곤 봉건성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미국은 태생부터 자유롭게 태어났기에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봉건 잔재와 투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스스로가 일찌기 경험해보지 못한 역사 - 봉건성과 싸워야 하는 나라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바깥 세계의 소란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분리된 지리적 혜택 등으로 인해 마치 배부른 부자가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절실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미국이 자신들의 체제를 얼마만큼 모방하는지 그것을 척도로 해서 다른 나라들을 평가하는 경향으로도 알 수 있다.



결어 - 우리 대미 인식의 이중성을 버려라!


권용립은 정치 문명으로서 미국의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결국 하나의 지적 구조물(intellectual construction) 즉, 가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미국 국민 개개인의 개별 정신 영역에 일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대다수 미국인들이 믿는 그 무엇, 미국 국민이나 아메리카 합중국의 자의식에 편승한다고 본다. 그러나 먼저 미국과 같은 방식으로 건국된(설계된 국가)의 정신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설계의 이념을 밝혀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석의 얼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미국의 독자적 정치문명을 이해하고 그 집단 정신의 내면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래야만 브레진스키나 헌팅턴
(혹은 조지 W. 부시, 라이스와 같은 네오콘)이 보여주는 너무나 미국적인 사고, 즉 한국을 미국의 파트너가 아닌 외교적 액세서리로 보는 브레진스키의 태도나 미국의 어떤 정책도 한국의 자유를 무조건 신장시킬 것이라는 헌팅턴의 아전인수격 메시지에 충격을 받거나 분노하는 새삼스러운 일도 없어질 것이라 말한다.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대하다가는 다시 배신감을 토로하는 우리 대미 인식의 이중성이 사라져야만, 우리는 미국에 대해 정신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있다. 미국에 대한 환멸조차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거울, 기대에 따른 미국의 모습이지 실재하는 미국의 모습이 아니란 것이다.


▶ "자, 소망의 거울이 우리 모두에게 무얼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설명해주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사용할 수 있단다. 즉, 그것을 들여다보면 정확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보니까 말이다. 도움이 됐니?"
해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건 우리가 원하는 걸 보여줘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구나." 덤블도어가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바로 그것을 보여준단다. 넌 네 가족을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네 주위에 그들이 서 있는 걸 보았고, 론 위즐리는 항상 형들에게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형들보다 더 잘되어 혼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본 거지. 그러나 이 거울은 우리에게 지식이나 진실은 보여주지 않는단다. 사람들은 이 거울이 보여주는 게 진짜인지 혹은 심지어 가능한지조차도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이 본 것에 넋을 잃거나 미쳐서, 이 거울 앞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냈지.
이 거울은 내일 다른 장소로 옮겨질 예정이란다, 해리. 그러니 이것을 다시는 찾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그리고 만일 이 거울을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게다. 꿈에 집착해서 현실을 잃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에는 "소망의 거울"이 등장한다. 주인공 해리 포터는 마법의 학교에서 소망의 거울을 발견하고 그 앞에 선다. 해리가 찾아낸 거울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신이 소망하는 행복한 기억들만을 보여주는 거울에 빠져 인생을 허비해버린다. 해리가 거울 앞에서 선지 삼일 째 되는 날 덤블도어 교수가 나타나 말한다. "너도, 앞서 다녀갔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소망의 거울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한 게로구나. 꿈에 집착해서 현실의 삶을 잊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이용할 수 있단다. 즉 그것을 들여다 보면 정확히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바로 그것을 보여준단다." 지금 우리들에게 비춰지는 미국의 모습, 혹은 그 거울에 비춰보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혹시 그와 같은 것은 아닐런지....


* 권용립 교수의 "미국의 정치문명"과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은 지금껏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우리나라 학자의 미국학 저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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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엘리트(오늘의 사상신서 10) - C. 라이트 밀즈 (지은이) | 한길사(1991년)


먼저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자.

18세기에 들어와서 역사의 무대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근대사회를 사회구조의 정점에서 권력의 분화라는 뚜렷한 현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즉, 문관이 권위를 독점, 군사적 강제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반면에 군인의 세력은 제한되었으며 정치적인 중립화를 유지해야 했고 따라서 그 세력이 점차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공업화를 이룬 여러 국가에서는 문관 우위라는, 일견 위대하기는 하지만 불확실한 사실이 점차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폴레옹 시대로부터 1차 대전까지의 오랜 평화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세계 역사는 바야흐로 군부 중심시대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장군들이 다시금 종전처럼 활약하게 되었다. 전 세계의 현실적인 성격은 군부의 지도자들이 제출한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정치적인 진공 속으로 장성들이 진군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회사 중역이나 정치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장성들이 -- 미국의 엘리트 세계에서 가장 우대받지 못하였던 이들 장성들이 진출, 지극히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혹은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대한 권력을 부여받기에 이르렀다. <243쪽>


위의 문장을 살펴보았을 때, 이 내용이 과연 현재의 미국 혹은 세계와 무관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의 13장에 논의된
"대중사회" 부분을 읽어보기 위해 오랜만에 손 때 묻은 이 책을 꺼내서 읽다가 심심한데(물론 절대로 심심할 겨를이 없지만) 이 책에 대해 사람들이 써 논 글이나 읽어보자는 심산에서 클릭해봤더니 절판이란다. 이런 걸 문화적 아노미라고 해야 하나? 문화지체(cultural lag)라고 해야 하나? 사회과학 분야의 관심이 예전 같지 못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한 시대를 풍미했던 C.W. 밀스의 책이 절판되었을 줄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세상이 이토록 빠르게 변화하는 걸 애통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 책의 가치 효용이 다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사실 이 책
"파워엘리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상당수는 이제 그 효용이 다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작동하는 지배구조의 엘리트들이 누구라는 걸 오늘날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이 책이 처음 나온 1950년대 중반 "파워 엘리트"가 미국 사회에 던진 충격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C.W.밀스는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 사회의 파워엘리트들을 상류사회, 지방사회, 대도시 상류사회의 400대 가문과 유명인사들, 대부호, 기업의 최고 간부, 기업체 부호, 군부 지도자 등등의 범주로 나누어 이들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있다. 그 가운데 미국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균형이론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분점하도록 하여 균형을 맞춘다는 이론)과 파워엘리트, 대중사회의 틀로써 설명한다. 책의 말미에는 미국 사회의 보수적 분위기(1950년대 미국은 이미 보수적 분위기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었다)에 대해 전하고 있는데, 럿셀 커크를 인용해 미국의 보수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리고 있다.


"1) 신의 의도가 사회를 지배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가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위대한 힘을 자기의 이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보수주의자는 전통적 생활의 다양성과 신비성에 애착을 느끼고 있다."
이들은 "사회는 지도자를 찾고 있다"고 믿는다. 마치 유대 민족이 선지자를 통해 하느님이 예시해준 왕을 찾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보수주의자(미국의)들은 사람들 사이에 자연적 우열이 있으며 거기에서 계급과 권력의 자연적 질서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이는 현재 미국이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내재된 보수주의의 도덕률이다). 미국의 전통은 신성한 것이며, 전통을 통해서 신의 섭리의 참된 시화적 방향이 명시된다고 보았다. C.W.밀스의 "파워엘리트"가 왜 대단한 책인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대목들이다. 미국 사회는 신의 섭리에 따른 전통에 의해 승인된(기름부음을 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통치되는 균형잡힌 사회인 셈이고, 밀즈는 바로 미국의 그런 보수주의를 비판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끝낸 미국은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으나 내외부적으로는 두 가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외부적인 위협이란 것은 일찌기 패튼이 주장한 바대로 소련의 위협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미국 사회가 이전과 다르게 크게 변모했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이 유럽에 미국식 문화를 광범위하게 퍼뜨린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전쟁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아 커다란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우선, 전쟁전에 비해 기업의 구조가 대규모화되었다. 이전의 중소기업들은 전쟁 기간 동안 소멸되거나 거대 기업에 합병되었고, 소규모
(물론 우리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농장들 역시 거대 기업 속에 포함되어 갔다.


전쟁은 참전한 남성 병사들을 대신해 노동 현장을 메꿔 준 여성과 청소년의 사회진출을 가속화시켰고, 전쟁 수행 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미국 동부와 서부의 도시들이 거대화되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미국의 기존 문화 시스템이 대중사회화
(산업화와 도시화)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자신이 대중문화의 총본산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 역시 대중문화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이 되는데, "파워엘리트"의 C.W.밀스 역시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J.S.밀과 A.토크빌의 자유주의적 견해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밀스의 견해는 물론, 대중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다.


C.W. 밀스는 공중(public)과 대중(mass)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다.
공중은 ① 의견을 받는 쪽과 거의 같은 정도로 많은 수의 의견을 보내 주는 쪽이 있고 ② 공중에 대해서 표명된 의견에 효과적으로 반응을 나타낼 기회를 보장하는 공적(公的)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며 ③ 그와 같은 토론을 통해서 형성된 의견이 효과적인 행동으로서 실현되는 통로가 용이하게 발견되며 ④ 제도화(制度化)된 권위가 공중에게 침투되어 있지 않고 공중으로서의 행동에 자율성이 유지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중에 있어서는 ① 다수의 사람들은 단순히 의견을 받는 쪽에 불과하다. ②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이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며 또는 불가능하게까지 만드는 조직에 놓여 있다. ③ 의견이나 행동으로의 실현은 여러 가지의 저항으로 인해 통제되고 있다. ④ 대중은 제도화된 권위로부터의 자율성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고 있다. 밀스는 어떠한 양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지배적인가에 따라 공중과 대중을 구별하고, 대중사회에서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는 제도화된 미디어이며, 대중은 주어진 매스미디어의 내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라 하였다. 그런데 매스미디어는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


밀스에 의하면 당시
(1950년대) 미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는 도덕, 덕성과 상관없는 것이며 그들의 능력은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과 결부되어 있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권력 수단이나 부의 원천, 명성의 기구에 의해서 선발되고 형성된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공중(public - 요새 말로 하자면 '참여 민주주의')의 토론을 정책 결정자의 의사와 결부시켜 주고 있는 자발적 결사체의 다원적 존재에 의해서 견제를 받으면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류사상 일찌기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령관이며 미국의 무책임한 제도의 조직 내부에서 성공을 차지한 인물들이다. (낡은 이야기라고 하기엔 지금 읽어봐도 너무나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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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 로버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책세상(1998년)



내가 어렸을 때 영화는 흑백영화였고, FBI요원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임을 받았으며 좋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그리는 FBI요원은 대부분 악당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대도시의 경찰 지휘본부에 모습을 드러낼 때의 그는 좀더 높은 차원의 내밀한 수사를 한다는 이유로 명백한 정의를 왜곡시키는 방해꾼으로 간주된다.


경찰 역시 악역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매우 노골적인 영화 람보 시리즈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람보 영화인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를 보면, 베트남 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 존 람보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을 걷다가 지방 보안관 브라이언 데니히에게 체포된다. 영화 속의 모든 것이 람보 편을 들고 있으며 보안관은 편협하고 어리석은 가학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보안관이 옳았던 것이 아닌가! 보안관은 람보가 골칫거리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영화가 끝나기 전에 보안관 조수들 중 여러 명이 죽게 되고 그 마을은 도살장이 되어버린다.


람보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는 더욱 노골적이다. 람보는 베트남에서 포로를 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CIA에게 차출되어 출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임무의 실제 목적은 람보가 실패하는 데 있었기에 생존하는 포로들에 대한 소문은 전혀 들을 수가 없다. 온갖 난관을 이기고 람보가 마침내 포로 몇 명을 찾아내어 그들을 탈출시키려고 할 때 CIA요원들은 그들을 내버려두라고 명령한다. 이 영화에서 실질적인 적은 람보를 죽이려는 북쪽 베트남인이 아니라 바로 CIA 요원이다.


(중략)


70년대에 국가의 권위를 불신했던 것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한 시민군인 극우파들이다. 그러나 정당한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불신은 정치적인 노선과 관계없이 대중문화의 한 가지 특징이었다. 내가 언급한 영화와 그 외에 대중들에게 친숙한 대중문화에서도 권위에 대한 불신이 하나의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다.


<로보트 폴 볼프 지음, 임홍순 옮김, 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1998년판 서문, 14-17쪽>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이 글을 모 잡지에 발표하는 글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원제명이 "In Defense of Anarchism"이란 것을 생각해볼 때 볼프의 서문은 책의 본문에서 나올 이야기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준다. 이때 볼프가 말하는 '좌익'이란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부인하기 보다는 자본주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체제로 연착륙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포함한 말일 것이다. 최소한 미국의 사례에 비춰보았을 때 국가는 정치적 좌파들에 의해 공격받기 보다는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주의 주도 오클라호마시티 중심가에 있는 알프레드 머라 빌딩에서 일어났던 폭탄 테러 사건처럼 극우파에 의한 것이다. 당시 범인으로 잡힌 티모시 맥베이는 연방정부에 반대하는 극우파 단체 출신이었다.


사람들은 1990년대 초반의 동구에서 발생한 현실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을 흔히들 좌파의 패배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자본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힌 단견이다. 실제로 좌파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국가에서 승리했다. 확실히 초창기의 야만적 체제였던 자본주의 체제를 국가의 경제체제로 채택한 국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강한 선진국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점에만 주목하여 보자면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를 압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영국만 하더라도 모든 의료체계를 사회가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고, 그외에 우리가 선진국이라 생각하는 거의 대부분의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과거 사회주의가 처음 태동할 당시의 주장들을 '사회복지 시스템'이란 이름으로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국가단위의 사회주의는 패배한 것으로 보이나 정신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애초에 소망했던 대부분을 획득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주의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하고 있다. 문제는 야만적 자본주의를 대상으로 투쟁했던 혁명적 사회주의가 그 이후의 사회주의로, 새로운 세상으로 전진해나갈 수 있는 정신적 동력과 대안을 마련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비단 사회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모든 정치 이념이 봉착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서문, 본문, 해설, 찾아보기'의 형태로 되어있지만 전체 페이지가 200쪽이 안 되는 얇은 책이다. 한 권의 작은 논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얄팍한 본문에도 불구하고 옮긴이인 임홍순 선생의 해설이 40쪽 정도 할애되어 별도로 따라 붙는다. 200쪽이 안되는 책에 40여쪽의 해설이 붙는다는 것은 이 책이 읽어내기에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볼프의 이 책이 읽기 어렵고, 난해한 개념들로 가득하다는 뜻은 아니다. 임홍순 선생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이해되지 못하고, 극좌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편견으로 규정된 "무정부주의"를 "아나키즘"으로 제대로 이해받도록 하고 싶다는 뜻에서 해설을 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볼프의 저술이 다루고 있는 부분을 잘 요약하여 해설해주고 있으므로 볼프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 다소 어렵다면 해설을 참고하는 것도 이 책을 이해하는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이래 "아나키즘"은 하나의 '이상주의'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물론 이 글을 적고 있는 나 역시도 실제 정치적 현실로서의 아나키즘을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다. 그러나 1880년대 이래 "8시간 노동제"가 환상에 사로잡힌 일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치부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8시간 노동제는 결코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아나키즘"에 대해 일종의 도덕적, 정치적 근본주의(fundamentalism)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평생 '전분'만을 섭취하며 살다가 세상을 등진 것처럼(헬렌 니어링은 소로우가 전분만 섭취하지 않고, 다른 과일이나 곡물도 섭취했더라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때로 아나키즘은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들에 이미 상당수 녹아들어 있다.


소로우가 그러했던 것처럼 마크 트웨인이 국가를 상대로 벌였던 전쟁에 반대하는 행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행위들 모두 직접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나키즘"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환경적인 분야에서 이런 아나키즘의 영향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우리는 "아나키즘"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된 사회체제에 반대하는 극렬 테러리스트들의 폭탄 세례를 자동연상하지만, 그런 식으로 치자면 "자본주의"는 "아나키즘"이 사제폭발물을 만들 때 공장에서 수없이 많은 아동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살해했다는 오명을 오늘날까지 뒤집어 써야 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18세기, 19세기의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달라진 것 이상 오늘날의 "아나키즘"은 환경분야, 정치분야, 철학적인 분야에서 각기 다른 형태를 띄고 있다.


볼프는 이 책에서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국가의 본질을 가장 강력한 통치권력으로 규정하고, 국가 권력에 의한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곧 권력의 문제임을 지적한다. 문제는 국가의 형태가 민주공화정제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이런 지배와 복종의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다는 측면에서는 전제왕정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국가를 문제삼는 것은 이렇듯 최고의 권력을 갖는 국가 권위가 정당성을 지녔는가 하는 것이다. 이때 어떤 형태의 국가도 존재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지니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볼프 역시 어떤 국가의 권위도 정당화될 수 없고,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적 신념은 아나키즘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문제는 논리 이전에 현실적으로 이미 최고의 권력으로 존재하는 국가의 권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볼프는 그 문제의 핵심으로 국가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도덕적 의무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한 개인이 갖는 최고의 의무는 '자율'에 대한 의무이며, '자율'이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스스로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시시각각으로 자율과 복종은 충돌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짧은 독후감으로 그 모든 걸 정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인 볼프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볼프의 이런 견해는 때때로 국가의 권위를 도덕적 권위와 동일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작은 일상에도 국가의 권위는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는 영원히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잠시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들 모두는 크든 작든 자율적인 개인이란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아나키스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 책이 쉽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은 분명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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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치의 유혹, 담배 - 골초가 골초들에게 보내는 금연메시지 71
코너 굿맨 지음, 김현후 옮김 / 나무와숲 / 2003년 1월



이 책의 부제는 "골초가 골초들에게 보내는 금연메시지 71"인데 그보다는 "담배에 대한 71가지 질문과 답변"이라고 다는 편이 나았을 법하단 생각이다. 마치 "스무 고개"를 통해 하나의 사물에 접근해가는 우리네 문답놀이처럼 아일랜드 출신의 저널리스트 코너 굿맨은 담배에 대한 71가지 질문과 답변을 통해 담배의 해악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책의 분량 자체도 많지 않고, 활자도 큼지막한 데다가 판형도 작아 전형적인 핸드북 스타일이다. 이 책의 장점은 아마도 금연을 결심한 이가 흡연의 유혹에 시달릴 때마다 급하게 책의 어느 부분이라도 펼쳐 읽으며 흡연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자는 취지인지도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취지가 성공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인 코너 굿맨조차 여전히 골초라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은 흡연자로서 나는 왜 흡연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가를 말하는 변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1,2장은 흡연자들의 성향 문제부터 시작해서 금연제로 시판되고 있는 물품들을 두루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아일랜드 출신 아니랄까봐 이 책의 저자는 최고의 독설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와 버나드 쇼(Bernard George Shaw)의 독설을 흉내낸다.

물론 핵심적인 내용은 담배를 끊으라는 말이긴 하지만, 마치 금연을 결심했지만 흡연의 유혹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용용 죽겠지"하며 놀리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당신이 금연을 결심하면 그 순간부터 당신은 성격이 파탄난 사람처럼 스스로는 물론 주변 사람들을 엄청난 괴로움 속에 스스로를 빠뜨리게 된다는 투이다. 그런 괴로움을 피하고자 저타르, 저니코틴 담배를 선택한다면? 그런다고 당신의 흡연량이 줄어드는 건 아니야. 고건 몰랐지 하며 다시 이죽대기 시작한다. 저타르 담배, 즉 라이트 담배는 흡연량을 늘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니코틴과 타르 흡입량이 줄어드는 건 아니란다. 그는 줄곧 이런 투이고, 그것이 현실적인 금연 욕구 유발엔 별도움이 안 되겠지만 이 책이 재미임에는 틀림없다.

1,2장이 그런 글이라면 3장과 4장 흡연자들이 현실적으로 금연을 결심하려 드는 이유 두 가지를 말한다. 그 중 하나는 당연히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이야기이다. 그에 따르면 하루 한갑 흡연의 위험도는 6.9로 러시안 룰렛 한게임 7.2보다 약간 덜 위험하고 보험 가입도 어려운 암벽등반 1회의 위험도인 4.2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아마 언젠가는 보험회사가 흡연자들을 상대로는 보험가입을 회피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간접 흡연의 위험으로 인해 점점 더 흡연자들이 사회의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받는 현실이다. 그는 두어 세대만 지나고 나면 흡연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너스레를 떤다. 과연? 그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담배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현실 상황 때문이다.

5장과 6장에 이르면 그 정체가 등장한다. 담배 권하는 회사들 즉, 빅 토바코들이다. "필립 모리스,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 알 제이 레이놀즈, 재팬 토바코 인터내셔널" 등이 그들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담배의 원산지는 신대륙 그중에서도 미국이다. 미국의 인디언들이 친구를 환영하는 뜻에서 권한 담배가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담배는 미국 최대의 흥행 상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저자는 주로 이런 담배회사들의 마케팅 전략과 은밀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드는 광고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진다. 흡연은 세련된 성인의 습관이자 여성에게는 커리어 우먼의 자부심을 선사한다. 이건 남성을 남성답게, 여성을 여성답게 한다는 담배회사들의 광고 전략이기도 하다.

코너 굿맨의 실질적인 이야기는 1장에서 10장까지이고, 뒤이어 11장과 부록은 담배라는 사물의 여러 모습들과 흡연가들의 이야기들을 다룬다. 앞서 결론삼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이 책에서 지적하고 싶어 하는 흡연의 최대 원흉은 흡연자들 자신은 아니다. 저자는 주로 다국적 석유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세계 담배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빅 토바코를 그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3.3인치에 불과한 담배 한 개비에 무려 600여종의 화학 물질을 담고 있으며, 흡연자들을 흡연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온갖 장치들을 담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세계 제1의 담배회사가 빅 토바코들 가운데 하나일까? 물론 전체 시장 점유율만 놓고 따지자면 "빅 토바코"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일회사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장점유율도 가장 높은 회사는 사실 이들 빅토바코가 아니라 중국국영담배회사라는 사실이다. 세계 제일의 담배회사가 중국국영담배회사로 전세계 담배 시장 점유율의 32.7%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가가 흡연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근대 이후 국가는 성매매와 담배를 함께 조장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이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겠다), 담배가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국가전매 상품이었으며, 국가가 군대를 통해 실제로 흡연을 권장해 온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즉, 역사적으로도 흡연의 위험은 담배회사만의 책임이 아니란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국가는 담뱃값을 올리네 어쩌네 하며 호들갑을 떤다. 이 책에는 그런 사실들은 빠져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 담배와 관련해 앞으로 네 권의 책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이 방면의 입문서 격인 코너 굿맨의 『3.3인치의 유혹』은 이번 편에 올리고, 좀더 심도 있는 비판을 가하고 있는 타라 파커-포프의 『담배, 돈을 태워라』에 이어, 담배의 문명사라할 수 있는 이언 게이틀리의 『담배와 문명』 그리고 최근 길거리 흡연여성 폭행사건으로 주목받기도 한 서명숙의 『흡연여성잔혹사』가 그것이다. 담배에 관한 책들 가운데 내 나름대로 선정한 재미있고 유익한 읽어볼 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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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 후지메 유키 지음 | 김경자 | 윤경원 옮김 | 삼인(2004)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싼 논쟁과 성의 역사학

- 새로운 혹은 해묵은 논쟁의 관점들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는 부제가 충분히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여성의 신체를 국가가 어떻게 관리(통제)하여 왔는가? 그것은 근대의 틀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통제되고, 억압되어 왔는가를 마르크스적인 관점과 페미니즘의 관점을 이용해 연구고찰한 결과물이다.


후지메 유키는 근대공창제는 군대, 군사주의, 근대국민국가 체제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제도는 군대 위안과 성병 관리를 기축으로 한 국가관리 체계이며, 근대국가 건설, 특히 강력한 군대 건설의 이익과 결합해 탄생한다. 성병 검진을 통해 질병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 여성을 창부로 등록시킨 이 제도의 목적은 성병에서 남성, 특히 장병을 보호하는 것이다. 캐서린H.S.문의 "동맹 속의 섹스"에 드러난 사례(1965년)를 요약해보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8군 병사들의 약 84%는 성매매를 경험했으며, 성매매의 주요원인은 동료의 압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은 성매매와 성병을 관리하는 것은 전쟁과 전쟁 준비에 저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관리할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들의 입장에서 살폈을 때 이런 제도는 거리의 여성들에 대한 시민권의 전적인 폐지를 국가가 공인하는 최초의 정책을 의미했다. 전쟁 기간 동안 병사들이 걸리는 가장 많은 질병 1위는 성병이고, 2위가 감기였다고 한다." 근대국민국가의 거의 모든 성매매 관련 법안은 남성고객과 성매매 여성의 처벌에 차등을 두었고, 알선업자와 포주는 체포되지도 않는 법률이었다.


또한 저자는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본국과 식민지에 공창제를 도입하는 과정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산업혁명의 유럽 대륙 및 미국으로의 파급, 선진자본주의 각국에 의한 식민지 분할, 상품경제의 침투에 따른 사회변동 등을 배경으로 전통 사회가 해체되고 도시와 해외로 미증유의 인구이동이 발생하고 무산계급 여성들에게 부단히 성매매 여성화의 압력이 가해지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결국 부르주아 사회가 사회제도로서 성매매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버나드 쇼는 성매매를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도록 요구하면서 "실제로 도덕성의 근저에는 경제문제가 있다. 성매매는 여성의 타락이나 남성의 방종이 아니라 여성들의 저임금, 과소평가, 과중 노동으로 야기되는 것이다. 여성들의 비참한 상황이 아주 가난한 여성들에게 이슬처럼 덧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성매매에 매달리도록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 성매매 여성이 인신매매 등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선택으로서의 성매매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후지메 유키는 성매매금지운동에 대해 여성주의 진영이 "여성 전체가 억압당하면서도 특히 노동자계급 여성들이 성매매 여성화되는 강한 압력 속에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성매매 여성의 오명을 쓴 동성(同性)이며 함께 연대해서 싸워야 할 동등한 자매"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폐창운동의 헤게모니를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이 잡고, 공창제(성매매) 폐지로 나아가는 것은 "해방을 지향한 것이 억압을 입법화"하는 것이며, "당연히 성매매 여성들과 연대해야 할 이들이 성매매 여성을 폭력에 강제된 희생자, 저능이기 때문에 타락한 자로 보고 구제, 교화, 배척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을 경계하도록 요구한다. 성매매 여성을 피해여성으로만 규정하는 것을 "계급을 뛰어넘어 자매로 이어줄 끈"을 끊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관점은 "우리는 왜 성매매를 반대해야 하는가"를 쓴 원미혜 선생의 "나는 성을 팔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 제기되는 '왜 굳이 성을 파는가?'라는 질문과 성을 팔고 있는 세계에서의 '왜 팔면 안되는가?'의 반문 사이에서 만들어진 좁고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는 듯했다. 어느 세계에서도 시원스런 답을 찾을 수 없었다"며 반복되고 있다.


근대일본의 사례를 중심으로 구미국가들의 사례들과 비교하며 성과 생식의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여러가지 점에서 논쟁적일 수 있다. 첫째는 그것이 일본의 사례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논쟁적이다.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는 2005년 1월 5일. 올해 들어 첫 수요집회가 열렸다는 사실은 아직도 역사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한일 양국의 문제가 어째서 현재진행형의 논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차원에서 저자인 후지메 유키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1990년대에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 전개한 저의를 요구하는 운동은, 일본의 연구자들에게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관점을 결여한 '일본 여성사'가 얼마나 일면적이며 오만한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져있는가 하는 점을 충격적으로 깨닫게 해주었다"고 고백한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본군 '노예'제가, 1930년대에 시작된 전쟁에서 돌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근대의 군국주의.식민지주의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전개된 국가폭력 제도, 즉 공창제가 가장 흉폭한 단계로 발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고 말한다.


둘째로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은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계급적인 관점으로,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의 몸과 근대국민국가 사이의 관계를 공창제, 낙태죄 체제, 산아조절 문제를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계급적 관점과 여성주의적 관점을 두루 이용하고 있는데,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은 주로 계급적 관점을 동원해 여성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는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이다. 고백하건대 나자신은 비록 여성주의적 자세 일부에 대해 비판적이긴 하지만, 후지메 유키가 다루고 있는 문제들 - 공창제, 낙태를 포함한 산아조절 문제 등 - 은 계급적 관점만으로는 해석하기 힘든, 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란 지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지메 유키의 비판에 대해 대체로 동감하면서도 방법론적으로만 여성주의적 관점을 차용한 것은 아닌지, 그 지향점을 지나치게 계급적 관점에만 치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여성주의적 관점은 방법론적인 부분에서만 차용하고, 그 지향점에선 소외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부분은 논쟁으로 남을 만하다고 느꼈다.


이와 같은 부분은 제1차 페미니즘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구미 사회에서 백인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교육의 확대, 취업기회의 확대, 민법 개정,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 같은 여성의 시민적 권리를 추구하며 국제적으로 폭넓게 전개"된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지만, "제1차 페미니즘에서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도전한 것은 소수파"였으며, "여성을 존경할 만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으로 이원화한 점, 근본적으로 이성애 중심이었음을 지적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는데, 이런 부분은 긍정할 수 있었다. 제2차 페미니즘은 성과 생식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제안했는데, 페미니즘이 드디어 권력의 문제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 제2차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성과 생식의 문제를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 정치학의 문제로 삼아 "개인적인 것은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이라는 슬로건 아래 그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던 남녀관계, 성애, 출산, 육아, 산아조절 등의 문제에 정치성을 부여한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였다. 제2차 페미니즘은 선진자본주의의 국가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중산층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비백인 여성과 제3세계 여성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2차 페미니즘은 백인중산층의 시야와 동기에 규정되기 쉬운 점을 들어  "제국의 페미니즘"으로 비판한다.


흑인해방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싸운 여성들은 여성 억압이 민족(인종) 억압과 계급 지배와 일체를 이루며 여성 사이에는 계급과 인종(민족)에 근거한 차이와 권력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지배집단의 여성(비록, 그 자신이 페미니스트라 할지라도)이 획득한 것은 피지배집단 여성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비판이다.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이 어려운 까닭은 이해가 쉽다, 어렵다는 차원의 어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최근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우리 사회의 여러 층위들이 성매매특별법과 성매매여성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의들, 논쟁들, 시위를 어느 한 가지 관점에서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성매매특별법 시행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언어가 사람을 규정한다는 명제가 일상사에서 이보다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드물다고 생각될만큼 성을 사고 파는 행위를 규정하는 단어들은 "윤락, 매춘, 매매춘, 성매매, 성 노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과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까지 접근해 들어가면 과연 성을 사고 팔 수 있는 것인가?란 질문으로부터, 성을 사고 파는 일은 올바른가? 이것을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와 같은 질문들, 성매매에서의 자발성이란 인정할 수 있는가? 와 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심각한 선택과 판단을 내리도록 강요한다. 마치 실제 성매매가 일어나는 집창촌의 좁디 좁은 골목길과 미로처럼 얽힌 방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름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현재까지 성매매특별법과 성매매 혹은 성노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

는데, 아직까지도 그 미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이 책은 나에게 해답을 선사하는 책이 아니라 보다 많은 고민 속에 처박아 버린 꼴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느낀 한 가지는 저자 "후지메 유키"라면 현재 우리 사회의 성매매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 어떤 선입견도 갖지 말고,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 그들 스스로가 그들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해 소외시키고, 타자화하지 말고, 그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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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동맹 속의 섹스(Sex among allies) - 캐서린 H.S. 문 | 이정주 옮김 | 삼인(2002)


대부분의 우리 역사를 통해 '조국'은 나를 노예처럼 다루어 왔다. 조국은 내가 교육을 받거나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게 해 왔다. '우리' 조국이란 만약 내가 외국인과 결혼한다면 더 이상 내 조국이 아니다. '우리' 조국은 스스로 나를 보호하는 수단마저 부정하며 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내년 거액의 돈을 남에게 지불하도록 강요한다. 그러고서도 나를 보호할 수가 없어서 ....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나를 또는 '우리' 조국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당신은 내가 공유할 수 없는 성적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내가 공유해 오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결코 공유하지 않을 이익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음을 진지하게 또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신은 나의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나 자신이나 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 여성인 내게는 조국이란 없다. 여성으로서는 나는 조국을 원하지도 않는다. 여성으로 내 조국은 전세계이다. - 버지니아 울프, "3기니" <동맹 속의 섹스, 본문 220쪽에서 재인용>

 

마치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연상케 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저 말은 우리 사회에서 혹은 국제 관계(한미동맹) 속에서 여성이 처하고 있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동맹 속의 섹스"는 여성으로 한 개인의 삶이 사회와 국가, 한미 외교정책, 더 나아가 국제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리 매김 되고, 틀지어지는가를 기지촌 여성의 삶이란 하나의 고리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캐서린 H.S.문의 이 책은 미국 클라크 대학 여성학 교수인 "신시아 인로(Cynthia Enloe)"의 연구방법과 주제 의식을 한국의 기지촌으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시아 인로 교수는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클라크 대학에 여성학과를 직접 설립한 인물이다. 그는 국제정치와 군사주의, 군수산업이란 거대 시스템이 여성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 등에 주목해 군사주의와 성별정치학을 연구해왔다. (이 책의 저자 캐서린 H.S.문은 신시아 인로가 자신의 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학자로 인정하는 이이며, 신시아 인로는 이 책의 발문을 쓴 권인숙의 논문 지도 교수였다.)

 

"일상"의 개념은 특히 여성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간으로 재해석되었다. 의미 있는 시간으로 역사가 주목하는 시간이 권력을 장악한 남성들의 시간이었던 데 반해서 일상은 여성의 시간으로 이는 "소외"와 의미의 궤를 같이한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시간으로서의 일상은 바로 여성의 시간이자, 동시에 의미 없이 소모당해야 하는 여성의 감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는 소외된 시간으로서의 일상이 정치적 의미를 지닌 시간으로 부활하자 이런 일상의 정치사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여성주의의 명제가 되었다. 신시아 인로의 연구는 이로부터 더 나아가 "국제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라는 명제까지 나아간 것이고, 캐서린 H.S.문은 바로 그 명제를 한국의 기지촌 연구로 증명해 보인다.

 

불과 10여년 전만하더라도 한국의 가장 진보적이라는 학자, 운동가들 가운데 누구도 기지촌 여성의 문제를 사회 문제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일 자체가 금기시되어 왔다. 이는 여성의 몸에 관한 것, 특히 성행위에 대한 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었으며, 이런 지극히 사적, 개인적인 문제가  짙은 색 정장을 입은 남성 엘리트들의 국제정치나, 외교정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런 여성문제(성문제)에 대한 재인식은 때로 우리 사회에서 '윤금이 씨 피살사건'과 같이 끔찍한 형태로 부각되면서 국내 문제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외부의 문제, 외국, 외국인, 외국 주둔군의 문제로 그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진보는 종종 민족주의와 혼돈되어 나타났는데, 이런 인식이 기지촌 여성의 문제, 성매매 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동맹 속의 섹스"는 2002년 6월 15일자 초판이고, 내가 이 책을 구한 것도 역시 이 무렵의 일이었다. 거의 2년여 동안 나는 이 책을 서재에 두고 묻혀만 두고 있었는데, 최근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책을 읽기고 결심했다. 첫째 이유는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이 법안을 어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고, 둘째 이유는 역시 첫째 이유와 이어진 것인데, 그런 고민 속에서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을 읽고 새삼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동맹 속의 섹스"가 지역적으로는 한국과 미국을, 국제관계 속에서  해석하고 연구한 책이라면, "성의 역사학"은 지역적으로는 일본의 문제를, 서구 제국들의 근대화 경험 속에서의 집창촌 문제와 낙태 문제를 국가주의와 근대를 고민하며 다루고 있는 책이다. 두 책의 공통점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의 여러 형태를 고민하고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동맹 속의 섹스"는 머리말과 맺음말을 제외하고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사자라 할 수 있는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과 그 군속들을 포함한 다수의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있는 연구논문이다. 캐서린 H.S. 문은 기지촌 여성들을 "도마 위의 고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21세기에 시행된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싼 여러 의견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을 둘러싼 논의들이 서구에서의 근대화 이후 본격적인 직업 성매매 여성이 출현한 이래 논의되었던 담론 및 주장들과 지독하게 일치한다.

 

기지촌 성매매 여성을 바라보는 주요 시각들은 단순명쾌한 이분법 혹은 불가항력적인 현상으로 파악하기 일쑤였다. 이는 부르주아 사회가 필연적으로 사회제도로서의 성매매를 동반하는 현실을 부인하거나 묵인하는 자세에서 비롯되며, 성매매를 한 개인 - 남성의 성적 방종이나 여성의 타락에 기인하는 - 적 책임으로 전가시킨다. 성매매 여성은 종종 윤리적으로 타락한 여성이거나 육체적 쾌락을 바라는 수지 웡(Suzy Wong)으로 묘사되거나 인식된다. 즉, 과거에나 현재에나 성매매 여성은 여전히 여성들의 저임금, 과소평가, 과중한 노동으로 야기되는 것임에도 이런 제반 환경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자발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거의 모든 매춘 여성들이 기지촌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빈곤, 낮은 사회적 지위, 신체적, 성적, 감정적 학대가 얽힌 생활을 경험했다. 그들은 이미 '타락한 여성'이었다. 처녀성도 잃어버리고 가족과의 연계도 거의 끊어지고 교육도 많이 받지 못한 이 여성들은 종종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털어놓는다. 그들은 이미 "도마 위의 고기"였다. 김연자 씨는 1950년대 후반 다른 여성들과 달리 고등학교까지 마쳤는데, 그녀는 자신이 기지촌 세계로 들어온 이유로 11살 때 사촌에게 강간당했던 일을 종종 이야기한다. 강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일 어머니가 집에 있어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었더라면 자신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까닭에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행상일 을 해야만 했다. <본문 48쪽>

 

다른 문제는 이것을 '필요악'으로 간주하는 태도이다.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부 여성들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냔 의식이다. 저자는 이런 기지촌 여성들이 어째서 오랫동안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추방되었는가에 대해 다루며 "기지촌 여성들은 파괴, 가난, 전쟁의 살육, 전쟁으로 인한 가족과의 분리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상징"이었으며, "남북한의 지리적. 정치적 분단과 남한 군대의 불안, 그리고 미국에 대한 끊임없는 종속의 살아있는 증언"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즉, 이런 굴욕은 형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아우로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몫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한국인의 눈에, 매춘 여성은 두 가지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 기능이란 한국사회에 끼칠 외국의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들을 견제하고, '존중받을 만한' 소녀와 여성들이 미군에 의해 매춘과 강간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본문 69쪽 - 70쪽>

 

여기에는 진보를 가장한 민족주의 담론들도 한 몫하고 있다. 논개는 조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순결과 삶을 희생한 여인으로 칭송받는다. 이런 담론들은 미군 전차에 의해 죽임당한 두 여중생을 순결한 민족의 꽃으로 승화시킨다. 다소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살해당한 윤금이 씨와 두 여중생은 본질적으로 '순결한' 이란 부분 즉, '존중받을 만한' 이란 부분에서 정확하게 갈린다. 대한민국은 기지촌 여성들을 필요악으로 대할 때도 있지만, 이들을 "국가방어와 GNP성장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는데, 1973년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은 도쿄를 방문했을 때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 만하다"고 하여 한일 양국의 여성 단체들과 언론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베트남전에서 목숨을 잃은 파월 한국군 장병들이 벌어들인 달러만 경제개발계획의 밑천이 된 것은 아니었다.

 

미8군의 한 정보장교는 군대가 1960년대 남한 GNP의 25%를 차지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1987년 미군은 남한 경제에 10억 달러를 기여했으며, 이것은 전체 GNP의 약 1%에 해당한다. …<중략>… 1978년 한국 경제는 매매춘을 통해 일본인으로부터 700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본문 76쪽 - 77쪽>

 

저자는 이와 더불어 기지촌 여성 박 양의 사례를 제시한다. 박 양은 기지촌 클럽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인에게 성을 팔았는데, 남자 형제들의 미래를 위해 미국인에게 성을 팔기로 선택한 경우이다. 그 이유는 본인이 한국인 남성에게 성을 팔 경우 언젠가 남자 형제들의 앞길을 막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들 자신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왔음에도 1988년 말지 보도에 따르면 한 명의 전직(기지촌) 성매매 여성은 등에 업힌 이민으로 평균 15명의 친척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며, 그럴 수 없는 경우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부친다고 보도했다.

 

캐서린 H.S. 문은 한국의 경우는 여성에 대한 외국의 통제와 지배가 가변적이며, 국가간 관계와 여성의 억압 사이의 마르크스주의적 상관관계가 이런 가변성을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해석하면서, 사회적으로 아무리 박탈당한 위치에 놓인 여성들일지라도 세계정치학의 역할자로 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저자는 이 부분을 제일 강조하고 있음에도, 이 부분이 두드러지게 느껴지진 않았다는 사실이 약간 아이러니지만) 하고, 국가간의 관계의 역동성과 여성들의 삶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위해 강대국과 군대, 자본주의적 여러 이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국가와 비정부 엘리트들은 소위 '국가 이해'를 추구하기 위해 종종 다른 계급과 집단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 나는 이 책을 읽었던 두 가지 이유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성매매특별법은 그 법안의 존폐 유무를 논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한다. 성매매특별법은 그간 분명히 우리 사회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처럼 행동해왔던 "성매매" 문제를 최초로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내가 성과 관련한 책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성매매특별법 자체에 주목하기 때문이기 보다는 우리 사회 속에서 성매매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복잡하지만 놀랄 만큼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맹 속의 섹스"는 기지촌이라는 특수한(미군이 주둔하는 아시아적인) 환경에 주목한 연구로 성매매 일반에 대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성매매 문제를 국제관계 속에서 연구하든, 국내적인 문제로 한정하든 그 본질은 주변부화 된 여성들의 문제, 그들을 국가 이해, 국가 안보, 사회를 위한 중요한 자원(사람이 아닌)으로 간주하는 시스템을 해체하는 데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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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독 - 조엘 안드레아스 | 평화네트워크 옮김 | 창해(2003)


"조엘 안드레아스""전쟁중독"은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선동적인 만화책이다. 그가 "한국의 독자들에게"란 글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1992년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걸프전) 직후 당시 미국 언론이 보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정확한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 언론이 보인 태도가 무엇이었기에 한 사람의 만화작가이자, 시민인 "조엘 안드레아스"는 자국 정부와 일부 애국적인 충동에 사로잡힌 시민들에게 불쾌할 수도 있을 이런 만화를 그리게 되었을까?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의 글 "미국을 알아야 평화가 보인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오늘날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개의 키워드 "기독교 원리주의, 군사주의, 미국 우월주의, 미국 예외주의"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종종 한국의 보수 언론들이 말하는, '미국은 평시에는 서로 정파와 정견에 따라 이전투구하지만 전시엔 정당은 물론 언론들까지 일체의 정쟁을 중지하고 하나의 목소리로 통합된다'는 주장들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미국이란 나라는 개국 이래 2004년 오늘까지 잠시의 휴지기를 제외하곤 거의 항상 전쟁 중이었다. '기독교원리주의'가 미국의 연원까지 거슬러 오르는 것이라면 "군사주의"는 미국의 정치, 경제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개념에 속한다. 거기에 기독교원리주의 선민의식과 결부된 미국우월주의와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라는 미국 중심주의는 그들 스스로가 만들고 타국에는 강제하는 국제법과 국제기구조차도 미국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라는 미국 예외주의가 된다.

 

세계 최고의 언론 자유국가로 비춰지는 미국이지만 미국 언론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전쟁이 발발하면 그나마 자신들을 포장해오던 '객관주의'의 외피마저 과감히 벗어던진다. 조엘 안드레아스가 추구한 가장 확실한 목적은 바로 "진실"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간 미국 시민으로 살면서도 "미국의 피비린내 나는 치욕적인 역사에 대해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던, "전쟁에 중독된 미국"이 미국의 보통 사람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미국 이외의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미국을 전쟁중독에 순종적이고 이에 부역하는 인구를 가진 '거대한 하나의 깡패'처럼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미국인들 역시 군사주의에 저항해온 강력한 전통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이런 사실을 공유하는 세계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연대하는 반전평화를 달성하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미국의 진실"을 좀더 많은 미국인들, 세계 시민들에게 알려 미국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반전평화라는 확실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이 지닌 미덕은 일정하게 만화가 지닌 고유의 미덕에서 출발한다. 복잡한 내용을 알기 쉽게 간추리고, 핵심적인 대사와 지문, 그림을 통해 이성과 함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7장의 구성을 갖추고 있으나 이 책의 쪽수는 100쪽이 채 안 되는 얇은 팸플릿 수준의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의 옮긴이 정욱식 선생이 고백하고 있듯 이 책만큼 "미국의 군사주의", 반전평화에 대한 확실한 호소를 담고 있으면서도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구성한 책도 없다.

 

미국이 나쁘다는 건 알겠는데, 왜 그런지 남에게 설명해주기 어려운 분들이 읽는다면 물론 도움이 되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국에도 우리와 똑같이 전쟁에 반대하고, ㅠ.ㅠ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는 걸 느끼고 싶은 분들에겐 이 책이 더욱 좋은 책이 되리라. 미국에 살고 있는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 여러분! 우리는 미국의 군사주의, 패권주의를 혐오하고, 반대하는 것이지, 당신들, 미국에 살고 있는 여러 시민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랍니다. 그 사실은 알아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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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 조숙영 옮김 | 르네상스(2004)



전후 일본인들에게 용기를 준 인물로 최근 영화화된 역도산이 있다고 한다. 정확히 알 수야 없는 일이지만 그런 역할을 한 또 하나의 존재가 있는데 일본 프로야구의 상징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교징(巨人)'이다. 일본 야구팬들의 성향 자체가 '교징'과 '안티교징'으로 상징된다 할 수 있는데, 안티교징의 대표 격인 팀이 한신 타이거즈다. 자이언츠가 도쿄(관동)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일본 만화를 애독한 분들은 잘 알겠지만 타이거즈가 위치한 오사카 등 간사이(관서) 지역 사람들은 독특한 지역색으로 도쿄에는 지고 싶지 않다는 정서가 있다. 타이거즈는 이런 지역 정서를 기반으로 매년 '교징을 누르자'는 타도 교징의 구호를 앞세웠지만 성적은 매번 변변치 않았다. 그런 한신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타격의 신', '일본 야구 사상 최고의 포수', '일본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사'로 꼽혔던 노무라 가쓰야(野村克也) 감독이 영입되면서 우리에게 '히딩크 열풍'이 있었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노무라 열풍'이 불었었다. 변변한 스타가 없는 만년 꼴찌팀들을 강팀으로 변모시키는 그의 독특한 리더십(ID야구, 데이터야구)이 불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일본에 새로운 활력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런 노무라 열풍 뒤엔 아내 사치요(沙知代)가 있었다. 노무라 열풍에 힘입은 탓인지, 사치요 자신의 재능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몇 차례의 방송을 통해 사치요의 거침없는 독설, 명장 노무라 감독을 절절 매게 하는 그녀의 입담은 매사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데 조심스러운 일본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여러 방송사에서 '사치요 모시기'에 나선 것도 그런 사치요의 인기 덕이었다. 그녀는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아이 문제로 상담해온 이에게 "당신이 그렇게 사니까. 아이가 문제아가 되는 거야"라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충격을 주곤 했다. 그런데 노무라 감독은 지난 2001년 12월 아내 사치요 때문에 한신 타이거즈의 감독직을 불명예 퇴임했다. 그의 아내 사치요가 탈세혐의로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사치요는 자신과 남편의 수입을 관리하는 회사를 설립한 뒤 3년간 2억엔의 법인세 및 소득세를 탈세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재기 넘치는 입담과 직설적인 화법, 거침없는 독설로 무장했던 사치요는 자신의 학력을 속였다는 혐의로 방송가에서도 퇴출당하고 만다.

나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를 읽으며 독설(毒舌)의 힘, 미학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를 잠시 궁리해 보았다. 앞서 사치요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독설은 다음 세 가지 덕목에 기댈 때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세 가지 덕목은 "첫째는 진실, 둘째는 애정, 셋째는 풍자"다.

갈레아노는 우루과이 출신의 저널리스트로 1971년 "수탈된 대지(범우사)"로 처음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지난 월드컵 시즌 무렵 발간된 "축구, 그 빛과 그림자(예림기획)"로 잠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상황들을 보여준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1493년 무렵부터 유럽에서 매독이 번지기 시작하고, 이것이 중국에 옮겨진 것은 1505년경의 일이었고, 일본은 1512년, 조선은 1515년경에 유입되어 창병(瘡病)이란 뜻에서 당창(唐瘡)또는 광동창이라 불렀다. 매독이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번지는데 12년, 다시 조선까지 번지는데 2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당시의 세계화는 이렇게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에이즈가 미국 뉴욕에서 처음 발병 사례가 보고된 뒤 국내에서 나타나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새로운 괴질로 등장하고 있는 조류 독감과 사스는 아마 그보다는 훨씬 빨리 전파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책을 읽고 몇몇 지명과 인명을 제외하면 우리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그네들 상황과 우리 상황으로 구분해서 볼 일이 아닌 거다. 세계화는 이라크 전쟁이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갈레아노는 이렇듯 빠른 시간 축을 가지고 움직이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질서를 보다 효과적으로 공격하고, 일반 독자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지닌 해악은 무엇인지 빨리 알려주려는 마음에 이 책을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20년 혹은 30년 전만 하더라도 가난은 불의의 산물이었다. 좌파는 그것을 고발했고, 중도파는 인정했으며, 우파는 아주 드물게 부정했다. 세월은 너무도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 가난은 무능력에 대한 정당한 벌이다. 가난한 자에겐 연민이 일어나지만 더 이상 가난이 의분을 유발하지 않는다. 운명의 손길이나 기회가 오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폭력이 불의의 자식인 것도 아니다. 지배 언어, 그 대량 생산된 이미지와 단아는 거의 언제나 당근과 채찍의 체제를 위해 소임을 다한다."(본문 43쪽) 그래서 이 책의 구성은 학교의 교과서와 흡사한 면모를 보인다. 물론 내용은 절대 고리타분하지 않다. 목차는 교과과정이란 말로 대신하고, 초급과정에서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공포에 관한 강의, 윤리학 세미나'를 진행하고 상급과정에선 '불처벌, 고독의 교육학, 대항학교'를 가르친다. 갈레아노의 이 책이 지닌 힘은 독설의 미학, 그 가운데서도 진실에 기대고 있다. 우선 그는 세계화의 진실을 가르친다.

냉전 종식 이후 몇 년간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무기 판매는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세계 무기 시장은 1996년 총 판매액이 400억 달러에 이르러 8% 성장을 기록했다. 무기 수입국의 선두 주자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총 90억 달러를 퍼부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권 유린 국가의 선두 자리도 고수하고 있다. 1996년 국제사면위원회는 "구금자를 고문하고 학대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계속 받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법원은 최소한 27명에게 120대에서 200대의 태형을 선고했다. 그들 중에는 24명의 필리핀인이 포함되어 있는데 보고서에 따르면 동성애 행위를 문제 삼아 이 같은 처벌을 내렸다. 최소한 69명이 사형을 선고 받아 처형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파드 국왕이 이끄는 정부는 정당과 노조 설립을 계속 금지해왔다. 언론 검열도 지속적으로 매우 삼엄하게 이루어졌다."<본문 132쪽>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 상황은 갈레아노의 말대로 지난 수십 년간 서방 인권 단체의 공격 대상이었다. 한해 평균 60-70명가량이 고문 등에 의한 강압적인 수사 과정을 거쳐 사형당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이슬람 율법에도 존재하지 않는 참수형이다. 여성은 사회 진출은 물론 운전도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선진국들 가운데 누구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지 않는다. 최대의 무기 수입국 가운데 하나이자 중동 지역 최고의 미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여성의 사회 진출이 허용되고 있는 이란의 인권 상황은 늘 도마 위에 오른다. 세계화는 이런 인권문제와 마찬가지로 모든 국가와 민족에게 보편적 선과 부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엔 수많은 욕쟁이 할머니들이 있다. 그들은 식당에서 "술 좀 더 주세요"라고 말하는 손님에게 "니가 갖다 처먹어"라고 말한다. 어지간히 취기가 오른 손님의 주문엔 "술 좀 작작 처먹어"라며 응하지 않기 일쑤다. 손님들은 푸대접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런 욕쟁이 할머니가 있는 가게는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들 욕쟁이 할머니들의 욕설이 상대를 비하하거나 욕보이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장사수완이기 보다는 상대의 건강을 염려하는 가족 같은 느낌을 전하기 때문이다. 갈레아노의 독설엔 애정이 담겨 있다.

자기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면서 희망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많다. 희망이 무슨 지친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세기말, 천년의 끝. 세상도 끝인가? 오염되지 않은 공기가 얼마나 우리에게 남아있는가? 휩쓸려가지 않은 땅과 살아 숨쉬는 물은? 병들지 않은 영혼은 얼마나 남아 있는가? '아프다(enfermo)'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계획이 없는'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갖가지 심한 유행병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병이다. 그러나 또 어떤 누군가는 보고타의 어느 담벼락을 지나다가 이런 글을 남겨 두었다. "더 좋은 날들을 위해 염세주의는 내버려 둡시다."
우리가 희망을 갖는다고 하고 싶을 때, 에스파냐어로는 희망을 품는다고 한다. 아름다운 표현이자, 아름다움 도전이다. 흘러가는 이 시대의 무자비한 바깥 공기를 쐬며 노천에서 얼어죽지 않게 희망을 품는다. <본문 334쪽>


독설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조롱이란 점에서 욕설과 흡사한 면을 지닌다. 어떤 이는 욕설은 "민중의 시(詩)"라고 말한 적도 있지만, 욕설은 직접적인 언술이란 점에서 독설과 분리된다. 독설은 강장에 대한 조롱이자, 풍자이며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선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지만 현실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브라질의 주교 엘데르 카마가 말했다. "그런데 왜 먹을 게 없느냐고 물어보면, 날 빨갱이라고 해요." <본문 326쪽>

해마다 연말이면 시민단체에 후원을, 사회복지를, 자선냄비에 몇 푼의 돈을 집어넣으면서 스스로를 위안한다. 사회에 뭔가 좋은 일을 했다고 위로하면서 이때의 자신은 시혜자의 위치에 올라선다. 지역감정 타파를 주장하면서 철따라 돌아오는 선거에서는 지연, 학연, 혈연에 따라 투표한다. 권력관계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개혁은 위장일 뿐임에도 포장된 개혁의 이면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포기에 이른다. "어쩌다 정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 높은 하늘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체념하는 동안 "여기 지상에서는 불의는 불의인 채 여전히 그대로"이다.

“법이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는 부정부패가 유일한 법이다. 부정부패가 이 나라를 좀먹고 있다. 미덕과 명예와 법은 우리의 삶에서 증발해 버렸다”고 말한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악명 높은 갱단 두목 알 카포네였다. 저널리스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알 카포네가 세상의 도덕을 개탄하는 뒤집혀진 언술,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를 통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 세계화를 극소수의 승자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대다수의 패자들이 벌이는 무자비한 경주에 비유한다. 지난 11월 수능시험에서 많은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떠들썩하다. 방법보단 결과를 앞세우는 교육 환경, 가장 비교육적인 교육이 보란 듯이 행해지는 입시지옥에서 학생들에게 죄의식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갈레아노의 표현을 빌자면 학교가 거꾸로 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거꾸로 된 것이다. 아니면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에서 학교만 뒤집어지길 바라는 게 이상한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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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 김동춘 | 창비(2004)



현재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동춘 교수는 그간 우리 사회의 굵직한 이슈마다 중요한 이론적 잣대를 제공해온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시민단체로 자리 잡은 "참여연대"의 창립(1994)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 창립 등 그는 단순히 학문적 차원이 아닌 행동하는 진보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 왔다. 이 책은 그가 숨 가쁘게 지내온 뒤 찾아온 2003년 연구안식년을 맞이해 미국 UCLA대학의 박사후 연수를 마친 산물로 저술된 것이다.

 

미국이 세계 제1의 강대국이란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물론 미국을 패권국가라고 부르는 인식에는 정치적 좌우를 막론하고 공통된 인식이다. 다만, 미국을 과거 대영제국과 서구 선진국의 식민지 경영을 일컫는 말 “제국”으로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일부 사람들에겐 다른 문제인 듯싶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고 열흘 정도가 지날 무렵 알자지라 방송은 럼스펠드를 인터뷰하며 미국이 “제국 건설(empire building)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자 럼스펠드는 “우리는 제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국적이지 않다. 그리고 과거에도 그런 적이 없다”고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에서 미국에 대한 기본적 오해의 출발은 ‘고립주의’라고 배운 “먼로 독트린”부터라고 생각해왔다. 엄밀히 말해 먼로독트린은 미국의 고립주의가 아니라 유럽에 대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미국에 있음을 주장한 선언이다. 즉, 먼로 독트린은 미국이 국제정치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독점적 권리가 미국에 있음을 유럽에 알린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으로 오해해 왔다.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의 네 가지 주제

김동춘 교수가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될 무렵 그는 미국에 있었다. 그는 TV토론 프로그램의 "한 백인 시청자가 전화를 해서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 자국내 흑인들은 '반역자'라고 공격"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미국의 분위기를 전한다. '자유와 관용의 땅' 이라 생각해온 미국에서 듣는 '반역'이란 언사가 주는 문제의식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김동춘 교수는 국제관계학이나 정치학자가 아닌 사회학자이다. 미국 유학파가 아닌 국내에서 학위를 받은 그가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어 보이는 미국에 대한 연구와 책을 낸 것은 그간 우리 사회에 미국은 전방위적으로 존재해왔지만, 우리 사회에서 바라보는 미국은 친미와 반미라는 두 가지 잣대만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가장 냉정한 현실론자임을 자부하는 이들로부터 미국에 반대하는 이상론자들이 주장하는 양극단의 스펙트럼 사이에 놓인 일반인들을 헤매고 만든다. 이런 극단의 논리 속에서 미국은 점점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 되어 왔다.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은 그런 양극단의 논리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기술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간 김동춘 교수가 보여 온 면모를 살핀다면 이 책에도 그의 관점은 분명히 녹아있고, 그가 지향하는 가치와 세계가 현실론자들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임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저자는 양극단의 논리 속에서 미국의 현실,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세계의 현실, 무엇보다 미국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고민하고 있다. 이 책은 주와 참고문헌을 포함해 모두 368쪽,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제 혹은 목적은 다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첫 번째 주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간 "한국 사회가 생각해 온 미국이란 국가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는 것"이다. 김동춘 교수는 책머리에서 "이 책은 주로 미국의 좋은 점만 알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지만, 미국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과 반감을 갖고 있다가 미국에 직접 가서 보고 겪고 나서는 그 엄청난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기가 질려버리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실체와 문제점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뜻"도 가진다고 밝히고 있다.

 

두 번째는 제목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이 암시하듯, 미국의 시스템 혹은 국가 동력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주제가 미국의 탄생으로부터 팽창, 제국에 이르는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이라면 두 번째 주제에 해당하는 부분은 미국을 기존의 국제정치, 국제역학관계로 바라보는 방식을 배제하고, 사회학적 틀을 이용해 미국 사회에 대한 그간의 연구 성과와 그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경험하고, 미국 현지의 자료들을 직접 접하면서 분석한 결과에 해당한다. 이때 그가 발견한 미국의 주요 동력원은 "전쟁" 혹은 전쟁을 통해 보장받고, 확대될 수 있는 시장이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배경을 찾는다.

 

앞서 말한 “전쟁과 시장”이란 미국의 주요 동력원의 문화적 구성 방식과 역사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세 번째 주제에 해당한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듯, 미국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아니 우리 사회보다도 더 선진화된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미국 사회가 어째서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보수 우익의 메커니즘에 종속되어 있는가? 혹시 "전쟁과 시장"의 맥락 이면에 실재하는 미국의 보수 우익의 메커니즘은 미국 시민들로 하여금 세계 시민이 아닌 제국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강요하거나 이에 자발적으로 동조하도록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미국 사회의 내부를 보다 면밀하게 파고든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국제정치질서 속에서 미국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내부를 사회학적 시각으로 고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자 패권국가로서의 면모를 숨기지 않는 현재 미국과 앞으로의 미래를 예견해 보고, 우리의 선택을 고민하게 만드는 일이다. 과거 또는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측하고, 그 모델을 제공하는 학문의 역할은 사회학의 몫이 아니라 미래학(futurology)의 몫이다. 더구나 현재 유일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역할을 감안할 때 미국의 붕괴 혹은 제국으로서의 미국의 역할이 해체되는 상황을 예견해보는 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넘겨다보는 것처럼 불온 혹은 불경해보이기까지 한다.

 

친미, 반미적 관점을 떠난 냉정한 관찰

오늘날 가장 많은 교포, 이민이 거주하고 있는 것은 물론 가장 많은 유학생들, 가장 많은 박사 학위가 미국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는 미국을 잘 알고 있을까. 김동춘 교수가 고백하고 있듯 미국에 대한 특집, 기획 등을 준비하노라면 뜻밖에 미국에 대한 전문가가 태부족이란 사실을 절감해야 할 때가 있다. 미국 전문가를 자임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과의 현실, 혈맹 관계를 강조하다 보니 우리의 입장 보다는 미국의 시각이 앞서는 이 혹은 논리적 근거보다는 감정적인 부분이 앞서 냉정하게 접근해야 할 부분에 주장이 앞서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미국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친미적 관점, 반미적 관점과도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지난 20세기 미국이 세계 문명을 주도하게 된 것, 그 문명의 혜택을 우리 한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사람들이 누려왔던 현실을 모두 부인하거나 부정해 버리고 출발하는 것도, 미국이 실제 자국의 이익에 충실하여 전쟁을 벌이고, 시장을 개척하는 차원에서 원조했던 사실을 망각하고 이를 마치 구원자의 손길로 인식하는 것도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맞서 유럽을 구원한 것은 사실이고, 한국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함께 알고 있어야 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까닭 가운데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측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미국이 철저한 반파시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은 아니다. 미국은 프랑코의 파시스트 독재를 용인했고, 독일에서 히틀러, 나치의 등장과 집권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다. 당시 월스트리트의 자본가들은 히틀러의 나치당을 지원했고, 헨리 포드는 그들이 반유대적이란 점을 들어 히틀러와 협력했다. 전후 미국은 뉘른베르크와 동경의 전범 재판에서 구파시즘 세력을 선별하여 미국 이주를 허용하고, 트루먼의 냉전 전략은 전세계 특히 한국과 그리스에서 구파시즘 세력을 파트너 삼아 이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김동춘 교수는 "미국 내부의 비판적 지식인들조차 이라크 선제공격이 마치 미국 역사상 최초의 일인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가까운 과거인 1961년 쿠바 피그만 침공 작전, 1983년 레이건 정부 당시 그라나다 침공,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파나마 무력 침공 등 미국은 수많은 전쟁을 선전포고 없이 단지 ‘경찰 행동’ 차원에서 해 왔다. 그라나다 침략의 명분은 그곳에 거주하는 미군이 위협에 처했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라나다의 미군은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었고, 파나마 침공 역시 독재자 “노리에가”의 제거가 명분이었으나 누가 보더라도 파나마 운하에 대한 통제권을 미국이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제공격전략(예방공격)은 냉전이 미국의 공세적 소련 봉쇄 전략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처럼, 냉전 기간 내내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쟁전략이었다.

 

"미국이 전쟁을 먼저 벌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예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에는 오직 의회만이 전쟁을 선포할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1950년 북한의 남침에 맞서 미국이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전화 한 통으로' 개입했고 이는 이런 방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자주 거론된다. 이것은 전쟁이 국민의 동의에 기초하기보다 대통령의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서, 그리고 은밀하게 추진되었다는 뜻일 게다.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한 것만 전쟁이라 한다면 한국전쟁도 미국의 주장했듯이 전쟁이 아니라 '경찰행동'이고, 베트남 전쟁도 전쟁이 아니다." <본문 82쪽>

 

1950년 당시 한국전 파병을 앞두고 미 국회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19세기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85차례나 전세계 각 지역에 파병했고, 전쟁을 벌여왔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를 위한 전쟁

미국의 건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증대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물론 미국 시민들은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느끼는 것 못지않은 자부심을 가질 권리가 있다. 미국은 이런 선조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전세계를 향해 자유와 인권의 수호국을 자부한다. 우리가 미국을 연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자유의 여신상과 세계 최고의 인권국가임을 상기해볼 때 어쩌면 미국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입장이다.

 

미국이 처음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의 이유는 대량살상무기(WMD)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난 걸프전 이래 12년간 미국의 경제봉쇄로 사실상 전쟁 상태에 있던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도, 대량살상무기를 만들 재정도, 대량살상무기를 만들 의지도 없었다. UN조사단 역시 이라크에서 아무런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전쟁의 이유를 다시 이라크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 민주화로 돌렸다. 후세인이 쿠르드 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독가스는 미국제품이었다. 죄 없는 민간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할 무렵 이라크를 방문해 후세인을 격려한 인물이 바로 현재의 국방장관 럼스펠드였다. 이라크에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한 핼리 버튼의 총수가 현재 미국 부통령인 딕 체니였다. 핼리 버튼이 총수로 재직할 당시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가장 많은 무기를 이라크에 수출했다. 미국은 한 때 무자헤딘이라 부르며 무기를 지원한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킨 뒤 자신들이 이슬람의 율법에 갇힌 아프간 여성들을 해방시켰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미국의 인권은 여성에 대해 가장 강력한 이슬람 율법을 강제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있는 이란에서 여성들은 차도르를 쓰기는 하지만 사무실에서 남성들과 함께 근무한다.

 

미국은 냉전 해체 이전까지는 직접적인 무력개입을 자제해왔다. 국제 정세가 미국의 직접 개입을 용인하지 않은 탓에 미국은 현지에 수립한 정권과 CIA의 공작을 통한 '작은 전쟁(저강도 전쟁)' 전략을 구사해 왔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50여만 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 1970년대 후반의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의 민간인 학살, 멀리 갈 것이 아니라 1980년의 광주를 상기했을 때 미국이 주장하는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는 선별된 대상에 의한 것이고, 설령 그것이 세상 더할 것 없는 독재라 하더라도 미국의 이익에 부합된다면 그것이 민주주의였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 역시 미국의 팽창 전략에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중동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예를 보자. 최근 MBC에서 방송한 5부작 다큐멘터리 “중동”에서 네탄야후 전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중동에 평화가 오지 않는 이유를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불법 점령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고, 계속 저항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 지역은 “6일 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 팔레스타인인, 기독교도, 이슬람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서 철수할 것은 요구한 UN결의를 무시한 채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며 유대인 지역을 넓혀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전략은 바로 미국의 전략을 고스란히 추종한 것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란 미국의 원하는 것을 다른 민족이나 국가가 따르는 것이다. 미국의 평화 전략에 따르면 상대에게 보다 빠른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핵을 사용하거나 무차별 융단 폭격을 실시하는 것도 평화를 위한 길이 되고, 이런 전쟁조차 평화를 위한 전쟁이 된다. 그것이 지금까지 미국이 벌이고 치른 전쟁 가운데 ‘평화를 위한 전쟁’ 이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미국 최고의 대박사업은? 전쟁!

미국의 많은 이들이 매달 이라크에서 사용하고 있는 40억 달러면 전세계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에릭 홉스 봄은 "극단의 시대"에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 육군은 5억 1,900만 켤레 이상의 양말과 2억 1,900만 벌 이상의 바지를 주문했고, 독일군은 1943년 한 해만 440만 개의 가위와 620만 개의 군대용 스탬프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전쟁은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고, 애초에 미국은 이라크 전비와 재건 비용을 세계 매장량의 11%를 차지하고 있는 이라크의 석유를 팔아 충당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이 이토록 많은 돈을 이라크에 퍼붓고 있는 이유는 과연 이라크인들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을까. 미국은 어째서 이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서는 것일까. 그것은 미국을 움직이는 엔진이 “전쟁과 시장”이기 때문이다.

 

1993년 소말리아에서 미군 18명이 전사(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하자 미국에는 외국에 미군을 파견하지 말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국익에 결정적이지 않은 전쟁에는 한 명의 미국인도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명분이 인권, 세계 평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도적인 이유만으로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관련된 것이라면 언제라도 무력 개입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이 전쟁을 국가의 성장 동력으로 인식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대박을 터뜨린 전쟁사업은 2차 대전 참전과 전후 복구를 위한 마샬플랜 그리고 냉전전략일 것이다. 2차 대전으로 미국은 세계 총생산의 반을 차지하는 경제적 초강대국이 되었다. 흔히 뉴딜이 미국자본주의를 공황에서 구해냈다고 말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2차대전이 미국 경제를 살렸다. 전쟁은 자본 이득을 증가시켰으며 투자 기회를 확대했다. 고용문제나 경제난이 전쟁으로 한방에 해결됐다. 더구나 자기 영토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니 인명손실을 제외하고는 별로 손해본 것이 없었다. 2차대전 개입 후 미국은 전쟁 호황에 스스로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이 전쟁으로 미국 사람들은 전쟁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아챘다. 더구나 파시즘을 멸망시켰다는 명분도 얻었으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본문 124쪽>
 
이후 미국의 전쟁은 명분은 무엇이 되었든 실제로는 시장개척을 위한 전쟁(프론티어)가 되었고, 고조되는 무력분쟁 위기는 미국의 무기 수출을 위한 좋은 호재였다. 지난 2002년 미국의 무기 판매고는 133억 달러로 전년도 121억 달러에 비해 크게 늘어났고, 2위 국가인 러시아(50억 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 이는 세계 전체 무기 판매고의 45.5%에 해당한다. 그중 86억 달러는 중동 국가들에게, 36억 달러는 미국의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평가받는 중국이 수입했다. 단일 국가 규모로는 중국이 1위, 한국이 2위(19억 달러)이다. 미국이 아시아의 평화체제 구축, 남북 화해 협력 분위기 조성에 적대적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미국의 세계지배전략 - 지배 엘리트 육성

지난 대선 후보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이 인정한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은 건국 과정부터 미국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부 수립과정, 제헌 과정,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국방 등 우리 사회의 어느 한 분야도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대한민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2004년 12월 1일자 프레시안 기사에서 노희찬 의원은 한 달 전 관저로 초청 받아 만난 모 주한유럽대사로부터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라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도 미국으로부터 썩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다. 걸프전이 끝난 이후 현재까지 13년 동안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중동 국가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으며 소련 붕괴 이후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미국은 냉전 종식 이후 현재까지 전세계 35개 국가에 700여 개 이상의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있다. 만약 이것을 로마제국식으로 한정해 말하자면 로마의 시선이 닿는 곳 어디나 로마화가 진행된 것처럼, 미국의 시선이 닿는 곳 어디나, 미국이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제국이 건설된 것이다.

 

미국에 대한 우리들의 짝사랑 이야기는 고종 황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야 하지만, 그 핵심은 광복 직후 단정 수립을 지지했던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 "일본과 달리 미국은 땅이 크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므로 우리의 영토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따라서 우리를 도와줄지언정 침략은 하지 않을 것"과 같다. 그러나 조병옥은 틀렸다. 그가 미국에 유학해 있던 1930년대 이미 미국은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쿠바,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아이티, 니카라과, 필리핀, 파나마 등이 그들의 식민지였다. 미국은 로마 제국과 흡사하면서도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질서를 구축했던 중화 제국과도 흡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단 이들과의 차이는 보다 타산적이고, 냉혹한 실리 계산에 따르되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시스템을 통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통치전략은 군사력을 동원해 이들 나라를 직접통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란 관념을 통한 것이었다. 미국은 직접통치 방식을 대신해 "나라만들기(state-builing)", 즉 법, 제도, 엘리트 이식작업을 통해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통치한다. 그래도 못 미더운 나라들은 미군을 반식민지화한 중국의 상해처럼 치외법권화된 지역에 주둔시키는 방식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나라만들기의 시작은 보통선거를 통한 대표자 선출인데, 미국의 사전정지작업을 통해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세력은 과감히 제거한다. 해방 직후의 남한과 현재 이라크 상황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성립된 신생 정부는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합법성을 인정받게 되고, 그런 뒤 현지의 지배엘리트들 가운데 선발해 미국 유학의 형태로 미국의 대학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며 교육시킨다.

 

이들이 귀국한 뒤엔 미국식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 과거 로마 제국이 그러했듯 점령지역의 세력가들을 포섭하여 그들의 파트너로 육성하는 것이다. 과거 영국이 식민지 경영을 위해 자국의 관리들, 군인, 기업인들을 훈련시켜 보냈다면 미국은 현지 관리, 군인, 기업인을 육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미국식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무장시켜 그들로 하여금 지배엘리트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미국의 대학이 다른 선진국의 대학들보다 우수해서가 아니라 미국에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유학가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제3세계의 군부엘리트들을 그들의 군사학교에서 육성해 왔는데, 앞서 말한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물론 한국의 전두환, 노태우 등도 모두 미국의 군부엘리트 학교 졸업생들이었다.

 

미국을 제국으로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은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방식이 아닌 그 본질로 파악했을 때의 제국주의(imperialism)를 한 국가의 정치, 경제적 지배권을 다른 민족, 국가의 영토로 확대시키려는 국가의 충동이나 정책이라 했을 때 미국의 본질은 제국에 가깝다.

 

우파국제주의자들의 발전전략 "영구전쟁론"

미국에도 내부 비판자들, 시민사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속적으로 제국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는가. 김동춘 교수는 미국이 실질적으로는 이념적으로는 일당독재국가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레이건 집권 8년 동안 미국 정치사회에서 중도좌파는 완전히 제거되고, 중도파가 좌파로 간주되고, 민주당의 정책 역시 지속적으로 우경화되는 정치 지형의 변화가 있었다. 그 결과 "화씨 9/11"의 감독 마이클 무어 같은 이는 민주당을 향해 "위선의 가면을 벗고 차라리 공화당과 합당하라"고 비판한다. 현재 미국을 주도하는 정치세력의 면면을 살펴보면 과거 좌파 국제주의의 정확히 반대 측면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미국의 주류는 우파 국제주의(세계화)에 해당한다. 과거 좌파 국제주의가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다면 그들은 미국의 패권을 지속시키기 위한 일종의 ‘영구전쟁론’을 추진한다. 냉전 시대를 거치며 미국 우파는 유럽과 달리 집요하게 애국주의 담론, 반공 담론의 장에 민주당과 좌파들을 끌어낸다. 그 결과 미국의 정치집단은 스스로 국가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애국게임에 휘말리게 되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과도한 충성심을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 대선에서 부시가 승리했지만 캐리가 당선되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선포하기 직전인 2003년 2월 미국 언론에는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는 부시와 파월, 럼스펠트 등 각료 사진이 크게 실렸다. 부시가 개신교도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교파에 속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공적인 자리인 각료회의 자리에서 다 함께 기도드리는 광경은 자유주의 국가 미국을 연상하는 이들에게는 낯선 모습이다. 미국인들은 유대인들 못지않게 스스로를 신에 의해 선택된 국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지닌 국가라고 생각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나는 신이 우리 미국인들을 만들었으며, 어떤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에게 이처럼 힘을 주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중동에서의 이슬람 근본주의 못지않게 미국의 정치 지형 속에서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 베트남전을 경험하면서 미국의 가톨릭 우익, 유대교 우익과 합세하면서 "도덕적 다수, 기독교 연합" 등 적극적인 정치 세력화에 나섰고, 종교와 정치를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 미국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신이 보기에 합당한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미국 사회를 "기독교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런 현상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워드 진”이나 “노암 촘스키” 같은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미국 사회의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비판적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60년대 미국의 반전운동세대들은 우경화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아카데미 가둬두거나 전문가주의로 퇴보하면서 더 이상의 비판을 멈추고 있다. 어쩌다 나오는 이들의 비판적 발언조차 하워드 진에게 어느 어린 여학생이 "그렇다면 왜 미국을 떠나지 않는가"라며 비판한 것처럼 반애국적인 행위로 단정된다.

 

모든 제국은 팽창한다, 고로 제국은 붕괴한다

우리는 지난 역사 속의 제국들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제국은 팽창한다. 한 번 팽창하기 시작한 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팽창을 멈출 수 없다. 최대한 팽창한 제국은 내부로부터 붕괴한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은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건설한 뒤로부터 몰락하기 시작했고, 중화제국의 최대 판도는 청조 시대의 일이었으나 이후 중국은 급격한 몰락을 경험한다(물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청나라보다도 넓은 판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며 전 세계 가솔린 소비량의 40%를 차지하는 나라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는 세계적으로 두 번의 미국화(Americanised)를 불러왔다. 한 번은 냉전을 통해, 다른 한 번은 세계화를 통한 것이었다. 이제 미국의 패권은 현재 절대적이다 못해 초월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김동춘 교수는 바로 지금이 '제국의 위기' 라고 진단한다. 그 부분을 말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악독한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핵심적인 부분은 미국은 바로 그들이 주장하고 전파한 "인권과 평화, 자유와 민주주의"로 인해 내부로부터 붕괴하게 될 것이란 예측이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적 불평등(세계화 혹은 자유무역)은 국가 단위를 해체하는 듯 보이지만 미국만큼은 철저하게 국가의 경계를 유지한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은 구대륙의 차별받던 시민들을 받아들여 국가의 동력으로 삼은 덕이다. 그러나 미국의 보편주의는 점차 약해지고 있다. 제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엄격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 미국은 자국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입국조차 할 수 없도록 통제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노쇠한 제국이 빠지는 딜레마에 똑같이 빠져들고 있다.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 무기가 공화국 수비대를 한 달도 못되는 기간에 붕괴시킬 수는 있지만 종전 선언 1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라크에서 총성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 이념으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그들이 지닌 돈과 힘에만 의존하는 국제질서는 위험하고, 위태로운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미국은 자본축적의 한계 혹은 자본주의 붕괴 시나리오에 의해 붕괴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붕괴”란 말은 너무 엄청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마치 로마 제국이 게르만 용병대장의 손에 의해 약탈되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붕괴가 이미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왔던 것처럼 미국의 붕괴 역시, 대영제국의 붕괴가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 시절에 시작된 것처럼 그렇게 시작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미국의 붕괴는 당연히 소련의 붕괴가 가져온 충격파보다도 더한 충격을 가져올 것이다.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국방비를 합쳐도 미국보다 적은 현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은 참으로 맥 빠지는 일이며, 보수우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로마 제국의 붕괴가 중세의 어둠을 불러왔다고 믿는 이들에게 미국의 붕괴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예견 또한 가능하겠지만, 대영제국의 붕괴 과정처럼 조용히 올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우리가 미국의 패권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의 붕괴 또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 초강대국, 절대적 패권국가인 미국의 붕괴는 미국이 영원한 패권국가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부질없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로마가 그렇게 붕괴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아쉬운 점 가운데 하나는 이 책이 좀더 일찍 나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 중 상당수는 이미 국내에 출간된 상당수의 미국 비판 서적들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 책에 대한 조선일보의 서평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보수우익이 미국에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전자는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이 가장 최근의 미국 사회를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학적으로 내부를 고찰하고 있다는 장점과 대중적으로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으로 상쇄되고, 후자의 경우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는 아니면 그들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이들에겐 어차피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을 것이란 점에서 상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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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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