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전명 발키리 (Valkyrie)/ 감독 브라이언 싱어/ 출연 톰 크루즈/ 제작 2008 미국, 독일



난제 -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과 사건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재구성하는 일은 화살 하나로 세 개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처럼 어렵다. 역사성과 오락성(흥행성적) 그리고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언젠가 어느 신문 기자던가, 평론가가 영화 <트로이>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썼다가 인터넷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스포일러를 유포했다고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이 일을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무렵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 좌석의 젊은 여성 둘이 나누는 대화를 실제로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기자인지, 평론가인지를 혹독하게 비판했고 그 덕분에 영화 보는 재미가 반감되었다고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을 힐난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대성(大聖) 공자도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는데, 뉘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고전을 읽을 수 있을까. 영화를 통해서이든, 원작을 통해서이든 누구나 그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순간은 있는 법이다. 고전이란 인류의 문화유산이란 점에서는 보배이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수많은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널리 전파된 이야기란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영화화하거나 드라마로 장르 전이(轉移)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이야기 틀을 바꾸긴 매우 어렵다. 고전이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익숙한 이야기 스타일이 대중에게 이미 숱하게 검증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이에 도전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장편영화인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스릴러물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던 신예감독 브라이언 싱어였지만, 이후 <엑스맨> 1편과 2편, 그리고 <수퍼맨 리턴즈>에서는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감독으로 안주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릴 때부터 제2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꿈꿔왔던 브라이언 싱어로서는 선배가 <쉰들러 리스트>로 보여 주었던 길을 따라가고 싶은 의욕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진해서 영화 <발키리>의 감독을 맡았다. 사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매력적인 인물과 유난히 끌리는 사건, 극적인 요소들로 인해 깊이 매료되는 시대가 있는 법이다. 나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억압에 저항했던 숄 남매의 <백장미단>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것과 거의 동시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음모 사건을 접했다.

-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톰 크루즈


결과를 빤히 아는 역사영화(EPIC)를 보는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생전에 모두 42차례의 암살 기도(『독재자들』, 교양인, 2009)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치지도자로서 가장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던 인물은 아마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였으리라 싶은데, 『피델 카스트로 - 마이 라이프』(현대문학, 2008)에 따르면 모두 600여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이 6차례의 암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늑대 무리는 조직적으로 사냥감을 공격하지만 우두머리를 잃으면 사냥을 포기한다고 하는데, 국가조직의 수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암살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정치수단 중 하나다.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 했던 가이 포크스(Guy Fawkes)를 비롯해서 링컨 대통령을 암살했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이라는 리 하비 오스월드(Lee Harvey Oswald),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을 암살한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Sirhan Bishara Sirhan)에 이르기까지 정치인을 겨냥한 암살은 성공유무와 상관없이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이런 사건들이 수많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누군가 한 개인의 죽음이 시대의 향배를 어긋나게 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 감독을 비롯해 수많은 미국인들은 케네디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까닭 역시 그가 범죄와의 전쟁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법무부 장관 출신이었고,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당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던 베트남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개인으로서의 위인(偉人)인지, 아니면 평범한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大衆)인지는 역사학의 오래된 논쟁거리로 남겨두자.

어찌되었든 역사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인류의 생애사 속에 포함되는 실존했던 인물들이 시대를 고민했던 흔적이란 것이고, 두 번째 재미는 과연 나폴레옹이 불면증과 위장장애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역사, 나아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와 같은 역사 속 작은 국면들이 차지하는 결과를 되짚어봄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서양의 역사를 우리 한국의 역사에 대입시켜봄으로써 우리가 처해있는 실제 현실의 문제와 한계 등을 점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영화 <발키리>는 <유주얼 서스펙트>라는 걸출한 스릴러를 연출했던 감독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극적인 요소가 약한 편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점들을 감안해서 본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슈타우펜베르크 vs. 김재규
정치적 수장을 제거하는 암살의 상당 부분은 브루투스와 케사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측근에 의해 실행될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최고 권력자는 항상 삼엄한 경호를 받기 때문에 암살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암살의 성공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암살이 암살만으로 정치적 의도까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면 한 개인에 불과한 정치인의 암살을 통해 정치적 의도까지 관철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던 케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의도는 로마공화정을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그의 죽음은 공화정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겨냥해 민주주의를 회복하려고 했다는 김재규의 의도와 달리 그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는 없었다. 현대적인 국가조직은 ‘관료제’라는 단단한 배후조직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영화 <발키리>에서 암살 음모의 주동자였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정치인들과 군인들의 논의에 답답해했던 이유는 히틀러 암살 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될 최고 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독일 군부의 뇌리에는 쉽게 자리 잡을 수 없는 논의, ‘쿠데타’를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비록 규모나 역사적 의의란 차원에서 여러 가지 차이는 있지만 슈타우펜베르크와 김재규는 상당히 닮은꼴이다. 이 두 사람을 닮은꼴이라 비교한다는 것은 본의든 아니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를 비교하게 된다.

일제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치르며 출발한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은 좌우 갈등, 분단, 부정부패, 경제난 등으로 최악의 위기 속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부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이후 형식상으로는 민주선거를 통해 연속해서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의 최대 업적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수백 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보릿고개’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3선 개헌에 성공한 뒤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쿠데타를 통해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뒤이어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철권으로 억압하는 독재에 염증을 느낀 민중의 저항 속에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총에 살해당한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제정을 대신해 출범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무능과 볼셰비즘의 발흥에 위기를 느낀 독일의 일부 민족주의자들, 군국주의자들과 결합해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을 독일 의회의 주요 정당으로 성장시킨다. 이후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과 독일제국의회 방화사건 등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비견할 만한 ‘비상대권’을 차지하고 독일 내 유일무이한 최고 권력자가 된다. 유신체제가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 헌법 개정에 대한 발언만으로 처벌되었던 것처럼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차지한 독일 역시 나치 체제와 총통에 대한 어떤 비방, 비판도 처벌의 대상이었다.

서민적 독재자와 귀족적 민주주의자

내가 아는 한 독일 역사에서 군부에 의한 쿠데타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퇴한 빌헬름 제정을 물러나게 한 키일 군항의 반란은 있었지만 그것은 쿠데타라기보다는 혁명이었다. 어떤 이는 독일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을 독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그와 정반대의 이유로 독일에선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일컬어 ‘국가가 군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소유한 이상한 체제’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독일은 국가구조 속에 군대의 전통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는 군부가 민간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고려 무신정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군부의 정치화는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일본 군대를 통해 습득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통치자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는 막걸리를 마시는 대통령이다. 민주공화정의 주인이라는 대다수 국민들이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동안에도 대통령은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 마시는 풍경을 즐겨 연출한다. 이런 풍경이 연출되는 까닭은 단순하다. 최고통치자들의 실생활이 서민적이지는 않지만 서민적이라는 인상을 줄수록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그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윤보선이나 장면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이 두 사람과 달리 서민적인 풍모와 출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최고통치자였던 히틀러는 그동안 독일을 지배해왔던 기존의 지배엘리트들과 달리 매우 서민적인 인물이었다.

히틀러 암살음모를 추진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물론 에빈 폰 비츨레벤 장군, 헤닝 폰 트레스코프, 메르츠 폰 크비르하임, 베르너 폰 헤프텐, 파울 폰 하세,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등 히틀러 암살 음모의 주역들 대다수는 중간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들어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독일의 전통적인 귀족(융커)계급 출신이었다. 하사출신이었던 히틀러는 귀족계급이 지배하던 독일군 수뇌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자초한 무능한 무리로 멸시하기 까지 했다. 그가 에르빈 롬멜을 총애했던 까닭 중 하나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이후 권력수반에 앉을 계획이었던 루드비히 베크 전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칼 프리드리히 괴들러(전 라이프치히 시장) 같은 인물들이 히틀러 암살 이후 수립하려 했던 독일은 과거와 같은 지배엘리트들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이들이 처음부터 히틀러의 반대파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들은 히틀러의 지지자들이었고, 그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히틀러에게 등을 돌리게 된 까닭에 대해 영화 <발키리>는 유대인학살 등 인류에 대한 범죄, 역사 앞에 선 인간으로서의 양심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히틀러가 권좌에 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볼셰비즘의 발호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 내 자본가들과 중산층, 영국과 프랑스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진 결과이긴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가 밑바탕이 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사회주의자가 되고, 서구로부터 들어온 기독교식 교육을 받은 피지배계급의 자식들이 청교도적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계급적 뿌리와 이반된 사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처럼 히틀러를 가까이에서 접한 귀족적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를 제거하고자 했고, 그의 통치로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했던 대다수 독일 서민들은 여전히 히틀러를 지지했다.

쿠데타로 나치지배가 종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가들이 가장 즐겨하는 질문이자 가장 꺼리는 질문은 “만약에~”란 것이다. 역사란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사건을 찾아내 인과관계와 그 의미를 찾아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거나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영화 <발키리>로 우리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영화 <발키리>는 역사영화로서는 매우 훌륭한 편이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역사 영화들이 지닌 문제점의 상당수는 역사를 희화화하거나 제멋대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키리>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진지하다(물론 다큐멘터리도 허구이며 창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나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나치체제에 저항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전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이런 의도는 톰 크루즈라는 대중적인 스타에 의해 충분히 담보되었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발키리>의 장점은 이처럼 진지하다는 데 있지만, 동시에 관객들에게 왜 진지해져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역사 속의 사건이 그 자체로 극적인 요소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관객 모두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히틀러 암살이란 대의에 목숨을 거는 요 인물들의 당위적 결의는 영화 내부에 있지 않고, 관객들의 영화 외부에서 배운 역사에서 나온다. 그 결과 논리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영화 서두에 이미 히틀러의 제거를 결심한 사람이었고, 베를린의 히틀러 암살 음모 세력 역시 이미 준비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왜 목숨까지 걸면서 히틀러를 제거하려 하는지에 대해 관객들 보고 스스로 역사에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의 진행상 필요한 등장인물 수가 너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 <발키리>자체가 지닌 극적인 요소에만 천착해버리면 역사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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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아이들Children of Heaven>


감독 / 마지드 마지디
출연 / 알리(아미르 파로크 하쉬마인), 자라(바하레 세디키)

간혹 "세상살이가 다 비슷하다"는 말엔 인생의 고단함을 위무받고자 하는 이의 간절한 소망이 묻어있기 마련이다. 그렇다. 세상살이가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혹시 비디오 가게에 가서 이 비디오 테잎을 발견하고 들었다 났다 하며 그냥 골치 아픈 데 액션 영화나 한 편 때리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지 말고 이 영화를 한 번 보도록 권하고 싶다. 거기엔 아주 먼 곳에 살고 있는 알리와 자라, 오누이가 있고 나와 당신의 어린 시절이 있고, 이제는 운동화가 떨어지기 전에 쓰레기통에 버리는 부유함 속에 잊혀져 버린 우리들이 있다.

알리(아미르 파로크 하쉬마인)는 몸이 아픈 엄마의 심부름으로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금방 수선한 여동생 자라(바하레 세디키)의 신발을 잃어버린다. 집에 새 신발을 살 여유가 없다는 생각과 무서운 아빠에게 혼날 걱정에 알리는 자라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당장 내일 신고 갈 신발이 없는 자라는 눈물을 글썽이는데... 결국 신발 찾기를 포기한 알리는 동생 자라와 한가지 묘안을 떠올린다. 오전반인 자라가 알리의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녀오면 오후반인 알리가 그 신발을 갈아 신고 학교에 가기로 어린 남매 사이의 비밀스러운 협정이 맺어진다. 하지만 그 일은 생각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한편, 자라는 전교생이 모인 학교 운동장에서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다른 소녀를 발견한다. 자라는 오빠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 소녀의 집까지 뒤를 밟지만 그 소녀의 아버지가 앞을 못보는 장애인인 것을 보자 단념하고 돌아선다. 며칠 후, 알리는 3등상에 새 운동화가 상품으로 걸려있는 어린이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것을 알고 대회에 참가한다. 동생에게 꼭 3등상을 받아서 운동화를 선물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나선 마라톤 대회. 오로지 3등상을 위해 안간힘을 다해 달리는 알리. 과연 알리는 3등을 해서 새 운동화를 탈 수 있을까?

사실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개봉되고 비디오 출시된 것은 올해의 일이지만 우리가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놓고 경쟁을 벌였던 영화였다. 국내에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드링 일부 매니아 게층에만 호평을 받고 대중적인 호응은 받지 못한 데 반해서 이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비교적 흥행에도 성공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에 비해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논할 수는 없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의 아름다움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인 <자전거도둑>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실제 영화 속에 보면 알리와 알리의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부유층이 사는 거주지역의 정원사 노릇을 해주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계속 허탕을 치다가 알리의 아버지는 한 집에서 정원사 일을 해주고 거금을 건네 받는다. 그러나 그런 행운도 잠시 알리의 아버지가 모는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고장나 이들은 가로수를 들이받는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 과연 천국일까? 운동화 한 켤레가 없어서 오누이가 번갈아가며 신을 갈아 신어야 하는 가난이 넘쳐나는 이곳이 과연 천국이고 이 아이들은 천국의 행복한 아이들일 수 있을까? 나는 이 영화가 어쩌면 이슬람 선전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리우드 영화들에 나오는 그 괴기스러운 이슬람 전사들(테러리스트)의 모습만 신물나게 보아온 우리들에게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네들 사는 모습 역시 우리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이 영화의 선전효과는 미흡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극장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이 영화를 보았다는 미국인들이 지금은 저 높은 하늘에 신처럼 군림하고 앉아 알리와 자라가 뛰어가던 그 골목길에 거대한 폭탄들을 떨구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오사마 빈 라덴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어쩌면 그는 이미 미국이 마음 먹었을 때 죽었던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오사마 빈 라덴은 죽은 것일까? 노예와 자유민의 차이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그 선택할 권리의 유무에 달려 있다. 미국인들이 수만킬로 떨어진 이국의 아이들에게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게 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미국이 계속 그런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동안엔 절대로 오사마 빈 라덴이 죽엇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 <천국의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정말 저 아이에게 신발 하나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절해진다.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기에 선생님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는 알리의 커다란 눈망울과 오빠를 야단맞게 하고 싶지 않아 불편함을 감수하는 동생 자라. 자신의 신발을 찾았지만 눈먼 맹인의 딸임을 알고 그냥 참는 그 아이 자라의 얼굴을 보면서....

언젠가 그 어느 골목에서 자랐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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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2001)



감독 : 송일곤
출연 : - 혜나(김혜나), 유진(임유진), 옥남(서주희)


- "슬픔과 희망 사이 그곳엔 신비한 힘이 있다." 라는 카피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 영화 <꽃섬>.
단편 영화들로는 이미 유명한 감독인 송일곤의 첫번째 장편 영화이다. 사실 나는 <꽃섬>을 보기 전에 몇 차례 송일곤 감독의 영화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명성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단편 영화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허세 같은 것.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영화는 영화로서의 생명이 절반 이상 뚝 떨어진다는 나의 단견이라면 단견이 그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 속 배우들은 어쩐지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은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나 역을 맡았던 김혜나는 아직 배우는 학생이었고, 두 명의 다른 배우들 역시 영화 연기자라기 보다는 연극으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영화 촬영 방식을 택해서 시나리오를 나누고, 분할하여 촬영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이야기 순서대로 영화를 촬영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같은 장소에서 촬영할 일이 별로 없는 로드 무비의 성격상 그 방법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되었다.

<꽃섬>
이 영화에 대해서 그다지 길게 말할 기분은 아니다.
각기 다른 삶의 고통과 질곡을 안고 있는 세 명의 여인이 그들의 슬픈 감정을 잊기 위해 혹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슬픔을 잊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하는 꽃섬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일들을 이 영화는 때로는 다큐멘터리처럼 때로는 연극 무대를 스케치한 듯 그렇게 주섬주섬 챙겨 보여줄 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칫 지루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빠른 호흡에 익숙해진 탓이다. 일생동안 모든 동물이 하는 호흡의 수가 정해져 있다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렇게 햇 각 동물들의 평균수명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 호흡 수와 심장 박동수가 빠르면 빠를 수록 동작도 빠르고 성격도 급하다고 하는데 그 예를 들어 코끼리와 생쥐의 심장 박동수는 코끼리가 생쥐보다 훨씬 더디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나의 심장이 급격하게 뛰었던 기억은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은이런 영화를 자주 보게 되면 오래 산다인가? 글쎄, 사람에 따라서는 느릿느릿 말하는 사람을 때려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사람들도 있고 보면 반드시 호흡의 빠르고 느림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송일곤 감독은 시종일관 관객들로 하여금 그저 지켜보도록 만든다. 감독은 아마 고집이 무척 센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였다. 관객은 누구나 극중의 어느 한 인물을 골라 자신과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런데 극중 배우 누구하고도 쉽사리 동화될 수 없는 자신을, 감독은 스스로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다고 섣부른 페미니즘 영화처럼 남성을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도록 부추기지도 않는다. 어떤 면에서도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주로 여성이라고 해서 이 영화가 페미니즘적인 영화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나의 생각엔 우리에게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페미니즘 설화. 이어도의 전설이 자꾸만 생각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약 페미니즘이란 사상에도 계급과 동서양을 나누는 어떤 구분이 있다면(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동양의 그것과 서양의 그것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듯하다. 그것은 마치 토종벌들이 꿀을 채집하여 집에 가져갈 때 머리를 집 입구에 받고, 그 안에 채집해온 꿀들을 저장하는 풍경과 서양벌들이 꿀을 채집하여 꿀을 저장할 때 항상 외부 적의 침공에 대비하여 머리를 밖으로 하여 꿀을 저장하는 모습처럼 다른 것이다.

토종꿀벌을 이용한 꿀통 근처에 양봉꿀벌이 나타나면 토종꿀벌들은 서양꿀벌의 습격으로 금새 전멸하게 된다고 한다. 서양의 페미니즘 신화가 아마존의 여전사들로부터 비롯되었다면 동양, 그중에서도 한국의 페미니즘 신화는 어쩌면 이어도 전설에서 발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존의 여전사들은 남자들의 대륙을 공격하고, 그로 인해 아마존의 여왕이 헤라클레스에게 굴복당하고 마는 데 반해서, 우리 이어도 전설의 여자들은 그저 남자가 없는 평화로운 섬으로 존재한다. 적극적인 네거티브가 아니라 떠남으로 해서 혹은 도착함으로 해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이 영화 <꽃섬>을 보며 일부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 <꽃섬>에서는 가장 반항적인 캐릭터인 '혜나'마저도 엄마의 친구가 따라주는 맥주 한 잔을 넙죽 마시고 더이상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묻지 말라는 말에 변변한 말대꾸 없이 물러서고 마는 순둥이이다. 그리고 포구에 드러누워 꺼이꺼이 목놓아 운다. 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았지만 그 누구의 탓도, 책임도 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다거나 자신탓이라고 자책하지도 않는다. 혹은 신에게 갈구하여 얻은 목소리를 잃은 '유진' 정도가 자학하여 스스로 자살하려고 하지만 혜나와 옥남에게 구출된 뒤로는 누구보다도 조용한 사람이 되고만다.


<꽃섬>이 나에게 올해 본 10편의 좋은 영화 안에 들게 된 까닭은 상처입은 사람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에 대한 좋은 해답을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상처입은 사람을 질질 끌고 꽃섬에 갈 의사는 없다. 다만 지켜볼 뿐이다.

때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극도의 무기력함,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죽어가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사랑하는 나머지 상대방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자신감이 배반당하는 순간, 그리고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그 많은 일들에 대해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으로서 느껴야 하는 고통 역시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에 얹어진 돌덩이 같이 무거운 마음 하나 나눠짐으로 해서 함께 함으로 해서 우리는 영화 속의 유진처럼 죽음조차 담담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 <꽃섬> 한 편만으로 송일곤 감독의 미래를 점쳐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의 미래를 기대해볼 뿐이다. 그리고 참고로 알려드리자면 꽃섬은 남해에 실제하는 섬이다.

* 2001년 12월에 썼던 리뷰라 현재 송일곤 감독의 미래와는 상관없는 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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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 선생 Kanzo Sensei, 1998



- 감독 : 이와무라 쇼헤이
- 배우 : 이모토 아키라(간장 선생 아카키)
* 소노코 : 아소 구미코
* 우메모토 : 카라 주로
* 토리우미 : 세라 마사노리
* 피터 : 갬블린 자끄
* 토미코 : 마스자카 게이코


먼저 밝혀둘 것은 이와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는 유일하게 이 한 편을 보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이와무라 쇼헤이란 감독에 대해 나는 신뢰할 수 있는 감독이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으로 '이모토 아키라'라는 배우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데 있다. 이와무라 쇼헤이 감독보다는 오히려 주연배우인 '이모토 아키라'를 보고 싶어서 선택한 영화였다.  

이코토 아키라는 이 영화말고도 국내에서 소개된 영화로 '으랏차차 스모부'라는 영화에서 일본의 국기인 스모를 사랑하는 교수로 나온다. 무엇보다 나는 이 배우의 나레이션을 좋아한다. '으랏차차 스모부'에서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감독인 장 콕토가 스모를 예찬하는 시를 이코토 아키라의 음성으로 낭송해주는 대목이 있는데 나는 이 부분을 몇 차례나 리와인딩해서 듣곤 했을 정도였다. 일본 영화를 볼 때,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보다 일본 영화니까.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단지 일본영화니까 라는 대목에서 몇 발짝 더 나가고 나면 할 말이 없다. 그래, 일본영화니까, 일본인 시각에서 다루는 것은 당연한 거고, 배경이 일본이니까 일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얼마전 한국의 모 에로 배우가 일본에서 포르노 영화에 출연했는데 한복을 입고 나왔다고 떠들석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좀 초연해질 때도 된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 에로 배우가 무슨 국가대표도 아닌데, 한 개인에게 국가가 너무 많은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고 있는 동안엔 우리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군국주의의 망령이 아직도 배회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의 문제에 대해 야단치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우파적 민족주의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신론자와 유일신론자가 서로를 설득하려드는 방식과 마찬가지 방식이기 때문이다.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무리 설득한들 설득될리 없기 때문이다.
 

예를 좀 이상한 것을 들었는데 한일양국의 문제는 오히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의 문제보다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까 한다. 일본의 양심적인 인사들과는 연대하고,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는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서로의 교과서가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결국 일본 정부의 현재 뿌리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 군국주의자들이 군복만 바꿔 입어 생긴 결과이고, 우리 역시 분단 이후 남한 사회 내에서 일본의 잔재를 뿌리 뽑지 못한 채 면면이 계승해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간장 선생은 그저 평범한 의사였다. 때로는 돌팔이의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전쟁과 간염이라는 질병이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탐구해 갔다. 결국 그는 간염을 통해 국민의 생활이 전쟁으로 인해, 국민의 목숨이 일본의 군국주의로 인해 위협받는다는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만약 전쟁 전의 일본의 지식인들과 일반 국민들이 이런 상식, 전쟁과 타민족의 식민 지배를 통해서는 결국 그들도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쳤다면 일본으로서도 우리 민족으로서도 그런 불행한 결과들은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간장 선생이 아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행동하게 되는 계기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역사의 수레바퀴는 늘 피를 묻히며 진행된다.
 

일본의 근대성을 묻는다.

일본은 과연 전근대를 벗어났는가?



거의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러하듯이 일본의 근대성 역시 기형적인 것이다. 최근 일본 파산설의 근저를 파고 들어가보면 결국 우리 못지 않게 일본이란 사회의 전근대성을 발견하게 된다. 정치인은 자신의 지역을 위해 국가 예산을 할당받고자 하고 그 돈으로 도산위기의 지역의 기업을 지원한다. 파산했어야 할 기업은 그렇게 해서 살아남고, 기업은 다시 정치자금을 정치인에게 헌납한다. 일본의 시민들은 풀뿌리 지역자치 운동에만 치중할 뿐. 일본이란 커다란 국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나몰라라 하고, 그럴 힘도 의지도 없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므로 정치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그나마 조직력이 있는 일본의 우파는 숫적으로는 소수이면서도 정치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기형적인 상황들이 반복된다.  

분명 간장선생은 좋은 영화이긴 하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에서 간장 선생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너무 멀고 지난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깨달음이 지나치게 개인적이란데 있다. 일본의 개인주의는 완성되었을지 모른다. 하긴 그것은 오히려 일본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이다. 그러나 간장 선생의 깨달음은 그저 개인의 것일 뿐. 사회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를 보면서 한일양국이 가야할 길이 아직 너무나 멀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와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들을 차례차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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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SF영화와 좀비물, 그리고 epic(서사시)류의 영화들을 특히 좋아하는 편이다. 긴 글 읽기와 긴 글 쓰기를 선호하는 사람답게 영화도 시리즈물로 계속되길 바란다. 세헤라자데(이야기꾼)에게 매료당한 아라비아의 군주(독자)처럼 천일동안 읽어도 읽어도 물리지 않는 네버엔딩스토리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취향이므로 당연히 "스타워즈", "에일리언", "터미네이터",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 같은 영화들은 모두 DVD로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런 영화들은 되도록 극장에서도 보려고 한다. 이번에 개봉된 "T4" 역시 개봉 당일 극장에서 심야영화로 보았다. 영화 감상도 주로 집에서 DVD로 즐기는 것을 선호하는('rewind' 기능 때문에) 나의 영화감상 스타일상 웬만한 영화가 아니면 굳이 극장에서 보려고 하는 편은 아니다. 전작이었던 "T3"가 다음 영화를 위한 징검다리 영화 정도에 머물렀기 때문에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될 수밖에 없는 "T4"에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T4"는 졸작이다.


그저 그런 영화 "피라냐"의 속편 감독으로 데뷔했던 제임스 카메론은 "터미네이터(1984)"를 통해 '테크 느와르'란 평을 받을 만큼 그럴 듯한 영화를 만들어내면서 일약 주목 받는 신예 감독이 되었다. 타임머신을 통한 여행이란 소재는 사실 진부했지만 그는 현대의 인물이 과거나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온 살인마가 구세주의 어머니를 살해하여 미래의 운명에 영향을 주려한다는 이야기 설정으로 본래의 이야기 구조를 뒤틀어 버렸다. 더군다나 미래로부터 온 살인마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었다. 비록 저예산 영화였고, 출연했던 배우들 역시 가능성은 있었지만 여전히 배우로서의 능력을 검증받지 못했던 보디빌더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린다 해밀턴, 마이클 빈 등 풋풋한 신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임스 카메론은 "T2"에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시키는 감독으로서 카메론의 능력은 감탄을 넘어 찬탄의 경지에 이른다. 연기능력이나 대사능력이 부족했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는 기계인간(로못)이라는 설정으로 뻣뻣한 몸동작까지 커버되었고, 예산 부족으로 사이버틱한 장면이나 미래형 최신 병기 등을 사용할 수 없는 조건은 미래로부터 오는 인간은 알몸으로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져올 수 없다는 설정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이런 설정들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높여주었고, 긴박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이와 같은 카메론의 재능은 이제 명실상부한 헐리우드의 유명 감독이 된 이후 제작했던 "T2"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CG기술의 부족을 T1000을 나노머신이 탑재된 액체금속형 로봇이라 설정하여 도리어 강점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T4"가 이전의 "T1"이나 "T2"에 비해 졸작 내지는 범작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약점은 미래로부터 온 살인마 로봇의 추적이 아니라 관객들을 미래로 끌고 가서 이미 과거에 카일 리스(마이클 빈), 사라 코너(사라 해밀턴)의 입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들을 재확인시켜주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T1"에서 미래로부터 온 연인을 믿지 못했던 사라 코너를 설득하기 위해 카일 리스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했다. 사실 이 과정은 이야기 구조상 사라 코너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영화 속 상황 설정을 관객들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과정으로서도 필수적인 요소였다. "T2"에서 이런 역할은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대신 죽은 아버지 카일 리스를 대신해 이야기를 끌어가는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이자 미래가 보내준 새로운 로봇 아버지 'T800(아놀드 슈왈츠제네거)'에 의해 수행된다. 그런 의미에서 "T1"과 "T2"는 미래 저항군의 리더가 될 존 코너의 성장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배경이 미래로 전환된 "T4"에서 감독은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오래된 미래'이자 이미 과거가 된 이야기들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T4"의 감독은 마치 그런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영화를 진행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크리스찬 베일이 분한 존 코너이지만 그는 "T4"에서도 여전히 배트맨처럼 연기할 뿐이다. 과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존 코너의 모습은 그처럼 결단력 있고, 단호하며 전투의 귀재인 저항군의 리더였을까? "T2"에서 에드워드 펄롱이 연기한 존 코너, "T3"에서 닉 스탈이 연기한 존 코너가 성장했다면 "T4"에서의 존 코너를 상상할 수 있을까? 맥지(MCG) 감독은 "T4"에서 어마어마한 물량을 쏟아부었지만 관객들이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까지의 "T"시리즈들의 액션 장면이 대단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될돌이켜 생각해보면 "T"시리즈는 액션영화라고 규정하기엔 액션 장면이 생각외로 많지 않으며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들처럼 속도감 있는 액션도,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시리즈보다 액션 장면은 매우 소규모로 구성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시리즈의 액션 장면은 뭔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 이유는 이 시리즈가 근본적으로 묵시론적인 전망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T4"는 그저그런 액션 영화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이 영화의 복선이라거나 관객이 미처 예상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면 샘 워싱턴이 존 코너를 유인하는 반인반로봇의 존재였다는 설정인데 이 역시 영화 초반에 이미 눈치빠른 관객이라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겉으로 쉽게 드러난다.

게다가 '로봇인지 인간인지 회의하는 존재'란 설정은 게리 시나이즈가 고전SF소설의 반열에 오른 "화성에서 온 사나이"를 스크린으로 옮긴 "임포스터(Imposter, 2002)"은 물론 원작자인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원작을 응용한 무수한 작품들에서 차용된 설정이다. 어쩌면 "T4"의 운명은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가 끊임없이 외치면서도 운명적으로 흘러가는 전작의 성공적인 요소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타워즈" 역시 시대를 거슬러 "다쓰베이더"의 탄생 과정, "제다이"의 몰락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전작에 못지 않은 성공을 거둔 까닭은 이전의 "스타워즈"들에서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아무리 스펙타클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이야기(narrative)란 점이다. 이것을 망각하면 아무리 스펙타클한 요소가 뛰어나더라도 범작에 그치고 만다는 교훈을 "T4"는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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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런(Chicken Run, 2000)



존재하지 않는 세계 - 유토피아(Utopia)

   영국의 인문주의자이며 정치가였던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저술하여 유명해진 - 오늘날엔 읽는 사람보다는 인용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은 기이한 고전이 되어가고 있지만 -『유토피아』는 본래 그 유래가 그리스어의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친교를 맺으며 영향을 받아 이 책을 저술했는데, 책의 내용은 당시의 유럽, 특히 16세기 무렵 영국사회의 여러 병리 현상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를 꿈꾼 것이지 전혀 실제 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하기사 공화정제, 전 시민이 교대로 농경에 종사, 노동시간은 6시간, 나머지 여가는 교양시간, 필요한 물품은 시장의 창고에서 자유로이 꺼내 쓸 수 있으며 남녀는 혼인하기 전에 미리 서로의 나체를 볼 수 있도록하고, 안락사를 허용한다는 그의 유토피아가 오늘날의 관점으로도 쉬운 것은 아니다)만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가 고민했던 사회적 모순들은 오늘날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모어가 살던 16세기 영국은 자본주의 생성 초기로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폭력적으로 진행되던 때였다. 양을 사육하기 위해 농민들은 대대적으로 농경지로부터 쫓겨나야 했고, 모어는 이를 가리켜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기이한 세상이라고 했다. 현실은 오늘날에도 대동소이하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대량해고 및 실직 사태에 직면해 있고, 과거와는 형태만 달라진 빈곤이 계속 된다.

  <치킨 런>은 죽음이라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의 탈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다른 애니메이션들이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다. 하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예술작품치고 지옥에 비해 천국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예를 찾긴 매우 어렵다. 천국이란 그 상상의 세계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그에 대해 반대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지는 일종의 대안적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지옥은 현실의 축쇄판이기 때문이다. 누가 애써 비난받을 짓을 저지르겠는가? <치킨 런>에는 조지 오웰식의 <동물농장>이 그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양계장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유사하다는 분석을 할 수는 있다. 거기에 애써 기호학적인 분석 어쩌구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치킨 파이 자동 제조기'를 '대처리즘'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던 아니면 그와 상관없이 바라보던 간에 양계장이 지배와 억압의 세계, 암탉 진저의 탈출 시도가 그에 대한 일탈을 말한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진저가 꿈꾸는 이상세계가 원시적이고 소박하면 소박할수록 사람들은 좀더 친근감을 느끼고 쉽게 동의하게 된다. 이 말은 천국은 모호할수록 좀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논리적 제약을 무시하고 말한다면 유토피아는 그런 까닭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영화에서 진저와 록키 그리고 그들의 일행은 무사히 닭들의 유토피아에 이르게 되고, 동화 속 주인공들이 그러했듯이 아들 병아리, 딸 병아리를 낳아 인간들에게 발각되기 전까지 당분간은 행복하게 산다는 타협을 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현실 속의 닭들은 과연 어떻게 사는지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충고이면서 동시에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비관적인 현실론의 일단에 자리하고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 약육강식'이란 말이다. 19세기에 등장한 다아윈(Charles Darwin)과 월리스(Alfred Wallace)의 진화론을 사회학에 접목시킨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진화(Social Evolution)론이 그것이다.‘적자생존’,'자연도태',‘강자우월론’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사상은 결국 생물학적 다양성이나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비서구 사회들을 결국 서구사회와 같은‘문명화(Civilizing)’된 사회로 강제 진화시킬 필요가 있는 미개한 야만사회로  규정하도록 했다. 나는 서구 합리주의 철학이 도달할 수 있는 막다른 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회진화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개념 속에 자연은 타자화된(정복할) 대상이었으며 자신들의 문명·문화라는 편협한 잣대로 보았을 때 그들과 다른 문명권은 오로지 정복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냉장고

  어두컴컴한 밤. 갈증에 시달리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연다. 마치 SF영화의 한 부분처럼 혹은 공포영화의 살인 장면이 벌어지기 직전처럼 갑자기 열린 냉장고 속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 원시시대였다면 동굴 역할을 했을 법한 냉장고, 그 환한 전구 불빛 속으로 여러 식료품들이 보인다. 그린 자이언트 옥수수 캔, 동원 참치 캔, 플라스틱 밀폐 용기 속에 담긴 방울 토마토, 비닐랩에 싸인 오이, 햄, 소시지, 그리고 달걀. 우리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이야기로부터 참신한 발상의 전환을 증명해주는 '콜럼부스의 달걀'에 이르기 까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에 달걀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닭은 인류가 길들인 가장 오래된 가금(家禽)류 중 하나였다. 물론 여기서 길들인다는 것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어린왕자와 여우'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길들인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만약 여기서의 '길들임'이 전자의 길들임이라면 어린왕자는 여우의 고기와 모피를 얻기 위해 여우의 생명을 난도질해야 한다.



  냉장고 속의 달걀이 닭의 살아있는 난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달걀 프라이를 해먹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기름에 튀겨낸 생선 대가리의 쾡한 눈동자가 마치 나를 쏘아보는 듯해서 섣불리 생선 살에 손을 대지 못했던 기억처럼 말이다. '존재의 응시'란 나 이외의 타자를 나와 동등하게 대우할 때만 가능하다. 냉장고 속의 달걀은 과연 얼마나 그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중 달걀 썩은 냄새를 맡아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냉장고 속의 달걀은 한 달 이상 그 싱싱함을 유지시킬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달걀 자체의 생명력이라거나 냉장고의 탁월한 보관력 덕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걀이 그토록 오랜 기간 보존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먹을 거리로 삼고 있는 달걀이란 생명의 유통기한 아니,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부은 항생제 덕분이다.

한 알의 달걀이 닭이 되기까지

  우리가 길들인 닭은 다시 새끼를 얻기 위한 종계와 고기를 얻기 위한 육계, 달걀을 얻기 위한 산란계로 구분된다. 재래(자연방임 상태로 살았던)의 종계들은 보통 1년에 120개에서 140개의 알을 낳는데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며 기온이 내려가면 털갈이를 하면서 알을 낳지 않는다. 현대의 산란계들은 완벽한 공기순환구조와 온도를 유지하는 시스템이 보호(?)하는 계사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닭들은 계절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24시간 켜진 불빛 아래 밤낮없이 알을 낳다가 1년쯤 후 산란율이 떨어지면 폐닭이 되어(산란계들은 몸을 너무 혹사한 나머지 육질이 좋지 않아 프라이드 치킨이나 부위별로 판매될 수가 없어서) 노상의 장작불 구이 신세가 된다. 새끼를 얻기 위한 종계장에서 나온 알들은 인근의 완전자동화된 부화장으로 옮겨져 20여일의 부화 기간을 거쳐 태어난다. 이중에서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병에 걸린 것들은 사료로 쓰이거나 박스째 헐값에 팔려나간다. 내가 국민학생 때 샀던 병아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 걸러진 병아리들은 수천마리씩 컨베이어 벨트로 쏟아져 나오고 숙련된 인부들이 병아리들의 목덜미를 잡고 여러 가지 백신 주사를 놓는데 시간당 3천 마리까지도 예방접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한 차례 소동을 겪은 병아리들 중 육계로 팔려나가는 닭들은 아직 산란능력도 생기기 전인 생후 30-35일만(이걸 사람의 나이로 환산하면 10살이 겨우 넘은 나이인 셈인데, 재래종에 비하면 3배나 빠른 성장속도)에 시장에 나가게 된다. 유난히 '영계'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인 까닭도 있고, 우리 육계 농장의 질병 오염도가 너무 높아서 체중을 1.6kg 이상 기르면 그만큼 폐사율(20%)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병아리를 30일만에 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료도 남달라야 한다. 사료에는 주로 항생제와 성장촉진제가 첨가되어 있는데,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 따르면 법적으로 사용가능한 항생제만도 3백 50여 종이 넘는다. 걔 중에는 이 엄청난 성장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죽는 병아리들도 생겨난다. 날개를 펼쳐볼 수도, 마음껏 훼를 칠 수도 없을 만큼 좁디좁은 양계장에서 운동부족과 약물남용의 스트레스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팔려나가는 닭의 90%가 백혈병이나 암 등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거짓은 아닌 셈이다. 



  패스트푸드점의 매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손님회전율이라는 것이 적용된다. 즉, 좀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서 빨리 먹고, 빨리 나가줘야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메꿔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손님회전율을 높이기 위해서 맥도날드의 창업자 레이 크록(Ray Kroc) 같은 이들은 패스트푸드점의 실내 인테리어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유심히 통제(맥도날드에 들어서는 고객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치밀한 통제 속에 들어가게 된다. 우선 규격화된 메뉴, 제한된 소스 종류, 줄서기 시키는 주문 카운터,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 빨리 먹고 나가야 하는 분위기, 지정된 퇴식구와 쓰레기통 등 고도의 통제 구도 하에서 놓이게 된다)하고 있다. 패스트푸드점의 의자가 유난히 불편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보고 이미 돈을 지불했으니 빨리 먹고, 빨리 나가달란 뜻이다. 이런 법칙은 양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닭들은 마치 패스트푸드점의 손님처럼 빨리 먹고, 빨리 성장해서 이윤을 남겨줘야 하기 때문에 30일 동안 고도로 농축된 성장호르몬과 항생제가 범벅된 사료를 먹고 도계장으로 실려나간다.


날 수 없는 새와 레드스킨

   닭의 운명은 그들이 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 되었던 시절 혹은 그렇게 길들여지기 시작하면서 결정된 것이었을까? 신은 과연 닭을 인간의 먹을 거리로 삼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인가.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들 사이의 해묵은 논쟁을 이곳에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바람구두는 분명 채식주의자는 아니고, 순전히 식욕이 당기기로 말하자면 서구인들 못지 않게 육류 소비를 즐기는 축에 속한다. 오늘날 육식이 건강에 이롭지 못하다는 것은 담배의 해로움과 마찬가지로 이제 의학적 상식 축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채식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자연 상태에 놓인 인간이 채식과 더불어 육식을 하는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지난 몇년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광우병 파동처럼 인류는 좀더 풍요로운 사회, 기아 걱정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미명 아래 생명을 가진 생명체이자 지구상의 생명 다양성 중 분명 한 축을 담당하는 가축들을 매우 비자연적,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육한다. 인류의 재앙으로까지 불린 광우병 파동이란 결국 좀더 많은 고기와 우유를 얻고,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완전 채식 짐승인 소에게 단지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도태시킨 숫컷 병아리와 소와 양의 내장, 잡고기, 뼈 등을 갈아만든 사료를 먹여 육식동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계장으로 실려간 닭들은 커다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싣고 간 닭들을 쏟아낸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옮겨지는 닭들은 일일이 사람들 손에 붙들려 빙글빙글 돌아가는 쇠꼬챙이에 거꾸로 매달리게 된다. 죽음의 사슬에 엮인 닭들은 이렇게 도계장에서 대량으로 도륙되는 닭들은 마치 <치킨 런>의 치킨 파이 자동제조기와 흡사한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60볼트의 전기침 세례와 목 뒤의 경동맥을 자르는 칼날 세례를 받게 된다. 그렇다고 닭들이 우리가 흔히 어렸을 때 시장통에서 보았던 것처럼 닭의 모가지를 단칼에 딴다거나 잘라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기계가 닭의 머리를 있는 대로 쭉 잡아당겨 끊어내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닭의 머리를 끊어내는 이유는 이렇게 하면 식도와 내장기관까지 끌려나와 세 사람 정도의 인력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출된 내장은 닭똥집만 제외하고는 모두 폐기물로 팔려나간다.



  <치킨 런>의 진저와 록키처럼 이런 과정을 모면한 닭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 집 마당에 작은 철망 닭장을 만들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닭들은 밤이 되면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데다가 알을 낳는 항문 부위에는 신경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밤새 휏대에 올라가 잠들지 않은 닭 중엔 닭장에 침입한 생쥐가 항문 부위를 죄다 파먹어도 모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머리 나쁜 사람들에게 '닭 대가리'라는 오명을 붙여준 것은 이렇게 항문을 파먹혀 피를 질질 흘리고 다니면서도 평화롭게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닭을 바라보는 주인의 기막힌 심정이 녹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엔 닭 도축 작업을 주로 밤에만 했다고 한다(물론 닭서리를 해본 분들은 더 생생하게 기억하겠지만). 어쩌다 도축 컨베이어 벨트의 전기침과 칼날을 피해 살아난 닭들은 공포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레드스킨(Redskins) 현상이 나타나는데 육질이 나빠지는 것은 물론 온몸이 붉어져 팔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날아라 병아리, 중독된 소비 사회를 넘어

   현대의 물질문명은 더 이상 기아에 대한 맬더스의 예측이 옳다고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과학이 이루어낸 농경기술의 발달은 식량 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제 굶주림은 분배의 문제에 속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기아선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아이스크림 메이커 '베스킨 라빈스'의 유산상속자였던 존 로빈스는 "매해 기아로 죽어가는 인구를 먹일 수 있는 곡물의 양이 1,200만 톤인데 이 1,200만 톤은 미국인들이 소고기 소비를 10%만 줄이면 얻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말한다. 육류 소비를 억제하고 그 사회적 비용으로 채식을 한다면 좀더 많은 이들에게 풍족한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다만 고민되는 문제는 그렇게 얻게 된 1,200만톤의 곡류를 과연 굶주린 이들에게 앞장서 전해줄 정부와 사회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나는 우선 우리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소 종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식량문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소박한 대안은 당신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서라도 적게 먹고, 적게 소비하라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소비란 인간의 삶과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생활필수품이건, 일반 소비재이건, 기호품이건 간에 결국 그것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지본주의가 구축해놓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체제는 소비를 강요한다.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경기변동을 초래해 때로는 경기 부흥을 위해 소비를 촉진한다. 마치 비만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빅맥을 먹으며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하는 것과 같이 낭비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에 중독되어 있다. 이제 소비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도구이고, 인간은 소비를 통한 자본축적의 수단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체적 판단과 욕구에 따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프로그램(거대기업의 의도와 광고와 유행 등에서 나타나는 패턴)에 따라 소비한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지구자원의 무한정한 소비와 그에 따른 공해. 그로인해 우리 인류의 생존기반이자 물질생활의 토대인 지구를 파괴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물론 그전에 항생제 남용과 축적으로 인한 새로운 전염병의 유행이나 호르몬계 이상 등으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욕망의 무한 질주인 자본주의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고민할 일도 더 이상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02/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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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봄날은 간다(One Fine Spring Day, 2001)


감독 허진호의 영화는 이로써 두 편을 보게 되었다. 어제 만난 <고양이를 부탁해>의 제작자 오기민 씨는
"최근 한국영화의 돌풍의 뒤에는 나날이 작아지는 감독들이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고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한국 영화들은 영화 자체의 흥행 성적은 둘째로 하더라도 감독의 이름만큼은 뚜렷이 남았던 것 같은데 최근의 히트한 한국영화의 감독들 이름을 나는 모르겠다. 가령 <조폭마누라> 등등. 어쩌면 이제 영화는 정말 감독의 작품이기 전에 그저 상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동차를 만든 이의 이름을 모르듯이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허진호 감독은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연출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의 이름 석자는 나의 기억에 또렷이 새겨질 것이다. 그의 첫번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나는 잔잔하며 순간을 놓치지 않는 그의 연출력에 놀라워 한 적이 있다. 그는 화면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없는 대신에 어떤 화면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는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 연결. 관객의 기대와 호흡을 적절히 끊어 놓고 이어주는 그 연출력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는 영화아카데미 6기 출신이다. 이만하면 한국 영화아카데미는 한국영화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봄날은 간다> - 가지 말라 해도 그날들은 간다.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를 나는 사실 두려워서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나의 절친한 친구가 말하기를 "너는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말하면서도 "절대로 누군가랑 같이 보지 말고 혼자 보라"는 그 말이 나에겐 두려움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극장에서 혼자 보았으면 너무 슬펐을 영화를 집에서 마눌과 함께 보았다. 첫사랑의 흔적을 현재 함께 살 맞대고 사는 여자와 함께 확인하러 간다는 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 사랑의 흔적이 나만의 것일 수 있을까. (그 내숭덩어리가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첫 사랑은 혹여 존재하는 것이 아닐런지.)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며 떠오르는 상념들이 많았다는 것. 친구 녀석이 말하기를 이 영화 <봄날은 간다>는 누구하고도 같이 보지 말고 꼭 혼자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던 이유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거이다. 간혹 어떤 영화들은 정말정말 보고 싶은데 그와 꼭같은 이유로 죽어라 보기 싫은 영화들이 있다. 내게는 이 <봄날은 간다>의 경우가 그랬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한 가지는 그렇게 말해준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옆에 누워 영화 보는 내내 재잘거리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녀가 내 곁에 있음으로해서 나는 저 영화를 보면서도 이렇게 슬프지 않을 수 있구나. 아, 이 여자가 내 옆에 있어줌으로 해서. 만약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제 얘기같아요, 라고 말한다면 화낼 사람들 많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돌아가고 싶은 시기. 그러나 너무 아파서 차마 돌아가고 싶다는 마법의 주문을 끝까지 읊조릴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봄날은 간다>는 바로 그런 사랑의 마법에 걸린 연인들을 그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깊이라는 면에서는 <줄 앤 짐>의 잔느 모로를 능가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영애라는 배우의 매끄러움을 훑어간다. 너무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여자.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마치 손아귀에 쥐고 있는 한줌의 모래알들처럼 힘주어 쥐려 할면 할수록 어느새 손아귀에서 스르르 빠져나가고 만다. 세상에는 아무리 갖고자 소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분명히 사람의 마음 일 것이다. 사랑을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고, 사랑하면서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랑이란 것도 세상엔 분명히 존재한다. 사랑의 층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 다양하다. 가령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자. 두 주인공은 예정된 파멸의 길로 나간다. 그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랑을 택함으로써 그 파국을 애처롭지만 지켜보는 아픔을 택한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서 이제는 일종의 클리셰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모습이다. "버스와 여자는 지나간 뒤에는 잡지 않는 법"이란 충고를 손주에게 해주던 할머니의 연분홍 치마는 바람에 날린다. 그리고 나에게 이 영화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이영애가 강릉의 자기 아파트 창가에 머리를 내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앞으로 숙이는 장면이다. 아주 묘한 느낌을 전해주는 장면인데 나는 이 장면이 이 두 연인의 다가오는 파국을 잘 보여주는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글쎄, 명확히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면 어렵겠지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멀리서 흔들리는 깃발, 혹은 무지개처럼 끝없이 도달할 수 없는 먼 미지의 무엇이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영애의 행복에 겨운 그러나 동시에 나른한 듯한 포즈는 잡힐 듯 잡을 수 없는 집 나간 고양이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도 느껴진다.


"라면 먹고 갈래요."

그리고 잠시후


"자고 갈래요"

그리고 다시 잠들었던 유지태가 깨어나 이영애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자 얼마간 서로를 애무하던 이영애(음, 배우의 이름으로 그냥 쓰려니까 영 어색하네.)는 유지태를 밀어내며 말한다.

"다음에 좀 더 잘 알게 되면...우리 그때 해요"

우리는 이때 극중 한은수(이영애)가 '냉정한 불'이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물론 극중에서 한은수가 이혼녀라는 방식으로 그녀에게도 나름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대어 진행된다.

남자와 여자는 인간이라는 동종의 짐승이 아니라 아예 서로 다른 종이란 것이다. 그들은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오랜 세월 서로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통하지 않을리 없지 않은가?) 생각하는 방식도 심지어는 먹이의 종류도 다르다(연인과 함께 식사할 때 남자와 같은 메뉴를 시키는 여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어쨌든 <봄날은 간다>는 슬픈 영화다. 나는 영화 <줄 앤 짐>을 보면서 상당히 비통해 했고, 잔느 모로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영화 <봄날은 간다>를 유쾌하게 보았다. 옆에서 시종일관 잔소리를 늘어놓는 마누라의 등을 긁어주며 오랜 친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 때문에 가슴 아픈 이들이여! 세월이 약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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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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