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발견
- 임재천 (지은이) | 눈빛 | 2013-11-25







임재천의 사진집 "한국의 재발견"은 한국의 '재발견'이 아니라 한국의 '대발견'이다. 그것은 이 사진집의 첫 장만 넘겨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제일 첫머리에 등장하는 곳은 부산 영도인데, 순간적으로 나는 이곳에서 쿠바의 말레콘(Malecon)을 보았다.

1.
사진은 최초 탄생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몇 안되는 예술장르 중 하나다. 사진의 태초는 프랑스의 니에프스가 자연 풍경을 최초로 고정한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를 완성한 것이 1826년의 일이었다. 태초의 사진은 풍경이었다. 물론 태초의 사진이 풍경이 된 이유는 당시 기술력으로 상을 정착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8시간이라는 긴 노출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니에프스의 사진에는 8시간 동안에 해가 움직여서 해가 지나간 자리만 남고 실제 해는 나타나지 않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훗날 기술적으로 진일보한 다게레오 타입의 사진을 발명한 다게르가 촬영한 거리는 마치 핵전쟁 이후의 지구를 연상시키듯 사람들은 모두 사라진 뒤 텅 빈 거리만 남아 있었다.

나는 니에프스와 다게르가 남긴 최초의 '헬리오그라피'들이 사진이라는 한 예술의 범주가 감추고 있는 철학적 본질의 대부분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진을 의미하는 영어 'photography'란 단어는 잘 알려진 대로 라틴어 'phos(빛)+graphos(그리다)'의 합성어로 1839년 영국의 허셀(Herschell)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해 오늘날 사진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포토그래피(photography)란 말을 풀어보면 '빛으로 그리다'란 뜻이 되는데, 이 말은 자연으로서의 '빛'과 인위적인 행위로서의 '그리다'는 행위의 이항대립으로 구성된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풍경은 인물사진과 함께 사진의 가장 오래된 기본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의 역사는 170여 년 정도인데, 사진이 그만큼 젊은 예술 분야인 탓도 있지만 유럽에서 동양으로 전파된 시기를 헤아려보면 사실상 동양과 서양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최초의 서구 문물이 등장할 때 그에 따른 번역어를 고민한다는 것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이 문물 혹은 제도를 어떤 것으로 생각했고, 고민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寫眞)'이란 말을 해체해 보면 동양적 사고 속에 사진이란 무엇이었는지를 재구성해볼 수 있다.

'사(寫)'란 '베끼다, 옮겨놓다'라는 우리가 잘 아는 의미도 있지만 '떨어버리다, 덜어 없애다'란 뜻도 있다. '진(眞)'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참, 변하지 아니하다, 생긴 그대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진은 우리가 아는 대로 본래의 참된 모습을 생긴 그대로 베끼거나 옮겨놓는 기능도 있지만 다른 한 측면에서 보면 본래의 '모습(眞)'을 덜어 없애거나 떨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예술은 태생적으로 논쟁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사진처럼 그 자체로 예술인가 아니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같이 단순한 과학적 산물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던 사례는 없었다.





2.
1911년 이탈리아의 비평가이자 영화운동가 리치오토 카뉘도(Ricciotto Canudo)는 「제7예술론Club des Amis du 7e Art」을 통해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선언했다. 그가 주장한 바에 의하면

제1의 예술 연극
제2의 예술 회화
제3의 예술 무용
제4의 예술 건축
제5의 예술 문학
제6의 예술 음악
제7의 예술 영화
제8의 예술 사진
제9의 예술 만화

그는 영화를 '제7의 예술'로서 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며 앞서 6가지 종류의 예술을 총화 시킨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영화가 단지 ‘촬영되어진 연극’일 뿐이라는 편견"에 도전하기 위한 주장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도 니에프스와 다게르에 의한 사진의 탄생(1826년~1838년)이 뤼미에르 형제에 의한 영화의 탄생(1895년) 보다 앞서며, 기술적으로도 사진이 탄생한 뒤에 비로소 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영화에 뒤이어 제8의 예술이 된 이유는 사진이 걸어야 했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1862년 프랑스 파리 법원의 판결에 의해 비로소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발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프랑소아 아라고(Francois Jean Dominique Arago, 1786 ∼ 1853)는 “사진은 진보에 기여하고, 민주주의에 이바지하며, 누구나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며 사진을 예술로 받아들이도록 주장하기도 했다.

다시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 사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발터 벤야민이긴 하지만, 나는 좀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그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이란 담론으로 인해 사진의 본질에 대한 오해(?)가 강화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란 오해에 대해 동양의 사유는 사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지만 동시에 본래의 '모습(眞)'을 덜어 없애거나 떨어버리는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담고 있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와는 사진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화가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다른 한 편으로 사진에 비해 유화가 지닌 예술성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초보자들은 희생시켜야 할 것을 희생시키는 중요한 기법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라고 했는데, 이런 주장의 저 편에 서 있는 당시 다게레오 타입의 사진들은 '희생시켜야 할 것들을 희생시키지 못하는 초보적인 작품'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3.
디지털 기술이 사진의 물성(物性)까지 변화시키고 있는 현대, 특히 풍경사진은 여전히 그런 오해를 받고 있으며, 나는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풍경은 여전히 천지(天地)이고, 풍경사진은 지천(至賤)이기 때문이다.

소박한 풍경의 기록으로 시작된 풍경사진은 처음엔 단순한 풍경의 기록이라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풍경을 좀 더 미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창조의 욕구가 싹트면서 초기의 사진가들은 회화를 선진예술로 생각해 사진을 통해 이를 모방했다. 훗날 사진을 미술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조차 초기의 작품들은 회화를 모방하는 ‘예술사진(Pictorial photography)’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풍경사진은 장엄한 자연의 풍광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만든 역사적 건축물, 마을의 정경, 일상적 풍경,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생활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관계를 담아내려는 풍토적 정경의 사진들, 또는 작가 자신의 주관적 내면세계를 반영시키는 작품에 이르는 등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으며, 근대화 이후 여가 생활의 증대를 반영해 유행하기 시작한 엽서사진과 관광 목적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지천이다. 심지어 안개가 한창 아름답게 피어날 이맘 때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 근방에 나가보면 마치 낚시꾼들이 포인트를 찾듯 좋은 사진의 포인트로 알려진 근방을 배회하는 사진가들로 득시글거린다.

그렇다면 임재천의 사진이 그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의 으젠느 앗제(Jean Eugene Auguest Atget)는 근대사진의 보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생전의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파리 시정의 일상적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치중한 아마추어 사진가였다. 본래 그는 초야에 묻혀 있었던 무명의 사진작가였다. 잘 알려진 대로 앗제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만 레이(Man Ray)와 그의 조수로 일하던 버레니스 애보트(Berenice Abbott)였다. 앗제는 당시 만 레이의 이웃으로 몽파르나스에서 살고 있었는데, 1926년, 앗제가 죽기 직전 만 레이는 그의 작품을 초현실주의 기관지에 게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미국의 여성 사진작가 애보트는 앗제의 사진이 지닌 가치를 알아차렸고,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앗제의 초상사진을 촬영했다. 앗제는 애보트가 초상사진을 촬영하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애보트는 그때부터 앗제의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해 이후 40년 동안 앗제의 포트폴리오와 아카이브를 만들어, 1981년 MoMA에서 그에 관한 전시회를 열면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임재천의 사진을 앗제에 비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이 임재천의 사진이 지닌 진정한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임재천의 풍경사진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새롭지 않다. 그의 사진들은 기법적으로 보자면 미묘한 광선(光線)의 뉘앙스를 추구하는 한국 살롱사진(풍경사진)들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디 전통적이란 것은 낯익은 것, 낯익은 것은 진부한 것이고, 진부한 것들은 마음의 평정을 선사하긴 하지만 감동을 주지 못하기 마련이다.





4.
근대의 여행은 8시간 노동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가져다 준 여유를 이용해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 자신이 일하던 곳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과거의 여행이 생(生)과 사(死)의 일대사(一大事) 인연(因緣)을 걸고 진리(經典)를 찾아 머나먼 천축(天竺)으로 떠나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모험이었다면 근대 이후의 여행은 여흥(餘興)을 찾아 떠나는 것이 되었다. 여행의 필수품으로 관광가이드북이나 누군가 먼저 다녀온 사람의 여행기를 찾아 읽는 이유는 낯선 곳에서 낯설고 싶지 않다는 안정과 평온에 대한 추구이다. 에드워드 W. 사이드는 그와 같은 이유에서 여행을 하는 자들의 정서와 심리는 기본적으로 ‘텍스추얼(textual)'한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낯선 장소, 낯선 시간을 찾아 떠나지만 그들의 마음과 감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언설화(言說化)된 지식과 이미지로 충만해 있다. 결국 이들이 찾아간 곳은 낯선 시간과 공간이 아닌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굳건한 권위를 지닌,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직접 대면하게 될 진짜(real) 현실보다 현실화된 권위를 지닌 텍스트들, 다시 말해 굳어진 대상들뿐이다. 이것은 온갖 첨단문명으로 도배된 현실의 여행이 지닌 한계이자 오늘날의 풍경사진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사진의 탁월한 현실 묘사력은 ‘텍스트로서의 사진’이 지닌 텍스추얼한 권위를 더 한층 강화시켰고, 이후의 사진들은 과거의 사진들이 만들어 놓은 권위와 경쟁해야만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사진집이 아닌 사적인 계기로 인연을 맺은 최초의 사진가는 얼마 전 타계한 김영갑 선생이었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통해 당신과 인연을 맺었고, 당신이 사인해서 보내준 사진집을 받았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찍는 사진을 분명 풍경사진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에는 다큐멘터리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오늘의 이 풍경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자신이 가진 뛰어난 장점 중 하나인 대상을 사실대로 묘사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기록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다른 사진, 이전의 사진들이 남긴 기록들과 투쟁해야만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록이 가지고 있는 기록이라는 속성의 중요한 가치를 두고 ‘시간성’의 개념을 도입해 강화하고자 한다. 기록은 시간(세월)이란 긴 여행, 소멸을 염두에 두고 현재를 남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임재천의 사진을 높이 평가하는 지점들이 한 부분은 분명 거기에 있지만, 나는 그것에 의존해 임재천의 사진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1년에 한두 번 이상 역사기행의 명목으로 전국의 명승지를 살펴보는 일을 17년째 하고 있으며, 굳이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나의 닉네임이 ‘바람구두(windshoes)'란 것에 걸맞게 돌아다니는 일에 익숙하다. 그가 사진집에 담고 있는 곳들은 나도 대부분 다녀본 곳들이며, 나 역시 사진기를 손에 잡은 지도 어느덧 그만큼의 연륜이 쌓였다. 그래서 그의 사진들, 그의 사진들이 담아내고 있는 풍경들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또 그만큼 그의 사진들은 나를 낯설게 한다. 낯익은 장소가 경이(景異)하게 보이기에 나는 그의 사진들이 경이(驚異)롭다.

그의 작업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풍경사진의 전통과 맥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가 앞으로 여기서 좀 더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땅에 대한 경험과 기억들을 ‘tabula rasa’의 상태로 몰아 부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지 않을까 감히 기대해보게 되는 것이다.





* 임재천은 계간 "황해문화" 2011년 여름호(통권71호)의 포토에세이를 장식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 이시우 사진 / 인간사랑 / 2007년 6월


얼마 전 국정원에서는 과거사진상규명활동보고서를 냈는데, 지난 7~80년대부터의 공안사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부공안기관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강화도에서도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만 하는 작고 외진 섬, 미법도에 한동안 국가공무원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곳을 찾아 미법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납북 사건이 잊혀질 무렵인 1976년 오형근씨 사건을 시작으로 미법도에 공안사건의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1977년 안장영, 안희천씨, 1981년 황용윤씨가 차례로 ‘간첩’이란 꼬리표를 달고 법정에 섰다. 오형근씨 수사 과정에서 안장영씨에 대한 첩보가, 안장영씨 수사 과정에서 안희천씨와 황용윤씨에 대한 첩보가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나왔다. 황용윤씨의 수사 과정에서 나온 ‘첩보’가 발단이 돼 간첩으로 몰린 정영(67)씨 사건까지 서해의 작은 섬 미법도에서만 모두 5건의 간첩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미법도 납북 어부들은 군사독재의 하수인들에게 ‘황금어장’으로 비쳤던 게다. - <한겨레21>(2007년11월01일 제683호) 특집

불과 70여 가구가 거주하는 어촌에 불과한 미법도에 그렇게 많은 간첩들이 거주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들은 간첩이 아니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정부공안기관들에 의해 조작된 사건들이었고, 국가기밀은커녕 검찰에서 자신이 하는 진술이 법정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설령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안기부 직원들이 바로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고문과 협박에 못이겨 했던 진술이라고 자신의 진술을 번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어부들을 법정으로 불러내 처벌한 것은 국가보안법이었다. 어떤 이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국가보안법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민주화된 시대이기에 과거에 비해 국가보안법이 남용될 위험도 적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제2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비록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지난 4월 19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뒤 5개월여 동안 이시우는 감옥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끊임없이 기밀과 창작, 검열과 창작의 자유를 놓고 투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장장 60여일에 걸친 단식 투쟁도 불사했다. 그는 구치소에 수감된 뒤 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그의 부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65kg이었던 체중이 20kg 정도 빠져 “뼈에 얇게 살을 발라놓은 몰골”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 5월 1일 그가 아직 감옥에 갇혀있을 때, 옥중에서 발표한 한 장의 편지가 있다.

기밀과 창작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례가 있습니다.

‘얀’이란 세계적 사진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본 지구’란 사진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하늘에서 찍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전협정 상으로도 어려운 일이지만 군사기밀 보호법 때문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사군정위 비서장인 ‘캐빈 매튼’ 대령은 그를 헬기에 태워 한국의 사진가들에겐 한번도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지역에 대한 고공촬영을 했고 사진을 발표했습니다. 아마 그는 한국의 DMZ를 대표하는 사진작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비무장지대를 대상으로 10년 넘게 사진작업을 해온 저의 사진은 군사기밀보호법의 혐의가 씌워진 채 어쩌면 ‘모내기’그림으로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당하셨던 ‘신학철화백’의 그림처럼 철창에 갇혀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될 운명에 있습니다. FTA를 반대하는 예술가들에게 대통령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는데 소수 공안세력들은 창작의 자유 대신 기밀의 족쇄를 채워 손발을 묶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깝습니다.

이시우가 말하는 사진가는 우리에게도 『하늘에서 본 지구』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다. 한 사람은 군 헬기를 얻어타고 공중에서 DMZ를 촬영하고, 다른 한 사람은 풍경 사진 속에 강화 고려산 미군 통신시설의 일몰을 촬영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시우는 간첩일까?

먼저 간단하게나마 그의 약력을 살펴본다. 1967년 충남 예산 출생, 1988년 신구전문대 사진과 제적, 1989년 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창작단장, 1990년 전국노동자문화단체협의화 풍물분과장, 1991년 전국노동자문화운동협의회 창작단장, 1993년 서울중구문화회관에서 <사람과 사진>전, 1995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혐의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뒤 그는 강화도에 거주하면서 주로 비무장지대 DMZ의 풍경을 촬영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해왔다. 사실 이 책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은 그의 이런 작업 내용을 담아 지난 1999년 처음 출간되었고, 올해 재판 1쇄가 새롭게 나왔다. 이미 본 사람들은 다 본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올해를 상징하는 책 10권 가운데 하나로 재선정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올리게 되는 ‘국가보안법’ 때문이다.

2007년, 올해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평양에 갔다. NLL(북방한계선)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갈라진 민족의 양 정상은 현재의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데 합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자신의 발로 직접 넘어서던 그 날, 사진작가 이시우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5개월 째 수감 중이었고, 목숨을 건 40여일의 단식 투쟁 중이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보법에 대해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독재 시대에 있던 낡은 유물”이라며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시대, 인권존중의 시대로 간다면 그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게 좋지 않겠냐,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민통선을 촬영하던 사진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감옥에 갇혔다. 대통령의 말이 진실이라면 국민이 주인 되는 시대, 인권존중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난 2003년 말 1,000여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국보법 철폐’ 단식을 하면서도 끝끝내 수구보수세력의 저항을 넘어서지 못했다.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겠다던 대통령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저들과 보수연정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의 반동들이 모여 오늘의 위기를 자초했다. 2007년 올해 10년 만에 사회과학서점들이 경찰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했다. 인터넷 헌책방 미르북 대표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구속적부심에서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일단 석방되었다.

여기 거의 7년여 만에 재출간된 사진집 한 권이 있다. ‘슬픈 조국의 대지’를 만남과 강, 사색이란 주제로 촬영한 사진집이다. 강화도에서 정동진에 이르는 155마일 휴전선 아니 비무장지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색할 수 있을까? 남과 북, 좌와 우의 꽉 막힌 철옹성들 사이에서 과연 우리는 다른 것을 사유할 수 있을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현장에서 만난 20th C : 매그넘(MAGNUM) 1947~2006 - 매그넘 (지은이) | 에릭 고두 (글) | 양영란 (옮긴이) | 마티(2007)





20세기 최고의 프리랜서 사진가 집단 “매그넘”


『현장에서 만난 20th C』는 “우리는 그들의 사진으로 세계를 기억한다”는 의미심장한 부제를 달고 있다. 선언적 어투로 쓰인 이 말을 만약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진집단이 했다면 아마 우리는 매우 거만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누구인가? “MAGNUM” 사진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 없는 보도 사진가들의 집단이 바로 매그넘이다. 매그넘은 좀체로 넘어서기 어려운 중세의 길드 같다는 느낌을 준다. 어쩌면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스러운 입교식을 치르지나 않을까 싶을 만큼 신비로운 매력을 선사하는 이들이 바로 매그넘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라이프> 등 포토저널리즘의 전성기를 경험한 사진작가들은 편집자들의 의도와 요구에 따른 작업 방식에 많은 불만을 품게 되고, 그들이 촬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촬영하고,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게재해주는 매체에 그들의 사진을 제공해주는 방식의 사진작가 에이전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했던 프랑스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무어 등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창립한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집단이 바로 매그넘이다. 이들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문으로 하여 이후 세계를 대표하는 엘리트 사진 집단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지난 1993년과 2001년, 국내에서도 매그넘의 대규모 사진전시회가 있었기 때문에, 또 최근엔 로버트 카파 사진전이 열리기도 해서 국내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나 역시 매그넘에 소속된 사진작가들 가운데 로버트 카파는 물론이고, 베르너 비쇼프, 유진 스미스(한동안 ‘매그넘’에서 활동하다가 탈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엘리어트 어위트, 요제프 쿠델카, 필립 할스만 등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매그넘과 관련된 몇 권의 원서 사진집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지닌 최고 미덕 중 하나는 이전의 다른 책들에서는 보기 힘든 사진들이 제법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건 정말 큰 미덕이다.)

한․불에서 거의 동시에 출간된 『현장에서 만난 20세기』
- 그러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편집레이아웃

국내에서 지난 2007년 10월에 출간된 『현장에서 만난 20세기』는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로는 프랑스보다도 한 달 정도 먼저 국내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1947년부터 2006년까지 주요 사건들을 매그넘의 사진작품을 통해 바라보고, 에릭 고두(Eric Godeau)의 글이 해설을 다는 형태로 꾸며져 있다. 이미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이 『현장에서 만난 20세기』의 편집과 레이아웃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막상 직접 책을 읽어보니 이들의 지적은 모두 사실이었다. 일단 10년 단위로 내지를 붉은색, 주황, 올리브그린, 노랑, 남보라, 민트그린 등의 테를 둘러 구분하고 있는데, 사진들이 온갖 요란한 색채의 방해를 받는다. 거기에 사진 캡션으로 들어가는 문장들은 그야말로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 가뜩이나 요란한 색채들로 인해 저해된 가독성은 더욱 떨어진다.

프랑스판과 거의 동일한 시기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내심 프랑스판과 거의 동일한 표지와 내지 레이아웃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막상 프랑스판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국내판 책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내지 레이아웃을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를 구하지 못해 내지 편집의 차이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이 책이 싱가포르에서 인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실 사진집의 경우 외국에서 인쇄해오는 일이 그렇게 드물진 않다. 작년에 열화당에서 출간된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은 독일에서 인쇄한 것이다. 매그넘에서 제공한 사진의 질이 특별히 카르티에 브레송보다 나빴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현장에서 만난 20세기』의 인쇄 질감이 앞서 언급한 책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도 용지 선택 문제와 인쇄의 질이 전체적으로 사진의 질을 떨어뜨린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카파가 매그넘을 결성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로버트 카파를 비롯한 “매그넘”의 사진작가들이 독자적인 사진집단, 에이전시를 창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당시 권력집단의 보도통제는 물론, 편집이라는 권력(편집권)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었다. 나 자신이 한 명의 편집자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편집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대단한 권력자이기도 하다. 지배계급(권력)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세계와 일상의 권력을 합리화하고 영속화시키기 위해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미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부자연스러움’과 ‘어색함’ 예를 들어 클래식 공연장에서 느끼게 되는 공연한 주눅, 박물관 마다 일정한 방향과 동선을 지시해주는 화살표들과 같이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기존의 세계(지배권력)가 교묘하게 직조한 틀(매트릭스)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의 부제는 “우리는 그들의 사진으로 세계를 기억한다.”이다. 이 말은 절반은 맞는 말이지만 꼭 그만큼의 진실은 유보된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들이지만 사진 그 자체는 하나의 스펙타클(spectacle)한 이미지 기호일 뿐이다. 우리에게 그 한 장의 사진이 진정한 의미로 기억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해석(단순하게 말하면 ‘캡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이 존재해야만 한다. “사진 한 장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는 이야기는 도상성(iconicity)이 지닌 위력을 설명해주는 훌륭한 사례다. 사진은 누가 뭐래도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사진의 이미지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고, 우리들에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켜 허구적인 객관성과 신뢰성을 얻어낸다. 그러나 사진은 결코 대상의 객관적인 반영이 아니며,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손쉽게 가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은 도리어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시각기호인 사진은 그 자체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보도사진들의 경우에 우리는 사진 이미지 밑에 가로 놓인 해석(캡션)을 읽고, 이미지를 해독하는 과정을 거친다. 사진 속에서 총을 들고 있는 병사가 광폭한 살인마인지, 전란 속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난민들을 구호하기 위해 파견된 병사인지 우리는 사진만으로 해석할 수 없으며, 좀더 복잡하게는 병사가 띄고 있는 정치적 의미, 사회적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롤랑 바르트는 거친 바다 위에 배가 닻을 내려 선체를 고정시키듯, 언어기호는 시각기호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특정한 범위 내로 한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정박(anchorage)’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우리는 이 책에 글을 쓰고 있는 저자(혹은 편집자) 에릭 고두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괜찮은 내용의 그런 데로 괜찮은 번역 그러나 몇 가지 결함으로 독자에게 불친절한 책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책을 다 읽고 난 뒤 책의 어디에도, 아니 책의 뒤표지에 적혀있는 몇 줄의 글만으로 저자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발간하게 되었는지 유추해내야 했다. 우리는 그가 선별해낸 300장의 사진과 보도사진가의 전설이라는 ‘매그넘’을 통해 역사를 이미지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자신은 문서보관소에 기록된 수많은 사진들을 일일이 헤집고, 자신이 나름대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1947년부터 2006년까지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 그는 장막 저 편에 서 있다.

나는 이 책의 가장 큰 문제가 가독성을 해치는 편집레이아웃에도 있지만, 이처럼 독자들에게 상세한 정보(예를 들어 저자에 대한 정보, 옮긴이의 말 등)를 제공하지 않는 불친절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인터넷 서점 아마존(프랑스)에서 이 책은 23.75유로(38,000원)에 판매되고 있으며, 인터넷상으로 이 책에 수록된 사진의 이미지들이 보고 싶다면 매그넘의 포토아카이브 사이트를 찾아가면 좋을 것이다. (물론 사진의 크기가 좀더 작고, 화질도 좋은 편은 아니지만)
( http://www.magnumphotos.com/archive/C.aspx?VP=Mod_ViewBoxInsertion.ViewBoxInsertion_VPage&R=2TYRYDK5YSOX&RP=Mod_ViewBox.ViewBoxThumb_VPage&CT=Album&SP=Album )

끝으로 한 마디 더 나는 가끔 사진집단 매그넘의 저런 선언적인 어투에서 삼성의 CF카피 같은 선정성을 느낀다. 그건 매그넘 작가들 탓일까? 아니면 기획사들 탓일까? (어쨌거나 비키니 편에서 '달리다'와 '칼 사강'이란 불어식 번역은 좀 웃겼어요.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철학, 예술을 읽다 -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06년


『철학, 예술을 읽다』는 시민을 위한 대안 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가 그간 진행해온 예술과 철학이라는 세미나에서 강의된 텍스트를 모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일반 시민을 위한 강의였던 만큼 개괄적이고, 대중적인 수준의 텍스트란 점이 이 책이 지닌 기본적인 미덕이자 역시 한계라면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철학, 예술을 읽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미학(美學)이란 학문 영역은 우리에게 다소 낯선 세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학 자체가 근대의 학문이자 서구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 할 길을 창공의 별이 지도 몫을 하는 시대는 복되도다”란 루카치의 언술에서 말하는 시대가 그리스 고전 시대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거칠게 말해서 서구 고대의 철학은 그 자체로 일상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고, 가치 판단의 근거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루카치는 저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간의 논쟁 -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옳은 정치란 무엇인가를 물었다면 소피스트들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정치를 할 것인가를 물었다 - 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리스 고전 시대의 철학이란 그 자체가 곧 정치요, 경제이며, 수학이자 예술이었다.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의 모든 지식인들은 소피스트들인 셈이다.

데카르트를 기점으로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근대에 이르러 모든 학문은 각각의 영역에서 철학과 결별하는 형태로 진화해왔고, 한동안 학문영역에서 이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학문 발전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 학문 간의 통섭의 필요성 때문에 혹은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정처 없는 대중의 욕구가 개별화되어 있는 각각의 영역에서 양자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이 책의 대표집필자격에 해당하는 조광제는 「책머리에」서 “예술과 철학은 참으로 묘한 인연으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사실 다른 학문영역에 비해서는 비교적 근접한 거리를 유지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 실제의 영역에서도 그러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지만 - 대중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현대 예술은 철학의 개입이 없다면 해석하기 곤란한(이른바 ‘예술의 종말’까지 이야기될 만큼) 소수만의 것이 되었다. 어쩌면 이 책은 그렇게 멀어진 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쓰인 책일지도 모른다.

『철학, 예술을 읽다』는 철학자를 중심으로 미술, 음악, 무용, 문학, 연극, 건축, 사진, 영화 등 다양한 분야의 비평가로 활동하는 이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1부 「예술, 철학과 마주보다」는 예술의 개념부터, 기원, 예술사, 대중문화와 예술, 매체, 과학과의 관계 등 예술 일반에 대해 대중들이 부딪치고 난감해 하는 부분에 대한 친절한 해석으로 꾸며져 있다. 1부가 예술 일반의 개념을 개설하고 있다면 2부 「철학, 예술 사이로 걷다」는 앞서 말한 각각의 장르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철학과 예술, 예술과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앞서의 1부가 철학의 입장에서 예술을 읽었다면 2부에서는 예술의 입장에서 철학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모두 16명의 필자가 참여하여 16편의 예술과 철학에 대한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다. 여러 명의 필자가 참여하는 만큼 고른 수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비교적 고른 난이도와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각각의 마지막 장에는 해당 주제와 연관하여 함께 읽을 만한 참고도서와 간단한 평을 수록하고 있어 이 책을 텍스트삼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맛보기 삼아 이 책이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깨우쳐주는가를 살펴보자. 무엇이 예술인가? 라는 질문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자 동시에 예술의 영역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엇을 예술로 규정할 것인가란 질문엔 결정된 답이 없다.

유명한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Arthor Danto ; 1924 ~ )는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예술의 종말은 이제 예술이 취해야 할 특정한 역사적 방향과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미래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방향도 나머지 다른 방향들과 동등하게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예술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업이 거의 무한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어떠해야만 예술이 된다는, 예술에 대한 통념이 무용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본문 15쪽>


위에서 인용하고 있는 아서 단토의 말은 미술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이 책의 1부를 사실상 거의 관류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현대회화를 보면서 “도대체 뭘 그린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비상식적이거나 수준 낮은 감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회화는 이제 더 이상 사물들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 현재의 가장 기초적인 미학이란 것이다. 현대의 회화는 사물들 또는 한 사물을 구성하는 양태들 속에 숨겨진 공간적 타자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곰브리치(Gombrich ; 1909 ~ 2001)는 “사실 미술이라는 것은 없다. 오직 미술가들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의 길은 인생의 길을 닮았다. 인생은 길고 긴 종합예술로, 인생의 한 순간은 화폭 하나나 조각품 하나에 비유할 수 있다. 예술가의 긴 인생을 생각해보면, 예술가가 생산한 작품이 만들어지는 시간은 아주 짧다. 그러나 예술가가 온몸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삶의 일부다. 예술이 있다기보다 예술가가 있다는 것을 다시 음미하자.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긴 과정은 한 인간의 삶의 과정과 닮았다. 인간이 생애에서 자신의 본성을 잘 구현하기 위한 시간이 길듯이, 예술가가 작품 활동을 하는 시간도 길다.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에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린 선각자가 있듯이, 예술가도 여러 경향의 수렴을 통해 몇몇 걸작을 창안할 때 인간성의 한 선구자가 된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인간성을 구현한다. <본문 119~120쪽>


예술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의 결론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의문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내 경우엔 이 책의 결론은 사실상 류종렬의 「예술사, 인간성 표출의 역사」란 글에서 거의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술이므로, 예술은 일상적인 것이며,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인간성을 구현하고, 새로운 지평을 넓혀가므로 철학자들은 예술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예술이란 없다, 다만 인간이 있을 뿐이다"라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마르크 샤갈 ㅣ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1
인고 발터 지음, 최성욱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독일의 유명한 미술전문 출판사 Taschen의 <베이직 아트 시리즈> 중 한 권인 『마르크 샤갈』의 책날개에는 샤갈의 진면목을 살펴볼 만한 샤갈의 말이 있다. “선한 사람이 나쁜 예술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선하지 않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선한 사람이란 말은 나쁜 예술가란 말의 개념만큼이나 모호하지만, 선하지 않다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은 더욱 모호하다. 어쨌든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샤갈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가란 위대함보다는 선함이란 덕목을 갖춰야 하는 존재란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마르크 샤갈이란 이름에서 우리는 그의 작품들이 지닌 몽환적인 이미지 못지않게 그 자신에게서도 몽상가의 이미지를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샤갈의 작품에서 특정한 유파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으며, 샤갈 이후에도 샤갈처럼 그리는 작가를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내게 그는 전무후무한 예술가다. 저자 인고 발터는 그를 “긴 생애 동안 주변인으로, 예술적인 기인으로 살았다. 샤갈은 다양한 세계를 연결하는 중개자였다, 유대인이었지만 우상을 금하는 관습을 당당히 무시했고, 러시아인이었지만 자기만족에 익숙한 나라를 뛰쳐나왔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지만 프랑스 미술계의 세련된 세계로 도약했다.”고 평한다.


러시아 지역을 포함한 중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을 아슈케나지라 부르는데, 이들은 스페인계 유대인인 셰파르디와 더불어 유대인을 구성하는 최대 집단이다. 한때 이슬람이 지배했던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가 완료된 1492년 이후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을 포함한 대규모 유대인 박해가 있었던 것처럼 18세기 이후 20세기 초엽까지 동유럽(특히, 러시아)에서도 포그롬(pogrom)이라는 대규모 유대인 박해가 있었다. 마르크 샤갈은 이런 시대(1887년 7월 7일 출생)에 러시아에서 태어나 성장한 유대계 러시아인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아슈케나지의 공동체 언어였던 이디쉬어 보다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박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양친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는지 몰라도, 러시아와 유대계 혈통이란 이종교배의 덕분으로 그는 유대공동체 문화와 러시아 문화를 결합시킨 독특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리라.


인고 발터와 라이너 메츠거의 공저인 『마르크 샤갈』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균형 잡힌 미술 서적의 면모를 보인다. 작가의 생애를 중심으로 작품세계의 변모를 살피는데, 문자 텍스트와 도판을 적절하게 안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구성은 러시아에서 보낸 소년시절을 통해 샤갈이란 독특하고 모호한 세계관의 형성과정을 독자로 하여금 짐작해볼 수 있도록 한다. 그는 러시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통해 정교에 바탕을 둔 러시아의 민속/민중(folk)문화와 유대교적 전통이라는 모순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평화롭게 해결한다. 파리 생활을 통해 그는 유럽의 변방인에서 중심으로 진출하게 되고, 고향을 떠난 샤갈의 향수는 파리의 세련된 문화와 만나 한층 더 고양된다. 하지만 전쟁과 러시아 혁명은 파리의 이방인이자, 세계의 이방인이었던 샤갈에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샤갈은 러시아 혁명의 초창기 동안 혁명을 지지하는 예술가의 일원으로 짧지만 혁명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성향은 정치와 예술을 병행할 수도, 예술을 종속시킬 수도 없었다.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치에 위협받게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파리를 떠나긴 했지만 전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파리 시민이란 위치에 안주했던 것은 아닌 듯싶다. 그가 즐겨 그렸던 “서커스단”은 샤갈의 영혼 속에 깃들어있을 모티프(motif)들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데, 샤갈 자신은 “내게 서커스는 마술적인 쇼다. 태어나고 다시 사라지는 세상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세상은 생기 넘치는 카니발의 소란스러움, 흥겨운 음악과 놀라운 마술, 기이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낯설음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서커스 무대에서는 세상의 법칙이나 규율은 간단히 무시되고, 그 어떤 신기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길 바랐다. 그는 그런 변화의 근원이 마음과 영혼에서 비롯된다고 믿었고, 마음과 영혼에서 일어나는 변화만이 사회구조나 예술의 변화를 촉진하는 삶의 열쇠가 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의 박해와 유대민족을 구성하게 되는 거대한 에피소드인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그린 샤갈의 작품, 정중앙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이 커다랗게 묘사되고 있다. 십계를 들고 있는 모세와 수탉, 거꾸로 유영하는 사람들, 불타는 마을,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여인(마리아)과 염소. 샤갈의 「출애굽기」를 보면서 마치 불교미술의 만다라를 보는 듯한 마음이 든 것은 아마도 샤갈의 작품 세계가 이렇듯 절묘하게 모순이 균형을 이룬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 아닐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내 영혼의 음악 - 김정환 지음 | 청년사 | 2001


시인 김정환은 클래식음악 매니아로도 널리 알려진 편이다. 음악을 언어로 풀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음악은 물론 문학이나 미술 모두 감정에너지를 창조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점에선 공통되지만, 음악이 언어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었다면 구태여 바흐나 베토벤이 음악을 만들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을, 그것도 이론이나 음악사가 아니라 감상을 언어의 형태로 풀어내는 일은 어렵다. 단순히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시(詩)에 대해 내리는 모든 정의가 오류의 역사이듯 그 또한 오류를 반복하는 일이 될 게다. 그것이 어려우므로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나서 단순히 몇몇 찬사를 반복하는 것으로 감상평을 매듭짓곤 한다. 그런 점에서 ‘훌륭하다’거나 ‘걸작’이라거나 ‘불멸의 명반’이란 표현은 진부하지만 차라리 정직할 수 있다.

아마도 김정환은 그런 점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내 영혼의 음악』의 책날개에는 이런 광고 문구가 있다.

“그는 음악관련 형용사가 ‘훌륭하다’ ‘걸작이다’ 등 8개 정도에 불과한 기존 책들을 보고 ‘열받아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다른 책들이 상투적인 극찬과 백과사전식 나열에 그쳤다면, 이 책은 음악을 소화한 다음 그것을 문학적 표현으로 옮긴 또 하나의 창작입니다. 또한 다양한 사진과 그림 자료를 수록하여 ‘귀’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줍니다.”

만약 출판사의 표현대로 그가 남다른 감상평 혹은 비평을 통해 본래의 의도를 관철해냈다면 『내 영혼의 음악』은 클래식음악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넓히는, 거두기 힘든 성공을 거둔 책일 것이다. 문제는 광고 문구가 말하는 ‘기존’의 책들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출간되고 있는 웰 메이드(well-made)된 클래식 입문서들 가운데는 저런 비판에 어울릴 법한 책이 많지 않다. 문제가 있다면 그런 책들이 대개는 일정한 심도를 획득하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수준의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클래식음악 감상자 층이 날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클래식 감상자들의 수준은 다른 장르에 비해 높은 편이고, 감상의 역사 역시 오래 되었다. 클래식음악의 세계에서 ‘불멸의 명반’이나 ‘명연’이란 칭호를 얻는 것들은 연주가 음반에 수록되기 시작한 이래 일정한 보편성을 획득한 연주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김정환의 『내 영혼의 음악』에 수록된 음반들은 앞서 이야기한 보편적인 명반이기 보다는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란 점은 언급해두고 싶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이 『내 영혼의 음악 - 시인 김정환의 명반 150선』이 된 까닭이다. 누구도 아닌 나의 영혼이고, 누구도 아닌 시인 김정환이 선정한 명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명반 150선을 무시할 필요도, 굳이 동의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그가 선정한 명반 150선의 보편성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으며, 문제 삼을 능력도 없다는 뜻이다. 다만 문제를 삼고 싶은 것은 저자의 지나치게 넘치는 문장들이다.

이 책의 어느 편을 펼쳐보아도 김정환의 날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이 점은 장점일 수도 있는데, 문제는 저자의 주관적이고 독특한 문장 습관들이 반복되어 사용되다보니 어느새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다음의 문장들을 살펴보자. 158-159쪽은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표시해둔 것이 아니라 아무 페이지나 그냥 펼친 것이다. 단 두 페이지에서 문장 하나가 한 문단을 이루는 경우가 정확하게 네 번 나온다.

"스트라빈스키가 디아길레프 <발레 뤼스>의 세련되게 야만적인 러시아풍 무용음악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다가 전위적인 야만 그 자체로써 서양음악-무용계를 경악시키며, 그렇게 스캔들을 통해 현대음악의 대표주자로 급부상하는 과정은 이제 보면 현대음악적이라기 보다 대중문화적이다."<158쪽>

"그러나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디아길레프의 영향력은 단지 막강할 뿐 아니라 자유자했고 또 정확하기도 했다."<158쪽>

"그러나 그 길은 디아길레프에 의해 일단 차단되었다."<159쪽>

"디아길레프는 <병사이야기> 무대화를 거절하고 그 대신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 작곡가 페르골세시의 악보를 건네면서 무용음악 <풀치넬라> 작곡을 유도했다." <159쪽>

문장 하나가 문단 하나를 이룰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만한 내용인가를 생각해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러나’라는 접속부사가 두 번이나 문장 첫머리에 오며 남발되는 경향을 보인다. 기왕에 옮겼으니 159쪽의 나머지 문장도 살펴보자.

"페르골레시 음악을 거의 짜맞추기 한 것에 불과한 <풀치넬라>는, 디아길레프의 의도대로, 놀라움을 안기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렇게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의해 신고전주의가 탄생하는 것이다."

또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184-185쪽에 이르는 마지막 제5장은 ‘그리고’라는 접속부사로 시작한다. 다음 문단은 ‘그러나’로 시작한다. 한 문단 건너 띄고 다시 ‘그리고’로 끝난다. 이것이 이 책의 한 장이다. 어떤 문장은 지나친 단언을, 또 어떤 문장은 ‘~하기도 했다.’ ‘~낼 것이다’와 같이 명확하지 않게 끝낸다. ‘말줄임표’ 역시 별다른 이유 없이 남발되고, 반문으로 끝나는 문장 역시 지나치게 많다.

189쪽을 보자. "이게 무슨 소린가? 지휘는 예술이 아니란 말인가? 천만에. 클라이버의 지휘에는 해석이 없단 말인가? 노." 그리고 이 뒤에 나오는 문장에는 "분명"이란 단어가 연거푸 사용된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과 7번 음반은 나 역시 즐겨듣는 음반인데, 이 글을 읽고 나니 갑자기 연주에서 물음표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책은 음악을 소화한 다음 그것을 문학적 표현으로 옮긴 또 하나의 창작입니다."란 표현이 무색하게 『내 영혼의 음악』에는 미처 걸러지지 않은 듯 저자의 생경한 목소리가 너무 많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시 음악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 사실을 절감하게 해주는 책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말하기의 다른 방법(눈빛시각예술선서 7) -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이희재 옮김 / 눈빛(2004)





존 버거(John Berger)의 화려한 약력, 국내번역본 목록이 증명해주듯 국내에도 그의 독자들이 상당히 많은 듯 싶다. 어제도 그의 애독자 한 사람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글은 그런 점에서는 그 독자 분에게 빚지고 있다. 사실 그 전에도 존 버거의 책을 몇 권 읽어보았으나 느낌만 있을 뿐 뭐라 말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어서 '입 닥치고 잠이나 자'란 무슨 노래가사처럼 그렇게 있었다. 그 느낌은 지금도 매한가지인데 그냥 갑자기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것도
"말하기의 다른 방법(Another Way of Telling)"으로 여겨졌다.


1926년 런던 태생으로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80세에 이른다만, 그에 대한 별세 소식은 아직까지 듣지 못했으므로 여전히 알프스의 어딘가 작은 산골 마을에서 은거해 생활하고 있다고 추측만 해본다. 미술비평가, 소설가, 극작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 비평가라고 그에 대해 소개해주고 있는데
(내가 읽은 그의 글들은 대개 미술비평 혹은 사진과 관련된 글들이다, 부커상 받은 소설도 있다는데 안 읽어봐서), 이런 사람을 일컬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저 '글쟁이' 정도가 가장 좋은 말 같다.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나역시 그와 같은 삶을 꿈꾼다(언감생심으로나마). 애초에 그는 미술평론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좋은 사진작가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우리들의 사유, 사진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히는 데도 도움을 주는 글을 써왔다.


그 가운데 이 책,
"말하기의 다른 방법"은 제목에 모든 것이 녹아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제목이다. 책의 뒷 표지에는 존 버거의 서문 중에서 일부를 따온 이런 카피글이 있다.


우리는 산악지방에 사는 농부들의 생활을 담은 사진집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 마을과 인근 골짜기에 살고 있는 농부들이 지난 7년 동안 우리의 이 작업을 도와주었다. 여기 선보이는 것은 엄격히 말해서 그들의 삶이 일궈낸 작품이다. 우리는 사진에 관한 책을 내고도 싶었다. 오늘날 사진과 카메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사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진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사진은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 카메라가 발명되면서부터 계속 제기되어 온 이런 물음들에 대해서 답변을 구해보고 싶었다.


그, 그들의 답변은 사진이란
"말하기의 다른 방법(Another Way of Telling)"이란 것이다.


그는 사진작가 장 모르(Jean Mohr)와 공동으로 작업했다.
"내 카메라 너머에"는 장 모르의 글과 사진, "모습들"에서는 존 버거의 글과 장 모르의 사진, "만일 매 순간에..."는 장 모르의 사진에 존 버거와 장 모르의 글이 혼합되어 있는 방식으로 두 사람은 글과 사진(존 버거가 작업한 사진도 있고, 앙드레 케르테츠의 작품도 있다)을 번갈아 가며 하나의 질문에 공동의, 그리고 때때로 다른 형태로 답을 구한다. 그 과정은 흡사 구도자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카메라 렌즈는 매우 정직한 시골 농부의 시선을 따라가는 듯 보인다. 존 버거의 글도 그렇지만, 장 모르의 글 역시 정직함이 주는 품격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글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냥 글만 읽을 일도 아니고, 그냥 사진만 볼 것도 아닌 책으로 한 장 펼쳐놓고 소 여물 씹듯 오래도록 음미하고, 되새김질하며 읽는 글과 사진이란 또 얼마나 풍요로운 읽기의 다른 방법(another way of reading)인가?



셀프 포트레이트


- 장 모르

사진을 잘 찍으려면 자기 얼굴을 찍는 것과 다른 사람이 찍은 자기 사진을 수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자신이 사진 찍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이는 당혹, 불안 그리고 심지어는 공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나로 말하면 뚱뚱한 편은 아니다. 코가 크지만 터무니없이 길쭉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나는 내 얼굴 모습을 오랫동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처럼 보였으면 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그런 얼굴을 가지려면 삶의 방식도 달라야 했다). 나는 내 얼굴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그때마다 내 얼굴을 '위장'했다. 내 모습이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찡그리기도 하고 빛을 가지고 장난하기도 하고 카메라를 교묘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이렇게 연기하는 버릇이 고쳐진 것은 클로드 고레타(Claude Goretta)가 나를 소재로 하여 찍은 텔레비전 영화 "사람들 속의 사진가(A Photographer Among Men)"를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을 때였다. 그 처방은 너무나 강력해서 내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자기 약점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낸 채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진짜였고, 어떤 의미에서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의 모습에 대해서 난 더 이상 책임이 없었다.
몇 년 뒤 사진에 관한 강의를 하던 중 우리끼리 서로 돌아가며 사진을 찍어주자는 얘기가 나왔다. 내가 포즈를 취할 차례가 왔을 때 한 학생이 무심코 내뱉었다. "여기서 보니까 선생님은 사무엘 베케트를 닮으셨군요."
<본문 40-41쪽>



* 사진은 책 본문을 스캔한 것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르 클레지오 지음 | 신성림 옮김 | 다빈치(2008)




"이 출발이 기쁜 것이 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 프리다 칼로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에서 "석기 시대의 인간이 동굴의 벽에 그렸던 고라니 동물은 하나의 마법의 도구이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신령들(Geister)에게 바쳐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벤야민의 이 말을 프리다 칼로에게 대입시켜 보면 그녀가 그렸던 스스로의 모습들은 고대 제의(Liturgia)의 주술들에 해당한다. 물론 이 작품들이 누구에게 바쳐진 것인가를 해독하는 건 우스운 일이며, 그 대상을 한정 짓는 행위 자체가 비난 받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그 대상을 "디에고 리베라"라고 말한다면 말이다.
 
1925년 9월 17일 오후. 작은 체구에 짙은 눈썹을 지닌 한 소녀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충돌사고가 있었다.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남자친구 알레한드로(그는 프리다 칼로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오빠뻘 되는 친구로 프리다는 그에게 열렬히 빠져있는 상태로 스스로 그의 약혼녀 혹은 정부로 자임할 정도였다)와 함께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가슴 속에 뜨거운 열기를 품었고,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지닌 아리따운 소녀의 몸은 승객용 손잡이들이 달려 있던 쇠파이프에 몸 한복판을 관통 당했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 군데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석고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하다"고 훗날 술회했던대로, 몰핀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고통을 달래는 작업이었다.

 

내가 프리다 칼로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10년 안쪽의 일로 친구가 말해주기 전엔 알지 못했다. 나에게 멕시코 화가는 디에고 리베라를 비롯한 당시 멕시코 벽화운동가들이 전부였고, 디에고 리베라와 관련해 그의 부인으로 일자 눈썹을 한 여자 '프리다 칼로'란 사람이 있었다 정도였지, 특별히 이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곤 감상해볼 기회도 없었다. 아마도 대개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셀마 헤이악이 동명의 타이틀롤을 맡은 영화 "프리다"가 국내에 개봉되기 전까지는, 그 덕분에 갑자기 프리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당시 우리 말로 인터넷에 올려진 거의 유일한 사이트였던 내 홈페이지에 프리다 칼로를 검색하다 찾아든 낯선 네티즌들 숫자가 상당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의 저자 " J.M.G. 르 클레지오"는 우리에게도 "조서(調書)"란 작품으로 상당히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소설가다. 르 클레지오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접하게 된 것은 그가 1970년대 멕시코의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면서다. 그는 이곳에서 '비둘기와 식인귀(食人鬼)의 만남' 이라고 그 스스로가 표현한 대로 특별한 열정과 사랑, 증오로 똘똘 뭉쳐져 있던 이들 부부에 대해 관심갖게 된다. 르 클레지오는 프리다에게서 멕시코의 신화적 세계를 발견했다. "프리다는 고대의 멕시코였다. 그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창조적 영혼 그 자체였다. 신화의 피를 뒤집어 쓰고 지칠 줄 모르는 기억의 파도에 흔들리는 그녀의 영혼은 서구 세계에서 무언가를 배워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살 속에서 뽑아내기라도 하듯 스스로의 내부에서 아주 옛날부터 존재해 온 정신의 편린을 길어 올렸다."

 

책 제목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 프리다 칼로도, 프리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도 아니다. 비록 르 클레지오가 어느 한 쪽은 비둘기로, 다른 한 쪽은 식인귀로 말하긴 했지만 이들 부부의 어느 한 쪽의 부도덕함을 지탄하기 위해 이 평전을 쓴 것은 아니란 뜻이다. 예술사적으로 보았을 때, 부부 모두가 예술가일 때 비교적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재즈나 블루스 가수들이 마약이나 빈곤, 차별로 인해 요절하지 않은 사례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예술가들의 이미지에 주술적인 이미지를 덧칠해 신비화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최소한 내가 접해온 실제 예술가들의 삶 혹은 그네들의 정신 세계를 엿본 경험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부부'라는 일종의 계약 관계에 충실할 수 없는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그들은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훔쳐 본 죄로 사슴으로 변해 사냥개의 습격을 받고 온몸을 갈갈이 찢기운 악타이온의 화신이자, 자연과 미풍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아내의 오해를 받아 실수로 아내를 죽이고 만 케팔로스 같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타인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거나 소유할 수는 있어도, 타인에게 종속되거나 소유되긴 어려운 인물들이란 말이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들끼리 만난 경우, 거기에 같은 장르에 종사한다고 했을 때 그 관계가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은 눈앞에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 로댕과 까미유의 관계를 아는 이들이라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와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아서 조지아 오키프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의 사례들도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건 예술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례들이 이런 경우를 더욱 돋보이게 할뿐이란 거다.

 

어린 프리다가 그를 최초로 만난 것은 1923년 디에고가 멕시코 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교육부가 주문한 프레스코 벽화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디에고는 벌써 꽤 이름난 화가였고, 이미 복잡한 여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당시 그의 연인인은 루프 마린이었는데 그녀는 디에고의 주변 여자 관계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대응하고 있었다. 디에고가 벽화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루프 마린은 그 주변에서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때 작업장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한 어린 소녀가 떠밀리다시피 해서 작업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 날의 순간을 디에고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 볼리바르 강당의 작업대 위에서 '인간의 창조'를 주제로 프레스코 벽화 초안을 잡고 있던 디에고는 자신을 지켜보던 소녀를 마주 보았고, 작고 어린 소녀 프리다는 이 거인에게 '그가 일하는 모습을 좀더 지켜보고 싶으니 작업을 계속하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를 통해 디에고 리베라가 그녀와의 만남을 매우 신비로운 것이며 운명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려는 느낌을 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를 어떻게 해석하든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필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는 여인의 삶과 살을 탐닉하던(디에고 리베라에게 식인귀란 별명이 붙은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퍼뜨린 이야기. 의대에서 해부학 수업 중 죽은 여인의 인육을 먹었다는 것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 편력 탓이 더욱 크다), 산을 뽑아 옮길 수 있건 없건 간에 거인으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바칠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프리다 칼로에게 잘 어울리는 말일 수 있을까? 1970년대 페미니즘이 기세를 떨치기 전까지 프리다 칼로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단지 프리섹스주의자, 양성애자, 스탈린주의자 그외 디에고 리베라의 세번째 부인 등등으로 불렸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한다. 이 말을 프리다 칼로에게 들이대면 그녀가 맞닥뜨렸던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20세기 여성들이 맞닥뜨린 세계의 한계였다고 풀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성은 과연 자신의 육신과 정신으로 홀로 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프리다 칼로가 보여준 대답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보잘것없는 평가에 그쳐야 했던 프리다 칼로를 되살려 낸 것은 여성주의 비평가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프리다 칼로는 때로 <쥴 앤 짐>의 '잔 모로'나 '바람같은 베티'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프리다 칼로에게 드리워진 디에고 리베라의 거대한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이며 동시에 디에고 리베라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홀로 설 수 있었던 프리다 칼로를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프리다 칼로는 결코 비둘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코요아칸의 하늘 위로 유유히 떠 있는, 아름답고 매서운 한 마리 매였다. 그녀에게 가장 행복하고 불행한 사실은 그 매서운 눈초리가 바라본 것이 언제나 디에고 리베라였다는 것이다.

 

"일생 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디에고는 평생을 두고 프리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미국에서 돌아온 디에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한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었고, 유산으로 갈갈이 찢어진 몸으로 돌아온 프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으며 어린 시절 서로에게 가장 애증의 관계로 엮였던 동생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디에고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 때의 고통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배신자 디에고에게 보내는 한 장의 편지와도 같은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그가 배반의 칼날로 자신을 후벼 판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의 저고리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구요." 사실 디에고가 자신과 결혼한 여인의 여동생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인이란 사실을 망각했다. 디에고와 헤어져서 몇 달을 보낸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디에고는 이 일을 자랑삼아 떠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1937년 프리다는 더 이상 디에고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초청을 받아 디에고의 곁을 떠난다.

 

1941년 초 디에고는 더 이상 프리다가 없는 삶을 견딜 수가 없었고, 그것은 프리다도 마찬가지였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샌프란시스코로 불러 두 번째 청혼을 했다. 1949년 디에고 리베라의 창작활동 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미술학교에서 개최된 성대한 전시회에서 프리다는 처음으로 디에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글을 발표했다.

 

"나는 내 남편 디에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우스운 일이게 되겠지요. 디에고가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애인으로서의 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를 아들처럼 다루며 이야기한다면 그건 디에고에 대해 묘사한다기 보다 내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거나 그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묘사하는 일일 뿐입니다."

 

푸른 집(코요아칸의 집을 이렇게 불렀고, 프리다 기념관이 되었다)과 철제 코르셋(척추의 부상으로)의 견고한 이중 감옥에 갇힌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바친 사랑은 마치 종교와도 같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인간이 신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결국 경배를 보낼 나란 존재가 없다면 신의 존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광명의 빛이었으며 메마른 대지로부터 솟아오르는 한줄기 감로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디에고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적금 통장을 털어 달아나듯, 신과 자연과 생명의 넘쳐나는 사랑을 인간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디에고 역시 프리다 곁을 떠나고자 했다.

 

디에고가 프리다의 곁을 진정으로 떠나고자 했던 것(바람을 피웠다거나 외도가 잦았다는 것은 프리다에게도, 디에고에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음을 전제하고)은 그의 평생동안 단 한 차례의 일이었고, 그 한 번이 프리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물론 이들 부부의 재결합 이후에도 디에고는 여전했다. 그는 계속해서 놀라운 창작열을 보였고, 다른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였다. 남자들의 혁명은 죽음을 부르는 권력이었고, 그것은 여성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혁명은 그들 스스로에게 삶의 고통과 사랑을 책임으로 짊어지웠다.



프리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디에고, 탄생/ 디에고, 건설가/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약혼자/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연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나/ 디에고, 우주/ 디에고, 통일 속의 다양함/ 그런데 왜 나는 '나의 디에고'라고 말하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닌데. 그는 오직 그 자신의 것일 뿐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디에고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녀의 푸른 집과 철제 코르셋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는 생명과 죽음, 사랑과 증오, 우주와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그림들을 그렸다.

 

오른발의 회저병이 도져 결국 오른발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프리다는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왜 다리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수술이 끝난 후 프리다는 "한쪽 다리를 잘라냈다.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정신적 충격과 형액순환마저 바꿔놓은 불균형이다. 수술한지 일곱달이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누워있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디에고를 사랑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그림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다. 디에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디에고가 죽는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뒤를 따르리라. 우리는 함께 묻힐 것이다. 디에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디에고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그는 아들이자 어머니이며, 배우자이고, 그리고 내 전부이다."

 

프리다는 세상에 온지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6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폭우가 쏟아졌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뒤 일년이 채 못된 1955년 6월 29일 오랜 조력자 중 하나였던 엠마 우르타도와 조용한 결혼식을 치뤘다. 디에고 리베라의 누이었던 마리아 델 필라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은 죽기 직전의 프리다가 엠마에게 부탁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엠마에게 자신이 죽은 뒤, 디에고와 결혼하여 그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엠마와 디에고의 결혼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4개월 뒤 디에고도 이승을 등졌기 때문이다. 디에고는 유언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여인과 영원히 합쳐질 수 있도록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돌로레스 시민묘지의 유명인사 구역에 매장했다.

 

종종 어떤 예술가들의 평전은 반드시 다른 예술가에 의해 정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학자나 학문적 연구자 혹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널리스트 보다는 차라리 다른 예술가의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될 때가 있는데, 이 두 사람의 삶을 다룬 르 클레지오의 이 평전이 그렇다. 정제된 문체로 정리된 두 사람이자 하나의 영혼으로 연결된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감동받는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그 감동의 대부분은 프리다에게서 온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성의 미학 - 진중권, 미와 쿄코 | 세종서적(2005)


내가 처음 진중권을 주목하게 된 것은 그의 요설스러운 독설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종종 그의 독설이 방향타를 잃었다고 비난 받을 때도(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 자신이 그렇다고 느껴질 때조차) 그에 대해서는 한 수 접어주고 보았다. 그만큼 그(의 글)에 대해 받은 첫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인데 나에게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준 책은 이 책 "성의 미학"이 나온 세종서적의 다른 책 "춤추는 죽음"1.2권이었다. 예전에 알라딘에 짤막한 서평을 올린 적이 있는데(그 무렵엔 500자던가 리뷰에 제한이 붙어서 길게 쓰질 못했지만, 다시 쓰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춤추는 죽음"이 서양미술에 나타난 타나토스(Thanatos)에 대한 책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개념인 에로스(Eros)도 언젠가 나올 것이란 생각 때문에 나름대로는 간절하게 에로스를 다룬 그의 저서를 기다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국내 저자가 쓴 서양미술 서적 가운데 그것도 죽음(타나토스)이란 테마를 가지고 그렇게 깊이 있게 저술된 책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지적해두고 싶은 건 최소한 중세의 죽음에 관한한 진중권도 필립 아리에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야 당연한 귀결일테고, 그와 상관없이 "춤추는 죽음"은 판갈이해서 언제 다시 출판할까 기다려졌을 만큼 좋은 책이었는데, 당시의 만듦새는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이번에 보니 다시 판갈이해서 며칠 전에 출간된 것 같다. 아마도 "성의 미학"을 출간하면서 이 책도 판갈이해 재출간한 것 같다. 양장본이라니 구미가 당겨서 일단 보관함에 넣어둔다("춤추는 죽음"은 절대 손해보지 않는 책이니 특히 권하는 바이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성의 미학" 이야기를 해보자. 책 머리에 진중권이 밝히고 있듯 아니, 그보다는 신화적 세계의 틀 안에서나 우리의 일상에서나 매일반으로 일어나는 일들인 삶(에로스)과 죽음(타나토스)은 진중권이 "삶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와 자연에서 삶을 퍼 올리는 생식의 신 에로스"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나 같이 둔한 사람도 죽음을 다루었으니 삶(사랑)을 다루는 책이 나올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춤추는 죽음"에서 진중권이 주가 되고, 미술사가(아내) 미와 쿄코가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 책은 반대로 미와 쿄코가 주가 되고, 진중권이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 역할 분담이 어느 정도로 이루어졌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저 책 읽는 독자의 감각으로 보았을 때 공동 지은이로 되어 있지만 미와 쿄코가 지은이, 진중권은 옮긴이가 아닐까 싶을 만큼, 이 책에서 진중권의 예리함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진중권 문장의 힘은 사유의 여백에서 온다기 보다는 하나하나 가득차 있는 요설스러움에서 온다. 그의 문장이 끌고 가는 대로 질질 혹은 자발적으로 끌려가다 보면 어느샌가 그는 예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해 들어온다. 그것이 마치 낚시 바늘 끝에서 살짝 벌어진 날카로움처럼 의식의 한 귀퉁이를 푹 찌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한 구절처럼 '지금은 살아있지만 언젠가는 죽어서 우리들 안으로 들어올 그대여 기억하라. 죽음을...'처럼 그렇게 피해갈 수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그에겐 지극히 평범한 인식조차 범상하지 않은 무엇으로 탈바꿈시키는 문장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선 그런 재미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이 책에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이런 류의 책이 여러 종 출간된 현재의 상황에서 그 장점들은 그렇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볼 거리가 없거나 잘못 만들었다거나(그렇다고 하기는 커녕 만들어진 것이나 글의 내용은 오히려 튼실한 편이다) 하는 건 아니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실망의 폭만큼 잔혹해져서 별 셋 이상 줄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페로티시즘(Feroticism) - 김영애 | 개마고원(2004)

 

이 책은 지난 2004년 나오자마자 구한 책이었다.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무렵 소위 예쁜 그림들(에로틱한 그림들)에 대한 흥미가 생겨서 궁금해 하고 있던 차에 "페로티시즘"이란 제목이 주는 묘한 이끌림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6,000원 다주고 사기엔 아까울 수도 있지만 13,000원 내외로 구입한다면 그렇게 아깝지는 않을 것 같다. 돈으로 책의 값어치를 매길 수는 없겠지만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해도 좋을 만큼 나이가 들어버린 아저씨이므로 돈으로 가격을 매기는 것이 제라늄 화분이 있는 집 어쩌구 떠들어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해된다.

 

농을 약간 섞어 이야기하자면 이 책의 제목 "페로티시즘=feminism + eroticism"의 등식보다는 "fetishism+eroticism"의 등식이 이 책에는 더 적합할 것 같다. 아마 저자의 별도의 설명이 없었다면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것인줄 알고 보았을 것이다. "페로티시즘"에는 요사이 유행하고 있는 몇몇 개념들이 들어 있다. 그 하나가 저자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페미니즘이고, 다른 하나는 에로티시즘 그리고 몸(body)이다. 저자의 고집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도 괜찮다고 여긴 탓인지 모르지만,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지금 만만하게 논의될 성질의 것들은 아니다.

 

게다가 저자는 이런 말들을 하기 위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푸코, 사드, 바타이유, 프로이트, 라캉, 마르쿠제, 들뢰즈 가타리, 보봐르 등등 에로티시즘 내지는 성과 사랑, 욕망에 대해 한 마디쯤 했음 직한 사상가들을 죄다 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매우 어렵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두어야 하는 건 이들을 끌어낸다고 해서 이들이 저절로 무언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표4(뒷표지)의 광고 카피처럼 새겨져 있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좀 더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욕망, 혹은 치유? 에로티시즘은 무엇인가?"

 

"섹스"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가능할까? 의문이지만(학문의 영역에서 정의내리는 일은 가장 어렵고, 폭력적이란 생각을 종종 한다) 최소한 내 개인적인 범주 안에서의 정의로 보았을 때, "섹스는 대화다"라고 정의하는 편이다. 대화를 서구적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이라 했을 때, 사회학이나 인류학에서는 인간만이 상징체계를 통해 사회를 경험하고 인식하며 다른 인간과 커뮤니케이션한다고 생각하고, 이 자체가 문화라고 생각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이 만들어 내고, 경험하는 사회의 총체적인 생활 양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랬을 때 내가 말하는 섹스란 결국 사회의 총체적인 생활 양식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무엇이 된다. 설명하기가 점점 더 난감해진다.

 

그만큼 성의 문제는 생식이나 욕망을 위한 섹스든, 철학적, 미학적 에로스의 문제든, 아니면 정치적, 사회적 젠더의 문제든 도자히 한데 꿰기 난망하기 그지없는 여러 바늘귀들을 하나의 화살로 동시에 꿰뚫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 이 책이 애초에 저자가 의도했던 바, 수준만큼의 성취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이 책의 의미가 반감되진 않는다. 모든 책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는데, 이 책에도 다른 책에는 없는 미덕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 자신이 솔직히 한계를 시인하고 출발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사실 미술비평(이론)서와 현실(작품) 사이에는 언제나 괴리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거기에 수용자(독자일 수도 있고, 감상자일 수도 있는) 사이의 괴리까지 포함하면 그 차이는 더욱더 크게 벌어지기 마련이다. 저자 자신이 그런 한계를 인정하고 들어간 덕분에 우리는 대중적인 에로티시즘 개설서 한 권을 얻은 셈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다소 어려운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다른 미술 서적들에 비해 읽기 어렵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적인 시각으로 사회와 예술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 관점에 선뜻 동의하기도 어려울 수 있는 것이 소위 가부장제 사회에서 태어난 여성들의 고민인데, 이 책은 그 점에서 첫 진입관문으로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나름대로 풍성한 도판들과 최근 미술계의 조류(국내 작가들이 소외된 것은 좀 억울하겠지만)들도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것은 흥미를 배가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구매를 고민하는 분들은 한 번쯤 책을 살펴본 뒤 이 정도면 괜찮다. 구태여 페미니즘적인 부분에 민감하지도, 민감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쩐지 흥미가 생기는, 에로틱한 그림들에 관심은 있는데, 그 작품들에 담긴 함의가 무엇인지 호기심이 있다면 더욱 좋겠다. 하지만 이 방면에 이미 많은 관심이 있고, 꽤 진도가 나간 분들이라면 구태여 볼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분들은 그런 분들대로 이런 책 놓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최근엔 이런 시각으로 다뤄진 미술 서적들이 꽤 여러 종 되므로 그 책들과 잘 비교해 살펴보는 거도 좋다.

 

이렇게 이 책의 장단점을 살펴보았는데, 다만 한 가지 꼭 지적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쿠르베의 작품 "세상의 기원"에 대해(에로티시즘이든 페미니즘이든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49쪽에서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소장한 것이 들뢰즈라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이 작품은 부다페스트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나치에 의해 압수되었고, 이후 개인 소장가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잘 알려져 있다시피 들뢰즈가 소장하게 되었다. 물론 이 때에도 그림이 너무 노골적인 것을 걱정한 그의 부인이 앙드레 마송에게 덮개그림을  주문하여 마송의 그림 아래 이중으로 숨겨져 있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진중권의 최근 저서 "성의 미학"(세종서적, 2005)에는 그 소장자가 들뢰즈가 아니라 라캉으로 되어 있다. 과연 누구 말이 맞는 걸까? 내가 확인해본 바에 따르면 1955년 이후 라깡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 맞는 것 같다. (진중권 말고도"팜므파탈"의 저자이기도 한 이명옥의 "사비나의 에로틱 갤러리"에서도 최후 소장자로 라깡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책과 비교해보기 전에 난 그것도 모르고 이 책만 믿고 들뢰즈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이런 젠장.... 책을 믿을 수 없게 되면 연구자들은 아주 죽어난다. 저자의 잘못이든 편집자의 잘못이든 이런 잘못은 그래서 치명적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2 3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