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 - 김형국 |열화당(1999)


▶ 진진묘(캔버스에 유채, 33.0×24.0㎝, 1970)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
의 저자를 굳이 따지자면 세 사람의 공동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이 책이 장욱진의 화집이란 점에서 당연히 대표 저자는 장욱진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화가 장욱진의 면모를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김형국 선생이 나서 돕고 있다는 점에서 김형국 선생 역시 이 책의 중요 저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화가 장욱진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살펴보고 그의 영혼의 반려로 이 책의 한 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저자는 장욱진의 아내 이순경이 또한 중요 저자다. 

 

장욱진 작품 가운데 "진진묘(캔버스에 유채, 33.0×24.0㎝, 1970)"란 것이 있는데, 이 작품은 1970년 1월 3일 불경을 외우는 아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덕소로 돌아가 7일 낮밤을 식음을 전폐하고 그렸다는 아내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장욱진이 아내의 모습에서 불성을 발견한 것이겠지만 얼핏 그냥 보아서는 불화라고 해도 될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또 보면 볼수록 묘한 그림이다. 표정하며 자세하며 아내같기도 하고, 보살같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그리고 나서 화가는 몇 개월동안 앓아 누웠고, 이를 불길하게 여긴 화가의 부인 이순경이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렸다. 그러나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 여긴 화가는 이를 두고두고 아까워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또한 화가 자신이 직접 제목을 붙인 몇 안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이에 대한 자료를 엮었다고 해도, 이 책이 장욱진의 화집인 이상 김형국과 이순경을 공동 저자의 반열에까지 올린다는 건 좀 어색하다. 하지만 이 두 사람과 장욱진의 관계는 한 사람은 부인으로, 평생의 반려이자 동지로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작품 세계를 널리 알린 카프카에게 있어 막스 브로트의 성격이란 점을 떠올려보면 공동 저자라 하더라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장욱진은 일본 유학 중 역사학자 이병도 선생의 맏딸 이순경과 결혼했다. 잘 알려진대로 이병도 선생은 우리 역사학의 태두이자, 우리 역사를 실증사학(어찌보면 싫증사학이지만)이라는 무미건조한 학문으로 고정시킨(더욱 큰 문제는 사관이 없다는) 책임이 있다고 비판을 당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사관을 강제로 주입하려 할 때, 우리 학자들이 모여 이에 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것이 '진단학회'였다는 사실까지 깍아내릴 필요는 없다. 한국어 사용조차 금지당하는 시대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가며 학회를 이끌고 '진단학회보'를 만든 업적은 후세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부정당해야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긍정적이었다. 어쨌든 장욱진은 이순경과 결혼한 뒤 평생토록 변치 않는 사랑을 함께 했다. 늘 혼자였던 장욱진의 작품 속 까치에게 가족이 생긴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징용경험과 한국 전쟁이란 힘든 경험들 속에서도 장욱진이 이중섭과 달랐던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이란 울타리 덕분이었다. 화가와 가족들은 어려운 살림이기는 했지만 잠깐 이산 체험 끝에 한데 모여 살게 되었고, 장욱진은 매우 행복해 했다. 이때부터 그는 가족의 모습을 작은 화폭에 옮겨놓기를 즐겨했다. 이 무렵 그린 작품 중 유명한 것이 <가족도>이다.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옹기종기 둘러 앉은 모습이 그에게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광경이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교수라는 신분과 직업의 안정에서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가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미술이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고 몹시 따랐지만 장욱진은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고,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친다는 그 자신의 감정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안주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타고난 화가였던 것이다.

 

이 무렵 장욱진의 동료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화가 이중섭이 굶주림과 외로움 속에서 병들어 먼저 세상을 떠난다. 장욱진은 그로부터 몇 년 뒤 교수직을 사임하고 만다. 때마침 4.19혁명을 앞둔 무렵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자주 시위를 했는데, 제자들이 매일같이 장욱진 곁에 모여들자 학교 당국은 그가 시위를 부추긴 것으로 추측했는데, 학교에서 불편해 한 탓보다는 그 자신이 떠나고 싶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청해서 교수직을 사임한 장욱진은 그 유명한 덕소생활을 시작한다. 그와중에 친분을 더욱 도탑게 나누었던 인물이 바로 김형국 교수이다.

 

훗날 장욱진의 묘비명을 김형국은 이렇게 적는다.

 

심플한 그림을 찾아 나섰던 구도의 긴 여로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땅 송룡 마을에 돌아와 영생처로 삼았다. 천구백구십년 세모의 귀천이니 태어나서 칠십삼년 만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화가였다. 어린 날 까치를 그리자 집안의 반대는 열화같았고 세상은 천형으로 알았지만 그림이 생명이라 믿었던 마음은 드깊어갔다. 일제 땅 무사시노 대학의 양화 공부로 오히려 한국 미술에 빛나는 정수를 깨쳤다. 선생은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가정의 안락이나 서울대학 교수 같은 세속의 명리는 도무지 인연이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움에다 착함을 더한 데에 진실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찾아 평생 쉼없이 정진했다. 세속으로부터 자유를 누린 대신, 그림에 자연의 넉넉함을 담아 세상을 감쌌고 일상의 따뜻함을 담아 가족 사랑을 실천했다. 맑고 푸근한 인품이 꼭 그림 같았던 선생을 기리는 문하의 뜻을 모아 최종태는 돌을 쪼았고 김형국은 글을 적었다. 천구백구십일년 사월.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은 작가의 화집으로 올컬러 인쇄라고는 하지만 부피만 놓고 생각해볼 때 그 부피에 비해 가격이 다소 높은 편이다. 다만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몇 가지 장점은 다른 책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장욱진의 매직 그림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장욱진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의 회고가 담긴 뒷 부분이다.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장욱진에게 시집와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동안 - 예술가의 아내로서 살아온 - 의 삶과 애환이 잘 녹아 있다. 애써 고상함이나 교양을 꾸미지 않아도 가장 고상하고 우아한 예술가의 아내는 고상하다. 


▶ 장욱진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http://windshoes.new21.org/art-changucchin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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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 황병기 | 풀빛(1994)




"국악"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유익서 선생의 장편소설
『민꽃소리』를 떠올리게 된다. 작품성 유무를 떠나 우리 소설에서 드물게 국악인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대강의 내용은 우리 음악을 하는 전통 명인들이 겪는 비극적인 사랑과 예술에 대한 추구를 다루고 있는데, 소설 자체의 재미도 있지만 그보단 내 개인적인 추억에 얽힌 일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내 기억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할아버지의 환갑잔치, 내가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7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그 무렵엔 우리 집안이 쫄딱 망하기 전이라 제법 규모있는 환갑 잔치를 치렀는데, 소리하시는 분들을 모셔다 잔치를 벌였던 기억이 난다.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칠순 잔치를 괜찮은 부페 식당을 빌어 그곳에 노래방 기계를 가져다 놓고, 부페 직원이 사회를 보는 것과 흡사할 것이다. 어쨌든 내가 만난 최초의 국악인은 할아버지의 환갑잔치에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밴드마스터처럼 쇠락한 분위기의 사람들이었다. 나의 이런 기억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종종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혹은 자주 대하고, 접하게 되는 지라 그 가치를 잘 모르는 일과 사람에 대해 흥미를 느낀다. 어떤 인물들은 그 사람이 한국 사람이기에 국내에선 도리어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음악인의 예를 들자면 윤이상 선생이 그렇다. 물론, 아는 이들은 알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음악인이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장르적으로 보았을 때 국악이 또한 그런 건 아닌가. 나 자신이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하는 사람이면서도 나의 이런 성향이 도리어 우리 음악에 대해 일정한 폄하 혹은 몰이해를 조장하는 건 아닌가란 반성이 든다.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는 우리 국악계의 존경받는 스승이자 훌륭한 가야금 연주자인 황병기 선생이 그간 이곳저곳에 발표했던 글들과 그가 국악을 연주하는 예술가로 살아오면서 느낀 것들을 정리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물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이 중심이라 그냥 황병기 선생의 에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가끔씩 황병기 선생은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들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이 책은 재작년쯤 헌 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가끔 글과 문장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특별한 문학교육을 받았을리 없는 이들에게서 문장의 힘을 느끼게 될 때 그 충격은 좀 더 커진다.  이 책에 수록된 황병기 선생의 글을 읽노라면 조금도 현학적이거나 멋을 부리지 않은 문장들에서 풍기는 고졸(古拙)한 멋이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런 순간은 정말 글이 곧 사람이라는 말이 맞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국악에는 '열 명창에 고수 한 명'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명창(名唱) 열 명 나오긴 쉬워도 훌륭한 고수(鼓手) 한 명 나오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국악을 전공한 이가 아니라면 이 말의 깊은 속내를 접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황병기 선생은 그 뜻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해준다. 「고법(鼓法)의 7단계」란 글 가운데 일부를 소개해 본다.

 

우리의 민속음악은 작품이 악보로 전해 온 것이 아니라 연주자들의 귀에 의하여 전해져 왔다. 즉 작품은 연주자의 귀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주자들은 서양음악에서보다 훨씬 주관적인 연주를 하게 된다. 게다가 판소리의 북 반주처럼 완전히 즉흥 연주를 할 경우에는 더욱 주관적인 연주를 하게 된다. 그러나 연주자의 주관이 극치에 달하여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신을 벗어나서 새로운 객관성을 얻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음악의 객관성이 철저한 주관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공자가 인생의 최고 단계라고 설파한"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대로 하여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경지와 상통한다고 하겠다. 완전히 즉흥적이면서 주관적으로 뜨겁게 연주하는 듯이 보이는 판소리의 북 반주는 사실은 철저하게 법도에 맞게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연주라는 무아의 단계에까지 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판소리 북을 유달리 '판소리 고법(鼓法)'이라고 부르면서 법(法)자를 강조하는 것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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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열화당미술문고 213』 - 장소현 | 열화당(2000)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잔느 에퓌테른느


굳이 우리나라와 일본만 그런 것은 아니고, 전세계적인 분위기이긴 하지만 미술 사조상 특정한 화풍에 대한 선호도로 따지자면 단연 '인상주의'풍의 그림들이 사랑받는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인상주의 화풍에 속하지 않음에도 인상주의 화가들 못지 않은 사랑을 받는다. 1884년 7월1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지방의 리보르노에서 출생한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수없이 복제된다. 누구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자신의 벽 어딘가 액자에 담아 걸어두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만큼 그의 작품들은 사랑스럽고, 따스하다. 

작품이 그럴진대 작가의 따스함은 오죽할까.

모딜리아니는 동료와 친구를 비롯해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지만, 유독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것은 단 한 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화가들의 관례처럼 자화상을 그린 것과 비교했을 때 그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던 이른바 '만남의 화가'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가 이 작품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붓 놀림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죽기 일년전에야 비로소 유일한 자화상(1919년)을 남겼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의 저자인 장소현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 대학원에서 동양미술사를 전공했으면서도 그의 직업은 극작가, 언론인, 방송진행자이다. 그는 몇 편의 희곡과 시집, 콩트집, 단편집을 발행하기도 했는데, 그런 덕분인지 책 속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그의 작품 속 누드 여인들이 그런 것처럼 발그레한 홍조를 띠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장소현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열화당 문고본 중 하나이므로 판형은 핸드북 정도의 크기로 작지만, 알찬 책이다. 모딜리아니에 대해 연대기순으로 따라가면서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함께 조망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모딜리아니 아메데오(Modigliani, Amedeo) 1902년경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 그의 재능에 가장 큰 위협이 된 것은 중학 시절 앓았던 늑막염이었고, 늑막염은 폐렴으로, 폐렴은 다시 폐결핵이 되면서 그의 건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요양을 위해 나폴리, 로마 등을 여행하던 중 마주치게 된 카마이노의 조각들은 그로 하여금 평생동안 자신의 조국 이탈리아와 예술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는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단테Dante, 페트라르카Petrarch, 레오파르디Leopardi, 카르두치Carduchi, 다눈치오Dannunzio 등 이탈리아의 위대한 고전 시인과 니체, 쉘리,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로트레아몽 등의 시를 줄줄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자신의 작품의 원천이자 영감이었던 셈이다.


1906년 22세 때 모딜리아니는 세계 문화예술의 수도 파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세잔느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단순하면서 우아한 곡선들은 세잔느의 영향력을 그나름대로 내면화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피렌체 미술학교 시절부터 회화보다는 조각가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는 파리에서도 브랑쿠시풍의 간결한 조형 양식을 발전시킨 독자적인 조각작품을 만들었지만, 어렸을 때 앓았던 병의 후유증으로 약해진 체력과 폐는 조각이라는 육체적 노동을 감내할 수 없었다. 결국 몽파르나스로 거처를 옮긴 모딜리아니는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 키슬리와 수틴 등과 사귀게 된다.

◀ 파리 시절의 모딜리아니, 1909년경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많은 친구들의 사랑을 받았고, 잘 생긴 외모 덕에
(내가 아는 서양 화가들 가운데 최고의 미남) 여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천성이 이방인이었고, 보헤미안이었다. 고향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으나 그에게 명성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예술적 성취에 대한 집념과 경제적 안정을 동시에 이룰 수 없었던 모딜리아니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술집에서 술집으로 전전하며 삶과 건강을 소진했다. 그는 항상 가난했지만 자존심만은 팔지 않았고, 그림도 멈추지 않았다. 평생 병약한 육체와 가난에 시달리며 예술혼을 불태운 모딜리아니에게 고흐의 동생 테오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그는 즈보로프스키였다. 즈보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의 예술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 주었다. 

딜리아니의 정신은 정처없이 떠도는 보헤미안이었으나 그의 심성은 연약한 식물성이었다. 그는 대상을 물리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기 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했다. 모딜리아니 시대의 초상화, 인물화는 더이상 회화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사진의 출현으로 회화에서 인물화는 사진과 경쟁할 수 없었다. 도구로서의 렌즈는 물리적이고, 광학적인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 도구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사람이요, 그 대상도 역시 사람이다. 따라서 렌즈를 통해 본 세상 역시 한 인간의 모습을 닮고 담아내게 된다. 사진이 예술일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도 거기에 있다. 모딜리아니 역시 그런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았다. 비록 가난하고, 보잘 것 없더라도 모델의 삶과 인생을 가까이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델과 대화를 나눈다.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모딜리아니의 마음이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따스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 덕이었다. 모딜리아니가 33세일 때, 잔느는 19세의 미술학도였다. 잔느의 집안은 독실한 가톨릭이었으므로, 가난한 유대인인 모딜리아니와의 결혼에는 극심한 반대가 따랐다. 잔느와 모딜리아니의 사랑은 모든 장애를 뛰어넘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이듬해 딸을 낳는다. 모딜리아니는 딸의 이름을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따서 잔느라고 지었다
.(이 딸 잔느가 후일 성장하여 미술사가가 되어 모딜리아니 연구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만든 평전 『모딜리아니:인간과 신화』의 저자가 된다) 이 시기가 모딜리아니의 인생에서 짧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잔느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모딜리아니의 음주벽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고,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1920년 1월 24일 창 밖으로 삭풍이 불어오지만 가난한 이들이나 머무는 자선병원. 여러 환자들이 누워있는 병실 하나 남은 난로마저 온기를 잃고 있을 무렵, 얼음장 같이 차가운 마루에 한 남자가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다. 쓰러진 남자 옆에 만삭의 몸을 한 여인이 남자의 손을 당겨 잡는다. 그녀는 남자를 조용히 내려다 본다. 이제 여인은 남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금전 죽음의 사신을 피해 버둥대다 침대 밖으로 떨어진 그의 침대 주변에는 몇 개의 빈 포도주 병과 반쯤 얼어버린 정어리 통조림이 뒹굴고 있다. 지저분한 침대 시트에는 남자가 토해낸 붉은 선혈로 흥건하다. 

여인은 떠나가는 남자에게 말한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 께요…"
남자는 잔느를 바라보며 ... 단 한 마디를 남겼다.
"그리운 이탈리아!(카라 이탈리아)"
(이때 이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말하는 많은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일설에는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아내인 잔느에게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잔느가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다. 다만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란 임신 9개월의 여자가 남편을 따라 투신자살한 사건은 인간도 동물인 이상 뱃속의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모성 본능을 초월한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1920년 1월 24일 20세기 서구회화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틀 뒤인 1월26일 그의 아내 잔느 에뷔테른느가 남편을 따라 투신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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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 치명적 여인들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 이명옥 | 시공아트(시공사) | 2008


인사동 미술갤러리 사비나의 관장 이명옥의 책 "팜므 파탈"은 이중적 재미를 제공한다. 하나는 요녀(妖女)의 이미지로서 팜므 파탈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주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사진술의 출현 이후 일정 부분 그 위치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서구 신사들의 점잖은 포르노물(?)들을 대거 눈요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간의 누드가 예술이 된다는 점에, 여기에 도덕적 금기를 들이미는 것은 창작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거기에 약간의 의문을 들이대고 싶다.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느꼈나?"하고 말이다. 빛바른 양지 쪽으로 인간의 누드를 끌어낸 것은 과연 얼마만의 일이며, 우리들 자신은 벌거벗은 여인의 몸이 예술이란 사실을 언제부터 스스로 인지하고 이해하게 된 것일까 하는 의뭉스러운 의문을 갖는다. 스스로 그런 생각에 도달한 것일까? 아니면 주변에서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대니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걸까?


누드를 예술로 인지한 것이 스스로의 힘이냐? 아니면 깨우침(교육받은)의 힘이냐?를 되묻는 것은 당신에게 정직하냐고 되묻는 것이기도 하다. 누드는 늘 정직의 문제를 묻기 때문이다. 마네의 1863년작인 '올랭피아'에 얽힌 이야기는 미술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제법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의 그림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림 속 모델의 나부가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림 속의 모델이 신화 속의 여신이 아니라 현실의 매춘부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즉, 당대의 문화비평가들에겐 누드 자체의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림 속 모델에게 신화 속에 등장하는 성녀 내지는 여신의 이미지를 덧씌워야만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즉, 아름다움은 발가벗은 여인의 몸 자체가 아니라 환상이었던 것이다. "기시다 슈"의 책 <성은 환상이다>를 보면 "처녀성"은 문명,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른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동양문화권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 "처녀성"은 그다지 대접받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불길한 것으로 폄하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여성을 재산으로 분류하는 문화가 강할 수록 여성의 처녀성은 강조되고, 처녀성의 파기는 재산상 손실을 입힌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본주의가 강화되면서 여성의 성에 부과된 환금성(換金性)은 결혼을 통해 보다 비싼 값으로 팔리게 되었고, 자유로운 연애와 섹스는 통제 받아야 하는 것이 되었고, 그에 따라 결혼은 더욱 신성한 것이 되었다.

서양미술에서 '요부 그리기'가 하나의 유행이 된 것은 많은 미술사가들이 인정하고 지적한 것처럼 19세기적 현상이었다. 지은이 이명옥은 이런 "요부 그리기 - 팜므 파탈"을 "잔혹, 신비, 음탕, 매혹"의 네 가지 구분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이 네 가지 구분을 통해 19세기 세기말을 살아갔던 예술가들이 느꼈던 팜므 파탈의 치명적인 유혹을 나열하고 있다. 모두 29명의 여성 이미지들을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 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넘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하다. 내가 이 책에서 넘친다고 느끼는 점은 그간 우리가 말로만 들었거나 혹은 익숙하지 못했던 지난 세기 서양에서의 팜므 파탈들의 이름과 그림, 그들이 느꼈을 법한 감흥들이다. 반면에 이 책에서 부족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팜므 파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통사적인 언급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등장 이래 재발견되거나 복권된 여성성의 다양한 갈래들 중 마녀와 팜므 파탈에 대한 해석은 시종일관 흡사한 면모들을 가지고 있는데 작가는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보다는 여러 팜므 파탈들을 소개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그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서구 회화에서 다루고 있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들이 아직 우리에겐 익숙치 않기 때문이란 사실을 먼저 인정해주어야 한다.

팜므 파탈을 보는 각도는 여러가지이다. 현실사회사적으로 보았을 때 팜므 파탈의 등장은 프랑스 혁명 이래 사회의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된 부르주아지들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로 확보한 자본 축적의 과정을 통해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맞이했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 햇살이 밝으면 그늘은 보다 짙어지는 법이다. 빅토리아 시대 겉으로는 귀족을 능가하는 예의범절과 세련미를 강조하였으나 그 이면에서는 무수한 불륜이 일어나고, 간통 사건 역시 급증했다. 참호전 양상을 띤 전선에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 폭발할 것 같은 절망을 잠재울 목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전선에는 군위안부 시설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은 일순 절망으로 바뀌었고, 그네들이 확고하게 믿었던 유럽 문명의 진보는 더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팜므 파탈 그리기는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즉, 유럽 자본주의 문명이 화농이 짙게 곪아 피부를 뚫고 올라온 고름자국이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관점은 여성들이 더이상 가정에 갇힌 한 떨기 꽃의 구실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거기엔 산업화가 초래한 측면이 있고, 유럽의 한 세대가 전멸하는 전쟁은 이런 여성의 사회진출을 더욱 촉진시켰다.

오랫동안 서양미술사 속의 여성상 혹은 여성을 모델로 한 예술작품들은 마치 일본 대중문화의 아슬아슬한 금기인 '헤어누드' 금지 조항을 회피하도록 강제되어 왔다. 예술가들은 그런 사회적 금기 속에서 에로티시즘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화적 이미지, 성녀 등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편법을 써 왔다.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 .미국)의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란 작품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성의 몸은 오랫동안 여성과 남성의, 여성과 사회적 편견의, 예술가들의 창작의 자유와 사회적 금기의, 우리 사회의 진보성과 보수성의 전장이 되어 왔다. 성서에 기록된 유디트는 유대 민족의 영웅이었고, 오랫동안 그렇게 묘사되어 왔다. 우리들에게 논개가 있다면 그네들에겐 유디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유디트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손에 이끌려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지긋이 바라보는 여성 이미지로 변화되었던 것이 19세기의 일이었다. 어째서 19세기에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이명옥은 목청 높여 팜므 파탈의 이미지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 대신 오랫동안 남성 예술가들 혹은 그들과 튼튼하게 공조했던 남성중심사회의 관객들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이들 팜므 파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사회적 맥락에서 왜 이런 작품들이 그려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팜므 파탈의 목소리들을 귀기울여 듣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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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의 문화디자인 : 삶과 철학이 있는 디자인 이야기  - 김민수 | 다우출판사(2002)

1. 8.15는 누구를 위한 해방이었던가?

지난 총선이 있기 얼마 전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으로 계신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을 뵈었는데, 임헌영 선생님은 참 변치 않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하게 되었다. 머리 위에 서리가 내렸다는 걸 제외하면 당신은 지금 물리적인 나이로 청년인 사람들보다 더 푸른 청춘이셨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우리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얼마전 누더기로 통과된 친일진상규명법과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관련한 예산을 국회가 삭감한 일 때문이었다. 그날 임헌영 선생은 1945년의 8.15를 해방이니, 광복절이니 하는 명칭 없이 그저 '8.15'라고 부른다 하셨다. 우리 역사에서 그 명칭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사건이 일어난 날짜가 명칭을 대신하는 일이 어디 한 둘인가? 그런데 8.15를 해방도, 광복도 아닌 그저 '8.15'로 불러야 한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 선생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8.15가 해방이라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해방이 아니라 친일파들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8.15란 그저 친일파들이 일본제국주의라는 그들의 상전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지 진정한 우리 민족의 해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투사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분들은 친일파들을 이 땅에서 청산해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 그들을 추적하고, 체포하고, 고문하고, 심지어 죽이는데 앞장 섰던 친일 무리들을 단죄하고 새롭게 해방된 내 땅에서 민족의 번영을 위해 일로 매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은 그런 독립운동가들을 바로 얼마전 출옥한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되돌려 보냈고, 그들을 형무소로 끌고 간 자들은 과거 고등계 악질 형사, 일제하 순사들이 대한민국 경찰 뺏지를 달고 다시 수갑을 채워 감옥으로 보냈다.

2. 재임용에서 탈락한 교수. 김민수
이 책 "김민수의 문화디자인 - 삶과 철학이 있는 디자인 이야기"의 저자 김민수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듯 장황하게 과거 청산 문제와 친일파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는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프랫인스티튜트와 뉴욕대학에서 수학한 뒤 모교인 서울대 디자인학부의 교수로 재직했었다. 그리고 그는 1998년 8월 31일 교수재임용에서 최종 탈락했다. 그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의심이 많은 이들은 김민수 교수의 재임용 탈락이 김민수 선생이나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들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 눈으로 과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판단해볼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 "김민수의 문화디자인"이다. 물론 그의 대표 저서 중 하나는 "21세기 디자인문화탐사"이다. 하지만 "김민수의 문화디자인"은 뒤에서도 다시 말하겠지만 이 책의 부제가 설명하고 있듯 그의 '삶과 철학이 있는 디자인 이야기'란 측면에서 그란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 책으로 생각되었다.

일반적으로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까닭으로 학교측에서 제시하는 것들은 대개 두 가지이다. 그것은 교수가 교수의 직분에 충실했는가인데, 사회적인 맥락을 제외하고 학교측에서 판단할 수 있는 직분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사로서의 교수이고, 다른 하나는 연구자로서의 교수이다. 그렇다면 김민수는 과연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당할 만한 사람인가? 그가 서울대로부터 재임용에 탈락된 표면적인 이유는 연구성과 부족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를 교수 재임용에 탈락하게 만든 책,『21세기 디자인문화 탐사: 디자인, 문화, 상징의 변증법』(서울: 솔 출판사, 1997)은 같은 해 "월간디자인" 선정 '97 올해의 저술상 수상작이었다. 그가 문학사상사 주최로 열렸던 "이상 사후 60년 집중 재조명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논문 "시각예술의 측면에서 본 李箱 시의 혁명성"은 해외의 권위있는 국제 디자인 학술지인 에 비교문화 연구의 지평을 확장시킨 논문으로 평가받으며 게재되었다. 명목은 연구실적 부실이었지만 그는 학교측에서 제시한 기준의 4배를 초과달성한 연구자였다.

3. 그의 재임용 탈락은 정당한가?
김민수 교수에 대한 학생들이나 동문들의 평가는 어떠할까? 그와 대학 동문이자 기용건축소 소장인 정기용은 어느 글에서 "학생들은 김민수 교수에게서 배우고자 하는데 그는 재임용에서 탈락된 것이다. 가만히 전후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모교의 교육상황이 예전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다시 한번 놀랐"으며 "김민수 교수의 재임용 문제는 결국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드디어 침묵하며 방관해 온 동문들의 입을 열게 하였고 그것은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방학숙제를 하루동안에 해내야 하는 절박함처럼 다가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학의 미술교육에 대하여 숨김없이 말하고 진지하게 논의할 시점"이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은 김민수 교수의 재임용을 강력히 주장하며 무학점으로 진행되었던 그의 강의에 동참하였다.

그렇다면 김민수 교수는 어째서 재임용에서 탈락된 것일까?
그는 1996년 10월 17일 개교 50돌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서울 미대의 역사를 다루면서 초대 학장을 지낸 장발, 동양학과 교수출신의 장우성, 노수현 등을 친일파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이것은 김민수 교수가 새롭게 발굴해서 소개한 내용이 절대로 아니다. 이미 지난 92년 전남대 이태호 교수가 발표한 논문 내용을 자신의 논문 각주에 삽입했을 뿐이었는데 그는 괘씸죄의 적용을 받았다. 장발은 4.19 혁명으로 총리가 되었다가 5.16군사쿠테타로 쫓겨난 장면 총리의 형이기도 하다. 이들의 친일 행적은 사학계에서는 이미 검증된 사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측은 김민수 교수측에게 문제된 부분의 삭제를 요구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논문집 게재를 거절했다. 결국 2년뒤 미술대 인사위원회는 재임용 과정에서‘연구내용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김민수에게‘재임용 불가’ 판정을 내렸다.

4. 삶과 철학이 있는 디자인 이야기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은 '다이달로스는 눈물을 흘린다 - 성찰'편으로, 제2장은 '디자인, 거짓말하며 수작을 걸다 - 발견', 제3장은 '사람의 디자인 - 인터페이스', 제4장은 '다시, 세상 속에서 디자인하기 - 반성과 전환' 이다. 나는 남의 글을 읽으면 내가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종종 연필과 포스트잇을 동원하는 것으로 대신할 때가 종종 있다. 이  책을 읽은 것이 대략 2년쯤 전의 일인데, 다시금 살펴보니 전체 272쪽의 책에 12장의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있다. 첫번째 포스트잇이 붙은 곳의 중요 문구는 이런 것이다. '내 눈을 처음 발견한 날' 이 책의 제1장은 디자인데 대한 자신의 성찰을 드러내는데 할애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에 와 닿은 것은 그 자신이 미술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그려왔던 석고 데생이 사실은 사물을 새롭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하는 예술가의 눈에 고정관념의 더깨로 들씌워졌음을 고백한다. 입시를 위한 조형교육을 통해 그는 끊임없이 사물을 인이 박힌 대로 윤곽선, 덩어리감, 명암, 반사광 등의 원리에 따라 관찰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포스트잇은 '시간의 켜'란 대목에 붙어 있다. 여기에서 김민수는 비엔나 미하엘광장 3번지에 있는 로스하우스를 둘러보았을 때의 감회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로스하우스는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의 친구 아돌프 로스가 건축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벽면에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건축 양식이란 특징을 보인다. 아돌프 로스가 이 건물을 지을 당시만 하더라도 오스트리아는 아르누보 양식의 여파로 장식을 대단히 중시하는 건축 양식이 유행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건물을 "눈썹이 없는 문둥이 건물 같다"며 비난했다. 그러나 20세기의 건축은 로스가 추구했던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저자인 김민수는 그로부터 "역사란 그런 게야!"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로부터 사물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세번째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곳은 이채롭게도 '루쉰과 디자인 정신'이란 글에 붙어 있다. 이채롭다고 말한 것은 솔직히 문과 출신들이 예체능 전공자들에게 지닌 뿌리 깊은 불신이나 편견 때문이다. 한 마디로 "니들이 '루쉰'을 알아"인데, 그것은 우리 학문적 지형의 편협함 때문이기도 하다. 김민수는 "우리의 문화예술이 지난 20세기 박정희 개발독재의 산업근대화 과정에서 아무 생각 없이 토해냈던 '무국적 사생아 문화 만들기'였던 것과는 달리 중국 디자인은 자신의 뚜렷한 목소리와 냄새를 지니고 있다"며 비슷한 시기 서구의 영향 아래 근대화를 추진한 아시아의 두 나라 중국과 한국의 문화적 풍토의 차이를 "사상적 뿌리"의 유무로 파악하고 있다.

네번째 포스트잇은 '디자인으로 세상 읽기 - 단상들'에 붙어 있다. 이곳을 펼치니 서울대 미대 50동 건물 앞에 세워진 장발의 동상 이야기로 시작된다. 지난 1996년 서울대가 스스로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추대한 장발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의 흉상 이야기와 운보 김기창 이야기이다. 장발은 1941년 일제에 그림을 그려 바치는 회화봉공을 맹세하고, 내선일체 군민합작의 총력체제를 갖춘 경성미술가협회에 참여했다. 물론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대동아성전에 이바지하는 보국예술가로서 군국주의 찬양에 열을 올렸던 분이다. 그럼에도 국립서울대학에서는 자발적으로 친일하신 분의 흉상을 만들어 세웠고, 그 뒷면에는 그뜻을 기리기리 길이고, 찬양하는 글귀를 새겨넣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는 이유는? 혈연, 지연, 학연의 질긴 네트워크 덕이다. 누가 자기 아버지를 욕할 것이며, 누가 자기 스승을 욕할 것인가? 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사실 거기엔 은밀한 이해관계가 숨겨져 있다. 친일파는 아직도 힘이 세기 때문에 거기에 빌붙어 기생하면 여러모로 현실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5. 김민수의 문화디자인 = 디자인+언어, 디자인+문화미학, 디자인+인문정신, 디자인+철학자, 디자인+자유
김민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은 지난 98년의 일이고, 올해는 어언 2004년이다. 그가 행정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복직되지 못하고 있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단순한 시간 계산으로 치자면 그의 투쟁은 세기를 넘겨오고 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천년, 수많은 학생들이 또 새학기를 맞아 희망찬 기대감으로 들떠있을 때 중세의 감옥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비둘기에 실어 보내며, 고뇌하는 나같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내가 지은 죄가 있다면 패거리 문화에 동조하지 않고 단지 진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것이 그토록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면 진짜 조폭을 시켜 차라리 나를 죽여다오."

나는 이 책을 통해 디자이너이자 학자이자 한 사람의 훌륭한 지식인으로서의 김민수를 만났다. 이 책의 부제 속에 '삶과 철학'이란 말이 나온다고 해서 이 책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다. 디자인이란 말은 본래 라틴어의 '데시그나레(designare)'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이 때의 뜻은 "지시하다·표현하다·성취하다"라고 하는데, 이렇듯 디자인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실체를 지닌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디자이너 김민수가 지적하고 싶은 것, 표현하고 싶은 것, 성취하고 싶어 하는 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와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민수 선생이 하루빨리 교직에 복직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끝으로 의회반란이 있었던 지난 3월 12일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경향신문> 칼럼에 썼던 말을 재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날 따뜻하니까 식민지 아닌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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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그림 여행』 - 스테파노 추피 지음 | 서현주 옮김  | 예경


세계적으로 이름난 출판사란 것이 있다. 프랑스의 갈리마르, 일본의 이와나미 같이 종합출판사로 명성을 얻은 출판사가 있는가 하면 예술관련 서적을 전문적으로 출판하여 명성을 얻는 전문출판사도 존재한다. 프랑스의 라루스, 영국의 파이돈, 독일의 타쉔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명성을 얻은 출판사들이다. 이것을 그대로 한국에 대입해보면 우리의 출판 환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데, 작년 한 해 우리 사회를 대변할 만한 여러 키워드들이 있었지만,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두드러진 것은 누가 뭐래도 "한류(韓流)"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란 말은 그 출처가 어디인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수식하는 말이었다(도대체 이렇게 시끄러운 나라를...그래서 최근엔 '다이나믹 코리아'를 국가이미지로 추구하는 건가) . 영국하면 신사의 나라, 프랑스하면 예술의 나라, 독일하면 철학의 나라, 오스트리아하면 왈츠와 모차르트가 연상되듯 국가에는 국가이미지란 것이 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노벨문학상의 향배를 가늠하며 한국 작가들의 수상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만, 문화부 기자들이라고 그 속사정을 몰라서 한국 작가들의 수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건 아닐 게다. 무엇이 문제인고 하면 제 집안에 황금송아지가 있어도 이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이 문제이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된 것들이 태부족인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70년대부터 정부차원의 국가 이미지 홍보 사업을 벌여왔다. 명칭은 해외공보관, 해외홍보원, 해외문화원 등으로 변경되고, 분화되어 왔지만 그 목적 자체는 같은 것들이다. 대한민국을 세계에 홍보하여 괜찮은 국가의 이미지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폄하할 필요도, 애써 격상시킬 필요도 없이 냉정하게(이 말은 또 얼마나 냉정하지 못한가?) 바라보려는 노력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번번이 민족감정에 휩쓸려 세계 속에서 제대로 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시아의 작은 경제 강국, 민주화 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나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독일이 폴란드,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란 사실을 안다. 칸 영화제가 어느 나라에서 개최되는지도 알고, 영국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연합 왕국이란 사실도 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도 국가이미지 홍보를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명사들을 선정해 국가이미지 홍보대사로 삼거나 각종 문화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미지를 개선하고, 홍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Frankfurt Buch Messe)이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TIBE, 볼로냐, 미국과 함께 세계 4대 도서전시회로 손꼽히는 행사로 오는 10월에 개최되는 이 도서전에서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선정되었다. 우리의 국가이미지, 출판수준과 문화를 알리는데 더할 나위없는 호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이 행사 준비에 여러가지 차질을 빚고 있어 주위의 염려를 사고 있다. 우선 이강숙 조직위원장이 지난 8월 사퇴한 이후 11월까지 수개월여를 공석으로 두었고(다행히 김우창 선생이 조직위원장이 되었다), 그나마 행사 준비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55개 사업을 48개 사업으로 축소, 예산도 265억원에서 237억원으로 축소) 애써 마련된 좋은 기회를 놓칠 위기에 처했다.

 

예경 출판사가 미술 출판이라는 외길을 28년간 걸어왔다는 것은 성과는 나중에 좀더 고민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축하해야 마땅하다. 게다가 예경은 외국의 출판물을 번역 출간하는데만 애쓰고 있는 그런 출판사가 아니란 점에서 역시 격려받을 만하다. 예전에 서평을 올린 바 있는 박용숙 선생의 "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가 있고, 강우방의 "미의 순례", 김영나의 "20세기 한국 미술", KOREAN ART BOOK 시리즈로 "금동불"부터 "탑파"에 이르는 우리 미술의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미술 분야의 책을 내는 것은 출판의 다른 분야에서도 매한가지 고충이긴 하지만 특별히 공은 더 많이 들어가고 상대적으로 실속은 적은 편이다. 도판 하나, 사진 한 컷 이용하려 해도 저작권 문제를 일일이 해결해야 하고, 이미지를 많이 다루는 책의 특성상 일반 인쇄용지말고, 고급지를 사용해야 하며, 책의 판형도 고려해야 하고, 컬러인쇄다 보니 인쇄 감리에도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미술 분야에 대한 독자층이 넓은 것도 아니다 보니 책의 가격 산출에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천년의 그림여행"의 정가 36,000원인데, "미술출판 28년의 한 길! 예경을 한결같이 성원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특별가로 드립니다"란 명목을 달아 19,800원의 임시특별가로 판매하고 있다. 그 자세한 내막이야 출판사 관계자가 아니니 알 수 없다. 문제는 36,000원이든, 19,800원이든 이 책이 그 값을 하는 책이라면 좋은 평을 들을 만한 것이고, 아무리 값이 싸도라도 제 값을 못하면 좋은 이야기를 듣기 힘들다. 그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 책은 좋을 평을 들을 만하다는 거다. 문제는 이 책의 용도인데, 만약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읽고 싶다면 그와 관련한 좋은 책들은 이미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이 방면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E.H.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거나, "생각의나무"에서 출간한 "라루스 서양미술사" 시리즈를 읽는 것도 좋다.

 

문제는 우리의 독서습관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만원에 가까운 책값을 지불했으니 이 책을 통해 본전을 빼야겠다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책날개에 적힌 글에 따르면 "천년의 그림여행"에 수록된 그림들을 이해하기 위해 별도의 이론서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라 장담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어찌보면 더더욱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권의 책으로 서양회화 1,000년의 역사를 이해하겠다는 욕심은 그 자체로 그릇된 것이다. 제 아무리 속도가 최상의 덕목으로 칭송받는 시대라 할지라도, "하룻밤에 읽는, 한 권으로 끝장내는" 류의 선정저인 제목 뒤에 따라오는 건 중국사, 미술사, 과학사 어쩌구하는 묵직하기 이를 데 없는 분야들이기 십상이다. 그런 책을 읽고, 그 분야에 대해 '다 알았소' 할 욕심이라면 광고와 상관없이 그것이 도둑놈 심보다. "천년의 그림여행"은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명확한 한계를 이미 노정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한계 속에서 이 책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으며, 한계를 보충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우선 이 책은 1,000년이란 시간적 제약을 두고 서양 회화를 살펴본다. 서양미술의 역사가 어찌 1,000년밖에 안되겠는가? 거기에 서양미술의 여러 장르 가운데 조각과 건축, 공예 등을 제외한 회화 분야에만 치중하겠다고 말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서양회화의 역사다. 시간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통사(通史)의 구조를 택하지만, 그 안에 140개의 개별 주제와 화가들을 나눠 담고, 다시 이를 본문페이지 상단에 지역별로 다른 색상을 인쇄해 구분해볼 수 있게 한다. 지역별 구분은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저지대국가(벨기에, 네덜란드 등), 중부유럽과 스칸디나비아, 영미, 국제적인 흐름(사조)'으로 세분화하고 있다. 거기에 본문을 보조해주는 부록으로 "위도와 경도"라 해서 화가들을 지역과 시대로 구분해 입체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중요한 회화에 대해서는 별도의 페이지를 구성해 좀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본문들은 대개 펼친 페이지 형태로 구성해서 한 명의 화가를 소개함에 있어 그 작가의 시대적 위치(사회적 영향이나 예술사적 위치)와 평가, 간략한 작품세계를 알리고, 대개 메인 컷 한 두 개와 서브 컷 서너 개를 삽입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고야와 같이 대가에 속하는 작가들에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예를 들어 본문 51쪽에서 소개하고 있는 "슈테판 로흐너(독일)"에 해당하는 색은 중부유럽과 스칸디나비아를 뜻하는 노란색 마크가 페이지수를 알리는 숫자 상단에 있고, 그의 작품 3컷과 작자 미상의 그림 1컷이 소개된다. 거기에 로흐너 작품의 사인처럼 사용되는 특징인 선명한 파란색이 두드러진 천사의 색채에 숨겨진 비밀을 알려준다(슈테판 로흐너는 선명한 파란색을 내기 위해 당시로선 순금보다 훨씬 비싼 청금석을 염료로 사용한 것이라 한다. 보라색이 고귀한 귀족이 입는 의복 천에 주로 사용된 까닭 역시 보라색 염료의 당시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던 것이 한 이유라는 사실을 알면 천사가 순금보다 비싼 물감을 사용하는 건 당연할지도). 물론 이 정도로 이 작가에 대해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해 전문가가 되길 소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로흐너에 대해 이 정도 상식과 교양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간 서양미술사(대개의 미술사 책에는 충분한 도판이 수록되지 않는 편이다)를 통해 이름만 접했거나 처음 이름을 접하게 된 화가들이 대다수이다. 전세계적으로 서양미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시기는 인상주의 시대로, 이 시기를 전후한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보의 양 자체가 빈약하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이 책은 일반인을 위한 서양회화사 입문서 혹은 교양서로서 적당한 난이도와 풍부한 도판을 지닌 책으로 별 다섯을 충분히 줄 만하다. 물론 전체 400쪽에 근접하는 분량의 책이다보니 오탈자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참고로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오탈자를 찾아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으니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에 대해선 논할 자격이 없음을 밝혀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의 부록이나 찾아보기 등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으나 이 책의 목차가 좀더 성의있게 만들어졌다면 하는 것이다. 이 정도 정성을 들여 만든 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목차가 달랑 4개의 구분 '여행에 앞서, 천년의 그림여행, 화가연표, 찾아보기'으로는 천년의 여행을 즐겁게 시작하는 초입치곤 너무 빈약하다.

 

끝으로 예경출판사의 28년 걸어온 길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앞으로도 좋은 책들을 많이 출간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획을 많이 하는 훌륭한 출판사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이 책을 잘 읽는 뾰족한 묘수가 있을리 없겠지만 가격대비 효용성이란 측면만 놓고 보자면 일단 한 권 구입해놓고 침대 머리맡에 놓고 잠들기 전 차근차근 그림 중심으로 보는 것도 좋을 것이고, 괜찮은 서양미술사랑 같이 펼쳐놓고 "천년의 그림여행"이랑 비교해가며 읽는 것도 좋은 여행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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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금지 - 구와바라 시세이 / 눈빛(1990)


지난 2005년은 여러모로 흥미 있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한 해였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이자, 1905년의 을사조약 100년인 해이다(그 외에도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Don Quixote)』가 세상에 나온 지 4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 안데르센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거기에 우리가 일본과 한일청구권협정(1965년)을 맺은 지도 40주년이 된다. 우리에게 해방과 지배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복원이라는 의미를 담는 사건들이 같은 끝자리수를 갖는 해에 모두 일어났다는 것은 시간차를 두고 생각해볼 여러 가지 것들을 던져준다.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 1936년생이니 어느덧 칠순이 넘은 사진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낯설다.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 그의 사진들은 낯설지 않은 풍경을 담아내고 있으며, 그런 만큼 그의 작품들 역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눈빛에서 출판된
촬영금지 : 한국 - 격동의 4반세기에 수록된 사진들은 1964년부터 촬영된 우리시대의 초상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째 장의 제목은 <1. 반일(反日)과 친일(親日)의 틈새에서>이다.

1965년, 한국은 하나의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불안한 정세에 놓여 있었다. 조국의 독립으로부터 20년, 한국전쟁 휴전으로부터 12년째의 일이다. 수도 서울과 지방의 대학에서 한일 국교 수복의 굴욕 외교에 반대하는 학생 데모로 혼란했고, 급기야는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그것은 1950년 이승만 정권을 와해시킨 4.19혁명에 이은 민중의 봉기라고 할 수 있는 격동의 시기였다. 한일 국교 수복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도 과거 36년간에 걸친 일본에 의한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상기시키고, 민중의 이념과 일본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일합병은, 한국인의 토지와 언어, 심지어는 이름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빼앗았다. 이 가혹한 역사를 경험해야 했던 한민족에게 있어서는 일본과의 국교 수복은 너무나 빨랐고, 그만큼 충격도 컸다. <본문 27쪽>

1965년 4월 19일 4.19혁명 5주년 기념일엔 비가 내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얼굴을 적시며 도로 위를 걷는다. 그 옆으로 "헌병"이란 두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군용 지프와 트럭에 철모를 쓴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이들은 침묵 속에 거리를 걸으며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다음 페이지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진 한 장이 펼친 페이지 구성으로 들어 있다. 비에 흠뻑 젖은 대학생들이 모두 비감한 표정으로 손에는 책을 쥐고, 우산을 들었으나 펼쳐 쓰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걸어온다. 누구하나 웃지 않는다. 다음 장에는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달려온 기동대에 쫒겨 달아나던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시궁창 속에 빠져 달아나고 있는 모습이다. 연이어 민족의 굴욕을 상징하듯 시궁창물로 더럽혀진 태극기를 펼쳐 보이는 이들이 서 있다. 굴욕외교에 맞선 시위대와 시궁창물을 뒤집어쓴 태극기.

▶ 가랑비를 맞으며 침묵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서울, 1965, Kuwabara Shisei.

그것이 1965년 한 일본인 사진작가가 대신 바라본 대한민국의 얼굴이었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1936년 일본 시마네에서 출생하여 1960년 동경종합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한다. 그가 일본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1962년 일본사진비평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신인상을 수상하면서부터였다. 이 해 그는 ‘미나마따병’을 주제로 개인사진전을 열었다. 그는 일본 구마모토와 가고시마 두 지역에서 발생한 괴질인 미나마타병을 오랫동안 취재해 왔다. 1956년 첫 환장의 발병 사례가 보고된 이래 신일본질수수유공장의 폐수에 다량 함유된 수은중독이 원인으로 판명되기 까지 일본 기업은 이를 부인해 왔다. 원인모를 괴질로 지역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가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정확한 원인 규명은커녕 진상조사조차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다. 평화롭던 어촌은 죽음의 마을로 변해간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이 과정을 촬영한 사진집 『미나마타병 1960-70에 관해서』로 1971년 일본사진가협회상을 수상한다.

▶ 미나마타, Kuwabara Shisei.

그의 첫 해외여행지는 한국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저는 1964년 7월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저에겐 최초의 외국방문이었죠. 방문 목적은 일본의 그래픽저널 월간지인 「타이요(太陽)」의 '분단 한국'이란 특집 기획기사를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한 ․ 일간에 외교관계가 열리지 않았던 때로, 일본인들이 방문하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저는 특파원자격으로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후 구와바라 시세이는 50여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며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는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우리의 모습을 일본인인 ‘구와바라 시세이’가 담아낸 것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어두운 모습일 수 있고, 부끄러운 역사일 수 있는 순간들을 많이 촬영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 『촬영금지』는 특히 그런 모습들이 많다. 그가 보도사진을 촬영하던 당시는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1989년 9월 서울에서 열렸던 그의 사진전에서도 실제로 이런 항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왜 이처럼 가난한 한국의 모습을 찍어 전시하는가, 그것도 일본인이..."


◀ 청계천, 1965, Kuwabara Shisei.


이에 대해 구와바라 시세이는
"사진, 특히 보도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찍히는 쪽에 상처를 입히는 냉혹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찍히는 사람이 언제나 즐거워하는 것만은 아니다.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 화내는 사람, 얼굴을 돌려버리는 사람.... 나는 어쩌면 많은 한국인에게 상처를 입혀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이 행위는 아니었다. 다만 사라져 없어져 가는 역사의 현장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려고 했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과연 우리는 이 노작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앞의 인터뷰에서 88년까지 한국 사진을 촬영한 뒤 이후에는 한국에서 작업을 별로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예, 한국에도 이젠 젊고 유능한 사진가들이 많이 등장해서 외국인인 제가 기록할 필요가 없어진 것도 이유입니다. 그리고 좀 모순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에는 별 매력을 못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의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한국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제겐 큰 행운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사진들에서 묻어나는 정서는 가난한 약소국, 과거 그가 속해있는 나라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나라에 대한 비판이나 편견이 아닌 말없는 따뜻함과 애정이 배어나온다. 그 역시 보도사진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Feature Photo(기획사진)’이라고 한다는데, 기사에 보도탐사라는 분야가 있듯 ‘기획사진’이라는 것은 사진에 스토리가 담긴 것을 의미한다. 즉, 현장을 보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사건 하나, 인물 하나를 추적하며 연속적으로 담아내는 사진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순간의 긴박함이 배어나오는 사진들에서조차 뭔가 정적인 느낌들이 묻어난다. 그는 『촬영금지』의 넷째장인 <4. 한국인의 얼굴과 발자취>에서 한국인들, 한국의 민중들에 대해 더할 수 없는 애정을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취재를 통해서 한국이 걸어온 역사의 발자취와 민중들의 꾸밈없는 삶을 기록하고자 했다. 최근까지 한국이 이루어온 고도의 경제성장이나 근대화를 찬양하거나 반대로 비판하는 것은 용이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배후의 이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땀의 희생에 대해서는 얘기하기 쉽지 않다. 나는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된 이들의 오열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본문 89쪽>


청계천, 1965, Kuwabara Shisei.


구와바라 시세이와 한국의 인연이 따뜻했던 것만은 아니다. 두 번째 한국 체제 기간 중이던 1965년 12월 그는 강제출국조치 당해 한국을 떠나야 했고, 이후 3년간 그의 출입금지조치는 풀리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관광 비자를 얻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으나 그 이후엔 다시 한국행 비자가 발급되지 않았다. 이런 그를 돕기 위해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재일교포 친구 이강 씨가 나섰다. 그는 한국에 취재차 들를 때마다 여러 곳에 구와바라 시세이의 선처를 호소했고, 덕분에 그의 한국행은 다시 가능해졌다. 그러나 1971년 10월 15일 한국 김포공항에 도착한 이강은 검은 지프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그에게 북한을 왕래하고,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간첩행위를 했다는 죄명이 쓰인 것이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그가 과연 북한에 갔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가 김대중이 입후보한 대통령 선거를 취재할 때, 김대중이 일본에 들렀을 때 그와 함께 회식했던 인연으로 연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따름이다.

1975년 2월 1일 구와바라 시세이의 친구 한 명이 또 한국에서 행방불명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고 반년, 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되기 3개월 전인 1975년 1월 1일 재일교포 김달남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에게 씐 혐의는 북한에 밀항, 비밀공작원이 되어 한국에서 파괴활동을 한 북한의 비밀공작원이란 것이었다. 그에겐 사형이 구형되었고, 그의 항소는 기각되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오는 순간, 재일교포 김달남, 일본명 타츠오의 목숨을 구명해준 것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1978년 크리스마스 아침, 김달남 씨는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구와바라 시세이가 직접 경험한 우리의 근현대사의 단면들이기도 하다.


▶ 열차편으로 포항에서 부산군항으로이동하는 청룡여단 병사들, 1965, Kuwabara Shisei.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15년 가까운 기간 동안 한국의 정치상황은 유신독재의 장거리 터널을 건너고 있었다. 그는 1980년 광주를 촬영하지 못한데 대한 뼈아픈 소감을, 광주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동안 그는 계엄군의 보안 통제 속에 광주에 진입하지 못한 그 소감을 밝힌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남녘땅 빛고을에서 빚어진 피의 참사를 그 당시 서울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성스러운 선혈이 뿌려진 광주로부터 직선거리로 268킬로미터 떨어진 서울에 있으면서도 광주의 현장을 목격하는 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장에 갈 것을 갈구하면서도 갈 수 없었던 보도사진가에게는 단 한 장의 사진조차 없다. 역사의 현장에 참가할 수 없었고, 그것을 기록할 수 없었던 분함은 패배감에서 오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의 좌절이었다. 저널리스트를 지망하는 한국의 젊은이들, 특히 다큐멘터리에 뜻을 둔 제군들에게 나의 과거의 체험을 통해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보도 사진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상을 기록하는 일에 모든 정열을 바쳐야 한다. 현장을 밟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말할 자격이 없는 한낱 패배자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의 사회는 열려있지 않은가. 온돌방에 언제까지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자! 밖으로 나가자." 라고 말한다.

사진평론가 이영준은 구와바라 시세이의 작품들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중요한 메시지는 '
과거에 담긴 현재적 의미'라고 말한다. 한일청구권협정을 맺은 지 40년 만에 공개된 정부의 협정문서 일부가 그때의 진실을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TV드라마를 통해 그때의 독재자는 갑자기 근대화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당시 대일협정의 밀사는 제2의 이완용을 각오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애국열사가 되는 현실, 대학생들이 가장 복제하고 싶어 하는 정치지도자 1위, 그 자식이 가장 큰 야당의 당대표로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진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준의 말대로 "그의 사진에 나타난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 보이고 건물들이 우중충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어두웠던 60년대를 찍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대사의 모순이 여전히 진행되는 상태, 그 무거운 현실이 여전히 촬영금지의 그늘 속에서 우리들을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의 사진은 과거에 종료된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더럽고, 치사한 현재의 우리들에게 과거에 대한 기억상실증을 막아주는 의미로 현존한다.

* 노대가(老大家) 구와바라 시세이. 이제는 그 자신도 세월의 흐름을 빗겨갈 수 없어 앞으로는 긴박한 사건의 현장보다는 문화적인 내용의 사진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이 책 『촬영금지』는 한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구하기 매우 힘든 책이었다. 혹시 그 시대와 사진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은 이 책을 꼭 구해서 읽기 바란다. 그리고 만약 재고가 모두 떨어진다면 제발 이 소중한 사진집을 절판시키지 말고, 좀더 양질의 인쇄와 도판으로 개정판을 출판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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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 - 박용숙, 예경(2003)


가끔 독자를 압도하는 느낌의 책이 있다. 이 책의 전체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현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당대가 위치한 지점으로 다가올수록 점점 더 이야기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현재로 다가올수록 비평은 비평이기 이전에 일종의 예언서가 되어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미술사 이야기>의 속편격이다. <한국미술사 이야기>가 선사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는 한국미술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그 이후부터 당대에 이르는 한국 미술 이야기를 다룬다. 

이 책의 저자 박용숙 교수의 글을 예전에 읽어 본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에겐 낯선 인물이란 것이다. 나는 웬만하면 독후감에 그것도 국내 저자의 학력을 언급하는 것을 꺼려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경우엔 저자에 대해 무척 궁금해졌다. 그는 중앙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동덕여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활동하는 미술평론가이다. 1935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70세이다. 거기까지 알아보고 난 뒤 난 입이 쩌억 벌어졌다. 세상에나.... 나는 저자가 무척이나 젊은 사람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야 나는 이 책이 어째서 날 그토록 압도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는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책(문학작품을 제외한)은 저자의 말이 매우 중요하고, 그 책의 모든 것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그것은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의도, 그리고 어떻게 읽어주길 바라는지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저자의 말이 목차나, 추천의 글 따위가 주는 것보다 그 책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책 머리에>란 글을 통해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주길 바라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이 책의 중요한 입장들을 설명해주고 있고, 책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는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동양화 소묘>란 글을 통해 미술비평가로 등단한다. 이후 30여년간 미술평론가로 활동했으나 비평집 한 권 없다고 한다. 이 책을 살펴보더라도 그렇고, 인터넷을 통해 박 선생의 그간의 비평 글들을 읽어보니 본인이 말한 것처럼 "무능과 치부"를 드러내 그것을 부끄러워 해야 할 성질의 비평, 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한 겸양일까? 박 선생의 말씀은 이렇다. "우리 미술의 궁핍한 자화상을 드러낸다는 생각에 더욱 곤궁스러울 뿐이었다"는 것이다. 거기엔 우리 현대미술 100년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한 세기 동안 고민하면서 쌓아올린 현대 미술의 열매를 우리는 짧은 시간에 함께 담아내려고 했으니 고민스럽지 않겠는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문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문화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조직이며, 한 인간의 내적 자기에 대한 훈련이고, 한 인간의 인격에 대한 통제이며, 보다 높은 수준의 자각의 획득이다." 한국 사회의 근대성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들 자신의 불구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동양의 얼굴을 하고 서양의 옷을 걸쳐 입은 광대의 어설픈 모사라는 '동양적인 것에 대한 슬픔'에 대해서 말이다. 한국은 중국과는 또다르다. 우리는 한 줄의 비평을 쓰기 위해 한국의 고전은 물론 중국의 고전까지 거슬러가지 않으면 안된다. 불행히도 제대로 공부하자면 그 방법밖에 없다. 저자는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서구 인문학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학자로서의 뼈저린 고백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미술사가가아니라 미술평론가이다. 미술평론은 개별적인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을 쓰는 것이고, 미술사는 이 개별적인 작가와 작품을 통해 한 시대를 엮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이 작업을 "십자가의 고난"에 비견한다.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 어려운 작업에 대해 이 책의 옷고름을 처음 벗겨내는 순간, 이 책의 저자가 매우 훌륭하게 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모두 열여덟가지의 이야기로 꾸려져 있다. 그중 첫번째 이야기인 '출발을 위한 화두'는 이 책 전체의 구성을 압도할 정도로 잘 쓰인 글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의 서두 부분인 이 글에서 저자는 우리의 미술과 서양 미술의 본질적인 차이를 밝혀내고 있다. 단원의 그림일지 모르는 맹견도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를 분석하는 이 글에서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과 같이 기하학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이도 눈앞에 있는 이 사물을 실감나게 그릴 수가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이 있었던 것이다. ...중략...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단지 개 한 마리를 사진 찍듯이 묘사한 것에 불과한 이 그림은, 그러나 18세기 동양문명권에서는 자연과학과 부국강병의 승리를 의미했으며 어머니의 욕망과 자본주의 문명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였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작자미상의 작품 <맹견도(猛犬圖)>, 국립중앙박물관
- 종이 바탕에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그린 작품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엎드려 있는 개의 자세는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다. 짧은 필치와 채색으로 처리된 털은 개의 근육과 관절의 구조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대상의 입체감을 살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특히 건물의 기둥과 마루 바닥 묘사에서 사용된 명암법과 투시법은 서양화의 표현 기법으로서 전통적인 동양화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이 책이 성취한 것은 단순히 한국 현대 미술 100년사를 정리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 그 중에서 한국이란 한 사회가 서양의 그림, 미술, 사회를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함께 분석해준다는 것이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그간 한국미술사를 서술하고, 정리해주는 책은 많이 있었으나 그것을 하나의 관점에 따라 서술하고 정리하여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출판된 가장 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람시의 말대로 "한 인간의 내적 자기에 대한 훈련이고, 한 인간의 인격에 대한 통제이며, 보다 높은 수준의 자각의 획득"으로서의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시선을 얻었다. 게다가 저자는 90년대 이후 한국 미술에 대한 새로운 저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책 머리에'에 밝히고 있기까지 하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박 선생의 이런 노력에 존경의 마음을 보내며 박용숙 선생이 새로운 저술을 집필할 수 있을 만한 여유와 건강이 허락되길 바란다. 이 글을 얼핏 읽는 사람은 박용숙 선생의 이 책에 대해 지나친 용비어천가를 보낸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책을 들고 읽어보면 이것이 괜한 허언이 아님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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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없는 거리에 인간의 얼굴을 돌려주는 그래피티 테러리스트 - 뱅크시(Banksy)

뱅크시를 가리키는 말은 제법 많다. 내가 알기로 1974년 생이라고 들었는데,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서(은둔형이다) 일명 '얼굴 없는 아티스트'라고도 부른다. 그(녀)가 주로 작업하는 공간은 아웃도어다. 다시 말해 '낙서화가(Graffiti Artist)'란 것이다. 그러나 뱅크시의 의미나 명성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사건은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근엄한 예술공간인 '대영박물관, 런던 테이트 미술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뉴욕 현대예술박물관' 등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도둑전시'했던 해프닝들 덕분이었다. 

대개의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모사한 것처럼 굵직한 기둥이 도열하여 세워진 권위가 물씬 풍기는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감상자들은 작품을 감상하기 전부터 건물이 주는 위세에 주눅이 든다. 관람객들은 언론이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전시, 세계적 걸작이란 권위 앞에서 위축된다. 마치 성소를 순례하는 신도들처럼 줄을 서서 작품의 발바닥에 키스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앞사람의 뒤꽁무니를 따라간다. 큐레이터나 미술비평가들이 써놓은 작품 해설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면서 나도 모르게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감상과 해설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예술의 권위에 침을 뱉어라!
뱅크시는 이와 같은 지금까지의 미술관람 관행에 돌을 던진다. 그를 가리켜 예술가인 동시에 문화파괴자(Vandals) 혹은 그래피티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뱅크시가 세계 유명 미술관에 관람객으로 위장해 몰래 숨어들어 자신의 작품을 슬쩍 걸어두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행동은 매우 파격적이고,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한 편으로 그 방식 자체는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퍼포먼스나 해프닝(happening)과 개념적으로 보자면 크게 다른 형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해프닝이란 연극적인 퍼포먼스와 매우 유사하고, 환경미술과 마찬가지로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해 왔던 영속성과 장인 정신과 같은 전통적인 개념에 도전하는 것으로 과거에는 응당 예술작품은 미술관이나 화랑에만 전시되는 것이라 여겨져 왔던 화랑, 미술관처럼 한정된 장소를 벗어나 외부의 공간에서 제한 없이 연극, 음악, 그리고 시각 예술을 결합시킨 미술 형태 중 하나로 퍼포먼스와 별다른 구분없이(해프닝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와는 구별된다) 사용되기도 한다. 

뱅크시가 이들과 달랐던 점은 그가 보여준 해프닝이 전통적으로 예술작품이 전시되는 공간, 그것도 인류가 남긴 최고의 예술적 문화유산이 전시되는 공간이라고 믿어져왔던 미술관과 박물관이란 공간의 권위, 평론가들에게 독점되어 오던 예술 작품 평가의 권위를 기본부터 해체하는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명한 예술 작품 곁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전시해두고 관객이나 미술관 관계자가 알아채기 전까지 도둑 전시를 일삼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일단 몇몇 작품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뱅크시의 작품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래피티'와는 약간 다르다. 대개 그래피티를 생각할 때 벽면에 검정색 스프레이를 뿌린 뒤 그 위에 형광 느낌이 나는 색색깔 스프레이로 화려하게 그려진 그림들을 연상하기 쉬운데 뱅크시의 경우엔 스텐실 기법을 즐겨 사용하고, 벽면에 남아있는 여러 흔적들을 기발한 발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쥐를 발견하고 의자 위로 몸을 피신한 소녀와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쥐를 보라. 깨진 벽면 속에 드러난 붉은 벽돌의 모양에서 뱅크시는 '쥐'를 연상(못 써요, MB를 연상하다니)했고(솔직히 나는 일부러 깬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쥐의 수염과 귀, 긴 꼬리만을 덧붙여 한 마리의 쥐가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 마치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비극적인 희극의 정신을 표현하다



그는 주로 영국에서 활동하고 영국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국인이든 아니든 영국적인 문화 풍토가 잘 느껴지는 대목은 뱅크시의 작품 곳곳에 숨겨져 있는 '블랙유머' 감각이다. 블랙유머가 보통의 '유머'와 구분되는 결정적인 근거는 블랙유머가 삶의 부조리나 부정적인 사회 풍자에서 비롯되는 '비극적인 희극'이라는 점이다. 뱅크시의 작품들에서는 버나드 쇼나 처칠의 짧은 문장으로 압축되어 있는 풍자를 읽는 것처럼 재기 넘치는 날카로운 풍자정신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근본적으로 약자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비명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희극이기도 하다. 벽면에 그려진 메이드 복장의 여성은 담벼락을 마치 커튼처럼 들어올린다. "이거봐! 이게 벽이야? 커튼이지!" 현대예술의 거만과 위선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뱅크시의 '연인'이란 작품이다. 어쩌면 거리에 이런 그림이 낙서화로 그려지고 전시되는 것 자체를 폭력이라 부르고, 이런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의 건물 소유주는 당장이라도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혼쭐을 내리라 잔뜩 벼르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뱅크시의 작품으로 인해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뉴스는 들려오지 않는다. 도리어 그 반대로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을 흉내낸 작품들이 세계 도처에서 그려지고 있다.




디자인 서울이라는 웃기는 권위 의식
얼마 전부터 오세훈 서울 시장은 '디자인 서울'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하는 '디자인'이란 우리 일상의 풍경을 조금 더 아름답게, 편리하게,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 시민이 생각하고 꿈꾸는 디자인과 개념의 온도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세훈 서울 시장이 주장하는 '디자인'이란 서울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콘크리트 어항을 건설하고 그 공로로 대통령 자리까지 오르게 된 전임 시장의 업적을 계승하여 '나도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을 좀더 그럴싸하게 포장한 정책의 명칭일 뿐이다. 그가 말하는 디자인서울이란 '좀더 거창하고, 좀더 위대한, 좀더 세련된' 정책을 펼치고 싶다는 그의 공약을, 아니 그의 정치적 욕망을 대리하는 개념일 뿐이다. 우리가 오세훈 서울 시장의 '디자인 서울'이 이처럼 위대하고, 거창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속좁고, 자기 중심적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근거는 그가 얼마 전 '해치맨 프로젝트'라는 몇몇 미술전공 학생들이 남긴 '디자인 서울'에 대한 풍자에 대해 보여준 너그럽지 못한 태도 때문이다.




해치맨이 공공디자인, 디자인 서울에 끼친 해악이 있다면 길 가던 시민들에게 서울의 숨겨진 진면목, 서울 시장이나 그의 수하 공무원들이 잊고 있던 공공미술의 진정성을 일깨워 준 것이며, 웃음을 잊고 살아가던 서울 시민들에게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한 정도일 것이다. 이 정도가 죄라면 서울시는 '디자인'을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다는 걸 자인한 셈이다.


 
유니폼이 가지고 있는 기능은 착용자에게 소속감, 동료 의식 및 단결심을 가지게 하며 대외적으로는 소속되어 있는 단체나 조직의 얼굴 역할을 한다. 유니폼이 착용자에게 이와 같은 기능과 의미를 할 때 유니폼을 입지 않은 일반인들은 우리가 아닌 저들로 소외되며,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상징하는 유니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권위가 된다. 그러나 뱅크시는 유니폼이 주는 권위를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토네이도에 휘말려 현대로 온 도로시는 거리에서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하고, 그녀의 런치바구니는 검색의 대상이 된다. 과거 토네이도에 휘말려 오즈의 나라로 날아갔던 도로시를 막아 섰던 것이 마녀들이었다면 현대로 날아온 어린 소녀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존재들은 억압적인 국가기구인 경찰과 군대인 셈이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거리 어디에선가는 G20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유니폼들이 길 가는 사람들을 막아서고 있을 것이다.


"WHAT ARE YOU LOOKING AT?"

"꽃"이란 작품은 도로의 규칙이자 질서를 의미하는 차선(Line)을 응용해 규율과 규범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자신을 형상화하고 있는 어찌보면 자화상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대영박물관에 몰래 숨어 들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며 규율을 깨뜨리며 도전하고 있는 화가 뱅크시, 그가 이런 해프닝을 벌이고 다닌다고 해서 '국격(國格)'에 손상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다는 뉴스는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마도 영국을 비롯해 뱅크시의 습격을 받은 선진국들 중 어디도 그의 이런 작품행위가 자국의 국격에 손상을 준다고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넉넉한 인격을 갖춘 어른이 아이들의 재치 넘치는 장난을 눈감아 주듯, 천국과 지옥은 물론 연옥까지 탄생시켜 교회의 엄격한 윤리와 율법으로 중세를 지배했던 가톨릭 교회가 카니발을 통해 민중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것처럼 통치의 정당성에 자신 있는 권력이라면 예술가들의 도전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고 세련된 통치기법일 것이다. 



그렇다고 뱅크시의 풍자정신이나 문제의식이 그렇게 부드럽고, 유순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불온한 의식은 미키마우스와 맥도날드의 손을 잡고 걷는 어린 베트남 소녀를 그린 "네이팜"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미키마우스와 맥도날드는 미국을 상징하는 양대 아이콘이자 미국식 삶의 표본을 상징한다. 그러나 '제3세계로 미국식 삶이 이식되는 과정(아메리카나이제이션)'을 우리는 '평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뱅크시는 단순한 낙서화가가 아니라 참여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는 팔레스타인 등 억압이 존재하는 세계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그만의 방식으로 이에 항의하는 그래피티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그의 이런 방식은 실정법 상의 체계로 보자면 그 자체로 범죄의 형식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그가 공공시설물 혹은 민간시설에 낙서를 하는 행위가 범죄라면 세계 곳곳에 네이팜탄과 클러스터 폭탄을 떨어뜨리는 자들이야말로 인류에 대한 범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힘 없는 자의 넋두리지만 짓밟힐 수록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얼룩말의 무늬를 빨아주는 '세탁'이란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선량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그것이 뱅크시가 의도하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닐까 싶다.

뱅크시의 작품들 대부분은 결국 저(알타미라 벽화)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운명으로 소실될 운명에 처한 뱅크시의 작품들을 망실되기 전에 사진으로 기록한 일종의 작품집이다.



* 대한민국 국립경찰이 인정한 '이명박 대통령의 상징 = 쥐'
오늘 아침 일간지를 보니 국내에도 뱅크시 못지 않은 뛰어난 예술성과 풍자정신을 가진 예술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마치 뱅크시가 한국에 온 것이 아닌가 싶은 만큼 말이다.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알리고자 정부가 설치한 홍보 포스터에 낙서 그림을 그리던 40대 남성이 지나가던 시민에 의해 신고당하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경찰이 과태료 정도 물리고 훈방하면 될 사안에 대해 "G20을 방해하려는 음모"라는 거창한 명분을 붙여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기각된 사건이다. 경찰이 특히 예민하게 굴었던 이유는 체포된 이들이 경찰조사에서 했다는 말을 통해 반증되고 있다.

체포된 이들은 경찰조사에서 “단지 G20의 ‘G’라서 쥐를 그린 것일 뿐”이라면서 “정부가 G20에 매몰된 상황을 유머스럽게 표현하려 한 것인데, 이 정도 유머도 용납이 안되느냐”고 말했다는데, 체포된 이들이 이렇게 변명하듯 말해야 했다는 것도 우습지만, 사실 이 사건 자체가 코미디인 것은 정부가 G20 홍보를 위해 설치한 코엑스 주변의 각종 옥외 홍보물은 옥외광물법상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강남구청이 정부가 설치한 것이라 단속할 수 없다고 하는 뉴스가 나온지 불과 2~3일도 안 되어 터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뱅크시가 한국에 온다고 해도 그가 쉽게 작업하긴 여러모로 어려울 것 같다. 일단 신고정신이 투철한 시민(이런 건 주인의식이 아니라 관변의식이라고 부른다)이 계시고, 이를 절대로 용납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정부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점점 더 뱅크시적인 반항들,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서 표출하는 저항들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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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색채를 포함한)로 말하기에 익숙한 예술가나 그것을 읽어들이는 전문적인 훈련을 쌓은 미술비평가들의 고민이 무엇일까? 회화 혹은 조각을 모두 포함한 예술 장르로서의 미술, 거기에 난해함을 더한 현대 미술의 조류를 모두 한눈에 파악하고 있는 감상자들, 일명 고급 문화 향수자들이라 해야할 일부를 제외하고 미술은 그저 막막한 대상에 불과할 것이다. 마치 보리수 밑에서 진리를 터득한 부처이지만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단이 없다면 과연 오늘날의 불교가 성립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고민이 예술가와 미술비평가의 고민일 것이다. 자신은 어떤 회화를 보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나 그것을 일반 감상자들 에게 전할 방법이 없다면 그 아름다움을 발견한 비평가도, 그 작품을 만든 작가 자신도 답답하지 않을까?

특히 이 대목에서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이미 이미지를 자신의 언어로 채용한 작가들이 아니라 일종의 번역자라고 할 수도 있는 비평가들의 것이 더욱 크고 고심스러운 대목일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체화한 모국어를 매개로 한 예술인 '문학' 조차도 안목있는 감상을 위해서는 감상자의 적절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데, 미술이란 물론 그 자체가 번역이 필요없는 만국의 공통어라 할지라도 역시 제대로 된 감상을 위한 훈련과 교육은 필요한 것일게다.
게다가 이 책의 제목인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란 말에도 숨겨져 있듯 '서양화'란 말은 이미 우리 것이 아닌, 즉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외부의 것이란 점에서 미술비평가의 고민은 이중의 것이 된다. 우리의 문화가 우리 토양(자연환경)에서 우리의 삶(생활환경)과 역사를 통해 내면화된 체험임에도 그것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할 터인데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의 감상이란 그만큼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주헌 역시 고민의 출발점을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1.2권 구분은 그런 점에서 상업적인 고려에 의한 분권이라기 보다 책의 목적 자체에 부합하는 구분이다. 우선 1권은 '미술감상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글을 통해 이 책의 목표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종의 소재별, 주제별 장르 구분이랄 수 있는 역사화,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와 같은 장르화들 마다 별도의 장을 두어 설명하고, 서양 미술의 중요한 개념들인 원근법, 빛과 색, 상징, 모델을 다룬다.
2권에 이르면 사조로 살펴 본 서양미술사라 할 수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고전주의에서 표현주의, 야수파에 이르는 서양 미술의 역사와 사조를 그리고 그 안에서 분화된 다양한 미술 유파의 흐름을 일일이 추적하고 있다. 그외에도 추상화, 판화, 조각, 미술관, 미술시장과 같이 중요하지만 자칫 소홀하기 쉬운 분야와 실질적인 미술감상을 위한 도움글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난 개인적으로 이주헌의 글을 참 좋아한다. 그의 글은 예술을 다루는 이의 글이 지녀야 할 미덕들을 적절히 가지고 있다. 우선 그는 아름다운 작품을 보면 적당히 흥분할 줄 안다. 이 말은 그가 대중적인 시각과 수준을 가늠할 줄 안다는 뜻이며 미술 평론을 업으로 삼데 그것을 즐길 줄 안다는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살짝 거리두기를 할 줄 안다.
이 책은 미술의 매우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으며 그러므로 빠질 수 있는 다양한 함정들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미술(서양화)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애정은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가 많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는 이들을 위한 입문서의 역할을 하고자 만들어진 책이다. 서양미술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텍스트를 필요로 하는, 이것을 발판 삼아 더욱 많은 것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매우 든든한 친구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자신있게 보기'를 위해서라며 사실은 독자를 윽박질러 온 미술입문서와 다르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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