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04.20 도종환 - 산경
  2. 2011.04.08 도종환 - 책꽂이를 치우며
  3. 2011.01.31 도종환 - 늑대
  4. 2010.10.19 도종환 -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산경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불혹이 될 때까지 살아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산'과 '강'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산은 그저 그곳에 있게 하면 되고
강은 그저 흘러가도록 하면 된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니
내가 산에 가는 것이오
강이 멈추지 않으니
내가 강을 따라 함께 가면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지 않는 것을 오게 하고
흐르는 것을 잡아 세울 수 있나
그저 하늘 아래 허물없이 살아가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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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책꽂이를 치우며

-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 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

나는 도종환 시인의 이 시가 머리로 꾸민 시가 아니라 정말 일상에서 시인이 직접 대면한 그 순간의 일부를 시로 옮긴 것이라 생각한다. 신혼 살림을 13평 짜리 방 두개의 작은 연립에서 시작했다. 방 하나는 부부 침실,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책창고였다. 우리 부부가 가장 먼저 생각한 혼수는 책꽂이였는데, 좋은 책장을 들일 수 없어 동네 가구점에 부탁해서 책장 여섯 개를 맞췄다. 책장 여섯 개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작은 유리창 하나도 허락할 수 없으리만치 책으로 가득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가난한 우리 부부에게는 최대한의 사치였는데 욕심껏 책장을 맞춘 것까지는 좋았지만 책장 여섯 개로는 택도 없이 부족한 우리 집 책이 문제였다. 결국 책장 한 칸에 책 두 줄씩 포개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책장의 가로대가 모조리 휘어버리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다. 결혼 생활 10년에 지금껏 이사를 세 번했는데,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의 갖은 원성을 들으며 남들보다 더 많은 이사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지금은 방 3칸 짜리 삼십평형 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부부 침실을 제외하곤 방 2개 모두 유리창을 허용할 수 없는 서재가 되어 버렸고, 거실마저 책꽂이가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둔 길 책을 읽어 불 밝힐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지만 도종환 선생도 내가 당신의 시집을 정리하여 내다버리길 바라진 않을 거란 심정으로 이사다닐 때마다 꽁꽁 싸매고 다닌다. 어떤 사람에겐 빛이 더 많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겐 천만근 무게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람구두이고, 그런고로 천만 근 무게로 내리 누르지 않는다면 언제고 이 세상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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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늑대

- 도종환



너는 왜 길들여지지 않는 것일까
편안한 먹이를 찾아
먹이를 주는 사람들 찾아
많은 늑대가 개의 무리 속으로 떠나가는데
너는 왜 아직 산골짝 바위틈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불타는 눈빛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
번개가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달려가던
날카로운 빛으로 맹수들을 쏘아보며
들짐승의 살 물어뜯으며
너는 왜 아직도 그 눈빛 버리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바람을 피하지 않는 것일까
여름날의 천둥과 비바람
한겨울 설한풍 피할 안식처가
사람의 마을에는 집집마다 마련되어 있는데
왜 바람 부는 들판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오늘은 사람들 사이에서 늑대를 본다
인사동 지나다 충무로 지나다 늑대를 본다
늑대의 눈빛을 하고 바람부는 도시의 변두리를
홀로 어슬렁거리는 늑대를 본다
그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외로운 정신들을.


*

떠돌이 생활 3년 만에 다시 학생이 되었을 무렵 내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모두가 연모해 마지않는 시 쓰는 아리따운 교수님의 고임을 받았고, 그것은 나만의 은근한 자부심과 자만심을 부채질하는 일이었다. 2년짜리 대학에서 1년을 보낸 뒤 교수님이 불러 내게 말씀하길...
 

'너는 고독한 마라토너의 눈빛을 지녔다....그런데 어째서 시를 쓰지 않느냐고...'

그 말씀의 끝에 내 혀끝을 감도는 말이 있었으나 끝끝내 내뱉지 못한 한 마디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늑대 같은 사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개 같은 사내였노라. 
누군가 살짝 코끝만 쓰다듬어 주어도 금방 따라나설 태세를 갖춘...누군가에게 버림받아 다신 마음 내어주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

오랜 세월이 흘러 늑대냐, 개냐하는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간 폼잡는 질문은 시를 쓰는 일과 무관하단 걸 알게 되었다. 시를 쓴다는 일은 사랑하는 일과 같다. 사랑은 사랑에 대해 묻지 않을 때만 사랑일 수 있듯 시를 쓰는 일은 왜 시를 쓰는지에 대해 묻지 않고 시가 될 때만 시가 된다.  

그 눈빛은 만든 것도, 생겨난 것도 아닌 내가 잠시 지니고 있던 어떤 삶의 무게였을 테지...이제 더이상은 내 것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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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 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다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

사랑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이해는 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아픈 일일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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