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 01

-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일번지 포카라에 들어서는 초입에서 바라본 마나슬루 


탈출인가, 출장인가?
11월 18일(금) 아침에 네팔 카트만두로 떠나 11월 26일(토) 새벽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오는 7박9일 일정의 네팔·히말라야 문화탐방은 새얼문화재단이 기획하고 있는 힌두·불교문화권 탐방 시리즈의 사실상 두 번째 일정이다. 인도는 이미 한 차례 다녀왔고, 아마도 다음 기행의 목적지는 티베트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인도 기행은 재단의 다른 분이 수행하고 다녀왔는데 어쩌다보니 이번 네팔 기행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가 수행하게 되었다.


2011년은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한 해였다. 2009년 8월부터 월간 <인물과사상>에 매월 혹은 격월로 「현대일상의 지배자들」이란 연재를 시작했다. 기업문화 혹은 기업을 중심으로 한 변화와 혁신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고,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에 대해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내용인데 매월 100매에서 120매가 되는 글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탓이었겠지만 올 연초에는 피로가 겹친 탓에 면역력이 떨어져 그만 대상포진에 걸리고 말았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며칠씩 회사를 결근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 연평도 포격 사건까지 벌어져서 마약 성분이 들어간 진통제를 먹으며 연평도 주민 돕기 운동을 위해 연평도 현지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가정적으로는 결혼 10년이 지나도록 그야말로 천신만고(千辛萬苦)한 노력에도 쉬이 들어서지 않던 아이가 태어나 첫 돌을 지내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상황이었던 터라 직장과 가정, 거기에 부수적으로 연재하던 원고까지 겹치면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져 있었다. 그런 일들이야 남들도 살면서 겪어내는 수고로움이었을 터이니 나만의 괴로움이라 말할 순 없어도 거기에 더해 내 자신이 자초한 괴로움들마저 있어 올해는 청소년기를 제외하고 내 생애에서 살아내기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이런저런 피곤함과 삶의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네팔·히말라야 문화기행에 굳이 동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11월 18일 출국하기 전 날까지도 내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계간 『황해문화』의 최종 마감 원고를 붙들고 있었는데 편집장으로서 떠나기 전 최종본까지 살펴야 했기 때문에 결국 출발 12시간 전에야 부랴부랴 여행용 가방을 꺼내 옷가지를 넣었다 빼다를 반복하며 호들갑을 떨어야 했다. 그런 부산함 덕분에 어딘가 떠나기 전의 여행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여행의 설렘은 내겐 대단한 사치였고, 당장 네팔의 현지 기후가 어떤지 제대로 알아볼 시간마저  없어 트위터에 11월 현재 네팔 기후가 어떤지 대놓고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네팔에 다녀온 어떤 이가 네팔의 11월은 한국의 초가을 날씨라 다니다보면 도리어 더울 수 있고, 일정 중에 포함된 룸비니 같은 곳은 초여름 날씨에 가까우니 여름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얻었다. 만약 그 조언이 없었더라면 7박 9일의 일정이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을지…. 부랴부랴 여름옷 한 벌을 챙겨 넣을 수 있었다.


새얼문화재단은 1년에 한 차례씩 국내 역사기행과 해외 문화기행을 떠나는데 국내 역사기행은 대략 100여명 안팎의 대규모 인원이 2박 3일의 일정으로 함께 먹고 자며 이동하면서 국내의 여러 역사 유적들을 찾아간다. 이에 비해 해외 문화기행은 경비와 일정 문제 등으로 국내 역사기행에 비해서 비교적 소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행사이긴 하지만 참가인원은 여행지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서도 유동적이다. 그러나 이번 네팔·히말라야 기행은 처음부터 30명 이내로 인원 제한을 두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처럼 인원 제한을 두게 된 것은 네팔 현지 사정이 그 이상의 인원이 함께 여행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을 만큼 불편한 탓이 컸다. 결국 나와 한국 가이드, 현지 가이드 포함해 모두 26명의 인원이 이번 문화기행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하게 되었다.

 


부대끼는 마음을 뒤로 하고 9시 45분에 출발하는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였다. 일행들을 먼저 나와 영접한다고 내 딴엔 일찍 출발해 도착했는데도 공항 장기주차장에 주차한 뒤 3층 출국장 만남의 장소를 찾지 못해 약간 헤맨 탓에 약속장소에 가보니 이미 많은 분들이 도착해 있었다. 네팔로 출국하기 전 휴대폰 로밍에 대해 문의하고,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며칠 전 구입한 네팔 안내 책자를 펼쳐들었다. 내가 구입한 책은 한국의 랜덤하우스가 일본의 다이아몬드 빅사와 출판계약을 맺어 한국판으로 펴낸 <세계를 간다> 시리즈의 네팔 편이었는데, 원래 여행안내서로 가장 유명한 론리플래닛 시리즈의 네팔 편을 구입하려고 찾아보다가 론리플래닛 시리즈가 편집이나 내용 구성이 매뉴얼스러운데 비해 종합적으로 보아 <세계를 간다> 시리즈가 내게는 좀더 적합할 듯 싶어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결과는 비교적 만족스러운 편이었는데 <세계를 간다>가 한국이나 일본의 여행자 스타일을 좀더 고려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네팔, 히말라야 그리고 마나슬루
나에게 네팔이란 나라는 아버지의 꿈이 서린 곳이다. 처음 네팔이란 나라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꼭 한 달 간격으로 잇따라 세상을 떠난 1979년 겨울부터 이듬해 1980년 연초까지 그 해 우리 집안은 사실상 풍비박산이 나있었다. 당시엔 아직 철없던 어린 시절이라 앞으로 닥쳐올 내 앞의 삶이 지닌 무게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었다. 그 무렵 내 눈에 띈 것은 책꽂이 한 구석에 꽂혀 있던 김정섭이 지은 『집념의 마나슬루』란 책이었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 세계에서 8번째로 높은 마나슬루(8,163m)가 히말라야 14좌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이고, 8,000m급 이상 봉우리 중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된 산은 안나푸르나였다. 에베레스트에 이어 세게 제2위의 높이를 자랑하는 K2는 난공불락의 어려움으로 인해 악명을 떨친 탓에 유명하고, 낭가파르바트는 목숨을 건 산악인들의 도전이 빛나는 히말라야 등반 역사상 가장 많은 산악인들을 집어 삼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비해 마나슬루는 그렇게 주목받을 만한 산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나슬루는 한국과 일본의 산악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산이다. 다만 한국의 산악인들에겐 집념과 도전의 산으로, 일본의 산악인들에겐 영광의 산으로 기억된다.




마나슬루(Manaslu)는 산스크리트어로 ‘영혼’이란 뜻을 지닌 마나사(Manasa)에서 나온 말로 ‘영혼의 땅’, ‘영혼의 산’이란 의미를 지닌다. 마나슬루가 처음 산악인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네팔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1950년 영국의 W.틸만(H.W.Tilman) 등반대가 마나슬루 일대를 정찰하면서부터였다. 네팔이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뒤 서구의 산악인들은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스코트 원정대가 펼쳤던 극지원정 경쟁, 올림픽을 통한 스포츠 경쟁이 그렇듯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히말라야 초등 경쟁은 각국의 산악인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벌이는 치열한 레이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은 경제적인 여유를 갖춘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알피니즘이란 말 자체가 애초에 서구에서 출현한 용어인 것처럼 그들은 알프스, 힌두쿠시, 알래스카 등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며 세계 알피니즘의 역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14봉 등반 경쟁에서도 역시 그들이 앞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영광을 상실한 영국은 특히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에 강한 집착을 보였고, 독일은 낭가파르바트(8,125m)에 줄기차게 도전했다. 독일이 낭가파르바트에 집착한 것은 아마도 세계 최초로 아이거북벽을 정복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의 경험과 역사가 배어나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티벳에서 보낸 7년>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에서도 가장 높은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산악인 힐러리 경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1953년 5월 29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존 헌트 경이 이끄는 영국 원정대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초모룽가)에 오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남성으로 태어나 현장 언론인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자신의 성정체성이 남성이 아닌 여성에 있음을 깨닫고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된 특이한 이력의 언론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쟌 모리스가 펴낸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여행』에 감격적으로 잘 묘사되고 있다. 쟌 모리스는 특파원으로 영국원정대를 동행취재하면서 힐러리와 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과정을 특종 보도하는 영광을 누리며 언론인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게 된다.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우리 앞의 낡은 박스 위에 앉은 저 두 사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우리 밖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날은 너무나 밝았다. 눈은 그지없이 뽀얗고, 하늘은 그지없이 푸르렀다. 대기는 아직도 온통 흥분으로 들끓는 듯 했다. (쟌 모리스, 박유안 옮김,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세계 여행1-에베레스트부터 성전환까지』, 바람구두, 2011, 22쪽.)



쟌 모리스가 타전한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 뉴스가 영국에 도착한 것은 때마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날(1953년 6월 2일)이었다. 영국 전역은 새로운 여왕의 등극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접하며 열렬한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히말라야에 등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처럼 히말라야 등정이란 사건은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할 수 있는 뉴스라고 생각했기에 국가적인 지원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역시 태평양전쟁의 패전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에 성공하면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분으로 마이니치(每日)신문사의 후원을 받은 일본 산악회가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마나슬루에 원정대를 파견했다. 마나슬루에 대한 사전정보가 부족했던 일본원정대는 초기엔 틸만 원정대가 촬영한 한 장의 사진만으로 시작해 마나슬루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했고, 등정 가능한 코스를 여러 차례의 사전 원정으로 파악한 뒤 1956년 유코 마키가 이끄는 12명의 대원과 20명의 셰르파로 구성된 등반대가 본격적인 마나슬루 등정에 나서게 된다. 이들 원정대는 같은 해 5월 9일 토시오 이마니시와 셰르파 갈첸 노르부, 두 명이 정상 공격에 나서 마침내 마나슬루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록 우리와는 민족적 감정이 뒤얽혀 있는 일본원정대에 의한 마나슬루 초등이었지만 이것은 서구 산악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히말라야 8,000m급 초등 경쟁에 동양의 산악인들이 뛰어들어 이룩한 최초의 쾌거였다. 이후 중국원정대가 1964년 시샤팡마(8,046m)를 초등(시샤팡마는 네팔이 아니라 티베트, 중국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구 원정대가 도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14좌 봉우리 중 두 곳을 일본과 중국이 초등하는데 성공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서구 산악인들의 몫이었다. 또한 당시 일본 원정대의 마나슬루 초등을 도우며 함께 했던 셰르파 갈첸 노르부는 1955년 프랑스 원정대와 함께 마칼루에 오른 데 이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8,000m급 2개봉을 초등한 사람이 되었다. 당연히 일본은 이들의 마나슬루 등정을 범국가적으로 축하했다.




16명의 한국원정대를 집어삼킨 마나슬루

 

일본은 이후에도 마나슬루와 끈질긴 인연을 이어가는데 1971년 마나슬루 북서릉을 오르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고, 1974년엔 동릉을 통해 일본의 여성원정대 대원 3명이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하면서 여성 최초의 8,000m 봉우리 등정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남기는 등 마나슬루는 ‘일본의 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일본과 깊은 인연(일본의 등산용 석유버너 중 마나슬루의 이름을 딴 제품까지 있었을 정도)을 맺게 된다. 우리나라가 히말라야 등정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은 일본보다 뒤처진 1962년 경희대 산악부가 다울라기리 2봉(7,751m)에 대한 정찰등반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때는 사실상 히말라야 14좌 초등경쟁이 완료되어 가던 시점이었는데 이후 김정섭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가 마나슬루에 도전하기까지 1971년 한국산악회가 추렌히말(7,371m)에 등반한 것이 우리가 경험한 히말라야 원정의 전부였다.


한국의 마나슬루 제1차 원정 당시 김정섭은 직접 원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뒷받침하면서 실질적으로 원정대를 꾸린 당사자였다. 그러나 제1차 마나슬루 원정대는 김정섭의 동생으로 원정대에 참여한 산악인 김기섭을 불의의 사고로 읽은 뒤 철수하고 만다. 김기섭은 한국인 최초의 히말라야 희생자였다. 『집념의 마나슬루』는 자신이 빠진 채 진행되었던 제1차 마나슬루 원정에서 동생 을 잃은 슬픔과 비탄 속에서 동생의 시신을 찾아 고국으로 가져오고 제2차 마나슬루 도전에 나선 제2차 원정대의 기록이다. 그러나 제2차 원정마저 1972년 4월 10일에 일어난 눈사태로 인해 김호섭, 송준형, 오세근, 박창희와 함께 참여했던 일본 산악인 야스히사를 비롯해 셰르파들까지 모두 15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1937년 세계9위봉인 낭가파르바트(NangaParbat, 8,125m)에서 독일 원정대원 16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이래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 규모의 대형 참사였다.


그는 1차 원정에서 동생까지 잃은 실패 이후 절치부심하며 2차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 등반하며 겪어야 했던 일들, 그리고 다시 조난과 실패, 철수에 이르는 과정을 비교적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심정이야 피를 토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런 슬픔을 딛고 일어서게 만든 힘, 그 힘을 집념이라고 표현한 것이리라. 『집념의 마나슬루』에는 그가 준비한 또 한 차례의 원정, 제3차 원정계획서를 책 말미에 게재했는데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초등학생 시절엔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란 말도 흔히 들을 수 없던 시절이었던 터라 그의 3차 원정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다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단지 등정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애와 네팔의 현지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어서 그 내용에 빠져 읽었을 뿐이었다. 이후 김정섭은 1972년 2차 원정과 1976년의 3차 원정에 직접 대장으로 참여해 당시 7차례 꾸려진 히말라야 원정 중 5차례 원정에 관여한 국내 히말라야 원정의 실질적인 개척자로 활동했다. 김기섭, 김호섭, 김예섭, 세 동생을 히말라야 마나슬루에 묻은 맏형 김정섭은 1974년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될 세 번째 도전에 나섰지만 마나슬루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거듭되는 악천후로 인해 6,800m에서 통한의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만 했다. 마나슬루는 그를 끝끝내 품어주지 않았다(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김정섭 씨는 미국 뉴욕으로 이민 가서 현지에서도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사를 정리하는 원고를 집필하며 2002년엔 다시 마나슬루로 가서 동생들의 시신을 찾아올 계획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나마스떼(당신 안에서 신을 봅니다)’란 네팔의 전통 인사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지만 정작 이 책이 그 시기에 어째서 우리 집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보다 더 세월이 흐른 뒤 돌아가신 아버지의 앨범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이 책이 왜 우리 집에 있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남긴 앨범에는 한 가닥 자일에 의존해 산을 타고 있는 당신의 모습, 빙벽을 기어오르는 모습들이 담겨져 있었다. 나중에야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산을 좋아해 대학 산악부에서 활동했고, 김정섭 씨 형제 가운데 어느 분과 친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의 형제들과 함께 산에 다녔고 마나슬루 등반팀에 합류하라는 제안도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이 분들과 함께 히말라야에 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물론 할아버지의 만류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1차 원정이 있었던 1971년 무렵은 내가 이제 막 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어느덧 비행기는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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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운대행(沒雲臺行)
  

- 황동규


1


사람 피해 사람 속에서 혼자 서울에 남아
호프에 나가 젊은이들 속에 박혀 생맥주나 축내고
더위에 녹아내리는 추억들 위로
간신히 차양을 치다 말고
문득 생각한 것이 바로 무반주(無伴奏) 떠돌이.
폐광지대까지 설마 관광객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길들의 고요.
지도를 펴놓고 붉은 볼펜으로 동그라미 하나를 치고
방학에도 계속 나가던 연구실 문에 자물쇠 채우고
다음날 새벽 해뜨기 전 길을 나선다.

  2

영월 청령포를 조심히 피해 31번 국도를 탄다.
상동 칠랑에서 국도를 버리고
비포장 지방도로로 올라선다.
중석 걸러낸 크롬 옐로우 물이
길 옆 시내 가득 흘러오고
저단 기어를 넣은 `프레스토'가
프레스토로 떤다.
차 고장 없기만을 길의 신(神)에 빌며
망초꽃이 모여선 길섶을 지나
아다지오로
덤프트럭 자국 깊이 파인 언덕을 오른다.
길의 신이 급커브를 약간 풀어놓으며
아슬아슬한 낭떠러지를 보여준다.
크롬 옐로우가 꿈결처럼 몸을 바꿔
흑인 영가로 흐르기 시작한다.
흑인 영가의 어두운 음을 끼고
에어콘 끄고도 헐떡이는 차를 천천히 몰아
온갖 생물학이 모여 썩고 있는 쓰레기 낟가리를 돈다.
아! 폐광 하나가 검은 입을 벌리고 비탈에 박혀 있다.
입술 위로 너와지붕이 튀어나오고
그 위엔 다듬지 않은 풀들이
수염처럼 자라고 있다.
빠지고 남은 이빨처럼 녹슨 쇠기둥 두 개가 박혀 있고
녹슨 밀차 한 대가 굴 밖으로 나오려다 말고
뒤틀린 선로 위에 심드렁하게 서 있다.
들이밀면 머리부터 씹힐 것 같아
목을 움츠리고 슬쩍 몸을 들이민다.
귀가 먹먹
아 사람 사라진 사람 냄새!
천정에서 물 한 방울이
정확히 머리 위에 떨어진다.

  3

고개가 가파르다.
자장 율사(慈藏律師)가 진신사리 봉안했다는 정암사 가는 길
그도 헐떡이며 넘었으리라.
앵앵대는 소형차를 길가에 그냥 내버리고 싶다.
가만, 자장이며 의상(義湘) 같은 쟁쟁한 거물들이
경주, 황룡사, 부석사를 버리고
왜 강원도 산 속을 방황했을까?

왜 자장은 강원도 산골에서 세상을 떴을까?
입적지(入寂地) 미상의 의상도
강원도 산골의 행려병자가 아니었을까,
이곳 어디쯤에서?
가파른 언덕을 왈칵 오르자
해발 1280m의 만항재.
태백시 영월군 정선군이 서로 머리 맞댄 곳.
자글자글대는 엔진을 끄고 차를 내려 내려다보면
소나무와 전나무의 물결
가문비나무의 물결
사이사이로 비포장도로의 순살결.
저 날것,
도는 군침!
황룡사 9층탑과 63빌딩이
골짜기 저 밑에 처박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없이도 마음이 온통 시원하다.
잠시 목숨을 잊고 험한 길 한번 마음놓고 차를 채찍질해
황룡사, 63빌딩, 정암사를 순식간에 지나서
정선 쪽으로 차를 몬다.

  4

화암약수터 호텔 여주인은 웃으며 말했다.
“제철인 데다 버섯 재배농가 회의로
정선군 모든 방이 다 찼지요.
몰운대 저녁노을이나 보시고
밤도와 영월이나 평창으로 나가시죠.”
표고버섯죽 한 그릇 비우고
길을 나선다.
신선하고 기이한 뼝대
저녁빛을 받아 얼굴들이 환했다.
그 위에 환한 구름이 펼쳐진 길
그 끝을 향해.

5

몰운대는 꽃가루 하나가 강물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엿보이는 그런 고요한 절벽이었습니다. 그 끝에서 저녁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앉아 있었습니다.
새가 하나 날다가 고개 돌려 수상타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모기들이 이따금씩 쿡쿡 침을 놓았습니다.
(날것이니 침을 놓지!)
온몸이 젖어 앉아 있었습니다.
도무지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

너를 잃고 해마다 한두 번씩 찾아가던 몰운대, 구름도 가라앉아 지날 수 없다던 강원도 정선의 높은 뺑대(절벽) 위에 서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죽어버리자던 마음도 잊혀지곤 했다. 너를 잃고도 살아갈 수 있다던 내가 징그럽게 미웠으므로 나는 그곳에 설 때마다 미워하던 나에 대해 알 수 없는 위안을 얻어 돌아서곤 했다. 절벽 위 벼랑 끝에 서면 생(生)에 대한 지긋지긋한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간신히 기운을 차려 돌아서면 하늘 위로 구름이, 땅 위의 옥수수 밭이 스스스 소리를 내며 뱀처럼 움직인다. 바람이 혀를 날름거리며 '거봐, 이번에도 죽지 못하고 돌아섰지?'

삶이 세상에 갇혀 오도가도 알 수 없는 이라면, 도통 생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은 몰운대로 가라. 그곳 벼랑 위에 서면 네 삶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으리. 퉁퉁하게 부어오른 한꺼풀 살가죽에 갇힌 그대의 삶이 흐엉흐엉 소리를 내며 울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 지난 2010년 다시 찾은 몰운대, 벼락맞은 소나무는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가지마저 삭아서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나무 둥치 속 보금자리를 찾은 벌들이 앵앵 울어대며 나그네의 등을 몰아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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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책꽂이를 치우며

-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 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

나는 도종환 시인의 이 시가 머리로 꾸민 시가 아니라 정말 일상에서 시인이 직접 대면한 그 순간의 일부를 시로 옮긴 것이라 생각한다. 신혼 살림을 13평 짜리 방 두개의 작은 연립에서 시작했다. 방 하나는 부부 침실,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책창고였다. 우리 부부가 가장 먼저 생각한 혼수는 책꽂이였는데, 좋은 책장을 들일 수 없어 동네 가구점에 부탁해서 책장 여섯 개를 맞췄다. 책장 여섯 개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작은 유리창 하나도 허락할 수 없으리만치 책으로 가득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가난한 우리 부부에게는 최대한의 사치였는데 욕심껏 책장을 맞춘 것까지는 좋았지만 책장 여섯 개로는 택도 없이 부족한 우리 집 책이 문제였다. 결국 책장 한 칸에 책 두 줄씩 포개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책장의 가로대가 모조리 휘어버리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다. 결혼 생활 10년에 지금껏 이사를 세 번했는데,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의 갖은 원성을 들으며 남들보다 더 많은 이사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지금은 방 3칸 짜리 삼십평형 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부부 침실을 제외하곤 방 2개 모두 유리창을 허용할 수 없는 서재가 되어 버렸고, 거실마저 책꽂이가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둔 길 책을 읽어 불 밝힐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지만 도종환 선생도 내가 당신의 시집을 정리하여 내다버리길 바라진 않을 거란 심정으로 이사다닐 때마다 꽁꽁 싸매고 다닌다. 어떤 사람에겐 빛이 더 많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겐 천만근 무게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람구두이고, 그런고로 천만 근 무게로 내리 누르지 않는다면 언제고 이 세상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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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오랜만이구나. **아!
그간 어려운 일들이 많았구나.

너에게 위로를 주고 싶지만, 나 역시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 이곳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도 내 영혼은 계속 굶주림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랜 벗들에게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절교의 말들을 가다듬고 있다.

**아, 이런 경우 대개의 위로란 이런 식으로 출발하기 마련이다. 내가 살면서 겪어왔던 여러 어려움들을 너에게 들려주면서 나는 이렇게 살았고, 그것들을 이렇게 극복했다고 말하는 방식 말이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너와 같은 어려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너와 같은 괴로움을 안고 있다 해서, 같이 삶의 진구렁 속에서 뒹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어찌 서로에게 위안이 되겠느냐?

그래서 나는 네게 내가 과거에 너와 비슷한 경험 혹은 그 보다 더 깊은 절망과 슬픔 속에 있었음을 결코 자랑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위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문학의 길, 작가의 길을 걸어가려는 너에게 한 마디의 충고를 한다면... 그것은 나의 말을 대신한 파블로 네루다의 충고다. 너에게 파블로 네루다의 이 말과 이 시를 위안을 대신하여 주길 바라며 건넨다.

"젊은 작가는 외로움의 몸서리 없이는, 설령 그것이 단지 상상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글을 쓸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이나 사회의 맛이 깃들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시(La poesía)


그러니까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 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혹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찔려
벌집이 된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 만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1964) 중에서


나는 나의 언어와 생각을 평생동안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이미 무수히 많은 말들이 도착해 있고, 사람들은 나의 말에 귀기울이는 척 할 뿐 결코 삶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러하므로 평생 외로울 것이다. 견뎌라! 이 질긴 삶이 너의 생명을 거두어 갈 때까지....

너는 이 세상의 견디기 어려운 두 가지 외로움을 선택했구나, 하나는 글을 쓴다는 것, 다른 하나는 좌파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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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인천, 어디까지 가봤니?


지난 해 TV를 보면서 심심찮게 맞닥뜨렸던 대한항공(KAL)의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광고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우리와도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이고, 이민, 유학생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오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광고가 참신하게 느껴졌던 것은 그동안 미국하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뉴욕이나 LA,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의 풍광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잘 알지 못했던 미국의 작은 소도도시들을 찾아 소개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광고 덕분에 『오즈의 마법사』가 만들어진 배경이 되었던 캔자스 주의 와메고(Wamego), 『톰 소여의 모험』을 탄생시킨 한니발 같은 미국의 여러 곳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기에 너무나 익숙하지만 실은 잘 모르는 곳이 인천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인천 시민들이 만들고, 후원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문화재단인 새얼문화재단에서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어찌 보면 인천 사람이 아니다. 인천에서 현재 일하고 있고, 분양받은 아파트가 완공되면 다시 인천에서 살겠지만 인천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인천에서 학교를 다니지도 않았다. 만약 새얼문화재단과 인연이 닿지 않았더라면, 고등학교 때부터 지역문화운동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인천이란 도시의 인상은 여느 타지방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996년부터 새얼문화재단에서 일하게 되면서 나는 태생이 인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인천에 대해 좀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인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개항장 제물포, 인천상륙작전, 도크식 항만시설이 전부였다. 다행히 인천에 대해 잘 알고, 사랑하는 지역운동가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인천 한세기』를 쓰신 신태범 박사님, 『개항과 양관역정』을 펴낸 최성연 선생님 등을 생전에 직접 뵙고 생생한 이야기들을 엿들을 수 있었던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인천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더 많이, 더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는 인천의 약한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고민이었다.

현재 인천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는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덩달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했지만, 그 분들이 살아왔던 과거의 인천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지난 30여 년간 지속된 개발근대기 동안 많은 수의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유입되었고, 그 결과 타지에서 함께 이주한 문화가 본래의 인천문화와 혼종(混種)되면서 새로운 인천문화, 다양하고 역동적인 인천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이제 인천에 자리를 잡아 인천 시민이 되었고, 지금의 인천문화는 싫든 좋든 이들과 함께 만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천을 문화가 없는 도시라고 폄하하지만 문화란 지역민의 생활, 풍토, 환경이 한데 어우러져 시간과 함께 쌓여온 것이기에 문화 자체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인구 270만의 광역시인 인천에 공통된 지역문화와 단일한 정체성을 기대하는 것은 해불양수(海不讓水)의 도시 인천이 가진 풍부한 문화적 유전자를 배제할 위험성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인천은 아무도 가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인천의 모습을 염려하게 만든다. 송도신도시와 청라지구가 완성되면 과거 개발근대 못지않은 제2의 대규모 인구이동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든 그렇지 않든 인천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시민들이 느끼는 공통된 염원은 한결 같다. 잘 사는 도시,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잘 사는 도시, 살기 좋은 도시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현재 그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이 잘 살게 되고, 그들이 살기 좋은 도시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잘 살고 있는 시민들이 이주하여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론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나무 한 그루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잎과 줄기뿐만 아니라 뿌리의 힘이 중요한 것처럼 하나의 도시가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수많은 문화가 혼종되어 오면서도 현재의 인천을 만들고, 굳건히 지켜온 인천 문화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나는 그 뿌리가 곧 인천의 매력이며 우리가 그것을 새롭게 발견할 때 인천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리라 여긴다. 인천은 다른 여타 대도시들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문화 ․ 생태적으로 다양하고 힘이 넘치는 역동성을 지닌 도시다. 인천은 하늘과 바다, 육지로 연결된 인적 ․ 물적 소통의 요지로 그 어떤 지역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자연생태계와 문화생태계를 아우르고 있다. 수많은 생명의 아우성으로 바람 잘날 없는 세계 3대 갯벌과 아름다운 풍광이 돋보이는 연안도서들이 있는가 하면, 근대 개항장과 원 인천의 옛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화수부두, 북성동, 괭이부리말, 배다리 같은 지역이 있고, 부평, 관교 같은 신도심 지역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터널을 통과하며 인천만의 독특한 문화벨트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를 가보아도 한 도시 안에 이처럼 풍부한 이야깃거리와 다양한 얼굴을 감추고 있는 도시는 많지 않다.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든, 근대 이후 개항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든 이제 인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뿌리의 일부가 된 것들이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새롭게 인식할 때 인천의 뿌리는 더욱 단단하고, 튼튼하게 내려질 것이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는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고 했는데, 인천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가치를 재발견하고 새롭게 인식할 때 우리는 진정 인천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에 문화가 없다고 말하는 당신, “인천, 어디까지 가봤니?”

출처 : 인천발전연구원 웹진 아뜨리에
(http://webzine.idi.re.kr/content_view/read.jsp?v_seq=44&m_seq=323&content_seq=519&content_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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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 <연말정산-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 - 포토텔링기획전




전시기간 : 2009년 12월 31일 - 2010년 1월 20일
참여작가 : 김성헌, 김수진, 이치열, 심현철, 이명익, 정택용, 조재무, 박선주, 한상훈
전시장소 : 사진전문갤러리카페 <포토텔링>
홈페이지 : www.phototelling.net



사진전문 갤러리 카페 포토텔링(Phototelling)은 사진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다는 모토로 만들어졌다. 이들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준비한 기획전의 제목은 <연말정산 -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광학 원리에 의해 사물을 포착해내는 카메라 렌즈에 의해 정착된 사진은 있는 그대로 재현된 광학원리의 결과물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바라본 이의 시선에 의해 포박된 기호(記號)이다. 사진 기호는 작가에 의해 촬영되고, 현상과 정착, 인화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발화(發話)한다. 사진은 타인(감상자)의 시선에 다시 포박되는 과정을 통해 수화(受話)된다. 수신된 기호는 타인의 논리와 감정의 미로를 지나 또 하나의 심상(心象)이 된다. 세상의 모든 대화(對話)는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사진의 놀라운 재현성은 종종 화자에 의해 언술된 기호가 모두 사실(fact)일 것이라는 강박을 준다. 그러나 언어가 그러하듯 사진 역시 왜곡될 수 있으며 세상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모두 보여줄 수 없다. 사진의 놀라운 재현성과 현장성은 그 힘이 강력하면 할수록 그와 반대로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강력한 회의에 부딪치게 된다. 한 장의 사진은 물론이요,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사건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구체적 보편'이다. 사회적으로 무수한 연쇄의 고리를 지니고 있는 구체적 보편의 연쇄 앞에서 한 장의 사진이 구체적 해답이나 대답을 주기엔 너무나 약소하다.




한 장의 사진은 하나의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한 장의 사진 너머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진실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야만 한다. 이들의 사진은 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묻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구체적 보편의 연쇄 앞에서 구체적 해답(혹은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 과연 지금도 우리 안의 모순들과 대면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또 사진 속에 담겨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연민이 과연 진실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증명사진과 존재증명

문학에서 ‘자서전’이 그러하듯 미술에서 ‘자화상’이란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그려 그것을 후세에 남긴다는 의미보다 자신(존재)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의 투쟁을 담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 본질을 묻는 작업이다.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의 외양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의 온전한 모습을 집약하고자 노력한다. 자화상은 세계에 투사된 자아의 이미지이자, 존재의 확인이며 동시에 세상과 대결하는 자신을 노출하는 첨단(尖端)의 일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획전이 담아낸 우리 시대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비록 성긴 모양에 그칠지라도 그 윤곽을 살피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시선을 - 기륭전자(비정규직), 뉴타운, 미디어 법, 세종시, 대통령 서거, 쌍용차 등 -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의 자화상, 대한민국의 증명사진은 참담하다.




1997년 IMF외환위기를 전후해 우리는 ‘희망퇴직’이란 말을 즐겨 들었다. ‘희망’과 ‘퇴직’이란 어울리기 어려운 두 단어가 결합된 형용모순은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 당한 사람들보다 좀 나은 행운을 누렸다는 의미가 되었다. 1950년대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우리는 ‘희망의 빈곤’ 시대를 살았다. “잘 살아보세. 누구나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상징하듯 국가가 제시한 근대화의 아젠다는 폭압적이고 봉건적인 노동통제의 시대를 거쳐 근대 포디즘적 노동통제 시대로의 전환기 동안 ‘하면 된다’는 희망을 통해 빈곤을 인내하도록 했다. ‘희망’을 품고 있는 동안 ‘빈곤’은 그래도 견딜 만 했다. 그러나 생산 자본주의에서 소비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노동통제를 곧 자율, 자기계발이란 허울 좋은 논리로 전환시키며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강제하는 빈곤을 자기계발하지 못한 이들의 자기 책임으로 귀결시켰다. 이제 빈곤은 단순한 절망과 박탈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적 무능력자들의 책임이 되었다.

사회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자 약자들은 자신보다 더 약한 처지의 사람들을 배제하고, 박탈하여 엄혹한 시대를 견디려 한다. 광우병 촛불시위 현장에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비롯한 온갖 구호가 나왔으나 ‘비정규직 문제’로 넘어가면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이 아니면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앞에 우리는 모두 잔인한 동맹의 구성원이 되었다. 국가권력, 기업권력 앞에서 모두가 시선을 외면한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동안 그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왕따’였다.




이등시민의 사회 - 박탈과 배제의 일상화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처럼 황국시민과 후레이센진(不逞鮮人)처럼 일등시민과 이등시민으로 양분되고 있다. 이런 차별은 단순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만이 아니라 언제 누가 될지도 모를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제의 원리를 관철시킨다. 쌍용자동차는 거친 세계화의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한 이들의 투쟁으로, 세종시는 지역이기주의로, 미디어법은 그동안 안전한 고용의 테두리 속에서 고임금을 누려온 이들의 제 밥그릇 지키기로 폄훼된다. 5.18 광주 민주항쟁 이후 권위를 의심받았던 대한민국은 올림픽과 월드컵을 거치며 ‘오! 대한민국’으로 찬란하게 부활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집권여당이 2년 내 정규직으로 전환하란 법 규정을 4년으로 바꾸지 않으면 해고대란이 일어난다며 도리어 난리 치는 국가다. 우리는 빈곤하다.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 빈곤하다. 한 사회가 이처럼 조직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짓밟으면서도 OECD 10위 안에 드는 생산력, 경제력, 경쟁력을 누린다 한들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담고 있는 우리 시대 초상의 몇몇 구체적인 진면목을 살펴보자. 1990년 6월에 설립된 기륭전자(Kiryung electronics)는 한국의 위성방송 수신기를 제작, 생산하는 업체로 이 업체가 생산하는 제품들 - 디지털 셋톱박스, 디지털위성 라디오, 네비게이션, 지상파 DMB, HD Radio 등 - 은 대부분 외국에 수출된다. 제조업으로 분류되는 기륭전자지만 이 업체는 지난 2002년 이후 생산직 정규노동자를 한 번도 고용하지 않았다. 2005년 6월 30일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노동부에 기륭전자와 파견업체 휴먼닷컴에 대해 불법파견이라며 진정서를 냈고, 다음달 5일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기륭전자는 생산 물량을 중국의 외주업체로 빼돌린 뒤 물량감소를 이유로 계약직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노동부는 불법파견을 이유로 기륭전자에게 개선명령을 내렸지만 기륭전자는 비정규직 중 1년 미만 노동자 전원을 해고한 뒤 이들을 도급으로 돌리겠다며 개선이 아닌 개악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이는 법적으로는 불법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점거농성을 시작하자 공권력이 투입되었고, 조합원 전원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1,000일이 넘는 기나긴 투쟁이 시작된다. 기륭전자는 ‘파견근로자보호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였지만 끝끝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법적으로 파견된 사람일 뿐, 기륭전자의 정규직 사원이 아니므로 회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는 단지 기륭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비정규직이 무조건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고, 이제는 한국에 공장도 없기 때문에 정규직화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륭전자는 이름만 바꾼 다른 공장을 통해 제품생산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용산참사’. 정식명칭은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사건이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5시 33분, 대한민국 수도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 경찰과 용역 직원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경찰특공대 1명, 철거민 5명이 목숨을 잃었고, 2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 시절부터 추진했던 뉴타운과 도시정비사업의 결과였다. 서울시가 도시환경정비라는 목적으로 추진했던 도시정비사업은 서울 곳곳에서 벌어졌고, 그중에서 용산 4구역은 한강로3가 일대 5만3,442평방미터를 재개발하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재개발로 인해 인근의 땅값이 크게 올랐고, 그 결과 이 일대 지역에서 상가를 임대받아 장사를 하던 이들은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도시정비사업 관련 법률은 도시개발법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 토지 보상법 등 여러 법률체계에 얽혀 있어 일반인들은 설명을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며 복잡한 법률체계의 틈바구니에서 법률이 서로 일치되지 않거나 행정 판단을 내리기도 어렵게 되어있다.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는 철거현장마다 아수라장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법률체계의 문제다. 그리고 이런 법률체계의 틈새를 이용해 공공연한 불법행위들이 자행된다. 문제는 행정 권력이 토지소유주들의 입장과 세입자들의 입장 사이에서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역시 도시정비사업의 한 주체로서만 인식한다는 데 있다. 서울시와 용산구는 도시정비를 통한 땅값 상승과 이를 통한 세비 증대 등을 이유로 도시정비사업을 강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서울시와 용산구는 토지보상법에 규정된 주거이전비를 철거지역 세입자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이들을 강제로 내쫓으려 했고, 저항하는 이들을 범법자로 몰았다. 국가권력은 세입자들을 내쫓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용역들에게는 관용을, 이에 대항하는 세입자들은 범법자로 대했다. 범법자가 된 세입자들 가운데 생계를 위협받게 된 이들이 옥상 건물 위에 망루를 설치하고, 경찰과 용역 철거반에 맞서기 위해 화염병과 신너, 돌을 준비했다. 경찰은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사전에 최소한의 안전대책 마련이나 협상 없이 곧바로 경찰특공대를 진입시켰고, 그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용역들을 대동하기도 했다. 화재 발생의 직접적인 요인에 대해 일각에서는 농성자들이 화염병을 던져 생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공판에 나온 경찰특공대원은 “진압 당시 화염병 던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 내부에서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인터넷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용산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철거민과 조합간의 보상비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이에 주목해 이것을 사회문제가 아닌 세입자와 조합 사이의 문제만으로 축소해서 보려고 한다. 이명박 정부가 용산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며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도록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구속처벌하고, 범대위 위원장 등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 역시 마찬가지의 시선이다. 용산참사를 국가권력과 시민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세입자와 조합, 세입자가 조합에게 좀더 많은 이주보상비를 뜯어내기 위해 벌였던 시위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UN사회권 규약위원회에서는 “퇴거를 당하는 사람들이 원치 않을 경우 겨울철과 같은 악천후에는 퇴거를 수행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용산4구역은 2008년 11월부터 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국제사회는 겨울철 강제철거를 금지하고 있다. 검찰은 수사기록 등의 열람, 등사를 거부했고, 법원이 요구한 수사기록 3천 쪽 역시 변호인단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변호인단이 수사기록이 전면 공개될 때까지 공판이 중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끝내 거부되었고, 변론을 거부하자 재판부는 국선 변호인들로 하여금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겼다. 이에 반발한 피고인 9명이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운찬 신임 총리는 10월 3일 전격적으로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용산 철거민 참사에 대해 자연인으로서 무한한 애통함과 공직자로서 막중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총리로서 사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지만 “사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기는 어렵다면서 당사자 간 원만한 대화가 이뤄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고 꼬리를 붙였다. 무한한 애통함과 막중한 책임을 뒤로 한 채 용산참사의 피의자들은 모두 1심 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구형한 검찰이나 검찰의 구형 그대로 형을 선고한 법원이나 모두 비인정(非人情)이다. 그리고 용산참사는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곧 만 1년을 맞이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것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등에 새겨진 짧지만 강렬한 문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외침일 것이다.

“함께 살자”

함께 살자는 기륭전자의 외침, 용산의 외침,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외침을 외면하고서는 올해의 연말정산은 불가능하다.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이후, 2004)』에서 매스미디어를 바라보며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행위, 살아남은 혹은 평화롭게 살고 있는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바로 고통의 근본원인은 그대로 둔 채 단지 연민하는 포즈만 취하는 것이 주는 가증스러움을 거부하라는 말이다. ‘실천 없는 연민’은 ‘자기 연민’이자 ‘자기애’의 발로이고, ‘연민 없는 논리’는 잔인하다.



‘엄살’이란 ‘아픔이나 괴로움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실제보다 보태어서 나타내는 태도’를 일컫는다. 엄살이란 전체를 뜻하는 ‘온(온 세상의 온)’과 ‘살갗’이 합쳐진 ‘온살’이란 말이다.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준비한 작가들은 그들이 이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온살(엄살)쟁이’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타인이 얼어 죽어도 우리는 그와 상관없이 살 수 있다. 파업을 주도할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언론인이 일요일 오전 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되어 잡혀가도 누군가는 여전히 평온한 아침을 맞이한다.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릴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아프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지금 당장 나의 일이 아니므로 오늘 하루도 평범하게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다면 엄살이란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다. 혼자만 도덕적인 척 한다거나 위선이라고 지적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엄살'이란 상처의 기억, 고통의 상상력이다. 연인과 다툰 뒤 전화를 받지 않아 애태우던 불통의 기억, 가난하여 차별받았던 기억, 급작스러운 실직으로 고통 받았던 기억, 이런 기억을 실제로 체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 엄살의 힘이 우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우리는 상처의 기억, 고통의 상상력을 통해 내 일이 아닌 일에도 내 일처럼 아파할 수 있다. 인간이 꿈의 세계에서 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꿈꾸지 못하는 자들의 현실론이야말로 상상력 부재의 밀폐된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의 답답함을 의미할 뿐이다. 손톱 끝에 박힌 가시 하나에서 온 몸의 통증과 불편을 체험하듯 이 사회의 작은 일부가 아플 때 우리는 그것을 나의 일처럼 느낀다.



2009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포박하여 그려낸 이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자신이 바라보았던 것을 보여준다. 그들 중 누구도 이것이 대한민국의 모든 진실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진짜 얼굴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한 장의 사진 너머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진실에 대해 이제 우리는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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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세컨드1


- 김경미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남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 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쉿, 나의 세컨드는 - 김경미 시집
김경미 (지은이) | 문학동네



*

간혹 아깝게 놓치는 시집이 있는데, 김경미 시인의 "쉿, 나의 세컨드는"는 꼭 갖고 싶은 시집이었는데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지금은 구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다. '세컨드'란 표현이 한국에만 있는 건지 외국에서도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 말인 건 확실하다. '날 얼만큼 사랑해?'라고 묻는 말의 배후에는 '네가 제일이야!'란 말이 도사리고 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탓인지 아이들도 태어나면서부터 제 형제들과 먼저 경쟁을 벌이려고 한다. 첫째가 둘째를 시기하고, 둘째는 셋째로부터 위아래로 치고받힌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말씀들 하시지만 당하는 당사자로서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생각해보면 난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첫 번째가 되어 본 기억이 없다. 우리 집안의 장남의 자식이므로 장손으로서의 책무나 부담감은 백배지만, 든든한 배경이 되었어야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편이고, 아버지는 요절한 탓에 좋은 건 하나도 없고, 부담만 턱살처럼 늘어진다. 그래서 나는 시기와 질투를 숨기는 법을 어려서부터 익혀야 했다. 사실 이제는 그런 감정으로부터 어느 정도 초연해지기도 했다. 승자독식사회니까, 첫째가 된다. 1등이 된다는 건 그만큼 많은 자원을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승자가 된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고금의 진리가 증명하는 건, 물질적 자원의 풍요와 행복은 기초생활 보장의 차원을 떠나면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김경미 시인이 말하는 세컨드의 의미도 그것이다. 당당하게 나는 세컨드, 하류인생이라 말할 것...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하며 씨익 웃어줄 것...

나는 당신과 이 사회의 세컨드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이나 이 사회를 질투할 것 같은가? 천만에 말씀, 변방에도 행복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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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를 위한 반대’ 라고요?



이명박 대통령이 TV에 나와 그간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국민과의 대화’로 풀어보겠다고 했을 때, 솔직하고 진솔한 대화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민주화 이후 대국민 담화 대신 국민과의 대화는 꽤 여러 차례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대통령이 감독, 주연, 조연까지 도맡아서 하는 모노드라마였다. 손석희 교수가 물러난 자리에 대신 주인공으로 나선 이명박 대통령은 1분 질의에 20분간 답변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토해냈다. 물론 그 중엔 대통령도 추운 겨울이면 일반인들처럼 내복을 껴입는다는 새로운 사실도 있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100분간 진행된 ‘대화’는 불도저 대통령의 일방적인 ‘담화’로 채워지고 말았다.

대통령은 4대강 사업과 관련해 지난 정권들에서도 수질 개선과 홍수 조절 등 여러 가지 하천정비 사업에 해마다 수조원이 들어갔는데, 그때는 반대 안 하다가 지금에 와서 반대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간 수질 관리며 홍수 예방을 위해 찔끔찔끔 예산을 집행해 왔는데 이번에 잘 정비해서 원천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논리다. 얼핏 들어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이 늘 해오던 하천정비 사업이나 서울시장 시절의 치적으로 내세우는 청계천 사업과 비교될 만한 수준이 아니라 국토환경을 변화시키는 거대사업이란 사실은 쉽게 망각되어 버린다. 게다가 지금까지 홍수가 났던 곳들은 대개 지방하천이고, 이명박 대통령이 보를 만들겠다고 하는 곳은 국가하천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인 시절부터 ‘반대를 위한 반대’란 말을 즐겨 사용해왔다. 인수위의 영어몰입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때도 “반대를 위해 반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한 대통령의 초지일관한 자세를 높이 평가해야 할까. 또 대통령은 ‘반대를 위한 반대’는 주장이 간단명료하기 때문에 국민들 귀에 잘 전달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의 반대가 심한 까닭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실상을 잘못 이해하거나 대통령이 우리 국민의 수준을 너무 낮게 보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던 미네르바가 구속되었다가 풀려났고, 정권이 바뀌면서 해임되었던 정연주 KBS 사장도 결국 해임 무효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MBC 의 PD와 방송작가는 재판이 진행 중이고,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환경단체들이 내보내려 했던 라디오 광고는 두 차례나 방송이 보류되었다. 미디어법 강행 통과 이후 정부의 미디어법 홍보광고는 계속되었지만 미디어법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광고는 헌재에 의해 심판 중이란 이유로 보류되었다. 이처럼 반대의 목소리는 도처에서 억압받고 있다.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대화 상대는 아무래도 국민이 아니라 역사인 듯싶다. 그는 여러 차례 인기보다는 소신을, 그로 인해 비난받을 것도 각오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정치적 의도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자신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소신 있는 정책을 추진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역사의 정의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책 실패로 국민의 지지를 잃은 정치 지도자들은 곧잘 ‘역사와의 대화’나 ‘역사의 심판’이라는 미명 아래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 왔다. 정책을 추진하는 데만 급급해 국민의 말을 들을 시간조차 없는 대통령의 말에 과연 역사가 귀기울여줄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이와 같은 대통령의 소신과 진정성을 백 번 믿어준다 하더라도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대통령의 소신과 정책이 어째서 자고 일어나면 표현이 달라지고 내용이 달라지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경향신문>(2009.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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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김창남(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 권혁태(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님들이다. 오, 이런...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의 공부법

여러분 안녕하세요.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전성원입니다. 오늘 오면서 보니까 이번 강연을 알리는 포스터에 저를 가리키는 말로 “뚱뚱한 르네상스맨”이란 새로운 별명이 생겼더군요. 이번 강연을 준비하면서 학생 여러분이 얼마나 고심했을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이곳에 다녀갔던 다른 분들처럼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그 분들처럼 여러분이 관심을 가질만한 특정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인터뷰하고, 홍보하는 동영상을 만들고 포스터까지 만드는 어려운 과정을 준비해온 팀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제 직업은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이고, 이름은 전성원이지만 인터넷 온라인 세계에서는 바람구두라는 닉네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라는 주제로 10년이 되어가는 디지털 아카이브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운영자로 더 많이 소개되는 편입니다.


어느 방송국 PD나 사진작가, 아나운서 같은 구체적인 직업으로 호명되지 않고 “르네상스맨”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소개를 받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제가 이른바 신문편집자들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속어인 ‘야마’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잡다하게 벌여놓은 일들이 많기는 합니다. 사실 제 소개를 스스로 하라고 한다면 저는 지식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인문사회과학전문 계간지인 황해문화 편집장,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라는 디지털 아카이브를 운영하는 디지털 아키비스트, 새얼문화재단이라는 인천지역의 문화운동단체에서 일하는 지역문화운동가,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의 운영위원이자 동시에 사진비평, 영화비평, 문화예술정책 분야는 물론 심지어는 아동문학비평까지 온갖 분야를 참견하고 비평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저는 이런 분야에 대해 아무런 라이센스도 취득한 바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문학비평이나 영화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신춘문예나 영화잡지를 통해서 등단이라는 절차를 밟도록 되어 있습니다. 의사들이 중세 길드 조합에서 출발한 것처럼 예술가들도 이런 길드를 형성해서 자격 없는 사람은 아예 비평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제도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자면 저는 한 마디로 글쟁이이자 자격 없는 문화지식인인 셈입니다. 저는 공부하는 걸 지독하게 싫어해서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했고, 3년간 전국의 막노동판을 떠돌면서 노가다꾼으로 살다가 남들보다 4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운전면허 시험도 시험이라고 미루고 미루다가 제 나이 서른한 살에 간신히 땄습니다. 대학원에 들어갈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저랑 대학동기인 집사람이랑 같이 방송통신대학 2학년에 편입했는데 저는 그 대학도 5년만에 졸업했습니다.


오늘 저를 이 자리에 불러주신 김창남 교수님은 지금도 저만 보면 “언제 논문 쓰고 졸업할 거냐?”고 혀를 끌끌 차십니다. 제가 2005년에 성공회대 문화대학원에 입학했는데 올해가 2009년이니까 대학원만 5년 동안 다니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제가 오늘 여러분 앞에서 “나는 나를 이렇게 공부시켰다”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오늘 강연의 가장 큰 주제이자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토록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미디어 특강까지 나올 수 있었을까?



인생은 C다!

사실 저는 자라온 과정이나 환경을 살펴보면 계간지 편집장이나 글쟁이보다는 조폭이나 깡패가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꼭 버스나 지하철에서 강제로 물건 팔러 온 사람처럼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세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고, 일곱 살 때는 아버지가 집을 나가셔서 그 뒤로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랐습니다. 제 나이 열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뒤로는 할머니와 함께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밑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습니다. 굉장히 고생하면서 살았을 것 같지만 숙부, 숙모님이 훌륭한 분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고생이라 느끼진 않았습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도 아주 잘 해서 반장에, 학생회 간부도 맡아서 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사실 삶이란 매우 작은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고, 다른 이들에게 평가받는 것도 큰 성과나 실책이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 중에서 어떤 사람도 아마 평생 살면서 인류를 절멸시킬 수도 있는 핵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눌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일은 아마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택이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는 일이거나 아니면 무언가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해봐야겠다 고민하는 정도겠지요. 저도 살면서 사소한 일로 목숨을 걸어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젊어서 일찍 죽어도 스타가 되고, 영웅이 되지만 어떤 사람은 장수만세에 출연해도 좋을 만큼 오래 살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엔 별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삶의 밀도 차이 때문입니다. 짧게 굵게 살고 싶다는 사람이 있고,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는 사람이 있지요. 밀도란 부피분의 중량을 말하는 건데 인생에 있어서의 밀도란 그 사람이 평생 살았던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경험하고, 얼마나 많은 일을,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을 했는가로 결정될 겁니다.


여러분, 넌센스 퀴즈 같은 것인데 B와 D 사이엔 뭐가 있나요? 그렇죠. C가 있습니다. B! Bith(탄생)과 D! Dead(죽음) 사이엔 C! Contents(내용)가 있습니다. 그럼, 이 컨텐츠는 무엇으로 만들어질까요? 컨텐츠는 3C, 소통을 뜻하는 Communication과 상호협력을 뜻하는 Cooperation 그리고 창조를 뜻하는 Creative로 만들어집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도 많이 보았음직한 만화 <슬램덩크>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자칭 천재 강백호도 아니고, 서태웅도 아니라 불꽃남자 ‘정대만’입니다. 어릴 적엔 농구의 천재였던 정대만은 중학시절 농구대회를 석권할 만큼 뛰어난 농구실력을 지녔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경기 중에 무릎 부상을 당하고 좌절해서 깡패가 됩니다.





그런 정대만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과거 “포기하면 그 순간이 끝”이라고 가르쳐줬던 안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였습니다. <슬램덩크>는 북산고라는 만년 하위팀이 어떻게 팀워크를 다져가면서 정상을 향해 도전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오관돌파를 하는 것처럼, 조자룡이 조조 군대를 무인지경으로 휩쓸면서 유비의 자식인 아두를 구해내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처럼 <슬램덩크>의 작가도 각각의 캐릭터들에게 극적인 순간들을 부여하는데 정대만의 극적인 장면은 오랫동안 농구를 쉬었기 때문에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마지막 3점슛을 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그는 이 순간 스스로에게 말하죠. 자기 팀 동료들을 믿는다고. 설령 자신의 3점슛이 불발로 끝나더라도 리바운드 천재 강백호가 있고, 서태웅이 있고, 채치수가 있으니까. 그는 안심하고 슛을 쏩니다. 그게 바로 협력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대만은 일순간 경기를 지배하게 되고, 모든 관중이 숨을 죽이는 순간을 연출해 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인 거죠.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것은 제가 어떻게 세상과 커뮤니케이션하고, 누구와 협력해서 무엇을 창조했는가 혹은 무엇을 창조하려는가 하는 겁니다.


민주화운동에서 냉소에 이르기까지

제가 1970년생입니다. 우리 나이로 올해 딱 마흔인데요. 우연한 이유인지 아니면 모든 인간이 역사 속에서 태어나 살게 되는 탓인지는 몰라도 저는 태어나긴 서울시 구파발동에서 태어났지만 자라기는 송파구 마천동에서 자랐습니다. 마천동은 요즘 제2롯데월드와 함께 이전하냐 마느냐로 논란이 되었던 공수특전사령부가 있는 동네입니다. 지금은 그 일대가 나름대로 번화해진 뉴타운이지만 제가 자랄 때만 해도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고무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할 만큼 가난하고 못 사는 동네였습니다. 비만 오면 온 동네가 진구렁으로 변할 만큼 낙후된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지역은 청계천을 덮고 그 위로 삼일고가도로를 만들면서 원래 그곳에 살던 도시 빈민들을 성남광주지구로 강제 이사시키면서 만들어진 동네입니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도 이 동네 이름이 나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 공수부대사령부인 특전사가 있었기 때문에 12.12사태가 일어나던 날 밤엔 저희 집에서도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가 제 나이 열 살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친구들 중에는 아버지가 직업군인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공수부대, 특전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도 광주사태, 5.18민주화운동일 겁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지금 서울구치소 옆에 있었고, 당시 전두환 정권 아래서 집권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이 있었습니다. 84년이던가 85년이던가 민정당 연수원 점거농성사건이 있던 날엔 저희 학교 수업 중에 창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을 만큼 최루탄 냄새가 지독했지요.
 

어쨌거나 저처럼 비뚤어지기 쉬운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중학교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 살았던 편입니다. 그런 제가 비뚤어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중학교로 전학 온 한 친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란디? 그랑께”하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녀석이었는데 광주에서 전학 온 촌놈이었지요. 제가 이 녀석에게 넌 광주에서 왔으니까 광주사태에 대해 잘 알거 아니냐고 해서 물었더니 이 녀석이 저를 운동장 저 구석까지 끌고 가서 한다는 소리가 이거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이야기해주는 거였습니다. 자기 사촌 형도 공수부대원에게 죽었다는 거죠. 사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들이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별로 충격도 아니었겠지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제 친구들의 아버지가 광주로 내려가서 제 친구의 사촌 형을 총으로 쏴 죽인 겁니다. 그때부터 도대체 광주에선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제가 다니던 중학교에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오신 사회선생님이 계셨는데, 저를 참 예뻐해주셨습니다. 이름도 잊지 않는 것이 그 분 성함이 이원숭 선생님이라 저희가 원숭이라고 놀렸거든요. 그 분에게 어느날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여쭸습니다. “선생님! 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땠을 것 같아요? 저는 그 순간 이 분의 얼굴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서 저를 다시 쳐다보더니 지금은 말해줄 수가 없으니까 이따 방과 후 학교 근처에 있는 중국집 앞에서 기다리라는 거예요. 제가 이 날을 잊을 수 없는 이유가 또 있는데 난생 처음으로 중국집에서 짜장면 말고 잡탕밥이란 걸 먹은 날이거든요. 선생님이 퇴근하고 오실 때까지 학교 근처에서 놀다가 중국집 앞에 서서 선생님을 기다리니까 저를 밀실로 데려가셨어요. 거기에서 처음으로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엔 성당에서 은밀하게 광주비디오란 걸 돌려보고는 했는데 저도 나중에 어른들 틈에 끼어서 광주비디오를 봤습니다. 겉으로는 영화 <미션>을 성당마다 돌아가면서 상영회를 했는데 <미션>을 보고나서 광주비디오를 틀어준 겁니다. 어린 마음에 그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어요. 며칠 동안 밤에 잠을 못 잤어요. 무서워서.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세상엔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이면을 갖고 있구나.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 역시 내 스스로 탐구하고, 알아보기 전엔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말이죠. 그때부터 제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부터 교과서보다는 금지된 지식을 얻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세계사교과서를 대신해서 자와할랄 네루가 영국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다가 옥중에 갇혔을 때 자기 딸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하도록 하기 위해 썼다는 <세계사편력>을 시작으로 풀빛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민중사> 같은 책들을 읽었죠.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 1986년이었고,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되던 해가 1987년이었습니다. 87년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어떤 인연으로 당시 운동과 결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너무 구구한 사연이 될 듯합니다. 다만, 1987년 12월 명동성당이란 시대의 막간극 무대에 저도 잠시 편승했던 적이 있었다는 정도를 밝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역사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50여개 학교, 20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공정한 대통령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외쳤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 중 일부만이 기억하는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엽합’의 명동성당 시위였습니다.


조세희 선생은 1987년 12월 대선의 그 날을 ‘악이 드러내놓고 선을 가장하고, 선이 악에게 패배한 날’로 불렀습니다. 우리가 염원했던 민주화의 역사는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잘못 시작되었습니다. 17살의 어린 학생이었던 당시의 저는 그 날의 충격과 비참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국민의 다수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자 후계자였던 노태우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정치인들, 운동세력은 독재의 문민화를 전복시키는데 실패했습니다. 독재의 문민화 전략이 먹혀들고,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명망 높았던 운동가들은 속속 전향 선언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경력은 제도권에서 자신의 입지를 쌓는 업적으로 변신되었습니다. 지역주의가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자 그들 가운데 일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과거 독재 권력에 뿌리를 둔 정당에 투신해 새로운 지배 권력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민주화 20년의 역사는 동시에 전향의 역사이고, 패배의 역사였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제게 그 같은 일련의 흐름들은 대단한 충격이었고, 저 자신의 삶마저도 굴절시킬 만큼의 치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거의 10여 년 간 냉소와 자기비하를 최선의 방책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고등학생 운동 혹은 대학생 운동세력으로 하여금 출세와 성공이라는 일반적인 삶의 궤도를 이탈하게 만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5.18광주’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테러를 가했던 ‘5.18광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나라 대한민국의 본질과 우리 앞에 민주주의의 얼굴로 미소 짓고 있던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고, ‘5.18광주’의 진실을 접했던 우리들은 시대와 양심의 부름에 호응하는 것이 청년의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 명동성당 시위를 마무리 짓는 비참한 현장에서 저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첫째. 진실을 깨우치게 된다고 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과 안위를 떨치고 일어나 진실을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보이는 것과 다른 이면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거나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닐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제가 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이 싸움은 내가 평생을 전력투구한다 할지라도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목표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란 깨우침이었습니다. 저는 진보란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란 당대의 현실을 고민하고,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보는 언제나 현실을 토대로 미래를 상상하는 겁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지녔던 가장 강한 매력은 계급착취가 없고,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대접받고, 존재하는 인간해방의 평등세상이란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상정했습니다. 그것도 마치 역사의 법칙처럼 부르주아자본주의 생산력이 최고조에 달한 뒤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한다는 엄밀한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것이었지요.


좌절이라면 좌절이었을 법한 그 경험 이후 97년까지 거의 10년여를 방황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갔었고, 다시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3년여를 보내다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 무렵의 제가 스스로 대단히 불행하다거나 불운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광고회사에 취직했고, 연애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에 대해 받았던 느낌은 오래도록 민감한 상처로 남았습니다. 버림받은 느낌, 상실감, 배신감에 저는 세상을 향해 실천 없는 냉소만을 보냈습니다.





천호동텍사스촌에서 황해문화 편집장에 이르는 길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 인생을 보내고 있을 때 우연히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당시 재수를 해서 경원대학교에 다니던 친구인데 그 친구에게 제 고등학교 1년 후배가 분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1991년 5월 3일에 분신을 했다고 하더군요. 이때를 역사는 이른바 분신정국이라 부르는데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분신,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 분신, 3일 경원대생 천세용 분신, 6일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의문사,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분신, 10일 노동자 윤용하 분신, 18일 시민 이정순 분신, 22일 노동자 정상순 분신,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경찰에 밟혀 압사, 6월 1일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 분신 등 이 기간 동안 모두 10명이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때 막연하게 아,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막노동판으로 돌아가서 일을 하면서 대학등록금을 벌었어요. 그때는 제가 제 돈으로 속옷 사 입는 것도 아까워서 남이 입다가 버린 속옷을 주워서 삶아 입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갔어요. 그때는 서울예전이 서울 명동에 있었는데, 저는 서울에 올라와서 살 거처가 마땅치 않아서 천호동 423번지 옥탑방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천호동 423번지 알아요? 천호동 423번지의 별명이 일명 '천호동 텍사스촌'이었어요. 학교에서는 매일 같이 아름답고 순수한 시를 배우고, 저녁에 집으로 가는 길엔 창녀들이 옷깃을 잡는 날들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옥탑방이 3층이었는데 1층은 쇼윈도우 케이스였고, 2층은 벌집으로 작업방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잡은 직장이 한보그룹의 막내아들이 개인적으로 돈을 투자해서 만든 광고사였어요. 이때 제가 한 일이 광고 카피라이터 겸 광고대행사의 AE같은 역할이었는데, 이 무렵 제가 만든 출판 광고들이 한보그룹에서 수입했던 피아트 자동차, 삼성 라이온즈 팬북, 한보철강 브로슈어, 한보그룹 브로슈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성경제연구소와 함께 삼성인의 법률상식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여러분, 얼마 전 삼성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기억하시죠. 이미 10여년도 훨씬 전부터 삼성은 삼성인의 법률상식 같은 책을 만들어서 사내 기밀을 누설하면 징역 몇 년을 맞을 수 있다는 식으로 직원들을 교육했습니다.


당시 한보는 유원건설 같은 중견건설 회사도 인수하고, 하루가 다르게 회사가 확장일로에 있었기 때문에 저도 나름대로 잘 나갔어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아는 분이 거의 없겠지만 이른바 수서비리 사건이라고 해서 지금의 박연차 게이트 같은 건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비리 사건으로 결국 한보그룹이 휘청이면서 무너지고 맙니다. 저도 그 때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이 때 저랑 같이 일한 사람이 함민복 시인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자본주의의 우울”이란 시집을 냈죠. 직장을 그만두고 3개월 동안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고민했습니다. 유명한 시 구절이 있지요.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꼭 그랬더라구요. 80년대 운동하다가 민자당 입당하고 그런 사람들만 잘못 산 것이 아니라 나도 잘못 살았구나.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 천하의 흥망은 평범한 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인천에서 지역문화운동을 하는 새얼문화재단에서 황해문화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랑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 그 선배가 장석남 시인입니다. 그런데 이 선배랑 같이 일을 한 기간은 막상 얼마 안 됩니다. 한 1년 반 정도 함께 했는데 갑자기 그만둬 버렸어요. 물론 저도 고등학교 때 나름대로 독서도 하고, 의식화 학습도 했지만 사실 제 주전공은 문학입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혼자서 인문사회과학 계간지 편집을 혼자 떠맡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도전과제가 주어진 거죠.


공부는 일로 배워라

여러분! 공부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세요. 공부는 일로 배우는 게 가장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직장을 다니게 될 텐데요. 자기가 공부 잘하면 학교에서 장학금 주죠. 요즘 같이 취업하기 어려운 때에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 하는 건 좀 암담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에 나가서 직장이란 게 얼마나 좋은 거냐면 선배들이 일 가르쳐주는데 거기에다가 달달이 공부하라고 월급도 준다는 겁니다. 어느 학교에서 매달 용돈주고, 공부시켜주는 곳이 있겠어요. 육군사관학교 같은 곳이라면 몰라도. 제가 공부는 일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이야기한 것은 곧이곧대로 들으면 배 아픈 이야기겠지만 이 말은 일을 반대로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로 여기란 뜻입니다.


저는 문학전공자라서 다른 인문사회과학분야에 대해서는 사실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문이나 잡지, 다른 계간지들을 죄다 살피면서 제 마음에 드는 필자 1,000명의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물론 이 일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은 아니었지요. 우리 김창남 교수님에게 강의를 들었다면 누구나 기억하게 되는 말일 텐데요.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물은 전부 바닥으로 빠져나가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나물은 자란다는 말이 있지요. 제가 성공회대학교란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저는 노동과 공부, 놀이가 하나로 결합될 때 우리의 삶이 가장 행복해진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기는 참 어렵죠. 저 혼자 그렇게 하려고 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한 개인이 완전히 바꿀 수는 없어도 본인 자신이 발상을 전환하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신상명세를 작성하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낯선 사람, 낯선 세계, 낯선 생각들을 만나는 일은 놀이동산에서 88열차 타는 것만큼 신기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계간지 특성상 매 계절마다 새로운 주제로 특집을 꾸밉니다. 편집기획 일이란 것이 내가 그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알지 못하면 기획도 할 수 없고, 원고청탁도 할 수 없고, 교정이나 교열도 볼 수 없습니다. 뭘 알아야 이번 특집은 이런 의도로 만들어졌고, 이렇게 이렇게 써달라고 부탁을 할 거 아닙니까?


모르면 어떻게 해요? 그 분야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겁니다. 마케팅에서 새로운 시장에 도전하기 전에 뭘 하나요? 시장조사란 걸 하지요. 편집자도 똑같습니다. 어떤 지식인에게 원고 청탁을 하려는데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이런 청탁을 하면 어떤 글을 써줄지 대충은 알아야 원고 청탁을 할 수 있습니다. 안 그랬다간 완전히 엉뚱한 글이 나오기 때문이죠.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사람 책을 읽어야 됩니다. 제가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에 진학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김창남 교수님의 책으로 시중에 나와 있는 것을 죄다 사서 읽는 일이었습니다. 박사 논문으로 쓴 것부터 김창남 교수님의 친구 중에 화가 분이 있는데 이분이 쓴 에세이집에 나온 김창남 교수님의 고교시절 모습까지 전부 찾아 읽었습니다. 한 번 시작했으면 아예 뽕을 뽑는 거죠.


먼 길 돌아가는 공부일수록 즐겁다

저의 공부란 것은 주로 이런 식입니다. 가끔 어느 어느 분야에 공부를 좀 하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으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부와 놀이에는 공통요소가 있습니다. 멀리 우회할수록 성취했을 때의 만족도가 커지고, 그것이 진짜 공부가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판소리 중에 “흥보가”를 아실 겁니다. 판소리 흥보가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 중 하나가 놀부가 화초장을 하나 얻는 대목입니다. 놀부가 너무 귀한 보물을 얻었다고 생각해서 집에 갈 때까지 화초장 이름을 기억하려고 계속 외우죠.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얻었구나. 얻었구나. 화초장 한 벌을 얻었다. 화초장 한 벌을 얻었으니 어찌 아니가 좋을소냐.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또랑 하나를 건너뛰다, 아뿔까, 잊었다. 이것 무엇이라고 허등만요? 응, 이거 뭐여? 뒤붙이면서도 몰라, 초장화? 아니다. 장화초? 아니다. 화장초?”


그런데 그만 화초장의 이름을 까먹어 버립니다. 놀부는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대로 엄청난 욕심쟁이죠. 가진 거라곤 물욕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놀부지만 화초장의 이름을 까먹는 순간부터 화초장은 더 이상 금은보화 같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이 됩니다. 놀부가 화초장의 이름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화초장은 욕구와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거죠.


“아니다. 어따, 이것이 무엇인고? 간장, 고초장, 꾸둘장, 방장, 송장? 아니다. 어따, 이것이 무엇이냐? 천장, 방장, 꾸둘장? 아니다.”하면서 놀부는 화초장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제법 먼 길을 돌아갑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 후, 아내에게 “얼른 썩 알아맞춰, 죽이기 전에”라고 말하면서 묻습니다. 놀부 마누라가 “이전에 우리 친정 아버지가 그런 걸 보고 화초장이라고 허던구마”라고 말하자 “놀보가 어찌 반갑던지, 아이고, 내 딸이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공부란 건 이처럼 즐겁고 순수한 놀이처럼 해야 됩니다. 앞서 저는 괜찮은 광고회사를 다녔다고 했습니다. 아마 계속 그 길로 나갔으면 지금처럼 10년도 넘은 차를 계속 고쳐가면서 타지 않아도 괜찮았을 겁니다. 그런데 광고 일을 하면서 저는 별로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볼 때는 별로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도덕적으로도 별로 훌륭한 기업이 아닌데 그 회사가 훌륭하고, 그 회사의 CEO가 훌륭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죄다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셈이지만 순전히 제 개인적인 차원에선 그랬습니다.



공부는 왜 하는가?

우리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에 대학 4년을 다니면 공부하는 기간만 16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하는 이유가 뭐예요.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도대체 뭔가요? 우리 옛 선인들은 공부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 첫 구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하니라.

큰 가르침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과 하나 되는 것에 있으며, 지극히 선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에 있다. <『대학』, 經一章>



공부를 하되 항상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이 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현대의 교육은 대부분 직업교육이 되어 버렸습니다. 옛날 교육의 목적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떤 인생의 목표를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쳤지만 지금은 딱 의식주를 마련하는 게 공부의 가장 큰 목적인 것처럼 배웁니다.


우리의 육체는 모두 물질로 만들어져 있고,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물질을 섭취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제한된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서로 투쟁하는 장소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고, 또 요즘 여러분들이 피 말리게 경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16년간 열심히 공부했는데 당장에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갈 데가 없고, 취업을 했다손 치더라도 기껏 인턴이고, 정규직으로 채용되었는데 사오정이고 오륙도가 되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삶은 참 하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육체를 위해 추구해온 모든 것들은 육체가 없어지는 순간 그 가치와 의미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이며 살아오면서 추구해온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괴로움과 고달픔을 참고 견디며 노력해온 공부의 대가는 무엇인가? 사실 이와 같은 일생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고, 반드시 닥쳐오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살며,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겠죠.


지금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욕망이 일원화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물질적인 욕구에 찌들어 있는 거죠. 모두가 물질적 부를 축적하고 그걸 내 후손에게 안전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다리 타기’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오늘 제 강의가 일종의 자기계발방법에 대한 강연으로 생각하고 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 간신히 졸업한 공돌이였다가 노가다판 일꾼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계간지 편집장이 되고, 독학으로 문화지식인이 되었나 인간승리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오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제 아무리 자기계발은 허구다, 모순이다 이야기를 해도 세상의 모든 공부는 결국 자기계발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자기계발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저는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기계발, 즉 공부 자체는 좋지만 내 공부가 무엇을 겨냥하고 있으며,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계발론의 문제점은 “내가 노력하고, 자기계발 열심히 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 있다. 하면 된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처음 출발선부터 다른 사람들이 도처에 있고, 사실은 사회가 그것을 강제하는 시스템입니다. 며칠 전 뉴스를 보니까 주식 가격이 떨어졌을 때 대한민국 1%에 속한 사람들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자녀들에게 주식을 물려줘서 7살짜리 아이가 230억 원어치 주식을 증여받았지요. 잘못된 자기계발론은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듭니다. 일종의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거죠. 자기 혼자만의 입신출세를 위한 사다리 경쟁은 결국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내 안의 이기적인 자아가 나의 참된 자아를 착취하는 악순환에 빠뜨리고 맙니다.


▶ 성공회대 미디어 특강에서 그다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모로 부족한 나란 사람을 탐구대상으로 정하고 연구해준 조원들과 기념 촬영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

공부, 즉 배움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해서 나를 위한 공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 해서 남을 위한 공부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을까요? 윤리적으로는 당연히 남을 위한 공부가 더 높이 평가 받을 겁니다. 그런데 공자는 나를 위한 공부 없이 남을 위한 공부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영어 교과서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일대기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당시 우리 반에는 전교 1등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영어 선생님에게 “슈바이처 박사는 남을 돕는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니까 이것은 순수한 의미에서 이타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당시에 선생님은 대답해주는 대신에 저희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우리는 모두 하나의 생명으로 당연히 자신의 안전과 행복한 삶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이기주의자지만 그런 사람의 욕구가 사회공동체의 이익에 합치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람을 위대한 인간이라고 부른다”고 답했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지난 2000년부터 지금 2009년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주제로 디지털 아카이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커뮤니티를 구성하면서 어느덧 조회 수가 200만을 바라보고 있고,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들만 3,000명 가까이 됩니다. 그리고 얼마 전엔 다음세대재단에서 우수한 인터넷 홈페이지에 주는 상인 ‘정보트러스트어워드’란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돈 한 푼 생기지 않는 일이지만 저는 이 홈페이지를 내가 세상에게 받은 빚을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지난 10년간 꾸준하게 해왔습니다. 작년 촛불시위에 즈음해선 커뮤니티 인원이 너무 많이 늘어나고 디지털 아카이브란 본래 취지에 맞추기 위해서 커뮤니티를 따로 분리해서 “깃발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커뮤니티 사이트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커뮤니티 내부에서 운영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지금은 그 분들이 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커뮤니티 내부에는 이 분들이 마음에 맞는 분들끼리 독서클럽, 사진가클럽 등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클럽 활동을 합니다. 1년에 두 차례씩 망명자대회라는 오프라인 총회 모임을 갖고, 또 문화특강이라고 해서 팔레스타인평화연대의 활동가 민이 씨, 우토로살리기 시민모임의 활동가 분 등을 모시고 특강 행사를 한 뒤에 성금을 모아서 전달하는 행사를 갖는 자발적인 네티즌 모임으로 키워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인천이라는 지방도시에서 발행되는 『황해문화』의 편집장으로 있는 지난 10년 동안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원고청탁을 거절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성공회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님이자 저희 『황해문화』 편집위원이신 백원담 선생님의 아버님은 여러분도 잘 아는 백기완 선생님입니다. 제가 백기완 선생께 처음 원고 청탁을 드렸을 때만해도 백기완 선생님이 『황해문화』가 황해도 도민들이 만드는 잡지가 아니냐고 하시면서 원고 청탁을 거절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황해문화』의 특집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것이 중앙지 문화면이나 사회면에 실리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저는 잡지의 진보적인 논조를 지키기 위해 발행인에게 사표를 내기 일보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거나 ‘저주받은 세대’, ‘인턴세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누구나 시대의 자식들이고, 누구나 힘든 시절을 거치기 마련이며 어느 세대든 그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소명이 있는 법입니다. 땅에 넘어진 자는 넘어진 그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말들을 두서없이 지껄였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딱 세 마디입니다. 먼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바랍니다. 둘째. 옳은 일을 하십시오. 셋째. 어떤 위기나 난관이 닥치더라도 인간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이며, 인간을 전진하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라는 겁니다. 우리 한국 불교는 대체로 당나라 임제 의현(臨濟 義玄) 큰 스님의 사상에 기초합니다. 임제 큰 스님의 제자 삼성 혜연(三聖 慧然)이 엮은 『임제록(臨濟錄)』 시중(示衆)편에 보면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 했습니다. “처해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에서 주인이 된다면 서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두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성공회대 미디어 특강을 책으로 엮은 거다. 표지 상단 좌측에서 두 번째가 나란다. 누구냐? 넌!(밑의 책은 제법 팔렸던 것으로 아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건 한 푼도 없으니 알아서들 하시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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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죽어서 원망도 할 수 없는 정부


▶ 사진 : 이치열

이명박 정부가 지난 16일로 출범 600일을 맞이했다. 대통령 임기 5년(60개월) 중 약 3분의 1이 지난 것이다. 이제부터는 집권 초반기가 아니라 중반기에 들어섰다.

재임 600일 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유난히 ‘불(火)’과 인연이 깊었다. 취임 직전에 국보 1호 남대문이 불탔고, 집권 100일 만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벌어진 촛불시위를 청와대 뒷산에서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2009년 1월20일, 용산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경찰, 용역직원 간의 충돌로 화재가 발생해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는 ‘용산 참사’가 벌어졌다.

이 대통령은 집권 중반을 준비하며 ‘중도 실용, 친 서민 정책’을 내세웠고, 그에 맞춰 청와대 비서진의 진용을 바꾸고 내각도 정운찬 총리 체제로 새롭게 정비했다. 그러자 주춤하던 지지율도 절반 수준을 회복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실업난과 물가고 등의 문제를 남겼지만 경제위기는 진정 국면에 들어섰고, 그동안 꽉 막혀서 도저히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남북문제도 조금씩 진전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엔 주요 20개국(G20) 회의를 유치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대통령의 집권 600일을 맞아 언론이 전하는 국민들의 바람은 한마디로 ‘대한민국 CEO’가 아니라 ‘나라의 어른’이자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다.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은 특정 정당의 정치인이거나 특정 지역, 종교, 계층의 대변자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수호자이자 대변자이길 바란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반등하기 시작한 것도 중도실용정책의 성공 때문이 아니라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의 수장으로서 성의껏 치러준 덕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집권 중반기를 맞은 이명박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보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중도실용, 친서민 정책의 진정한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용산 참사로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유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이들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는 한 차례 사전 협상도 없이 진압에 나서면서 안전대책조차 수립하지 않은 경찰의 무리한 진압 방식 탓에 예고된 참사였다. 참사 발생 이후엔 화재의 원인부터 시작해 경찰청이 조직적으로 여론조작에 참여했다는 논란, 청와대 여론조작 지침 논란 등 무수히 많은 의혹 속에 명확한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법원이 검찰에 제출하도록 한 수사기록 3000쪽을 검찰이 공개하고, 용산 참사를 중앙정부 차원에서 해결하도록 대처해야 한다.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이 없다면 원망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갈 것이기 때문이다.

<맹자(孟子)> ‘진심장(盡心章) 상(上)’편에는 “편안하게 해주는 방법으로써 백성을 부리면 백성들은 비록 고달프더라도 원망하지 아니하며, 살리는 방법으로써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죽이는 자를 원망하지 아니한다(以佚道使民 雖勞不怨 以生道殺民 雖死不怨殺者)”는 말이 있다.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기 위해 4대강 정비 사업을 한다면 비록 국가부채가 늘어나고 사는 것이 다소 고달파지더라도 국민들은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장기적 비전이나 계획이 아니라 대운하사업이 어렵게 되자 단기적 경기 부양을 위해 벌이는 토건사업이라면 국민들은 당연히 원망하게 된다. 미래의 시민인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어린이 성폭행범을 무겁게 처벌한다면 설령 형벌이 무거워지더라도 국민은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권의 이익을 위해 방송을 장악하고, 단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형벌을 무겁게 내리고 억압한다면 당연히 처벌하는 자를 원망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겠노라 발버둥치는 국민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놓고 원망조차 듣지 않겠다는 정부라면 어떤 국민이 원망하지 않겠는가.

* 원래 써서 보낼 때의 제목은 <죽어서도 원망할 수 없는 정부>라고 했는데, 제목이 살짝 달라졌다. 흠, 원제목에 나름 중의적인 메시지를 담았던 건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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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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