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공자께서 말씀하길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





정초에 올해는 『논어(論語)』 공부를 목표로 삼았다고 자신 있게 말했는데 5월말이 되어서야 「학이(學而)」편 마지막 장을 살펴보고 있다. 처음부터 허언(虛言)이 될 줄 알았다지만, 먼저 말부터 하지 않고서는 그나마 스스로에게 한 약속조차 지키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부터 앞세웠으나 그것을 변명삼지는 않겠다.




「학이(學而)」편 첫 번째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학이(學而)」편의 처음과 끝은 수미일관(首尾一貫)하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며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며 배우고 익히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고, 그 가운데 벗이 멀리서도 찾아와 준다면 그것이 곧 나의 즐거움이다.’



얼마 전 나는 성공회대에서 매년 개최하는 매스컴특강에 강사로 초빙되는 영광을 안았다. 성공회대의 매스컴특강은 해마다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나름의 일가를 이룬 여러 사람들이 초빙되어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고,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그것을 다시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그런 자리가 나에게까지 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광이고 한 편으론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나는 이런 특강이 요사이 젊은 대학생들이 목을 매고 있는 자기계발식 담론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해야 했다. 자신을 계발한다는 논리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며 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자기계발론은 사회모순이나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실업과 빈곤의 문제까지 자기책임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이다.



신영복 선생은 『강의-나의 동양고전독법』(돌베게, 2004)에서 “노예제 사회에서는 학습이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앞서 공자의 시대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시대는 전통적인 종법(宗法)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던 격변기였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교육자로서 공자의 위대함은 그가 신분질서에 구애받지 않고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교육의 혜택을 베풀었던 최초의 전문 교육자였다는 점이다. 고대노예제 사회의 지배계층은 혈연으로 지위와 권력이 승계되었으며 처음부터 지배계급으로 양육되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교사가 노예 신분이었던 까닭도 거기에 있으며 동양에서도 노예제 사회하의 지배계급 역시 학교에 가지 않았다. 대개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졌으며 엄격한 위계질서에 의해 통제되던 시대에는 학업에 의한 결과로 신분이 상승하는 일도 매우 드물었다. 이런 시대에 학습이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학습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는 전통적인 종법질서가 붕괴되던 시대였으므로 출신이나 신분의 고하가 아니라 실력이 가장 중요하고 우대받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춘추전국(春秋戰國),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는 백성들이 전쟁과 부역으로 도탄에 빠진 시대였지만 다른 한 편으론 그동안 백성들을 억누르고 있던 종법질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공자 자신도 식읍(食邑)을 봉토로 받는 대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공자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고대노예제 사회처럼 신분이 고착된 상황일까? 아니면 춘추전국 시대처럼 자유로운 신분 상승이 가능한 시대일까? 이런 시대의 학습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 시대를 좀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바라본다면 세계적으로는 춘추전국시대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고대노예제 사회처럼 신분이 고착되어가는 상황처럼 보인다.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秦)이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한 까닭은 여럿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봉건적 토지제도에 바탕을 두었던 정치경제구조를 급격히 군현제(郡縣制)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충격을 흡수할 만큼 체제가 유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네구멍가게를 하던 이들은 비록 영세하지만 어딜 가도 소상공인이었고, 사장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SSM(Super Supermarket)이 동네 구석구석까지 차지하고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몰락해 버리는 것처럼 전국 시대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귀족이자 지배계급에 속했던 사람들이 일거에 몰락해버리면서 그에 따른 불만과 불안요소가 팽배해졌다. 그러나 통일 이후 진(秦)이 시행했던 급격한 사회개혁에는 아무런 완충장치도 없었다.



세계화 이전과 이후 제조업의 이윤율이 저하되면서 자본은 자본의 집중으로 이윤을 창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양극화는 진의 군현제와 마찬가지로 과거 중산층에 속했던 사람들을 급격히 사회적 약자로 만들었고, 과거 노동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은 고용과 해고의 유연화를 명목으로 비정규직이 되었다. 좋은 직장은 점차 규모가 축소되었고, 이제 젊은이들은 땀 흘려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상황(working poor)에 내몰리고 있다. 사회적 신분상승(좋은 직장)의 길목은 좁아졌지만 이를 추구하는 이들은 줄지 않았으므로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려 하는 경쟁은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는 세력은 이를 대물림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구조적으로 교육 불균등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시스템이 취약한 데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취업이나 학업 자체를 포기하는 이들도 출현하고 있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고 했다. 공자의 말은 나의 실력만 출중하다면 언젠가 자신의 실력을 알아줄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만 지금의 사람들에게 이 말은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듯싶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에 대학 4년을 다니면 공부하는 기간만 16년이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 그 대부분을 우리는 공부로 지새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회에 나오면 필요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나는 공자의 저 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말의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실력만 있다면 언젠가 다른 이가 알아줄 날이 온다는 의미 말고 좀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



현대의 교육은 대부분 직업교육이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떤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 것인가?를 배울 기회는 사라졌고, 지금의 교육은 의식주를 마련하는 것이 공부의 가장 큰 목적인 것처럼 배운다. 물론 우리의 육체는 물질이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물질을 섭취해야만 한다. 그러나 16년간 열심히 공부했는데 당장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갈 데가 없고, 취업을 했다손 치더라도 기껏 인턴이고,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어도 사오정, 오륙도가 되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참 하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본인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처음부터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은 도처에 있고, 우리 사회는 그것을 강제하는 시스템이다. 며칠 전 뉴스를 보니 주식 가격이 떨어졌을 때 대한민국 1%에 속한 사람들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자녀들에게 주식을 물려줘서 7살짜리 아이가 230억원어치 주식을 증여받았다고 한다. 잘못된 자기계발론, 다시 말해 지금까지 내가 아닌 남을 겨냥해 해왔던 공부는 결국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착시 현상에 빠뜨릴 뿐이다. 자기 혼자만의 입신출세를 위한 사다리 경쟁은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내 안의 이기적인 자아가 나의 참된 자아를 착취하는 악순환에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



공자가 「학이편」에서 가르치려 하는 것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며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며 배우고 익히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고, 그 가운데 벗이 멀리서도 찾아와 준다면 그것이 곧 나의 즐거움’이란 것이다. 공부와 놀이에는 공통요소가 있다. 멀리 우회할수록 성취했을 때의 만족도가 커지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판소리 “흥보가”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 중 하나는 놀부가 화초장을 얻는 대목이다. 놀부는 화초장 하나를 얻고 너무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화초장 이름을 기억하려고 계속 외운다.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얻었구나. 얻었구나. 화초장 한 벌을 얻었다. 화초장 한 벌을 얻었으니 어찌 아니가 좋을소냐.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또랑 하나를 건너뛰다, 아뿔까, 잊었다. 이것 무엇이라고 허등만요? 응, 이거 뭐여? 뒤붙이면서도 몰라, 초장화? 아니다. 장화초? 아니다. 화장초?”



그런데 놀부는 개울 하나를 건너다 그만 화초장의 이름을 까먹어 버린다. 놀부는 가진 거라곤 물욕 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화초장의 이름을 까먹는 순간부터 화초장은 더 이상 금은보화 같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이 된다. 놀부가 화초장의 이름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화초장은 욕구와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아니다. 어따, 이것이 무엇인고? 간장, 고초장, 꾸둘장, 방장, 송장? 아니다. 어따, 이것이 무엇이냐? 천장, 방장, 꾸둘장? 아니다.”하면서 놀부는 화초장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제법 먼 길을 돌아간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 후, 아내에게 “얼른 썩 알아맞춰, 죽이기 전에”라고 말하면서 묻습니다. 놀부 마누라가 “이전에 우리 친정 아버지가 그런 걸 보고 화초장이라고 허던구마”라고 말하자 “놀보가 어찌 반갑던지, 아이고, 내 딸이야!”라고 말한다. 욕심쟁이 놀부지만 그 순간만큼은 공부의 즐거움에 흠씬 빠질 수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공부를 무엇보다 큰 즐거움으로 여겼지만, 이때의 공부는 입신출세를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앎을 사랑하는 일이었으며 이때의 앎이란 지인(知人), 사람을 아는 것이며, 사람을 알고자 하는 까닭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것(愛人)이고, 애인(愛人)이 바로 공자의 인(仁), 군자가 추구하는 이상이었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 「안연(顔淵)」 22장



우리는 남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공부하지만, 그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배워서 다른 이에게 나눠주는 즐거움(樂), 다른 이를 사랑(愛)하는 인(仁)을 통해 삶(生)을 즐기는(好)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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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공이 묻기를 “가난하여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여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길 “좋으나 가난하여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자공이 말하길 “시에 이르길 ‘깎고 다듬은 듯 쪼고 간 듯이 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군요.” 공자께서 말씀하길 “사야,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가는 것을 말하니 오는 것을 아는구나.”





「학이」 10장에서 공자의 제자들 중 자공과 자로(子路, BC 543~BC 480)가 없었다면 『논어』가 지금처럼 생생한 재미를 선사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자공(子貢)은 공자의 물질적인 스폰서로서 공자의 보디가드 역할을 했던 자로(子路)와 함께 『논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인물 중 하나이다. 성인이기 전에 먼저 교사(敎師)였던 공자를 잘 드러내는 말은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가 말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이다.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의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다.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천하를 통일하여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다.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



맹자는 세 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하면서 왕이 되는 것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을 앞뒤로 두 차례나 강조하고 있다. 사실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은 단순히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나마 주 왕실에 대한 겉 치례 예의라도 갖추려 했던 춘추(春秋)시대에 비해 날 것 그대로의 패권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전국(戰國)시대의 인물이었던 맹자는 패도(覇道)를 추구하는 군왕에게 먼저 사람이 되라고 질책하기 위해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첫 번째는 하늘이 내려 준 즐거움으로 부모의 생존은 자식이 원한다고 하여 영원한 것이 아니므로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써 즐겁다는 말이다. 두 번째 즐거움은 하늘과 땅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강조한 것으로, 스스로의 인격 수양을 통해서만 가능한 즐거움이다. 세 번째 즐거움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즐거움으로, 즐거움을 혼자만 영위할 것이 아니라 남과 공유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 즐거움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마지막 세 번째 즐거움은 타인과 나눈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즐거움이자 의지가 필요한 일이란 점에서 대승(大乘)적인 즐거움이다.



자공은 중국 최초의 재벌이었다는 평을 받을 만큼 이재에 능했고, 공자의 유세가 가능했던 까닭도 자공의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후세의 평가가 있을 만큼 공자가 학파를 형성하고 오늘날의 명성을 얻는데 크게 기여한 제자였다. 또한 자공은 말하기를 즐겨하고, 스승인 공자에게 따져 묻기를 즐기되 늘 공손함을 잃지 않았다. 자공이 스승 공자에게  “가난하여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여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던 속내는 자신이 이처럼 기여한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드러내 자랑하지 않으며 스승을 모시는 것에 있어서도 늘 겸손하였던 바를 칭찬받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공의 “貧而無諂 富而無驕(가난하여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여도 교만하지 않다)”라는 말은 빈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높이 생각해줄 일이긴 하나 결국 빈부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자는 향원(鄕愿)을 싫어했다. 선을 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라 보았던 공자는 자공에게 그것도 괜찮은 일이긴 하지만 아예 빈부에 얽매임 없이 사는 즐거움이라는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貧而樂 富而好禮(가난하여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한다)”라고 답한다.



공자는 『논어(論語)』 「옹야(雍也)」편(18장)에서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의 경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는데 이 때의 호(好)와 앞의 낙(樂)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떼어낼 수 없는 사랑(合一)의 경지를 의미한다. 공자는 자공에게 그 정도 경지에 도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묻고 있다. 그러자 자공은 곧바로 스승의 말을 알아듣고 “시에 이르길 ‘깎고 다듬은 듯 쪼고 간 듯이 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군요.”라며 시의 비유를 들어 답한다.



자공이 인용한 구절은 『시경』 위풍(衛風) 기욱(淇奧)의 첫 장에 나오는 것으로 주나라가 동천(東遷)할 때 공을 세운 위나라 무공(武公)을 찬미한 시다.



瞻彼淇奧 綠竹猗猗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咺兮 有匪君子 終不可諼兮



기수의 물굽이 바라보니 푸르른 대나무 우거졌도다

우리 님은 구슬을 깍아 다듬은 듯 쪼고 간 듯이 위엄있고 너그럽도다

빛나고 의젓하며 아름다운 우리 님을 끝내 잊지 못하겠네




“如切如磋 如琢如磨(자르고 다듬어 쪼고 간다)”라는 구절에서 여(如)자를 뺀 것이 “절차탁마(切磋琢磨)”다. 『대학』에도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자르듯하고 쓸 듯함은 학문을 말하는 것이요, 쪼듯하고 갈 듯함은 스스로 닦는 일이다)”라고 하여 절차(切磋)는 학문을 뜻하고, 탁마(琢磨)는 수양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공자는 자신의 뜻을 헤아리고 더 나아가 시(詩)를 인용하여 답을 하는 자공이 대견했을 것이다. 하여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사야,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가는 것을 말하니 오는 것을 아는구나).”라고 칭찬한다. 그것이 공자의 즐거움(君子三樂)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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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며 거처하는데 편안함을 찾지 아니하고, 일을 행하는 데는 민첩하지만 말을 삼가며 도를 지닌 이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면 가히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된 순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논어』의 가장 첫 머리에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어』를 통해 드러난 공자의 말과 행동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공자가 배움, 공부하는 것을 진실로 사랑했던 사람이란 것이다. 언젠가 농담처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지만 좋아하는 것은 다른 대체재를 찾을 수도 있지만, 사랑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란 차이점이 있다. 비록 표현은 ‘好學’이지만 의미는 배움에 대한 사랑이다.

세계 3대 성인(聖人)이니 4대 성인이니 해서 석가모니, 예수 그리스도, 공자를 꼽고, 거기에 더해 소크라테스를 넣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석가모니와 예수 그리스도와 공자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앞선 두 성인이 초월자인데 비해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고행 끝에 도를 깨닫고 초월자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자 대리자로서 지상에 왔다. 이들의 행위는 초월자로서 현세를 넘어선 피안의 세계를 상정하고 있지만 공자에게는 죽음 이후의 세계로부터 오는 후광(後光)이 없다. 또한 공자는 스스로를 성인으로 내세운 적이 없다.

공자는 앎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生而知之)는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자(學而知之)는 그 다음이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배우지 아니하는 자는 최하”<계씨편, 9장>라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生而知之)가 곧 성인인데, 공자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도를 안 사람이 아니다(我非生而知之者)”<술이편, 19장>라고 했다. 즉, 스스로 성인이 아니라고 말한 셈이다. 공자에게 있어 배움이란 그 자체가 ‘도(道)’이자 ‘도(道)’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군자(君子)란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배움의 길 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갈고 다듬어가는 존재, 다시 말해 학생(學生)이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그곳이 어디든 낙원이 된다. 배우는 사람이자 삶으로서의 학생(學生)이 배움을 사랑한다면,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그곳이 어디이든 공부하는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또한 스스로 배우는 과정이기에 말로서 얕은 지식을 드러내 보일 필요도 없을 것이며 어딘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 묻고 가르침을 얻는 것을 꺼리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바른 가르침을 얻고 행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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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공자가 말씀하길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엔 그 뜻을 살피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행적을 살핀다. 삼년동안 아버지가 하던 바를 바꾸지 말아야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삼년상(三年喪)을 치르진 않아도 누구라도 삼년간의 시묘(侍墓)살이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다. 장례를 치르는 제도(喪葬制)는 그 자체가 하나의 관습이자 문화이기 때문에 한번 뿌리를 내리면 나름의 의미와 존재 이유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속되는 제도이자 풍속이다. 사실 고려시대에는 삼년상을 치르지 않았다. 백일상(百日喪)을 치르거나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해서 치루는 역월단상제(易月短喪制)를 시행하였다고 하는데, 이 역시도 일반적인 풍습이 아니라 지배계급에 속하는 이들이 치르는 방식이었다. 대개는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거나 빈소를 사찰에 모시는 방식(追遷祭)이었다.

고려말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도입되기 이전까지는 전통적인 무속에 의한 방식과 불교식 장례인 무불식(巫佛式) 장례풍속이었으나 고려말부터 본격적으로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유교식 상장제(喪葬祭)가 무불식 장례방식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주자가례에 의한 사례(冠婚喪祭)는 이후 수백 년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의 전통 문화의 일부가 되었고,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양반이나 상민의 구별 없이 누구나 행하는 제도가 되었다. 어떤 이는 이것이 너무나 까다롭고 시행하기 어려워 번문욕례(繁文縟禮)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유교식 전통상례인 삼년상을 대신해 과거 고려시대로 회귀하여 무불식 장례풍속인 49제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통의 뿌리란 이런 점에서 참으로 깊고도 오묘한 것이다. 삼년상의 번거로움이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으므로 뭔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할 터인데 이럴 때 또 다른 과거의 전통에서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조선시대에도 신진사대부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중종 이전까지는 국상이 나더라도 칠칠제(7일×7=49일)를 행하였는데, 혼령이 이승을 방황하다가 49일째 되는 날 승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년상이 주자가례에서 새삼 강조된 것이긴 하지만 삼년상 장례제도는 공자 이전에도 일반적인 법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몇몇 문헌에 따르면 삼년상을 지내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 각기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요순(堯舜)시대를 기원으로 하는 설이 있고,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앞서 「학이」편 9장에서 이미 이야기했지만 공자와 유가에서 바라본 제사란 성실을 다해야 하는 일이긴 했지만 그 자체가 귀신이나 혼령을 받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삼년상을 천하의 법도라고 인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또 공자는 어째서
“3년간 아버지가 하던 바를 바꾸지 말아야 효라고 할 수 있다(三年無改於父之道)”고 한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공자는
“자식이 태어난 지 3년이 된 뒤에라야 비로소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이다. 대체로 3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다.”<『禮記』>라고 말하고 있으며, 『논어』 「양화」편 21장에서 제자 재아와의 문답을 통해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삼년상을 모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식이 태어나 혼자 먹고 활동할 수 없는 젖먹이 기간과 그 후 부모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 자라야 하는 2년, 부모가 품안에서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답, 보은지의(報恩之義)를 다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식이 태어나 부모의 품을 떠나는 기간을 3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원리가 있고, 그것을 지탱해주는 윤리가 있는 법이다. 공자가 살아가던 시대는 농경사회였고, 지금처럼 세대와 세대가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다른 문화 속에 살았던 시대가 아니었다.

대를 이어 전통적인 농법에 종사하였고, 종법(宗法)질서에 따른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 속에 살았다.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하더라도 부모의 묘소를 멀리 모실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또한 농사에는 때가 있는 법이므로 모든 일을 작파할 수도 없었다. 조선시대에도 군역을 져야하는 평민의 경우엔 삼년상을 치를 수 없도록 했다. 군역의 의무가 우선했던 까닭도 있지만 삼년상을 핑계로 군역을 회피하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주(周)나라가 세운 전통적인 사회체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사회혼란이 초래되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를 의례란 이름을 빌려 복원시키는 것이 혼란을 바로 잡는 방법이라 여겼다. 공자는 효제(孝悌)를 개인의 단순한 품성이 아니라 사회가 유지되는 정치경제적 토대의 으뜸가는 기초 질서로 보았다. 효제는 개인적인 실천이지만 이를 확장하면 충의(忠義)로 사회적 실천이 된다.
비록 공자가 주의 법도로 회귀하길 희망했지만 이것은 이미 변해버린 사회를 단순히 과거로 복귀시키자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는 이미 사회가 과거로 완전히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학이」 11장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其志其行”의 해석에 대해서는 몇 가지 남다른 해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뜻과 행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3년간 아버지의 뜻과 행적을 살피라는 의미는 개인적인 효의 차원에서는 부모를 잃은 죄인으로 근신하여 스스로 행실을 삼가란 뜻이다. 이 기간은 삼년상을 치르는 기간과도 겹친다. 앞서도 말했듯이 효는 개인적인 실천이자 동시에 사회적 실천, 다시 말해 정치적 실천이다. 고대농경제 사회에서의 변화란 매우 작은 일조차 급격한 변화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변화가 현재와 비교하더라도 그만큼 더딘 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농경제 사회라 할지라도 변화는 일어났을 테고, 봉건왕조에서도 이에 따른 개혁은 필요했을 것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여 삼년상은 부모의 경우에만 치르지 않았다. 임금이 죽으면 신하가, 스승이 죽으면 제자된 입장에서 치르는 것이기도 했던 것처럼 전통적 봉건제 아래에서 가부장은 작게는 집안(가문)의 최고 통치자이지만 크게는 한 국가의 통치자일 수도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왕(王)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기업체의 최고경영자이고, 국가의 최고통치자일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인데, 지금까지의 대통령들은 임기 초반인 1년 이내 뭔가 성과를 보이기 위해 매우 조급한 정책을 추진해왔다.

봉건제 국가에서 권력서열 2인자인 태자들은 어려서부터 군주로서의 처신과 온갖 교양들을 두루 섭렵하도록 교육된다. 이른바 제왕학이란 것이다. 그 과정이 선대 군왕의 급작스런 죽음과 같은 급격한 정치변동에 따라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제위에 올랐을 때 왕조에는 위기가 찾아오고, 국가와 백성들은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급격한 정치변동이 아닌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제위에 오르더라도 왕재(王才)가 부족한 인물이거나 외부로터 전란과 같은 급격한 위기가 닥칠 때, 선대 임금의 제신(諸臣, 오늘날로 말하자면 행정관료나 기관의 수장)들을 절차나 명분에 따르지 않고 핍박하는 등 자충수를 두어 위기를 자초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사회이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파워엘리트들을 잘 교육하고 준비시켜야만 한다.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재생산되기 위해 파워엘리트를 성장시키는 과정은 사회의 준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파워엘리트가 되기 위해 처음부터 그에 합당한 자질과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을 소명의식이라 불러도 좋고, 노블리스 오블리쥬라 말해도 좋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민주국가에서는 이 과정을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하는 민주교육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정치계급(파워엘리트)은 정권의 유지나 확보를 위해 그때그때 새로운 스타를 급조해왔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파워엘리트들은 그 자리에 임하기 전까진 파워엘리트로서의 과정을 준비하지 않다가 갑자기 사회의 공공영역에 출현하는 경향이 있다. 출마에 임박해서야 저자도 명확하지 않은 책 한 권을 출판하거나 짧은 기간 동안 선출직이나 임명직 관료, 의원으로 잠시 활동한 공적을 바탕으로 출마해서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된다.

현 대통령은 기업체 간부로 성장해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는데 우선했고, 국회의원들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변호사, 기업체 간부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정권 교체 과정이 축적되는 과정이 몇 차례 있었으므로 과거에 비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같은 기구도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국정을 어떻게 끌어갈 것인지, 정책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행정기구를 정식으로 장악하기 이전엔 아무래도 봉건왕정 아래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을 능가할 수가 없다. 물론 과거의 왕정 아래에서 임금에게는 통치기간에 제약이 없었으므로 3년간
“其志其行”할 시간도 길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가 5년이라면 최소한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급격한 변화 대신 전임 대통령과 비록 정파는 다르다 하더라도 지속시킬 정책과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해볼 기간으로 삼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실 정파나 정당이 다른 통치자뿐만 아니라 우리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통치자라 할지라도 뭔가 전임 통치자와는 다른 면모를 일신하여 보여주려 하는 편이었다. 뭔가 보여주기 위한 정책을 전시행정(展示行政)이라 하고, 시쳇말로는 쇼(show)라 한다. 공자는 “삼년동안 아버지가 하던 바를 바꾸지 말아야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무조건 바꾸지 말란 말도, 아비의 잘못된 길을 그대로 따르란 말도 아니다. 다만 그 뜻을 충분히 살피고, 결과를 미루어 짐작해본 연후에 이를 고쳐도 늦지 않다는 말이다. 

* 이명박 대통령은 정권이나 정파와 관계없이 지속되어야 할 민족화해 통일정책을 10년 전으로 되돌려놓았고, 임기가 남은 기관의 수장들을 강제로 몰아냈을 뿐 아니라 특히 문화예술분야에서는 대개 직접 정치 혹은 정권과 무관하게 자기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온 사회의 원로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욕보이기 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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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 溫良恭儉讓鎰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자금이 자공에게 묻기를 “부자(공자)께서는 어느 나라에 가시든지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에 대해 듣게 되는데 이는 스스로 구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준 것입니까?” 자공이 답하기를 “선생님께서는 온화하고, 어질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겸양함으로써 얻으셨으니, 선생님께서 구한 것은 다른 사람이 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자공(子貢, BC 520 ?~BC 456 ?)은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 출신의 유학자로 공자가 위나라 망명시절에 문하로 들인 제자라고 추정된다. 그는 공문십철(孔門十哲) - 「학이」편 4장 소개 - 중 한 사람으로 재아(宰我)와 함께 언어에 뛰어난 재질을 지녔다고 한다. 성은 단목(端木)이오, 이름 사(賜)였다. 공자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안회나 훗날 공자를 계승했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공자 문하에는 늦게 들어온 증자에 비해 자공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편이다.
그러나 『논어』에 등장하는 제자들 중 자공과 자로(子路, BC 543~BC 480)가 없었다면 『논어』가 지금처럼 생생한 재미를 선사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안회는 너무나 이상적인 제자였기 때문에 스승인 공자조차도
“안회는 내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선진」편, 3장>며 재미없어 했다. 자로는 공자보다 9살 아래로 제자 그룹 중에서도 최고 연장자이며 장자가 아쉬워했을 만큼 두각을 나타낸 협객(俠客)이었지만 자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인물이었다. 그는 본래 무뢰한(無賴漢)이었으나 공자의 문하로 들어선 뒤부터는 순진한 양처럼 공자의 훈육을 따랐다. 비록 등장하는 횟수는 자로가 자공에 비해 앞서지만(자공이 35회) 두 사람 중 누군가를 주연급 조연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면 단연 자공이다.

가르칠 때는 좀 힘들지 몰라도 가르치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제자는 스승을 공경하면서도 뭔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제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 역시 늘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공에 대해 때로는 적당하게 야단치고, 때로는 자공의 자부심을 부추겨주기도 하면서 제자로서 자공을 사랑했다. 자공은 늘 공자와 대립각을 형성하지만 평생을 두고 공자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거두지 않았으며 공자의 생전에는 언제나 묻고, 또 물어가며 배움의 갈급함을 채워가는 제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에 자공이 빠진다면 시쳇말로
“공자왈 맹자왈”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엄청 재미없는 책이 될 뻔했다.

「학이」 10장에서 자공에 질문하고 있는 자금(子禽)은 『사기열전』에 공자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공의 제자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열전』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자공의 제자일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그도 공자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공자 문하에 남아있던 유학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금은 성은 진(陳)이고 이름은 항(亢)으로 자공에게 묻고 있는 질문의 내용을 보면 성품이 자공 못지않게 외향적이며 도발적이었으리라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다만 자공이 공자와 나눈 문답의 내용에 비해 자금의 질문은 질이 좋지 않다.

자공의 제자란 추측이 나오는 까닭도 공자의 직접 제자라면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공자가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그 나라 정사에 대해 지분거렸는데 이건 관직이라도 하나 구해보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투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공이 공자 생전에는 외향적인 성품과 이재(理財)에 밝은 탓에 가끔 공자의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공자 사후 3년간 무덤을 지켰고, 다른 제자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3년을 더 남아 여묘했던 인물이라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자금과 자공은 격이 다르다. 자공은 생전에 공자는 허명(虛名)뿐이며 실제로는 제자인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자공은 스승 공자를 받드는 일을 한 번도 등한히 해본 적이 없었다.

“자공은 중니(仲尼, 공자)보다 낫다”고 숙손무숙(淑孫武淑)이 이야기하자 자공은 “궁실의 담장에 비유하면 나의 담장은 어깨에 미치므로 집안의 좋은 것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장은 여러 길이므로 그 문을 열어서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부함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자가 적으니 그 사람의 말이 또한 당연하지 아니한가?”<「자장」, 23장>

「자장」편에는 숙손무숙이 두 차례, 「학이」 10장에 등장하는 자금(子禽)까지 등장해서
 '솔직히 말해보라며 자공 그대가 실은 공자보다 낫지 않느냐' 고 도합 세 번을 묻는 장면이 있다. 마치 예수가 체포된 직후 베드로가 첫 닭이 울기 전까지 세 차례 예수를 부인할 것이란 『성서』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인데, 자공은 단 한 번도 공자를 부정하거나 자기보다 낮춰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공은 도리어 성을 내며 “공자는 해와 달과 같아서 헐뜯을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다”, “선생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 계단을 놓아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자공은 공자의 문하에 들어설 당시에도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젊을 적을 말고는 별도의 직업(관직)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요즘 같으면 스승이 제자를 기르는 일도 직업이 될 수 있었으나 춘추시대엔 가르치는 것만을 전담하는 직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교육이란 지배계급에 속하는 귀족들만의 몫이었고, 귀족들은 실제 통치자였기 때문에 자기 자식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가르칠 여력도, 이유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공자는 최초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자공의 재력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공자는
“사(賜)는 타고나지 않았는데도 재화를 늘렸다. 예측하면 잘 맞았기 때문이다.”<「선진」편, 18장>라고 자공의 재산증식 능력을 평했다. 자공은 뛰어난 상인으로 공자의 유세를 후원했다. 공자가 열국(列國)을 떠돌았다고는 하지만 위나라를 중심으로 놓고 그 주변을 순회했다는 점만 놓고 보더라도 자공의 경제적 도움이 얼마나 중요했을지 추측해볼 수 있다.

“자공은 사두마차에 올라 기마행렬까지 어마어마하게 이끌게 했다. 비단 꾸러미를 예물로 가지고 다녔으므로 여러 제후들로부터 초빙되었으며 또한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가 방문하는 나라의 왕자들은 몸소 뜰로 내려와 대등한 예의를 그에게 베풀어야 했다.”

위에 나오는 내용은 『사기』의 기록이다. 자공은 공자가 열국(列國)을 유세할 때 공자의 물질적 후원자가 되었으며 제후들에게 선물과 같은 선심공세를 펼쳐 스승의 유세를 도왔다. 그렇다고 자공이 단순히 이재에만 밝은 인물은 아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노나라가 제나라로부터 침공의 위기를 겪을 때 자공의 다섯 나라를 돌며 유세한 결과에 대해 기록하고, 자공이 쌓은 부에 대해서는 별도로 「화식열전」에서 다룰 지경이었다.

“자공이 한번 유세를 떠나니, 노나라는 사직을 보존하고(魯國存), 제나라는 엉망되고(齊國亂), 오나라는 멸망하고(吳國亡), 진나라는 강성해지고(晉國强), 월나라는 패자되었다(越國覇).”


공자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은 자공이었다. 만약 공자가 자공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수 있었을까? 공자의 사후 공자 교단이 존속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묻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질문은 반대로 공자의 존재가 없었다면 과연 자공이 기억될 수 있었을까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가 엄격한 사회였다. 비록 송(宋)대에 이르러 중국의 상인 계급이 급성장하기는 했지만 중국의 지배계급은 상인계급의 성장을 적절하게(?)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도리어 그것이 결과적으로 서구와 달리 근대화, 자본주의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방해한 것이긴 하지만 봉건질서의 입장에서는 매우 성공적인 통제였다. 

춘추시대가 봉록과 정전제라는 경제 질서의 파괴로 인해 출현한 것이지만 여전히 상인의 지위는 귀족들의 지위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춘추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좌전』에는 이 시대 상인들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는데 귀족과 상인 사이의 맹세의 내용이다.
‘너는 나를 배반하지 말고, 나는 너의 물건을 강제로 사지(강탈하지) 않겠고, 구걸하거나 강탈하지 않겠고, 네가 장사에서 이문을 남겼거나 값진 보화를 소유하더라도 참견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얼핏 보기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이것을 맹세로 남길 정도라면 실제 상인들의 처지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앞서 공자는 자신만의 학설을 가르치지 않고, 많은 것(六藝)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공자는 단순히 여러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것뿐만 아니라 누구나 차별 없이 가르친(有敎無類)<「위령공」, 38장> 스승이기도 했다. 공자는 스승에 대한 속수(束脩, 육포 열 개를 묶은 것)의 예(禮)만 나타낸다면 위로는 사마우(司馬牛) 같은 대부 출신부터 아래로는 세간의 낮은 평가를 받는 사람까지 가르쳤다. 자공 역시 상인 출신으로 공자가 아니었다면 학문하는 자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며, 훗날 제후들과 교류하며 유세가로서 『사기』에 기록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공이 공자의 덕을 높이 흠모한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자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뒷부분에서 다시 다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쯤에서 간단하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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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증자가 말하길 “부모의 장례를 정성껏 모시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면,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


신종추원(愼終追遠)의 신종이란 부모의 장례에 예를 극진히 하는 것을 말하고, 추원이란 부모의 조상에 이르기까지 오래 되어도 잊지 않고 추모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가까운 사람을 잃고 추모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것이 인정(人情)에 해당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認定)하는 것과 달리 이것이 조상이 아닌 조상신을 받드는 행위로 이해되는 것은 공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억울할 것이다.

공자를 가리켜 세계 최초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가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제사지내는 일조차 인간의 일이지 조상신(귀신)을 받드는 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상상하게 되면서 인류는 비로소 오늘이 아닌 내일을 사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다시 청동기로 넘어가는 도구의 혁명보다 더 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인간의 의식이 처음 열리고 자연에 의해 지배당하던 시절의 인류는 자연(우주만물)의 모든 질서를 관장하는 것이 신(神)이라고 여겼다. 신의 존재는 세상 만물에 조화(調和)를 제공하고, 정당성을 부여했다. 다시 말해 임금은 임금이오, 신하는 신하이고, 백성은 백성으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질서는 하늘이 내린 것이란 말이다. 따라서 임금은 하늘의 뜻을 받드는 자로서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제례를 봉행함으로써 인민을 단속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영성(靈性)이란 말은 종교 간의 차이를 떠나 인간이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대상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판타지와 신화의 세계에서나 엿볼 수 있는 것이 되었지만 고대에 사람과 신령은 서로 교통할 수 있는 존재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이미 소피스트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공자가 제사조차 인간의 도리일 뿐이라고 설파하기 전에 이미 중국에는 인본주의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이미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귀신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았다. BC 722∼BC 481년의 역사를 다룬 『좌전(左傳)』에는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귀신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國將興, 聽於民. 將亡, 聽於神)”고 했다.

공자 역시 몇 차례에 걸쳐 귀신에 대해 말하는데 그의 기본적인 자세는 공경하되 멀리하는(敬而遠之), 실증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면 믿지 않는다(無徵不信), 괴이한 일과 완력에 대한 것,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그리고 귀신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存而不論)는 것이었다.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之義.
번지가 안다는 것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가 말씀하길 “인간의 도리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하면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옹야(雍也)」편, 20장>

子曰 夏禮, 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 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공자가 말씀하길 “하나라의 예에 대해서는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으니 (그 후예인)기나라의 것은 실증하기에 부족하며 은나라의 예는 내가 능히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후예인)송나라는 그것을 실증하기에 부족하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들이 충분하다면 내가 능히 실증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팔일(八佾)」편, 9장>

子不語怪力亂神
공자는 괴이한 일과 완력에 대한 것,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그리고 귀신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논어』, 「술이(述而)」편, 20장>

이런 공자였으므로 유교적 의미에서의 제례가 조상을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도록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에 가깝다.
그런데 먼 조상까지 추모하여 제사를 지냄으로써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공자 시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는 일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와 같은 해석은 또 그 만큼 소박한 것이기도 하다. 공자 자신이 효제(孝悌)를 중요한 실천 덕목으로 하도록 가르쳤으므로 조상의 사후에도 공경함을 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긴 하다. 일단 소박하게나마 살펴보자. 공자가 살았던 춘추(春秋)시대의 주(周) 왕실은 이미 이름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주 왕실로부터 분봉(分封)된 제후국들 대부분 - 제(齊)와 송(宋)을 제외하고 - 은 주 왕실과 같은 성씨인 희(嬉)성이었다. 그들은 제후로서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주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을 으뜸으로 치던 전국(全國)시대에 비해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씨족공동체의 유습이 강하게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종법(宗法) 질서는  주 왕실과 공통의 조상을 모시고 있는 각 제후국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중요한 체제였다. 그러므로 조상에 대한 제례의식은 혈연공동체를 강화하고 주 왕실과 각 제후국들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정치행사였을 것이다. 공자 역시 제례를 중시했으나 다른 제자백가들에 비해 심한 것은 아니었고, 그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앞서 말한 것이었다. 공자 역시 제사를 받들 때에는 눈앞에 조상이 있는 듯 하고, 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에도 역시 그러한 것처럼 행하라 일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하란 의미였지 그 존재 자체를 믿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공자와 묵자(墨子)는 모두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도덕이 땅에 떨어진 무도(無道)하고,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상황으로 보았다. 두 사상가가 현실에 대해 내린 진단은 사실상 거의 동일했지만 이에 대한 해법은 상당히 달랐다. 그 중에서도 귀신의 존재에 대해 공자는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은 태도를 취했으나 묵자는 「명귀(明鬼)」(귀신의 존재를 밝히다)편에서 세상이 이처럼 혼란스러워진 까닭은 세상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에 대해 의혹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귀신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의 대행자이기에 존재하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므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주장이다.

비록 『논어』와 마찬가지로 『묵자』 역시 진위(眞僞) 여부
(「겸애」와 「비공」편을 제외하고는 후세의 첨작으로 생각된다)는 물론 이후 30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책으로 추측되고, 이것이 묵자가 반드시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보다는 귀신의 존재를 통해 겸애의 마음을 가다듬는 방편으로 삼으려 한 것이라 이해한다 할지라도 공자의 태도에 비해서는 확실히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이전까지 귀신의 일에 해당하는 제례와 같이 조상을 받드는 일조차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보은지의(報恩之義)로 보았으므로 그 자신이 실제로 원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임금의 권위조차 신에게 부여받은 정통성(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일이 되었다. 겸애와 평화를 주장한 묵자가 후세에 와서는 도리어 현실순응적인 태도로 변화(혹은 상명하복의 전체주의적 강자의 논리화)하는 것을 보면 공자의 합리적인 인본주의적 태도는 도리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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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가 말씀하길 “군자의 몸가짐이 장중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어지고, 그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논어』의 「학이」편 8장은 「학이」편 6장
“제자들은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도록 하라. 행실을 삼가하고 믿음이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 이를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8장의 군자(君子)는 6장의 제자(弟子), 다시 말해 ‘학문하는 자’를 의미하고, “군자의 몸가짐이 장중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어지고, 그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不重則不威 學則不固).”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도록 하라(入則孝 出則弟).”에 해당한다.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主忠信 無友不如己者).”는 “행실을 삼가하고 믿음이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過則勿憚改).”“이를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行有餘力 則以學文).”와 서로 연결된다.

가정의 도리가 효제(孝悌), ‘정이 주가 되고 논리가 그 뒤를 따르는 것(情主理從)’이라면 사회의 도리는 충신(忠信), ‘논리가 주가 되고 정이 그 뒤를 따르는 것(理主情從)’이라 할 수 있다.

子曰 主忠信 毋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가 말씀하길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자한(子罕)」 24장>

「자한」 24장에서는 없을 무(無)를 말 무(毋)로 바꿔놓았을 뿐 같은 말이 반복된다. 이처럼 앞의 가르침이 뒤에서도 반복되는 경우는 『논어』에서 상당히 많은 편인데 특히 배움의 자세에 대한 공자(孔子)의 각별한 배려와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논어』는 기본적으로 스승인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를 통한 훈육의 과정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사실 「학이」 8장의 가르침에서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無友不如己者)”이다.

공자는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좋은 면을 골라 그것을 따르고,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나의 허물을 고친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술이(述而)」, 21장>고 했다. 공자는 자기만 못한 자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으니 스승으로 삼도록 가르쳤으나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가까이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공자는 어째서 그렇게 가르쳤던 것일까? 공자가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고 가르친 까닭은 공자가 생각하는 ‘벗’의 의미가 단순히 동학(同學)의 의미가 아니라 동지(同志)의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안연(顔淵)」편 24장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以文會友 以友輔仁).”고 했다. 글이란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고, 뜻이 맞는 이들과 벗을 맺고, 함께 인을 돕는다는 것은 실천행위를 의미한다.

공자는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편(실천의 방식)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강조했다. 그러나 ‘효제충신’이란 것이 개인적인 실천의 방식이라 조금 부족했다고 여긴 탓인지 공자를 계승한 맹자(孟子)는 사회적인 실천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관자(管子)』에게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따온다. 맹자에게 있어 정치란 인(仁)을 실제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므로 유학자들은 당연히 정치인이자 관리였다. 도덕주의적인 담론만으로 통치에 임할 수는 없었기에 맹자는 관자의 구체적인 실천방식도 유학에 도입했다. 예의염치란 본래 관중의 말을 기록한(엄밀하게 말해 『관자』가 관중이 저술한 책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관자』 「목민(牧民)」편에 나오는 국가지도(國家之道)의 사유(四維)에 해당하는 말이다.

사유란 국가를 지탱하는 네 가지 도리란 말인데, 관자는 이 중에서 한 벼리가 끊어지면 국가가 기울고, 두 벼리가 끊어지면 국가가 위태해지며, 세 벼리가 끊어지면 국가가 전복(顚覆)되고, 네 벼리마저 끊어지면 국가는 멸절(滅絶)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첫째가 예(禮)이고, 둘째가 의(義)이며, 셋째가 염(廉)이고, 넷째가 치(恥)인데 이것이 예의염치(禮義廉恥)다. 관자는 예란 절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不踰節), 의란 벼슬(출세)을 쫓아 스스로 나아가지 않는 것(不自進), 염은 악을 숨기지 않는 것(不蔽惡), 치는 굽은(잘못된) 것을 좇지 않는 것(不從枉)을 의미한다. 관자는 물론 맹자 역시 법에 의존한 통치에 앞서 예의염치를 통해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고, 이를 통해 국가기강을 확립하고자 했다.

후세의 유학자들은 유학은 왕도(王道)의 길이고, 관자는 패도(覇道)의 길이므로 관자를 멀리하라 가르치고, 관자를 멀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지만 이것은 배울 수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배우라던 공자의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 공자의 제자가 비록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 많은 중국에서 3,000명의 제자는 별로 많은 수가 아니었다. 노나라에서 죄를 짓고 발뒤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왕태(王駘)라는 자를 추종하는 자가 공자의 제자와 맞먹었다고 전해지고, 실존 유무조차 불명확하긴 하지만 공자의 최대 라이벌이었다고 할 수 있는 소정묘(少正卯, ?~BC 496)의 변설에 놀아난 공자의 제자들이 그에게 휩쓸려 안연만 빼놓고 모두 몰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누구나 차별 없이 가르쳤다. 당시 공자와 경쟁관계에 있던 제자백가(諸子百家)들과 공자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제자백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학설을 중심하여 가르치고 배우도록 하였지만 공자는 제자들에게 각종 서적을 가르쳤고, 각종 과목(六藝)을 널리 배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연은
“글로써 나를 넓혀주시고 예로써 나를 단속해주었다(博我以文, 約我以禮).” <「자한」, 10장>고 했다. 이는 공자가 자신의 학파를 넓히려 하기보다 국가와 천하를 위한 인재양성에 본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후세에 이르러 유학(儒學)이 유교(儒敎)로 변모하며 유연함을 잃기는 했지만, 공자의 가르침이 2,500년의 시공을 초월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생한 가르침으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기본적으로 그의 가르침이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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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자하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길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고, 부모를 섬기길 온힘이 다하도록 하며, 임금을 섬길 때에는 온몸을 다 바치며, 벗과 사귈 때에는 말에 믿음이 있도록 한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공자의 제자로 공문10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인 자하(子夏, BC 507~BC 420?)는 중국 위(魏, 山西省)나라 출신으로 본명은 복상(卜商)이다. 특히 시(詩)와 예(禮)에 능하였는데, 공자가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다고 한 일화 “회사후소(繪事後素)”<『논어』, 팔일편>가 있었다. 공자의 사후에는 서하(西河)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며 위나라 문후(文侯)에게 초빙되어 스승이 되었다. 공자보다 44세 연하였는데, 공자가 제자들을 앞세워 보내는 고통을 겪었던 것처럼 자하 역시 자신보다 먼저 자식을 여의는 고통을 겪었다.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한 나머지 실명(失明)까지 했다고 전해진다<상명지척(傷明之戚)>.


「학이(學而)」 6장에 이어 다시 한 번 덕행(德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학문의 순서는 예(禮)를 배우고 도(道)를 터득하고, 덕(德)을 밝히고 성(性)을 인식하여 마지막으로 천명(天命)을 깨닫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공자는 물론 중국의 사상가들 대부분은 지식 그 자체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지식을 위한 지식’은 무가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식이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직접 인간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경우조차 그것을 행하는 것이 우선이지 공언(空言)으로 토론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사가인 풍우란은 명저 『중국철학사』에서 유교적 전통 속에서 지식이 가진 의미를 다음의 한 마디로 정리해내고 있다.

“만약 누가 성인(聖人)이라면 털끝만큼의 지식이 없어도 역시 성인이며, 누가 악인이라면 무한한 지식을 가졌어도 역시 악인이다.”


서양에서의 우주(自然)와 나(我)를 구분하여 줄기(體系)를 세우는(科學)의 길(立言)로 나아갔다면 동양에서의 학문 혹은 과학이 서양에 비해 발달하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한 가지는 우주와 나를 분리하지 않은 때문일 수도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우주(하늘)의 뜻을 받드는 존재로서 ‘예(禮)를 배우고 도(道)를 터득하고, 덕(德)을 밝히고 성(性)을 인식하여 마지막으로 천명(天命)을 깨닫는’ 것이 학문의 길이었다. 천명을 깨달은 사람이란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그의 몸(身, 실천) 자체가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그의 실천은 배우지 않았어도 그 자체로 예를 행하고, 덕을 밝히는 것이 된다.

『춘추(春秋)』를 노(魯)나라 좌구명(左丘明)이 해석한 『좌전(左傳), 춘추좌씨전』에는 “최상의 일은 덕을 수립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요, 그 다음이 주장을 수립하는 것이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라 하여 역시 덕(德)을 강조하고 있다. 『대학(大學)』의 8조목(八條目) 중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내성외왕의 도(內聖外王之道)’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내성’이란 ‘수신제가’ 다시 말해 입덕(立德)에 해당하고, ‘치국평천하’는 외왕에 해당하는 입공(立功)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배움 역시 이와 같은 내성의 도를 깨우치는 것이었다.

한자는 뜻풀이가 쉽지 않아 여러 이견들이 있는데 ‘賢賢易色’ 역시 주해(註解)를 다는 이들에 따라 갈린다. 하안(何晏)이나 주자(朱子)는 易를 ‘바꾼다’로 해석하고, 色을 여색(女色)으로 보아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꾼다’고 하였는데 고주(古註)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이라 했다. 또 ‘賢賢易色’을 부부관계의 윤리(夫婦之道)로 해석하여 ‘부인을 얻을 때는 어진 덕을 어질게 여기며(賢賢) 미색은 가볍게 여긴다(易色)’로 풀이하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색(色)’이란 단순히 여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족보존을 위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자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 중 하나로 공자 스스로도 부정하거나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논어』에서 공자가 색(色)에 대해 직접 이야기한 것은 「자한(子罕)」 17장과 「계씨(季氏)」 7장 두 군데뿐이다. 그나마도 이것을 부정하기 보다는 절제의 어려움<「자한(子罕)」, 17장>이나 경계하라<「계씨(季氏)」, 7장>는 뜻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정도다.

子曰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공자가 말씀하길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미녀를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자한(子罕)」, 17장>

孔子曰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典.

공자가 말씀하길 “군자가 경계할 것이 세 가지 있다. 젊었을 때는 아직 혈기가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여색을 조심하고, 장년이 되었을 때는 혈기가 굳건하므로 남과 다투는 것을 조심하고, 늙어서는 혈기가 이미 쇠약해졌으니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계씨(季氏)」, 7장>

비록 공자의 제자인 자하가 배움보다는 덕행을 더욱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배움의 뜻이 본질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지 배움을 등한히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학문을 하지 않고서도 학문이 목적하는 바를 실천한다면 학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의 말  -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자가 으뜸이요 <「계씨(季氏)」, 9장> - 은 공자도 하고 있지만, 공자는 뛰어난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교육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子曰 唯上知與下愚不多.

공자가 말씀하길 “오직 가장 지혜로운 자와 가장 어리석은 자만이 변하게 할 수 없다.” <「양화(陽貨)」, 3장>

공자는 배우지 않고서도 깨우친 자, 타고난 깨달음을 으뜸으로 쳤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본성이 그러하다는 상징적인 의미이지 실제로 공자가 항상 염두에 두고 깨우치려했던 이들은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배우려는 자(困而學之, <「계씨(季氏)」, 9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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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공자께서 말씀하길 “제자들은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도록 하라. 행실을 삼가하고 믿음이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 이를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살다보니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일류대학 나왔다고 해서 삶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며, 지혜가 생기는 것도 아니더라는 사실이었다. 만 권의 책을 읽어도 때때로 허망하며, 세상에 대해 한 가지를 알게 되면 열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많이 알아갈수록 고독했다. 사실 이것은 공자의 삶이기도 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고 하였지만 공자는 생전에 예수가 나사렛마을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것처럼 세상의 인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공자만큼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상가는 없었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들에게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가르쳤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다한 뒤에, 다시 말해 덕행(德行)을 실천한 뒤에도 여력이 있거든 글을 공부하라(行有餘力 則以學文)고 가르쳤다. 공자가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問道, 夕死可矣)”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그에게 있어 공부란 세속적인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이 되는 공부였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할 바에야 그 삶이 어찌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공자는 그렇게 가르쳤다. 공자는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공부를 한 자로서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 들어와서는 효를 실천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도록 처신하며, 행실을 삼가고 믿음이 있게 하라 - 배움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 애중(愛重)하고 친인(親仁)하는 것 - 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청소년 중 84%가 대학교육을 받는 시대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은 부모 세대가 성취한 계급적 성취의 조락(凋落)에 대한 공포, 자식 세대에서는 쓰레기가 되는 삶에 대한 공포를 가속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교육은 당신의 삶이 어째서 보잘 것 없는가에 대한 피난처 역할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 이유는 당신의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당신의 아버지가 부자가 아니며, 당신의 어머니가 적극적인 뒷바라지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당신은 일류대학을 나오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신의 삶은 쓰레기가 되고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교육이 위기인 진정한 이유는 글로벌스탠더드에 맞는 인재를 키워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머지를 쓰레기가 되도록 하는 교육, 그에 대한 적당한 핑계가 바로 교육이 되도록 하는 것이 위기의 본질적인 원인이다. 비록 세속적인 의미에서 부유하지 못해도, 출세하지 못하였더라도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본령(本領)일 것이다.

배우는 학생을 일컬어 제자(弟子)라 한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자신의 아우와 자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내 아우, 내 자식의 삶을 쓰레기처럼 여기도록 하고 싶은 스승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라 인정해버린다면 우리는 지금의 이 상황을 영원히 극복할 수 없다. 맹자는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놓쳐버린 자기 마음을 다시 찾는 것일 뿐이다.(學文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 고자 상)”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는 있어도 마음까지 궁핍하게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교육이 지닌 진정한 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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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공자가 말씀하길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려면 매사를 신중하게 처리하여 믿음을 얻어야 하며, 쓰는 것을 절약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그 때를 살펴야 한다.”


때마침 용산4구역의 철거민들이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시점에서 공자의 말씀을 읽는 마음이 착잡하다.  

천승지국(千乘之國)이란 말 4필이 모는 전차 1,000대를 운용할 수 있는 규모의 나라, 다시 말해 제법 봉토가 큰 제후가 다스리는 지역을 말한다. 천자는 만승(萬乘)이요, 제후는 천승(千乘), 대부는 백승(百乘)이라 했다. 소 한 마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1년에 천 평의 땅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말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산업혁명이 무르익을 무렵 영국 탄광지역에서 선로가 만들어졌다. 중세후기부터 이미 광산 갱도에 선로를 깔아 이용했는데, 당시에 화차를 움직이는 것은 말이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계산에 따르면 말 한 마리를 먹이는 데는 8명의 노동자가 소비하는 식품을 사는 것과 같은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영국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된 까닭도 결국 말을 먹이는 사료 값이 너무 비싸다는 문제에서 비롯됐다. 말 한 마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대략 4~5에이커(1에이커는 1,224평)의 농경지가 필요했다.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 1승(乘)에는 말의 유지비용만 막대한 것이 아니라 뒤따르는 병사의 수도 엄청났다. 갑사(甲士) 3명, 보졸(步卒) 72명, 취사병 10명, 피복담당 5명, 말 담당(수송) 5명, 땔나무와 물 담당 5명하여 모두 100여명의 병사가 전차 1승을 보조하기 위해 출전해야만 했다. 그런 전차가 1,000대라 하니 당시 제후가 차지하고 있는 봉토(封土)와 경제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 인류는 "생산성향상"을 위해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곧이어 불을 사용하게 되고, 마침내 농경사회에 와서 가축을 기르게 되면서 "향상된 생산성"으로 사람의 힘만으로 경작하던 농경지보다 훨씬 큰 면적의 농경지를 황소를 이용하여 경작하게 되었다. 생활의 면적이 넓어지다 보니 효율적인 운송수단이 필요하게 되었고, "말"이 보편적인 (그러나 "운용"의 비용 때문에 부자와 국가만이 소유하게 되는) 운송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말 한 마리를 먹이기 위해서는 대략 4-5에이커의 경작지가 필요했고, 여기서 생산된 곡식은 모두 말을 먹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1900년대 영국에서는 약 350만 마리의 말들이 약 400만 톤의 귀리와 건초를 먹어치웠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전체 농경지의 약 1/4을 말 사료를 기르기 위해 사용되었다. <리처드 하인버그, 신현승 옮김, 『파티는 끝났다』, 시공사>

공자는 이 정도 규모의 나라를 통치하는 제후라면 매사를 신중하게 처리하여, 백성의 믿음을 얻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용을 절감하고, 백성들을 공역을 시킬 때는 농번기를 피해 적절한 시기를 골라 피해가 최소한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공자의 애민(愛民)의식은 「안연(顔淵)」편 7장에서 자공과의 문답에서도 잘 드러난다.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 何先 曰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길 “먹을 것을 충족시키고, 군사를 충분히 갖추며, 백성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자공이 말하길 “만일 부득이하여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셋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사를 버려야 할 것이다.” 자공이 말하길 “만일 부득이하여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먹을 것을 버려야 한다.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백성이 믿지 않는다면 정치는 설 수 없게 된다.”

공자와 같은 춘추시대의 사람으로 관중(管仲)이 있다. 그는 공자보다 1세기 정도 앞서 살았던 사상가인데 그의 언행을 모은 책이 바로 『관자(管子)』이다. 흔히 그를 실용주의 제왕학(帝王學)의 대부라 할 만큼 관중은 실용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던 것으로 유명하다. “곳간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는 관중의 한 마디는 그의 정치철학이 무엇이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보다 1세기 전의 인물이자 명재상으로 이름을 높였던 관중의 말을 정반대로 뒤집어 버렸다.  

과연 ‘공자왈, 맹자왈’하는 공자답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공자가 먹고 사는 것을 등한히 한 인물은 아니었다. 나중에 「술이(述而)」편 <執鞭之士>를 이야기할 때 다시 말하겠지만 공자는 경제가 통치자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경제가 통치자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통치자가 백성의 배를 주리도록 할 것이며, 마음먹은 대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누가 부자 되기를 싫어하겠는가? 그래서 경제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도 경제는 역시 중요했지만 농경사회인 중국은 예측할 수 없는 기후의 변화와 발전하지 못한 과학기술로 인해 홍수와 가뭄으로 한 해 농사를 망치기가 부지기수였다.  

그와 같은 위기 국면은 통치자가 원한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과연 당신이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관중이 명재상이었던 까닭은 단지 실용주의만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백성에게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는 먼저 통치자 자신이 무엇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 “주는 것은 얻는 것임을 아는 것은, 정사의 보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성과의 소통에 능한 인물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신뢰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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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통치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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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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