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지금보다 어렸을 때... 이 시를 읽으며 나는 황순원의 단편 어느맨가에 나오는 겉늙어버린 동리 형처럼 끼룩끼룩대며 웃었다. 이상하게 세상을 다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생리적 연령이 어리거나 마음이 어리다. 나도 그랬다.

어느 날엔가 나는 갑자기 고등학교 3학년생에게 메일 한 통을 받았었다. 미술을 하는 여학생이었는데 세상의 바닥까지 보아버린 어투였다. 그런 어투의 편지를 받으면 마음 한 켠이 싸아하면서도 흐뭇해진다. 그건 삶에 대해 진지하다는 반증이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세상을, 삶을 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매우 중요했다. 그건 내가 기르고 있는 내 속의 작은 괴물들에 대해 당신들도 알아달라는 까탈이었으므로...

정작 세상을 안다는 건... 세상이 나에 대해 얼마나 무심하며 내가 세상을 알고 모르고 조차 전혀 상관없어 한다는 건데 그걸 몰랐으므로 온통 반항이었다. 따지고보면 그때도 그걸 알았지만,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왜 모두가 일어나겠는가. 일부는 그에 대항하느라, 뭐 국가주의니,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 같은 고상한 까닭 같은 거 없어도 그저 싫어서 못 일어나겠다고
개기는 마음, 왜 없겠나...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그렇게 세상을 뜨는 흰 새떼들은 그렇게 자기들끼리 끼룩대면서 다른 어디론가 날아간다. 이 세상 밖 어디론가...그러나 세상은 그들이 떼어 맨 등 위에 있고, 그들이 떼어 맨 무거운 날개짓 안에 있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세상을 뜨는 존재들은 아무도 없다. 황지우의 열패감... 그것이 이 시의 매력이다. 오줌 누고 일어나면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속옷 어딘가엔 지린내가 배기 마련이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싶지만... 세상은 우리의 양어깨를 내리누르며 말한다. 자신이 똥 눈 자리에 그대로 주저 앉히며..."길이 보전하세로..."

내가 처음 알았던 무렵 싱싱한 포도송이 같던 계집 아이들이 이제 그 포도송이를 닮은 눈매를 가진 아이들의 어미가 되었음을 확인하며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읽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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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새벽 산에서


-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 꽃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비가 그친 새벽 산에 머물러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산의 등허리에서 무럭무럭 피어올라가는 하얀 김... 산 중턱엔 하얀 구름이 드리워져 있고, 산 아래로 내려온 나는 방금 전 선계에서 유배된 불쌍한 중생이다. 산이 하늘에 두고 온 섬이라면 나는 수중의 고혼이 된 셈이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이 참 멋지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희망조차 비우는 것이 날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희망이나 절망이야말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일지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볼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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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사랑의 데칼코마니


왜,
너는 나에게 오지 않는 거지?
왜,
너는 나를 기다리게 하는 거지?
왜,
너는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거니?
VS.
왜,
너는 나에게 오지 않는 거지?
왜,
너는 나를 기다리게 하는 거지?
왜,
너는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거니?

사랑하는 평범한 연인들은 다들 이런 이유로 싸운다,
전자가 나의 말이면 후자는 그대의 말이다.
시인은 기다림조차 기다림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아니, 네가 나에게 오는 길이라 말한다.

닭살 돋는 연애시이면서 동시에 선문답처럼 오묘함이 깃든 시다.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황지우!
엄살도 떨 줄 알고, 청승맞게 넉살도 좋은...

**
사랑은 할 때보다 기다릴 때가, 기다릴 사람이 있을 때가 좋지만
무엇보다 가장 좋을 때는 그런 희망과 열정이 이제 막 솟아오를 때다.
다시 말해 아직 그런 존재가 없을 때가 가장 좋은 것인지도... ㅋㅋ


연애와 사랑에 대한 나의 일관된 견해는
사심 없이 바라보고, 철 없이 행동하며, 욕심 없이 차지하되,
미련 없이 사랑하고, 후회 없이 헤어지란 거... 결론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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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重慶森林)
- 감독 : 왕가위  출연 : 임청하, 양조위, 왕정문, 금성무 등


'해가 뜨면 사랑이 끝난다'라는 노래가 있다.

내 심정이 지금 그렇다
어떻게 메이를 잊지?
난 혼자 약속을 했다
바에 제일 처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했다.


<키노(KINO)>란 잡지가 정확하게 언제 창간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키노>에 내가 몰입하게 된 것은 실연과 함께였다. 7년을 사귀던 여자와 헤어졌을 때 나는 미친듯이 영화를 보았다. <중경삼림>엔 이런 대사가 있다.
"실연당한 후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참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땀이 흐른다. 수분이 다 빠져 나가버리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거라 믿기 때문이다." 연애를 해 본 사람들은 안다. 실연당했을 때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며 미친듯이 남아도는 시간을 소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알포인트>란 영화로 오랫동안 꿈꿔오던 감독으로 입봉한 공수창 선생 밑에서 영화 시나리오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지금 그나마 영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잡스러운 지식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그 무렵의 남아돌았던 시간이 내게 베풀어준 혜택이라고 해두자. 마음 둘 것 없어 정붙인 것이 영화였고, 그 무렵 날 가장 아프게 했던 것들 역시 영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녀와 헤어질 무렵 가장 각광받던 시네아스트는 바로 '왕가위'였으니까.


왕가위의 영화들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로 이어지는 동안 내겐 나만의 여자가 없었다. 오랫동안 한 여자를 사랑해오다가 누구의 것도 아닌 남자가 된 것이 오랜만에 찾아온 자유였는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그 시간들 동안 그닥 행복하지 않았으며 자유를 느낄 만한 기분도 아니었다. 부유하는 먼지처럼 .... 세상 모든 것이 하찮았다. 페이왕(왕정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량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왕가위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건 참 재미없는 일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들이 수없이 많은 수다들을 늘어놓았으니 말이다. 수다에 수다를 더한다는 건 재미없다. 그의 영화들은 모두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영화가 청춘남녀들에게 그토록 가슴저리게 기억되는 이유는 그들모두가 한때 기억에 기대어 살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실연당해본 적 없는 사람은 이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왕가위의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그들만의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모두는 실연 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어째서 자신만 슬픈 척하느냐고 묻는 것은 과도한 비판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보이는 광각렌즈의 일그러진 왜곡과 엿보는 자의 관음증이 어색하지 않다. 비틀거리고 닫힌 영혼들이 흔들리는 사각의 화면 속에서 금붕어처럼 유영한다. 세상 모든 만물에는 유통기한이 없지만, 유독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사랑에 대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동안 당신의 유통기한은 아직 연장되고 있다.


"..언제든지, 어떻게 하든지, 물건들에겐 유통기한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정어리도... 빵도... 랩마저도 기한이 있다. 세상에 유통기한이 없는 물건은 없는 것인가?"


왕가위 자신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다르다고 단언한다. 그는 고독하고 불안정하고 사랑에 버림받은 현대 도시의 젊은이들을 많이 그려왔지만 자신은 쾌활하고 유머감각이 뛰어나며 선글라스 뒤에 가려진 두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린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외롭지만... 그는 "나는 외로운 사람은 아니며 단지 재미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다. 19살때 만나 오랫동안 연애한 여자와 7년전 결혼, 아들 하나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그는 인생에서 외로웠을 때가 두번 정도 있었다고 한다.



첫 외로움의 경험은 5살때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겪은 낯선 도시의 삶이었다. 상해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자신만을 데리고 홍콩으로 온 후 문화혁명 때문에 국경이 막혀 형과 누나와 헤어져 살았다. 광동어를 모르던 그는 낯선 홍콩에서 외로움을 느꼈으며 당시 BBC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시그널뮤직을 벗삼아 외로움을 달랠 수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다음 외로웠다고 느낀 적은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를 촬영할 때. 아내가 아이 때문에 미국에 가있어 혼자 호텔생활을 했다.


세계는 점점 좁아져서 모든 도시가 비슷해지고 있다. 어딜 가나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가 있고 편의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홍콩이야기라도 그건 홍콩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가던 우리들의 이야기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기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연당한 젊은이들의 비탄이야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인생살이란 건 하나도 극적이지 않다. 영화에서처럼 인생에 배경음악이 깔리는 법도 없고, 지하철 안에서 총격전을 벌일 일도 없으며, 서점에서 우연히 옛사랑과 마주치는 요행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풍문처럼 옛사랑이 딸 둘을 낳고, 남편이랑 그럭저럭 잘 살고 있으며, 올가을엔 새로 운동을 시작해볼까 궁리하며 두둑해지는 뱃살을 두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늙는다. 그러므로 극적인 반전과 사건들을, 그런 삶을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흐뭇한 상상이던가.


"우리 서로가 매일..어깨를 스치며 살아가지만, 서로를 알지도 못하고 지나친다. 하지만 언젠가는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쳤던 순간에는 서로의 거리가 0.01cm밖에 안되었다. 57시간 후, 나는 이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요행히도, 요행히도 인생에 뭔가 극적인 순간이 찾아와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순간이 찾아와서 극적인 고백을 통해 사랑을 얻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들, 메마르고 척박하며 기대했던 일들조차 아니, 노력하고 공들여 오던 일조차 너무나 쉽사리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세상에 우리는 있다. 우리는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는 사막에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사막보다 아름답지 않고, 때로 아무리 헤매어도 발견할 수 없는 오아시스가 있을 뿐이다. 왕가위의 사각거울에 비친 영상을 보면서 한때 사랑했으나 이제 더이상 사랑받을 수 없게 된 옛 연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
중경삼림>처럼 끝이 허무한 영화가 좋다.

주인공들 모두가 격렬한 총격전 끝에 죽어버려도 좋다. 아무리 달려가도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므로... 그 뒤에 어떻게 되었네? 하며 그들의 안부를, 미래를 묻지 않아도 좋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종결되었으므로... 사랑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같은 말이다. 우리가 미처 깨닫고 있지 못할 뿐... 또 혹시 아는가? 어느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소갈머리없이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날이 오게 될지... 그래서 황지우는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라고 노래하는 것은 아닌지.... 중경삼림(重慶森林)의 어디에도 삼림(森林)은 등장하지 않는다. 거기에 등장하는 삼림이란 따지고 보면 도시의 정글에서 자라난 사람들... 우리가 스쳐가던 시골길의 어디멘가에서 무심히 스쳐가던 바로 그 나무들처럼 자라난 바로 우리들이니까.



이해한다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별개이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고
오늘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던 사람이
내일은 다른 것을 좋아하게 될 테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
중경삼림>의 등장인물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주시하지만 끝끝내 마주서지 않는, 그리하여 결코 서로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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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고향


- 황지우



고향이 망명지가 된 사람은 폐인이다.

출항했던 곳에서 녹슬고 있는 폐선처럼
옛집은 제자리에서 나이와 함께 커져가는 흉터;
아직도 딱지가 떨어지는 그 집 뒤편에
1950년대 후미끼리 목재소 나무 켜는 소리 들리고, 혹은
눈 내리는 날,차단기가 내려오는 건널목 타종 소리 들린다.
김 나는 국밥집 옆을 지금도 기차가 지나가고.
나중에는 지겨워져서 빨리 죽어주길 바랐던
아버지가 파자마 바람으로 누워 계신
그 옛집, 기침을 콜록콜록, 참으면서 기울어져 있다.
병들어 집으로 돌아온 자도 폐인이지만
배를 움켜쥐고 쾡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신 아버지,
삶이 이토록 쓰구나, 너무 일찍 알게 한 1950년대;
새벽 汽笛에 말똥말똥한 눈으로 깨어 공복감을 키우던
그 축축한 옛집에서 영원한 출발을 음모했던 것;
그게 내 삶이 되었다.
그리움이 완성되어 집이 되면
다시 집을 떠나는 것; 그게 내 삶이었다.
그러나 꼭 망명객이 아니어도 결국
폐인들 앞에 노스탤지어보다 먼저 와 있는 고향.
가을날의 송진 냄새나던 목재소 자리엔 대형 슈퍼마켓;
고향에서 밥을 구하는 자는 폐인이다

<출처> 황지우,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

"고향이 망명지가 된 사람은 폐인이다"란 말, 가만히 보면 지금의 나 같다. 황지우는 폐허의 시인이다. 폐허를 사랑하다 못해 그 스스로가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주둥이가 노랗다.


애초에 우리들에겐 고향이 없었다. 부모를 따라 이리저리 풍랑치듯 옮겨 다니며 살았고, 우리들에겐 고향이 없으므로 이별도 없다. 수도관을 타고 전염되듯 옮겨온 염소 소독된 수돗물 맛이나 비행기 타고 멀리 이송되어 온 제주 삼다수로 자랐기에 고향의 물맛도 알지 못한다.

허구헌날 뜯어 고치는 도로와 전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든 토건국가의 개발열풍 속에 자란 우리에겐 정붙일 사람도 고향도 없다. 어딜 가도 밥 한 술 공짜로 얻어먹을 곳 없는 우리는 모두 제 땅의 망명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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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2010.10.27 09:29


  

-  황지우 (黃芝雨)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나는 문학을 오랫동안 벗삼아 살아왔다고 감히 자평하고 싶은 인간 중 하나이지만, 여적 외우는 시가 없다. 물론 정현종 시인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나는 그 섬에 가고 싶다" 정도는 염치불구하고 빼놓아야하지만, 대학 다닐 때 어느 문학평론가가 강의하는 강의에서 자신이 외울 수 있는 시 한 편을 암기해서 적어내는 쪽지 시험이 있었다. 미리 예정된 시험이었으므로 나는 한 편의 시를 고르기로 했다. 그러자 갑자기 책꽂이에 꽂혀있는 모든 시집들이 소리쳐 외치기 시작했다.

밤새 한 편의 시도 외우기로 결정하지 못한 나는 결국 그 무렵 갓 나온 황지우의 시집 한 권에서 이 시를 찾아 외우려고 노력했다. 나의 이런 비참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노력은 무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과연 그렇게까지 노력을 했는지도 의문이지만) 결국 단 한 편의 시도 암기하지 못하고 시험장에 임해서야 간신히 대안을 발견해냈다. 마치 원래부터 그러했던 것인양 필통에 이 시를 적어놓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다 한 편의 시도 외우지 못했다. 그리고 나 혼자 이렇게 파렴치한 독백을 했던 것 같다. '고대 이래 시는 노래였으나 근대의 시는 더이상 노래가 아니라 읽는 것이 되었다'고. 그 교수님, 지금도 이런 시험을 치르는지 모르겠다. 밤새 시집들이 덤벼들어 곤란했던 그 밤이 그립네...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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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황지우
聖 찰리 채플린

- 황지우

영화 <모던 타임즈> 끝 장면에서 우리의 ‘무죄한 희생자’,
찰리 채플린이 길가에서 신발끈을 다시 묶으면서, 그리고
특유의 슬픈 얼굴로 씩 웃으면서 애인에게
“그렇지만 죽는다고는 말하지마!”하고 말할 때
나는 또 소갈머리 없이 울었지

내 거지 근성 때문인지도 몰라; 나는 너의 그 말 한마디에
굶주려 있었단 말야:
“너, 요즘 뭐 먹고 사냐?”고 물어 주는 거


*

누군가 작은 관심만 가져주어도 온 신경이 다 곤두서는 것은 알량한 자존심이 마음 속까지 치장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누군가를 속일 수는 있어도 나를 속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너무 악한 까닭입니다. 눈이 맑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마음은 편해지지만 그 뒤켠에 두려움이 드는 까닭은 그대의 눈동자가 거울같아서 일겁니다.

"너, 요즘 뭐 먹고 사냐?" 이 한 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작은 관심만으로도 나는 그렇게 속절없습니다. 마음 참 많이 무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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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사람이 늙으면 적당히 때가 묻어야 아름답다.(혹은 그와 반대의 경우에도 역시 아름답다. 그러나 꼬장꼬장하게 늙어가는 어르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자신이 그 모습의 뒤에 숨어있는 그 분의 속깊은 정을 느낄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 가능하다. 사람이 늙어서까지 남을 사랑하고 배려할 줄 모른다면 그보다 추한 꼴도 없을 것이다.) 또 사람이 늙으면 이렇게 천연덕스러워지는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 황지우는 아직 덜 늙은 셈이다. 이 시가 천연덕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처연하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더 늙어버리면 <늙어가는 아내에게>와 같은 시를 쓰지 않았을 테니까요.

화성에서 온 남자들은 결혼하고 1년이 지나면 더이상 신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러나 금성에서 온 새댁(새닭?-크흐)들은 3년 이내에는 신혼이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내내 닭살 돋는 플레이들을 펼치곤 한답니다.

제가 간혹 게시판이나 제홈을 통해서 페미니즘적인 발언 비슷한 것들을 하고는 하지만 속 알맹이는 여전히 지극히 보수적이고 건전한(?) 한국 남자랍니다. 집에 들어가서는 말많이 하는 거 싫고, 씻고, 밥 먹고, 뉴스 좀 보다가(요새는 다시 TV에 흥미를 잃어서) 아내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저는 침실에 들어와서 쓸데없는 책들을 보다가 잠이 듭니다.

아내는 뒤늦게 씻고 들어와 침대에 누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만 이미 잠을 청하고 있는 저는 만사 귀찮죠. 아침에는 이런 형세가 역전되어서 제가 아내에게 이런저런 재롱을 피우지만 오히려 아내가 역정을 냅니다. 금성인과 화성인은 이렇게 생활리듬도 다릅니다.

솔직히 황지우 시인의 저 가슴 찐한 러브 스토리와 명대사를 제게 읆조려 준 적 한 번 없는 아내이지만 (정말 거리가 멉니다.) 오늘 이 시를 올린 것은 어제 아내와 한 약속이 있어서 그렇죠.

정말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그래서 저는 내일 회사에 나가서 시를 게시판에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겠다고 했죠. 아내는 직접 쓴 걸 올리려고 하느냐고 물었지만 그럴 재주가 있어야 말이죠.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황지우 시인의 아주머니는 황지우 시인에게 푹 빠졌었던 모양입니다. 그러게 저런 말이 술술 나왔었겠죠. 살아보면 저런 것도 다 작전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작전을 쓰기 까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원래 남자고, 여자고 말 한 마디로 넘어가는 법이니까요. 화살이 꽂히는 순간은 정말 순간입니다.

간혹 정말 이 여자의 어디가 좋아서 내가 결혼이라는 그 끔찍한 과정을 걷게 되었을까 자문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죠.

사랑하는 이유 한 가지를 찾다보면
미워지는 이유 열 가지는 나옵니다.

참 쉽게 사랑하고,
참 쉽게 결혼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어렵기만 했던 제게 그래서 아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손쉬운 사람입니다. 언젠가 그대 누운 무덤 옆에 함께 눕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대와 함께 최선을 다해 늙어가고 싶습니다. 우리 앞에 생이 다하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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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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