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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 이병률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헌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 줄 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 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 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 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어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 보아라 * 누군가는 내게 엉엉 소리내어 당신의 슬픔을 보여주고, 간다... 더보기
도종환 - 산경 산경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불혹이 될 때까지 살아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산'과 '강'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산은 그저 그곳에 있게 하면 되고 강은 그저 흘러가도록 하면 된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니 내가 산에 가는 것이오 강이 멈추지 않으니 내가 강을 따라 함께 가면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더보기
공광규 -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 공광규 얼굴 표정과 걸친 옷이 제각각인 논산 영주사 수백 나한 언제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바위벼랑에 앉아 편안하게 햇볕 쬐고 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잡아먹는 스피커 염불 소리에 아랑곳 않고 지저분한 정화수 탓하지 않고 들쥐가 과일 파먹어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다람쥐가 몸뚱이 타고 다녀도 아랑곳 않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깔겨도 그냥 웃는다 초파일 연등에 매달린 이름들 세파처럼 펄럭여도 가여워 않고 시주돈 많든 적든 상관 않는다 잿밥에 관심이 더한 스님도 꾸짖지 않는다 불륜 남녀가 놀러 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고꾸라져도 누가 와서 제자리에 앉혀줄 때까지 그 자세 그 모습이다 바람이 휙 지나다 하얀 산꽃잎 머리 위로 흩뿌리면 그것이 한줌 바람인 줄만 알고... 더보기
가이 해밀턴 - 공군 대전략 (Battle Of Britain) 공군 대전략 (Battle Of Britain) 감독 : 가이 해밀턴 출연 : 해리 앤드류즈, 마이클 케인, 트레버 하워드, 커드 저진스 제작 : 1969(영국) 서구의 몰락과 나치의 유럽 통합 계획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한 대의 허리케인 전투기가 패주하는 영국군과 프랑스 피난민들의 머리 위로 공중제비(소위 "승리의 횡전"이란 비행 포메이션)를 넘으며 멀리 사라진다. 그러자 전차에 올라탄 채 후퇴하고 있던 영국 병사 하나가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저게 어디서 사기를 쳐." 1940년 6월 5일 아침 몇 명의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 근처를 산보하듯 거닐었다. 그곳에 독일의 전격전에 휘말려 패전하며 간신히 프랑스에서 철수한 영국군 장비와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전사한 영국군 시체들이 .. 더보기
김선우 - 낙화, 첫사랑 낙화, 첫사랑 -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T.S. 엘리어트는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시에 대한 정의가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문학에 있어 '.. 더보기
김혜순 - 잘 익은 사과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는.. 더보기
문태준 -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 문태준 끔찍하다 조그맣게 모인 물속 배를 내 눈앞처럼 달고 올챙이가 헤엄치고 있다 아주 어둡고 덜 어두울 뿐인 둥근 배 속 다리 넷이 한테 엉겨 있다 한 통이다 한 통이 통째로 움직인다 마음 가면 마음이 전부 간다 속으로 울 때 손발이 모두 너의 눈물을 받아준다 너의 몸을 보고 내 몸을 보니 사람이 더 끔찍하다 팔을 밀어넣고 나의 다리를 밀어넣어 저 원적(原籍)으로 돌아갔으면 둥근 배 속 아직은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이별이라는 말에 태동(胎動)이 있기 전 출처 : 현대문학, 2007년, 9월호 * 남진은 란 노래에서 목놓아 노래 부른다. "다앙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것을"이라고... 바다야, 이별이 있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으련만 대중.. 더보기
CITY - Am Fenster CITY - Am Fenster 그룹 City는 특이하게도 동독의 록그룹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은 "Am Fenster"였다. 내 개인적으로 고등학생 시절 성시완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처음 들어보고 너무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탓에 이후 언젠가 한 번은 다시 이 프로그램에서 방송을 해주리란 기대를 품고,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누구나 경험해 봤음직한 일을 나도 했다. 작은 워크맨 라디오에 카세트 테잎을 꽂고 이 음악이 방송되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는 일 말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City의 Am Fenster를 녹음하는데 성공했고, 그 다음엔 그 테입이 늘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듣고 또 듣고는 했었다.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는 전영혁을 통해, 어떤 이는 성시완.. 더보기
켄트 M. 키스 - 그럼에도 불구하고(The Paradoxical Commandments) 그럼에도 불구하고(The Paradoxical Commandments) - 켄트 M. 키스(Kent M. Keith, 1949~ ) 사람들은 때로 분별이 없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라. 당신이 선을 행할 때도 사람들은 이기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 당신이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거짓 친구와 진정한 적을 얻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오늘 행한 좋은 일은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의 솔직함과 정직으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정직하라. 가장 위대한 이상을 품은 가장 위대한 사람도 가장 악랄한 소인배에 의해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 더보기
김정란 - 눈물의 방 눈물의 방 -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네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 세상은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주지 않는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많은 것을 누려본 기억도 별로 없지만 세상은 한 가지를 주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