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가


- 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


나는 지금도 제일 처연한 시 중 하나로 신라 향가인 <제망매가>를 손꼽는데, 박목월 선생의 이 시 <이별가> 역시 못지 않다.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하는데 와락 눈물이 날 것 같다.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은 걸어서도 건널 수 있고, 잠 자면서도 건널 수 있고, 추락하면서도 건널 수 있고, 온갖 방법으로 건널 수 있을 만큼 가까운데... 왜?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양희 - 사라진 것들의 목록  (3) 2011.10.27
공광규 - 얼굴 반찬  (0) 2011.10.26
이재무 - 제부도  (1) 2011.10.25
이문재 - 마흔 살  (0) 2011.10.24
정해종 - 엑스트라  (0) 2011.10.19
박목월 - 이별가  (0) 2011.10.14
박영근 - 길  (1) 2011.10.12
오규원 - 모습  (0) 2011.10.11
이성부 - 슬픔에게  (2) 2011.10.08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0) 2011.09.30
윤제림 - 길  (0) 2011.09.22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2011.10.12 10:38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시인의 시가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이런 일이 좋은 건 아니다.
그건 내가 몹시 지쳤거나 다쳤거나 힘겹다는 증거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시인의 마지막 연이 나를 또 왈칵왈칵하게 만들어 버린다.
잘 쉬고 계시냐고 시인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그곳에선 부디 편안하시라고...
삶이 그토록 쓸쓸했던 당신!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광규 - 얼굴 반찬  (0) 2011.10.26
이재무 - 제부도  (1) 2011.10.25
이문재 - 마흔 살  (0) 2011.10.24
정해종 - 엑스트라  (0) 2011.10.19
박목월 - 이별가  (0) 2011.10.14
박영근 - 길  (1) 2011.10.12
오규원 - 모습  (0) 2011.10.11
이성부 - 슬픔에게  (2) 2011.10.08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0) 2011.09.30
윤제림 - 길  (0) 2011.09.22
백석 - 여승(女僧)  (0) 2011.09.21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모습


- 오규원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 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

시인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에게 이 시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시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육체는 명동 골목 사이로 쏴아하고 불어가는 한 줄기 바람에도 가늘게 흔들렸으므로...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 흔들림을...


 


** 교수가 되기 전에 시인이란 생업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직업으로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던 당신이었다. 사진, 아니 이미지에 대해 비할 바 없이 높은 안목이 있던 분이기도 했다.(이미지 출처: 문학과지성)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재무 - 제부도  (1) 2011.10.25
이문재 - 마흔 살  (0) 2011.10.24
정해종 - 엑스트라  (0) 2011.10.19
박목월 - 이별가  (0) 2011.10.14
박영근 - 길  (1) 2011.10.12
오규원 - 모습  (0) 2011.10.11
이성부 - 슬픔에게  (2) 2011.10.08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0) 2011.09.30
윤제림 - 길  (0) 2011.09.22
백석 - 여승(女僧)  (0) 2011.09.21
나태주 - 산수유 꽃 진 자리  (0) 2011.09.19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슬픔에게


- 이성부



섬 하나가 일어나서
기지개 켜고 하품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느냐.
바다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리움만 먹고
숨죽이며 살아남던 지난 십여년을,
파도가 삼켜버린 사나운 내 싸움을,
그 깊은 입맞춤으로
다시 맞이하려 하느냐.
그대,
무슨 가슴으로 견디어 온
이 진흙투성이 사내냐 !

*

오래전 어느 시절 나는 내 삶에도 노래처럼 어떤 음계가 있다면
그것은 국악 장단 중에서도 가장 느리게 흘러간다는 진양조 장단에
발맞춘 슬픔이 아닐까 결론짓고 홀로 힘없이 미소지은 적이 있었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호흡과 리듬을 타고 난다면
나는 아마도 진양조 늦은 장단에 내 삶을 맞추고 싶었다.
내 삶은 언제나 손아귀에 가득 쥔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너무 쉽고 빠르게 새어나가버리는 듯 했으니까.
그리하여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 흐름에 맞춰 날 적응시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내 삶의 기본은 '서글픔'이란 걸 알게 되었다.

태어난 것이 서러워 울었고
사랑받지 못하는 삶이 서러워 울었다.
파도처럼 매일의 삶이 울음이었다.
간신히 두 발로 선 뒤엔 쓰러지지 않으려 살았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강인하다거나 인내심이 많다거나
매사에 눈치 빠르게 잘 적응하며 살아간다 했으니 나는 서글펐다.

"그대,
무슨 가슴으로 견디어 온
이 진흙투성이 사내냐 !"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이 예사롭지 않다.
나는 진양조의 삶을 꿈꾸었으나 내 삶은 언제나 휘모리...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문재 - 마흔 살  (0) 2011.10.24
정해종 - 엑스트라  (0) 2011.10.19
박목월 - 이별가  (0) 2011.10.14
박영근 - 길  (1) 2011.10.12
오규원 - 모습  (0) 2011.10.11
이성부 - 슬픔에게  (2) 2011.10.08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0) 2011.09.30
윤제림 - 길  (0) 2011.09.22
백석 - 여승(女僧)  (0) 2011.09.21
나태주 - 산수유 꽃 진 자리  (0) 2011.09.19
강영환 - 여름에 핀 가을꽃  (0) 2011.09.14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별

- 안나 아흐마또바
(Anna Akhmatova, 1889-1966)


내 앞에는
저녁의 비스듬한 길이 놓여 있네
어제는 사랑에 빠진 채
"잊지 말아요" 속삭이던 사람
오늘은 다만 바람소리뿐
목동들의 외침과
맑은 샘가의
훤칠한 잣나무뿐


*

어제는 사랑에 빠져 행복했던 사람
그 사람이 사라진 뒤의 나에겐 저녁의 비스듬한 길이 있을 뿐이다.
사랑은 '침묵'이 아니라 '대화'로 이루어진 탓에 사랑은 말의 연금술사이자 말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비스듬한 길을 걸어 나조차 사라진 뒤에도, 모든 말들이 허공으로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맑은 샘가의 훤칠한 잣나무는 남아 있겠지.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

승려란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인연(因緣)을 걸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대오각성(大悟覺醒)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자를 말한다. 태어남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생 한 번의 커다란 사건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하지만 무수한 윤회를 반복해도 도를 깨우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무수한 인연의 덕을 쌓아야만 가능하다. 한 번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도 어렵건만 도를 깨우쳐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대오각성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번뇌를 깨뜨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는가.


그런데 시인은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라고 한다. 시인의 욕심이다. 하지만 그래서 시인이다. 모든 걸 초탈한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을 지상에 유배된 자들이라 부른다. 지옥 같은 현실로 유배된 지장보살의 현신쯤 되는 자들인 셈이다.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해종 - 엑스트라  (0) 2011.10.19
박목월 - 이별가  (0) 2011.10.14
박영근 - 길  (1) 2011.10.12
오규원 - 모습  (0) 2011.10.11
이성부 - 슬픔에게  (2) 2011.10.08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0) 2011.09.30
윤제림 - 길  (0) 2011.09.22
백석 - 여승(女僧)  (0) 2011.09.21
나태주 - 산수유 꽃 진 자리  (0) 2011.09.19
강영환 - 여름에 핀 가을꽃  (0) 2011.09.14
김사인 - 늦가을  (2) 2011.09.09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2011.09.22 10:10




- 윤제림



   꽃 피우려고 온 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을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가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 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가는 짐 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동네 어귀에서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걷는 아줌마를 본 적이 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아줌마 저 배에 들어있는 게 뭔지 몰라 저 아줌마는 뭘 먹었기에 저리 배가 나왔을까 했다. 그때는 그 뱃속에 끝없이 이어진 기나긴 탯줄의 길, 가도가도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바다, 숨막히는 미로를 뚫고 나올 꽃 같은 우주를 품고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길 위의 인생들이 만나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란 걸 미처 몰랐다.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목월 - 이별가  (0) 2011.10.14
박영근 - 길  (1) 2011.10.12
오규원 - 모습  (0) 2011.10.11
이성부 - 슬픔에게  (2) 2011.10.08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0) 2011.09.30
윤제림 - 길  (0) 2011.09.22
백석 - 여승(女僧)  (0) 2011.09.21
나태주 - 산수유 꽃 진 자리  (0) 2011.09.19
강영환 - 여름에 핀 가을꽃  (0) 2011.09.14
김사인 - 늦가을  (2) 2011.09.09
김수영 - 강가에서  (0) 2011.09.08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여승(女僧)

-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말이 담고 있는 정경이 구구절절하게 아프고, 아프다. 머리 깎은 여승이 속세에서 겪은 삶의 내력이 한 편의 짧은 시에 모두 담길 수 있을까? 아마도 삶의 이러한 면, 저러한 면을 사려 깊게 살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가 보여주는 몇몇의 정경 그 너머에 있을 삶의 저 편이 보일 것이다.

시의 감동은 보이는 속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저 편에서 온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읽는 것은 내 안에 등불 하나 밝히는 일과 다르지 않다.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영근 - 길  (1) 2011.10.12
오규원 - 모습  (0) 2011.10.11
이성부 - 슬픔에게  (2) 2011.10.08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0) 2011.09.30
윤제림 - 길  (0) 2011.09.22
백석 - 여승(女僧)  (0) 2011.09.21
나태주 - 산수유 꽃 진 자리  (0) 2011.09.19
강영환 - 여름에 핀 가을꽃  (0) 2011.09.14
김사인 - 늦가을  (2) 2011.09.09
김수영 - 강가에서  (0) 2011.09.08
마종기 - 證例6  (0) 2011.09.07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산수유 꽃 진 자리

-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

"풀꽃"의 시인 나태주의 시들은 따사롭다. 얼핏 생각없이 바라보는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따사롭기 그지 없어 예쁘기만 한 시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그의 따사로운 시어들을 곰곰이 씹고 있노라면 따사롭기 그지없는 시가 담고 있는 정신의 한 편은 고통을 참아내는 강인한 인고(忍苦)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을 가졌는데 누군가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 꽃 옆에서 무심히 중얼거린다는, 얼핏 읽노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마음을 전할 길 없어 안타깝게 여기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만 읽기 쉽다. 그러나 첫 번째 행과 아홉 번째 행에서 반복되고 있는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는 내용적으로는 같은 말이지만 앞서의 말과 뒤에서 반복되는 말 사이엔 시간적 간격이 크다.

첫 번째 행에서 시인의 사랑 고백을 듣는 산수유는 아직 춥고, 쌀쌀한 바람이 피는 3월 초봄에 남들보다 이르게 피어난 산수유 꽃이지만 아홉 번째 행 이후 등장하는 산수유는 볕좋은 봄날과 뜨거운 여름 한철을 보내고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무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의 산수유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차가운 한기가 미처 떠나지 않은 황량한 산야에서 누구보다 먼저 피어나는 산수유는 샛노랗다.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은 대부분 아직 차가운 날씨에 행동이 굼뜨기 마련인 곤충들을 유혹해 수분을 유도하기 위해 노란 빛을 띈다는데 해마다 춘삼월, 깊은 계곡 시냇가는 아직도 얼어붙어 있는 그 계절에 남도땅으로부터 들려오는 산수유 소식으로부터 우리는 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안다.

개나리가 피어날 때쯤 꽃이 지고, 여름엔 잎만 무성하게 피었다가 우리 모두가 산수유 꽃이 피고 지었던 사실조차 기억에서 잊혀져갈 무렵에야 석조(石棗ㆍ돌대추)라는 별명처럼 작은 대추모양의 예쁘고 빨간 열매가 산수유 꽃 진 자리마다 알알이 맺힌다. 봄의 전령으로 남들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웠던 산수유가 절기상 첫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나서야 열매를 맺는다. 상강이란 절기는 가을도 다가고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되어 나뭇잎들도 떨어질테니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라는 절기다. 서리는 입춘(入春) 지나고도 여든 여덟 번의 밤낮이 바뀌고서야 '이별서리'로 그친다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추위에 얼어죽지 않고 버티다가 다시 꽃을 피우는 것이 산수유나무다.

요즘 세태가 하도 급해서 연인끼리의 사랑도 1000일은 커녕, 100일도 안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풍속도이라고 한다. 성미급한 사람들은 100일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만난지 10일, 20일만 되어도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요즘 우리네 사랑 풍습이라고 하는데 산수유는 그래서 기다림의 나무다. 산수유의 꽃말이 '지속ㆍ불변'인 까닭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산수유 꽃 진 자리에 빗대어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랑을 찬미하고 있다.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규원 - 모습  (0) 2011.10.11
이성부 - 슬픔에게  (2) 2011.10.08
복효근 - 아름다운 번뇌  (0) 2011.09.30
윤제림 - 길  (0) 2011.09.22
백석 - 여승(女僧)  (0) 2011.09.21
나태주 - 산수유 꽃 진 자리  (0) 2011.09.19
강영환 - 여름에 핀 가을꽃  (0) 2011.09.14
김사인 - 늦가을  (2) 2011.09.09
김수영 - 강가에서  (0) 2011.09.08
마종기 - 證例6  (0) 2011.09.07
오세영 - 비행운  (0) 2011.08.18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빛(Light)

   
- 프랜시스 W. 부르디옹(Francis W. Bourdillon, 1852-1921)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The day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The mind has a thousand eyes,
     And the heart but one;
Yet the light of a whole life dies
     When its love is done.
 

밤엔 천 개의 눈이 있고
     낮엔 오직 하나가 있지
하지만 밝은 세상의 빛은 해가 지면
      사라지고 말아

정신엔 천 개의 눈이 있고
     가슴엔 오직 하나가 있지
하지만 온 생명의 빛은 사랑이 꺼질 때
     사라지고 말아
 

* 제목이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로도 알려져 있다.

** 가끔 영 어색하긴 하지만 외국시를 외국어로 낭송하는 것이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시가 본래 노래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인간의 목소리가 최고의 악기라는데 외국어로 된 시는 외국어로 낭송되는 것을 듣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노래를 듣고 싶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1년쯤 전에 평화박물관 연말 송년식 자리에서 일본인 친구들이 미야자와 겐지의 "바람에 지지 않고"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갈아 낭송하는 것을 들으면서 어쩐지 그 기대가 깨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 지나치게 개구진 친구들이었기에 낭송의 감동이 좀 덜했다고나 할까.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