乍晴乍雨

- 김시습(金時習)

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사청환우우환청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예아변응환훼아 도명각자위구명)
花門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화개화사춘하관 운거운래산부쟁)
寄語世人須記憶 取歡無處得平生
(기어세인수기억 취환무처득평생)

갰다가 비가 오고 비 오다가 다시 개이니,
하늘의 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나를 기리는 사람 문득 돌이켜 또 나를 헐뜯을 터,
공명을 피하더니 저마다 또 공명을 구하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상관하랴,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이 무엇을 다투랴.
세상 사람들아 내 말 새겨들으시라,
즐겁고 기쁜 일 평생 가지 않나니.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지은 "사칭사우"를 우리말로 옮겨보면 "변덕스러운 날씨"쯤 될 것이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통곡하며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살아갔던 김시습이다. 어릴 적 읽었던 김시습의 위인전에서 기억에 남았던 일화가 있는데, 김시습의 나이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널리 소문이 나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갈 정도였다.

세종은 김시습을 친히 궁으로 불러들여 어린 신동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그의 지혜를 살핀 뒤 크게 만족해 상으로 비단 몇 필을 내려 주었다. 세종은 어린 신동에게 상을 내려주는 대신 어른의 도움 없이 홀로 비단을 집으로 가져가도록 했는데, 진짜 시험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린 김시습은 비단을 풀어 자신의 허리에 묶고는 집까지 비단을 끌고 돌아가니 세종이 이 사실을 전해듣고 크게 경탄했다는 이야기이다.

공자께서 '나는 나면서부터 안 자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힘써 구하는 자(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스스로를 낮춰 겸양을 표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혜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깃드는 것이란 의미에서 공부를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다. 어쨌든 '나면서부터 아는 것(生而知之)'라면 '배워서 하는 것(學而知之)'인데 주자는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라야 이처럼 나면서부터 아는 총명예지(聰明睿知)가 임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생지지질(生知之質)'이라 했다. 그런데 조선 역사상 이처럼 '생지지질(生知之質)'로 일컬어진 단 한 명이 바로 김시습이었다.

태어난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깨우칠 만큼 천품이 탁월해 임금도 친히 관심을 기울일 정도이긴 했으나 세종이 친히 김시습을 불러 시험을 치르게 했다는 이야기는 민간의 설화가 부풀려진 듯 싶다. 세종은 민간에 널리 퍼진 김시습의 천재성에 대한 소문으로 인해 혹시라도 어린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두려워 지신사 박이창을 시켜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이를 확인토록 했을 뿐이며 박이창의 보고를 받은 뒤 "내가 친히 그 아이를 불러보고 싶으나 일반 백성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 그러니 그 가정에 권하여 잘 감추어 교양을 쌓도록 하고 그가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치 크게 쓰리라"는 전교를 내렸다 한다. 그러나 김시습의 나이 21세 때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문을 굳게 닫아 걸고 나오지 않은지 3일만에 크게 통곡하면서 책을 불태워버리고 이후 미친 척하며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노릇을 하며 살았다.  

비록 이 시에서 김시습은 관조달통(觀照達通)한 듯한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매월당이 이후 살아온 삶의 내력을 조목조목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어떤 이는 편벽이라고도 하던데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는 아무리 가난하여도 무엇이건 빌리지 않았고 남이 주어도 받지 않았으며 자신을 찾아오는 이에게 물어 자신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자가 있다면 아주 즐거워했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면서 그 속에는 다른 배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썹을 찡그렸다고 한다. 얼핏 세상사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또한 자신이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봉건시대의 정치체제란 왕이 곧 체제인데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세조와 그 후손이 집권하는 것은 김시습에게 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체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이 체제를 뒤집을 만한 권력이나 의지가 있었던 것 또한 아니었기에 그는 살아도 살아있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체제의 외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는 그것을 상상하게 된다. 아마도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는 이와 같은 그의 상상이 빚어낸 체제의 바깥, 어디쯤이었으리라. 쓸쓸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시습, 그의 나이 59세에 무량사에서 입적했으나 그는 죽음 뒤에도 여전히 색다른 사람이었다. 화장을 거부한 탓에 몇 해 동안 절 옆에 안치해두었는데 3년후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도 생시와 다름 없는 안색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죽음 이후에 부처가 되었다고 믿어 화장하였는데 이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만들어 세우고 그의 풍모와 절개를 기렸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김시습에게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청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그것이 김시습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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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핀 가을꽃

- 강영환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자갈밭으로 난 작은 길 위에
마른 눈을 들어 들어서
안간힘으로 버텨선 흔들림으로
가을꽃이 피었다
먼 원시림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건강한 뼈대
자갈밭에 내려 쌓이는
수천의 빛 무리를 넘어뜨리며
위태로이 홀로 서서
말라비틀어진 이 계절의 중심에서
억센 근육을 부러뜨려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출처] 칼잠, 시로사(1983)


*

"여름에 핀 가을꽃"은 강영환 시인의 등단작이자 첫 시집 칼잠에 수록된 시인데 아쉽게도 시집 자체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에는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란 구절이 첫 행과 마지막 행에서 반복(5행에서도 축약된 형태로 '가을꽃이 피었다'가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5행 이전에 피어난 가을꽃은 자갈밭으로 난 작은 길 위에 피어난 현실 속의 가을꽃이지만 5행 이후에 피어난 가을꽃은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상에 피어난 꽃이기 때문이다. 수천의 빛무리를 넘어뜨리며 위태롭지만 굳건하게 피어난 꽃이다. 철모르고 여름에 핀 가을꽃.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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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


요즘 시인들은 왜 달에 대한 멋진 시 하나 토해내지 않는 건지. 제가 가장 마지막에 주목했던 소설가는 "마루야마 겐지"였습니다. 이 말은 최근엔 소설을 읽지 않는 제 현실의 문제이죠. 어쨌거나 그의 소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는 참 특이한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설을 읽고 난 뒤 낡은 오토바이를 사서 한계령도 넘고, 한반중에 동해안 모래 사장도 달려보고 싶었지만 울애인이 다른 건 다 되어도 그것만큼은 허용해줄 수 없고 해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김사인의 이 시를 읽고난 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이 한창 때 연애 좀 하지 않았을까. 저는 마지막 행에 가서 폭발하는 시를 좋아하는 편인데, 김사인의 <늦가을>은 특히 첫 구절이 매력적입니다.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라는 구절 말이죠. 시에서 노래하는 대상은 불혹을 넘긴 중년의 여성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남과 북을 모두 통틀어 고달프기 마련입니다(예전에 <북한의 여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란 책을 읽었는데 남한에 비해 반드시 평등하다고 말할 순 없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간 시인은 늦가을을 불혹을 맞은 여성에 비유한 건지, 불혹을 맞은 여성을 늦가을에 비유한 건지 몰라도 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긴 있어 보입니다. 늦가을. 9월에서 11월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면, 늦가을은 11월에 해당하겠죠.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에 숲속에 가보셨나요. 11월의 가을 숲속은 추워요. 술먹고 그런데서 잠들었다간 입 돌아가기 딱이죠. 오한이 들죠. 바람도 차갑고... 그런 적막천지 한밤중에 머리를 감는 여자.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외롭다는 감정은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어젯밤엔 갑자기 잠이 안 오더군요.


잠자리에 든 아내를 깨워 자유로라도 나가보자고 꼬셨습니다. 추석을 며칠 앞둔 자정 무렵... 문득 여전히 달이 내 뒤를 쫓는지 알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그냥 자자고 쿨쿨... 잠이 오지 않아 부대끼는 밤에 문득 일산 가던 길에 내 뒤를 쫓던 커다란 달이 그리웠어요. 사랑은 어느덧 늦가을에 접어들어 오한이 들고, 주춤주춤 고무신을 옮겨보아도 오는 이도, 가는 이도 없지요. 잠도 오지 않는 밤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뭅니다. 이유야 어쨌거나 다음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내일모레 불혹을 바라보는 사내가 창 밖을 바라봅니다.


늦가을엔 정말 쓸쓸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이가 들 수록 나의 세상은 깊어지겠지만 그 세계에 깃드는 사람이 없으면 참말 쓸쓸할 거예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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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俗돼간다  俗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1964년)

*


김수영을 일컬어 한국 현대시의 신화라고도 부르지만 아마도 이런 호명법에 대해 김수영 자신은 그다지 마뜩지 않게 여겼으리란 생각이다(개인적으로는 나역시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인 김수영은 물론 그처럼 높이 평가받을 만한 시인이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측면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그가 이런 평가를 마뜩지 않게 여겼을 것이란 사실은 김수영의 시 세계가 바로 신화 혹은 그 자신을 포함해 무엇이 되었든 덧씌우고 포장하는 코스튬을 경멸해 왔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에서 자아는 거의 대부분 자아 과잉 상태에서 거울 혹은 도마 위에 올려진다. 이 시 "강가에서" 역시 첫 구절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로 시작한다. 시적 자아는 타인을 통해서 혹은 그 자신의 자아에 의해 분석대상이 되고 있다. 시 속의 '저이'는 '나'보다 가난해 보이지만 여유가 있고,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이나 많지만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줄 만큼 호기롭다. 그리고 그는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오고, 반드시 4킬로미터 가량을 걷는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이는 '애 업은 여자'와 오입한 자신의 부도덕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애 업은 여자와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오입할 수 있었던 자신의 성적 능력을 아무 고민 없이 자랑할 만큼 속물이다. 게다가 그는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시적 자아는 그와 나를 비교하면 할수록 안으로부터 파괴된다. 나의 어조는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비교하고 있으나 그는 이미 나의 염치나 윤리의식 따위 개나 물어가라는 식으로 전혀 개의치 않는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던가? 그에게 그런 의식 따위 없으니 도리어 부끄러워진 건 '나'이다. 그런데 이 '나'는 사지육신 멀쩡한 나(자아)인가?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느낄 만큼 왜소해진 '나'이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되어가는 나를 김수영은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올려놓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선이 너무나 생생하고, 신선해서 마치 금방이라도 바닷속에서 끄집어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는 거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이토록 파괴적인 정황을 시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쓰고 있는 김수영의 정직함은 무시무시하지만, 그가 느꼈을 위선과 암울한 시대가 또한 그를 사정 없이 내몰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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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例6
: 앤 선더스 아가에게

- 마종기


내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환자는 늙으나 어리나 환자였고, 내가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기계처럼 치료하고 그 울음에 보이지 않는 신경질을 내고, 내가 하루하루 크는 귀여운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서는 연민의 작은 꽃 한 번 몽우리지지 않았지.


가슴뼈 속에 대못 같은 바늘을 꽂아 비로소 오래 살지 못하는 병을 진단한 뒤에 나는 네 병실을 겉돌고, 열기 오른 뺨으로 네가 손짓할 때 나는 또다시 망연한 나그네가 되었지.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 나는 드디어 귀엽게 살아 있는 너를 보았다. 아, 이제 아프게 몽우리졌다. 네 아픔이 되어 낮에도 밤에도 속삭이는구나.


미워하지 마라 아가야. 이 땅의 한곳에서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패기 있는 철학자들의 연구를 미워하지 마라. 너는 그이들보다 착하다. 나이 들어 자랄수록 건망증은 늘고,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은 어두워진단다. 그이들은 비웃지만 아가야, 너는 죽어서 내게 다시 증명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


*

마종기 시인은 시인이자 의사이고, 의사이자 시인이지만 그 전에 한 아이의 아비였고,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다. 마종기 시인의 "證例" 연작 시리즈는 그가 시인이기 전에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란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준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주석을 다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지만 마종기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끝 연에서 이 시는 세상을 다 알고 경험한 척하며 철학자연하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보이고 있다. 도서관에 앉아 책만 들척이며 세상의 진리를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글을 쓰고, 세상의 만사를 자기식대로 난도질하는 지식인들이 나는 우습기까지 했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내가 의대생으로 해부에 매달리면서 일어났다. 졸업 후에 밀어닥친 의사 생활 중에 더 두드러지게 되었지만, 문학이라면 적어도 그 당시 상당히 유행하던 행동주의 문학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행동이 없이 관념의 추상 언어로만 지껄이는 문학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체험을 통한 현장의 은유야말로 살아 있는 시를 만드는 새로운 질료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진정성을 갖춘 문학이라고 믿었다. 행동이 밑바탕이 되지 않는 문학은 공중누각이고 세상에 필요 없는 문학이라고 믿었다. 골방에만 박혀서 하루하루의 질박한 삶을 외면하는 의식의 조작이 아니고,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것만이 진정한 시의 길이라고 믿었다."


'진정성'이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다시 말해 정의되지 못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쉽게 내뱉어지고 쉽게 사용되는 말이다. 또 다시 말해 '진정성'이란 말은 쉽게 정의되지 않으며 어쩌면 정의될 수 없는 말이란 뜻이다. 진정성이란 말 자체가 본디 한자어에서 왔을 테지만 이 말의 '진정'이 명사 '眞情'인지 부사 '眞正'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내 경우엔 명사가 아니라 부사 '진정'이란 의미에서 "거짓이 없이 참으로"란 뜻으로 받아들인다. 진정성을 영어로는 'authenticity'라고 흔히 번역하는데 이 말은 진정성보다는 '진본성'에 더 가까운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때보다 '진정성'이 강하게 요구되고, 자주 사용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 말의 참 뜻을 아직 모르며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란 말이다.


비록 시인은 철학자들의, 지식인들의 창백한 지식과 이성이 빚어내는 냉정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 역시 앞의 첫 연에서 의료시스템의 한 부분을 차지한 도구로서의 자신을 나무라고 있다. 그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그 역시도 알지 못했던 자각이다.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에야 비로소 시인은 환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앤 샌더스'라는 이름을 가진 "귀엽게 살아 있는 너"로 재인식하게 된다. 마종기의 이 시가 지닌 진정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이 자각, 그 역시 창백한 지식과 이성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성찰에서 출발하는 것일 게다. 그가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자각도 아마 그것이었을 게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진정성은 그의 말대로 결국 '행동',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행동"만이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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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찾기

- 옥타비오 빠스(O
ctavio Paz)


나의 몸에서 너는 산을 찾는다
숲 속에 묻힌 산의 태양
너의 몸에서 나는 배를 찾는다
갈 곳을 잃은 밤의 한중간에서

*

나는 정신의 사랑보다 몸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랑의 유물론'쯤이라고 해두자.

이 말은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도 여전히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난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 미칠 것 같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옥타비오 빠스의 "서로 찾기"가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다.

몸의 사랑.
여자는 남자에게서 산을, 남자는 여자에게서 배를 찾는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 머무를 곳을 찾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 떠날 곳을 찾는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애타게 찾지만 만남은 잠시고 엇갈림은 영원히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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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飛行雲)


- 오세영


한낮

뇌우(雷雨)를 동반한 천둥번개로
하늘 한 모서리가 조금
찢어진 모양
대기 중 산소가 샐라
긴급 발진
제트기 한 대가 재빨리 날아오르더니
천을 덧 대 바늘로 정교히
박음질 한다.


노을에 비껴

하얀 실밥이 더 선명해 보이는
한줄기 긴
비행운(飛行雲)



출처 : 『황해문화』, 2009년 봄호(통권63호)


*


42년생 시인에게 천진(天眞)하단 말은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갈수록 오세영 시인의 시가 천진해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건 나이가 들면서 더욱 천진해지는 시인들이 있으며 그 모습이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시인이기에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에 오세영 선생의 시(詩) 3편을 받았는데 모두 비슷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이었기에 당신의 시를 받고 싶었는데 소원 풀었다. 이제는 퇴임하여 명예교수로 계시지만 당신이 문학하는 학자로 펼쳐보이던 문학관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시인으로서의 당신에게는 언제나 동의할 수 있다.


노년의 천진한 시들도 여전히 빛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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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비

- 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메이는 소리

*

사는 게 비루하다고 여기다가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그래도 좀 낫다 싶어
한숨을 푹 내쉰다

살아야 할 날이 어제보다 하루 줄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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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구렁달


-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


어릴 적엔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들을 죄다 뜯어 고치겠다는, 아니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부터 싫든 좋든 나도 그 세상 풍경의 일부란 사실을 알게 되고, 내가 이 세상의 문제들에 책임질 나이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늙어가기 시작했으리라.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은 10개월이 지나면 끊어지지만 과거 성장하며 겪어왔던 어려움들은 어느 순간 극복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탯줄처럼 줄곧 내 뒤를 따라왔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시들고 찌든 우리 얼굴처럼 시든 갈구렁달이 줄곧 내 뒤를 따라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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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

- 윤성학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조붓한 산길을 오붓이 오르다가
그녀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가릴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편에 세워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가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출처 : <창작과비평>, 2003년 여름호(통권120호)



*

내외(內外). 한자어 뜻풀이대로라면 안팎이다. 그런데 이 안과 밖은 떼어놓을 수도, 한데 있기도 까다롭다. 그래서 남녀 사이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피하는 일 역시 내외(內外)한다고 말한다. 너무 가까이, 너무 멀리도 안 된다. 딱 그 정도 거리를 유지하기. 세상의 모든 슬픔은 어쩌면 그리 시원하게 내통(內通)치 못한 탓. 내 여자가 일러주는 대로 딱 그만큼만 만날 있다가는 “벼엉신~”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혹은 일러준 대로 하지 않아서 “음흉한~”소리를 듣고 ‘쬧겨’날 수도 있으니 남정네들아 기회가 오더라도 오금이 저리도록 적당히, 적당히 내외통(內外通)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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