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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함순례 - 벽 안에 사람이 산다 벽 안에 사람이 산다 - 함순례 도배 새로 하면서 감쪽같이 그를 봉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고요를 흔들고 가는 그가 슬쩍 귀찮았던 것인데 옥상 난간엘 두 번씩이나 오르내린 사춘기 아들 쓸어안고 먹장처럼 깜깜한 날 벽지 한 장의 긴장을 뚫고 또 그가 왔다 꽃무늬 가면을 쓰고 저리 또렷한 소릴 내다니! 굵고 지긋하신 목소리가 내 안의 둥그런 물관 같은 피붙이, 어린 슬픔을 파고들어서 얼굴 없는 그를 아득히 올려본다 매번 차임벨로 노크를 하고 헛기침 두어 번으로 가다듬지만 밤잠 설친 듯 목소리 탁할 때 있는 걸 보면 그에게도 거둬야 할 식솔들이 있으리라 그러고 보면 나는 딴살림 휘파람 불며 스쳐가도 그만인 내 눅진한 살림의 안쪽으로 줄기차게 말을 건네는 저 지극함은 무언가 딴살림 챙기며 늙어가는 그의 본색.. 더보기
신경림 - 파장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얼마 전 고등학교 후배이자 대학 동기 녀석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간만에 대학 동기들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어떤 시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으로부터 느끼기 전엔 참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는데 신경림 선생의 시 이 내게 그러했다.. 더보기
문정희 - 남편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일 중 제일 견딜 수 없는 건, 아내 이외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죄가 된다는 거다. 그리고 더 견딜 수 없는 건 그건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감기 같은 거라는 사실이다. 알아도.. 더보기
허수경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허수경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 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룡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 더보기
진은영 - 70년대산(産) 70년대산(産) - 진은영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출처 :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2008년 * ▶ 영화 중에서 주변에 복서를 했던 친구가 있던 덕에 잠깐이었지만 권투를 배웠다. 프로선수로 한두 번 링에 오른 뒤 권투하고는 영영 이별하고 뱃사람이 되겠다고 해대에 진학했다가 그것도 싫다고 그만두고 치기공사가 되어 이제는 이름조차 잊혀졌다. 나는 그에게 권투를 배우며 약간이나마 인생을 알 것 같았다. 상대에게 가장 빠르게 가 닿을 수 있는 주먹질은 스트레이트, 곧게 내뻗는 주먹이다. 어퍼컷이 멋있어 보이지만, 훅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권투에.. 더보기
정호승 -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읽을 때 만해도 나는 이 시를 받아들이기가 참 곤란했다. 그만큼 내가 날이 서 .. 더보기
고은 - 어느 소년 소녀의 사계가(四季歌) 어느 소년 소녀의 사계가(四季歌) - 고은 봄 네 작은 무덤가에 가서 보았네 가장 가까운 아지랑이에 낯선 내 살의 아지랑이가 떨었네 겨우내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로 보이는 그 마을의 슬픔 버들옷 뿌리 기르는 시내가 흐르네 어느 날의 봄 비오는 괴롬을 마감하려고 내 봄은 어린 풀밭가에 돌아왔는지 봄에는 네 무덤조차도 새로 있었네 그렇지만 나는 무언가 좀 기다리다 가네 여름 네 어릴 때 가서 살아도 아직 그대로인 한 달의 서해 선유도(仙遊島)에 건너가고 싶으나 네가 밟은 바닷가의 단조한 고동소리 네 소라껍질 모아 담으면 얼마나 기나긴 세월이 그 안에서 나올까 나는 누구의 권유에도 지지 않고 섬을 그리워하네 언제나 여름은 어제보다 오늘이고 첫사랑과 슬픔에게 바다는 더 푸르네 옛날의 옷 입은 천사의 외로움을 .. 더보기
고정희 -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 더보기
도종환 - 늑대 늑대 - 도종환 너는 왜 길들여지지 않는 것일까 편안한 먹이를 찾아 먹이를 주는 사람들 찾아 많은 늑대가 개의 무리 속으로 떠나가는데 너는 왜 아직 산골짝 바위틈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불타는 눈빛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 번개가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달려가던 날카로운 빛으로 맹수들을 쏘아보며 들짐승의 살 물어뜯으며 너는 왜 아직도 그 눈빛 버리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바람을 피하지 않는 것일까 여름날의 천둥과 비바람 한겨울 설한풍 피할 안식처가 사람의 마을에는 집집마다 마련되어 있는데 왜 바람 부는 들판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오늘은 사람들 사이에서 늑대를 본다 인사동 지나다 충무로 지나다 늑대를 본다 늑대의 눈빛을 하고 바람부는 도시의 변두리를 홀로 어슬렁거리는 늑대를 본다 그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더보기
이생진 - 사람 사람 - 이생진 어떤 사람은 인형으로 끝난다 어떤 사람은 목마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생식으로 끝난다 어떤 사람은 무정란으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참 우습게 끝난다 * 율곡 이이는 에서 배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황되게 뜻을 높고 멀리하여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긴다. 특별한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 자신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활한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으랴." 이생진의 시 은 진술로만 이루어진 시다. 진술로 이루어진 시는 교훈적인 느낌이 강한데, 이 시는 서글프다. 그 어떤 사람이 '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시(詩)의 기본은 '묘사'다. 묘사만으로도 시는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시를 처음 써보는 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