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일 중 제일 견딜 수 없는 건, 아내 이외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죄가 된다는 거다. 그리고 더 견딜 수 없는 건 그건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감기 같은 거라는 사실이다. 알아도 막을 수 없고, 한 번 걸렸다고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호되게 앓아도 다음에 또 걸리는 이 질병같은 사랑...  

사람은 왜 이렇게 생겨먹은 걸까? 아니, 사랑은 왜 이리 막 되어먹은 걸까? 라고 물어야 할까?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면서 결국 내 여자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로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라고 손꼽는 건 별로 달갑지 않다. 남자는 죽을 때까지 짐승이니까, 언제나 자기가 왕이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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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