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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최승자 - 삼십세


삼십세



-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릎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릎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시인선16, 1989>
*

언젠가 안도현 시인의 초청강연 자리에서 그가 말하길 시인 김소월은 '진달래'를 가졌고, 김용택은 '섬진강'을 가졌는데, 자신은 기껏해야 '연탄재'뿐이라고 말하며 웃는 것을 보았다. 김소월이 어찌 진달래만으로 기억되겠느냐만 더 오랜 세월이 흘러 나무의 부드러운 부분들이 깍여나간 뒤 남는 것이 옹이뿐이듯 시인의 작품들도 결국 세월의 긴 마모를 견디다 마지막엔 옹이만 남게 될 것이다. 이 시 "삼십세"를 다시 꺼내 읽으며 문득 안도현 시인의 에피소드가 떠오른 것은 최승자의 여러 명작 시들 가운데 세월의 힘을 가장 오래도록 견뎌낼 만한 첫 구절이 바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의도된 오독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시를 다시 꺼내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시의 첫 구절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저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러운' 서른 살은 온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서른'과 '서러운'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볼 거리이지만 이 시를 덮고난 뒤에도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그렇게 기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어느 새 구호가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한 여자랑 혹은 한 남자랑 살기엔 참 지독하게 긴 시간이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수없이 많은 여자들과 연애를 하고, 그들을 농락하고, 농락당하고, 배신하고, 배신당하며 살고 싶다. 인생에는 사랑이나 연애 혹은 섹스 말고도 소중한 무엇인가가 많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더 소중한 일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보다 더 행복하고, 즐겁고, 그리하여 지독(至獨)하며 치명적인 일은 '아마(?)'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나이 서른. 결혼이 연애의 무한한 가능성을 닫아버린 결과물이듯(혼인 계약의 정절을 지킨다면 말이다) 인생에서 '서른'이란 연령대는 참 애매한 나이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인간의 연령에서 애매하지 않은 나이가 있으랴. 이 말은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애매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니코스 카찬차키스나 에밀 시오랑쯤 되는 내공을 쌓아두어야 한다. 어느 때 죽더라도 후회할 것이 없는 사람이야 말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니까. 최승자의 두 번째 연은 온통 죽음에 대한 묘사와 상징으로 가득하지만, 만약 이대로 끝났다면 이 시의 묘미인 극적인 반전의 재미는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최승자는 냉소한다. 공자의 말처럼 삶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대하여 말할쏘냐 풍이다. 그렇다고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시는 삶과 죽음 사이에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나이, 서른에 대한 시인의 자조이다.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해부하는 물고기처럼 혹은 개구리처럼... 시인은 자신의 팔다리조차 이토록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시인 최승자는 이 시 한 편으로 "삼십세"를 영원히 자기 것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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