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금 전 긴 복도에서 소독약 뿌리는 사내와 마주쳤다. 그는 긴 복도 회랑에 양철 소독통을 들고 복도의 양 옆 벽에 무색의 소독약을 뿌리며 나와 지나쳤다. 나는 이 글을 씀으로써 그를 잠시동안 기억하겠지만 그는 영국식 검은 군용 스웨터에 짙은 회색 목도리를 칭칭 감고 스쳐간 나를 아마도, 아마도 기억하지 못할 테지.

몇 해전부터 열화당에서 새로운 사진집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시리즈로 열 권의 사진집 중 도로시아 랭과 유진 스미스, 가브리엘레 바질리코 등의 사진집을 새로 출간했다. 포장을 뜯고 집에 들고 가서 읽었다. 옛날 열화당 사진문고 시리즈에 비해서는 월등히 뛰어난 인쇄 질과 판형, 그리고 자세한 캡션들, 비평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인쇄잉크 냄새를 킁킁 맡으며 나는 신간들이 풍기는 예리한 냄새, 그것은 마치 추운 날 햇빛에 잘 내어 말린 빨래의 차갑고, 뽀송뽀송한 느낌 같은 것이다. 종이는 아직 손때가 묻지 않아 한국은행에서 갓나온 지폐처럼 빳빳하고,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미지의 사진들이 나의 시선을 교란한다. 

그리고 나는 낸 골딘의, 나는 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름이 매우 낯익음에 대해 의아해 한다. 그 낯익음은 파리대왕의 작가. 윌리엄 제랄드 골딩 때문이었다. 이름 뒤에 g자 하나의 차이다. 낸 골딘의 사진집을 들고 복도를 서성이며 그녀의 사진들을 본다. 우선 그 풍부한 디테일에 놀라고, 놀라운 스냅샷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그녀의 포트레이트 사진조차 스냅샷의 기운이 느껴진다. 낸 골딘의 사진집을 보면서 오랫동안 업무 이외에 나의 즐거움을 위한 봉사는 그만 둔 카메라를 꺼내 다시 만지작거린다.


우습지 않은가.

낸 골딘의 사진을 보며 풍성하다는 표현을 하다니..... 친구의 성교 장면, 동성애자, 이성애자, 메마르고 때로 앙상하기 까지 한 인물들의 모습을 담아낸 그녀의 사진에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디테일을 말한다. 사진에서 드러나는 육신은 이미 인간의 몸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피사체.................. 사진이 만약 인간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면 사진은 다만 인간의 앙상한 육신을 담아 올린 요리 접시가 아닐까. 그녀의 사진이 풍성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영혼이 혹은 감정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진과 그녀의 인생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자살한 언니. 히피 생활. 나도 그런 생활을 염두에 둬 본 적이 있다. 되는 대로 자라난 수염과 빡빡 민 머리. 사람들은 거친 미소에 흠칫 놀라 뒤로 한 발씩 물러난다. 아니 그들은 물러나는 것이지만 내게는 그들이 밀려나는 것으로 혹은 물리치는 것으로 보인다. 높은 성은 그 높음, 위세당당함으로 인해 늘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공격 본능을 자극하지만 바닥에 푹 퍼진 더러운 오물의 진창은 그 낮음으로 인해 늘 사람들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방어하도록 만든다.

사람에게는 과연 희망이 필요한가? 아니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 아니라 환상인가? 환상이 필요한 사람은 환상이 허구임을 깨닫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것은 라 그랑드 일루젼이다. 인간은 필요하기 때문에 환상을 만들어간다.나는 환상이 깨질 때 비통해 하는 인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환상이 깨졌다고 자살하는 인간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는 또다른 환상을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또다른 환상을 따라 함께 뭉친다.

환상을 만드는 인간들이란 대개 간교하고 세속적이다. 그들은 잠시도 고통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늘 환상에서 다른 환상으로 끊임없이 이동해 간다. 마치 세렝게티 평원을 달리는 누 떼처럼..... 환상은 누떼가 생존본능을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생존본능이다. 그래서 희망은 늘 곤란하다. 그래서 희망에 환상이 덧 대어지면 종교가 된다. 그런데 소독약을 뿌리고 지나간 사람은 날 기억할까?

 


낸 골딘(Nan Goldin)은 뉴 다큐멘터리(new documentary) 사진으로 매우 유명한 사진가이지만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번이 사실상 거의 처음인 것으로 안다. 그녀의 사진에서 풍겨나오는 풍성함이란 사진 속의 피사체들과 하나의 삶 속에서 살아갔기 때문이다. 피사체는 그녀를 포토그래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하나의 풍경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사진이 담고 있는 풍경은 황량하나 그녀의 사진에서 인물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다. 가령 소독약을 뿌리고 지나친 사내는 날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그와 함께 십년째 소독약을 뿌리고 한집에서 거주하고  그의 생활 속 깊은 일부가 된다면 나는 그를, 그는 나를 기억할 것이다. 낸 골딘의 사진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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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1863-1928)


자화상 - 아뜰리에, 1905, 베를린국립미술관



독일 화가, 조각가이며 판화가, 바이에른의 테텐바이스 태생. 뮌헨에서 공부하였으며 1893년 뮌헨 분리파의 창립 회원이 되었다. 1895년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칸딘스키, 클레를 가르쳤다. 슈투크는 또한 베를린, 드레스텐, 스톡홀름, 밀라노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었다. 19세기 말에는 아르 누보, 즉 유겐트슈틸 운동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으며, 뮌헨의 자택을 통해 유겐트슈틸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장식적이고 평평한 색채를 사용해 그림의 분위기를 조절한 것은 어느 정도 후대의 발전을 예시하는 것이다. 슈투크는 지금은 잊혀졌지만 생전에는 높은 명성을 누렸다.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 천국을 지키는 파수꾼, 1889, 250 × 167cm


프란츠 폰 슈투크와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상

창세기에는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 한번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1:27)이고. 좀 지난 다음에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다. 성서에 대해 음모설을 들이대긴 우습지만 한자 한획도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간혹 이 부분에서 무언가 숨겨진 진실이 있지 않느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 죄악(Die Sünde), 1893, Oil on canvas, 945 x 595mm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였을 때, 모든 만물이 짝이 있는데 아담만 홀로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위해 흑을 빚어 여자를 만들어 릴리쓰(Lilith)라고 이름지었다. 하느님이 그녀를 아담에게 데려가자마자 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다. 아담이
“나는 너보다 윗 사람이니, 너는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 네가 밑에 누워야 한다”고 말하자 릴리쓰는“네가 밑에 누워야 한다. 우리 모두 평등하게 땅에서 만들어진 존재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들은 서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일이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자 릴리쓰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아담은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렸다. “우주의 주인이시여, 당신이 내게 준 여자가 도망간 걸 보소서.” 하느님은 즉시 세 천사를 보내어 릴리쓰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프란츠 폰 슈투크 - 관능(Sensuality), 1891, Collection Abraham Somer, Los Angeles


세 천사는 홍해까지 달려가서 릴리쓰를 붙잡았다. 그들이 그녀를 잡고 말하길“우리와 같이 가겠다면 같이 가자. 그렇지 않겠다면 바다에 빠져 죽으리라.” 릴리쓰는 하느님이 나를 창조한 것은, 오직 궂은 병으로 생후 8일 이후 아기를 괴롭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란 것을 안다. 남자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8일까지는 봐 주고 그 후에 해를 가하겠다. 그러나 여자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는 12일의 유예 기간을 줄 것이다.”라고 저주하며 외쳤다. 천사들은 완강히 저항하는 그녀를 도저히 데려갈 수 없었다.

오늘날 릴리쓰는 페미니스트들과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만, 과거의 예술가들에게도 여성상위를 주장한 릴리쓰는 매우 매력적인 여성으로 비추어졌던 모양이다. 프란츠 폰 슈투크의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여성이 릴리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여성이 인류를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게 한 이래 여성의 상징 중 하나이자 가장 징그러운 혐오의 대상으로 묘사되는 '뱀 '이 등장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도 죄악과 관능이다.



프란츠 폰 슈투크 - Wounded Amazon, 1903, Oil on canvas, Van Gogh Museum

 

서양회화에서 상당히 많이 그려지는 주제 중 하나가 '아마존의 여전사'들이지만 이들이 멀쩡하게 그려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난 거의 보지 못했다). 이들은 대개 부상당하거나 남성 전사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들이 등장하는 신화 속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 신화 자체가 여성들에 대한 경고였을 것이다. "남성에 대한 저항? 꿈도 꾸지 마라!"는 메시지...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 목욕하는 수잔나, 1913, 56,6 × 17,8 cm


'롯의 두 딸'과 더불어 르네상스 이래 서양화가들이 성서에서 가장 많은 모티브를 따오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목욕하는 수잔나>는 구약성서 다니엘서 13장 1절에서 64절에 나오는 이야기로 부유한 유대인의 아내 수잔나는 정원에서 목욕하는 것을 즐겼다. 이것을 안 두 사람의 늙은 장로가 이것을 몰래 엿보고는 자신들과 관계하지 않으면 그 집의 남자 몸종과 관계했노라고 소문을 내겠다고 협박했다. 물론 결백한 수잔나는 이 협박을 물리쳤고, 장로들은 수잔나가 불륜행위를 했다고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 당시 간통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예언자 다니엘은
"당신들은 증거와 심문 없이 이스라엘의 딸을 정죄하였소. 두 장로가 수잔나에게 거짓 증언을 하였소."라고 하였다. 다니엘은 그들에게 "두 증인을 각각 데려오시오. 내가 직접 들으리다"고 했다. 다니엘은 장로들에게 각각 수잔나가 간음한 현장의 나무 밑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한 장로는 소나무에로 데려갔고, 다른 한 장로는 느릅나무로 데려갔다. 거짓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환호하였다. 두 장로는 모세의 율법대로 처벌받았다.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 목욕하는 수잔나, 1913, Gouache, Papier, 63 × 25 cm



물론 이 이야기는 현명하고 정당한 재판 절차를 통하여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야기이지만 중세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그 같은 '정의'로운 교훈 보다는 아름다운 여인의 나체를 훔쳐보는 두 장로(남성의 시선)와 여인의 나체에 주목했다. 1550년대의 틴토레토(Tintoretto), 반다이크(Van Dyke), 렘브란트에 이르는 많은 화가들이 <목욕하는 수잔나>를 그렸지만 당시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 작품들은 사실상 포르노 취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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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터넷에 홈페이지란 것을 만들 생각을 했을 무렵의 나는 HTML은 커녕, GIF, JPG란 용어는 몰랐다. 내가 아는 건 오로지 HWP파일뿐이었다. 무턱대고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네이버에서 계정을 받았고, 당시 홈페이지는 네이버에서(현재 블로그가 그런 것처럼) 여러 이미지들 가운데 선택하여 메인 이미지로 만들 수가 있었는데, 이 그림이 내가 맨처음 올렸던 그림이다.

당시엔 이 그림 속의 소년이 어린 시절의 나와 가장 닮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지금 다시 보면 정말 어렸을 적의 나와 일부는 닮았을 수도 있었단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난 저렇게 웃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어쨌거나 문화망명지의 첫 타이틀 롤을 맡았던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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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30일, 최경태는 ‘여고생-포르노그라피2'란 이름의 전시회를 열었다가 결국 이 문제로 6월 2일 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검찰에 고발되었다.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된 재판은 “단순한 누드가 아니고, 여고생의 오랄 등 보는 이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는 판결문과 함께 화가에게 벌금 200만원, 음화로 지목된 작품 31점의 압류 소각 결정이 내려졌다. 2002년 8월 음화 전시판매, 음란문서 제조 교사 판매 반포죄가 적용되었고, 대법원 상고는 기각되었다.

2003년 01월 03일 오후 01시. 여고생 그림(음화) 31점 압류 집행, 소각예정, 종로경찰서 형사 4명이 충북 음성 작업실 겸 집을 방문. 눈이 이렇게 오는데 ... 자식들을 보내자니 마음이 아픕니다. 나 혼자 ... 소주 한 잔 합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창 밖 눈을 보며 홀짝 홀짝, 음악은.....
에디트 피아프.... 2차 대전 프랑스 지하카페 분위기입니다. - 최경태

생각해보니 그 무렵 인사동 거리를 걷다가 우연치 않게 최경태의 '여고생-포르노그라피'란 전시회 포스터를 발견하고 허탈하게 웃은 적이 있었다. '이제 벗겨먹다 못해 여고생까지 팔아먹냐?'란 것이 아마 그 무렵의 내 생각이었던 듯 싶은데, 다른 한 편으론 이 작가의 작품 세계가 과연 거리에서 발견한 포스터 한 장으로 즉흥적으로 몰염치한 인간으로 매도해도 좋을 만한 사람인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역사 이래 훗날 진지하게 다시 살펴보아야 했던 예술치고 당대에 사회적 물의가 아니었던 적이 또 얼마나 있었던가.  


- 그의 작품들은 대중의 평가 이전에 법에 의해 평가받았고, 결국 소각되고 말았다. 위의 작품은 인터넷에 유포되어 있는 작품으로 중요 부위가 모자이크 처리 되어 있으나 도리어 그것이 부도덕한 사회의 단면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듯 하다. 


최경태가 이런 사건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기 전까지 그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과거에 활동했던 경력을 통해 이른바 '민중화가'의 면모로서 기억하는 이들이 좀더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그가 참여해왔던 그룹전들을 살펴보면 그의 이런 면모는 더욱 두드러진다. '작업동인1984', '인간시대동인전', '리얼리즘동인전', '젊은의식전', '한강목판화전', '메시지와 미디어전', '오늘의 삶, 오늘의 미술전', '동학혁명, 새야새야파랑새야전', '한강미술관10년전', '독립예술제', '02조국의산하전','굿디자인페스티벌', 'NO CUT전', '죽음앞에 선 인간전', '10인의 모색전', '오늘의 청년전', '여기는 한국전', '형상미술제', GIRL'S DON'T CRY 시부야전', '커버스토리전', '신나는 만화세상, 움직이는 미술관전', '국가보안법폐지전', '불량아트(섹스는 정치다)전' 등이 있다. 최경태는 인천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PROJECT SPACE 35(뉴욕), 여고생-포르노그라피2(보다갤러리), 코리아판타지(도올갤러리), 금호미술관, 한강미술관 등을 비롯해 13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에로티시즘 21C(아트선재센터), 금기의 아름다움(두산아트센터), 굿티아인페스티벌(코엑스), NO CUT(갤러리 사비나) 메시지와 미디어전(관훈미술관) 등 10회의 그룹전과 14회의 커버스토리전을 가졌다.

미술평론가 김종근은 그의 작품들이 소각되어 버렸다는 최경태의 참담한 소회를 읽고 "기억 속에 그와 함께 보냈던 1980년대를 회상했다. 20년 이상 화가와 비평가로서 그와 만났던 순간들을 기억하면 더욱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함께 겹쳤다. 80년대 초반 그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팔리지도 않는 그림들을 그리면서 초라하고 궁핍한 시대를 살았다. 나는 <인간시대> 그룹 동인을 만들어 예술을 통한 인간성 회복을 호소했고, 그는 우리 시대 민중들의 슬픔과 억압과 자유 그리고 민주화 시대의 희망에 대하여 노래했다. 당연히 그 그림들은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눈치 보는 사람들>, <전사>, 그리고 <소주 한 잔> 등의 목판화를 통해 소외받은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놓치지 않고 그려냈다."라고 회고한다.

- 최경태_소주 한잔에 웃을 수 있는...,_목판화_26×35cm_1994 (이미지 출처 : neolook.com)


그의 작품들이 불타 사라진 뒤에도 작가는 여전히 스스로 난 여전히 포르노그래피 중독자다. 그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고, 이를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며 과거 음화로 지목받았던 스타일의 작품들을 그리고 있다. 과연 그의 작품들은 쓰레기처럼 소각되었어야 마땅한 작품이었을까? 우리는 브레히트의 시 <분서>를 기억한다.

분서(焚書)

위험한 지식이 담긴 책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리라고
이 정권이 명령하여, 곳곳에서
황소들이 끙끙대며 책이 실린 수레를
화형장(화형장)으로 끌고 왔을 때, 가장 뛰어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추방된 어떤 시인이 누락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화가 나서 나는 듯이
책상으로 달려가, 집권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그는 신속한 필치로 써내려갔다.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그렇게 해다오! 나의 책을 남겨 놓지 말아 다오! 나의 책들 속에서
언제나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너희들이 나를 거짓말쟁이처럼 취급한단 말이냐! 나는 너희들에게 명령한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
<全文>


최경태의 작품들이 한 군데 모여 불타는 동안, 한때 그가 속했던 진보진영의 예술가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나의 작품도 함께 불태우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내가 둔감했던 탓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1980년대 엄혹한 독재 통치 기간 중 압수된 그림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이들 정치적이고, 선동적인 작품들에 비해 최경태의 음란(?)하게 정치적이고, 자극적으로 선동적인 작품들에 대한 압수와 소각 조처에 항의하기엔 특히 명분이 약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여전히 불편한 그림들을 그려대고 있는 최경태가 1996년 이후 제도권으로 들어와 이제 막 명예와 부를 누리게 된 민중미술 화가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경태 자신도 과거의 흔적이나 과거 자신이 했던 작업들의 공로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여고생 포르노그라피 작업들이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을지 모를 정치적 의도, 정치성이라고 생각할지 모를 오해(?)에 대해 멀어지려 한다.

“내가 ‘여고생’을 그림의 소재로 선택한 건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야. 나는 단지 성숙되지 않은 여고생의 깔끔한 성기가 좋을 뿐이지. 물론 대한민국의 모든 여고생들의 성기가 그렇게 깨끗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대다수는 성적 경험이 없을 테고, 아저씨들은 그 ‘처음’같은 느낌을 갈구하고 있지 않나 싶어 실재로 그녀들은 그것으로 경제 활동을 하며 물질적인 욕구를 채우고 있고, 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아저씨들은 그녀들에게서 그 처음 같은 느낌을 사고 보상을 해주고 있지 그게 뭐 잘못된 거지? 왜 그녀들과 아저씨들을 단속하는 거지? 미성년자가 아닌 여성들과의 매매춘은 괜찮은 건가? 단지 ‘미성년자’라는 이유만으로 여고생들의 경제 활동을 규제하고 있는 이 땅의 도덕과 법은 그렇게 자신만만한가? 그녀들도 핸드폰을 가져야 하고 이쁜 것이 최고가치인 사회에서 그녀들도 이쁜 옷과 악세사리를 사야하는데 어떻게 하니? 가진 거라곤 ‘풋풋한 몸뚱아리’ 밖에 없으니...."


그는 이들을 그리면서 스스로 포르노 작가이자 포르노 중독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도리어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여고생 매춘이 만연한 사회, 그 나체에 성적 호기심과 흥분을 느끼는 나 자신과 우리들을 풍자한 작품이다. 우리 사회 자체가 싸구려 포르노와 다르지 않다. 포르노 그림은 인간다운 삶이 상실된 시대를 견뎌내는 내 절망의 표현이다." 그는 자신의 성적 호기심과 흥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 창작에 있어 성적 호기심과 흥분보다 더 큰 동기는 바로 '절망의 말 걸기'라는 사실이다.
화가 최경태는 항소하였으나 2002년 5월의 항소심 결과 역시 피고인의 그림은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예술로 승화되지 못한 점이 인정된다는 등의 사유로 항소마저 기각당한다. 화가는 이를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 당했고, 2003년 1월에는 ‘여고생-포르노그라피2’ 전시회의 작품들은 모두 압류 후 소각처리 되었다.


- 구스타프 클림트의 제자이자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화가 에곤 쉴레의 작품 <검은 머리의 소녀(
Girl with Black Hair)>, 1911, Watercolor and pencil on paper, 56.2 x 36.7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 Gift of Galerie St. Etienne.


- 에곤 실레, 꿈 속에서 보다, 1911, 수채와 연필. 하긴 오늘날엔 중요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에곤 실레의 작품들 역시 당시엔 불태워진 적이 있다. 에곤 실레에 대해서는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에곤 실레(http://windshoes.new21.org/art-egon.htm)편에 좀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여고생의 오럴섹스를 묘사한 최경태의 작품은 음란하다, 그것도 지독하게. 하지만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최경태의 포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음란하다고 지목하고 불태우는 음란한 사회에 대해서도, 여기에 뭔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근엄한 음란에도 동시에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고생들은 시니컬하다. 술자리 음담패설에 등장하는 닳고 닳은 창녀의 한 마디, '귀찮으니까 빨리 싸고 나가'줬으면 하는 그런 표정 말이다. 어떤 이는 이것만으로도 그의 작품은 관객과 사회의 관음증적 시선에 도전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 작품들은 음화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 정도 수준에서 타협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여고생들의 보지가 아름답더라, 그렇게 말하면 정말 안 되는 거냐?’고 그렇게 반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 최경태 / 'ADARASI FANTASY' 연작 중에서(2008)


포르노(porno)라고 약칭되기도 하는 포르노그래피는 그리스어로 창녀를 의미하는 ‘포르네(porne)'와 ’쓰여진 것(graphos)’의 합성어이다. 로마인의 시조들이 이웃 나라인 사비니 여성들을 "약탈" 혹은 "강간"하여 그네들의 로마를 만들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전설 혹은 역사다. 하기사 로마의 건국자가 헬레네를 납치했던 전력이 있는 트로이 출신이란 걸 고려해보면 이런 여성 약탈이 로마인들에게 새로울 것도 없을 거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인류 최초의 포르노그라피"란 저런 개선문, 승리를 표현하기 위해 제작된 개선문의 조각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노예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모르겠으나 여성은 전쟁의 가장 뛰어난 전리품 중 하나였다. 영화 트로이에서 영웅 아킬레스와 아가멤놈의 주된 트러블 중 하나가 전리품으로 탈취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것이 우연은 아니다. 전쟁은 아무리 고대 사회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전투에 참여하는 이들은 죽을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런 젊은이들의 용맹을 고취시키기 위해 고대 공동체는 젊은이들의 용기를 북돋는 다양한 장치들을 준비한다. 물론 교육적인 측면까지 고려되었을 테지만, 궁극적으로 제시된 것들은 약탈과 살인, 방화 그리고 강간이었을 거다.


속된 말로 예비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군복의 힘을 빌어 평시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들을 과감히 해치우고 마는 것, 가령 노상방뇨, 주정, 희롱 따위를 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인간됨이 그런 탓도 있지만, 고대 사회 이래로 전사들에게 허용되던 일탈행위의 전통이 고스란히 전해진 측면도 있다. 고대 사회는 그런 젊은이들의 만용을 부추기기 위해 개선문 혹은 승리의 장식들에 강간의 이미지, 약탈의 이미지들을 자랑스럽게 새겨넣는다. 그것이 인류 최초의 포르노그라피이다. 개선문에서 하늘로 곧추선 남성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것처럼, 마야 린의 전몰자 기념비에서 대지에 드러누운 여성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 최경태_눈을 떠라!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1990(이미지 출처 : neolook.com)


많은 사람들이 예술의 의미에 내포된 의미 중 하나가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가 생성된 것은 예술의 장대한 역사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가장 최근에 두드러진 일부의 현상일 뿐이다. 예술의 출발 자체가 원시시대엔 사회적 통합과 주술적인 의미였고, 중세와 근대에는 지배권력의 각광받는 사생아였을 뿐이다. 예술이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고, 지배권력을 풍자하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고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 혹은 그런 의미를 부여받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현상이다. 그 이전 시대에는 극히 불우한 몇몇 예술가들의 사례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 불우한 예술가들의 경우조차 정치적 의도가 앞선 결과이기 보다 그들의 충동이 사회적 통념과 배치된 결과라는 것이 좀더 사실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포르노그라피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도 그런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포르노그라피를 그리면 안 되는 것이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포르노로 소비하든, 작품으로 소비하든 대중이 알아서 그냥 소비하도록 내버려두면 안 되겠느냐고 말이다. 인터넷으로 '최경태'를 검색하다보니 이런 말이 있었다.


"최경태라는 분이 여고생 교복을 입힌 모델을 대상으로 포르노그라피를 그렸다가 기소당해서 그림 31점을 소각당하고 벌금 200만원을 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림들을 보고 싶은데, 글만 무성하고 그림은 별로 없다. 게다가 그림에 모자이크 처리라니 헐..."


촛불이 새로웠던 것은 대통령이나 의회, 정당이 결정하여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민주공화국의 주체라는 것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 감상의 주체는 누구인가? 최경태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차원에 앞서 그것을 불태웠다는 것에는 반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국사회에서 '진보' 혹은 '좌파'는 어느 순간부터 공자왈맹자왈하는 도덕재무장론자들이 되었다. 이래 가지고는 '뉴타운'에 이길 수 없다. 도덕적 당위로서의 건강한 삶은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받을 만 하지만 이것으로 대중을 설득하려는 사람은 늘 그 당위로 인해 발목을 잡히게 마련이다. 만약 진보진영이 계속해서 그와 같은 방식만을 고수한다면 결국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처럼 노땅들만 좋았던 과거를 서글프게 회상하는 엔딩씬을 찍을 수밖에 없다.


20대는 왜 거리에 나오지 않느냐고 야단치는 단단한 대갈통을 부수고, 그들에게도 진보가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진보적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알려줄 수 있을 때 진보는 멋진 세상을 꿈꾸는 희망이 된다. 도덕은 본래 위선하기 좋아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주자! 나는 내가 일한 만큼 즐거울 자유, 막 살고 싶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고 싶을 뿐이다. 다만 그것이 당신이 본래부터 누려야 했을 자유와 권리를 착취하거나 당신이 그걸 누릴 수 없을 만큼 불평등한 사회시스템이 원인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싸우고, 지지하겠다.  


좀더 부지런하고, 좀더 도덕적으로 살아서 좀더 부유해지고, 좀더 풍족하게 살기보다 조금 더 가난하고, 조금 덜 쓰면서 살아도 내 삶을 곰곰이 반추하며 천천히 나 살고 싶은 데로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자본주의의 냄새나는 경쟁시스템으로부터 탈락하고 싶다. 근면성실로 성공한 엘리트 대신 부도덕하고 게으른 진보주의자를 꿈꾼다. 우리들 각자가 내 돈 내고 생수를 사먹는, 나만 안전한 시스템 대신, 누구나 안심하고 수돗물을 마실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돈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이 시대에 여고생 몸 팔기를 누가 규제하고 누가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지? 그녀들이 그녀들의 몸을 가지고 ‘알바’를 하든 말든 그것을 규제할 '도덕'이 지금 우리사회에 존재하니? 티 없이 깨끗하고 탱탱한 피부.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은 듯한 핑크빛의 유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골격과 음모, 처음인 듯 한 성기를 난 그리고 싶어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여고생을 그리지 나는 솔직해지고 싶어."

한나라당에서 최고의원까지 지냈던 허태열 의원이 지난 2010년 11월 3일 같은 당 정희수 의원이 주최한 국회경제정책포럼에서 이날 강사로 함께 나온 최중경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의료까지 곁들여 그 안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관광지 조성이 꼭 필요하다"면서 "관광사업을 육성하기 위해 ‘섹스 프리’하고 ‘카지노 프리’한 금기 없는 국제관광특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끄럽지만 우리는 일본과 국교정상화 이후 1960년대~70년대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기생관광'을 중요한 관광소득으로 삼았던 적이 있다. 그래도 그때는 우리가 모두 가난했다는 변명거리라도 있지만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 돈만 벌 수 있다면 또다시 그러한 것들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집권당 국회의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 사회는 진정으로 음란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최경태에게 돌을 던지랴!

* 트위터를 비롯해 인터넷의 여러 장소에서 허태열 의원의 '섹스 프리, 카지노 프리'란 발언을 두고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오갔는데, 그가 이토록 조롱거리가 된 이유는 아마 '어륀쥐' 정권이라 불릴 만큼 정권 초반부터 영어에 대해 구설이 많았던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님께서 정작 간단한 영어표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 멋대로 콩글리쉬를 구사한 탓일 게다. 

그의 본래 의도야 '섹스(매매춘)와 카지노(도박)'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관광특구를 조성하자는 주장이었겠지만 '섹스 프리(sex free) 특구'를 만들자 했던 그의 주장을 영어로 해석하면 'tax free' 같이 'without(~이 없는)', 다시 말해 '섹스 없는', '카지노 없는' 특구를 만들자는 주장을 한 셈이니 말이다.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그런 이유에서 허태열 의원의 발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는 농담도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건 퇴폐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 지나칠 정도로 금욕적인 표현이라 도리어 문제가 된다. 아무리 정부가 제멋대로라고 해도 남녀간의 섹스 문제까지 나서서 특정지역에선 섹스를 금지하다니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거다.


만약 그가 '프리 섹스 특구'라고 했다 한들 쪽팔리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이 경우에도 문제는 생기기 때문이다(물론 애초부터 그런 발상 자체가 문제지만). 그래도 '한나라(우리나라를 말하는 거 아니다)'를 대표한다는 국회의원께서 주장한 바를 살펴보면 '섹스 = 매매춘'이란 등식이 자동으로 성립되는 셈이니 머릿속에 온통 이런 생각만 입력해놓고 살아가는 분이라면 당장이라도 발목에 '전자발찌' 채워드리고, 화학적 거세처리 해드려야 할 만큼 위험천만한 분이다(물론 물증은 없고 단순히 심증뿐이지만). 

만약 그의 주장이 본래 의미한 것이 섹스에 대한 규제 없는 특구, 그곳에선 무엇을 하든 규제하지 않는 지역(치외법권)을 의미한다면 그곳은 청소년은 물론이고 길거리에서조차 공공연하게 벌이는 애정행각이든 뭐든 규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이쯤되면 가히 '소돔과 고모라'의 한국적 재현이 될 터인데, 그래도 명색이 교회 장로님 출신 대통령을 두 분이나 배출한 이 나라의 국격에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한나라당이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규정하고 단죄해 온 이유가 고작 자유로운 매매춘을 규제하고 금지한 '매매춘 단속'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면 이건 정권재창출을 위해서도 좀 곤란하다.

** 이처럼 음란한 사회에서 최경태의 포르노그라피(?)는 너무 성스러워서 도리어 성스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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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 1900-1991, 독일)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 - 플로라(Flora)


아르노 브레커의 조각 <플로라>라는 작품이다. 그냥 이렇게만 보면 그저 그런 조각들 중 하나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아르노 브레커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나면 그저 심상하게 보일까? 아르노 브레커는 프랑스의 조각가. 아리스티드 마이욜(Aristide Maillol)을 존경했다. 그는 1943년 아리스티드 마이욜의 고향 바닐로스(Banyuls-sur-Mer)를 찾아가 그의 모습을 조각하기도 했다. 만약 이 시기가 독일과 프랑스가 평화로왔던 그런 시대였다면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 조각가의 모습을 조각하는 후배 조작가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 남겨진 아리스티드 마이욜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아르노 브레커는 나치미술의 대표적인 조각가였고, 1943년이란 시점은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해 있는 상황이었다.

독일의 조각가이자 판화가이며 건축가였던 아르노 브레커는 독일 앨버펠트에서 1900년 한 채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브레커는 지방에서 교육을 받다가 1920-1925년에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27년부터 1933년에는 파리에 거주하였는데, 이 무렵 데스피오, 마이욜 등과 교분을 나눴다. 그후 1년간 로마에 체류하였다. 1934년 독일 베를린에 정착하여 1937년 조형예술대학 교수가 되었다. 초기에는 추상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으나 로마에서 본 고대와 르네상스 미술 작품의 영향을 받아 영웅적 인물 조각과 근육이 팽팽한 거대한 전사상을 제작하였는데 이것으로 나치 독일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아르노 브레커 - 가드(The Guard)


화가를 꿈꾸었으나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군인,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된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기준으로 보아 적합한 예술가들을 선호했고, 현대미술, 추상예술 같은 분야는 유대인의 영향을 받은 더럽고, 퇴폐적인 미술로서 독일의 정신을 훼손하고 오염시키는 예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 자신과 나치즘의 이상적인 예술세계를 구현해줄 수 있는 예술가를 필요로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아르노 브레커는 히틀러의 구미에 딱 맞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아르노 브레커는 히틀러와 나치당에게서 작업실(아뜰리에)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된 거대한 성과 그의 작업에 보조할 인부들을 제공받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의 작업을 돕는 인부들은 전쟁 포로였다.

그는 전쟁 이전부터 '독일의 미켈란젤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고, 나치 독일의 국가공인예술가에 해당하는 만큼 그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나치 정권의 주문에 의한 것이 많았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이처럼 나치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전쟁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나머지 작품들 역시 전후에 대부분 파괴되었다. 다만 불행 중 다행으로 브레커, 자신은 히틀러와의 관계에 대해서만 경고를 받고 나머지 혐의들에 대해서는 죄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후 그는 미술계에서 사실상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1950년 뒤셀도르프에 정착한 아르노 브레커는 1960년대에는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하는 조각가로 되돌아왔지만 비평가들 대부분은 그의 작품에 대해 더이상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페터 루트비히는 브레커를
"정치적으로 매우 편중된 슬로건 아래 그의 업적이 격하되었지만 위대한 초상화가"라고 그에 대해 변호해주려 애썼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두상을 조각하고 있는 아르노 브레커(1940)


나치 미술은 1930∼1940년대 독일 나치스가 예술가들을 나치즘에 봉사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미술 운동으로 제2차
세계대전 즈음 독일의 독재자인 히틀러의 파시즘을 대변한 예술이기도 하다. 나치 예술가로는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루드비히 트로스트Rudwing Troost, 이보 살리거Ivo Saliger, 파울 파두아Paul M. Padua, 요하네스 슐츠Johannes Schult, 베르너 파이너Werner Peiner, 아돌프 치글러Adolf Ziegler 등이 있다.

히틀러는 '확고한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단언하고 자신의 사상을 지지하는 예술을 찬양하였으며, 1935년 나치 선전 단체장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미술가들에게 인종차별주의에 기본바탕을 두고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찬양하는 작품을 제작할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내용 또한 승리나 애국심 투쟁 혁명 등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고, 건축과 조각 등에서는 주로 신고전주의 기법이 쓰였으며, 회화에서는 노동자의 투쟁적 생활상을 강조하는 사회적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당시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를 돌아보는 히틀러와 수뇌부를 따라 함께 한 아르노 브레커

 

거대한 성 안에 만들어진 아르노 브레커의 스튜디오

나치스는 표현주의와 추상미술은 퇴폐적이라 규정짓고 작품을 압수, 소각하였으며 1937년 표현주의와 추상주의 미술 작품을 모아 '퇴폐미술전'을 개최했는데 이것은 현대미술을 한꺼번에 매도하는 행위였다. 심지어는 나치스에 동조하던 에밀 놀데Emil Nolde와 같은 작가는 표현주의 미술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제작을 금지 당하였다. 반면 그 시기에 개최된 나치 아트전은 히틀러의 권력을 찬양하는 의미에서의 전시회로서 나치스 지도자들의 대단한 찬사를 받고 독일군의 영웅주의, 땅과 소작인, 아리안 남녀의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나체를 찬양하고, 기념비적 건축물과 초상화들을 전시했다.

 

1937년에 개최된 '위대한독일미술전시회' 포스터

 

'위대한독일미술전시회'를 둘러보는 히틀러와 독일 선전상 괴벨스, 이탈리아 선전상 디노 알피에리(Dino Alfieri) 등


패전 후 대부분 폐기되었던 나치미술 작품은 1970년대 제3독일 제국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
나면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나치미술을 문화적 유산으로 간주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나치 훈장 수집가들이 있고, 나치미술을 일반 예술사 속에 정착시키려는 이들도 있었다. 한편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1974∼1975년 독일을 순회하며 '제3독일 제국의 예술-억압의 기록들'이라는 전시회를 열어 파시즘의 실상과 나치미술의 비예술성을 폭로하였고 구스타프 메츠거Gustav Metzger는 1976년 런던에서 나치예술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의「The Guard」, 아돌프 비셀Adolph Wissel의「Farm Family from Kahlenberg」(1939), 후베르트 란징거Hubert Lanzinger의「The Flag Bearer」, 카를 알비커Karl Albiker의「Relay Runners」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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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는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인류 공동체의 커다란 숙제입니다. 우리는 동족끼리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전쟁을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을 용산에 건립했습니다. 죽은 이들을 기리고, 희생을 추모하는, 그것을 기념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인정하는 공동체 최상층부에 존재하는 국가차원에서 희생자의 추도와 화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정부의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교보문고 옆 촛불 시위 장소의 기념비가 공권력에 의해 임의로 철거되는 사태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국가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추모를 통제하려 듭니다. 그것은 이런 희생에 대한 상징성을 국가가 독점하고 통제하려 드는 탓입니다.




마야 린(Maya Lin)의 "베트남전 참전 추모비 The Wall, 1982"를 증거로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의 추모비엔 전쟁의 비참하고 추악한 장면은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곳은 1959년에서 75년 사이 베트남에서 실종되었거나 사망한 5만 8천여 명의 남녀 미국인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는 검은 돌담벽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죽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이 새겨져 있는 검은 돌담엔 이를 추모하기 위해 방문한 이들이 비춰보이도록 되어 있고 사람들은 마치 "통곡의 벽"에 선 것처럼 이 자리에 서서 죽은 이들의 이름과 대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야 린이 설계한 베트남전 기념관은 백악관에 인접한 지역으로 거대한 오벨리스크인 워싱턴 기념물과 링컨기념관 등 미국의 유명한 기념물들이 수직으로 높이 세워져 있는 곳입니다. 마야 린은 이곳에 기념비를 제작하면서 무수한 반대를 겪습니다. 왜냐하면 베트남전 기념관에 국가와 미국의 패트리어트들이 원하는 애국심을 고취한다거나 그들의 자긍심을 부추겨줄 그런 상징성을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야 린은 "상실이라는 뼈 아픈 현실을 인식하게 될지라도, 상실감을 극복하는 것은 어차피 각 개인의 몫이다. 죽음은 결국 개인의 사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이 기념물의 내부 공간은 개인의 명상과 심판을 위해 마련된 조용한 장소이다." 그녀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이 미국식 애국의 선전물이 되기를 거부했고, 미국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베트남전의 상처와 과오를 직시하는 장소가 되길 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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