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번역 :  권정생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외국 시인의 시는 원래의 언어로 낭송되는 것을 듣고 싶었다. 미야자와 겐지의 시  <바람에 지지 않고>는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에서 해마다 연말에 개최하는 송년회에서 일본인 평화운동가 두 분이 낭송하는 것을 직접 들을 일이 있었다. 시의 내용이야 두 말 할 것 없이 좋았지만 두 분이 한 번은 일본어로 한 번은 한국어로 번갈아가며 낭송하는 것이 얼마나 풋풋하게 웃기던지 시를 낭송하던 본인들은 물론 낭송을 진중하게 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던 청중들마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차라리 일본어로 전부 낭송한 뒤에 다시 한국어로 낭송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다닐 때 스스로를 '바보'를 자임하는 친구가 두 명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나보다 두어 살이 많았는데 두 사람 모두 사고로 죽었다. 대학 동기들이 그 두 사람이 생전에 썼던 습작시와 에세이들을 묶고, 자신들이 추도글 한두 편을 보태 유고시집을 냈는데, 나는 두 번 모두 참가하지 않았다. 한 친구와는 대학 다닐 때 매우 절친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발간하는데 돈은 보탰지만 글은 보태지 않았다. 두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추모한다는 것이 부질 없게 여겨진 탓이 컸다.

어려서 가까운 혈육의 '죽음'을 연달아 경험한 탓도 있을 것이고, 평소 당신과 가까웠던 지인들이 조문와서 살뜰하게 해주었던 위로의 말씀들에 배반당한 기억이 있는 탓이겠지만 나는 장례식장에서 건네는 위로의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위로는 그저 위로일 뿐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남겨진 두 자식은 장례식장에서의 절절한 위로보다 좀더 현실적인 도움이 절실했다. 나는 스스로를 바보라 칭하는 이들에게 연민과 동시에 두려움이 든다. 스스로 바보라 말하기에, 바보처럼 살려하고, 바보 같은 짓을 종종 벌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보라 세상에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간보다 스스로를 적당히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더 편하다. 바보같이 착한 것들은 꼭 남에게 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미야자와 겐지는 그걸 알기 때문에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더라도 칭찬도,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나 보다. 어떤 사람이 나보고 '바보'라고 했다. 있는 마음, 없는 마음 죄다 퍼주면서도 결국 제 실속은 하나도 챙기지 못한다고 했다.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바보가 되기란 정말 어렵다.

물론, 나도 안다. 내가 그 분에게 그와 같은 칭찬을 듣기엔 너무나 많이 모자란 사람이란 것을... 그러나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한 계속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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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의 가면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 방 벽에는 일본제 목제품인
황금색 칠을 한 악마의 가면이 걸려 있다.
그 불거져 나온 이마의 핏줄을 보고 있노라면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출전 : 악한 자의 가면/  브레히트/ 김길웅 옮김/ 청담사/ 1991


*

 
새해 벽두에 마음을 잡아끄는 시가 있어 옮겨 보았다. 비록 매우 짧은 시이지만 브레히트적인 위트와 풍자가 녹아있어 읽는 재미가 제법 삼삼하다. 늘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가르침들을 받아왔고,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막상 그리 산다는 일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통이 필요한가. 그런데 브레히트는 정색을 하고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라고 되묻는다. 황금가면을 뒤집어 쓴 악의 번드르한 얼굴은 사실 선과 악을 불문하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힘이 든다는 고백같이 들린다. 악마도 오죽하면 가면을 써야했겠나. 가면을 쓰고서도 인상 쓰느라 불거져 나온, 그것이 아니라면 악한 표정을 짓노라면 저도 모르게 이마의 핏줄이 불거져 나온다는 일본 사람들의 표현력도 가상하지만, 방 벽에 걸려 있는 악마의 가면을 보고 저런 시를 지을 수 있는 브레히트의 감각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경원시(敬遠視)하다"는 말이 있다. 본래 이 말은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 나오는 말로 공자의 제자 번지(樊遲)가 "지(知)란 어떤 것이냐”고 공자께 묻자 공자가 말하길 "백성의 도리(義)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知)라고 말할 수 있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라고 답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본래의 말 뜻은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말이지만 오늘날엔 공경의 개념은 사라지고, 낮추어 보거나 멀리한다,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 하지만 속으로는 멀리한다는 정도의 의미로 쓰인다.

물론 이때 공자의 태도는 "삶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랴(未知生 焉知死)"라는 태도의 연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귀신의 존재 (사후 세계)자체는 인정하되, 그보다는 현세에서의 도덕적 완성을 기하는 데 인간 자신의 노력을 쏟아붓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유학이 지닌 태도는 서구의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전통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다만 공자의 이런 태도가 서구의 인본주의, 휴머니즘과 같은 각박함으로 흐르지 않은 것은 동양의 전통적인 인식, 생사여일(生死如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생사여일", 말그대로 하자면 '삶과 죽음이 하나'란 것인데, 삶과 죽음의 이치가 하나이므로 삶의 의미를 모른다면 죽음 이후가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선과 악도 이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선의 의미인지 모르는 채, 선하게 살겠다는 다짐만으로는 선하게 살 수 없으며 스스로 선한 행위로 믿고 행한 일조차 결과적으로 악을 돕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경의 어떤 가르침에서는 진리란 "깨우친 자에게는 진리이지만 깨우치지 못한 자 즉 미(迷)한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니라 장애"가 되는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공자는 귀신에 대한 경원의 태도를, 미혹되지 않는[不感]의 지혜로움(知)으로 파악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선과 악이 어찌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항상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쉴러가 말하길 "지나치게 반성하는 사람은 성취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는데, 스스로 늘 경원하는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우리들은 미오(迷吾)의 세계에 빠진 생의 미아(迷兒)가 될 수밖에 없다.



▶ 일본 전통 연희인 '노(能)'는 기본적으로 가면극이지만 등장인물 전원이 가면을 쓰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면을 쓰지 않고 출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도 얼굴이 마치 가면인양 연기한다. '노'에 사용되는 가면의 종류는 200개 이상이지만 크게 6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 데 오키나(翁)계, 죠(尉)계, 남성계, 여성계, 귀신계, 원령계가 그것이다. 흔히 악마의 가면이라고 하는 위의 가면은 원령계의 대표적인 가면으로 전쟁으로 원통한 죽음을 맞이한 무장이나 살생을 해서 사후에 성불할 수 없는 망자 등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한다. 보통 눈이 금색으로 칠해져 있고 과장된 표정을 짓고 있어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절로 배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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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찾기


-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Lozano)


나의 몸에서 너는 산을 찾는다
숲 속에 묻힌 산의 태양
너의 몸에서 나는 배를 찾는다
갈 곳을 잃은 밤의 한중간에서


*


 1937년 무렵의 옥타비오 파스(1914~1998)

나는 정신의 사랑보다 몸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랑의 유물론'쯤이라고 해두자. 이 말은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도 여전히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난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없어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의심받고 엄살로 치부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사랑Eros의 완성체, 진정한 종결자는 결혼, 생식 - 이건 과정일 뿐 - 이 아니라 죽음Thanatos이다.

같은 의미에서 옥타비오 파스의 "서로 찾기"가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다.

몸의 사랑. 여자는 남자에게서 산을, 남자는 여자에게서 배를 찾는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 머무를 곳을 찾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 떠날 곳을 찾는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애타게 찾지만 만남(절정)은 잠시이고 엇갈림은 영원히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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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사람은


- 고트프리트 벤



혼자 있는 사람은 또한 신비 속에 있는 사람,

그는 언제나 이미지의 밀물 속에 젖어 있다.
그 이미지들의 생성, 그 이미지들의 맹아,
그림자조차도 불꽃을 달고 있다.
     
그는 모든 층을 품고 있고
사색에 충만하며 그것을 비축해 두고 있다.
그는 파멸에 강하며
남을 부양하고 짝을 맺어주는 모든 인간적인 것에 강하다.
     
대지가 처음과는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을
그는 아무 감동 없이 바라본다.
더는 죽을 것도, 더는 이루어질 것도 없이
조용한 형식의 완성이 그를 지켜 보고 있을 뿐.


<고트프리트 벤 시집 『혼자 있는 사람은』(이승욱 옮김, 청하, 1992)>


*

종종 혼자 있을 수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지만,
혼자 머무는 시간 동안엔 절대 그걸 꿈꾸지 않는다.

"혼자 있는 것이 조용한 형식의 완성이 될 수 있다."
고 시인은 말한다.
"더는 죽을 것도, 더는 이루어질 것도 없이"란 말은 결국 죽음.

"혼자 있는 것은 죽음이다."라고...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적으로 홀로 있을 수 없음을...
시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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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우(鬪牛)처럼
Como el toro


-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andez)


투우(鬪牛)처럼 죽음과 고통을 위해
나는 태어났습니다.
투우처럼 옆구리에는 지옥의 칼자국이 찍혀 있고
서혜부에는 열매로 남성(男性)이 찍혀 있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이내 가슴 전부는
투우처럼 보잘 것 없어지고
입맞춤의 얼굴에 반해서
그대 사랑 얻기 위해 싸우겠습니다.

투우처럼 나는 징벌 안에서 자라나고,
혀를 가슴에 적시고
소리 나는 바람을 목에 걸고 있습니다.

투우처럼 나는 그대를 쫓고 또 쫓습니다.
그대는 내 바램을 한 자루 칼에 맡깁니다.
조롱당한 투우처럼, 투우처럼.


출처 : 미겔 에르난데스, 양파의 자장가, 솔

*

"라틴" 하면 어째서 먼저 '태양'이 떠오르는 걸까.
그 뜨거움이 먼저 내 몸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걸까.
그 모든 것이 뜨거울까.

그 이유를 나는 이 시에서 본다.
"그대 사랑 얻기 위해" 싸우겠다는 남자.
"징벌 안에서 자라나", "소리나는 바람을 목에 걸고 있"는 남자.

그 모든 걸 조롱당한 투우처럼,
어쩌면 '조롱'보다는 '농락'이란 말이 더 적합한 번역일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조롱당한 투우처럼 자신의 이 모든 소망을
당신 손에 들린 한 자루 칼에 걸 수 있는
.....................
이 모든 게 뜨겁다, 뜨겁다, 뜨겁다 말고 달리 무슨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미겔 에르난데스는 스페인 시인이다.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에 저항한 시인이지요.
그는 결국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두고 알라칸테의 옥중에서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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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사막을 지나(A travers Mers et Desert)

- 앙리 미쇼(Henri Michaux)


효력 있다 숫처녀와 씹하듯
효력 있다
효력 있다 사막에 물이 없듯
효력 있다 내 행동은
효력 있다

효력 있다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따로 서 있는 배반자처럼
효력 있다 물건을 감추는 밤처럼
효력 있다 새끼를 낳는 염소처럼
조그맣고 조그맣고 벌써 비탄에 잠긴 새끼들

효력 있다 독사처럼
효력 있다 상처를 낸 단도처럼
그걸 보존하기 위한 녹과 오줌처럼
강하게 하기 위한 충격, 추락, 동요처럼
효력 있다 내 행동은

효력 있다 결코 마르지 않는 증오의 대양을 가슴에 심어주기 위한 모멸의 웃음처럼
효력 있다 몸을 말리고 넋을 굳히는 사막처럼
효력 있다 내팽개쳐 논 시체를 뜯어 먹는 하이에나의 턱처럼

효력 있다
효력 있다 내 행동은

<출처> 앙리 미쇼, 김현, 권오룡 옮김, 바다와 사막을 지나, 열음사(1985)

*


앙리 미쇼의 시집을 오랜만에 들춰보다가 '빙긋' 웃음 짓는다. "효력 있다 숫처녀와 씹하듯" '빙긋', 혹은 '벙긋' 그리고 '봉긋'... 뭔가 에로틱하다. 그러므로 "효력 있다"는 "효력 있다".


앙리 미쇼는 1899년에 태어난 시인이다. 세기말에 태어나 세기말에 죽었다. 오래 살았다. 그의 시어들은 반복된다. 반복하며 확장한다. 김현이든, 권오룡이든 왜 이 사람들은 굳이 "씹하듯"이라 했을까? 난 짖궂게도 혹은 10대 소년처럼 그 이유가 궁금하다.

김현은 "적대적인 세계와 자아 사이의 절망적인 싸움"을 벌인 시인으로 앙리 미쇼를 해석하고 있는데, 나는 앙리 미쇼보다 김현에게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이 간다. 당신은 왜 구태여 "씹"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바슐라르'를 연구하는 학자이자 점잖은 불문학 교수이자 수많은 시인을 발굴해낸 문학평론가인 그가 어째서?

난 그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건 그가 우리 문학사에 보기 드물게 '진짜'였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언어를 가진 사람만이 저렇게 당당하게 옮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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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곱하기 둘


-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

동지여, 감방에서
그 방까지
몇 걸음 걸리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오.

스무 걸음이라면
화장실로 그대를 데려가는 게 아니라오.
마흔다섯 걸음이라면
운동하라고
그대를 데리고 나가는 건 절대 아니라오.

여든 걸음을 세고 나서
장님처럼 고꾸라지듯이
층계를 오르기
시작하면
오, 여든 걸음이 넘는다면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그들이 그대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그들이 그대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이제는 오직 한 군데밖에 없다오


출처 : 아리엘 도르프만, 이종숙 옮김, 『싼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 창작과비평사, 1998.

*

내 주변엔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서 감옥살이 이야기 듣는 것이 친구들에게서 군대 이야기 듣는 것처럼 익숙하다. 4.19세대로 5.16군사법정에 섰던 한 사람은 비록 정치깡패이긴 했지만 당당했던 이정재가 사형을 언도받은 뒤 사형대에 설 때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시처럼 그 역시 ‘여든 걸음’ 너머의 세계로 끌려갔다. 서대문형무소에는 면회소 가는 길과 사형대 가는 길이 서로 이어져 있었으므로….

반공주의와 북진통일 이외에 모든 것은 친북좌파이던 시절 당당하게 평화통일론을 펼쳤던 죽산 조봉암은"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고 침실에서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넘은 나를 처형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판결은 잘됐다. 무죄가 안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만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 박사는 한 사람이 잘 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한다."라고 했다. 그는 사형언도를 받은 직후 곧바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인혁당 등 수많은 사람들이 법으로 이름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른바 법살(法殺)이었다. 엊그제(2008. 9. 26) 60주년을 맞이한 사법부의 수장 이용훈 대법원장이 과거 사법부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이제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 내가 감옥은커녕 유치장에도 가보지 못했던 것은 좋은 시대를 살았던 덕분이 아니다. 다만 운이 남들에 비해 조금 더 좋았을 뿐이었다. “스무 걸음, 마흔 다섯 걸음, 여든 걸음이 내 앞에도 여전히 놓여있다. 나는 다만 다른 이들에 비해 조금 운이 좋았을 뿐이다.

죽산은 교수대 앞에서 목사에게 마지막으로 성경의 <누가복음> 23장 22,23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재판장인 빌라도가 말한다. 나는 그의 죄를 찾지 못하겠다. 그러나 처형을 외치는 군중의 소리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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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 


            로버트 블라이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풀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헛간도, 가로등도
그리고 밤새 황량한 작은 중앙로도



Love Poem


         Robert Bly

        

When we are in love, we love the grass,

And the barns, and the lightpoles,
And the small mainstreets abandoned all night.


*

어릴 적 사랑에 빠졌을 땐 그것이 가능하리라 믿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더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라거나 혼자라는 느낌 같은 거 갖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외롭거나 혼자라는 느낌이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사랑은 더욱더 강력한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이 깨어졌을 때, 그리고 다음의 사랑이 허망하게 지나갔을 때, 내가 버림받는 것뿐만 아니라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다음 번 사랑을 만나서도 여전히 똑같은 고민, 우리가 영원히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유일하게 영원할 수 있는 것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나는 아주 편하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것은 고독이며 결국 혼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무한할 것만 같았기에 더욱 큰 고통이었던 사랑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너이지만 그러나 너는 너이고, 나는 나여야만 또한 사랑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풀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시인이 된다고 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살게 됩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이 기쁘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이 쓸쓸하고 고독한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 길로 걸어갑니다. 밤새 황량한 작은 중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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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혁명


- D.H.로렌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쫓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짓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출처 : 제대로 된 혁명 - 로렌스 시선집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은이), 류점석 (옮긴이) | 아우라(2008)


*


나는 어릴 적 등하교 길 부끄러움 반, 긴장 반으로 남들 몰래 담벼락의 영화 포스터를 훔쳐보는 것으로 D.H.로렌스를 처음 만났다. <차타레 부인의 사랑>이었던가? 반쯤 열리다 만 눈동자와 기다란 목덜미의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영화 포스터였을 거다. D.H.로렌스가 오해받기 쉬운 인물이란 점만 놓고 보자면 칼 마르크스의 반열에 세워도 좋다.



농부이자 미술, 사진, 사회비평가이며 소설가이기도 한 존 버거(John Berger)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아직까지 마르크스주의자냐고. 자본주의가 보여준 이른바 이윤의 추구에 의해 오늘날처럼 광범위하고 극심한 파괴가 자행된 적은 지난 역사에서 없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럴진대, 그 파괴와 재난을 예고하고 분석했던 마르크스에게 어찌 주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송두리째 상실하고 있다는 것으로 나를 향한 저 물음의 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 한 장 지니지 않은 그들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 역시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닐 것이다. 나 역시 그렇지 않다. 어느 의미로든 지금 우리가 꿈꾸는 혁명이란 D.H.로렌스의 혁명에 좀더 가까운 혁명인 듯싶다. 누군가는 2008년 초봄부터 시작되었던 촛불의 도도한 흐름이 한갓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며 절망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적 진보란 ‘두려움 없는 절망, 패배를 모르는 절망, 체념하지 않는 절망’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절망하라! 어떤 희망도, 기대도 없이 그러나 우리는 계속 전진한다. 멈추지 않고…. “그저 재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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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오는 데에는


-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1897 - 1982)



죽음이 오는 데에는
거의 일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 그때
알몸의 손이 와서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은 되돌려주었다
내 손이 잃었던 색깔을
내 손의 진짜 모습을
다가오는 매일 매달
광활한 여름의
인간들의 사건에로 업무에로

뭐가 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항상 몸을 떨고 있었던
나에게 나의 생활에
바람과 같은 커다란 목도리를 두르고
나를 가라앉히는 데는
두 개의 팔이면 족했던 것이다

그렇다 족했던 것이다
다만 하나의 몸짓만으로
잠결에 갑자기 나를 만지는

저 가벼운 동작만으로
내 어깨에 걸린 잠 속의 숨결이나
또는 한 방울의 이슬만으로

밤 속에서 하나의 이마가
내 가슴에 기대며
커다란 두 눈을 뜬다
그러면 이 우주 속의
모든 것이 나에게 보이기 시작한다
황금빛의 보리밭처럼

아름다운 정원의 풀 속에서
그러면 죽어 있는 것과 같았던
나의 마음은 숨을 되찾아
향긋한 향기가 감돈다
상쾌한 그림자 속에서


*

최인훈의 『광장』에서 나오는 이 대목을 나는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광장』에서 이명준은 <광장>을 찾아 월북했지만 그곳에서도 꿈꾸던 광장을 발견하지 못한다. 명준은 대신 무용수 은혜를 만나 그 여자의 다리를 베고 눕는 것으로 절망과 허무를 이기고자 했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그는 사랑에서 그 자신이 超克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절망과 허무를 극복하려고 들었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1950년대 소위 먹물근성이라 해야할까. 티토가 끝끝내 소비에트를 버리지 못했던 까닭, 스탈린이 끊임없이 그의 제거를 염원했음에도 스탈린주의를 말끔히 치워버리지 못했던 까닭, 그건 스탈린주의를 경험한 좌파든 한국전쟁을 경험한 우파든 상관없이 그들이 살아왔던 과거가 현재보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온힘을 다해 성취한 현재의 소비에트, 현재의 반공주의에 입각한 국가 안보, 천박한 자본주의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


루이 아라공....

나는 그가 "미래의 노래"에서 보여준

인간만이 사랑을 가진 자이기에
자기가 품었던 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자기가 불렀던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술로
자기가 걸었던 길이 다른 사람의 길로
자기의 사랑마저 다른 사람의 팔로 성취되고
자기가 뿌렸던 씨를 다른 사람들이
따게 하도록 사람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

<미래의 노래 - 첫번째 연>

이런 대책없는 낙관주의를 사랑한다. 심지어 응당 시인이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시인이 자기자신을 속여가면서까지 독자들에게 대책없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다. 아니, 심지어 경멸해 마지 않는다. 그런데 루이 아라공의 경우엔 그것이 대책없는 낙관주의이기만 했던 건 아니었던 듯 싶다. 그래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싶다. 왜냐하면 그에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만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러시아 태생의 엘자 트리올레트를 만나 결혼했고, 아내로부터 끊임없는 영감을 받았던 시인. 루이 아라공...

왜 아니겠는가?

그에겐 전 소비에트를 내어주고서라도 얻고 싶은 아니 결단코 바꾸지 않으리라 생각한 엘자 트리올레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조차 그녀의 두 팔이 다가와 안아주기만 한다면 이겨낼 수 있는 ...

루이 아라공은 아내 엘자의 이름을 건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엘자의 눈
나에게는 엘자의 파리밖에 없다

애처가였을까? 남자라서가 아니라 어떤 인간은 둘이되 결코 둘이지 않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들국화의 노래처럼...

"혼자는 너무 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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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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