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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강은교 - 사랑법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진부(陳腐)하다"는 말이 있다. 케케묵고 낡았다는 뜻이다. "늘어놓을 진"에 "썩을 부"를 쓴다. 두 글자 모두 "묵은"이란 뜻이 있다. 가령, 내가 누군가와 10년을 사귀었다면 그는 나에게 오래 "묵은" 사람이다... 더보기
김명인 - 베트남1 베트남 1 - 김명인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짚이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던 내 누이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3부인 남편은 출정 중이고 전쟁은 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에까지 밀어닥쳐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이션 박스 속에서도 가랭이 벌여 놓으면 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로이, 너는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지만 깡마른 네 몸뚱아리 어디에 꿈꾸는 살을 숨겨 찢어진 천막 틈새로 꺽인 깃대 끝으로 다친 손가락 가만히 들어올려 올라가 걸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행복한가고 네가 물어서 생각하면 나도 행복했을 시절이 있었던.. 더보기
이하석 - 버려진 병 버려진 병 - 이하석 바람 불어 와 신문지와 비닐 조각 날리고 깊은 세계 속에 잠든 먼지 일으켜 놓고 사라진다, 도꼬마리 대궁이 및 반짝이는 유리 조각에 긁히며. 풀들이 감춘 어둠 속 여름은 뜨거운 쇠 무더기에서 되살아난다. 녹물 흘러, 붉고 푸른 뜨겁고 고요한 죽음의 그늘 쌓은 채. 목마른 코카콜라 빈 병, 땅에 꽂힌 채 풀과 함께 기울어져 있다, 먼지와 쇠조각들에 스치며 이지러진 알파벳 흙 속에 감추며. 바람 빈 병을 스쳐갈 때 병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 끊임없이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휘파람처럼 풀들의 귀를 간질이며. 풀들 흘리는 땀으로 후줄그레한 들판에 바람도 코카콜라 병 근처에서는 목이 마르고.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와 콜라 병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쓰러진다. 풀들 그 위를 덮고 .. 더보기
김형영 - 지는 달 지는 달 - 김형영(金泂榮)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 캄캄한 하늘에 저리 밀리는 구름떼들 데리고 우짖는 草木 사이에서 이제 지는 달은 6천 만 개 눈 깜짝이는 바람에 다시 뜨리니 누가 이 세상 벌판에 혼자 서서 먼 草木 새로 지는 달을 밝은 못물 건너듯 바라보느냐 4월 초파일 절간에 불 켜지듯 바라보느냐 한 해에도 가장 캄캄한 밤에 우리 모두 바라보는 사람들, 바라보는 눈길마다 지난 날은 되살아 머뭇거리다가 멀리 사라진다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 *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앞 뒤를 같은 구절로 끝맺는 시를 수미상관(首尾相關)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처음과 끝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뜻인데 모두 4연의 이 시에서 마지막 연의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는 앞의 3연이 모두 7행, 5.. 더보기
오탁번 - 꽃 모종을 하면서 꽃모종을 하면서 - 오탁번 따뜻한 봄날 꽃밭에서 봉숭아 꽃모종을 하고 있을 때 유치원 다니는 개구장이 아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모종삽을 든 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빠 아빠 쉬도 마렵지 않은데 왜 예쁜 여자애를 보면 꼬추가 커지나? 아들은 바지를 까내리고 꼬추를 보여주었다 정말 꼬추가 아주 골이 나서 커져 있었다 꼬추가 커졌구나 얼른 쉬하고 오너라 생전에 할머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에게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나 나는 목이 메었다 손자의 부자지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는 무너미골 하늘자락에 한 송이 산나리꽃으로 피어나서 지금도 손자의 골이 난 꼬추를 보고 계실까 오줌이 마렵지 않은데 예쁜 여자애 알아보고 눈을 뜬 내 아들의 꼬추를 만져보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그렇.. 더보기
최두석 - 달래강 달래강 - 최두석 임진강이 굽어 흐르다 만나는 휴전선, 그 달개비꽃 흐드러진 십 리 거리에서 부모 없이 과년한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오누이는 몇 마디씩 고구마 넝쿨을 잘라서 강 건너 밭에 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고스란히 다 맞고 바라본 누이의 베옷. 새삼스레 솟아 보이는 누이의 가슴 언저리. 숨막히는 오빠는 누이에게 먼저 집에 가라 하고 집에 간 누이는 저녁 짓고 해어스름에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찾아 나섰다. 덤불숲 헤매다 반달이 지고 점점점 검게 소리쳐 흐르는 강물, 그 곁에 누워, 오빠는 죽어 있었다. 자신의 남근을 돌로 찍은 채. 하여 흐르는 강물에 눈물 씻으며 누이가 뇌었다는 말, "차라리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그래....." * 최두석 시인의 이 시를 낭송.. 더보기
베르톨트 브레히트 - 후손들에게 후손들에게 - 베르톨트 브레히트 I 참으로 나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직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나무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저기 한적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은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나의 행운이다하면, 나도 .. 더보기
조은 - 동질(同質) 동질(同質) - 조은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 나 지금 입사시험 보러 가. 잘 보라고 해줘. 너의 그 말이 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밧줄처럼 잡고 있는 추레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잡을 것이 없었고 잡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 긴장을 못 이겨 아무 데서나 잠이 들었다 망설이다 나는 답장을 쓴다 --- 시험 잘 보세요, 행운을 빕니다! 출처: 『황해문화』, 2004년 봄호 * 문득, 잘 사느냐고... 밥은 먹고 지내느냐고 안부를 묻는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서럽게 울었었지. 그래, 그래... 걱정하지마...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너는 어때... 그래그래... 밥이 보약이지... 소식없으면 .. 더보기
이성복 - 세월에 대하여 세월에 대하여 - 이성복 1 석수(石手)의 삶은 돌을 깨뜨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 몬티를 닮은 내 친구는 동시상영관(同時上映館)에서 죽치더니 또 어디로 갔는지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나는 손자(孫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천국(天國)으로 통하는 차(車)들은 바삐 지나가고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세월이여, 얼어붙은 날들이여 야근하고 돌아와 환한 날들을 잠자던 누이들이여 2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이마에 뱀딸기꽃이 피어 오르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때로는 정말 형님이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버지가 으흐허 웃었다 발가벗은 나무에서 또 몇 개의 열매가 떨어졌다 때로는 얼음 깔린 하늘 .. 더보기
문인수 - 바다책, 다시 채석강 바다책, 다시 채석강 -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책,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 종종 사람을 책으로 여긴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란 책을 모조리 읽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송두리째 읽고, 외워버리리라. 당신을 책 읽듯, 공부하듯 열심히 읽어내면 당신의 사랑도 얻게 되리라 여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당신은 또 기나긴 글을 이어가십니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머나먼 페이지 너머로 파도치듯 끝나지 않을 긴 이야기를 매정하게 잘도 쓰고 있습니다. 더보기